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시대의 이씨 성을 가진 인물(3)
* 아래에 소개하는 신라 때 이씨는 확인된 경주 이씨가 아닙니다.
신라 때에는 본관을 쓰는 이씨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이씨 성을 가진 역사인물로만 아시면 되겠습니다.
★ 이동(李同)
시대 신라
본관 미상(未詳)
성 이(李)
성별 남
활동분야 교육/사상 / 학생 / 유학생
생몰년 미상. 신라 경문왕 때 당나라에 간 숙위 학생.
869년(경문왕 9) 왕자인 사은 겸 진봉사(謝恩兼進奉使) 소판(蘇判) 김윤(金胤)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국학(國學)에 입학하여,
875년 당나라 예부시랑 최항(崔沆) 아래에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이때 함께 응시한 발해의 유학생 오소도(烏昭度)가 수석합격을 하고 이동(李同)이 차석을 차지함으로써
신라와 발해의 빈공과 쟁장사건(賓貢科爭長事件)의 발단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신라는 906년에 실시된 빈공과에서
최언위(崔彦위)가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烏光贊)을 누르고 수석으로 합격할 때까지
30여 년 간 커다란 수치감과 굴욕감을 인내해야 하였다.
최언위의 수석 차지는 마침 당나라에 조공 중이던 오소도의 항의를 불러일으켜서,
이른바 신라와 발해의 당 빈공과 쟁장사건으로 번져 그 뒤 양국의 관계를 더욱 경쟁적으로 만들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東史綱目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李基東, 韓國硏究院, 1980)
渤海國志長編(金毓?, 華文書局,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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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공과(賓貢科)- 중국 당나라 때에, 외국인에게 보이던 과거(科擧).
신라의 최치원 등이 급제하였다. ≒빈공(賓貢).
여기서는 빈공과 시험에 발해의 오소도(烏昭度)가 수석을 하고 신라의 이동(李同)이 차석을 하였는데
그 뒤 906년에 실시된 빈공과에서 신라의 최언위(崔彦위)가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烏光贊)을 누르고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최치원 같은 대문호도 처음 발해의 오소도가 신라인을 제치고 장원 급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쭉정이’와 ‘술찌거기’에 비유하는 배타적 옹졸함을 보였다고 한다.
'쟁장 사건(爭長事件)'으로는 당에 간
발해사신이 신라사신보다 윗자리에 앉을 것을 요청하다가 거절당한 사건이‘쟁장(爭長- 다툼)사건’이다,
'등제서열사건(登第序列事件)’은 빈공과 과거시험에
신라의 최언위가 발해의 오광찬보다 석차가 앞서자
당에 사신으로 간 오광찬의 아버지 오소도가 아들의 석차를 올려달라고 청하다가 거절당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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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인물들
신라시대의 이씨 성을 가진 인물(3)
이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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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2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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