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텔라의 마음공부 >
글 | 스텔라 박
“삶과의 교감을 창조하는 사랑으로 인해 우리들은 확장됩니다.
사랑은 우리를 연결되게 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존귀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부드러운 관심 속에서 싹트고 보살피는 행동으로 꽃을 피웁니다.
사랑은 우리의 손 닿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어떤 순간이라도 우리는 작은 자아를 넘어 사랑받는 전체의 부분으로
서로를 포용할 수 있습니다.”
- 잭 콘필드의 <용서, 사랑, 평화의 예술
(The Art of Forgiveness, Loving Kindness, and Peace)> 중
세존의 육성이 담긴 세다카경 말씀
세존의 육성을 듣고 싶다는 바램으로 니까야를 읽어나가다가 상윳다니까야 가운데 세다까 경(Sedaka-sutta S47:19)을 접하게 됐다.
세존께서 세다까(Sedaka)라는 숨바들의 성읍(Sumbhan Town)에 머물고 계실 때 비구들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신다.
대나무타기 곡예사가 제자인 메다까탈리까를 불러 이런 대화를 나눈다.
“메다까탈리까, 대나무 막대기에 올라가 내 어깨 위에 서라. 그대는 나를 보호하라. 나는 그대를 보호하리라. 이와 같이 우리는 서로서로를 지키고 보호하면서 곡예 기술을 보여주고 돈을 벌고 대나무 막대기로부터 안전하게 내려오자.”
제자인 메다카탈리까는 스승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른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승께서는 자신을 보호하셔야 하고 저는 제 자신을 보호할 것입니다.”
세존은 이 이야기를 비구들에게 들려주며 제자 메다까탈리까가 스승에게 말한 것이 바로 바른 방법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할 것이다.’라며 마음챙김의 확립을 받들어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니 이어서 스승의 방법처럼 ‘나는 남을 보호할 것이다.’라거도 마음챙김의 확립을 받들어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비구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남을 보호하고, 남을 보호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남을 보호할까. 4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받들어 행하고(By practicing mindfulness, 신수심법 등 사념처 수행) 닦고(By developing it) 많이 공부지음을 통해서이다.(By doing it a lot.)
남을 보호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인욕(Patience), 해코지 않음(Non-Harming), 자애(Loving Kindness), 동정(Caring for others)을 설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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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전 말씀은 매일 매일 어떤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보여준다.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념처 수행과 메따 수행을 함께 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남을 보호하는 것은 사념처 수행이요, 남을 보호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메따 수행이라는 얘기이다.
사념처 수행은 바른 견해와 통찰의 지혜를 갖게 해준다. 편견에 사로잡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큰 그림을 보게 하고 실상을 파악하게 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어 알게 한다.
참 오랫동안 ‘통찰’의 의미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그동안 ‘통찰’ 하면 함께 떠올랐던 단어들은 ‘섬광’, ‘번개’, ‘찰라’, ‘영감’, ‘뮤즈’, ‘지혜’, ‘명상’ 등이었다.
예를 들어 1시간 남짓 마음을 비우고 현재 경험에 주의를 기울여가며 산책을 할 때 갑자기 섬광처럼 스쳐지나가거나 떠오르는 지혜, 영감… 뭐 그런 것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영어 사전을 찾아보니 내가 이제껏 갖고 있던 오해를 뒷받침할 만한 정의를 써놓았다. “Insight: an instance of apprehending the true nature of a thing, especially through intuitive understanding; penetrating mental vision or discernment; faculty of seeing into inner character or underlying truth”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글 사전의 뜻은 훨씬 더 본래 의미에 접근하고 있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통찰은 그야말로 ‘우리의 인식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이다. 그건 눈먼 사람이 코끼리를 뱀 같다거나 기둥 같다며 부분적으로 아는 등의 편견이 아니라, 코끼리를 코끼리로 아는 것이다. 또한 단지 성장한 현재의 코끼리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 이전의 코끼리와 아기 코끼리, 장성한 코끼리, 늙은 코끼리, 죽어서 사라질 코끼리까지를 아는 것이다.
이렇게 아는 것은 공간적 연기를 이해해 빛 아래에서 훤히 아는 것이고, 시간적 연기를 이해해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아는 것이다.
이렇게 통찰(즉 바로 훤히 앎)할 때 두려움은 사라진다. 두려움이라는 허구는 빛이 없는 상태에 다름 아닌데, 빛을 비추는 순간 본래 없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기적수업(A Course In Miracle - 유대인들의 신비주의 수행체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었던 메리언 윌리엄슨이 기적수업 스승이다)에서는 “사랑이 없는 상태가 바로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사랑”이란 “나를 포함한 인식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허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연기적 사고요, 둘로 분리하지 않는다(Non Duality). 하지만 ‘사랑없음’은 나와 남을 동떨어진 객체로 보는, 분리의식에서 시작된 편견이다. ‘사랑없음’의 결과(즉 통찰이 아닌 편견)는 두려움, 정죄함, 미움, 증오, 희생양에게 책임 돌리기 등이다.
두려움의 상태에서 우리 몸을 관찰하면 가슴이 닫혀 있고 긴장돼 있다. 이를 알아차리고 몸의 각 부분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가슴을 열어주기만 해도 우리는 사랑의 상태(있는 그대로 보고 허용하는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마음은 그렇게 탄력회복성이 있다. 왜일까? 마음은 마음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아무 것도 되지 않을 수 있다.)
‘견성(Enlightment)이란 별다른 것, 신비한 것이 아니라 마치 빛이 비추인 듯,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요, 그래서 고통받을 것이 본래 없음을 알고 고통을 여읜 상태’가 아닐까, 싶다. 이를 위해서는 계를 지키고 선정과 지혜를 닦는 팔정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두번째 남을 보호하면서 나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인욕(Patience), 해코지 않음(Non-Harming), 자애(Loving Kindness), 동정(Caring for others)을 설하셨다.
명상을 처음 시작하던 시절, 사념처 수행과 함께 자애수행을 소개받았을 때, “명상 수행자들의 세계는 참 아름답구나…”라고 생각됐지만 그렇다고 이 수행을 따라한다는 것이 쉬웠다는 말은 아니다. 뭔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같았고 노력이 너무 많이 필요한 것 같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또한 반복한 결과 이제 나의 자연스런 제 2의 천성이 되어버렸다. 반복하는 것은 강화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의 행복과 평화를 바라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내 욕을 하고 다니고 내게 상처준 (그렇다고 내가 받아들인) 이들을 향해 친절한 마음을 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최근 나는 나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한 청취자가 라디오코리아 채팅 창에 나에 대한 악플을 계속해서 올리고 있었다. 그가 그일 수 있도록 허용해야지, 하면서도 몸과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저항이 일었다. 가만히 저항이 가져오는 몸의 감각을 살핀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심장이 툭 하니 고층에서 떨어진 듯한 몸의 감각이 감지됐다. 방석에서 떠나 일상 생활을 하면서도 이 생각은 끊임 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럴 즈음, 이 세다카 경을 읽게 됐다. 메따 수행이 남을 보호하면서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라는 세존의 말씀에 난 그 악플러를 향한 메따를 보내기 시작했다. “당신이 행복하기를… 당신이 평안하기를…” 하면서...
메따 수행을 하고 나니 우선 내가 편해졌다. 그 기도가 그에게 전해져 그 사람 행동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많은 기대는 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 결국은 나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악플에 대한 내 반응을 고요히 바라보니 그저 무상한 현상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로 인해 많이 마음 쓰여 하다가 왜 내가 내 행복의 여부를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위임했나, 하고 알아차리며 다시 한 번 몸의 감각으로 돌아와 평정을 되찾는다.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 깨달았다. 아직 내 이름과 평판에 대한 집착, 내 존재에 대한 집착을 만난 것이다. “아, 내 내면에 이런 부분이 있구나.”라고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집착이 내 평생 계속된 인정받기를 원하는 경향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남들의 인정에 대해 좋아할 것도, 남들의 악플에 대해 괴로워할 것도 없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참 많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고 밝히 안다. 마음에서 ‘내 생각이 옳다’며 ‘자기의’를 주장하고 싶어 못 견디는 순간에도 오직 현재 내 몸의 감관을 살피며 마음자리를 들여다 볼 뿐…이제 ‘자기의’는 완전히 내려놓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중 “스승이 자기 눈을 실수로 찔러 눈을 멀게 했어도 원망하거나 동요하지 않은 한 사미승”에 관한 법구경 이야기가 현재 맞딱뜨리고 있는 마음 속 갈등을 해결해줬다. 사마승은 “이것은 테라의 잘못도 아니고, 또한 나의 잘못도 아니며, 다만 깜마(업)의 결과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방송국 채팅창에 악플을 다는 그 분… 나의 잘못도 아니고 그의 잘못도 아니고 다만 업의 결과일 뿐으로 알고, 내 업의 결과가 있다면 당당히 받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편안해졌다.
고통을 여의어 행복에 이른 붓다에 귀의하고, 붓다가 직접 실험해 검증을 마친 행복에 이르는 길인 담마, 고통을 여의고 행복에 이르기를 함께 수행하는 상가…
판단하지 않으면(상을 짓지 않으면) 침묵하게 된다. 매순간 그저 빙그레 웃으며 현재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 모습일 수 있도록 허용한다.
태어나서부터 늘 함께 하며 나를 봐주었던 또 다른 나,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함께 했던 나,
내가 초라할 때나 화려할 때나 판단하지 않고 늘 고요히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로 돌아가 고요히 머물러 있을 뿐이다.
1)고통을 완전히 여의고 열반에 이른 이 붓다…
2)그분이 가르쳐준 고통을 여의는 방법을 설한 담마,
3)그리고 함께 저 언덕에 이르고자 오늘도 고요히 수행하는 우리 공동체만이 내가 기댈 귀의처이다.
매순간 행복하기 위한 결정을 하고 행복하지 않게 하는 요인들을 내려놓으니 고통을 여읜, 행복에 근접해 가는 듯 하다.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
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