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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7,10-14; 8,10ㄷ
그 무렵
10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
11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13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8,10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 10,4-10
형제 여러분,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5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기쁨에 찬 인사말을 전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와의 세 번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께서 어떻게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알아듣고 응답하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대화는 천사의 인사말에 대한 마리아의 당황, 곧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입니다(루카 1,29).
둘째 대화는 천사의 아기 잉태 예고와 그 아기의 신원과 소명에 대한 마리아의 물음, 곧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는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 곧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응답입니다.
이 대화를 통하여, 마리아의 깨달음 역시 세 가지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 이 일을 하시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고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이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깨달음입니다.
둘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신원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주님의 여종'임을 깨달음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아기 잉태’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명에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였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의 사랑을 허용하는 일, 곧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내 안에서 이루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명을 수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름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fiat)라는 동의, 곧 받아들임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은총이 나에게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내 안에서 하시도록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승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답송처럼 “주님,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시편 39,8)라고 말하는 것이요, 제2독서에서처럼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9)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께 결혼의 단란함과 미래뿐만이 아니라, 율법의 위반자로서 목숨까지도 내어드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그것을 희망하고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름하여, 말씀에 대한 '믿음'의 봉헌이었습니다.
그분의 희망 안에 일치를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마리아의 소명은 구세주의 구원 은총을 입은 우리 모두의 소명이요, 교회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 사랑을 믿고 따르는 일이요, 먼저 받은 바로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상 필요한 한 가지는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 임의 사랑에 나를 승복하는 일, 임이 온전히 나를 사랑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일, 사랑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기, 임으로 임을 사랑하기입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그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종이라고 하심으로써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와 관련한 대축일들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 구원 계획과 뜻이 이루어짐에 있어서 제일 앞에 있는 것이 바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사람을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셨다는 축일입니다.
이는 그럴 계획, 그러니까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낼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
마리아라는 한 처녀가 너무도 참해 하느님께서 계획을 바꿔 구세주를 보내시고 그녀를 구세주의 어머니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시고 그 어머니 될 사람도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런 계획에 의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가 이제 구세주를 잉태하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지내는 주님 탄생 예고 축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들은 하느님의 계획과 뜻과 관련된 내용들입니다.
먼저 첫째 독서 이사야서는 임마누엘 하느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사 7,14ㄴ; 8,10ㄷ)
아시다시피 이사야서는 메시아 하느님이요 임마누엘 하느님에 관한 예언서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셔서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그래서 그 하느님은 저 하늘 높은 곳에 고고히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라고 오늘 이사야서는 예언합니다.
그리고 둘째 독서 히브리서는 그 하느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음을 얘기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히브 10,9ㄱ)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시고, 성모 마리아는 그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종을 하셨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독서들과 복음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뜻이 착착 이루어져 가는 그 과정을 묘사하는 얘기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어머니들이 되는 것을 묵상함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복음에서 우리에게 이미 제시하신 것입니다.
당신을 만나러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있다고 했을 때 누가 당신의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냐고 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이 곧 당신 어머니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이 말씀을 탁월하게 풀이하였지요.
하느님의 뜻 곧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신성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으로 받아 모심으로 말씀을 잉태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실천할 때 그분을 낳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는 얘기합니다.
“신성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26-38)라며 마리아는 하느님 뜻에 순종하시는데 이것을 보며 종이라고 하심으로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를 본받아야 할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일상적으로 합리적인 말을 하면 알아듣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고집불통도 있습니다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말을 하면 그에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느님의 뜻으로 믿고 따르는 때도 있습니다.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일가친척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했고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역할을 했던 모세도 처음에는 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하느님의 도구로 충실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느님을 믿고 불과 삼백 명으로 십오만 병사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요셉은 임신한 약혼자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라는 꿈의 현시를 받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는 이 말씀에 결국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것을 순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원의 역사는 순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에 따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순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비합리적 비상식적, 비논리적이라 생각되어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인간의 협력과 동의로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순명은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바칠 것을 다 바친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 하느님의 뜻 앞에서는 미루지 않는 결단을 내려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 1,37)
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순간순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 연장이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혼자 있는 것도 죄고 혼자 있게 하는 것도 죄다>
오늘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인사합니다.
성모님은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주님께 함께 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죄를 짓고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치 않아서 숨었습니다.
이것 자체가 죄입니다.
인간은 혼자 있을 수도 없는데 혼자 있겠다고 합니다.
빛을 떠나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은 어둠과 있겠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혼자 있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혼자 사는 분들은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머물기 위해 혼자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일까요?
99%는 부모나 배우자, 혹은 형제입니다.
만약 이도 저도 아니라면 ‘자아’나 사탄과 함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정신이 이상하게 됩니다.
유튜브에서 ‘섬에서 혼자 사는 바다 자연인’이 많은 조회수를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이 주인공은 섬에서 혼자 살까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이분은 사업 실패로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섬으로 와서 혼자 사는데, 동생까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 치료하고 동생을 공기 좋은 자신이 사는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음식 탓인지, 병원이 없는 탓인지 좋아지는 것 같다가 치료도 못 해보고 죽었습니다.
이에 동생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 섬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실 혼자 있고 싶은 게 아니라 동생과 함께 있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 줄 동생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 혼자 있고 싶은 것이 된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그 삶에 만족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혼자는 행복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점점 어둠과 가까워집니다.
여성이 혼자 살겠다고 결정했지만, 실제로는 마귀와 함께 사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 자매는 자신이 마귀와 잠자리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혼자가 좋다고 합니다.
혼자가 좋은 게 아니라 마귀랑 사는 게 좋은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알려주는 가브리엘 천사와 같은 존재입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아기가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장난감을 가지고 재밌게 놀지만, 어머니가 안 보이면 불안해서 우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게 느껴져야 밖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둠, 사탄의 손아귀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니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자연인들에게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은 가브리엘 천사의 역할입니다.
산속에서 수십 년간 혼자 살아가는 이들이나, 화장실 같은 곳에 스스로 자기를 가두고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방송국의 스텝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 그리고 그 추운 곳에서 그들과 함께 머뭅니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자기를 사랑해주는 누군가의 존재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많은 경우 그 사람들이 스텝들이 사는 세상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자꾸 고향인 부산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혼자 있고 싶은 게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브리엘 천사나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무 오래 혼자 있게 해 드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혼자 있는 것은 결국 자기를 망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는 것도 죄이고, 혼자 있겠다는 사람을 혼자 내버려 두는 것도 죄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늘 새롭게 태어나셔야 합니다!>
원래 3월 25일에 경축하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 올해는 훨씬 뒤로 밀렸습니다.
이유는 올해 이 대축일이 성주간과 겹칠 경우 부활 제2주일 다음 월요일로 옮겨 지낸다는 로마 미사 경본 지침에 따른 것입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맞아 중세 신비가 마이스터 엑가르트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
“마리아에게서처럼 우리 각자 안에서도 아기 예수의 잉태와 탄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수를 낳지 못한다면 마리아가 그때 거기에서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늘 새롭게 태어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여기 이 자리에서 매일 아기 예수의 탄생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 우리는 버리고 떠나있기 연습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철저하게도 빈 그릇으로 존재할 때 그 빈 그릇에 겸손하신 아기 예수님께서 잉태되실 것이고 탄생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 속에서 ‘하느님의 탄생’을 이루어 낼 때, 비로소 한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이런 큰 기쁨과 영광을 원한다면 반드시 먼저 우리 마음의 밭갈이 작업이 필요합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탄생하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잉태하는 일은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에 도전하는 어려운 일이 분명합니다.
그 옛날 나자렛의 마리아가 그랬듯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다가오는 천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잉태한다는 것은 마리아가 그랬듯이 안락한 삶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잉태한다는 것은 마리아가 그랬듯이 본능과 이기심, 자기중심적 삶을 철저하게도 배제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잉태한다는 것은 안개 자욱한 낯선 길을 떠나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잉태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과 멸시를 꿋꿋이 견뎌내겠다는 각오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잉태하고 낳아 기르겠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과제이자 세례를 통해 받은 책무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순종>
1)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 18,14)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7)
구약성경에 있는 다음 말씀도 ‘하느님의 뜻’을 잘 나타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에제 33,11)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인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선포는(마태 4,17) ‘하느님의 뜻’은 곧 ‘인간 구원’이라는 선포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2)
‘성모님의 순종’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의 도구로 봉헌하신 일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씀은 “저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뜻이고, 자신을 도구로 쓰시라고 하느님께 바친다는 뜻입니다.
우리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실행해야 할 첫 번째 ‘순종’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에 그 뜻에 순종하는 첫 번째 방법은 곧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순종은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구원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어야만 다른 사람을 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두 번째로 표현하긴 하지만, 중요도를 생각하면, 두 가지가 똑같이 중요합니다.
3)
'순종'을 ‘허락’이나 ‘수락’으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순종’은 ‘사랑’입니다.
4)
아무 일에나 다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남용하는 잘못된 일입니다.
전쟁, 질병, 자연재해, 독재 정권, 식민지배...
그런 일들이 하느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내가 병에 걸린 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라고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병’이 정말로 하느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병의 치료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가 되어버리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실제로 어떤 고통과 불행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고통과 불행이 아니라, 그것들을 극복하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장상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혼동하는 경우도 있는데, 장상의 명령이 하느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일이거나, 선과 사랑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그 잘못된 명령에 복종하면 안 됩니다.
명령하는 입장에서도 자기 개인의 명령을 주님의 뜻인 것처럼 내세우면서 순종하라고 강요하거나 압박하면 안 됩니다.
5)
“성모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자.” 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구원의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되는지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맞서 싸우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이 상황을 피해서 멀리 달아나서 숨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를 묻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선’과 ‘사랑’과 ‘구원’이 실현될까?”를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지금 말하는 선(善)은 ‘하느님의 선’을 뜻하는 말이고, “나 한 사람에게만 좋은 일”이 아니라 ‘모두에게 좋은 일’, 즉 ‘공동선’을 뜻하는 말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순종과 비움의 여정과 순교영성 - 마리아 성모님의 삶>
"예수님이 내 운명이자 사랑이듯이 강론 또한 내 운명이자 사랑이다."
새벽 강론을 쓴 후 저절로 나온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저뿐만 아니라 성모님은 물론 모든 성인들의 운명이자 사랑이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로 불렸던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성탄 대축일 12월25일 9개월 전 3월 25일이 대축일인데 올해는 이날이 성주간이라 부활 제2주일 다음 월요일로 옮겨져 오늘 경축하게 되었습니다.
아드님의 부활시기와 겹쳐 더욱 풍요로운 느낌입니다.
우선 돋보이는 점은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겸손입니다.
교회는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아하즈에 대한 신탁을 예수님 탄생의 예언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예언후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온 인내와 겸손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인내와 겸손으로 표현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예수님 이름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을 것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받는 우리 하나하나의 이름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임마누엘임을 깨닫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 이름이 감명깊게 드러나는 성구는 마태복음 마지막 구절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임마누엘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깨닫게 하는 참 은혜로운 구절입니다.
이 말씀과 더불어 제가 고백성사 보속 시 말씀처방전으로 많이 써드리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 방문시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의 일성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마리아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은총이 가득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 보속 처방전 말씀을 받았을 때 환호하던 어느 수녀의 응답도 잊지 못합니다.
이 예화 또한 제가 참 많이 인용했습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이 말씀은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석(寶石)입니다. 살아있는 보석같은 말씀입니다.”
이와 더불어 독일에서 선교사로 파견되어 오랫동안 살고 계신 현익현 바로톨로메오 신부님의 기발한 유머도 잊지 못합니다.
이 예화 또한 재미있어 수 차례 인용했습니다.
제가 신부님을 수도원의 보물이라 하셨을 때 웃으며 즉각적으로 주신 답변입니다.
“나는 보물(寶物)이 아니라 고물(古物)입니다!”
불교의 사찰에서 자산 둘이 절의 역사를 증언하는 노목(老木)과 노승(老僧)이라 하는데 가톨릭 수도원 역시 노목과 노승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노승이 고승(高僧)이 되면 더 바랄나위 없겠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어느 사찰이나 수도원을 찾든 우선 확인해 보는 것이 노목과 노승 둘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나자렛 시골의 마리아를 찾아온 하느님의 겸손이 놀랍습니다.
임마누엘 탄생 예언 후 때가 될 때까지 얼마나 오랜동안 기다려온 하느님이요, 희망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한없는 기다림입니다.
언젠가의 마리아의 출현에 희망을 걸고 기다려온 하느님의 인내입니다.
기다림하니 해마다 파스카의 봄철이면 놀라운 신비로 와닿은 파스카의 봄꽃들입니다.
어김없이 거기 그 자리에서 몇날 동안 피고자 일년 열두달을 꼬박 기다리며 인내해온 봄철의 무수한 봄꽃들입니다.
이 감격을 노래한 “기다림”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꽃같은 만남보다
더 반갑고 고마운 만남있으랴
언제나 거기 그자리
꼬박 일년 기다렸다 피어난
파스카의 봄꽃들이다
꼭 일년만의 만남이구나!
산수유, 개나리, 매화, 매실, 벚꽃, 수선화, 민들레...
모든 봄꽃이 그렇다
꽃같은 반가운 만남 되려면
일년은 꼬박 기다려야 하는구나”
-2001.4
참으로 장구한 세월 인내하며 기다렸다 마리아를 발견한 하느님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참으로 눈밝고 귀밝은 하느님께서는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온 것이며, 마리아는 하느님의 기대를 충족시켰습니다.
마리아의 깊은 믿음은 침묵과 경청의 관상으로 드러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흡사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임마누엘 탄생의 신탁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내심을 속속들이 밝히는 하느님에게서 마리아에 대한 한없는 신뢰와 사랑을 깨닫습니다.
마리아의 재차 물음에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자신의 속내를 명쾌하게 자상히 밝히는 하느님입니다.
마지막 천사의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 때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마리아의 전 존재가 담긴 답변입니다.
인류 역사에 결정적 전환점(터닝포인트 ;turning point)이 되는 시점(時點)입니다.
하느님의 겸손한 설득이 주효했고 깊은 침묵중에 경청한 마리아의 믿음의 응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도 일방적으로 혼자서는 일하지 못합니다.
마리아의 자발적 순종의 믿음의 응답을 필요로 했던 하느님이요, 이 응답이 나오기 전 온누리가 쥐죽은 듯 침묵에 잠겨있었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부분에 관한 주석도 생각납니다.
마리아의 응답에 온 인류의 구원이 달렸기 때문에 하느님 역시 참 초조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느님도 어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무조건적 “예스(Yes)”, 순종의 응답에 하느님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지 짐작이 갑니다.
마리아의 위대한 점은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다는 점이 아니라 이런 자발적 순종의 응답에 있음을 봅니다.
부전자전이 아니라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을 그대로 보고 배운 예수님입니다.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무려 두 차례 반복됩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바로 이 고백이 예수님 삶의 본질이요 핵심이자 우리 믿는 이들 역시 그러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장엄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둔 어머니, 성모님을 부러워한 여인에게 주신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복되도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
(루가11,28)
그대로 성모님과 자신을 두고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게세마니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질 정도로 간절히 바쳤던 예수님의 기도도 생각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님 말씀이 절정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남김없이 순종과 비움의 여정 중에 100% 자신을 완전히 비운 후의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It is finished) 라는 고백이며 바로 이 말씀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아, 끝났다!(It is finished!)", 얼마나 고달픈 삶에 최선을 다한 삶이었는지 참 홀가분한, 해방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모전자전, 어머니 성모님의 순종과 비움의 여정을 그대로 보고 배운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잉태 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품에 안으실 때까지 시종여일 한결같이 순종과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셨던 성모님처럼,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과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셨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 모자분에게 다시 새롭게 배우는 순종과 비움의 여정이요 순교영성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남은 인생, 자발적 사랑의 순종과 비움의 순교영성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모님은 ‘강한 어머니이며 신앙의 여성’>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원래는 3월 25일입니다.
그런데 왜 부활 제2주간 월요일로 옮겨서 축일을 지내게 되었을까요?
교회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 성주간과 겹치면 부활 제2주간 월요일로 옮겨서 지낸다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성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루어지는 교회 전례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인 성찰에 따른 교회의 결정입니다.
저는 신학적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주는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축일입니다.
마리아의 순명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구원도 마리아라는 처녀의 자유의지와 결단을 통해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어머니의 마음으로 기꺼이 아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거룩하게 지내는 성주간에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당 교우들과 함께 메주고리, 파티마, 루르드로 이어지는 성모님 발현 성지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의 발현 성지순례를 하는 중에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모님에게 특별한 공경과 사랑을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교회는 성모님을 ‘천주의 모친’으로 공경합니다.
성모님은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면서 삼위일체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성모님에 대한 지극한 공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어머니에게 요한 사도를 아들로 부탁했습니다.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지기에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는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을 ‘복되신 동정녀’로 공경합니다.
성모님의 잉태는 성령으로 인한 잉태였기에 성모님은 동정녀라고 교회의 전승은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성모님의 몸에서 ‘임마누엘’ 주님이 태어나셨습니다.
하와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고, 죄의 결과는 죽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순종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께서는 죄, 죽음,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동정녀는 생물학적인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은 동정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동정을 지키는 사람을 동정녀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정결하게 사는 이들이 동정녀입니다.
성모님은 ‘강한 어머니이며 신앙의 여성’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성모님은 예수님 십자가를 함께 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내려진 예수님을 무덤에 묻기 전에 성모님은 가슴에 묻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에게 성모님은 힘들 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두려울 때는 용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성모님은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당찬 여인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구세주의 어머니를 알아보았고, 태중의 아이까지 축복하였습니다.
성모님은 구름 속에 있는 고귀한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천상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는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동정녀이기 전에, 천주의 모친이기 전에 성모님은 강한 어머니였고, 신앙의 여성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면서 ‘마리아의 노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 분야에서의 집중력이 남다르다는 것입니다.
집중하는 그 순간에는 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 어떤 전기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쓸데없는 것 무시하기의 전문가.”
쓸데없는 것을 무시하는 그 전문성(?)이 자기 예술에 헌신하는 능력을 키울 수가 있었고, 눈앞의 과제나 프로젝트에 자신을 묶어두는 능력을 결합하여 전설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학창 시절, 공부하면서 음악 듣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여기에 텔레비전을 봐도 상관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실제로 집중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집중에 솔직히 죄송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꿔놓습니다.
그러다 보니 SNS 메시지를 보지 못하고, 전화도 못 받습니다.
문제는 자기를 무시해서 SNS 메시지를 보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무 죄송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이것저것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더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는 어떤가요?
주님께만 집중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의 다양한 것에 관심을 두고 집중하면서, 정작 주님을 외면할 때가 너무 많은 우리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탄생에 대한 예고를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이날, 우리는 예수님 탄생 예고를 들으신 성모님을 보게 됩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몸인데, 잉태해서 아들을 낳게 된다는 천사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이 메시지는 성모님께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무조건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안 되는 이유만을 이야기합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면서 하느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만 집중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는 무조건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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