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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8,1ㄴ-8
1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2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
3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4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6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6,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끝까지, 믿을 때까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요한 6,39)
하느님의 뜻은 주님께서 우리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이어 하시는 말씀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하느님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지막이 좋아야 하고, 이런 마지막을 우리가 좋아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아니, 저에게는 이중 감정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좋으나 마지막은 싫은, 천국은 좋으나 이 세상에서 이별은 싫은.
이는 마치 제주도에 가고 싶다면서 집은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 경우 결국 선택해야 하는데 이 선택은 그렇게 어렵지 않지요.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리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이런 선택의 문제가 아닐 뿐더러,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불행이 되겠지요.
왜냐면 그것은 영원한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선택의 기회를 주시고,
마지막까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애쓰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을 말씀하신 다음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다시 살리시겠다는 주님 의지의 표시이고,
이는 최후 만찬 때에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마지막 날이란 마지막까지이고, 끝까지이며, 우리가 믿을 때까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리시겠다는 뜻이고, 그때까지 애쓰시겠다는 뜻이니
그 사랑과 사랑의 의지를 크게 느끼고 감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체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연 구원받게 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서 주님께서 주신 가르침에 순종하면 족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저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의탁하는 믿음의 삶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아! 이 말씀이었구나! 하는 깨우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뜻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은 미래의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지금 그때를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문은 세상에서 이미 열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이미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성체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면 좋겠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그것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적인 자기희생의 삶, 겸손의 삶을 추구하고 이웃을 위해 밥이 되어주고, 영양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편하게 계시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는데 그 어떤 장애물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 가롤로 보르메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날에는 더 이상 참척(慘慽)의 슬픔도 눈물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과거 어르신들께서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의 느낌이 든다고 해서 천붕(天崩)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먼저 앞세우는 것은 참척(慘慽)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슬픔과도 견줄 수 없는 슬픔, 참혹하고 깊은 슬픔을 일컫습니다.
부모는 산에 묻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참척의 고통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가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상처가 아물지 않습니다.
어제는 어여쁜 한 송이 꽃 같던 아이들이 차갑고도 깊은 바닷물 속으로 낙화한 지 십 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 적 이야기를 아직도 하냐, 언제까지 그 이야기 할거냐며 투덜거립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인간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입니다.
혈관 속에 따뜻한 피가 돌아다니는 인간으로서 그런 말을 어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남아있는 부모나 가족은 아직도 참척의 고통과 트라우마에 잠 못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천 번 헤아려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참혹한 고통 앞에서는 섣부른 위로의 말도 조심스럽습니다.
그저 침묵 속에,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 옆을 지켜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속 깊이 자리한 그 혹독한 고통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발산하며 애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기가 막히는 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아이를 앞세우는 큰 슬픔에 힘겨워하는 분들을 위해 오늘 주님께서는 한줄기 위로의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이 세상 어딜 가도 그 슬픔 그 고통 위로가 안되니, 어떻게든 주님 안에, 그분 말씀 안에 위로를 받으시고, 극복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이 혹독한 시절이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 모두 반드시 따뜻한 주님의 품 안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날에는 더 이상 슬픔도 눈물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생명의 빵>
1)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을 보았다면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빵의 기적’이 하느님의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5장에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라는 말씀이 있고(요한 5,36), 뒤의 10장에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0,37-38).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예수님을 증명합니다.
2)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 ‘부르심’은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초대”입니다(요한 3,35-36).
“나에게 올 것이고”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을 믿는 신앙인들을 끝까지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뒤의 10장에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0,15).
예수님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분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가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 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에도 적용해서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3)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당신의 뜻’이 따로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당신의 뜻’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 18,14)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7)
따라서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라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하느님께서 보내셨다.”인데, 당신의 신성과 권한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모든 사람’의 구원이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구원을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게 됩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인데, 유다는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반대쪽으로, 즉 멸망으로 가버렸습니다.
4)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즉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정원 제한’이 없는 나라”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자격 제한’은 있습니다.>
40절의 말씀은 39절의 말씀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충실한 신앙인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영원’은 글자 그대로 영원한 시간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단어를 동원해서 복잡하게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영원’의 반대말은 ‘찰나’, 또는 ‘허무’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뒤의 17장 3절에,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라는 예수님의 설명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다.’ 라는 말은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서, 하느님,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고,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것은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존재에서 영원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고, 죽음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입니다.
뒤의 8장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파스카의 기쁨 - 부활하신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삶>
“온 땅은 춤추며 하느님을 기리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여라.
빛나는 찬미를 주님께 드려라.”
(시편 66,1-2)
계속되는 파스카의 축제, 알렐루야 부활시기입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온갖 파스카의 봄꽃들과 더불어 날로 짙어지는 아름다운 신록입니다.
파스카의 기쁨을 상징하는 신록의 아름다움, 신록의 기쁨입니다.
요즘 부활시기 전례도 계속되는 “알렐루야.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입니다.
부활의 기쁨, 찬미의 기쁨이 없으면 도대체 이 광야인생 무슨 기쁨으로 살아갈수 있을런지요!
예수님 부활 사건이 하느님의 얼마나 큰 선물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선교해야 하는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옛 어른이 가르침도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물이 한 곳에만 모여 있으면 그 물은 썩는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갈 때 물은 생명의 근원이 된다.”
- 다산
“하늘은 한 사람을 부유케 하여 사람들의 가난을 구제케 하였으나, 세상은 제 부유함에 취해 가난한 사람을 능멸한다.
이런 사람들은 천벌을 받는다.”
- 채근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장면이 참 역동적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에 이어 복음은 사마리아에 전파됩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사마리아 및 로마로 판도가 바뀌면서 복음의 불길이 퍼져가는 모습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속담이 그대로 실현되는 모습입니다.
박해와 스테파노의 순교상황시 죽음의 분위기는 생명으로, 어둠은 빛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반전되는 모습들이 그대로 파스카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흡사 강풍에 번지는 복음의 불길같습니다.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며 일곱 부제들 중 스테파노에 이어 두 번째에 속하는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에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맹활약을 펼칩니다.
필리포스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놀라운 기적들의 발생입니다.
정말 신바람 나는 분위기입니다.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얼마나 역동적 분위기인지요!
그대로 필리포스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이런 기적에 큰 기쁨,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똑같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파스카의 봄철에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예전 인용했던 “예수님은 봄이다”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들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1999.3
엊그제 4월15일은 온종일 부드러운 봄비에 촉촉이 젖은 봄의 대지였습니다.
늘 인용해도 기분 좋은 ‘봄비’란 자작시가 생각났습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
-2005.4
19년 전 봄이나 지금의 봄이나 여전히 똑같은 심정입니다.
봄비처럼 메마른 우리를 촉촉이 적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우리의 사랑, 우리의 생명, 우리의 희망, 우리의 기쁨, 우리의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은 어제에 이어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그처럼 다음 대목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아니곤 누가 우리의 궁극의 배고픔을,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을런지요.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해 험난한 광야 여정중 세상 것들에 중독이 되어 폐인이 되기도 하고 괴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리워, 보고파, 배고파, 목말라, 주님의 생명을, 사랑을, 평화를 찾아 끊임없이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마디인지요!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 먼저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고 이어 우리를 예수님께 보내셨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 보냄 받은 “하느님의 선물”이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예수님께 보낸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어 또 당신께 온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약속을 환기시키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목적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예수님의 결연한 자세가 확연히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당신께 오는 이들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릴 것이라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의 단호하고 결연한 자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구원의 선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다음 베네딕도 규칙 말씀도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합니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성규 72,11-12)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이런 구원의 주님을 마음 깊이 모시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살기 시작한 우리들이요 저절로 나오는 다음 주님 향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당신은 저희의 모두이옵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희망, 저희의 기쁨,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찬미요, 감동과 감격이옵니다.
날마다 생명의 빵이신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오늘이옵니다.”
“내 입은 님의 찬미로 가득 차 있고
진종일 당신께 영광을 드리나이다.
주님을 찬미할 때, 내 입술은 방실방실
속량하신 영혼도 너울너울 기쁘리다.”
(시편 71,8.2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성과 은사>
교우 분들과 대화 중에 ‘서울 신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서울 신학교를 나온 신부님들이 인품이 좋고, 사목을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저도 서울 신학교를 나왔기 때문입니다.
군인들 중에도 해병대, 특전사, 공수부대 출신들이 있습니다.
일반 군인들도 나라를 위해서 복무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특수한 부대에서 복무한 군인들은 나름대로 자부심과 명예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동을 하는 전역자들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난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본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 중에서 ‘청년성서공부’를 했다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이 먼 미국까지 와서 열심히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어려움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청년성서공부를 통해서 얻었던 신앙에 대한 확신 때문이라고 합니다.
청년꾸르실료를 체험했다는 분도 보았습니다.
그분도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봉사하는 원동력은 청년꾸르실료에서 신앙의 기쁨을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두 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에 근거한 교리와 신학입니다.
교회는 교리와 신학을 토대로 교계제도를 설립하였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토대로 이단을 구별하였고, 세상의 논리에 대응하였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체계화 시킨 사람은 바오로 사도가 있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확립한 분들을 ‘교부’라고 부릅니다.
‘예로니모,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는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신앙으로 교리와 신학을 정립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에 근거한 영성과 은사입니다.
신앙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이 있습니다.
신앙은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차원도 있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을 초월하는 차원도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카리스마’라고 이야기합니다.
카리스마에는 많은 은사가 있습니다.
예언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심령한 언어를 하는 은사, 심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의 최종 목적은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 말씀 전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안토니오, 베네딕토, 십자가의 성 요한,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데레사와 같은 분들은 영성과 은사를 정립하였습니다.
교리와 신학은 영성과 은사를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영성과 은사가 없는 교리와 신학은 자칫 차갑고, 무미건조할 수 있습니다.
영성과 은사는 활력을 주는 기운과 같습니다.
교리와 신학이 없는 영성과 은사는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악의 세력도 영성과 은사의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리와 신학에서 벗어난 영성과 은사는 때로 이단으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교리와 신학이라는 그릇은 견고한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의 서적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영성과 은사라는 활력은 충만한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는 영적인 기운을 충전할 수 있는 신심단체들이 있습니다.
신심단체와 함께 한다면 신앙생활에 위안을 얻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와 신학 그리고 영성과 은사의 날개가 튼튼한 신앙인은 두려움 없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인가 아니면 세상인가?’>
영화 <아이언 맨>, <셜록 홈즈>, <오펜하이머>를 말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일까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일 것입니다.
솔직히 영화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는 아주 유명한 세계적인 배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때 지독한 마약 중독자였다고 하네요.
“나는 마약의 힘으로 창의력을 높이려는 집안에서 자라났다.”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교도소와 마약치료센터에 반복적으로 드나들었고, 당연히 결혼도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를 ‘갱생 불가’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그는 마약을 완전히 끊었고 아주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끊기 힘들다는 마약을 끊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해 한 기자가 묻자, 그는 버거킹 ‘치즈버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버거킹의 치즈버거를 좋아해서 매장에 가서 주문한 버거를 입에 넣는 순간, 버거의 맛을 하나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 내가 좋아하는 버거 맛도 제대로 못 느낄 지경까지 몸이 망가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때 가지고 있던 마약을 모두 바다에 던져 버리면서 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마약과 버거 중에서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마약을 선택했다면 순간의 쾌락에만 의존했겠지요.
그러나 그가 버거를 선택했기에 건강해질 수 있었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선택의 갈림길에 자주 서게 됩니다.
‘주님인가 아니면 세상인가?’라는 선택입니다.
세상의 것은 분명 순간의 만족을 줍니다.
그러나 주님의 것은 영원한 만족을 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 것을 쫓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순간의 만족만으로 충분하다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선택하라고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선택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마지막 날에 주님을 통해 다시 살려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선택하십니까?
화려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세상 것에 눈길이 더 많이 가고, 한 번이라도 만져 보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욕심과 이기심만을 키워나갑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세상 것에 있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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