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이십대장군 남이 장군이
남겨놓은 그 말씀 가슴 울리고
청년청년 그대는 위대하신 경
젊은피는 철관에 바로있도다
남이장군 노래를 어릴 때 이렇게
부른 것 같다. / 정영남
남이(1441, 세종 23~1468, 예종 1년)는 조선 세조 때의 장군이다. 본관은 의령. 태종의 외손 휘(彙)의 아들, 좌의정 권람의 사위다. 1457년(세조 3년)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7년(세조 13년) 이시애의 반란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용명을 떨쳤고, 건주위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진에 들어가 적을 무찔렀다. 적개공신이 되고 훈 1등에 책록되어 26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유자광의 무서운 계략이 숨어 있었다. 남이 장군은 원래 남아이십미평궁(男兒二十未平國)이라 했는데, 유자광이 평국(平國)을 득국(得國)으로 바꿔버린 것이었다. 시조를 읽은 예종은 두 손을 떨며 소리를 질렀다. "무엇이라? 스무 살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라? 어허, 이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로다!" 예종은 남이 장군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순간, 유자광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선왕께서 남이 장군을 총애하셨기에 과인 역시 철석같이 믿고 또 믿었거늘, 내가 호랑이 한 마리를 키운 꼴이 되었구나! 어허…. 공이 나를 살렸구려." "황공하옵니다."
예종은 당장 남이 장군을 잡아들이라 명했다. 결국 남이 장군은 물론이고 영의정 강순을 위시한 그의 측근까지 모두 참수를 당했다. 일국의 명장으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던 남이 장군은 유자광의 사악한 혓바닥이 부린 계교로 인해 결국 스물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억울한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이·강순 등을 역모로 몰아 죽인 간신 유자광(?~1512)은 무오사화(戊午士禍)까지 일으켰으며, 1506년(연산군 12) 9월에 대왕대비의 명으로 연산군을 폐하자 이번에는 성희안과의 인연으로 또 중종반정 공신의 호를 받고 무령부원군에 피봉되었다. 그 후 영경연사가 되었으나, 대간·홍문관·예문관 등의 탄핵으로 훈작을 빼앗기고 귀양 가 장님이 된 후 배소에서 죽었다. 아들 진·방 등도 귀양 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인과응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