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문택의 눈썹이 지독한 통증으로 이리 갔다 저리 갔다를 반복한다. 천상신의는 안 봐
도 뻔하다는 듯, 금문택에게 탕약 한 사발을 건넨다.
“이게... 뭡니까?”
금문택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탕약을 보고 묻는다.
“마취약(痲醉藥)이다. 살을 꿰매야 하니까, 마시고 푹 자거라.”
“... 마취 지속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하루. 정확히 내일 해시(亥時) 쯤 되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천상신의의 말을 듣고 금문택이 마취약을 밀어낸다. 그리고 마취약을 밀어내기 전과
같은 자세로 눕는다.
“마취하지 마시고, 그냥 꿰매 주십시오.”
“마취 안 하고, 그냥 꿰매라고?”
천상신의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묻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금문택을 보니 제대
로 들은 듯하다. 품에서 바늘과 실을 꺼내 실을 매며 재차 묻는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다고 맹세 하거라.”
“맹세하겠습니다.”
간단명료한 대답이다. 천상신의는 실을 다 맸는지 심호흡을 크게 한다. 그리고 바늘을
꽂을 만한 곳을 찾더니, 바늘을 주저 없이 맨살에 밀어 넣는다.
“... 끄윽.”
상처를 지지는 듯한 통증 탓에, 금문택의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하지만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잘 버틴다.
‘참을성 하나는 정말 대단한 녀석이로다. 찢어진 상처를 마취도 안 하고 꿰매는데 비
명을 단 한번도 안 지르다니.’
“몇 바늘이나 남았습니까...?”
“일곱 바늘 정도. 꾹 참거라.”
다시 바늘이 살점을 꿴다.
“으... 윽...”
목구멍 끝까지 올라오는 고통을 참아내는 금문택의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배지장
보다 희게 물들었다가, 새파랗게 질렸다가를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정말 아프군... 크으, 아무리 할 말 덕택에 참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문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다. 이런 고통까지 감수하며 버티고 있는 이유가
말이다.
사문도는 그런 금문택은 마음은 꿈에도 모른 채로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진다. 지금 깨
봐야 전신에 박힌 침 덕택에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겠지만, 금문택은 마음으로 절실
하게 빌고 또 빈다.
사문도가 조금이라도 빨리 일어날 수 있도록 해 주십사 하고 말이다.
결국, 사문도의 몸에 박아뒀던 침을 모두 뽑아낸 다음에 상처를 다 꿰맨 천상신의는
장장 한 시진동안 금문택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는다. 금문택은 차근차근 대답하
며, 이런 천상신의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다.
이야기가 막 끝나고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고 있을 무렵, 사문도의 입에서 걸걸한 신
음이 새어 나온다.
“으... 으음...”
동시에 천상신의와 금문택의 시선이 사문도에게로 쏠린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고, 사문도는 미세하게나마 눈을 뜬다.
‘여긴... 대체 어디지...?’
흐릿하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 덕택에, 사문도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다. 처음보다는
많이 선명한지라, 탁해진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려 어딘지 부터 알아내려고 애쓴다.
“아, 어르신... 금 대협...”
사문도는 촛불 덕택에, 방이 그리 밝지는 않지만 그 두 사람을 알아본다.
몸은 좀 어떻소, 소협?“
“괘... 괜찮습니다, 어르신...”
하지만 천상신의는 사문도가 자신의 질문에 간신히 대답한 것을 보고 혀를 찬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됐습니까...?”
“해시(亥時)를 넘겼소. 반 시진 후면 자시(子時)요.”
“가 봐야 합니다... 가야만 합니다...!!”
사문도가 몸을 일으키려고 몸부림치자, 천상신의가 얼른 달려와 사문도의 머리를 꽉
누른다.
“무리하지 마시오. 지금 소협은 푹 쉬어야만 하오.”
“수하가.. 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할 수는...
”
일어서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문도의 태도에, 천상신의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며
사문도에게 속삭인다.
“무슨 일로 그리 가려고 용을 쓰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사 소협은 내공을 쓸 수 없는
상태요.”
“... 예?!”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된 사문도가 동작을 뚝 멈춘다. 동시에 금문택도 눈을
부릅뜨며 천상신의를 바라본다.
“지금으로써는 내공을 쓸 수가 없소. 하지만 끝까지 말을 잘 들으시오.”
천상신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기다리는 사문도에게 차근차근 설명한다.
“본래 소협은 주화입마(走火入魔)를 일으키고 내공이 페지될 정도까지 몸이 상해 있
었소.”
조용히 경청하는 사문도를 보고 금문택은 서서히 천상신의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허나 정체불명의 무언가로 인해, 소협은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았소. 그리고 내공도
모두 단전에 모여 있소.”
“그 내공을... 영영 사용할 수 없는 겁니까?”
사문도가 조마조마한 얼굴을 하고 희소식을 기다리지만, 곧 전혀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된다.
“사용할 수 있소. 하지만 그건 1년 후의 이야기고, 지금은 경공술 외에는 그 어느 무
공도 쓸 수 없게 됐소.”
“하, 할아버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전...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금문택이 묻는다. 천상신의는 그런 금문택을 힐끗 보고 천천히 입을 연다.
“잘 들으시오, 소협. 이건 소협에게 대단히 중요한 얘기니 말이오.
지금 소협의 내공은 단전 윗부분으로는 전혀 올릴 수가 없소. 그 이유를 지금 말하겠
소이다.”
사문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 어마어마한 양의 내공을 지니고 있을 거요. 얼마나 되오?”
“7갑자(甲子)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문도의 대답에 금문택의 입이 쩍 벌어진다. 천상신의도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7갑자라... 험험, 그랬구려.
지금 소협의 나이에 필요 이상의 내공이 단전에 모여 있소.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 보
유할 수 있는 내공 수치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쳐 있다는 것이오.”
“그 내공이... 제 몸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잉여(剩餘)된 내공에 의해 현재 단전 상부의 단전로(丹田路)라는 단전로는
모조리 막혀있는 셈이오.”
“그리고 막힌 내공이 모두 뚫리는 데... 1년이란 세월이 날아간다는 말씀이겠지요.”
사문도의 허탈한 목소리에 천상신의는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마 이만한 걸 다행으로 생각하시오. 까딱 늦었더라면 아마 내공 전부를 잃었을
것이오.”
“...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
사문도의 감사하다는 말에 천상신의는 고개를 내저으며 사문도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고맙다는 말만 하지 말고, 여기서 사흘은 쉬었다 가 주시오. 그게 노부에겐 고맙다
는 말보다 몇 배는 더 위안이 되니 말이오.”
일순간 사문도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묵묵하게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는다.
“이틀만 머무르다 가게 해 주십시오.”
“사흘은 쉬어야지 상처가 안 벌어질 거요. 만일 무리하다가는, 회복기간이 갑절은 더
걸릴 텐데...”
“상관없습니다. 저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볼 바엔, 차라리 제
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 낫습니다.”
사문도의 진심어린 호소에 천상신의는 아패란 얼굴을 하고 혀를 찬다.
‘부하가 자기 몸보다 소중하다니, 천하에 이런 인물이 몇이나 되겠는가.’
자신이 아무리 막아서도 사문도는 떠날 것이다. 그걸 너무도 쉽게 짐작한 천상신의였
기에, 결국 사문도에게 항복하고 만다.
“딱 이틀이오. 그 전에 떠날 생각일랑은 꿈에도 마시오!!”
천상신의는 그 말만 남기고 뭐가 그리 바쁜지 내원을 빠져나간다. 사문도는 천상신의
가 나가자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다행이다... 천비 네 모습을 하루라도 빨리 볼 수 있게 됐으니, 정말 다행이야...”
현재 사문도의 뇌리에서 이세혁과 주은비, 그리고 강천비와 모용화운의 모습이 차례차
례로 지나간다. 한창 사람들 얼굴을 떠올리던 사문도에게 금문택이 묻는다.
“할아버지만 고맙고, 마지막에 도와준 사람은 고맙지도 않은 거요?”
“아참, 참!!”
사문도가 황급히 상상의 나래를 접고 미안한 얼굴로 금문택에게 사과한다.
“미안하게 됐구려, 금 대협. 그리고... 정말 고맙소. 결정적인 순간에 지원해 주셔서
...”
“됐소이다. 사과하지 마시오... 어차피 며칠 뒤면, 주공(主公)으로 모시게 될 것 같
으니 말이오.”
“!?”
금문택의 말을 들은 사문도의 안색이 급변한다. 그런 사문도를 보고 금문택이 슬며시
미소지으며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읊는다.
“이제야... 이제야 결심이 섰소. 사 소협이 특별한 사람이란 건 이미 확실히 깨달았
소.
소협. 이 양심 없는 놈은 말이오... 이 보잘 것 없는 놈을 받아주겠다는 사 소협을 무
시할 수가 없소.”
“... 금 대협...”
감격에 겨운 사문도의 얼굴을 보고, 금문택은 씩 웃더니 사문도의 오른손을 꼭 쥔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건 후일로 미루겠소. 10년이 걸리든 천년이 걸리든... 소협이 목
표로 한 바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이루어질 때까지는 이 한목숨 바쳐 싸울 생각
이오.”
사문도는, 엄숙한 얼굴로 자신에게 무릎 꿇어 충성을 맹세하는 금문택을 보게 된다.
그런 사문도의 얼굴에서 잔잔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가 일어난다.
침묵의 시간이 이어진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그 침묵이 깨지기 바라는 사람은 없다.
사내들끼리의 정(情)은 국경을 초월한다는 걸, 때로는 침묵이 대화보다 낫다는 걸...
이들은 알기 때문이리라.
아침해가 밝았다. 유난히도 밤잠이 없는 천상신의는, 언제처럼 묘시에 기상해 화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허허, 이젠 늦여름이로고. 해가 조금씩 늦게 뜨는 게 느껴지니...”
“일어나셨습니까?”
금문택의 목소리가 별안간 뒷전에서 흘러나오자 천상신의는 엷게 미소(美笑)짓는다.
“신기한 일이로구나. 네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다니 말이다. 어제 일로 피곤한데다 몸
도 안 좋을 텐데, 편히 시지 그러느냐.”
“..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일찍 일어났습니다.”
첫 번 들러오던 목소리에 이번 목소리가 약간 가라앉은 탓일까? 천상신의의 얼굴에 걸
려있던 엷은 미소가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한다.
“저... 사 소협을 따를 생각입니다. 어제 함께 싸우면서부터 생각했습니다.
어제 보셔서 알고 계시겠지만... 부하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 할아버지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했느냐. 허허...”
천상신의가 뒷짐을 진 채로 태양을 바라보다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려 부복(俯
伏)하고 있는 금문택을 바라본다.
“중원 어딘가에는 네가 있을 터이니, 짬이 나는 대로 찾아올 수 있겠구나.”
“...”
“네가... 내게 검술을 배운 게 어느덧 9년이다. 그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
금문택의 어깨를 짚은 천상신의가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는 듯, 그의 노안(老顔)에 한
가닥의 애소(哀笑)가 피어난다. 금문택은 고개를 수그린 채로 꼼짝도 않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할 거다만... 어딜 가더라도, 몸조심해야 한다.”
“... 예.”
천상신의의 손이 금문택의 어깨에서 스르르 떨어진다. 그리고 그 손으로 금문택의 머
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천상신의가 화원에서 모습을 감추자, 금문택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애달픈
눈초리로 자리에 서서 수없이 중얼거린다. ‘할아버지’란, 뒤죽박죽이 돼버린 감정이
섞인 이름을...
또다시 하루가 흘러서, 어느덧 약속한 이틀이다.
정오 전부터 부산을 떨던 사문도였기에, 이제 출발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허허, 부디 무리하지 마시오, 소협. 1년 뒤엔... 부디 몸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길
빌겠소.”
“예. 감사합니다, 어르신.”
사문도가 포권지례를 하고 돌아선다. 그때 천상신의가 생각난 게 있다는 얼굴을 하고
사문도의 어깨를 붙잡고 말을 잇는다.
“참, 깜빡한 게 있소. 문택이를 데리고 갈 수 있게 된다면 가르쳐 준다고 한 게 있었
잖소?”
“아... 그렇군요. 후후, 저도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금문택을 데리가 간다는 기쁨과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
람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말이다.
“잘 들으시오, 사 소협.
종남산(終南山)의 서쪽 중턱을 샅샅이 뒤져보면, 한 나병촌(癩病村)이 있을 거요. 그
곳에서 사람들에게 ‘화군백(華君伯)이라는 의원이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물으면 아마
모두가 성의껏 가르쳐 줄 거요.”
“종남산 서쪽 나병촌이라... 알겠습니다.”
천상신의는 약간이나마 희열의 기색을 띤 사문도를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한
다.
‘사랑이란 좋은 거란 말이 떠오르는군. 하긴, 사 소협 나이 정도라면... 사랑하기에
도 손색이 없지.’
바로 그때 사문도가 희열의 기색을 지우며 다시 정중히 묻는다.
“화군백이란 분은... 천음절맥을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을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천상신의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한다.
“자세히는 모르겠소. 허나 그 사람이 모른다면, 중원에서 천음절맥의 치유법을 아는
이는 없다고 보면 되오.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높은 의술을 지닌 사람이니...
아마 알고 있으리라 믿소.”
천상신의의 불분명한 답변에 사문도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다. 하지만 불안감을 얘ㅆ
떨쳐버리려 애쓰며, 되도록 좋은 생각만 하려고 애쓴다.
“감사합니다. 만일 알게 된다면, 그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 그저 문택이가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갈 수나 있도록 해 주시오. 녀석은 현재 소
협을 노부 이상으로 신뢰하고 있소. 부디, 문택이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 주시구려!
”
친손자를 걱정하는 듯한 천상신의의 굳은 눈빛은, 사문도에게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
다.
“믿어 주십시오. 기대를 저버리게 된다면, 그땐 이미 저는 제가 아니게 될 테니 말입
니다.”
상문도가 싱긋 웃으며 포권을 하고 돌아선다. 금문택을 부르려고 하는 것이다.
“금 대협, 얘기 끝났소. 마지막으로 회포라도 좀 풀어야 할 것 아니오?”
“...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인사 끝내는데 이제 한 명 남았소!”
얼마 뒤에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금문택이 나타난다. 꾸러미를 묶으며, 잘 다듬어
진 마의를 팔에 걸친 채로 나온 금문택의 모습은 두 사람의 얼굴에 웃음을 자아낸다.
“소협, 이것 좀 받아 주시오.”
“그러리다.”
사문도가 금문택이 건네준 꾸러미를 받고 얼마 후, 금문택은 말없이 천상신의 앞에 선
다.
“...”
잔잔한 침묵으로 서로의 감정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사문도가 실낱같은 미소를 지
은 채로 주시한다.
“절 받으십시오!”
별안간 금문택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한다. 천상신의는 말리지도 않으며 그
런 금문택을 고개 숙여 바라본다.
“짬을 내서, 다음에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지난 9년간 먹여 주시고 재워 주시고..
. 가르쳐 주신 것들...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금문택이 절을 한 이유는 감사의 표시 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어쩌고 보면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자신이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을 눈앞의 노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였을지도 모른다.
“... 변변찮은 녀석.”
천상신의 역시 금문택과 마찬가지로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 감정이 치소는 건
끝내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인지, 천상신의는 절한 채로 소리죽여 오열하는 금문택을 꾹
안아준다.
“인간은 만나면 헤어질 때가 있는 법이다. 사 소협을 섬기면서, 네가 걷고 싶어 하는
길을 걸어 다오. 그리고 가능할지 모르겠다만, 휘경이는 이제 그만 잊거라. 죽은 아
이 그리워해 봐야, 네 가슴만 찢어질 뿐이니까. 다른 사람 만나서, 조선으로 갈 때 적
어도 웃으며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할애비가 바라는 건 그게 다다. 이젠... 그만 가 보거라.”
천상신의가 솟아오르는 눈물을 애써 눌러 참으며 일어선다. 그리고 따라 일어난 금문
택의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준다.
천상신의는 찢어져라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는 금문택의 어깨를 툭 쳐 준다. 그리고
이젠 떠나란 듯, 사문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 갑시다, 금 대협. 이별의 슬픔은 길어봐야 좋을 게 없소.”
사문도의 오른손이 금문택의 오른팔을 잡아끈다. 그제야 금문택은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사문도의 뒤를 따라나선다. 그렇게 돌아서는 금문택의 뒷모습은, 유난히도 무
겁고 애처로워 보인다.
사문도와 금문택이 나란히 걷고 있다. 미끈하게 생긴 소년과 훤칠한 청년이 함께 걷고
있는 모습은, 정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할 정도다.
이제 대문만 넘어서면 천상신의와는 당분간 이별이다. 그걸 알고 있는 금문택이기에
마음이 서글픈 듯, 고개를 숙인 채 대문을 벗어나고 있다.
‘이젠 정말... 이 모든 것과 이별이로구나.’
자신이 인생의 반 가까이를 살아온 곳이다. 그런 곳을, 그나마 즐거운 추억을 지닌 곳
을 떠나야만 한다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리라.
사문도가 천천히 대문을 걸어 나간다. 금문택도 뒤이어 걷다가 마지막 산장의 모습을
새겨 놓으려는 듯, 몸을 젖혀 그 풍경을 잠시 바라본다.
하지만 곧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에 의해 천상신의의 동공이 부풀어 오른다.
“하... 할아버지...?”
천상신의, 그가 봉지 하나를 손에 쥐고 달려오는 것을 본 것이다. 마침 사문도와 금문
택의 모습을 발견한 천상신의가 급히 사문도에게 달려온다.
“사 소협, 잠깐 기다리시오!”
천상신의가 오고 있다는 것이 뜻밖이라설까? 사문도가 의아한 얼굴을 하며 뒤돌아본다
.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어르신?”
대문 앞에 멈춰서 호흡을 고르던 천상신의는 사문도의 손에 가져온 종이봉지를 쥐어준
다. 사문도가 받은 봉지를 열어보니, 청아(淸雅)한 빛을 띤 환약(丸藥) 네 개와 종이
쪽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어르신... 이 환약은...”
“꼭 무공을 써야 할 상황이 오면... 이걸 먹으시오.”
“... 예!?”
‘무공’이란 단어에 사문도의 안색이 급변한다. 벅차오르는 희열을 억누르며, 사문도
는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한다.
“이걸 먹으면... 무공을 쓸 수 있는 겁니까?”
“그렇소. 이거 하나를 먹으면 무공 세 번을 사용할 수 있소이다. 주의할 게 있다면,
하나를 먹고 한 시진은 지나야 다른 하나를 먹어도 부작용이 없다는 거요.
뭐, 자세한 주의사항은 안에 있는 종이에 정리해 뒀으니... 그걸 보고 적당히 사용하
도록 하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1년간 어떻게 지내야 하나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
봉지를 품에 챙기고 사문도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안 그래도 강천비에게 합류한다고
한들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제 그 고민을 덜게 된 사문도에겐 어린아이 같은 새하얀 웃음이 얼굴에서 피어난다.
“... 부디 이 아이가 소협 밑에서 상처받지 않도록 해 주시오.”
“제 주위엔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 걱정은 놓으십시오.”
“... 여하튼 소협만 믿겠소.”
사문도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천진(天津)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금문택도 덩달아
따라가려던 때, 천상신의의 잔잔한 목소리가 금문택의 귓전에 울려 퍼진다.
“언제나 몸조심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네 무운(武運)을 빌어주마.”
“... 할아버지께서도, 언제까지나 몸 건강히 지내실 수 있기를 빌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금문택의 말을 듣고, 천상신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안으로 향한다.
“... 고맙구나.”
금문택은 사라져가는 천상신의의 뒤에 포권을 한 뒤에 지체없이 사문도의 뒤를 따라간
다. 자신이 떠나는데도, 여태까지 눈물 한 방울 안 보인 천상신의가 조금은 야속해서
다.
하지만 덕택에 금문택은 보지 못했다. 노인(老人)의 눈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진심
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영롱한 물줄기를.
선착장 쪽으로 향하던 사문도는, 뒤따라오는 금문택을 보며 궁금한 얼굴로 묻는다.
“문택, 여기 장주에도 무기점(武器店) 정도는 있을 거라 믿소만.”
이젠 대협이란 호칭이 아니라 이름을 부르고 있다. 서로의 약속에 의해서다.
“물론 있습니다. 이 길로 죽 가시다 보면 곧 나올 겁니다.”
금문택도 마찬가지다. 예전보다 높임말을 쓰고 있다.
“... 알겠소.”
사문도가 가볍게 대답하고는 앞을 향해 전진한다. 그러자 금문택은 잠깐 골똘히 생각
에 잠기더니 머리를 긁적이다 사문도를 부른다.
“주공,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궁금한 거라... 말해 보시오.”
“주공께는 현재 부하라고 자칭할 수 있는 사람이 저 말고 몇이나 됩니까?”
잠시 생각하던 사문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름들을 줄줄이 읊는다.
“흠... 한 예닐곱 명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먼저 군사(軍師)를 맡고 계신 천뇌 곽경환, 수라쌍성(修羅雙星)이란 별호를 갖고 계신
태무극과 오태청, 혈귀(血鬼) 뇌명, 질풍귀(疾風鬼) 강천비,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망
빙화(死亡氷花) 모용화운...”
여기까지만 읊고, 사문도는 잠시 말끝을 흐린다. 그러자 눈치 빠른 금문택이 조용히
묻는다.
“그게... 주공을 따르는 사람들의 명단 전붑니까?”
“... 그렇소.”
웬일일까? 대답을 끝낸 사문도의 얼굴은 약간이긴 하지만 슬픈 기색이 곳곳에서 엿보
이고 있다.
‘... 그 명단에, 잠풍무영(暫風無影) 아저씨까지 들어갔다면 좋았을 것을...’
예전엔 부친 다음으로 존경했던 이, 하지만 지금은 자신과 부친을 내버린 배반자 잠풍
무영 태사현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태사현에 대한 증오심은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스스로가 태사현을 증
오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자신의 마음을 기만(欺瞞)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태사현 아저씨, 난 당신을 무척이나 존경했습니다. 그러는데도... 과거의 악연(惡緣
) 덕택에... 서로가 칼을 겨누고 싸워야만 하는 사실이... 정말 안타까워요.’
사문도는 서서히 얼굴의 슬픈 기색을 지운다. 그리고 금문택이 보이지 않을 만한 위치
에서 주먹을 으스러져라 꽉 움켜쥔다.
‘저를 배반하셨다면 차라리 용서라도 해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건, 저를 배반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저씨를 믿고 계시던 부모님과 지금 저를 따르고 있는 다른 분들이
상처받으셨다는 겁니다.
원망스럽습니다. 아저씨와 함께 꿈을 실행시킬 수 없는 현실을... 제 손으로 아저씨를
베어야만 하는 현실을!!’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읊으며, 사문도는 길을 따라 걷는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이전
에 있어야 하는 건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란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첫 발걸음은, 한성도에게 의뢰한 검이 완성되기 전까지 사용할 검을 팔고
있는 무기점이다.
‘모두들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이 사문도가 홍무극을 처치하고 그리로 가고 있는 중
이니 말입니다.’
엿새 전 하선(下船)하기 전 자신의 뺨을 치던 주은비의 모습을 떠올리며, 사문도는 걸
음을 조금 빨리 한다. 그러자 금문택은 자연적으로 그에 발맞춰서 사문도의 뒤를 따라
간다. 마치, 사문도의 그림자가 되려는 듯 말이다.
[귀거래혜] 22.공격(攻擊)
이야기는 사문도가 하선할 때로 되돌아간다.
사문도가 하선하고, 강천비는 사문도가 내줬던 수라구류도 초식을 익히고 있는 중이다
.
선미(船尾) 쪽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맹훈련하고 있는 강천비를, 주은비와 모용
화운이 훈훈한 미소를 담은 얼굴을 하고 바라본다.
“강 소협은... 언제나 저렇게 열심이군요.”
주은비가 감탄한 얼굴로 탄성을 터트리며 말문을 연다. 그러자 모용화운은 그런 주은
비를 흘낏 바라보고는 첫 번보다 짙은 미소를 지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저 녀석, 이미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어요. 처음엔 저런 예리한 기운 따위는 느껴지
지도 않았거든요.
이제부터는 얼마나 더 성장할까가 관건이 됐단 말예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나가고
있잖아요.”
“... 그래요.”
모용화운의 말을 묵묵히 듣던 주은비가 강천비에게서 잠시 시선을 돌려 유유히 흐르는
대은하의 푸른 향연을 만끽한다. 그때, 강천비의 일갈이 선미에 울려 퍼진다.
“수라구류도!!”
한줄기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친다 싶더니, 강천비의 도 끝에서부터 한 마리 아수라(阿
修羅)가 나타난 날갯짓을 해대며 날아간다.
전신 핏빛을 한 멋들어진 아수라의 형상에, 주은비와 모용화운은 잠시긴 하지만 넋을
놓은 채로 이 모습을 바라본다.
아수라가 동쪽 숲으로 기세 좋게 날아든다. 콰쾅!!! 하는 폭격음 비슷한 소리와 함께
삽시간에 숲이 부연 먼지로 휩싸인다.
“... 후우.”
도를 집어넣자 철커덕 하는 쇠 마찰음이 일어난다. 그제야 주은비와 모용화운은 정신
을 챙기고 강천비를 바라본다.
“처, 천비야. 그건 못 보던 도식(刀式)인데...”
모용화운이 얼떨떨한 얼굴로 묻는다. 그러자 강천비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
다가 묻는다.
“못 본 도식이라고요? 알게 모르게 수련해서 그런 건가?”
곁으로 다가온 강천비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호흡 또한 불규칙적이다. 그만
큼이나 혼을 빼놓는 집중력을 요하는 기술이라서 그럴 것일까?
“수라구류도라고... 주군께서 익히라고 주신 거예요.”
“위력은 어때? 쓸만한 것 같아?”
이번 질문에 강천비가 숨을 몰아쉬고 동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킨다.
“저, 저건...?!”
“아수라잖아?”
주은비와 모용화운 모두 기겁을 하고 숲을 바라본다. 나무가 뿌리째 뽑혀 아수라의 형
상을 그려내고 있다. 지금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은 생상함에, 두 사람은 질린 듯한
얼굴로 그걸 바라본다.
“며, 몇 성이나 익혔지?”
응답을 재촉하는 모용화운의 질문에도 강천비는 능청을 떨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대답
한다.
“응... 글쎄요. 한 5성 정도 되나?”
‘5성!!’
5성 위력인데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위력을 내뿜은 도식에, 주은비와 모용화운은 등
골이 식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책이 안 선다는 듯, 주은비는 수
라구류도가 날아간 숲을 보며 생각에 빠진다.
‘5성인데 저 정도 위력이라니.... 12성 대성하면 대체 어떻게 된단 말이지...?’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는 얼굴로, 주은비는 궁금한 것을 강천비에게 묻는다.
“강 소협, 그 도식을 완벽하게 쓴 사람이... 있나요?”
그러자 강천비는 당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공주님께서는 무림인이 아니라 잘 모르시겠지만, 최근 20년 내의 무림
사(武林史)에서 도를 쓰는 사람 중 가장 강했던 사람이 바로 이 수라구류도를 썼습니
다.”
“그 사람은 지금 생존해 있나요?”
“... 아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아쉬운 얼굴로 강천비가 고개를 내젓는다. 그러자 이번엔 모용화운이 더는 못 참겠다
는 얼굴을 하며 묻는다.
“그 사람의 이름이 뭐지? 혹시 나도 아는 사람일까?”
그러자 강천비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차근히 그 이름을 불러본다.
“물론이에요, 누님. 지옥도객(地獄刀客) 사무종... 바로, 우리 주군의 부친이시니까
요.”
“사 소협의 부친이... 도(刀)로 중원무림의 1인자였다고요?”
주은비가 놀랐다는 얼굴을 하며 묻는다. 강천비는 그저 묵묵히 입술을 들썩일 뿐이다.
“예. 도 한 자루만으로 무림을 휘젓고 다니신 분입니다. 제가 제일 존경하는 도객(刀
客) 중에 한 분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흐흥, 사무종 대협이 도의 1인자였다니. 도를 쓰는 솜씨가 귀신(鬼神)도 놀랄 지경
이란 일화는 원체 유명해서 알고 있었지만, 설마 1인자였을 줄은 정말 몰랐어.”
모용화운이 팔짱을 낀 채로 중얼거리는 걸 본 강천비는 얼굴을 굳히며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는다.
“전 주군의 선친을 엄청 존경한다고요, 누님. 그렇게 시큰둥하게 반응한다면, 주군이
안 계시더라도 제가 기분이 언짢단 말이고요.
주군의 수하인데다가 주군의 선친 이야기를 하는데, 누님의 태도를 보면 주군께서 뭐
라고 하실까요?”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강천비의 얼굴을 보고 모용화운의 입꼬리에 슬며시 미소가 걸리
더니 미안한 얼굴로 천천히 걸었던 팔짱을 푼다.
“주군의 선친께서 그러셨듯, 저 역시 도객의 1인자가 될 거예요. 이 수라구류도를 12
성으로 연마해서, 지옥도객 사무종 고인(古人)의 고강함을 제 손으로 증명하고 말테니
두고 봐요!”
자신 있게 자신의 꿈을 강조하고 선내로 사라지는 강천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모용화
운의 얼굴이 일순간 멍하게 바뀐다. 주은비는 그저 빙긋 웃으며 수라구류도가 명중한
숲을 바라볼 뿐이다.
“호호홋, 도객 중에서 1인자가 될 거라? 괜찮네, 그거. 주군의 심복이 되려면 아무리
안 돼도 그 정도는 꿈이 커야지!”
한동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모용화운이 조용해진다. 그제야 주은비가 몸을 돌려 모용
화운에게로 다가가 말을 붙인다.
“그럼... 모용 소저의 꿈은 뭐예요?”
“제 꿈요?”
주은비는 반문하는 모용화운을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간단해요. 붕괴된 북해빙궁(北海氷宮)의 재건이죠.”
갑자기 북해빙궁이 거롲되자 주은비는 의외라는 얼굴이다.
“... 좀 뜻밖이군요. 난 북해빙궁의 절기를 이용해 사 소협을 도울 수 있는 거라고
할 줄 알았거든요.”
“아녜요. 그 말도 맞으니까요. 다만 궁극적인 꿈은 북해빙궁 재건이라고 할 수 있겠
죠.”
“그럼 사 소협의 수하로 있는 이유가... 뭐예요?”
그 질문에 모용화운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내막을 털어놓는다.
“중원에 북망산(北邙山)이란 곳이 있죠? 그곳에서 지금의 주군을 만났어요. 당시 난
여진족에게 쫓기던 때였는데, 살해당하기 직전에 주군께서 날 구해주셨죠. 그리고 거
기서 약속을 했어요.”
“무슨 약속요?”
“내가 공자님의 힘이 되어 드릴 테니까, 후일 꿈이라고 생각하는 바가 이뤄진다면 북
해빙궁의 재건에 힘써 달라는 약속을 말예요.”
그제야 주은비는 모용화운이 사문도를 돕고 있는 이유를 알겠다는 얼굴로 탄성을 터트
린다.
2개월 전에 모용화운이 사문도를 돕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부터 궁금했던 것이다
. 그리고 지금, 그 의문이 모두 풀렸으니 주은비의 심정은 얼마나 개운하겠는가?
“주 소저, 소저는 황궁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생각해요?”
선미에 기대 잠잠히 있던 모용화운이 별안간 주은비에게 묻는다.
“음, 글쎄요.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 좋긴 하지만...”
주은비가 여기서 말을 끊고 잠시 뜸을 들인다. 그리고 결심했다는 얼굴로 자신의 생각
한 바들을 솔직히 털어놓는다.
“역시, 황궁 생활에는 자유란 게 없어요. 언제나 묶여 살아야만 하죠. 예법은 까다롭
고 말예요.
아마 지금처럼 이렇게 검을 갖고 돌아다니면 아바마마나 오라버니께서 기겁을 하실 걸
요?”
“새장에 갇힌 새 정도의... 생활이겠군요.”
“맞아요. 그래서 무림인의 삶을 동경해요. 부평초(浮萍草)처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자신의 가치관을 성립해서 살아가는 무림인을 말예요.”
주은비의 말을 경청한 모용화운이 머리를 살짝 숙인다. 그러자 어깨에서 찰랑이던 모
용화운의 긴 머리카락이 앞쪽으로 우르르 쏟아진다.
덕택에 주은비는 모용화운의 얼굴 곳곳에 피어난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재못한 채 발길
을 돌린다. 그러나 주은비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모용화운의 말에 자리에서 얼어붙는
다.
“호호홋, 그 무림인들 사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천비고요?”
이 말이 자신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얼굴은 미미한 분홍색으로 달
아올라버린 주은비는 애써 몸을 돌려 모용화운의 말을 부정하고 나선다.
“트, 틀려요! 수, 수많은 무림인 중에서 왜 하필 강 소협을 지목한거죠?!”
“역시나 그랬군요. 호홋, 하긴... 천비 정도면 사내들 중에서도 꽤나 괜찮은 편이죠.
”
“자, 잠깐만요. 대, 대체 뭘 근거로 제가 강 소협을 좋아한다고 단정을 짓는 거예요?
”
귀밑까지 붉어진 주은비의 모습에 모용화운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한동안 깔깔대다
가 웃음을 그치고 말을 잇는다.
“지금 주 소저의 반응.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천비와 얘기를 나눌 때마다 주 소저는 언
제나 웃고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어요.”
“겨, 겨우 그런 걸로 어떻게 쉽게 단정할 수 있어요?”
대놓고 소리를 질러댄 탓일까? 선내에 있던 황보성이 무슨 일인가 싶어 선미로 모습을
드러낸다.
“무슨 일이옵니까, 공주마마? 뭐 안 좋은 데라도...?”
“아, 아무 일도 아니니까... 황보 대협은 신경 꺼 주시고 들어가세요. 네?”
얼굴을 붉힐 때까지 붉히고 자신에게 애걸하는 듯한 주은비의 태도에, 황보성은 별 희
한한 일 다 보겠다는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시 선내로 사라진다.
“헤... 그럼, 정말 천비에게 관심없다 이거죠?”
모용화운이 흩어진 머리카락을 원래대로 고정하며 묻자 주은비는 당연하다는 투로 대
꾸한다.
“무, 물론이죠!”
“후... 그럼 천비는 이 모용화운이 차지하겠어요. 상관없죠?”
“... 뭐, 뭐예요?!”
주은비가 먹은 충격은 결코 적지가 않다. 안 그래도 본심을 감추느라 힘들 지경인다
느닷없이 모용화운이 당당히 강천비를 가지겠다니?! 그야말로 모용화운이 야속해 미칠
지경이다.
“대, 대체 왜 이렇게도 강 소협에게 집착하는 거예요?”
“흥분하지 마요, 주 소저. 천비에게 관심 없다고 했잖아요?”
“하, 하지만...”
“천비를 사로잡는데 며칠이나 걸릴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호홋!!”
몸을 돌려 바람에 휘날리는 흑발을 손질하는 모용하운의 모습은, 이제 막 아름다움에
대해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주은비 자신이 봐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하물며 사
내 티를 내는 강천비에겐 어떻겠는가?
치맛자락 사이사이로 드러나는 종아리와 허벅지는 인어(人魚)처럼 곧게 뻗어 있으며,
짧은 차림의 의상(衣裳)은 모용화운은 본래의 차가운 외모와 육감적 매력이 잘 어울려
긴장하고 있는 주은비의 혼을 빼놓는다.
‘저런 사람과 강 소협을 놓고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바보짓이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 생각이 주은비의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인다. 얼빠진 얼굴로 단장하고 있는 모용화
운을 보던 주은비는 모용화운이 선미에서 발길을 돌릴 때야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지
른다.
“자, 잠깐만요!!”
주은비의 비명(?)에 모용화운의 발걸음이 뚝 멎는다. 그리고 곧이어 모용화운의 낭랑
한 음성이 바람에 실려 주은비에게로 날아온다.
“무슨 일이에요?”
“제, 제발 부탁이니까요... 강 소협 만큼은... 그냥 놔 줘요...”
주은비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모용화운에게는 반가울 리가 없다.
“어머, 왜요? 난 천비가 좋은걸요. 주 소저가 천비를 좋아하고 있었다면야 모르겠지
만, 그렇지 않고서야 이 여장부(女丈夫) 모용화운이 인간 강천비를 포기할 수는...”
“좋아해요. 강 소협이 좋단 말예요!!
상냥해서 좋고, 언제나 사 소협에게 충성하는 모습이 좋고... 뭣보다도 천진한 그 미
소가 정말 좋단 말예요...”
큰 죄라도 지은 듯 어깨를 축 누그러트리고 고개를 숙이는 주은비에게 모용화운이 다
가가서 손을 내민다.
부끄러움으로 말도 못한 채 손을 꼼지락거리던 주은비는 이런 모용화운의 태도에 천천
히 고래를 들어 바라본다.
“뭐예요, 충분히 용감하면서. 그런 태도로 밀어붙여요. 대체 뭣 때문에 천비한테 말
한마디도 못하며 가슴앓이를 하는 거에요?”
“하, 하지만... 난 모용 소저에 비하면 외모도 별로고, 매력적인 면도 없고...”
그러자 모용화운이 주은비의 손을 쥐어주며 가볍게 미소 짓는다.
“틀려요. 주 소저는 언제나 웃을 수 있고, 또 한 나라의 공주인데다 귀엽기만 한걸요
?
자신에게 기죽지 말고 용기를 가져요. 용기를 갖고 살아가면 희망이 생기고, 그 희망
이 이루어질 때까지 최선을 다 하라고요. 그러면 세상에 안 될 건 없어요.”
“... 그럴까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 주은비에게 모용화운이 고개를 서너 차례 끄덕인다. 그리
고 힘내란 듯 등을 두들겨 주고는 선내로 움직인다.
대은하의 바람은 모용화운의 머리카락을 한껏 희롱하고 지나간다. 주은비는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걸어가는 모용화운에게 소리친다.
“모용 소저, 강 소협에게 말하기 없기에요! 마음먹은 대로 강 소협한테 밀어붙일 거
니까요!!”
그러자 모용화운이 고개를 돌려 웃으며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젓는다.
8월의 강바람은 주은비의 몸을 식혀준다. 하지만 주은비는 작렬하는 태양과 하나라도
된 듯 식을 줄 모르는 온기를 느끼며 가냘픈 손을 다시 한번 움켜쥐고 허공을 바라본
다.
‘고마워요, 모용 소저. 내제되어 있던 자신감을 일깨워 줘서!!’
천천히 움직이는 뭉게구름을 보며 주은비는 다짐한다. 언제고 모용화운 같은 여인이
되겠노라고.
한편, 사문도에게 군선의 권한을 어느 정도 위임받은 이세혁은 촛불에 의지해 자신의
선실에서 책을 읽고 있다. 흐르는 강물 탓에 선실이 간간이 흔들리긴 하지만 책을 읽
는데는 큰 무리가 없는 듯하다.
이세혁이 한 장 남은 책장을 넘긴다.
“... 후우...”
책을 다 읽은 이세혁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부여
잡더니 떨리는 촛불을 향해 섬전(閃電)같은 속도로 검을 휘두른다.
파파팟!!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한차례 선실에 퍼진다. 그리고 촛불 하나가 순간적
으로 세 개로 나눠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촛불이 꺼지지 않게 검으로 가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세혁은 그
행동을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소화해내고 있다.
‘한 나라의 관리로써 부끄럽기 그지없는 현실이로다. 아무리 막무가내였다곤 하나,
이제 열다섯을 넘긴 소년에게 2백이 넘는 자들을 상대해라고 보냈으니...’
몇 시진 전, 자신과 모두들을 멋들어지게 설득하고 홀로 유유히 하선한 사문도를 떠올
리며, 이세혁은 마냥 죄책감을 느끼는 듯하다.
‘저는 대영반 나리 이상으로 이 명이란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나라를 떠받
들고 계신 분을, 이곳에서 보내드릴 순 없단 말입니다!’
금의위 10여 명을 붙여주려던 자신의 의견을 단호히 거절하며 사문도가 남긴 말이다.
‘그 말에 현혹돼 그만 보내주고 말았다. 아무리 납득하려 해도, 지금 그 사실을 도저
히 납득할 수가 없어!’
자신의 무능력함과 안이함에 이세혁이 한탄을 하고 있다. 그 무렵, 갑작스레 들려오는
문고리 당기는 소리에 이세혁은 얼른 문밖에 대고 소리친다.
“누구냐?”
“접니다, 나리.”
황보성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점심시간입니다. 공주마마께오서 함께 진지를 드시고 싶어 하시니, 갑판으로 나와
주십쇼.”
“... 알겠네. 공주마마께 곧 나가겠다고 말해주게.”
“예이.”
문 너머로 발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그 소리가 완전히 끊기고 나서야 이세혁은 벽에
걸려있는 자신의 청삼(靑衫)을 걸치고 갑판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간다.
갑판에 이세혁이 나타나자 금의위 백 명의 시선이 모두 그리로 쏠린다. 그리고 좌우 1
열(列)로 갈라지더니 이세혁이 지나갈 길을 만들어낸다.
“영우니게 겨레(영수님께 경례)!!”
나열되어 있던 풋밤 세 개를 아무도 모르게 씹어 먹던 황보성은 갑작스레 나타난 이세
혁 탓에 미처 다 삼키지도 못한 채로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덕택에 입에서 분출(?)된
파편이 금의위 몇 명의 얼굴을 쓰레기장으로 만든다.
“푸, 푸훗!!”
황보성의 해괴망측한 행동에 금의위 대원들과 사문도 일행들, 주은비가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는다.
하지만 멀리 있던 이세혁은 미처 못 들었는지 천천히 길 사이로 들어온다. 덕택에 황
보성은 갑판이 내려앉을 정도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바보 같은 놈!”
하지만 이세혁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세혁이 황보성의 곁을 지나치기가 무섭
게 매고 있던 검을 뽑아 검집 채로 황보성의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풋, 푸하하핫!!”
“크하핫!!”
금의위 모두가 배꼽을 잡고 바닥을 뒹군다. 그리고 모용화운과 강천비는 눈물을 찔끔
거리며 웃어대고 있다. 그나마 주은비만 재밌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다.
“같이 먹어요, 대영반.”
“... 예, 공주마마.”
갑판 위에 늘어진 탁자, 그리고 그 탁자 위엔 먹음직스런 음식이 탁자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이 늘어져 있따.
신분이 최고인 주은비가 먼저 음식을 들자 다음엔 이세혁이, 다음엔 금의위 모두가 우
르르 달려들어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음식을 입에 가져간다.
모용화운과 강천비 역시 음식을 조금씩 먹으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거리며 웃어대
고 있다.
이세혁은 모두를 한번 훑어보다가 무거운 얼굴로 음식을 께적거린다. 사문도를 걱정하
고 있는 것이다.
그 기색을 눈치 챈 주은비는 종종걸음으로 이세혁에게 다가가 어깨를 톡톡 친다. 그러
자 흠칫 놀란 이세혁이 정신을 차리고 뒤돌아본다. 주은비가 눈을 굴리며 자신을 바라
보고 있다.
“대영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별 일 아니옵니다, 공주마마. 심려치 마시옵소서.”
하지만 이세혁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지워질 줄을 모르고 있다. 덕택에 주은비는
애써 미소를 짓고 이세혁을 위로한다.
“사 소협을... 걱정하시는 거죠?”
주은비의 질문이 정곡을 찌르자 이세혁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색이 더욱 짙어진다
.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괜히 저까지 걱정되잖아요?”
주은비의 염려 섞인 부탁에 숟가락을 쥐고 있던 이세혁의 손이 부르르 떨려온다.
“... 죄송하옵니다, 공주마마. 허나... 소신의 무능함에 강 소협과 모용 소저의 낯을
볼 수가...”
말끝을 흐리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짓누르는 이세혁에게 주은비는 차마 뭐라고 위로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그저 안쓰러운 얼굴로 위로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고
또 원망할 뿐이다.
다른 금의위 대원들은 이 두 사람의 심각한 분위기는 눈치도 못 챈 듯 즐겁게 떠들어
대며 음식을 위장(胃臟)으로 털어 넣는다. 실로 대조적인 분위기다.
한창 무능력하게 만 느껴지는 자신들을 원망하고 있을 무렵, 두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
온다.
“두 분께서는 왜 아무 것도 안 드시고 이렇게 계신 겁니까?”
강천비와 모용화운이다. 질문을 한 쪽은 당연히 강천비고 말이다.
“일단 먹고 봐요. 저쪽에서는 아귀(餓鬼)들이 음식이란 음식은 몽땅 먹어치우기 전에
말예요.”
금의위 전원을 ‘아귀’라 하다니. 하지만 미안한 구석도 있던 탓에 이세혁이 모용화
운의 당당함에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강 소협, 소협은... 걱정 안 돼요?”
“...?”
주은비의 질문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강천비는 의아한 표정이다.
“... 사 소협 혼자 하선했잖아요. 거기에 대해 아무런 걱정도 안 되는 거예요?”
주은비가 약간 답답하다는 듯한 얼굴로 되묻는다. 바로 측근인 강천비는 걱정하지도
않는 듯하데 자신만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 강천비가 조금은 야속했던 것이다.
“걱정할 필요 있겠습니까. 알아서 잘 하실 겁니다.”
강천비의 무책임한 대꾸에 이세혁과 주은비는 입을 쩌억 벌리고 강천비를 바라본다.
“그,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에요? 명색이 섬기는 사람인데, 정말 걱정이 눈곱만큼도
안 된단 말예요?!”
이젠 아예 꾸짖는 어조다. 하지만 이젠 모용화운까지 강천비를 싸고돈다.
“천비 말 대로에요, 주 소저. 괜한 걱정할 필요 없잖아요? 알아서 처리하고 오실 텐
데요, 뭐.”
주은비는 이들의 절대적 신뢰에 질려벼린 듯하다. 할 말이 없어 갑갑해하고 있을 때,
이세혁의 묵직한 목소리가 강천비의 귀에 떨어진다.
“어떻게... 강 소협은 그 정도로 사 대인을 믿는 거요? 뭘 근거로 그렇게까지 믿을
수 있는 거요?”
“신뢰감을 주는 일만 하시니까 안 그렇겠습니까.”
“대체 어떻게 말이오? 어떻게 강 소협은 사 대인에게 그렇게까지 절대적 신뢰를 보일
수 있는 거요?”
“주군께서 하셨던 일 중에서는 실패한 일이라고는 없습니다. 그 중에는 제가 생각해
도 불가능할 일도 있고 말입니다!”
강천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곧이어 강천비는 호흡을 끊고 자신의 생각을 줄줄이
읊어본다.
“사람은 사람을 믿어야 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믿고 섬기는 사람의 일이라면, 그 일
이 대의(大義)를 위해서 한 일이라면 털끝만치의 의심도 가져하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
다.
저는 주군의 능력을 믿습니다. 주군의 인덕을 믿습니다. 그분은 후일 무림지존(武林至
尊)으로, 신화(神話)로 남으실 분이란 걸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모용화운은 강천비의 뒤에서 주은비를 보다가 빙긋 웃으며 대신 말한다.
“그리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비록 곁에서 주군을 모신지 얼마 안 됐지만, 그분
은 결코 장난으로 호언장담을 하실 분은 아니란 걸 확실히 알고 있거든요.”
주은비는 이 둘의 태도에 얼떨떨한 얼굴을 한다. 하지만 이세혁은 이들의 말에 진한
감동을 받는다.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사람을 저 정도로까지 신뢰할 수 있다는 건 결코 쉬
운 일이 아니다. 금의위를 지휘한 지 어언 5년이 넘은 나도 아직 대원들에게 저 정도
의 신뢰를 받지는 못하고 있는데...’
이세혁이 동창을 이끈 지는 5년, 금의위를 이끈 지는 4년이다. 비록 강천비가 사문도
를 모신 기간보다 짧긴 하지만, 그가 대원들에게 부은 정성과 사랑은 결코 사문도 못
지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충격은 상당히 큰 듯하다.
“주군의 실력을 의심치 마십쇼, 대영반 나리. 1대 3백의 싸움도 쉽게 이기신 주군입
니다.”
어느새 강천비는 저만치 떨어져 음식 앞에서 익살스런 얼굴을 하며 숟가락을 쥔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강천비를 보고 있자니, 주은비는 맥이 탁 풀리는 걸 느끼고 이세
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이세혁을 빤히 바라보며 희마한 미소
를 날린다.
“사람이 사람을 저 정도까지 믿을 수 있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 사 대인을 믿는 것이라면, 능히 불가능할 건 아닐 것이옵니다.
고독랑이란 별호를 갖고 있긴 하지만 결코 그는 고독한 사람이 아니옵니다. 고독랑 사
대인이 자신 만큼이나 수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상, 저 두 사람처럼 사람을 그렇게
까지 신뢰하는 건 힘든 일이 아닐 것이옵니다.”
“... 그럴까요.”
주은비가 시선을 돌려 강천비 쪽을 바라본다. 황보성과 새우 요리 하나로 티격태격하
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입술 사이에서 웃음이 삐져나온다. 뭐, 결국 그 새우요리
는 모용화운의 입에 들어가긴 했지만.
강천비와 모용화운의 말 덕택에 주은비는 더 이상 사문도의 신변에 마음을 두지 않겠
다는 듯,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거운 얼굴로 점심식사를 해결하고 있다. 이를 보고
이세혁 자신도 더 이상은 사문도를 걱정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그때, 자그마한 사건은 시작된다.
콰콰광!!!
별안간 군선 우측에서 굉장한 높이의 물기둥이 치솟는다. 덕택에 한창 점심식사를 하
고 있던 갑판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한다.
“뭐냐, 뭐야?!”
“낸들 어찌 알아!!”
그때, 물줄기가 솟아올랐던 곳의 반대편에서 다시 한번 물거품이 치솟아 오른다. 첫
번처럼 굉장한 폭음과 함께...
‘이 정도의 폭음이라면, 심중팔구는 자모연환포(子母連環砲)의 폭탄(爆彈)이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팔기군의 흉폭한 모습이 이세혁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
세혁의 안색이 급속도로 싸늘하게 식더니, 우왕좌왕하는 금의위 대원들 사이에서 소리
친다.
“전원, 전투 무장을 개시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라!”
쩌렁쩌렁 울리는 이세혁의 음성에 금의위 전윈이 삽시간에 검을 빼들고 두 눈에서 형
형산 살기를 뿜어낸다. 언제 우왕좌왕한 적이라도 있었냐는 듯이.
이세혁은 허공에 물보라가 날리는 순간에도 공기 흐름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읽고 있다
.
‘동쪽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서쪽도 마찬가지.. 남쪽도...?!’
바로 그때, 목의 옷깃을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은 이세혁이 누군가 싶어 신경질적
으로 몸을 홱 뒤로 돌린다. 하지만 그게 결정적 실수였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나, 낚싯줄과 낚싯바늘?!’
물보라가 낚싯줄을 적셔서 서쪽 하늘에서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
더욱 황당한 건 분명 기미가 없었다고 생각했던 서쪽을 향해 낚싯줄이 뻗어있다는 것
이다.
‘서둘러 풀어야만...’
이세혁이 황급히 낚싯바늘을 목에서 떼 내려 애를 쓴다. 하지만 그때 이세혁의 몸이
서쪽으로 붕 떠오른다.
“앗?!”
“여, 영수님?!”
“대영반!!”
대원들과 주은비가 소리를 질러대자, 각자 전투태세로 준비하고 있던 강천비와 모용화
운의 시선이 서쪽하늘로 향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과 같이 경
악하게 된다.
“대, 대영반 나리!”
강천비가 비명을 내지르며 허공을 본다. 이세혁의 신형이 이리 꺾였다 저리 꺾였다를
반복하고 있다. 마치 나뭇가지 꺾이는 것처럼 말이다.
‘여진이다... 틀림없어!!’
당황할 법한 상황이지만, 강천비는 침착하게 모용화운의 어깨를 짚는다. 그러자 평소
답지 않게 떨리고 있는 모용화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서, 서쪽 숲 속이야. 분명 저쪽엔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창백해진 모용화운의 안색 덕택에 강천비는 이번 적이 결코 만만한 상대란 걸 직감적
으로 느끼고 나지막하게 모용화운의 어깨를 다시 흔든다.
“... 왜 그래, 천비야?”
“잘 들어요, 누님.”
그제야 모용화운은 강천비의 얼굴이 굳어있다는 걸 알게 된다. 곧바로 강천비의 딱딱
한 목소리가 굳어있는 모용화운의 귓가를 울린다.
“잘 들어요. 제가 대영반 나리를 구하고 나면, 전속 전진한 뒤에 천진 선착장에서 이
틀만 기다려 달라고 공주님께 전해 주세요!”
“무, 무슨 소리야?!”
“나는 제껴 두고, 곧장 천진으로 떠나라고요! 금방 따라갈 테니까, 염려 붙들어 매
두고요!”
그걸로 끝이다. 강천비가 허공을 한번 보더니 입술을 질끈 깨문다. 그리고 갑판에 도
움닫기를 하더니 공중으로 도약한다.
“야, 강천비! 야, 임마!”
모용화운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리지만, 강천비는 상관하지 않기로 하고 공중에
서 재도약해 올라간다. 이세혁을 구하고, 자신이 그 흉수와 싸우겠다는 일념으로 말이
다.
‘윽, 젠장! 수, 숨이...!!!’
가는 낚싯줄이 목을 칭칭 감아버린 탓에, 이세혁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다. 그나마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발버둥치는 것과 검을 쥔 손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것 뿐이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대명제국의 앞날을 위해... 여진이 침입해 오는 그때까지 인
재를 양성해내기 위해서는... 절대 죽을 수가...’
하지만 이대로라면 30초 내로 황천행이다. 보라색이 이세혁의 노안을 뒤덮고 있다. 산
소결핍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몸이 굳어 이젠 몸부림을 칠 수도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세혁의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근육이 산소를 받아들이지 못해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와버린 듯하
다.
이제는 눈이 뒤집히기 시작할 무렵이다, 이세혁의 갸륵한 정성이 하늘에 닿아서일까?
목에 묶여있던 낚싯줄이 느슨해지는 느낌과 동시에 이세혁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크, 크헉! 헉, 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떨어져가는 이세혁의 뺨에서 불꽃이 튄다.
“윽!?”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세혁이 풀린 눈을 깜빡이다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강천비를
보게 된다.
“... 강 소협...?!”
“긴말 할 시간이 없습니다. 송구하지만, 알아서 착지하시기 바랍니다!”
이세혁의 팔을 놓은 강천비는 맹렬히 서쪽으로 도약한다. 이세혁은 목에 붙어있는 낚
싯줄을 털어내면서도 마냥 공포에 질린 얼굴이다.
‘낚시하는 실력이 보통이 넘는 자다. 교묘하게 옷에 낚싯바늘을 꿰었고, 나도 모르는
새 낚싯줄을 목에 감다니...’
이세혁이 갑판에 착지하기가 무섭게 모두가 그리로 몰려온다. 숨을 못 쉬어서 얼굴이
질려있는 이세혁의 모습은 모두의 걱정을 자아낸다.
“대영반 나리, 괜찮으십니까?”
“아무 이상 없으신 겁니까?”
“그래... 괜찮아. 모두 걱정하지 말게나.”
한동안 헉헉거리던 이세혁이 겨우 숨을 돌리고는 검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고, 공주마마... 강 소협은...?”
그러자 주은비 목소리 대신에, 차갑기만 한 모용화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천비는 영감님을 습격한 녀석을 쫓으러 갔어요.”
“그럼... 서둘러 추격을...”
“천비가 먼저 떠나라고 하더군요.”
원망이 섞인 모용화운의 푸념에 이세혁이 고개를 번쩍 들어올려 모용화운을 노려본다.
그리고 느닷없이 모용화운에게 소리를 지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강 소협 홀로 추적하러 갔단 말이오?”
“... 그래요. 저보고 걱정하지 말고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천진 선착장에서 이틀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곧장 영감님을 구하고 사라졌어요.”
“서둘러 따라가야 하오. 한시라도 지체하지 말고 말이오!”
“떠나야 해요. 천비의 의지를 이렇게 꺾을 셈인가요?”
“의지보다 중요한 건 목숨이오! 게다가 강 소협은 아직 나이도 어린데...”
그러자 모용화운이 이세혁을 째려보며 이세혁의 목에 오른손을 가져간다. 금세 주변을
얼려버릴 듯한 한기(寒氣)가 그 손에서 쏟아져 나온다.
“의지보다 목숨이 중요하다고? 흥, 목숨 같은 건 개나 줘 버리고 그런 말을 하라고요
!
의지에 목숨을 걸고 달려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도리어 구하겠다고 설치는 꼴이라니!
천비를 그렇게까지 모 믿어요?”
갑판 공기를 냉각시키는 모용화운의 한기 덕택에 금의위 대원들을 모두 몸이 굳어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은 이세혁의 목에 있는 모용화운의 손을 보고 있다.
여차하다가는 움직일 듯한 기세다.
“주군이랑 천비가 그러더군요. 영감님은 이 나라가 무너지려는 걸 막고 있는 마지막
기둥이라고. 영감님을 무사히 북경까지 모시고 가고 싶다는 천비의 의지를 못 느끼겠
단 말예요?
제발 정신 차려요. 누구보다 답답한 게 나란 걸 알면서, 왜 내 마음을 못 쥐어 잡아서
안달하는 거예요?”
모용화운의 절규에 가까운 호소에, 이세혁은 할 말이 없다는 얼굴을 하고는 서서히 고
개를 내젓는다.
“멋대로 천비의 운명을 결정짓지 말라고요. 천비는 2개월 전보다 두 배는 더 강해졌
으니까요!”
한기를 뿜어대던 모용화운의 손에서 다시 핏기가 돌기 시작한다. 곧바로 한여름 공기
를 식혀버린 그 ㅅ한기도 갑판에서 자취를 감춘다.
“... 선택할 여지도 없군요. 영감님은 이 나라의 마지막 기둥이라니까, 무조건 살아
야만 한다고요.”
말을 끝낸 모용화운이 곧장 주은비에게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천비를 믿죠? 당당하게 돌아올 녀석이란 걸.”
“... 네.”
“그럼 천진 선착장으로 가는 거예요. 전진 명령을 내려요.”
웃음으로 가득하던 모용화운의 얼굴은 여진에 대한 증오와, 전진하기 싫다는 생각으로
얼룩져 있다. 누구보다 그 기분을 잘 알 수 있는 주은비여서인지, 한동안 서성이다가
눈을 내려 감고 대원들을 향해 소리친다.
“전진시켜요. 천진 선착장으로!”
“예, 공주마마!!”
대원 몇이 소리를 지르며 분주히 움직인다. 얼마 안 지나 군선은 천천히 다시 움직인
다.
주은비가 고개를 돌려 강천비가 사라진 서쪽 숲을 바라본다. 그리고 두 손을 꼭 쥐고
는 그곳을 향해 빌고 또 빌어본다.
‘강 소협, 제발 무사히 돌아와 줘요. 소협에게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은데... 무
사히 돌아와서 내 얘기를 들어 줘요!’
모용화운은 삽시간에 가라앉은 분위기가 맘에 안 든다는 듯 계속해서 싸늘한 얼굴로
머리를 흔든다. 사문도에 이어 강천비까지 하선하게 돼서 기분이 많이 상한 듯하다.
‘여진 놈들, 두 사람 중에서 하나라도 멀쩡하게 못 돌아오기만 해 봐라. 평생을 두고
두고 저주해 줄 테다!’
모용화운은 이를 뿌드득 갈고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움켜쥔다. 그리고 주은비와 마찬가
지로 눈을 질끈 내려감으며 두 사람이 무사히 돌아와 달라고 빌어본다.
한편, 강천비는 낚싯줄을 끊은 도를 움켜쥔 채 맹렬하게 숲길을 달린다.
‘기분 하나 정말 묘하군. 숲길을 달리면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건 난생 처음이야.’
모용화운 말대로 인기척이 전혀 없다. 그래서 현재 강천비는 낚싯줄이 늘어져 있는 길
을 따라 달리고 있는 것이다.
‘도망치거나 하진 말거라. 그럼 내가 쫓아온 이유가 사라지니까!’
흉수를 쓰러트리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달려온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를 위
해.
‘숫자는 몇이라도 상관없지만... 역시, 30 정도면 적당할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얼마간을 더 달리고 보니, 강천비는 넓은 공터가 앞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공터엔 나무가 많이 없어 어두컴컴한 숲길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쉽
게 눈치 챈 것이다.
뭉텅이로 놓인 낚싯줄 덩어리로 봐서, 분명 여기 부근일거라 생각한 강천비는 속도를
올려 그 공터를 향해 신형을 날린다.
마지막 나무를 젖히고 공터로 들어서자, 쏟아지는 햇살과 굴러다니는 낚싯대 하나가
강천비를 반긴다.
“휴... 흉수는...?”
아무도 없다는 허탈함에, 강천비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낚싯대가 놓여진 곳으로
걸어간다.
낚싯대를 집어보지만, 마치 무명의 어부가 고기를 잡을 때나 쓰는 낚싯대와도 틀린 바
가 없다. 대나무로 만든, 정말 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낚싯대로 이세혁을 교살시킬 뻔
하다니 강천비는 한여름 더위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이 평범한 낚싯대로 대영반 나리를 희롱하다니, 제아무리 별안간 당한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섬세하면서도 묵직한 손놀림은 결코 보통 고수가 아니다.’
적어도 자신 이상이다! 강천비는 인정하기 싫은 듯, 낚싯대를 팽개치고는 고개를 홱
내젓는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이미 멀리 떨어진 군선의 모습이 두 눈에 확 들어온다
.
“... 절벽?!”
강천비가 조금 나서서 보니, 깎아놓은 듯한 절벽 위다. 군선에서 봤을 때보다는 확실
히 높다.
‘우웃, 젠장. 정체모를 흉수는 땅으로 꺼졌나, 강 속에 숨었나? 흔적도 없잖아. 쳇!
’
절벽 아래로 침을 탁 뱉은 강천비는, 긴장 탓에 굳은 몸을 빙글빙글 돌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홱 돌아선다.
“!?”
한 사내가 있다. 사문도만치 짙은 흑의를 입고 있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내가 말이
다.
“다, 당신은 누구요?!”
“네가 찾고 있는 사람.”
소름 끼치는 목소리다. 무억양인데다 무미건조한 음성, 게다가 간간이 눈에서 내비치
는 살기와 혼합되어 강천비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전율한다.
‘흔적조차 느끼지 못했어. 만일 이자가 날 죽이려 했더라면... 내가 지금 이렇게 서
있을 수나 있을까?’
강천비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가면서도 눈앞의 사내에게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주군 이래로, 이 정도까지의 투지는... 눈에서 뿜어내는 살기를 내뿜는 자는, 이자
가 처음이다!’
본능이 아우성치고 있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분명히 실력은 이자가 위도 한참은 위
다. 자신보다... 게다가 대영반 이세혁보다!
“내 일을 방해한 작자가 너냐?”
“대영반 나리의 목을 묶고 있던 낚싯줄을 끊은 사람을 묻는 거냐?”
이젠 강천비도 반말 투로 나간다. 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똑똑한 녀석이군. 하나 더 묻겠다. 무슨 이유로
내 일을 방해하고 나선느 것이냐?”
흑의 사내의 질문에, 강천비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노성(怒聲)을 지른다.
“내 나라를 위해서다! 대명제국(大明帝國)의 기둥을 흔들지 말란 말이다!”
일갈을 내지른 강천비가 번개같이 도를 뽑아 흑의 사내에게 달려간다.
“대지양단(大地兩斷)!”
도에서 일어난 기류가 삽시간에 뻗어나간다. 2개월 전 군웅대회에서 쓰던 대지양단보
다 한 차원은 높아진 듯하다.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은 빠르기와 잰 듯한 예리함이 예
전에 비해 한층 더 강해져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10성 공력의 대지양단!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네놈이 물러설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
면...!’
찰나간이긴 하지만 도를 휘두르는 강천비의 뇌리에 이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눈앞에
는 그 사내가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있다. 한번 움직이면 자신이 죽을 수
있는 거린데도 움직이지 않는 흑의사내의 모습에, 강천비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억누르며 도를 휘두른다.
“황천으로나 가라!”
다시 일갈이 터진다. 도가 흑령의 머리를 쪼개려 허공을 가른다. 하지만 이때 사내의
신형이 흐릿하기 물들더니, 도가 머리에 닿는 순간에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춘다.
대지양단이 명중한 바닥엔 금이 쫙 가 있다. 말 그대로 대지를 양단해버린 것이다.
“이런 젠장!”
묵직한 느낌이 없었기에 강천비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신형을 날린다. 염려한 바와 달
리 흑의사내는 반격해오지 않은 채 거리를 둔 채로 여전히 음산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
보고만 있다.
“애송이, 네놈의 근성이 맘에 드는군. 네가 고독랑 사문도란 아이냐?”
사문도를 ‘아이’라 지칭한 흑의사내의 방자함에 강천비는 입술ㅇ르 짓이기며 미친
듯이 달려든다.
“주군을 아이라 깔봤으니, 죽어줘야겠다!”
강천비의 말을 되새기는 흑의사내의 입가에 살기어린 묘한 미소가 걸린다. 곧이어 허
리에 맸던 검을 빼들더니 날아오는 강천비의 도를 막는다.
금속성과 함께 이들의 병기에서 불꽃이 튄다. 그 틈을 탄 흑의 사내가 강천비를 뚫어
져라 노려보다 짤막한 말을 던진다.
“질풍귀 강천비였군. 난 흑령이라 한다. 네놈이 구해준 사람을 척살할 임무를 맡은
사람이기도 하고.”
역시 그였다. 항주에서 홍무극과 붙어 다니던 의문의 사내, 흑령! 말을 마치기가 무섭
게 완력으로 강천비의 도를 밀쳐내더니 쏜살처럼 강천비의 품으로 파고들어 검을 긋는
다.
“어림없다!”
도를 회수하여 검을 막아낸 강천비는 자신이 익힌 절기들의 보따리를 하나둘씩 풀기
시작한다.
“혈천마도(血天魔刀)!”
도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리한 섬광이 흑령에게로 작렬한다. 그러나 흑령은 당황하
지도, 반격하지도 않으며 계속해서 섬광을 피해낸다.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며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한 방도 안 맞다니, 민첩성 하나만큼은 귀신이로군!’
강천비가 착지하고는 쉴 틈도 없이 마지막으로 흑령이 보였던 곳으로 신형을 날린다.
하지만 실컷 자시를 잡고 보니, 공격해야 할 당사자는 거기에 없다.
“젠장!”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우고 느끼려 해봐도 흑령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다못해
방금전까지 솓아내던 살기마저도 사라진 상태다.
신형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만, 역시 흑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 가볍게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에 강천비가 얼른 몸을 돌린다.
“5감(五感)이 정말 둔하군. 네놈 주인도 그 모양이냐?”
비릿한 조소(嘲笑)와 더불어 흑령이 보내준 말장난에 강천비는 울컥하고 올라오는 뭔
가를 느낀다.
“뚫린 입이라고 맘대로 지껄이는군. 찢어 죽여주겠다!”
“네놈이야말로, 무기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다니. 무기가 불쌍하게 보인다.”
흑령의 대꾸에 강천비가 이마룰 찌푸리다 다시 소리친다.
“대체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말 그대로다. 네 녀석이 휘두르는 것은 무기 도(刀)가 아니다. 단산한 쇠몽둥이일
뿐이지.”
“뭐 때문에 그렇게 평가하는 거지?”
“쇠몽둥이는 부딪혀 봐야 손만 버린다. 네 녀석이 휘두르는 도에는 혼(魂)이 없어.”
“혼이... 없다고...?”
한동안 그 말을 중얼거리던 강천비는 어느 순간 마음을 휘어잡으며 속으로 외친다.
‘내가 휘두르는 도에 혼이 없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래도 10여 년간 도와 함
꼐 살아왔는데, 내가 휘두르는 도에... 혼이 없다니!’
흑령의 말을 부정하려는 듯, 자신이 10여 년 동안 세월의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흑
령을 째려보며 흑령에게로 발을 한걸음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