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기억의 한계도 깨뜨리시는 하나님>
[1] 나이가 60을 향해 다가가니 기억력에 한계가 오는 듯하다. 노트북을 켜면 무얼 찾으려 했는지 몰라서 망설일 때가 종종 있다. 서재에서 책을 찾으러 갔다가도 어떤 책을 고르려 했는지를 몰라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물론 30대 초반에도 그랬었다. 아침에 일어나 안경을 낀 채 안경을 찾다가 세수할 때에서야 비로소 안경을 끼고 있음을 안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보다 지금은 기억의 한계가 더욱 심해졌음을 절감한다.
[2] 이러다가 가족도 못 알아보는 치매가 찾아올까 두렵기조차 하다. 사람이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산다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면 망각이 때로는 복일 때가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해서 더 믾이 생각을 하고 있는 편이다.
인간의 기억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실제로 삶을 살면서 개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한 조각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저장된다면 어떻게 될까?
[3] 한 번 본 것을 사진 찍듯 머릿속에 저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사람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할까?
과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증상을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이라 한다. 이 증후군은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며 종종 드라마, 문학 속에 다양하게 변주되어 등장해 왔다.
[4] 장용민의 소설 ‘궁극의 아이’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다. 일명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인 앨리스는 일곱 살 이후 벌어진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한다. 몇 백만 명 중 한 명에게 생길까 말까 한 희귀한 증세지만, 실제로 전 세계에 수십 명이 이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한다.
‘서프라이즈’라는 TV 프로그램에서는 실제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이들이 등장한 적이 있다.
[5] 한 외국 여성은 자신의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밝혔다. 지난 일들이 마치 일상을 녹화해 놓은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며, 사소한 일에 예민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기자가 직업인 한 남성은 자신이 인터뷰한 내용뿐 아니라 며칠 전 편집장이 회의에서 한 말도, 몇 년 전 의사가 한 말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소설 ‘궁극의 아이’ 중 앨리스의 대사 가운데 이런 말이 나온다.
[6] “당신은 머릿속이 온통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예요. 그건 평생 과거라는 철창 속에 갇혀 사는 거라고요.”
과거 나는 일주일간 내 세미나에서 강의를 들은 시카고의 한 여성도에게서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병원에서 자신이 태어났는데,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이후부터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7] 나이가 들어 처녀 때 모친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핀잔을 주셨다 한다. 그래서 당시의 상황과 의사와 모친이 그때 한 말을 기억나는 대로 말했더니 모친이 한동안 충격을 받아 말을 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곤 몇 분 후에 모친이 이렇게 말하더라고 했다.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엄마, 저는 그 때 일어난 상황 지금까지 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랬더니 모친이 “너 정말이구나! 어찌 그게 가능한 거니? 믿을 수 없는 일이구나!”라며 놀라워 하셨다 한다.
[8] 딸이 태어났는데 울지를 않아서 의사가 엉덩이를 때려줬다는 사실과, 그때 무지 아파서 의사가 얄미웠다는 얘기와, 딸이 “응애!”하고 울지를 않아서 의사에게 “왜 그런 거죠?”라고 걱정한 얘기와, 의사가 엉덩이를 때리고 나서 “응애!”하고 울자, 모친이 “아, 이젠 됐네요!”라고 기뻐하신 사실들을 다 얘기했을 때 어머니는 깜짝 놀랐고, 모든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9] 독실한 신자인 그녀가 내게 해준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있을 수 없어 보였다. 나는 세상에 그런 사람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당시 기념으로 찍어둔 그 여성도의 사진을 지금도 핸드폰에 보관하고 다닌다(아래 사진).
사실 기억은 우리에게 유익한 점도 있고 해로운 점도 있다. 모든 걸 다 기억해도 문제고 전혀 기억하지 못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10] 어쨌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억력이 쇠퇴해짐은 속일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런데 자기와 관련된 사실들에 대해 기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타인에 대한 기억 결핍이 낳는 문제성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타인에게 신세를 지거나 고마운 일을 경험했을 때 그걸 기억하여 감사를 표하는 것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적이다.
[11] 자신에게 빚을 지거나 혜택을 입은 사람이 감사를 표하지 않을 때는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남에게 감사를 잘 표하지 못함을 본다. 그렇다.
성경 속에도 이런 사람의 얘기가 나온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간다. 거기엔 왕의 진노를 사 옥에 갇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 두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꿈을 꿨는데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전전긍긍하게 된다.
[12] 요셉이 그들의 낯빛을 보고 무슨 일인가 묻는다. 두 사람이 자기들이 꾼 꿈 얘기를 하자 요셉은 꿈의 해석은 여호와께 있으니 자신에게 말하면 풀이를 해줄 것이라 했다.
그래서 먼저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이 꾼 꿈을 그에게 얘기하자 요셉은 그의 꿈을 해몽해준다. 그것은 그가 다시 왕의 부름을 받을 것이라는 좋은 해몽이었다. 그때 요셉은 다음과 같이 관원장에게 부탁을 한다.
[13]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창 40:14-15).
얼마 후 요셉의 해몽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을 하게 된다. 요셉이 해몽한 그대로 된 것이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온 사실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14] 그가 감옥에서 자유의 몸이 되어 감옥에서 출옥할 때에 요셉에게 마지막으로 어떤 인사말을 했을까? 요셉의 간청한 대로 기회를 봐서 왕에게 얘기해서 풀려나게 하겠다고 요셉에게 약속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창 40:23은 “그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요셉이 얼마간 감옥생활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15] 그때 그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잃지 않았겠지만, 특히 술 맡은 관원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가 바라던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해주실 것을 얼마나 고대했겠는지 생각해보라.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왕궁에서부터 소식은 오지 않았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일을 깡그리 잊어버린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깊은 배신감에 사로잡혀 상대방을 원망하거나 미워하게 된다.
[16]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직접 경험했거나 아니면 매스컴을 통해 많이 들어왔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지 않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사람은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믿고 신뢰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아주 피곤하고 궁핍해질 수밖에 없다.
[17]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있을 즈음에 그가 모시고 있던 바로왕이 이상한 꿈을 하나 꾸게 된다. 그 꿈이 하도 요상하여 애굽의 모든 점술가와 현인들을 불러 해몽하라 했지만 능히 풀이할 사람이 없었다.
바로 그 때 술 맡은 관원장의 얘기가 나온다. 창 41:9은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라고 기록한다.
[18] 그가 말한 ‘자신의 죄’는 무엇일까? 그가 왕에게 말한 내용은 어떤 것일까?
자신이 옥에 있을 때 억울하게 갇힌 히브리 소년이 하나 있었는데, 자신이 그가 해몽한대로 복직이 되어서 왕을 다시 모시게 되었음에도 그와의 약속을 지금까지 잊어버리고 살아온 죄를 이제야 기억을 하니, 그를 왕궁으로 부르면 왕의 꿈도 능히 해몽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말이 있다.
[19] 감옥에 있을 당시 답답하게 지낼 때의 관원장의 마음과 복직이 되어 왕을 다시 모셨을 때의 마음이 달랐다.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편안하고 높은 직책에 있다 보니 지난날 요셉에게 진 고마움의 빚에 대해서 깡그리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신 이가 누구일까?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20] 그 꿈은 애굽의 모든 점술가와 현인들도 해몽하지 못한 꿈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왕의 조바심으로 인해 꿈 해몽을 못한 모든 이들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바로 그 순간 관원장은 과거 감옥에 있을 때의 요셉을 떠올리게 되었다. 한 마디로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인간은 감사를 잊고 살 때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의 억울함을 잊지 않으신다.
[21] 바로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애굽의 술객들과 현자들로 해몽할 수 없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관원장에게 기억을 되살려주신 이도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오늘 우리의 소망은 바로 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음을 기억하자. 그분이 존재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소망이 없다. 슬픔과 고통과 절망의 깊은 늪에서 우리를 구원할 자 여호와 외에 누가 있단 말인가? 아무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요새시요 피난처와 도움이심을 기억하고 오늘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힘차게 살아가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