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사과를 씻으며 생각한 것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도를 닦다가
정말로 공중에 떴다는 사람 이야기, 바다를 갈라 그 사이를 걸어갔다는 이야기, 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이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아침마다 사과 한 알을 들고 출근합니다. 몸에 좋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의식적으로 챙겨먹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뭐라도 하고 싶을 만큼 힘든
시기라는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피부미용은 물론 몸 속의 염분을 배출해주고 고혈압 예방과 치료를, 장을 깨끗이 하고 위액분비를 활발하게 하여 소화를 돕는데다가 불면증은 물론 빈혈과 두통에까지 효과가 있다는
사과를 먹으며 저는 이곳 회사를, 사회를 버텨나가고 있습니다.
사과농사에는 기온차가 큰 게 좋다지요? 제 일상도 뜨거웠다 차가웠다를
반복합니다. 눈물이 날만큼 행복한 날이 있는가 하면 도망치고 싶을 만큼 괴로운 날도 있었죠. 극심한 기온 차를 이겨내며 단맛을 품게 된 영천의 사과를 먹으며 저 역시 삶의 기온차를 이겨냅니다.
그 중에 어떤 것들은 할머니가 길러내신 사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리수거를
할 때, 경북 영천이라고 쓰여진 사과 박스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으니까요. 일조량이 풍부한 그곳 영천 땅에서 할머니는 사과를 길러내고, 사과가
자식들을 길러내고, 자식들이 자라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여행 보내드리게 된 것이죠. 다녀올게, 라고 손을 흔들었겠죠.
여권 챙겼지? 환전은 했지? 혈압약 챙겼지? 라는 말들을 하시면서 집을 나서셨을까요? 가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푹 쉬다 오시라는 말을 들었겠죠. 정말 그렇게만 됐어야 하는 일인데.
런던에 가고 싶어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왜 많은 땅 중에 그곳이었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저도 영국에서 5년을 살았습니다. 그곳이 가진 정취를 참 좋아했습니다. 런던의 오래된 건물들이 주는
고매한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트라팔가 스퀘어에 앉아 비둘기를 바라보는 일이나 누구에게나 공짜로 열려
있는 내셔널갤러리, 어딘가 세련되어 보이는 홀본스트리트의 젊은이들, 시내를
누비는 빨간 이층버스와 아기자기한 지하철, 근위병의 멋스러운 옷차림까지 모두 그곳을 좋아하는 이유였습니다. 여행 사이트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 1위로 곧잘 꼽히는 이곳에
가보고 싶으셨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누워 계신 모습을 보고 며칠 동안 할머니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아는 사람이 사고를 당한 기분이어서요, 충격이 컸던지 그곳을 영천으로 착각하고 계시다는 이야기가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요. 영천 사과와 런던에 대한 기억이 저로 하여금 할머니에게 어떤 유대를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없이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는데 저는 한번도 겪지 못했습니다. 테러라니, 테러라니요! 웨스트민스터 다리는 런던을 찾은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들렸을 법한 곳입니다. 할머니가 의사당을 배경으로 힘찬 포즈로 사진을 찍었던 그 장소에서 찍은 사진에
제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진첩에 그와 비슷한 사진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테러에 휘말린 사람은 없겠지요. 테러범은 왜 하필 그 시간에
그곳으로 돌진 했을까요. 이유가 뭐였든 미리 계획된 시간과 장소일 겁니다. 아마 할머니가 여행계획을 세우시기 전부터 계획된 테러일지도 모르고요. 당연히
그걸 미리 알 방도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걸 미리 알지 못했다는 점이 아마 따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들은 대개는 그렇게 애초에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일들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 무기력감이 죄책감이 되어 가슴에 구멍을 냅니다.
기억상실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영천의 바람과 과수원의 향기는 기억이 나십니까? 인천을 출발하셨던
순간은요? 히드로 공항에서 내려서 맡으셨을 이국 땅의 냄새는요? 잘
다녀오라던 따님의 인사는요? 그런 것들만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쿵! 하고 부딪히던 순간, 비명 소리, 사이렌 소리, 총 소리 같은 것들은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셨으면 합니다만, 저녁마다 소리를 지르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이처럼 떼를 쓰시기도 한다고요. 어쩌면 할머니는 울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가 어디냐고, 왜 내가 여기에 이러고 있냐고, 답답해서, 무서워서 아이처럼 울고 계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이란 놈은 왜 이렇게 재빠릅니까? 닿을라치면 어느 샌가 저만치
멀어져 있습니다. 행복이란 놈은 어쩌면 벌써 트랙을 빠져나가 그늘 아래에서 음료수를 마시면서 쉬고 있는
게 아닐까요? 트랙 위에 남겨진 것은 어쩌면, 우리뿐만이
아닐까요? 순진하게도 묵묵히 뛰다 보면 행복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천진한 생각에 사로잡혀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테러범은 경찰이 쏜 총을 맞고 숨졌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원망해야 합니까? 명석하지 않은 머리로는 누구를 탓해야 할지,
어디에다가 하소연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 앉아서 울기만 합니다. 더 이상 뛸 힘이 없습니다.
치료비도 문제입니다. 영국 정부도 보험회사도 한국의 외교부도 뜨뜻미지근합니다. 어물쩍거리는 태도에 몹시 화가 납니다. 뜨거울 때도 차가울 때도
확실한 입장을 보였던 영천의 낮과 밤이 그립습니다. 이렇게 미적지근한 태도에 지쳐가고 있을 모두에게
조그맣게 힘을 보태기 위해 어제는 월급을 받자마자 후원계좌를 찾았습니다. 이것밖에 해드릴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밤마다 소리를 지르게 하는 무서움에서 벗어나게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저 울고 있을 뿐이라 미안합니다, 할머니.
이 이야기가 삶은 환멸일 뿐이다, 라는 결론으로 치닫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소식을 안타까워하고 가슴 아파하고 힘이 되고 싶어 합니다. 영천의 사과 맛을 아는 사람들, 일흔을 앞둔 부모가 있는 사람들, 런던 여행을 해본 사람들, 가족이 아픈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지금이 아픕니다. 그
마음들이 모여서 기적을 이룰지도 모릅니다. 바다도 가른다는데, 공중부양도
한다는데, 맹인도 눈을 뜬다던데요. 해외 여행 중에 무차별
테러에 휩쓸려 머리를 다친 70대 환자가 뇌수술을 마치고 벌떡 일어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하여 보란 듯이 춤을 추듯이 걷고, 요란하게 웃고, 복스럽게 먹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아침 사과를 씻으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2017. 4. 26 중앙일보 J Plus
http://news.joins.com/article/21514455
첫댓글 박춘애 할머니의 쾌유를 빕니다.
테러 없는 세상, 테러의 원인을 제공하는 국가나 집단이 없는 세상... 물론 불가능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