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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이 남자가 사는 법
속초의 백양(白羊) 김순필(金淳弼)동문
<10년만의 해후>
간다 간다 하면서 몇 번을 벼르다가 우리부부는 계절의 여왕 5월말 화창한 날 속초로 향한다.
태평양 너머 시아틀 J동문 집에서의 전화 목소린 들었지만 귀환했단 소식을 듣고 한번 가려던 참이었다.
내부 순환도로 타고 북부순환도로 접어드니 벌써 구리 쪽 이다. 한강물을 옆에 끼고 시원스레 달린다.
팔당에서의 추억을 더듬으며 두물머리 양수를 지나니 남한강을 멀리하고 이젠 북한강변이다. 일상이 답답할 때 일 년에 몇 번 다니는 도로다. 옛 경춘가도 같은 로맨틱에, 다이내믹함을 겸비한 한 길이다
양평을 지나 동 홍천을 들어서니 강원도의 힘을 느끼는 산수가 펼쳐진다. 6번도로를 거쳐 44번가는 길은 고속화 되어 있어 옛 길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자동차의 접근성은 좋아졌다. 옛 3.8선을 돌파 만해 마을을 지나치며 산세는 우람하게 바뀐다.
“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어떻게 하나”라고 했던 오지는 서울 강동에서 2시간 내의 거리로 좁혀졌다.
설악 쪽에 갈 때 마다 동행이 있어 오붓한 자리를 빼앗길 게 뻔해서 연락을 하지 못했다.
연말연시에 몇 번 통화는 했으나 내년이 고희인 이 친구가 어떻게 나처럼 늙어 갈까, 부인은 어떨까? 모두가 궁금했다.
2박3일 중 도착 다음날 점심, 저녁을 같이하기로 예정을 했으나 56번 미시령 길을 내려올 때 오늘 당장, 아니 지금 숙소로 갈 테니 기다리라는 전화가 온다.
깔끔하게 차려 입은 그의 모습은 멋쟁이 실버 젠틀맨 모습이었다.
우리 두 부부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 우선 수천 년 묵묵히 솟아있는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는다.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있는 큰 바위처럼 그들도 순식간에 옛날 모습으로 다가왔다.
부인 Y는 해맑은 음성으로 어제 헤어지고 오늘 만난 사람처럼 벌써 내 아내와 지난 얘기를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의 안전하면서 여유 있게 하는 운전 솜씨는 우릴 편안하게 하였다. 마치 자기가 일 년의 반을 살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서해안 고속도로 에서처럼 한국의 동해안 7번 국도와 설악산 내외 주변 도로를 능숙하게 드라이빙 한다. 물이야 태평양으로 다 연결되어 있지 아니 한가.
<꿈이여 다시 한 번>
첫 날 저녁은 설악산 목우재 입구의 자연 산채 정식 집. 타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진짜 산나물 집이란다. 두부와 된장을 동반한 설악산 일대의 온전한 한국 산나물~ 한 수저 물어 씹으니 향긋한 향이 입안 가득하고~ 숨을 내쉬니 코 끝이 간지럽다.
“유붕이자원방래하니불역낙호”(有鵬自遠方來不亦樂乎)란 말인가. 라고 외치며 산동네 막걸리 잔이 부딪치며 올라가다 꺾어 기운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고 보지 않으면 잊어버린다고 했는데 우리 경복 친구들은 안 봐도 생생한 기억 만은 북악의 기를 받았나 보다.
그 동안 밀린 얘기/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혹은 교차해서/ 뿜듯이 나오는 화제는/ 붉게 물드는 설악을 배경으로 /넘나드는 파도처럼 쉴 사이 없다.
우선 집안 애기, 자녀, 학창시절의 유쾌한 추억 그러다 먼저 간 친구 애기엔 눈물이 핑 돈다.
그러다 고교 시절 단체 미팅 때의 여고 여자들의 근황에는 귀가 번쩍 뜨이기도 한다.
음주에 가무가 빠질 수 야 있나. 숙소 지하의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원래 음악, 가창 교육은 중학교 안병원 선생님, 고교 때는 박판길 선생님에게 잘 받은 우리 경복 건아들이 아닌가. 변성이 아직 안된 중1 합창단 시절 ‘사냥꾼의 합창’이 끝나고도 장익상 선생님의 딴~따라라리란,~~~~~~.따다 단따~따~”의 긴 피아노 후주를 기다린 끝에 인사를 한 기억도 새롭다.
고 2때 S여고 강당에서 Y주최로 고교생 음악 경연대회가 열렸는데 우린 ‘Home on the Range’를 ‘복(福)’자 교표가 있는 교복을 입은 채로 불러 뭍 여학생들의 시선을 모았던 기억이 있다.
순필은 베이스, 내가 멜로디, 고인이 된 K가 테너로 불렀는데 친구들이 응원단으로 몰려와 꽤 으쓱거렸다.
고3 때 우리 이웃J여고 강당 3.1당에서 전국 고교 연극 경연대회에서 오학영 희곡의'꽃과 십자가'에서 처음으로 무대 분장을 하고 광대란 무엇인가~무대 연기자의 떨리는 기쁨과 애환을 처음으로 맛 봤다.
당시 연출은 청년 이순재씨가 대학생 이었었나? 이수정 이란 예명으로 합숙하면서 연기지도 했는데
"왜"라는 외마디 단어를 100번 외치게 하는 무서운 카리스마에 우리는 순종하는 양 들이었다.
그때 순필 등은 주연이었고 난 조연이었다.
세상은 다 돌고 도는 것인지 나중에 방송사에서는 이 선생과 연기자와 연출자 쪽으로 조우 하였고 선거 때에 집안에 상사가 났는데 의원 후보자로 와 문상을 받기도 했다.
우선 옛날 생각에 조용필의 ‘친구여’가 유장하게 시작된다.
그 가사가 주는 필링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옛일 생각이 날 때마다 우리 잃어버린 정 찾아
친구여 꿈속에서 만날까 조용히 눈을 감 네
슬픔도 기쁨도 외로움도 함께 했지
부푼 꿈을 안고 내일을 다짐하던 우리 굳센 약속 어디에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남녀 합창이 되어 그 기분을 만끽한다.
순필은 KBS-TV의 감독출신 기술국장, 나는 MBC-TV의 PD출신으로 예능국장을 역임했으니 선곡과 진행이 어련 하겠냐 만은 선택된 노래 하나하나가 옛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팝송 순서가 되면서 ‘Green Fields' 'One Last Kiss' 'Save the Last Dance for Me'를 부를 땐 거기 얽힌 친구들의 영상을 떠올리면서 불렀다.
소녀시절 ’콜로라도의 달밤‘을 즐겨 부르던 부인은 ’애모‘를 내 처는 ’그리움만 쌓이네‘를 불렀다.
여러 노래 중에서 순필 내외는 조경수의 ‘행복이란’을 공감하였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 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 하리
이별 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가사 내용이 꼭 늘그막에 철 난 남편이 일생 수고한 아내에게 충성 맹서를 하는 양 아님
그 반대로 말썽 부린 아내가 착한 남편에게 고백하는~,
이 노래 역시 다 같이 정감 있게 불렀다. 쫓겨나기 싫은 사람이 더욱 힘차게 불렀나? 하하.
참 대중가요란 이상하게 어떤 거는 자기 신세와 똑같아서 살아가다가 깜짝 놀라기도 하는 묘한 데가 있다.
호텔에서 양식 먹고 집으로 와서 김치찌개로 비위를 달래듯 우린 ‘나그네 설움, 홍도야 울지 마라, 청춘을 돌려 다오, 꿈 이여 다시 한 번, 아빠의 인생, 굳세어라 금순아’등 우리 국산 전통 트롯가요 메들리로 피날레를 장식 하였다.
그런데 목이 컬컬한 벗님네를 어찌 그냥 보내랴. 편의점에서 맥주 캔을 사서 숙소 방에서 뒷 풀이 한다. 밤새도록 정담이 이어 질 것 같지만 내일의 원활한 프로그램진행을 위해 첫날을 마감했다.
<둘째 날 이아기>
이튿날은 점심때부터 시작되었다. 오기 전 우리 부부는 속초 앞 바다를 일주하며 구경하였다.
해안도로를 천천히 가면서 아바이 마을, 갯배를 보며 청초호로 왔다.
아동 사생대회를 하는데 애들이 하나같이 잘 삶은 달걀을 벗겨 놓은 것 같이 깨끗하고 반들거린다.
전엔 서울과 지방의 아이들이 차이가 있어 보였는데 요즘엔 전혀 아니고 오히려 우리 동네 학생보다 더 좋게 보였다.
시간을 맞춰 12시에 콘도로 와보니 10분 있다 도착된다고 연락이다.
핸드폰이 이럴 땐 참 편하다. 군대에서도 급하면 무전통신기 보다 이걸 먼저 쓴다며^^,
어젠 산채로 입맛을 돋우었을 테니 오늘 점심은 진짜 강원도 막국수란다.
우리도 집히는 맛 집이 있었지만 이 쪽이 진짜 토속 원조라고 한다~
옛날 속초 군 비행장 옆에 있는 원조 공항메밀국수 집.
이곳이 바로 강원도 정통 메밀 맛 집 이란다. 평양 옥류관의 냉면도
서울의 우래옥 냉면에 비하면 육수 맛이 송추입구의 평양냉면집 같이
닝닝하다. 이 집 맛도 우리 입맛에 맞는 근처의 실로암 막국수에 비하면
맛이 묵직하며 수수하였다. 메밀묵과 부추무침을 곁들인 촌두부에 이집
옥수수 막걸리로 잔을 부딪치니 이 또한 대낮에 행복의 무릉도원이다.
가이드 역에 충실한 순필은 한잔 만 마시고 우릴 속초시내로 인도 한다.
속초시내도 목하 디자인 작업 중으로 복잡하다.
시내 중앙시장을 지나며 생선의 값도 질도 관광객상대의 항보다 좋다고 귀띔 한다.
차중 시티투어를 끝내고 고성 쪽 7번 국도로 올라간다.
가다 오른쪽 "나포리아"란 간판 하나를 보고 들어가는데
조금 있으니 해안 철조망이 나타난다.
와~ 그 너머에 백사장과 동해바다가 넘실대는 비경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런 곳이 있다니!
어떻게 허가가 났는지는 둘째로 하고 바닷가에 바로 카페라니~
철조망과 백사장 파도가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또 영화에서 보는 별별 조형물을 백화점식으로 다 진열해 놨다.
파도치는 동해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찰칵한다. 뭘 생각하는 포즈일까?
또 가는 VIP 코스가 있단다. "세계 잼보리 대회"가 열렸던 청소년 야영장 조망과 화암사.
<속초에서 살아가기>
속초에 왔으니 설악에 신고 안할 수가 없다.
둘 째 날 마지막 코스 설악산이다.
내 아내가 무릎이 불편하여 경내에 있는 호텔 주차장까지 승차입장이다.
젊게 봐주셔 고맙다고 윤 여사가 보여주니 내 아내는 공짜다. 하하
입이 터진 두 여자를 뒤로하고 우린 설악산의 제일코스 비선대로 향한다.
이 코스는 비선 대를 지나 그 유명한 천불동계곡,양폭,희운각,소청,중청,대청봉을 잇는 코스다.
수년간 매일 아침 차는 입구 못 미쳐 설악파크에 두고
걷는다는 친구의 빠른 걸음걸이를 자연스런 척 따라가느라 숨 가쁘다.
30여분 쯤 걸으니 설악산 소공원과 비선대의 3분의2지점인 "와선 대"다.
들어 누어야 제격인 와선대지만 우린 앉기 좋은 바위에 좌선하고 정담을 나눈다.
하루일정표가 어떤지?/섭생은?/여가는?/주말은?/ 기타 등등~
우선 일찍 일어나 바닷가를 산책한다. 선창을 기웃거리다
싸고 물 좋은 생선을 들고 오는 것은 덤이다.
들어와 간단한 조식을 한 후 설악산으로 트레킹, 여기까진 부부유별이다. 여자들은 아침 잠이 좀 있으니까.
첨엔 주위에 높은 봉우리를 완등 하는 등 열의를 보였다가 요즘엔 걷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점심은 집에 와서 생선과 채소 위주로 밥을 먹는다. 오후엔 여가시간이다. 인터넷 작업,서핑,익히다 만 클라리넷 연주 연습, 여자들 나물 캐러가는 산야에 운전 맨, 배달 맨으로 동행하다 보면 하루 해가 다 간다.
저녁메뉴는 콩물이다. 미국의 자녀들과 소통 후 음악 좀 듣다 국가 기간방송 출신답게 9시 KBS뉴스 보고 잠든다.
좌편향 야당매체에 일침을 날리는 우리 또래의 수구보수파다.
나도 뭐 신기한 게 있나 벤치마킹하러 갔다가~, 세상사람 사는 게 똑같고 그저 무리하지 않고 처한 환경에 평범하게 순리대로 살아야 행복한 삶이라는걸 새삼 느낀다. 그러니 차마 한 달에 생활비는 얼마나? 물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러운건 없는데 오프라인으로 고급문화에 접할 기회가 드물다는 것이다. 언젠가 동해쪽에 오케스트라 공연이 있어서 부부가 가서 귀를 시원하게 씻고 왔다고 한다.
일요일은 교회 나간다. 15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의 성가대장이란다. 대단하다고 하니 뭐 대장이라는 건 수고한다고 가끔 밥사면 된다고 씩 웃는다. 그러나 가끔 부적절한 시국얘기를 꺼내는 목사에게 쓴 소리 직언을 한다니 나 보단 용기가 있다.
교회는 나이가 들어 신앙 생활을 하려던 차에 미국 가기 전 아들이 “우리 식구 모두 다 교회를 나가는데 아버지가 빠지니까 이상하다. 같이 나가 주셨으면 해서~”
이것도 ‘자식 이기는 부모 있나’ 는 아니지만 아들 권유였다.
저녁때 방문한 그의 거실 벽면엔 아무 장식도 없는 조그만한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부부가 속초 조양동의 현지민화 된 건 순전히 그 동네 사람들과 10여 년 전부터 동고동락한 결과다.
서울사람들이 은퇴 후 웰빙 합네 하고 지방 가서 잘 난체 하다가는 그 동네에서 쫓겨나기 십상이란다. 오나가나 소위 왕따를 당하면 집단이고 사회고 못 사는 게 현실 아닌가.
밝은 성격의 부인이 주변의 주민들과 겸손하게 인사 잘하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
그들의 초등학교 아이들을 위해 무료 영어교습으로 봉사하고 있으니 저절로 좋아 질 수밖에~
이 부부를 만나러 강원도에 왔던 지인들의 방문도 심심치 않다. 성수기 주말엔 예약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도 주중에 와야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와선 대에서의 아호(雅號) 이야기>
혹시 별호가 있나? 하니
망서림 없이 ‘백양’이란다.
아니 옛날의 백양 담배 말인가 하니 “음 흰 백(白),양 양(羊)자 일세"
연유와 내력은 이렇다.
옛날 우리 경복선배 J사장이 운영하는 무교동 유명 극장식 식당 ‘월드컵’에서 공연과 관련된
기술적인 일을 자문해 주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분의 지인께서 작명하셨다고 한다.
어느 우연한 자리에서 “김(金)순(淳)필(弼)의 이름 에서 필(弼)자에 일백 백에 활 궁(弓)이 양옆으로 벌려 있으니 당신은 오나가나 과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름을 바꿀 수도 없으니 쏠 수 없는 과녁으로 별호를 지으면 좋겠다.
사냥꾼들도 옛날부터 흰 양은 깨끗한 영물로 쏘지 않는다고 하니 백양(白羊)이 어떻겠소. 하여 탄생 된 거라고 수십 년이 지나서 털어놓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그럴 사 하였다. 머리가 하얗게 희고 큰 눈을 껌벅 거리고 지긋이 쳐다보는 모양이 미상불 백양을 연상시킨다.
우리 콘도 앞에서 석양을 등지고 서있던 백발의 초로신사~ ‘백양'이 딱 이다.
우리 친구들도 이젠 70이 다 되가니 아호를 하나씩 가지면 어떨까. 그 흔하게 회장이나 사장 등 등 사회 계급적인 칭호보다 근사한 이름을 지어 다음 동창 수첩에 병기 하면 멋지겠다고 생각되었다.
중학교 때 친구 K는 조용한 성품대로 호정(湖靜)으로 하고 내게 겨울 생을 고려했는지 헌설(軒雪)로 작명하였는데 발음이 좀 그래서 사용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내가 늘그막에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오르는 동네 거북 산에서 따와 구산(龜山)이나 은구산(恩龜山)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아는 동창들 아호는 광원금(光源金),호문산(好文山), 도하(道河), 정암(丁岩), 혜공(慧供),도덕(道德), 연파(延波), 인산(仁山) 안현(鞍峴)으로 파악되고 있다.
어쩌거나 늙어서 아명처럼 이름을 찍찍 부르는 것 보다야 “백양 한잔 하시게”가 더 순하지 아니한가.
미국 사람들이야 애칭이 다 있어 그걸로 불러주면 친한 사이가 된다지만 한자 문화권인 동양에서는 아호로 부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슬슬 입구 쪽으로 내려오니 두 여자 분은 웬 풀들을 가득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신나게 깔깔거리고 있다.
천연 자연산 설악산 산나물이란다.
우리 집이야 풀인지 나물인지 잘 모르겠지만 다년간에 걸쳐 백양부인은 나물 채집에 달인의 경지에 들어서 있었다.
<백양장(白羊莊)에서의 만찬>
소박한 서민들이 모여 사는 조그마한 아파트가 그의 속초 집이다.
백양장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일반식당에 가지 않고 그가 아침에 장 봐 놓은 좋은 생선이 있단다.
물 좋은 광어를 다듬어서 잘게 썰어 놓지 않고 일식 집처럼 살 토막을 면포에 싸서 김치 냉장고에 보관 잘 숙성을 시켰단다.
활어를 잡자마자 회 쳐 먹으면 생선 회 맛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란 일장 강의도 곁들인다.
칼질을 하는데 긴 외 칼을 능숙하게 다룬다. 웬 생선 회 칼이냐고 물으니 이 또한 횟 칼로 썰지 않으면 모양이 안 난단다.
찌개는 내장 등 서더리는 없고 남은 생선 뼈와 무 고춧가루로 끓이는데~
포인트는 밑에 까는 무를 미리 납작 납작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이다. 맛은 깔끔하고 담백하였다.
이것 뿐 이랴 비닐에서 뭘 꺼내는데 문어다. 넷 이서 먹기 충분한 문어를 삶는다.
미리 준비한 대형 접시에 가는 무우 채 썬 걸 깔고 회 칼로 뜬 생선 회를 모양 좋게 전시 해니 고급 일식 집이 부럽잖다.
따로 담아내어 오는 삶은 문어를 보니 침이 꿀꺽한다. 고추냉이(와사비 )분을 직접 간장, 초장과 같이 올리고 신선한 각종 나물에
직접 제조한 쑥 떡, 동네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명란, 가리비 젓갈이 맛깔스럽다.
자기들은 저녁 메뉴가 콩 물 한 사발이라는데 오늘은 우리 때문에 파계한 셈이다.
10년 만에 해후 하는 친구에게 들고 간 선물은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산 적,백 포도주 와인 두병이었는데; 우린 그들의 가양주(家釀酒)를 택하였다. 무슨 산 열매 술 이라는데 좌우간 몸에 좋다고 한다.
숙성된 광어를 한 점 들어 전구에 비추니 생선에 칼 간 자리가 오색이 영롱하다. 졸깃졸깃한 씹는 촉감은 미각을 자극하며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오늘의 쉐프 백양은 흐뭇하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택시를 불러 갈 테니 염려 말고 같이 마시자고 하니 음주운전으로 우릴 데려다 줄 생각에 주저 하고 있던 백양부부가 환히 웃으며 화답한다.
시나브로 분위기는 고조되고 감정의 조응은 우릴 옛날 학창시절로 이끈다. 자식걱정, 손자자랑은 뒷전이다.
어제 들은 조경수의 ‘행복이란’이 맘에 든다며 컴퓨터에서 다운 받아 배우겠단다. 아마 늙어서는 부부밖에 더 있으랴~"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당신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란 가사 내용이 가슴에 와 닿는 모양이다.
애프터로 그의 방에 가서 컴퓨터로 음악을 들었다. 기술 감독 출신이 어련 하겠냐 만은 조그만 스피커의 성능이 여간 좋은 게 아니다.
중학교 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곡한 안병원 선생님 지도로 광화문까지 피리 행진 한 얘기를 유쾌하게 한다.
그 나이에 클라리넷 이라니 그의 폐활량이 부럽다. 또 멋있다. 폼 난다. 늙어서 악기 하나쯤은 하고.............
아코디언을 배우다 그만 둔 일이 은근히 후회된다.
학창시절의 추억과 친구들의 얘기 보따리로 밤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SO LONG>
하직을 하며 아파트 마당에 나가니 콜 택시가 벌써 와 있다.
어미가 친정 나들이한 딸내미한테 하듯 설악산 산나물 등을 한 보따리 실어 준다.
기분에 취해, 추억에 취해 시 경계선(속초시와 고성군)이 넘었다고 할증료를 내라는데도 아깝지가 않았다.
다음 날 우리는 대포항 단골집을 거쳐 한계령 쪽으로 향한다
영동과 영서가 갈라지는 한계령 정상에서 양희은의 ‘한계령’이 읊어진다.
“저 산은/ 네게 우지 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 저 산은 네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 내리네 /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동해 쪽을 향하여 출발 신고 전화를 건다.
“고맙네 또 보세”
“언제 또 올래?”
GOOD-BYE가 아니고 SO LONG'이었다.
아직도 그 의 클라리넷 음률이 들리는 듯 하다.2010. 5 (끝)
PS.백양 김순필은 2021.10.18일 속초에서 별세하였다.
새벽에 걸려온 부인의 긴급전화를 받고 현지 문상하였다.
코로나가 진정되면 만나자고 기다리다가... 빈소에서 3년 만에 해후 하다니 인생 참 허무하다.
#속초 #이창식 #김순필 #은퇴 #설악산 #경복고 #강원도 #꿈이여 다시한번 #언덕위의 집 #한계령 #미시령 #팔당 #두물머리 #콜로라도의달 #행복이란 #클라리넷 #학창시절 #냉면 #7번국도#코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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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운영자)우정과 추억을 재치있는 글솜씨로 엮어서 펼쳐놓으니, 뭉클한 감동과 함께 어느 부분에선 입가에 절로 웃음이 번지는 수준급 여행기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이 글을 자유게시판 보다 <산행/여행이야기> 메뉴로 옮기면 좋겠는데 어떠세요? 그리고 시리즈를 기획하신다면 상의하여 별도의 메뉴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10.07.19 19:17
(이창식)감사합니다.기행문만 아니라 인터뷰 형식도 좋습니다.피상적으로 알던 동문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리는 인물 탐방도 있구요. 진행 중인 아프리카 국제협력사업도 있어서 시간이 좀~ 생각 좀 해보구요. 10.07.21 17:30
(민경조)우리 친구들 참 재주가 많은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숨겨놓았던 글솜씨가 이제 숙성한 간장이 되어 우리 곁으로 달려오니 참으로 감격 그 자체입니다. 멋 있는 풍경을 곁들인 이야기 마치 그 자리에 있는 듯합니다. 솜씨에 다시 한번 놀란 마음에 몇자 적었습니다. 10.07.19 19:59
(이창식)과분한 말씀이오~논어 강좌에 비하면 足脫不及입니다.한자 맞아요? 10.07.21 17:32
(김남규)창식이형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재미있게 글을 잘 쓰시는지 하여간 감동이요. 건강하시길 아울러 빕니다. 10.07.19 22:22
(이창식)에이 뭘, 암튼 도덕형 감사합니다.보내주시는 일용할 양식은 잘 먹고 있습니다. 계속 주시는 거죠? 10.07.21 17:34
(이주래)"은퇴 후" 라니요?
보아 하니, 지금 사시는 것이 진짜배기 같은데. 10.07.20 08:31
(이창식)관심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복중에 보신 잘 하시고 강녕 하시길~ 10.07.21 17:35
(이창식)공통적인소재가 아닌 신변 잡기 같아 서리 망설였는데~얼결에 쓴 졸고에 동문형 들이 관심을 보여줘서 감사합니다.오,탈자도 있고~ 전수철 형의 아호는 전언자의 지적대로 혜공(慧供)으로 바로 잡습니다.각자 확인을 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10.07.20 15:51
龜山 이창식의 여행이야기에 주된 인물로 등장하게되니 우선 쑥스러움을 금할 길 없다. 내 조촐한 삶을 가감없이 관찰한 그의 통찰력, 총기와 재치를 가득담은 그의 필력에 큰 박수를 보낸다. 어쩌다보니 화려한 도시생활을 떠나 이곳 속초와 인연을 맺은지도 어언 10년이다. 泰山이 있고, 大洋이 있고, 아직도 토종 인심이 훈훈하게 숨쉬는 이곳이 내 남은 인생을 더 건강하고,더 즐겁고, 더 보람있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리라 믿는다. 龜山 인형! 좋은 글 읽혀주셔서 감사합니다.
白羊 인형 고맙소.개인사를 공개해서 좀 조심스렀는데 의연하게 자연스럽게 응해 줘서~동문제형들도 다 이해 하시리라 믿습니다.오늘에야 기행문이 완성된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