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영국의 사회상을 해학으로 그려낸 Charles John Huffam Dickens(찰스 디킨스)
1812-1870년
찰스 디킨스는 19세기 영국의 소설가로,
그의 작품은 성서와 셰익스피어의 작품 다음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며,
'가장 크고 다양한 세계를 창조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라는
평을 받는 인물이다.
19세기 영국은
곧 찰스 디킨스라는 이름으로 표현될 정도로
당대 영국 사회상을 충실히 그려 내는 한편,
아동학대, 빈곤, 가정폭력, 노동 및 교육 현실 등
당시 가장 중요한 사회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찰스 디킨스는
1812년 2월 7일 영국 포츠머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 디킨스는 해군 경리부 하급 관리로 상냥하고 낙천적인 기질의 사람이었는데,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구두쇠 윌킨스 미카버의 모델이라고 한다.
2세 때 아버지의 전근으로 런던으로 옮겨 살았으며,
어린 시절 몸이 약하고 심약한 성격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를 하거나
셰익스피어 연극을 보러 다니며 지냈다.
그리고 유모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독서를 바탕으로
연극적 상황을 만들어 내며 공상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12세 생일 바로 다음 날,
아버지가 빚으로 체포되면서부터
디킨스의 인생에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도료 공장에 보내져 견습공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4개월 후 아버지가 유산을 상속받으면서 빚을 청산하고
공장에서 그를 데리고 나왔으나,
이때 겪은 최하층 소년 노동자로서의 경험은
그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고,
후일 작품에서 빈곤 계층의 현실과 사회 문제를 다루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디킨스는 이때의 일에 대해
'지독한 멸시를 받고 (앞날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삶이라고 표현했다.
공장에서 나온 뒤
웰링턴 하우스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15세 때 졸업한 뒤 변호사 사무실에 사환으로 취직했다. 그
러나 일이 잘 맞지 않아 방황하면서 연극을 보러 다니다가
결국 이듬해 사무소를 그만두었다.
이후 속기술을 배워 민법박사회관에서 서기로 일하다가
20세 때 의회 신문인 〈미러 오브 팔러먼트〉의 기자가 되었다.
이 무렵 배우가 되려고 각종 연극 오디션에 응모하기도 했다고 한다.
신문기자를 하는 틈틈이 습작을 하던 디킨스는
〈트루 선〉 지의 통신원 생활을 하면서
각종 풍속을 산문으로 써서 다양한 잡지에 투고, 발표했다.
이때 '보스'라는 필명을 사용했는데,
1836년 이 풍속 스케치들을 한 권으로 묶어 《보스의 스케치집》으로 출판하면서
작가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이 작품집이 호평을 받자
채프먼 앤드 홀 출판사의 의뢰로 《보스의 스케치집》의 확대판이라 할 만한
《픽윅 페이퍼스》를 매월 분책 형식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디킨스에게 작가로서의 명성을 안겨 주었다.
1836년에는 캐서린 호가스와 결혼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10여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디킨스는 1838년 《올리버 트위스트》,
1839년 《니콜라스 니클비》,
1840년 《골동품 상점》,
1841년 《바나비 러지》 등
연달아 장편소설을 발표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는 일련의 작품들에 자신이 직접 체험한 밑바닥 사회의 현실과
노동자들의 애환을 생생히 담고,
영국 사회 제도의 모순과 어두움을
다소 기괴하리만큼의 희극적인 인물과 풍자를 통해 비판했다.
런던 뒷골목을 배경으로
강제 노역을 하는 고아 올리버 트위스트의 일대기를 그린
《올리버 트위스트》는
당시 영국 노동자의 비참한 삶과,
특히 1834년 시행된 신빈민구제법을 고발하고 있다.
또한 니콜라스 니클비라는 청년이
학생들을 학대하는 기숙학교에 대항하는 등의 일화를 그린
《니콜라스 니클비》는
요크셔 주의 한 기숙학교에서 학생 학대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고발하고자 집필했다고 한다.
《니콜라스 니클비》가 발표된 직후
기자들이 요크셔의 학교들을 경쟁적으로 취재했고,
실상이 확인되어 학교들이 폐쇄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분책 형식으로 연재되듯이 발표되었는데,
이 때문인지 후기 디킨스의 작품에서 보이는 탄탄한 플롯 구조와
복잡한 짜임새는 찾아볼 수 없고,
분절적이고 다소 즉흥적이다.
그러나 저널리스트로서의 냉정하고 관찰적인 자세로
당대 영국 사회상을 거대한 초상화처럼 보여 주며,
사실적인 인물들을 통해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1842년
디킨스는 약 반 년간 아내와 미국 여행을 하고 돌아와 《미국 기행》을 발표했다.
그는 영국 최초의 유명 인사 작가라 할 만한데,
영국 내에서는 노동자 계급부터 여왕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독자들이 있었고,
미국인들에게도 크게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때문에 《미국 기행》이 발표되었을 때 미국인 독자들은
그 안에 담긴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묘사를 보고 분개하기도 했다고 한다).
1843년에 출간된 《크리스마스 캐럴》은
출판 5일 만에 초판 6천 부가 모두 매진될 정도였다.
디킨스가 '마음 깊은 곳에서 아끼는 아이'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1849년부터 발표되기 시작했는데,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풍에 두드러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가장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으로,
유복자로 태어난 주인공이
어머니의 재혼 이후 고난을 겪다 소설가로 성장하는 일대기를 그린 것이다.
그는 주인공 고아 소년의 이름을 지을 때
자신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었으며,
쓰는 도중에 많이 울었다고 한다.
기존 작품들이 한 인물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사회 문제를 짚어 나간
전기소설의 형식을 띤다면,
이 작품부터 다양한 개성을 지닌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플롯 구조가 다층적으로 이루어지는 파노라마적 사회소설로 이행하기 시작한다.
이런 방식은 1853년에 발표한 다음 작품 《황량한 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854년에는
영국 서북부의 공업 도시 프레스턴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나자
이를 주제로 하여 《어려운 시대》를 썼다.
디킨스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명성과 그로써 창출된 부를 충분히 누렸다.
이는 대중의 취향에 영합한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이를 잘 알고 글쓰기에 활용하기도 했지만,
사업적 수완 역시 뛰어난 덕분이었다.
그는 매달 분책 형식,
즉 시리즈로 책을 내고 독
자들의 반응을 살펴 다음 회에 반영했으며,
이런 노력으로 수십만 부라는 경이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그의 초기작들은
가정생활의 미덕을 칭송하며,
권선징악의 교훈 및 해피엔드의 결말을 취하는데,
이 역시 대중들이 요구하던 바였다.
19세기 중엽부터 산업화의 폐해는
사회 전반 및 여러 계층에서 등장했으며,
경제적인 갈등과 범죄가 치솟았다.
그런 상황에서 디킨스의 소설이 그려 내는 빅토리아 시대의 윤리성이
대중들의 마음을 위로했던 것이다.
그러나 디킨스 역시 이런 목가적인 자신의 작품에 회의를 느꼈다.
그리고 1858년
아내와 별거하고 가정생활이 파탄 난 이후에는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개인의 좌절과 사회의 어두움을
스스럼없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아내와의 불화는
아마추어 연극에서 만난 여배우 엘렌 터난과 불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인데,
별거 후 엘렌 터난과 죽을 때까지 관계를 유지했다.
작가로서의 자괴감에 시달리고 가정생활도 끝이 났지만,
그는 정력적으로 글을 쓰고,
공개 낭독회를 열고,
사회사업을 하고, 주간지를 창간하고,
여행을 다녔다.
프랑스 혁명을 무대로 한
《두 도시 이야기》,
《위대한 유산》,
《우리들의 친구》,
《막다른 골목에서》 등이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1865년 겨울에는
프랑스로 요양을 갈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이듬해 미국으로 가서
공개 낭독회를 열 정도로 그는 바쁘게 살았다.
의사로부터
활동 중지를 권유받았으나
죽던 해까지 추리소설풍의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을 집필했다.
1870년 6월 9일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음을 맞이했고,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디킨스의 시신은 웨스트민스터 교회 내 '시인의 구역'에 안장되었다.
6. 사실주의로 전환한 Walt Whitman(월트 휘트먼)
1819-1892년
초월주의에서 사실주의로의 과도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낙관적 인간관과 생명력을 다루었다.
월트 휘트먼은
미국의 정신을 대변하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며,
초월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의 대표적 작가이다.
민주주의를
미국의 중심 원리로 꼽고,
낙관적 인간관 및 모든 생명의 존재와
그 안에 내재된 생명력을 찬미했다.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토로한 논문 〈민주주의의 전망〉은
미국 민주주의의 3대 논문으로 꼽힌다.
월트 휘트먼은
1819년 5월 31일
미국 롱아일랜드 헌팅턴타운 근교 웨스트힐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월터 휘트먼은
농부이자 목수로, 토마스 페인의 인권 사상에 심취한 혁명적 사고방식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월트는 9남매 중 둘째였는데,
아버지는 다른 형제들의 이름을
앤드루 잭슨,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등으로 지을 정도였다.
어머니 루이자 판 펠서 휘트먼은
영적인 삶을 중시하는 신실한 퀘이커 교도였다.
4세 때
아버지가 사업 투자에 실패하여
가족이 브루클린으로 이사했고,
6세 때 브루클린의 공립학교에 들어갔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11세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 변호사 사무실 사환, 인쇄소 견습공, 인쇄 조판사 등으로 일했다.
연극과 문학을 좋아해 독학했으며,
특히 영국 낭만주의 소설과 시, 성경에 심취했다.
16세 때 조판사로 일하면서 주간지 〈뉴욕 미러〉에 익명으로 시를 투고하기 시작했으며,
17세 때는 고향 롱아일랜드로 돌아와 마을 학교에서 잠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세 때 주간지 〈롱 아일랜더〉를 창간하고
편집부터 신문 배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 했고(10개월 만에 팔았다),
다시 인쇄 식자공, 교사 등을 전전하면서
시와 소설을 써 나가는 한편, 이를 신문에 투고했다.
21세 때는 마틴 밴 뷰런의 대통령 선거운동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시티홀 파크에서 열린 민주당 집회에서 연설하는 등
일찍부터 민주당 지지자로 활동했다.
23세 때부터 6년여간 뉴욕과 브루클린 등지에서
일간지 〈뉴욕 오로라〉, 〈이브닝 태틀러〉, 〈데모크라트〉, 〈미러〉,
〈브루클린 이브닝 스타〉,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 등에서
편집자로 일하면서 시와 소설을 꾸준히 발표했다.
29세 때 민주당 지지 활동 때문에
보수 신문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을 그만두게 되자
〈브루클린 위클리 프리먼〉을 창간하고
이 신문이 팔리기 전까지 1년여간 노예제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이후로도 인쇄소 직원, 목수, 건설 노동자 등의 일을 전전하다가
36세 때인 1855년,
12편의 시와 서문이 담긴 시집 《풀잎》을 자비 출판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영시의 형식과 운율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산문 문장을 열거해 놓은 듯한 자유시의 형식을 선구적으로 보여 주었으며,
내용 면에서는
남성, 여성, 백인, 흑인, 정치가, 노동자 그리고 풀잎에 이르기까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존재와 그에 내재된 생명력을 찬미하며,
미국 주류 사회의 통념과 믿음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노동자로 온갖 직업을 전전했으며,
퀘이커 교도의 신실함과
민주주의적, 혁명적 성향을 지닌 부모 아래서 자라면서
깨우친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가 오롯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과
성욕을 강하게 표현한 〈나는 몸의 흥분을 노래하네〉 같은 작품들은
당시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오늘날에도 매우 파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 명망 높은 시인이자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풀잎》에 대해
'재치와 지혜가 있는, 미국이 배출한 가장 놀라운 작품'이라고 평하며
주변 지인들에게 추천 편지를 보냈으며,
휘트먼을 가리켜
'새로운 인간'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휘트먼은
작품의 형식과 내용이 모두 영시의 전통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좋
지 않은 평을 받았고, 일부 시가 외설스럽다, 저속하다 등의 말을 듣자
다소 침체되어 있었으나 에머슨의 편지들로 용기를 되찾았다. 이
듬해 에머슨의 편지들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을 추가하고
초판의 시 중 일부를 수정해 《풀잎》 2판을 냈으며,
죽을 때까지 수정, 증보를 거듭해 9판을 내놓는다.
2판에서 그는 자신을 '미국 최후의 음유시인',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라고 칭하며,
자신의 시는 육체와 성,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고 밝혔다.
《풀잎》을 발간했으나
전업 시인으로서 생계를 꾸려 나가기는 어려워
휘트먼은 브루클린의 〈데일리 타임스〉에서 약 3년간 편집 일을 하면서 시를 썼다.
이런 생활을 하면서
휘트먼은 시적 영감이 고갈되자
스스로 '난폭하고 세속적이고 관능적이며 먹고 마시고 여자들과 놀아난다'라고 하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오히려 감정적 소모를 불러일으켜
시인의 힘을 고갈시켰다고도 썼다.
이 시기 그가 느꼈던 감정들은 〈아담의 아이들〉, 〈창포〉 등에 내재되어 있다.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휘트먼은 북부를 지지하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시 〈울려라 북소리!〉를 발표했다.
또한 북군으로 참전한 동생 조지가
프레더릭스버그에서 부상을 당하자
동생을 만나러 버지니아군 야영소에 갔다가 부
상병들을 보고 간호병으로 자원했다.
이듬해 워싱턴으로 가서
군인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한편,
육군 회계관 사무국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휘트먼은 〈병자들의 위대한 군대〉 등
남북전쟁에 대한 시들을 쓴다.
1864년은
휘트먼 개인에게 큰 시련의 시기였다.
동생 조지가 남부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동생 앤드루 잭슨이 결핵과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으며,
형 제시가 정신이상으로 킹스 카운티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비극이 연달아 이어졌다.
1865년, 휘트먼은
에머슨의 지인을 통해 내무부에 자리를 얻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외설적이고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시집)
《풀잎》의 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내무장관 제임스 할란에 의해 해고되었다.
그러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편집자이자 시인인
윌리엄 오코너가 부당 해고를 항의하는 등
여러모로 노력하여
휘트먼은 법무부에 자리를 얻어 군인들을 인터뷰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남북전쟁에 관한 시들과 그해 4월에 암살된 링컨을 추모하는 시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을 수록한 시집 《북소리》를 발표했다.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과 함께
오코너가 쓴 휘트먼에 대한 전기 글 《선량한 회색 시인》으로
휘트먼은 '애국자 시인'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이듬해에는 수필집 《민주주의의 전망》의 토대가 되는 산문들을 발표하면서
전쟁에 대한 견해, 미국의 민주주의를 일으키고 국민의 사기를 드높일 방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청년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문학과 예술로 민주적인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다.
1860년대 후반부터
휘트먼은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먼저 크게 인정을 받으면서
미국 비평가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 한편 이 시기부터 우울증이 시작되었으며,
1873년에는 뇌졸중 발작을 일으켜 마비 증세를 겪었다.
그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동생과 함께 지내면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글을 계속 써 나가
1876년에는 《풀잎》 증보판과 시집 《두 시냇물》,
산문집 《남북전쟁에 대한 기록》을 펴냈다.
또한 미국 내외의 정치 문제에 대한 발언과 강연도 계속했으며,
죽을 때까지 《풀잎》의 부도덕성 문제에 대한 논란에 시달렸다.
1890년, 71세의 휘트먼은
이미 두 차례의 뇌졸중 발작을 겪으며 거동이 불편했으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 둔 상태였다.
휘트먼은 정식으로 결혼한 적이 없는데,
그해에 자신이 일평생 여섯 명의 사생아를 낳았다고 주장하는 한편,
자신이 살고 있던 캠던 시의 할리 묘원에 4천 달러 상당의 묘소를 구입하고 직접 디자인했다.
이후 1892년 3월 26일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휘트먼 시 전집》의 출간을 준비하고,
시집 《환상이여 안녕》, 《풀잎》의 최종판을 출간하는 등
말년에도 시인으로서 끊임없이 작업을 계속했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