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의 내용
2017년 8월 27일 본문 말씀: 신명기 28:20-24
(28:20)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공구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여 속히 파멸케 하실 것이며
(28:21)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이며
(28:22)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
(28:23)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28:24)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서 필경 너를 멸하리라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이 ‘저주의 내용’은 아예 안 듣겠다고 버티면 뭔가 상황이 달라지겠습니까? 즉 재주없는 소리는 아예 안 듣는 것으로 매사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대자연’의 조건 안에 묶인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저주의 말씀이 참으로 구체적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 행동 하는 것을 봐서 벌을 내리겠다는 차원이 아니라 ‘너희들은 필히 이 저주를 받아야 해’라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처분이 너무 가혹하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달래기 위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피조물을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피조물로서는 ‘저주’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에 기꺼이 자신의 형편을 드려야 합니다. 비록 힘들지만 하나님의 속성이신 저주성을 반드시 이 세상에 나타나야하기에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리시는 이 취지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택하여 세상 만방에 내세우신 것입니다. 비록 이 저주가 이스라엘에게 집중에서 일어나더라도 이스라엘은 도리어 하나님께서 감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보여주어야 될 이 기능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능입니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은 마지막 때에 나타나실 하나님의 아들이 하시는 일을 집단적으로 보여주게 됩니다. 곧 저주도 보여주고 축복도 보여주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축복을 받는 경우는, 말씀을 순종해서가 아니라 회개하므로 서 얻게 됩니다. 회개라는 말은 본래의 자기 역할의 자리로 되돌아 가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아들과 연계된 그 자리로 돌아가는 바로 그 일이 복을 보이는 유일한 순간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저주받을 짓이 우선입니다. 이 저주에 대해서는 대자연이 하나님의 명을 받고 움직이게 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마저도 철저하게 대자연에 의해 다루어지는 삶을 산다는 점에서 이방민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차이남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저주의 환란 중에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맹목적으로 얻어맞는 것은 이방민족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 차이점은 바로 저주 속에서 생명이 피어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상처를 주시고, 그 상처 속에서 ‘생명의 좌약’을 심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좌약의 성분에서 나온 효력이 전체에 퍼지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기능이 ‘아들로서의 기능’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모든 인간은 자연의 제약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명이란 바로 ‘기후’ 때문에 바뀐 겁니다. 아무리 나름대로 법과 도덕을 부르짖어도 민족의 운명은 기후에서 결정됩니다.
문제는 이방인들은 그 배후를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은 그저 ‘죽어 있는 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죽음의 집’으로 사용하십니다. ‘죽어 있는 집’이라는 그저 마냥 죽어 있는 겁니다.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죽어갈 뿐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죽음을 생산하는 집’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낯선 죽음’입니다. 숨겨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구약 내내 선지자들의 고난으로 이어져 오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일종의 ‘상처 속의 좌약’ 역할을 하고 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때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일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추수 때’입니다. 결코 인간의 경작술에 의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오로지 인간의 문명기술과 연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솜씨가 좋아도 저주의 환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저주가 벗어나는 것은 바로 그 저주를 당연한 조치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직실할 것같은 무게를 당하고 있습니다. ‘등이 휘게 될 정도로 무거운 것이 삶의 무게’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쇠의 무게와 철의 무게를 담당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불평하면 아니됩니다. 그리스도가 시킨 일이기에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의 추수는 ‘경작’이 ‘뿌려주심’으로 성사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제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시점에 예수님은 단독적으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을 비롯해서 유대인들은 전도 개념을 ‘경작’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작해서 잘 익을 영혼들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날 때는, 그런 제자들이 없었을 때라는 점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들이 전도에게 배제시킨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안에게, 구약 이스라엘에게 제시된 그 내용을 그대로 집어넣으십니다. 즉 “지금 너는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 그런 세대에 속해 있다”는 겁니다. ‘대통밥’이라는 음식이 있습니다. 대나무에 잡곡밥을 넣고 쪄낸 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마지막 때의 양식으로 변모되고 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즉 전도란 이미 예수님께서 임의적으로 시행하시는 생산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이 저주 안에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내리신 조치가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이미 결실’될 겁니다. 여인은 막 잡은 갈치처럼 퍼덕퍼덕 뜁니다. “나 메시야 만났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 어떤 경작 과정도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심었고 제자들은 거두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제시한 저주는 그 바탕 위에서만 생명이 나타납니다. 이게 바로 마지막 때의 성도를 통해서 나타날 ‘죽음의 집’의 기능입니다. 목마름의 한계와 목마르지 않는 한계를 다 보여주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자신을 위한 일에 저희들을 참여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7-08-28 03:41
148강-신명기 28장 20-24절(저주의 내용)1708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8장 20 - 24절입니다. 구약성경 304페이지입니다.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곤고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면 속히 파멸케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필경 너를 멸하리라.”
상당히 저주의 내용이 구체적이고 상세하지요. 구체적이고 상세하다는 것은 뭐냐 하면 벼르고 있다는 거예요. 반드시 이렇게 되게 하도록 주께서는 이 계획 추진을 지금 처음부터 원하고 있었고, 노리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오늘 아침에 이야기 했잖아요. 하나님이 인간을 울린다고. 피조물은 피조물이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행복하냐는 관심이 없어요. 피조물은 ‘나’ 주님만 드러내면 되는 겁니다. 피조물은 딴 거 너무 깊이 있게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누구신가 드러내면 되요. 저주를 받던 복을 받던 주님만 드러내면 합격입니다. 천국 합격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저주를 드러내는 것보다 복을 드러내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할 때 복 드러내는 것은 아예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게 없어요.
그저 이스라엘은 저주만 드러내게 되어 있고, 이스라엘만 그렇다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근데 이게 참 구체적인데, 이 구체적을 오늘날 용어로 이야기 하면 자연 자체가 충실하게 하나님의 지시를 따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자연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며칠 전에 미국에서 개기일식이 일어났다. 달이 해를 가렸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킨 거예요? 아니지요. 시킨 거 아니지요. 보세요. 인간은 큰소리 못 칩니다. 그렇게 5월달, 6월달 비 안온다고 난리 났어요. 충청도 지역 기우제 지냈습니다.
지금이 장마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돼요. 왜냐면 이거는 태풍이 오고 말고 도대체 인간은 뭔가 위에서 누르고 아래에서 깔리고 지금 밑에서 오르고 있고, 지금 완전히 샌드위치처럼 깔려있습니다.
여기에 23절 보세요. “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라.” 아래위로 깔리게 되어있어요. 이게 ‘신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이고..’ 뭐 이렇게 성경 아는 체 하지 말고, 안다 하지 말고, 그냥 자연이, 이 대 자연이 우리를 깔고 뭉게고 우리를 솟구치게 해서 우리에게 엉망진창으로 살게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 다 뜯어내고 성경 한 번도 안 보았다 치고, 인생이 뭐냐, 인생은 자연에 눌려 살아요. 인간은 자기 맘대로 못삽니다. 자연이 까라하면 까야 되요. 자연이. ‘총, 균, 쇠’를 지었던 제래미다이아몬드라는 사람이 지었던 책을 보게 되면 운명의 바뀜은 딴거 아니에요.
뭐 신의 징벌 이런 거 아니고 그냥 ‘총과 균과 쇠‘ 세균 돌아서 멕시코 사람 죽고 한 거예요. 마야문명 멸망당한 겁니다. 기후, 그 병균마저도 기후에 따라서 병균이 퍼지고 안 퍼지고 달라진 겁니다.
농사를 처음 지은 것도 기후 때문이고 모든 것이 기후 때문에 문명은 무너지고 성장하고 하는 겁니다. 그 문명에서 국가가 있고, 국가 속에서 민족이 있고, 민족이 파닥거리고 있고, 그 파닥거림 속에서 우리 개인이 있고, 한 칠십~팔십 살다가 죽어버리면 나 몰라라 죽어버리면 우리는 자기가 나름 책임진다고 하는 그 모든 책임은 다 소용 없는 겁니다.
그 되지도 않는 교회 나오라 하니까 책임지겠다고 한 거예요. 자기는 책임자라서 못나오겠다는 거예요. 뭐, 니 인생도 책임 못 지면서 뭐를 책임져요. 전에 제가 어릴 때 여자인데 목소리가 텁텁한 목소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름이 임희숙인데 임희숙이 불렀던 노래가 ’나 하나의 사랑은 가고‘라는 노래가 있어요. 그거 신경 안쓰는 사람은 모르는 노랜데. 거기 보면 ’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라는 가사가 있어요. 등이 휠 것 같은. 오늘 본문과 일치하는 데, 얼마나 찍어 눌렀으면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입니까?
그 다음 가사 보면 ’가거라 사람아 세월을 따라 가버려라‘ 얼마나 인생이 힘들었으면. 그 사람이 교회 다니다가 절에 다녀서 그런 거예요? 아니면 절에 가다 교회가서 그런 겁니까? 종교, 그거 아무 의미 없어요.
그냥 이 자연이 주님 손에 있습니다. 교회 안 찾아도 구태여 기독교 안 찾아도 교회 갈까 말까 그런 쓸 때 없는 생각하지 말고 그냥 그런 거 빼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는 우리는 우리의 원대로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되요. 파닥거려봐야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아침에 제가 요 밑에까지 쭉 산책을 하는 데 복무동에 가면 스물 몇 군데 등산복 판다고 쭉 있지요. 뭐 시너지 효과 한다고. 그런데 그 유리창에 뭐라고 씌어 있느냐 하면, ’시즌 아웃(Season out)’ 이라고 써 있어요.
계절 끝났으니까 헐값에 판다 이거죠. ‘철 지난 거 헐값에 판다는 거죠. 또는 신상 나왔다는 그런 광고도 되는 데, 계절이 끝났다. ’Season out’이 계절이 끝난거 거든요. 그러면 계절은 누구 맘대로 옵니까?
그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계절이 누구 맘대로 오는지. 성경을 펴고 복음 전하려고 하면 ‘나 성경 몰라, 나 성경 안 알고 싶어, 성경 안 볼거야.‘ 이런 마음이 움트기 마련인데 그러면 성경 안보고 이래 하면 계절 안 끝났습니까? 인간이 지 맘대로 살 수 있어요?
계절이 끝나면 같이 끝나는 거예요. 여름 끝나면 가을오고, 몇차례 슉슉 돌면서 순환되면 저희는 안 죽고 싶어도 죽어요. 결국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이 죽으라 하면 죽고 그렇게 살 때까지만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무리수를 둡니다. 자연의 일부 인 그들을 향하여 자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안을 율법이라는 것으로 제시를 한 거예요. 그건 인간으로서는, 이건 인간으로서는 감당 못할 일입니다.
어떻게 자연에서 빠져나옵니까? 이 운명이 자연의 운명인데, 자연에서 못 빠져나오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율법 지키면 자연에서 벗어나서 영생 얻을 줄 알고 착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게 착각인 이유가 뭐냐 하면 저주의 내면화를 몰랐던 겁니다. 율법을 주게 되면 마치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것처럼 착각을 해서, 그 율법에 순종하게 되면 이 자연에 휘둘리지 않고 모든 것이 평정되어서 편히 쉬리라 하는 노림수가 있는데,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말씀 준 게 아니고 그 이스라엘에 뭐를 장착하느냐 하면 저주를 장착해 버려요.
저주를.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화나게 만들어서 마음에 상처를 냅니다. 상처 내 놓고 상처에다가 좌약을 집어넣어 버려요. “어머니 이게 웃을 일이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인간에게 상처를 내고 그 안에다 좌약을 집어넣게 되면 그 좌약의 효과가 퍼지게 되어 있어요. 퍼지게 됩니다. 그래 놓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뭐라 하느냐 하면 “너는 지금부터 하나님의 아들의 기능과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의 역할이 결국 뭐냐 하면, 죄 때문에 죽었다가 주님의 의가 있어서만 부활이 되는 그런 기능이거든요. 이건 예수님의 사적으로 일어난 기능이에요. 요걸 집단화 시킨 것이 구약 이스라엘입니다. 참 쉽지요이~
구약 이스라엘 집단 전체가 장차오실 예수님의 기능을 집단적으로 보여 준 거예요. 집단적으로. 그래서 택했던 백성이에요. 모든 민족 가운데 너희만 알았나니, 너희만 택했다는 말은 장차오실 예수님의 기능을 너희만 수행하라는 겁니다.
수행을 하는 데, 수행이 잘 안돼요. 말씀을 못 지킵니다. 수행하라는 것이 실패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상처를 내고 그들에게 좌약 같은 것을 집어넣는 데, 그들이 누구냐 하면 선지자예요.
선지자는,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죄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자연의 재앙입니다. 이 자연의 재앙은 이방 민족에겐 그런 게 없어요. 왜냐하면 오늘 말씀에 의하면 22절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아주 구체적이 지요. 이미 너희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전제로 하고 주신 말씀이에요. 그래서 혹시 이 말씀 듣고 “아멘” 하신 분 있으십니까? 정말 이건 ’아멘‘ 하나마나 관계없이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돼요.
우리는 등이 휘어 질 만큼 삶의 무게를 짊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좌약이 있느냐 없느냐 그 문제예요. 예수 믿는다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자연에서 동일한 무게를 짊어지는 데, 속에 좌약이 있느냐 없느냐 그 문제입니다.
이 좌약을 넣어야 하는데, 인간이 자기 인생의 상처를 가짜로 때우는 자들이 있어요. 그들이 누구냐하면 바로 아담이 했던 짓인데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의 부끄러운 수치의 부분을 커버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팬티 입고 있었으면 아담 지옥 갔어요. 확 벗겨버리고 주님의 좌약을 집어넣어 버리죠. 그게 뭐냐. 가죽옷을 집어넣습니다. 가죽옷을 찼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그전에 있었던 부질없는 짓은 우리가 이 가죽옷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것을 만 천하에 공개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믿습니다.”라는 말은 “나는 인간도 아닙니다.” 라는 말이에요. 십자가를 앞장세운다는 것은 “내가 지킬 것은 남아있지 않습니다.“라는 말이에요. 나는 오직 자랑거리는 십자가만 자랑하겠다는 거예요. 십자가 믿는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설교를 여기까지 들어 보면 삶의 무게로 탄식한다고 해서 봐주는 거 없어요. ”주여, 저희가 삶의 무게로 힘듭니다.“ 한다고 해서, ”오이야, 내가 편하게 해줄게.“ 이런 거 없어요. 이런 꼼수 쓰지 말라는 거예요.
좌약에, 집어넣은 좌약에 주목하라는 겁니다. 선지자 노릇하라는 그런 이야기죠. 이 땅의 선지자. 그럼 선지자 노릇 하려면 신학교 가야 하느냐,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거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선지자 노릇이 어디 있어요.
모든 주님의 역할은 주시는 쪽에서 은사로, 선물로 줄 때 받는 거예요. 선물로 줄 때. 내가 요청한다고 선물이 오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홈쇼핑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전화 걸면 택배 오는 게 아닙니다. ”파란색 할래, 빨간색 할래” 그런 거 없어요.
주님이 빨간색 주면 빨간색 인생사는 거고 파란색 주면 그냥 파란색 인생사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빨간색, 파란색, 녹색도 구별 못해요. 그런 사람 있어요. 김을수 집사님이라고. 음식 먹을 때 덜 익었는데 다 익었다고 내 놓는 거예요.
그런 인생자체가, 우리에게 있는 인생의 어떤 모델 자체를 없애버리세요. 차라리. 모델을.
“나 저 사람처럼 신혼부부 생활할래.” 그런 ’저 사람처럼 이라는‘ 모델을 없애버리세요. “나는 고소영 같은 어떤...” 아, 그런 고소영 같은 모델 없다고 치세요. 하여튼 어떤 인생의 모델을 두지 마세요.
내가 모델이에요. 내가. 우리의 사는 게 주님이 주신 모델이에요. 다른 모델 없습니다. 인간 속에는 거울 뉴런이 있어서 모방하고 되비쳐 보는 어떤 신경세포가 있다는 거예요. 사람은 곧 잘 환경에 흉내를 잘 내고, 자꾸 그 환경에 쉽게 동조해 버리고 섞인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 있거든요. 있는데 그걸 가지고 철학자들이나 윤리학자들은 뭐라 하느냐 그걸 정서적 동질성, ’정서적 연대성‘이라고 해요. 동질감. 정서적 동질감은, 왜 이런 말을 윤리학에서 하느냐 하면, 목사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상대방을 이웃사랑 할 때, 그냥 건성으로 하지 말고 정서적 유대감을 가지고 하면 주의 법이 완성된다는 겁니다.
“나 오늘 은혜 받았다.” 하면서 헌금 팍팍 내고.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정서적 유대감 때문에 망했어요. 지금도 이스라엘은 아랍세력으로부터 정서적 유대감으로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의‘입니까?
제가 아까 뭐라 했나요? 저주를 장착한다고 했죠? 저주를. 정서적 유대감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 벌 받기 싫어 가지고 “나 이정도로 저 사람보다 착하게 하니까 하나님이여, 제발 벌이 피해서 다른 데로 가게 하옵소서.” 하는 거예요.
“나는 지금 이웃사랑 잘 하고 있으니까 나한테 오면 안됩니다. 나 싫어요.” 이렇게 자기가 스스로 커버하려는 것 밖에 안돼요. 주께서는 저주를 심으려고 하는 데, 딴 데 가서 심으라는 거예요. 인간 세상과 주님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인간 세상은 경작합니다. 경작. 문화(culture)라 하는데 경작해요.
주님께서는 뿌립니다. 백 쉐프 막 뿌리잖아요. 설탕 막 뿌리듯이, 요리사들이 뭐 뿌리잖아요. 뭐, 화학조미료 같은 거 뿌리지요. 뿌리는 것은 그냥 삐라 뿌리듯이 막 뿌리는 거예요. 뿌려서 구원 받는 거예요. 내가 경작하는 게 아닙니다.
왜 자꾸 인생을 경작하려고 합니까? 그러면 힘 덜 들 줄 압니까? 힘 더 들어요. 왜냐하면 자기의 성과와 공로가 자꾸 기억이 나가지고 이 정도 했으면 주께서 좀 봐줘가지고 어려움을 지나가게 해주셔야 하는데 “왜 이리 찾아옵니까?” 하면서 그 다음부터는 진짜 정면 대결에 들어갑니다.
인생이라 하는 건 첫째, 제가 말했듯이 모델이 없다 했죠? 누구를 닮아 갈 생각 하지 마세요. 누구를 닮고 모방하려고 하면 그거는 진짜 이상한 아버지 되요. 이제 그거 끝났지만. ’아버지가 이상해’, 그 드라마 아버지만 이상한 게 아니고, 엄마도 이상하고, 다 이상해요. 다 이상해.
제가 아직 방법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방법이 뭐냐. 이미 주님께서는 저주를 뿌립니다. 뿌립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저주를 뿌릴 때, 뭐가 날라 가야 하냐면 살아있는 내가 하나님 말씀에 복 받고, 어떻게 더 잘 사느냐에 대한 모든 의지가 완전히 말살 당해야 되요.
그러면 말살 당하게 되면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면, 세상 나라와 이스라엘의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세상나라는 뭐냐 하면 주님 보시기에 죽어있는 집이죠. 그냥 죽어 있는 집. 자기 딴에 살아본다고 살아 봤자 그 저주를 인하여 계속 살아봐야 계속 죽음으로 죽음으로 계속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떤 집이 되느냐 하면 ‘죽어 있는 집’이 아니고 ‘죽음의 집’이에요. ‘에이 또 슬슬 말장난 시작됐다.’ 하지 마시고, 죽음의 집은 낯선 집을 생산하는 집이에요. 이게 제가 말장난 하는 게 아니고요,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전도하실 때 하신, 제자들에게 전도하게 하실 때 당부하신 말씀이 있으세요.
이렇게 당부 했는데, 10장 5절에 보게 되면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하고 전파합니다.
제가 언젠가 이야기 했죠. 전도집회에서 전도집회 어떤 강사가 와서, 강사 이름이 차영배 교수라고 총신대, 저는 00 이런 거 하기 싫어요. 그 사람이 강의를 실컷 하고나서 어떤 학생이 질문을 했는데, 이렇게 질문을 했어요.
“전도를 그렇게 하라고 열변을 토하시는 데, 그러면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방인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길도 가지 말고, 차라리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는 주님의 말씀의 취지가 뭡니까?” 전도 하라고 한 시간 반 동안 강의 해 놓고 학생이 딱 그 질문 하니까 말문이 막혀 버린 거예요. 말문이...그 머리 허연 교수가. 나이 60 넘은 교수가.
얼마나 속으로 고소했는지, 저도 그 질문을 할라 했거든요. 전도라는 것은 수를 늘리는 게 전도가 아닙니다. 질을, 원래의 그 질감, 그 내부에 장착된 저주를 제대로 이제는 결실을 추수할 때가 되었으니까 주께서 심어 놓은 그 저주를 뽑아내는 거예요.
주님이 심었고, 주님이 그것을 뽑아내는 그걸 이야기 하는 겁니다. “거 봐, 인간 가운데 구원 받을 사람 아무도 없잖아. 내가 남긴 자 외에는.” 그게 바로 전도예요. 정말, 이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거든요. 이게 제가 고함 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살살 이야기해도 될 이야기 인데, 제가 이렇게 실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너무 아니니까, 너무들 아니에요. 요한복음 4장에서 그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 할 때에, 요한복음 4장 14절에 보면 주님이 전도를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거든요.
제가 지금 설명할 테니 좀 잘 들으셔야 해요. 지금 유대인들은 주님이 자기들을 데리고, 유대의 열두제자가 전부다 유대인들입니다. 주님이 그 열두제자를 데리고 전도 한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마지막 추수 때 전도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 보기에 기가 차지요. 그런 전도 같으면요, 이거는 기존에 유대사회와 세력 싸움 정치적 알력 밖에 안돼요. “네가 크냐? 우리 예수님 얼마나 멋있는 줄 알아? 우리 예수님이 전도하면 너희보다 더 커져!”
어디 뭐 전당대회 합니까? 오늘 국민의당 전당대회 한다는 데. 무슨 전당대회 해요? “민주당보다 우리가 더 크다“ 하면서. 열두 제자들은 생각이 그것밖에 안돼요.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갔어요.
찾아가서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1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고,“ 1400년 이스라엘 역사를 주님께서는 역사를 마감하는 시점에 와서 그걸 개인적 인격에 그걸 장착시켜 버리신 거예요.
어렵죠? 인간은 대나무 밥통이에요. 밥통 밥 먹어 보셨습니까? 대나무에다가 밥속을 집어넣잖아요. 주님께서는 저주를 집어넣었어요. 축복도 저주를, 원래 축복도 집어넣는다는 것은 저주도 함께 집어넣는 거예요.
만약에 말씀 안 지키면 저주 받기 때문에. 말씀을 집어넣을 때 축복과 저주를 같이 집어넣었다고 볼 수 있어요. 집어넣은 그것을 이스라엘 집단에다 집어넣었거든요. 이제는 이스라엘도 끝났어요. 모든 게 마감돼요.
뭐, ”어느 산에서 들이면 됩니까, 그리심 산입니까?“, ”아이고, 아직도 공간 문제냐?“ 그게 아니고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 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피조물 앞에 천국 갈 인간에게는 좌약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집어넣으면서 뭐라 하느냐 하면, ”내가 주는 물은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거니와,“ 이 말은 뭐냐.
이 말은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이나 관계없어요. 모든 인간은 마셔도 마셔도 목마를 수밖에 없는 이 세대 속에 갇혀있다는 겁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이야기 했잖아요. 갇혀 있는 상황에서 전도라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고요.
같은 더러운 것들 끼리 전도한다고 이게 전도입니까? 같이 더러운 건데. 색다른 것이 전도해야지 갇힌 것을 갇혀 있는 죄악된 것을 전도해봤자 죄만 전염 될 뿐이잖아요. 그걸 여인에게 집어넣은 거예요.
”내가 주는 물은 목마르지 아니하거니와,“ 그러면 이미 여인은 목마를 수밖에 없는 세대 속에서 그냥 평소대로 쭉 살아 온 겁니다. 그 다음에 집어넣습니다. 그 다음에 뭘 집어넣느냐 이거는 율법을 행한 것도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 다섯 명이고 지금도 수완이 좋아서 여섯 번째 남자하고 사귀는 데, 무슨, 전도 하려면 ‘이렇게 꼬시면 된다’ 뭐 이런 거나 전도 할까, 아무, 그런데 그것조차도 목마른 거예요. 어떤 방식으로도 인간은 목마른 방식으로 계속 허걱 거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갑자기 물을 마시고 싶네요. 거기에다 주께서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거니와,“ 그거 하는 순간 죽었던 갈치가 퍼덕거리고 뛰는 것처럼 여자가 물 길러 왔다가 그 까이꺼 물동이도 던져버리고 ”심봤다” 하는 식으로 ”메시아 만났다” 하는 식으로 고함을 칩니다.
주님께서는 이야기 합니다. “내가 주는 양식이 들어 있는 대나무 밥통 봤나?“ 추수 할 것 봤나? 제자들은 늦게 와가지고 ”주님, 배고프지요. 빵 사왔습니다.“, 주님은 ”너희들 내 양식 봤나? 내 밥그릇 봤어? 저게 밥그릇이야, 저기 펄쩍 뛰는 밥그릇“
하여튼 십자가 마을이나 우리교회 교인들은 손잡이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쥘라 고 해도 쥘 데가 없어. 빤질 빤질 해가지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밥들을 모으셔야죠. ”너는 내 사람이야.” 가 실패로 끝나면 받들어 모실 수밖에 없어요. 아예 밑에서부터 펄쩍 뛰더라도.
여러분 목마른 거 많이 마시기 바랍니다. 많이, 평생 목마른 거마시고, 또 주님께 원망하고 불평하고, 또 목마른 것 마시고, 또 불평하고...이제 북유럽 다녀왔으니 다음에는 또 어디 갈지 모르겠다. 북유럽도 목마르지요.
장로님 여행 다녀와서 하시는 말씀이 중요한 교훈을 이야기 했어요. “ 나이 60 넘어서는 북유럽 못 간다.” 그래서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와 합치 한 거예요. 전도라 하는 것은 인간이 영토 넓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좌약 집어넣는 게 전도입니다.
전도는 우리가 못합니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마지막 때 추수 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