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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행18:5-8]
본문에서는 바울의 동역자들이 고린도 사역에 가세하게 되었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핍박이 거세지면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두고 아덴으로 떠났다(17:14).. 바울은 자신을 인도하던 사람들을 되돌려 보내며 그들에게 속히 아덴으로 오라는 전갈을 보냈다(17:15). 바울이 이들을 아멘에서 만났다는 기록은 사도행전에 없다. 하지만 사도행전 17:15의 전갈을 기록한 것을 보면 그에 따라 이들이 아덴에서 다시 만났을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그렇지만 데살로니가전서(3:1~5)에 따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일이 염려가 되어 디모데를 다시 그곳으로 보냈으며 아마 실라도 같이 갔을 것이다. 이렇게 홀로 남은 상태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왔고 외롭게 노동하면서 고군 분투를 했다(행 18:1~4). 이굴라와 브라스길리를 만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그리워하며 소식을 기다렸다.
드디어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도착했다. 얼마나 좋았을까!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에서 돌아온 이들은 바울에게 저들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살전 3:6)을 전해 주었고 이것이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그 기쁨과 안도를 이렇게 고백한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3:7~8). 바울은 궁핍했다. 그래서 열심히 노동을 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실라와 디모데가 가져온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큰 위로가 되었다.그래서 ‘이제는 살 것 같다’고 말한다. 그동안 죽을 맛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동역자들이 돌이왔고 또한 좋은 소식을 전해 주니 이제는 살맛이 난다는 말이다. 비슷한 표현이 고린도후서 7:13에서도 발견된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바울이 ‘궁핍’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과(살전 3:7)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 뿐아니라 ‘사랑’을 치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살전3::6)실라와 디모데가 그들로부터 전달된 재정적 도움을 가져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재정적 도움은 빌립보서 4:15과 고린도후서 11:8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동역자들과의 재회, 그들이 가져온 마게도냐의 좋은 소식, 그리고 사랑의 선교비 등은 바울로 하여금 힘이 넙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바울은 전력을 다해 과감하게 복음을 전했다(행18:5). 이것을 누가는 “말씀에 붙잡혔다”는 표현으로 사도행전에 기록하고 있다. 말씀이 바울을 아예 포로로 사로집아서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상태를 말한다. 바울은 자비량 선교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으나(고전9:15)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바울은 사역을 위한 선교비를 거절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필요할 때는 그에 의존하여 전적으로 복음전파에 심혈을 기울였다. 외적인 지원만 기대하고 그 지원으로만 기뻐하고 그 지원을 위해 사는 삯꾼 목자는 아니었다. 그는 외부의 지원을 말씀에 사로잡히는데 활용했다.
18.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나이까?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22:1-2]
본문은 저 유명한 이삭 번제 사건,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구약의 갈보리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의 배경이 되는 하나님의 이삭 희생 제사 명령과 그러한 명령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리고 희생 제사를 드릴 모리아 산으로 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인간의 모든 이성적 판단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존함으로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치고자 했던 사실에서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순종의 본을 배우게 됩니다.
구약의 갈보리(the Calvary) 사건으로 불리우는 이삭 회생 제사 사건과 관련된 일련 기사가 세 단락에 걸쳐서 전개된다. 먼저 22:1-8절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것을 명하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브리함이 3일 길을 가서 이삭 회생제사를 시작하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22:9-4절이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희생 제물로 드리려는 찰나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어 아브라함을 제지기킨 대신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두신 숫양으로 아브라함이 제사를 마친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22:15-19절이 제사르,ㄹ 마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부르사 땅과 후손의 언약을 아브라함 생애에 있어서는 최종적으로 재수하였음을 밝힌다.
아브라함 생애 최대의 사건이었던 이삭 회생 제사 사건은 한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또한 역으로는 하나님이 인생에게 요구하시는 믿음과 순종의 절대 경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아브라함은 이를 통하여 구약 이스라엘 민족의 최초의 직계 조상으로서는 물론 만세대의 영원한 믿음의 아버지로서의 지의까지 영구히 얻었다. 실로 아브라함은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 이 하나님께 보여야 할 믿음의 진정한 자세의 산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점은 많은 사람들이 매우잘, 그리고 명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각종 설교나 강해 주석을 통하여서도 거듭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매우 근시안적, 부분적 파악에 불과하다.
물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참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독생자 이삭을 번제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신 표면적 이유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의 정도를 시험하시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담긴 보다 근본적인 하나님의 목적은 이를 통하여 죄인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구속희생의 피가 요구되는 사실을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궁극적으로는 바로 그 구속 희생의 피를 장차 당신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흘리실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 주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조말할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독생자 이삭은 살려 주셨으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는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골고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제물로 희생시키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삭 회생 사건을 이해함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정도를 시험하기 위한 표면적 목적과 아울러 인간의 구원을 위한 구속의 필요성과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 수난을 통한 이의 성취를 보여 주고자 하였던 궁극적 목적까지 동시에 깨달아야 할 것이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 초월자로서 전지 전능하신 분이신 바 당신 자신의 확인 내지 확신만을 위해서하면 새삼스럽게 아브라함의 밎음을 시험할 필요조차 없으셨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을 시험하신 것도 기실은 아브라함 개인 자신과 그의 육적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그의 영적 후손인 만세대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행한 순수 신앙과 절대 순종의 모범을 보여 주기 위한 의미가 더울 컸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허하사 이삭을 번제 베물로 바치도록 하셨고 이미 노경에 이른 아브라함이 실로 말할 수 없는 번민과 의문을 안으로만 한 채 묵묵히 그리고 단호히 이삭을 드리고 하였던 이 위대한 사건의 다양한 의미를 입체적으로 조망하여애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그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 뿐 아니라 젋은 아들 이삭의 믿음과 순종도 깨달아야 한다. 이삭은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의중을 파악한 후에도 노쇠한 아비를 거스리고 빠져나올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이삭은 묵묵히 자신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하나님이요, 자신의 하나님이기도 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마지막까지 순종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믿을을 보인 아브라함 부자의 순종과 인간들 자신보다 인간을 더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우러져 빚어낸 이삭 회생 제사 기록되어 있는 그 모든 구절들이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19. 선지자란/하나님의 비밀을 맡은자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4:1-2]
본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책망하며 조속히 하나될 것을 촉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1:18-4:21의 연속 기사이다. 여기서 교회 지도자들의 직분이 어떠한 것인가를 밝힘으로써 어떤 특징 지도자를 내세우며 파당을 만들어 분열하는 것이 부당함을 역설한 사실을 기록한 제3장에 이어 교회 분열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세상 지혜로 교회지도자들을 판단하는 일을 금한 시실도 기록하고 있다. 교회안에서 성도가 서로를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특히 복음 사역자를 인간적인 조건으로 평가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파당을 짓게 만들고 분열의 위기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복음 사역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꾼”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김으로써 모든 판단은 최고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성도들은 일체의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판단을 배제하도록 교훈한 것이다. 아울러 바울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함으로써(2절) 복음 사역자들은 성도들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무사 안일에 젖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자세를 지녀애 함을 교훈하기도 한다.
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를 포함한 사역자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일꾼이자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모든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종으로 불러 하나님의 비밀을 맡기고 이로써 교회와 성도를 돌보도록 위임한 자라는 것이다. 이렇듯 그리스도께서 종을 불러 주의 일을 위임하시던 모습을 가장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아마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일 것이다. 그곳을 보면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이후 승천하시기 전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내 어린 양 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 라”고 세 번이나 거듭 부탁하셨다(요21:15-17). 이 말씀에 나타난 대표적인 이미지는 당시 제자들에게 가장 익숙해 있을 목자의 이미지이다. 말하자면 목자가 양들을 데리고 다니며 푸른 꼴과 맑은 물로 먹이고 돌보듯이 제자들도 하나님의 양떼인 성도들을 먹이고 돌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먹이우고 마시게 할 푸른 꼴과 맑은 물은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 곧 구원의 진리이다. 즉 목회자는 성도들을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진리로 먹이고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로 성도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세상 여타의 것들과 달리 창세 전에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감추어둔 것이요 따라서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비밀 중의 비밀이기 때문이다(고전 2:7-10).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비밀을 올바로 깨닫고 그 진수를 캐내어 오늘날 이 복잡하고 바쁜 세상의 성도들을 먹이고 돌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목회자들이 이러한 주님의 사명을 제대로 행하려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기 위한 집중 적인 말씀의 연구와 묵상은 말할 것도 없고 성령의 조명을 위한 부단한 기도가 있어야 하며 동시에 세상의 흐름을 정확히 짚어내어 가장 적절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섬세한 기술도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님이 목회자들에게 위탁하신 일은 실상 가장 강도 높은 노동이요 또한 지식과 기술은 물론 영적인 차원까지 집약된 고도의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간혹 목회자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는 분들이 있다. 예컨대 어떤 분은 ‘목회의 중심은 말씀보다는 인간 관계다’ 라고 하면서 설교는 다른 사람의 설교집을 적당히 베끼거나 옛날 원고를 다시 활용하면서 뒷전으로 두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는 일에만 정신을 쏟는다. 그러다 가 설교가 부실하다는 지적이라도 있으면 소위 특별식을 먹인다고 하면서 유명 강사 몇 사람을 초빙하는 것으로 모면하곤 한다.
또 어떤 분은 지나치게 사회 참여와 봉사를 강조하는 나머지 설교를 온통 정치•사회적인 내용으로 채우면서 말씀은 결론에서 읽는 둥 마는 둥 지나치곤 한다. 하지만 이처럼 말씀을 등한시하는 교회에서 진정한 구원과 성령의 역사는 물론 올바른 사회 변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의 모든 사역자들은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씀의 종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물론 인간 관계도 중요하고 사람들의 필요와 요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과 진리로 영혼들을 가르치는 일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죄와 사망으로 죽어 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과 말씀뿐이다(요 6:53-57). 또 정녕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 뿐이다.
다시 1절을 보면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자신을 포함한 사역자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새삼 천명하고 있는 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 내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즉 당시 고린도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거짓 교사들의 유혹으로 인해 바울 자신의 사도성에 의심을 품고 있었고, 또 성도 들이 바울이나 아볼로, 게바와 같은 사람들 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목적 이상으로 내세우며 다투고 있었는 바 바울은 지금 이 러한 말씀을 통해 교인들이 사역자들을 어떻 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성도들을 돌보 도록 하기 위해 세우신 일꾼이요 종이다. 동시에 목회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땅히 목회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순종하되 필요 이상으로 높여 추종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목회자를 바르게 대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의 성도들은 목회자를 대할 때 다음과 같은 양극단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먼저 첫번째로 볼 수 있는 모습은 교회와 교인들이 목회자를 마치 왕이나 주술사처럼 두려움으로 대하는 것이다. 즉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이므로 목회자의 마음을 거스르면 곧 하나님의 저주가 내린다고 믿어 목회 자의 그 어떤 실수에 대해서도 지적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번째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이다. 즉 목회자를 마치 하인처럼 여기며 홀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와 교인들을 보면 목회자를 마치 월급을 주어 부리는 고용인으로, 자기들은 이들에게 생활비를 제공하는 상전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어떤 교회는 목회자를 운전기사처럼 여기며 두세 사람의 성도들이 모여 외부에 나가는 일에도 목회자에게 전화를 걸어 운전을 부탁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이상의 두 경우는 어느 것도 목회자를 바르게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모두 목회자를 세우신 하나님께 책망받을 모습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목회자들을 올바로 예우하고 대접하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본절의 말씀처럼 그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말씀을 위임받은 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지 세상의 일꾼이 아니므로 교회가 마음대로 고용하고 해고하며 부릴 수 있는 하인처럼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일꾼이기에 왕이나 주술사 혹은 하나님처럼 두려워하고 절대시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목회자는 말씀의 비밀을 맡은 자이기에 그들에게 말씀 이외의 다른 것들을 기대하며 요구하는 것도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땅의 모든 목회자와 사역자들은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과 사역을 위탁하기 위해 부르신 일꾼이요 종들이다. 동시에 그들도 인간이기에 보통 사람과 같은 결점과 연약한 점이 있을 수 있다. 때문에 무조건 절대시하며 따라서도 안 되고 무조건 완전한 기준을 가지고 비판만 해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성도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각자 받은 은사와 사명대로 연합하여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목회자와 성도는 서로 분리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모두 한 몸이 되어 함께 천국길을 가도록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2절을 보면 “말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중 성이니라”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일꾼이자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 섬기는 자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좋은 언변이나 세상의 지혜 등이 아니라 바로 충성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이 말에는 자신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일단의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은 충성을 다했다는 자기 변호적인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이처럼 가장 먼저 충성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의 구체적 의미는 무엇 입니까? 마태복음 25: 14-30을 보면 그 유명한 주님의 달란트 비유가 나오는데 이곳에는 착하고 충성된 두 종과 악하고 게으른 한 종이 등장한다. 먼저 착하고 충성된 두 종 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바로 가서 열심히 장사하여 각각 받은 달란트만큼의 이윤을 남겨 주인에게 돌려드렸다 (16,17절). 즉 그들은 주인으로부터 명령을 받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실행에 옮겨 최선을 다해 일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한 종은 이와 반대였다. 즉 24절을 보면 이 좋은 달란트를 받고 서도 나름대로 생각이 많았다. 그런데 그의 생각이란 주인 보기에 옳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나름대로 판단하여 행한 것 역시 주인의 의도와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인이 달란트를 맡긴 것은 열심히 수고하여 이윤을 남기라는 것이었지 아무것 도 하지 않고 맡긴 그대로를 가지고 오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르다’ 라는 책망과 함께 가지고 있던 것까지도 빼앗기는 벌을 받아야만 했다(26-30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과 종에게 요구하시는 충성이란 사명을 받은 후에 이리저리 재고 생각하며 의심과 불평을 하거나 일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명을 받아 기쁘게 순종하며 최선을 다해 수고하고 애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명령을 받고서도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며 애굽으로 가기를 주저했던 모세를 향해 노를 발하신 것이다(출 4:1-17).
본절에 나오는 ‘일꾼’ 이라는 말의 헬라 원어는 ‘휘페레테스’로서 본래 ‘배 밑에서 노를 젓는 자’를 의미한다. 우리가 잘 아는 영화 벤허에서 보듯이 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 벤허가 억울하게 죄수로 끌려가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어 노를 저었지만 우리는 그와 다르다.우리는 죄수와 노예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으로 부름받았고, 더구나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능 력과 형편을 아시고 그에 합당한 직분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리가 사명을 받고서도 불평하거나 자신의 부족한 점을 열거 하며 행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종의 모습이 아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일을 맡기시면 우리는 주저 없이 믿음으로 나아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충성이며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합당한 자세입니다.
다시 본문의 2절을 보면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하였다. 이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충성해야 함을 말씀한 것이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많은 표현들이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주인과 종’이다. 주님은 우리의 주인으로,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종으로 일컬을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이 관계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를 억압하신다는 의미 또한 아니다. 우리의 주님은 그렇게 무자비하신 분이 아니다. 우리의 주인되시는 예수께서는 자기의 피로 죄의 값을 치르사 우리를 자유케 하시되 다만 당신 안에서 생명의 종 노릇 하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 도를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종된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 가 바로 ‘충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충성이란 무엇일까요? 그저 시키는 것 만을 하는 것을 충성이라 여기십니까? 그것은 충성이 아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복종은 될 수 있어도 충성은 아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세상 종들의 태도이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책망받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인의 별다른 지시가 없었다고 장사를 해 볼 생각도 없이 땅에 묻어두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즉 나름대로 충성할 만한 의지는 있었지만, 주인이 시키지 않은 것이라고 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자들은 이와 달랐다. 그들은 ‘지극히 충성된 종’이라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주인이 달란트를 주신 이유를 헤아려 그것으로 배나 되는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충성의 태도이다. 먼저는 우리가 섬기는 주인의 마음과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기쁨으로써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남이 하든 말든 불평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이라면 그 일을 적극적으로 이루는 것이 바로 충성된 자의 모습이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주인을 위해 일을 찾아다 니고 적극적으로 순종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충성된 모습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서 그것을 향해 어떠한 생각을 갖고 계심을 알았다면 그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억지가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즉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수고와 노력을 드리는 것이다. 사람의 인정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지극히 충성된 종’ 이라 칭찬하실 것이다. 이 영광된 자리에 우리 모두가 서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20. 선지자란/ 복음의 빚진자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1:14-16]
우리는 다 복음에 빚진 자이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바울의 이 고백을 보고 무엇을 느끼 십니까? 사도가 언제 그렇게 빚을 졌는지 궁금하십니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빚을 졌기에 ‘헬라인이나...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을 졌다고 말하는지 궁금하십니까? 또 언제 그렇게 여러 사람에게 빚을 졌는지도 궁금할 것이다. 어떤 분은 그렇게 많은 빚을 진 사람이 어떻게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게 되었는지 의아해하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선교 사역을 위해 많은 빚을 지게 되었 나보다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빚진 자’ 라 는 것은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돈에 빚진 자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빛’은 ‘복음’의 ‘빚’을 말한다. 즉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갚아야 할 빚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갚아야 할 빚으로 표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복음을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은 오직 바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것은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줄 복음을 바울을 구원하사 그에게 맡기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자기가 맡은 복음을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들에게 전달하기까지 그들에게 빚진 자가 분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바울은 그토록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정 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면 어떻게 됩니까? 참으로 고통스럽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빚지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하루라도 빨리 빚을 청산하려고 한다. 바울의 심정도 바로 이와 같았다. 그는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세계 구석구석을 누볐다. 핍박과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생명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얼마나 수고했는지는 고린도후서11:23-27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면 복음의 빚은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아니다. 모든 인간은 다 복음의 빚진 자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도록 주님께 복음을 받은 자들이다. 또 우리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수고로 복음을 받은 자들이다.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버렸는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복음에 빚진 자라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속히 우리가 맡은 이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 다면 하나님의 징계를 면치 못한다.
빚진 자가 빚을 갚지 않으면 어떻 게 됩니까? 채권자로부터 소송을 당하여 불 이익을 당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하였다(고전 9:16).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던 이스라엘이 그 말씀을 다른 민족에게 전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심판을 받았다. 우리는 빚을 갚지 않으면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도바울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상 로마서의 주제이다. 로마서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믿음의 주제고, 우리 인생의 주제이다. 사실상 믿음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라 보면 틀림없다. 우리는 모두 능력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결혼을 앞둔 여성들은 능력있는 남자를 만나려고 한다. 물론 남자들 역시 능력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어한다. 교회도 능력있는 성도 한사람 만나면 목회가 잘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대를 막론하고 능력있는 사람은 어디서건 상종갈가를 친다. 하지만, 능력 중애서도 최고의 능력은 무엇인까? 바로 우리 하나님의 능력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능력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능력이기 때문이고, 하지못할 일이 없는 능력이기 때문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능력 있는 자라도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 또 사람의 능력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 권세있던 사람도 권세를 잃을 수 있다. 아무리 한때 능력있던 사람도 능력을 잃거나 권좌에서 물러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하나님을 삼으라고 권면 하고 있다(시146:3.5).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자라고 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능력은 소멸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구원의 손이 짧아지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민11:23). 다윗은 말했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27:1). 이렇게 일생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당당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금식도 하고, 철야 기도도 하며. 산 기도도 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본문을 잘 보면 사도 바울은 복음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복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나온다는 말다. 오직 복음 안에 모든 능력이 담겨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얻어야 할까요? 지금 헤쳐 나가기 위해 우리들에게 필요한 힘이 무엇일까요? 바울은 “복음”일고 분명히 말한다. 복음 안에 모든 인생의 답이 담겨저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해결의 길이 마련되어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복음이 위대하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사도 바울은 모든 자에게 빚진 자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해 주기 위해 안간의 힘을 쓴 것이다.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중지하고, 참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더욱 깊이 믿고 의뢰하시는 한분, 한분 되길 바란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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