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최근들어서 천주교회내에서 친교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성서에서 친교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은 딱 한군데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이나 그 제자들 그리고 초대교부들이
교회공동체에서 친교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고 여기는가 입니다
우리가 가까운 레지오를 들여다보면
그안에서 친교라는 것이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쁘레시디움중심모임에서 전꾸리아가 함꼐하는 자리를 만든것이
봄의 꾸리아야외행사와 겨울의 연차총친목회라고 봅니다
그런데 레지오교본을 보면 원문과 우리말해석에는 약간 차이가 있음을 알게됩니다
우리말번역에는 원문인 영어판에는 들어있지않는
약간의 여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주교회내에서 간혹 성가와 무관하게 사회유행가를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혀 신앙대화가 배재된 야외소풍이나 등산도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친교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도행전을 보면 그 친교에 반드시 단서를 붙이게 되는데
사도들의 가르침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우리는 세상일을 하거나 아니면 천주교회내에서 봉사하거나 간에
하느님의 영향력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신앙적인 애기를 하면서
이를 마치 세상사람들이 이해하려는 듯이 신앙적인 용어가 배제된채로
신앙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는 마치 성경의 한장면을 말하면서 성경외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를 할때에 특히 주일미사에는
주님의 복음서를 읽기전에 반드시 구약의 예언서나 아니면 신약의 서간문을
읽게되는데 그 절기에 따라서 이는 교묘하게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읽고 말할때에 성경외의 용어로 말할수 있는 부분은
아마도 세상안에서 살아가면서 경험한 이야일뿐일것입니다
우리는 떄로는 하느님의 위대함을 말한다면서
자신이 전혀모르는 분야를 소재로 꺼집이 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경우에는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이 아니라 다른사람들이 말하는것들을
주어들은것일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은 16세기를 전후로 해서 개신교회가 갈라졌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든 어떤의미이든지 간에 그때에
불편한 점이 있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이후 양진영은 이를 개혁하느라고 무수히 많은 노력을 들렸다는 것이
교회사에 분명히 나옵니다
천주교회는 수도원이 생겨난것입니다
지금도 사용하는 언어인지는 모르지만 한때에 사용했던 언어중에는
신부님의 종류를 들면서 수도사제와 세속사제로 나눗었다는 것입니다
세속사제라고 하는것이 사제가 세속적이라고 하는것보다는
아마도 세속에 사는 사제라는 의미가 강할것입니다
전주교구의 어떤 주교님은 강론중에 이런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 스스로는 어느정도 비가 올때에 우산이라는 보호장비를 사용하는데
평신도는 온통 비를 맞는다'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주교님은 교회라는 보호 울타리가 있는데 평신도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영향을 그대로 받는다는 의미일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더 구체적인 애기를 하겠지만
우리 평신도가 신앙적인 애기를 할때에 신앙적인 용어외에
인문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될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성서기록하는 분들이 예수님의 행적을 증언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했을것입니다. 그런데요 사실 표현법에서는 유일힌앙보다는 다분히 다신교들이
훨씬 풍부한 표현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전을 짓고 그 신전에 오래전부터 많은 문자를 작성해온 반면에
이들을 갖추고 있지않는 그리스도교와 같은 유일신앙은 단지 구전으로 전해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를 이를 이해하기 위한 여러설화나 예화나 비유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에서 볼때 사도 바오로는 그가 받은 교육과 지식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려고 노력했을것이고 그것들이 성서에 잘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상살이를 하면서 세상의 경험과 지식으로도
하느님을 증거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길을 가는데는 분명히 그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라가 가볍게 여기는것은
한글레지오교본처럼 약간의 여흥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표현법이 모세오경을 읽으면서 느끼게 됩니다
물론 그 표현법이 유대인들의 관습일수더 있을것입니다
모세는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땅으로 갑니다
그런데요 네게브사막근처에서 에돔족을 만날때에 하느님은
그 무리들이 바로 가나안땅으로 가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따르지 않고
정탐꾼을 보내어서 미리 조사해보자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으신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지파별로 땅을 분뱌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은 그들이 차지할 땅에서 이방인들을 전부 몰아내려고 하셨지만
이들은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속에서 살면서 하느님의 일을 핑개삼아서
세상일과 전혀 무관한 길을 갈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이라고 해서 고상하고 세속적인 일과는 뚜렷이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우리들이 세상의 삶도 중요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것들을 기본적으로 살펴봐야 할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는것도 중요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면서
하게되는 공동체의 친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번 시노드를 친교라는 용어대신에
남의 애기를 귀담아듣는 경청을 키워드로 내세운것입니다
경청을 하는데는 높고 낮음도 귀하고 천하는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애기를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가 강할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청을 통해서야만이 진실된 나눔이 가능하다는 것을, 친교가 일어날수가
있음을 알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성서는 모든것을 잘 배려해서 작성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복음서중 공관복음은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함꼐 하는 일들을
여러각도로 묘사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각자의 삶도 각자의 표현법으로 존중되기를 바랄뿐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