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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6,8-15
그 무렵
8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
9 그때에 이른바 해방민들과 키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 출신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 몇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10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11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우리는 그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2 또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을 부추기고 나서, 느닷없이 그를 붙잡아 최고 의회로 끌고 갔다.
13 거기에서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이런 말을 하게 하였다.
“이 사람은 끊임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합니다.
14 사실 저희는 그 나자렛 사람 예수가 이곳을 허물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준 관습들을 뜯어고칠 것이라고, 이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15 그러자 최고 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6,22-29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22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24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호수를 건너 가파르나움으로 몰려 온 군중은 대체 무엇을 찾아 온 것일까요?
우리 또한 오늘도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요한 6,25)
그렇다면 대체 '빵'은 무엇이며, '표징'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먹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맛집’을 찾습니다.
맛이 좋은 음식, 혹은 몸에 좋은 음식을 찾습니다.
그렇게 군중들은 이미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빵'은 이와 같이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 곧 육신을 생명을 위해 먹는 것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빵'을 통해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몸’, 곧 성찬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빵’이라는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빵'으로 육신의 배를 채웠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혹 우리가 여전히 육신의 안전과 보장, 편리와 유익만을 바라고 참 생명을 주시는 ‘말씀’과 당신 목숨을 건네시는 ‘예수님’께 목숨 걸고 있지 않다면, 바로 우리가 그러한 군중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요한 6,27)
그렇습니다.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바로 그 양식을 지닌 '우리 주님'으로부터 우리는 그것을 얻습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βροσισ)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군중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요한 6,28)
여기에서 군중들은 '하느님의 일들'(εργα)은 복수로 자신들을 주어로 제시하지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하느님의 일'(εργον)은 단수로 하느님이 주어로 제시되고 있으며, 그분이 하는 일을 우리들이 믿는 일로 제시됩니다.
결국 그분이 하는 일에 전폭적으로 의탁하고 신뢰하는 일인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일에 '하느님의 백성이 참여함을 의미합니다.'(교리서 1069항)
그것은 다름 아닌, 그분이 일하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일’(εργα)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양식’은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고 ‘실행’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식을 소화시키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진정 이것이야말로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는 일’,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결국 우리는 ‘믿음’ 안에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가 되고 실현이 되는 ‘양식’이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께서 저와 함께 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의식 성찰>
“너희가 날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요한 6,26ㄷ-27ㄴ)
표징을 보지 못하고 빵을 보는 사람들에 대해 주님께서 나무라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도 그런 사람이 아닌가 성찰함이 마땅합니다.
나는 빵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인 것처럼, 나는 표징을 보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이 말씀을 내게 하셨음에도 내게 하신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렇다면 진정 나는 표징은 보지 않고 빵만 보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 있듯이 저는 표징을 보는 사람입니다.
요즘 저는 일상에서 작은 기적을 많이 보고, 또 빵에서 표징을 보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도 그러하시겠지만, 매끼 식사 때마다 저는 성호경으로 식사합니다.
그것은 제가 자주 주장하듯 식사(食事)가 성사(聖事) 되게 하는, 더 풀어서 얘기하면 먹는 일을 개처럼 먹지 않고 천사처럼 먹음으로써 거룩한 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주장하게 된 것은 옛날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제가 담배 피던 때 담배를 끊지 못하고 피는 저를 미워했고, 저를 향한 미움의 화살을 다른 형제에게 돌려 연쇄적으로 미워한 적이 있었지요.
어느 날 한 형제를 미워하고 주님 앞에서 성찰했습니다.
담배 때문에 나를 미워하고 형제도 미워하는데 담배를 끊을 것인가? 또 끊을 수 있겠는가?
끊을 수 없다면 담배 피는 일이 미움으로 이어지지는 않게 하자! 아니, 이것을 오히려 성사가 되게 하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이제부터 담배 필 때마다 성호경으로 담배를 피자!
그럼으로써 담배 필 때마다 주님을 만나자!
담배 피는 것이 거룩한 분향 예절이 되게 하자!
이렇게 성호경은 제가 하는 모든 일을 성사화하는 가장 짧은 기도입니다.
관건은 이 성호경을 이런 의식을 가지고 하느냐입니다.
저의 돌아가신 선배 백종순 안젤로 수사님은 식사는 말할 것도 없고, 물 한 잔 마실 때도 벌컥 드시지 않고, 물잔을 앞에 놓고 아주 정성껏 성호경을 하고 드셨습니다.
그래서 물쯤이야 그냥 들이키려던 저희를 움찔하게 만드셨고, 물 한 잔에서 주님을 뵙고 만나는 성사를 거행하게 하셨지요.
이것은 성 프란치스코가 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성사화의 명수입니다.
무엇을 보든 거기서 주님을 뵙고 무엇을 하든 그것을 사랑으로 하는.
그런데 관건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의식입니다.
주님을 뵈려는 의지와 의식이 있느냐!
성사화의 의지와 의지가 있느냐!
이 의식 성찰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표징을 보는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생각하고 성찰하지 않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천상 것에 마음을 두라>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산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밥을 먹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 배고파집니다.
따라서 영원히 배고프지않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마태 4,4)
밥을 먹는 것보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선이라는 의미입니다.
말씀 안에 모든 것이 있기에 항상 말씀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상의 양식도 중요하지만, 천상의 양식이 더 소중한데, 그 천상 양식은 말씀과 더불어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어야 합니다(요 한6,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요한 6,35)
결국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믿음, 곧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동의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이 거부할 수 있으니, 신앙은 하느님의 일인 동시에 인간의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남들이 성경에 관해 많이 알고 통성기도를 잘하는 것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특히 전교에 동분서주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보면서 열성을 부러워하고 말 잘하는 그들을 보며 주눅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을, 신심 서적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 앞에 있는 시간은 많으나 기도하는 시간은 적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거저 얻으려는 마음이 너무 큽니다.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왜 그 말씀을 듣기를 주저하고 실천하기를 두려워합니까?
아마도 그것은 현실적인 득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세의 축복이 풍성하게 주어지면 기도하라 하지 않아도 매달릴 것입니다.
그러나 현세의 축복도 좋지만, 천상의 축복이 더 귀합니다.
영광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고난의 특권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옛말에 “구슬이 서 말 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고 훌륭한 일이라도 끝을 맺어 놓아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풍부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 선한 열매를 맺어 주십니다.
하지만 썩어 없어질 세상 것에는 눈이 번쩍 뜨이면서도 천상의 것인 영원한 생명에는 굼뜬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위안은 다른 위로를 찾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한 것이 헛된 것과, 영신적인 것이 육신적인 것과, 최고의 것과 최저의 것과 혼동되기도 하지만 천상의 것과 지상의 것을 똑같이 맛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 베르나르도)
여러분은 천상 것을 추구하십시오.
지상에 살면서도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우선 마음을 두십시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자주 접하고 미사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영성체로써 신앙의 건강을 잘 지키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이런 사람은 성체를 영해도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합니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습니다.
뻐꾸기 새끼는 다른 새끼들을 밖으로 밀어내 떨어뜨려 죽입니다.
그리고는 어미가 물어오는 양식을 먹습니다.
그렇다고 그 뻐꾸기가 다른 새의 무리에서 살 수 있을까요?
뻐꾸기는 또 자기처럼 하는 새끼를 남의 둥지에 낳게 됩니다.
뻐꾸기 새끼들에게 양식은 자기 어미를 찾는 데 소용되지 않습니다.
그냥 배만 불리는 데 사용됩니다.
그래서 그 양식은 그 무리에 살게 하는 힘은 발휘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빵으로 배가 부른 이들은 예수님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찾으려는 이유는 그분을 ‘세속적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루마니아의 ‘요람’이라는 고아원에서는 아이들에게 질 좋은 음식이 제공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아이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양식을 먹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의도하는 바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양식을 먹을 때는 그 양식을 통해 엄마를 찾기 위함입니다.
엄마를 찾아야 세상에 나아가 살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참 생명입니다.
저도 음식을 통해 어머니를 찾았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제부턴가 어머니가 의심되기 시작하면서 그분이 주시는 음식에 당신 피가 섞여 있는지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단팥빵과 흰 우유를 주셨지만, 그것을 당신이 드시지 않고 주셨음을 알았을 때 조금 더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들이 이뤄지지 않으면 자신이 존귀한 존재임을 믿지 못하게 되어 사회 부적응자가 됩니다.
이것은 생명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그분이 우리 어머니이심을 믿으려는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어머니처럼, 또 하느님이 아버지처럼 믿어질 때 우리는 천국에 가서 살 자존감을 얻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잃게 됩니다.
끊임없이 예수님께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심을 믿으려는 의도가 있어야 조금씩 믿어지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도 자칫 뻐꾸기나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존재처럼 하느님만 먹고 그 효과는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에일리언에서 에일리언 새끼는 사람의 몸 안에 들어가 그 영양분을 먹고 자랍니다.
그러나 결국 그 숙주가 어미가 아니기 때문에 조금 성장하면 그 숙주를 죽여버립니다.
그런 식으로는 결코 인간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 의해 멸종되거나 아니면 따로 살아야 합니다.
성체를 영해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이 이와 같습니다.
만약 아이 대학이나 직장에 취직하게 해 달라거나 집이 팔리거나 남편이 승진하게 해 달라는 목적으로 성체를 영한다면, 그 잘못된 의도 때문에 성체가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올바른 지향으로 성체를 영합시다.
그 의도가 중요한데 그 주시는 분을 믿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어머니로 믿기를 원해야 합니다.
자칫 우리도 성체를 영하면서 어머니를 찾는 게 아니라 숙주를 찾는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아무리 예쁜 꽃도 열흘이 지나면 지고 맙니다>
중국 남송의 시인이 남긴 유명한 표현이 있습니다.
화무십일홍권불십년(花無十日紅權不十年)
아무리 예쁜 꽃도 열흘이 지나면 지고 만다는 것,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손에 쥐었더라도 십 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우리네 인생의 자명한 진리를 잘 표현하는 문구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찰나, 한순간입니다.
외형적으로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한동안 지천으로 피어나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던 꽃들이 겨우 열흘 만에 속절없이 떨어져 내립니다.
대자연 속에 거듭 반복되는 순환의 리듬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겸손의 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속절없이 떨어져내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아, 또 이렇게 세월이 가는구나. 또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이렇게 허무하게 내 인생이 저무는구나, 하고 슬퍼하거나 우울해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시선을?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구나.
이 세상과 더불어 우리네 인생은 이렇게 조금씩 소멸되어 가는구나.
그래서 더욱 필요한 노력은 보다 영속적인 대상, 보다 가치있는 대상, 불멸과 지속 가능한 대상을 찾는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동일한 맥락으로 우리에게 간단하지만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로 건네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조금씩 우리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끌어당기던 그 좋은 것들도 조금씩 색깔이 바래가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더 백방으로 찾고 추구하고 얻기 워해 노력해야 할 불멸의 양식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생명의 빵>
1)
사람들이 예수님을 애타게 찾아다닌 모습에서 그들의 ‘간절함’이 보입니다.
왜, 무엇이 그렇게 간절했을까?
단순하게 말하면,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배고픔의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떠나버렸을 것이고,
남아 있다가 예수님을 찾아다닌 사람들은 배고픔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기적의 빵’을 받아먹은 그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던’(요한 6,12)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 강렬한 체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간절하게 예수님을 찾았을 것입니다.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힘들고 비참한 심정이 됩니다.
그 심정이 어떤지는 직접 겪어 본 사람들은 압니다.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 본 적이 없어서 그 심정을 모르는 자들이 그 간절함을 함부로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자비도 없고 사랑도 없는 태도입니다.
2)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모습은 활동 초기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녔던 모습과 비슷합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 1,35-37)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루카 4,42)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닌 이유는, 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든 이유는, ‘병고’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하게 바랐기 때문입니다(마르 1,32; 루카 4,40).
그 간절함도 무시하거나 비웃을 수 없습니다.
‘병고’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한 고통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웃 고을들에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마르 1,38-39; 루카 4,43-44) 카파르나움을 떠나시긴 했지만 다른 고을에서도 병자들을 많이 고쳐 주셨습니다.
사실 ‘빵의 기적’도 ‘병자들을 고쳐 주신 기적’에 바로 이어져 있는 기적입니다(마태 14,14; 루카 9,11).
3)
‘예수님을 찾다.’ 라는 말에서 ‘겟세마니’에서 있었던 일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요한 18,4-5)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요한 18,7-8)
군인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배가 고파서도 아니었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그리고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찾는 일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왜 찾느냐?’, 즉 찾는 이유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물리치지 않으셨지만, 배불리 먹는 것보다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가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는 “내가 너희를 배불리 먹였기 때문이다.”입니다.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들이 당신을 찾아다니게 만든 원인 제공자도 예수님입니다.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내가 일으킨 기적이 표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라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몸의 배부름’을 위한 빵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빵도 필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 빵과는 차원이 다른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빵의 기적’은 그냥 한 끼 배불리 먹은 식사였고, 그 빵은 ‘썩어 없어질’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빵의 기적’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체험한 일이 되고, 그 빵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향해서 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생명을 찾는 삶 -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아가는 이들>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타우다 지치나이다."
(시편 34,2-3ㄱ)
자주 되뇌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육적 삶이 아니라 영적 삶을, 아래에 속한 삶이 아니라 위에 속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파스카의 부활시기에 걸맞는 삶이겠습니다.
봄철 신록의 아름다움은 파스카의 아름다움을, 신록의 기쁨은 파스카의 기쁨을 상징합니다.
매일 거행되는 아름다운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파스카의 아름답고 기쁜 삶을 살도록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요즘 파스카의 봄철, 수도원 제 집무실문을 설렘반 기대반으로 열 때마다, 한 눈 가득 가슴 가득 안겨 오는 눈부신 신록의 아름다움, 신록의 기쁨이 이처럼 벅찬 감동인데, 천국의 하늘문이 열렸을 때의 아름다움과 기쁨은 얼마나 놀라울지 상상해 보곤 합니다.
요즘 대한민국은 어디나 아름다운 꽃세상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연의 온갖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이 또한 영원한 생명의 하늘나라를, 영적 삶을 살라는 표징들입니다.
아래로부터 위로에로 관심의 방향을 돌리자는 것이며 천상적 아름다운 영적 삶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너무나 세상 것들에, 육적인 욕망에 매몰되어 길을, 빛을, 희망을, 꿈을, 삶의 의미를, 중심을, 자신을 잃고 생각없이, 영혼없이 떠도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제 바티칸 광장에서 삼종기도후 교황님 강론 다음 대목도 우리의 영적 분발을 촉구합니다.
“날마다 우리는 수천의 소식들로 폭격당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피상적이고 무용한 것들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더 나쁘게 그들은 잡담거리가 되고 악의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말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이런 것들을 말하도록 하자.
어떻게 주님이 우리를 감동시키는가 보는 것과 이것을 나누는 것,
강의가 아닌 우리가 주님이 우리 가까이에서 감동시킨 유일했던 순간을 나누는 것,
그리고 우리의 기쁨에 불을 붙이고, 이웃의 눈물을 마르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신뢰와 위로, 힘과 열심, 용서와 부드러움을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자.”
교황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주님 파스카의 사람이 되어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난 이들이요 땅에서 하늘의 별처럼 사는 이들입니다.
아주 오래전 자작시도 이와 일치합니다.
23년 전 파스카의 봄철에 쓴, 자주 인용했습니다만 저에겐 늘 새로운 감동을 주는 ‘민들레꽃’이란 시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뒷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
하늘의 별처럼!”
-2001.4.16.
좌우간 이 시를 쓰고 한달은 영적 기쁨에 행복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게 떠오릅니다.
오늘 지금 여기 땅에서 하늘의 별처럼,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사도행전의 스테파노는 물론 성서와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바로 땅에서 하늘의 별처럼 사셨고, 지금 역시 곳곳의 땅에서 무수한 의인들이 하늘의 별처럼 살아갑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빵의 기적을 보고 당신을 찾아온 이들에게 육신의 빵이 아니라 진짜 영원한 생명의 빵이자 하늘이신 당신을 찾으라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육적인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에로, 아래에 속한 사람에서 위에 속한 사람으로, 땅에 속한 사람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세상의 사람에서 예수님의 사람으로 전환이 참된 회개이자 생명의 길이요 세상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초연한 이탈의 자유를 누리는 길입니다.
이것이 진짜 관상적 삶입니다.
다산 어른의 충고입니다.
"부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이지 인생의 목적 자체는 아니다.
돈은 그저 돈일 뿐이다.
집착하지도 멀어지지도 마라.
재물은 메기와 같아서 단단히 붙잡으려 할수록 미끄럽게 빠져나간다."
얼마나 세상 것들에 노예되어 자유를 잃고 살아가는 작금의 사람들인지요!
책을 보는 사람들은 날로 줄어들고 인류가 지구를 구할 시간이 2년 밖에 남지 않았다고 사이먼 스티엘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총장은 경고합니다.
이어 예수님의 말씀에 놀란 아래에 속한 땅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
참 화두같은 말씀이지만 진리입니다.
믿음은 생명입니다.
무엇을 ‘하느냐’에 앞서 우선적인 것이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로 ‘존재하는’ 일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깊어짐과 더불어 예수님과 하나될수록 충만한 생명에 그가 하는 일 모두가 성화되어 하느님의 일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본보기가 사도행전의 스테파노입니다.
땅 위에서 주님의 별처럼 살아가는 초연한 자유를 누리는,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입니다.
아래로부터 세상 사람들이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지만, 스테파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합니다.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자 이들은 거짓증인들을 내세워 스테파노를 모함합니다만 그의 한결같은 자세는 진리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는 스테파노의 얼굴은 주님과의 깊은 일치를 이룬 그의 자유롭고 순수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믿음의 일치와 더불어 초연한 자유를 누리며,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게 하십니다.
"실로 당신의 궐내라면, 천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들의 장막안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에 있기 소원이니이다."
(시편 84,1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청출어람>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이 있습니다.
파란 빛에서 나온 쪽빛이 더욱 파랗다는 뜻입니다.
기성세대는 다가오는 세대가 ‘잘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하지만, 다가오는 세대는 그들만의 능력과 창의력으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과학, 기술, 산업, 정보의 분야에서 인류는 분명 청출어람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의미도 잘 모르는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생명공학, 양자공학, 로봇 등과 같이 인류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뉴욕의 신문사를 떠난 지 2달이 되었습니다.
팬데믹이라는 터널도 있었고, 구독자의 감소도 있었고,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후임 신부님에게 인수인계를 하면서 미안함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의 기우(杞憂)였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신부님이 새롭게 단장한 홈페이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속도도 빨라졌고, 다양한 콘텐츠를 마련하였습니다.
제가 구축했던 홈페이지가 연탄 보일러였다면, 신부님이 새롭게 단장한 홈페이지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가스보일러 같았습니다.
주교님께서 뉴욕에 더 있고 싶으면 있으라고 하였지만, 제가 떠나온 것이 신문사를 위해서도 저를 위해서도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늘나라의 인사이동 때문에 예수님께서 떠나신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청출어람’을 기대하셨습니다.
비록 나약하고, 두려움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믿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숨어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면서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제자들과 함께 하셨고, 교회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사’를 남겨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빵을 먹으면서, 잔을 마시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기억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고, 그의 설교로 세례를 받은 신자가 3,000명이 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세웠습니다.
선교를 통해서 이방인을 위한 교회를 세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마귀를 쫓아내었고, 병자를 고쳐 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교회는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는데 전념하기 위해서 7명의 부제를 선발하였습니다.
7명의 부제들은 빵을 나누고, 재정을 관리하였습니다.
그런 부제들 중에도 청출어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보았던 ‘스테파노’부제입니다.
스테파노 부제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스테파노 부제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스테파노 부제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스테파노 부제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고인 물이 썩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아집과 ‘내가 다 할 거야!’는 욕망이 만나면 공동체는 분열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공동체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말도 맞는 말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아집과 욕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더 힘들고, 더 어려운 곳을 향해서 기꺼이 떠날 수 있었던 겸손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청출어람’들에게 신념과 열정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제 막 새로운 직무를 시작한다면 청출어람이 될 수 있도록 성령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열정과 헌신을 다 했다면 박수칠 때 떠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2023년 9월 24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삼종기도 훈화를 다음과 같이 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있어 결코 늦은 때란 없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찾으시고 또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이제까지 나름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고 노력도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새벽 묵상 글 쓰는 것도 이제 그만 쓰고 싶었고,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멈춰서 하루 종일 잠자는 게으름도 누리고 싶었습니다.
무엇인가를 하는데 도저히 안 된다는 생각으로 좌절에 빠져 포기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떠올려 보면 포기의 상황 안에서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아니 하느님을 나의 삶에 초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늦은 때가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기에 언제나 적합한 때를 이루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좌절이나 포기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하느님과 적합한 때를 살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아닌 세상만을 보려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그 안에서 사람들이 누리는 물리적인 것만을 바라봅니다.
여기에 집중할수록 하느님을 보기는 더 힘들어지게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만이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함꼐하는 사람만이 최악의 순간 같아 보이는 때에도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포기, 좌절의 마음이 들 때, 무조건 하느님을 찾아야 했습니다.
나를 찾고 또 함께 하자고 부르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찾아온 군중을 향해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군중은 빵의 기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쫓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빵을 더 배불리 먹기만을 바라는 군중의 현실적 욕망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세상만을 바라보고, 물리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주님을 믿는 것으로부터 가능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 믿는 것을 늘 뒤로 미룹니다.
물리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모두 채워진 뒤에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하느님을 나의 삶에 초대하지 않으면서 세상 것에만 집착하면서 살게 되면 좌절과 포기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세상 것들은 만족을 모릅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좌절과 포기의 삶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삶은 자그마한 것에서도 의미를 찾으면서 희망 안에 살게 됩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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