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의 연혁.............
백제시대에는 발라군이라 칭했으며,
660년(신라 무열왕 7) 백제가 멸망한 뒤
당이 대방주를 설치하면서 속현으로 세운
죽군현·포현현이 이 지역에 위치했던듯 하다.
통일신라시대 686년(신문왕 6) 통의군
757년(경덕왕 16)에는 금산군으로 개칭.
고려초 940년(태조 23) 나주라 칭했으며,
983년(성종 2) 나주목이 되어 지방관 파견.
996년(성종 15년) 나주진해군절도사로 바뀌어
해양도 소속, 1018년(현종 9) 다시 목으로 환원.
전라도 남부 계수관으로서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때 무안·담양·남평·낙안·곡성 등 5군이
속군으로, 철야·회진·반남·안로·복룡·원율·
여황·창평·장산·진원·화순 등 11현이 속현.
1310년(충선왕 2) 지주사(知州事)로 강등
1356년(공민왕 5)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1645년(인조 23)에 향리가
목사 이갱생을 해쳤다 하여 금성현으로 강등.
1654년(효종 5)에 다시 복구되었으며, 현종 때와
영조 때에도 비슷한 이유로 잠시 강등되었다가 복구.
1895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나주부가 되어
나주군 등 16개군을 관할했으며, 이듬해에
도제 실시로 전라남도에 소속되었다.
이때 관찰부가 광주에 설치됨으로써
전남 행정중심지가 광주로 넘어갔고,
목포의 성장으로 나주의 기능이 약화.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나주·나신·양지·왕곡·
세지·반남·공산·동강·다시·문평·삼도·평동·노안·
남평·다도·봉황·금천·산포·본량면 등 19개면을 관할.
1929년 나주면 + 나신면 = 나주면,
1931년 나주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1914년 상곡면과, 수운과 육운이 교차하여
시장으로 유명한 영산포를 포함하고 있던
지량면을 합하여 만든 양지면은 영산면으로
개칭했다가 1927년 영산포읍으로 승격했다.
광주의 도시발달에 따라 위성도시화 하자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하여 금성시.
1985년 나주시로 개칭.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대대적인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농촌지역이던 나주군을 통합해 나주시가 되었다
.................................................................
나주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장이 선 고장.
조선 세종 때, 지금 5일장이라 부르는 장시가
나주에서부터 처음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산포를 통해 호남의 각종 집산물들이
나주 장터로 몰려들었고, 물건들과 함께
사람들도 늘 북적였다고 하는데 장터에는
값싸고 양많은 서민음식이 인기를 끌기 마련.
하지만 나주 장터에서는
순대국이나 해장국 대신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싼
곰탕을 많이 팔았다 한다.
주변에 넓은 곡창지대가 있는
호남 벼농사 중심지이다가 보니
곰탕 재료로 쓰이는 소가 흔했고,
장터 근처에 관아가 있어 여유있는
벼슬아치들이 곰탕을 즐겨 찾았단다.
사골을 우려낸 것이 곰국이고,
여기에 밥을 말아 내오면 곰탕.
살림살이 어려운 시기에도 고기나
소의 내장 등을 듬뿍 담아서 내주는
장터 인심은 나주곰탕 인기로 이어졌다.
이는 나주 5일장을 찾은 장꾼들의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나주곰탕은 전라도의 곰탕을 대표하는 이름.
지금은 나주가 아니더라도 나주곰탕 ‘브랜드’를
내걸고 장사하는 식당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음식은 ‘원조집’에서 먹어야.,제 맛.
지금도 옛날의 맛을 이어오고 있는 나주곰탕.
그맛 때문에 먼길을 마다 않고 나주를 찾는다.
나주곰탕은
사골과 고기로 만
오로지 맛을 내는데,
핵심은 ‘맑은 국물’이다.
사골을 푹 고아 뽀얗게 우러난 국물에
양지, 사태, 목살 등을 넣고, 다시 끓이면
국물이 점차 맑아지면서 맛이 한결 깊어진다.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흑산도에서부터 나주까지
홍어를 실은 배들이 닿았다.
덕분에 삭힌 홍어의
본고장이 된., 나주 장터에는
홍어를 취급하는 어물전이 많았다.
근래 들어
어물전은 쇠퇴했지만
지금도 ‘홍어의 거리’에는
홍어전문식당들이 남아있어
나주 홍어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봄이면 벚꽃 눈처럼 휘날리는
'벚꽃길'로 유명한 사찰.,다보사
661년(문무왕 1)원효(元曉) 창건
.
일제가 불교를 탄압할 때에도
스님들은 이곳 다보사 사찰에서
한국 불교의 맥을 이어갔다고 한다.
나주시 경현동 629
다보사 입구 금강문,
높이 11.5m의 탱화,
대웅전의 꽃살문
등도 볼 만하다.
전라도 최대의 도시였던.,나주
그당시 다보사는 융성했으리라.
조선시대 나주 영산포가 번성할때
신안군 배들은 영산포로 몰려들었다.
당시 목포는 무안현에 속한.,작은 포구.
1897년 목포진 개항으로
전남 최대 항구가 된.,목포.
..........................목포.............................
백제 물아혜군이 757년(신라 경덕왕 16) 무안군.
944년(고려 혜종 1) 물량군, 991년(성종 10) 무안군.
1018년(현종 9) 나주의 속군, 1172년(명종 2)에 독립.
.
1391년(공양왕 3) 왜구침입 극심
성산극포권농방어사를 설치했다.
1397년(조선 태조 6) 전라 4진 중 하나
목포진이 설치되었으며 첨절제사 파견.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 때 무안현,
1896년에 전라남도 무안군이 되었다.
1897년 목포진 개항으로 전남 최대 항구.
삼학도는 매립되어 육지가 되었으나
유달산과 함께 목포사람들의 꿈과 미래.
낭군을 망망대해로 보낸 아낙들의 외로움.
고깃배를 기다리는 상인들의 희망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건너는
망자들의 한이 녹아있는 곳이었다.
1872년 ‘무안목포진’에 표기.
삼학도가 처음 지도에 그려졌다.
1502년 목포진에 땔감 제공한 삼학도
1895년 일본인에게 불법판매된 사건.
일본인 삽곡용랑은 삼학도를 매입했다.
개항 2년전 (개항: 1897년 )인데, 개항 후
밝혀져 처벌하고 환수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결국 1910년 국권침탈이 되면서
삼학도, 고하도는 일본인 땅이 된다.
‘삼학도 토지암매사건’
일본인이 목포 토지를
침탈한 대표적인 사례.
옛날에 유달산 젊은 장수가 무술을 연마.
그 늠름한 기개에 반해 마을의 세 처녀가
수시로 드나들어 공부를 소홀히 하게된다.
그러던 어느날
이 젊은 무사는
세 처녀를 부른다.
"나 역시 그대들을 사랑하나,
공부가 끝날 때까지 이곳을 떠나
다른 섬에서 기다려 주오"하고 청했다.
그 말대로 기다리던 세 처녀는
무사를 기다리다 그리움에 사무쳐
식음을 전폐하다가 죽었으나 세 마리
학으로 환생해서 유달산 주위를 돌며
구슬피 울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모르는 무사는 세마리 학을
향해 활시위를 당겨 쏘아 화살들이 명중,
3마리 학들은
유달산 앞바다에
모두 떨어져 죽는다.
그후 학이 떨어진 자리에
세 개의 섬이 솟아났으니
사람들은 세 마리 학섬이라
하여, "삼학도"라고 불렀단다.
........................................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영산포에 도달한., 뱃사람들은
나주 다보사를 한번쯤 들렀으리라.
고려를 창건한.,태조 왕건.
그 뒷배경이 된 나주 해상세력.
고려(918~1392)는 474년 동안 존속.
왕씨(王氏)가 34대에 걸쳐 집권한 왕조
..........다보사(多寶寺).............
661년(문무왕 1)원효(元曉)가 창건.
1184년(명종 14)지눌(知訥)이 중건,
1568년(선조 1)서산(西山)이 중창.
1878∼1881년 대웅전·영산전·
명부전·칠성각 등 중수
절의 뒷산에는
왕건이 견훤과 싸우기 위해
쌓은 금성산성지(錦城山城址)가 있다.
..................................................
.
2016.03.14 하얀집 나주곰탕
........나주시(羅州市 : 608.32㎢).....
동쪽은 화순군, 서쪽은 무안군·함평군,
남쪽은 영암군, 북쪽은 광주광역시와 접.
동경 126°33'∼126°54', 북위 34°53'∼36°03'
인구 9만 8182명(2015년)
행정구역은 1개 읍, 12개 면,
7개 행정동(34개 법정동),
446개 행정리(154개 법정리)
시청은 전남 나주시 송월동.
남동부에 용제산(龍帝山, 323m)·
덕룡산(德龍山, 376m) 등이 있고,
북서부에
옥산(玉山, 334m)·
금성산(錦城山, 450m)·
신걸산(信傑山, 368m) 등.
높이 약 400m 내외의 이들 산지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20∼50m의 구릉지와 10m 이하의 평야.
구릉지는 과수원, 나주평야는 전라남도 곡창지대.
특히, 지석천 연안에 남평들, 산포들이 넓게 분포
'남평읍 ~ 화순군 능주' 지석천은., 일명 ‘드들강’
길이 4km 유역의 남평평야. 화순평야는 미곡산지.
.
나주시의 북동쪽에서
황룡강(黃龍江)과 극락강(極樂江)이
남류하다가 다시 지석강(砥石江)과 합류
지석강 지류를 막아
건설한 나주댐이 영산강
유역의 넓은 나주평야를 관개.
이 댐은 작물성장에 맞은 온도의 물공급을 위해
수면에서 3m 이내의 표면수 만을 취수할 수 있는
특수 취수탑과, 물의 효율적 관리와 손실을 방지
유량조절장치를 설치한 국내 최대의 관개용수 댐.
나주댐에 의해 조성된 호수
붕어· 잉어· 뱀장어· 날치 등
담수어족이 많아.,인기 낚시터.
영산강은 시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로 흐르면서 시를 양분한다.
영산강 하류는 너비가 좁은 관계로
낮은 지대는 상습적인 수해지역이다.
나주시는 이들 하천 유역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지대가 발달되고
땅이 기름져 예로부터 농경이 발달하였다.
영산강의 지류인 문평천 유역과
이 하천이 합류한 영산강 북안에
다시 평야가 발달해 있다.
이 평야는
크게 나주평야
일부라 할 수 있으며,
총면적은 1,400ha에 이른다.
문평천을 가로막아 만든 백룡제라는
저수지가 관개용수로 이용되며,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것이
이 평야의 특색이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하나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은 13.8℃이며, 1월 평균기온 1.1℃,
8월 평균기온 28℃이다. 연강수량은 1,491㎜로
하절기인 6·7·8·9월에 70∼80% 이상이 내린다.
서리는 11월 초순부터 내려
이듬해 4월 초순에 끝난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유물이 일부지역에서 발견.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유물은 보산동을 비롯
남평읍·세지면·다도면·다시면·문평면·왕곡면 등 거의 시
전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군과 그 아래에서
출토된 간돌검·돌도끼·돌창류가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인문활동이
이뤄졌을 것.
특히, 마한의 54소국 중 임소반국(臨素半國)과
신운신국(臣雲新國)이 나주·광주의 접계지역에,
불미지국(不彌支國)이 반남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이 시대의 유적으로는
반남면 대안리·흥덕리·
신촌리 일대와 다시면
회진마을 일대에 집중된
독무덤 존재들이 주목된다.
독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 등은
이 지역에 일찍부터 비교적 강대한
정치권력체가 존재했음을 말해 준다.
백제시대
발라군(發羅郡)·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
미동부리현(未冬富利縣)
등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설치한
대방주의 6현 가운데 죽군현(竹軍縣) 등
4현이 나주지역에 있었다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이 대방주는 6년 만에 폐지되었다.
신라는 686년(신문왕 6)에
발라군을 통의군(通義郡)으로 고치고,
757년(경덕왕 16)에는 통의군을 금산군
(錦山郡, 혹은 錦城郡)으로, 반나부리현은
반남현(潘南縣)으로, 미동부리현은 현웅현
(玄雄縣)으로 개칭하였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뒤에는
한때 후백제의 영역에 속했다가
왕건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이때
이 지역 호족들이 왕건에 적극협력
고려 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940년(태조 23) 금산군을 나주로 개칭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나주목이 되어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로써 종래 전라도 남부의 수부였던
광주(무주)를 대신해 계수관(界首官)으로
등장하여,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996년(성종 15)
나주진해군절도사
(羅州鎭海軍節度使)라 하여
해양도에 속하게 되었다.
1011년(현종 2)에 거란의 침공을 피해
왕이 잠시 피란을 와서 10여 일을
머물다가 환도한 일이 있었다.
1018년에 다시 목(牧)이 되어
이후 조선 말기까지 거의 변화 없이
남부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 무안·남평·담양·낙안·곡성
5군을 속군으로 거느렸는데,
여기에 현웅현이 남평으로
고쳐져 예속되었다.
또, 철야·회진·반남·안로·복룡·
원율·여황·창평·장산·진원·화순의
11현이 속현으로 예속되었다.
이 속군·현들은 1172년(명종 2) 이후
점차 독립하거나 다른 지방에 이속되는
등의 변동이 있었다. 1270년(원종 11)에는
삼별초군에 의해 공략받기도 하였다.
1310년(충선왕 2)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
1356년(공민왕 5) 목으로 복구.
조선시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목으로서 전라도 남부 중심지였다.
1457년(세조 2)
진관체제에 따라
거진(巨鎭)이 설치
목사가 병마첨사를
겸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사건으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그 후로도 선비들 상호간의 대립과
갈등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 때는
김천일(金千鎰)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1645년(인조 23)에
향리가 목사를 구타한
강상지변(綱常之變)이 일어나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4년(효종 5)에 복구.
그후로도
현종 때와 영조 때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1755년(영조 31)에는
임금을 비난하는 벽보가
관아 앞에 내걸리는 사건이 발생해
또 많은 선비들이 처형당하였다.
『경세유표』에는
조선 후기 나주목의 토지결수가
2만 8000결로 전국 제일이라 하였다.
1895년에 관제개혁으로 나주군으로 개칭되었다.
다음해 새로운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져
13도제가 시행되고 각 도에 관찰사가 파견되는
체제로 바뀌어, 광주가 전라남도 관찰부가 되었다.
이로써 나주는
오랫동안 누려왔던
전라도의 중심도시 구실을
광주에 양보하게 되었다.
동시에 영역의 축소도 이루어져
오산면은 광주로, 대화면은 장성으로,
금마·원정·비음·종남면은 영암으로,
삼향면은 무안으로, 적량·장본·여황면
지역은 함평으로 각기 이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그 동안 별도로 존속해 왔던
남평군을 없애 남평면으로 하고
그 예하에 있던 여러 면들을 합병
함평에 이속했던 적량·장본·
여황면 지역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조선시대에 비하면
훨씬 축소된 영역을 갖게 되었다.
1927년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고,
1929년에는 나주면과 나신면이 합쳐져 나주면.
1931년에는 나주읍으로 승격하였다.
한편, 영산면·왕곡면·세지면 등은
이 시기에 궁삼면(宮三面)이라 불렸다.
1888년의 대흉년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떠돌게 되자
악덕 관리가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아
엄상궁(嚴尙宮)의 소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일제강점기에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소유권 주장,
소작료 징수 등의 탄압과 횡포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에 맞서 싸우는
궁삼면토지분쟁을 계속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경제적 수탈에 저항한
사례로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1949년에
삼도면·본량면·평동면이
광산군으로 이속되었다.
1973년부터 다도면 일대에
나주 댐 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에 완공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는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하여 금성시라 하고
나주군에서 분리, 승격.
1986년 1월 1일에 금성시를
다시 나주시라 개칭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의해
나주시와 나주군이 새로운
나주시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에
남평면이 읍으로 승격,
1996년 2월 10일삼도동 일부가
금천면에 편입되었다.
1998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1개 읍 12개 면 6개 동으로 편제.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동강면 장동리, 공산면 봉룡리,
산포면 신도리 등 20곳에서 뗀석기 발견.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다시면 가흥리 늪지대에서
벼화분이 발견된 것이 유일하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지석묘만 알려져 있다.
지석묘는 150곳에 1,200기가 분포하고 있다.
그 중 왕곡면 나주신포리지석묘군를 비롯해
다도면 판촌리·마산리 지석묘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북방식 지석묘인
다시면의 신풍리지석묘에서는
석검과 채문토기가 발견되었다.
입석은
세지면 오봉리·벽산리,
남평읍 동사리·교촌리
것이 대표적이다.
고분으로는
다도면 마산리에서
토광묘와 옹관묘가
조사되었다.
거대한 봉분을 한 고총 고분으로는
반남면에 나주신촌리고분군(사적 제77호)·
나주대안리고분군(사적 제76호)·
나주덕산리고분군(사적 제78호)
등의 옹관고분군이 있다.
석실고분으로는
다시면에 복암리고분군
(전라남도 기념물 제136호),
세지면의 나주송제리고분
(전라남도 기념물 제156호),
반남면에 나주흥덕리석실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5호) 등.
이 밖에도 동강면·공산면·왕곡면 등
영산강 하류지역에 많은 고분들이 산재.
옹관고분에서는
금동관· 금동시발·
환두대도 등 신분을 상징하는
금속유물과 많은 토기가 발견,
복암리석실분에서는
금동신발과 관이 출토.
...............................
나주 영산포 홍어거리 ~ 흑산군도 영산도.
.
.
.......................영산강........................
한강, 낙동강, 금강과 함께., 우리나라 4대강.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용연리용추봉(560m)에서
발원하여 광주광역시, 나주시, 영암군 등을 지나
영산강 하구둑에서 서해로 유입하는 하천이다.
길이 150㎞, 유역면적 3,551㎢.
전라남도 총면적의 29%를 차지.
섬진강보다 길이와 면적이 작지만,
영산강 유역이 우리나라 서남부의
핵심 지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4대강으로 취급한다.
영산강의 명칭은 중류에 위치한
나주와 영산포에 의해 역사적 변화.
나주는 통일신라 때 금성(錦城)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영산강을
금천(錦川), 금강(錦江)이라 했고
나루터는 금강진(錦江津)이라 했다.
고려시대 신안군 흑산면에 속한
영산도 섬주민들이 왜구를 피해서
나주 남쪽의 강변에 마을을 개척한 후,
그곳을 영산포(榮山浦)로 부르게 되었고,
조선시대 초기 영산포가 크게 번창하자
강 이름도 영산강으로 바뀌게 되었다.
.................................................
.....................흑산군도.............
흑산군도(黑山群島)는 전남 목포에서
남서쪽 약 90km 해상에 있는 군도이다.
대흑산도를 중심으로 68개 섬으로 형성.
면적 50여 km2
가거도에는 639m,
대흑산도 378m,
홍도 368m
산이 솟아 평야는 거의 없고,
농산물 생산량은 2개월 자급량.
포경의 중심지이고 전갱이·고등어·
조기·상어·갈치·홍어 등이 풍부하다.
어업가구는
총가구의 80%
진도와는 대조적.
흑산도 중심지 흑산항은 천연적 양항으로서
어업기지, 인근 항해선박 보급 휴식처 대피항.
또 통신 연락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이 항구 근방
예리(曳里)에는 3~10월까지 파시(波市)를 이룬다.
부근 홍도(매가도)는 제2의 해금강
기암괴석, 노송이 우거져 경승지대.
................................................
.....영산도(2.25㎢)....
전남 신안군 흑산면 속.
동경 125°28′, 북위 34°38′.
목포에서., 서쪽으로 84㎞,
진도에서.,서북쪽으로 60.4㎞
해안선 길이 7.9㎞.
대흑산도·가거도·대둔도(大屯島)·
다물도(多物島)·대장도(大長島)
등과 함께 흑산군도를 이룬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
'영산화가 많이 핀다.'고 하여
영산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질은 대부분 규암과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동쪽 해안은 단조롭고 급경사면을 이루는 반면에,
북서쪽 해안은 완만한 경사에 갑과 만이 형성되어 있다.
대부분 암석해안을 이루어 해식애(海蝕崖) 발달.
1월 평균 2℃, 8월 평균기온 26℃, 연강수량1,112㎜.
2009년 기준으로 인구는 103명(남 56명, 여 47명) 거주.
세대수 59세대이며 취락은
북서 해안 만입부(灣入部)에
집중해 있고 토지이용 현황은
밭 0.11㎢, 임야 2.04㎢로 산지.
농산물은 콩·고구마·보리·채소 등.
난류 제주해류가 통과하는 인근해역은
난류어족을 비롯한 각종 어족이 풍부하다.
어획물 -잡어·장어·전복·농어 등
전복· 홍합· 다시마 양식도 한다.
당산창송(堂山蒼松)·
기봉조휘(箕峰朝輝)·
비류폭포(飛流瀑布) 등
영산팔경(永山八景) 유명.
가장 대표적인 제7경
석주대문(石柱大門)이다.
청나라와 교역을 할 때 이곳을 지나는 배들이
풍랑을 만나게 되면 이 대문안으로 대피하였다.
흑산도 도선이 운항, 흑산초등학교 영산분교장.
...............................................................
고려 말, 몽고와 왜구가 해안가를 자주 침입해오자,
'해도입보론(海島入保論)'과 '해도개발론(海島開發論)'
고려 조정은 대비책으로 2가지 대안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는 적이 침입해 오는 길목에 위치한 섬에
군사와 주민들을 들여보내서 이들로 하여금
섬을 방비하도록 하여 섬을 개발하자는 제안.
하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진도, 장산도, 압해도, 흑산도 등
서남해 치소를 모두 내륙으로 이동.
섬 주민들도 강제로 육지로 내보냈다.
섬을 비우는 정책.,공도정책(空島政策).
그 무렵에 영산도 주민들은
영산강 뱃길을 거슬러 올라와
영산포 일대 나주에 정착했을듯.
영산도.
영산강,
영산포
3 지명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듯 하다.
그당시, 신안군 대부분의 섬주민들은
공도정책으로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고향을 모두 다 등지지 못했으리라.
그들에게 고향은 조상 대대로
삶의 터전이기에 영산강을 따라서
'영산도 ~ 영산포' 뱃길을 오고가며
계절따라 섬과 뭍에서 번갈아 살았을듯.
황금어장 시기에는 섬에서
농번기 일손 바쁠땐 뭍에서
양쪽에 생활근거를 두었을듯.
그후 뭍에 아예 정착한 섬주민도 있었고
다시 섬으로 되돌아간 주민도 있었으리라.
신안군 섬주민들도 이 상황은 비슷했으리라.
조선시대에도 연이어진
해금정책 그리고 공도정책.
그때마다 이 같은 상황이 반복.
.
........영산강 하구둑.......
전라남도 목포시 옥암동과
영암군 삼호읍을 연결하여.
영산강과 황해를 막는 하굿둑.
영산강하구언은 길이 4,350m, 최대높이 20m.
토석제(土石提)방식으로, 배후 호수인 영산호는
저수량 2억 5000만톤이며 영산강은 조석 영향차가
너무 커 나주 부근까지 미쳐 연안 농경지에 하천 범람,
농토 침식 등의 피해를 주기 때문에 건설한 하굿둑이다.
영산강유역 개발 사업 1단계 장성,
담양,나주, 광주호의 완공에 이어,
제2단계 핵심사업으로 1978년 착공,
1981년에 완공되었다.
영산강하굿둑이 건설된 이후에
가장 큰 이점은 농토확대와 더이상
하천이 범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포시와 영암군이 도로로 연결.
교통편리 및 수자원 확보도 대폭 증가했다.
그러나, 영산강 수질은 꾸준히 심각하게 악화.
영산호 수위는 토사가 쌓여 점점 올라간다.
또한 강폭이 줄고 하구에 펼쳐진 갯벌이 감소.
낙후된 영산강하굿둑 구조개선이 이뤄지고 있다.
또한 영암군 삼호읍에
대불국가산업단지가 있고
'신안~부산' 국도 제2호선이
지나가는 구간이기 때문에 하루
평균 5만대이상 지나는 중요한 길목.
하지만 출·퇴근시간에는
엄청난 차량들로 인해 매우
혼잡하고 밀리는 현상이 벌어져
평소 2,3분만에 통과하는 거리를
교통체증으로 20/40분 이상 걸린다.
그래서 목포시는 우회도로인
목포대교 건설로 교통량을 줄였고,
서해안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를
연결하는 국도 제2호선 무영로가
교통량을 분산하고 있다.
영산강하굿둑 건설 이후
한때는 관광객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저 그런 상태이다.
영산강하굿둑 위에서
영암군에서 목포시 방향으로
풍경과 야경은 볼만한 장소로 각광.
...............................................
영산강
나주 영산포 홍어거리
나주 동양척식 주식회사.,엣 건물.
............동양척식 주식회사............
동양 척식은 한국인을 아프게 한 이름.
일제강점기 한국경제와 농민착취에 앞장.
한국, 만주, 동남아시아에까지., 검은 손길.
1911년 봄, 전라도 나주군 왕곡면.,한 할머니는
자기네 논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일본인이 헌병과 순사까지 대동하여 논두렁에 팻말.
“남의 논에서 무엇을 하는 게요?”
“보면 모르겠소? 여기는 동양 척식 땅.”
“누, 누구 땅이라고?
여긴 내 땅이오. 내 땅!”
할머니는 팻말을 뽑으려 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떠밀리고 말았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무엇을 하는 회사였기에
남의 논에 팻말을 박고 주인 행세를 하려든걸까?
1908년 12월, 일본인을 한국에 이민시키는 회사로 설립.
서울에 본사를 두고, 부산, 대구, 목포, 사리원, 평양 등
9도시에 지점을 세우고, 한국 경제발전을 위한다고 주장.
“일본은 한국경제 발전을 도울 책임이 있기 때문에
회사를 세워 자원개발하고 산업을 일으키려 합니다.
경험이 많고 부지런한 일본 농부를 한국에 이민시켜
농업기술을 전수, 한국인에게 돈도 빌려 주겠습니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이 같은 구실로
대한제국 정부 소유의 토지를 받아 냈고,
일본 정부에서는 해마다 사업비를 받았다.
동양척식 주식회사는 한일 정부가
함께 사업비용을 댄 특수 회사였다.
그런데 자원개발 산업을 일으킨다던 회사는
헌병들을 앞세워 헐값에 땅을 사들이기 바빴다.
마음에 드는 곳을 차지하려고 농민협박, 농사 방해.
특히 날씨가 따뜻하고 농사가 잘 되는
남쪽 지방에 눈독을 들여 살기 좋은 곳에
일본인을 이민시키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왜 자국민을
조선 땅에 이민
시키려 했던걸까?
당시 일본은 근대화를 거치며
여러 사회 문제를 안고 있었다.
산업이 발전하자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렸지만, 집이나 식량이
부족해 일본에서 고통겪고 있었다.
품삯도 적어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자 일본은 일본인을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보내려했지만 두 나라 모두 거절.
그래서 남아메리카 브라질, 페루 농업 이민.
한국으로도 눈돌렸는데 자국민을 이민시키면
가난한 도시민 문제도 해결되고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을 때를 대비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앞세운 것.
그러나 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땅 주인이 되며 사정이 달라졌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계약 기간만
농사짓게 했고, 소작인이 마음에 안들면
계약을 깨거나 다시 계약을 맺지 않았던 것.
소작료도 껑충 뛰었다.
더욱이 땅 주인이 내야 할
세금, 비료 값, 씨앗 값까지
모두 소작인에게 떠넘겼던 것.
이것을 내지 못하면
동양 척식은 농민의 집을
쓸어 가다시피 빼앗았던 것.
볏짚이든 물동이든 이불이든
그릇이든 가리지 않고 가져갔다.
"모두 다 가져가거라.
숟가락조차 필요없다.”
먹을 게 없으니
숟가락마저 필요
없다는 울부짖음.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한국 농민들에게 높은 이자를 받고 빌려 주었다.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하면
빌린 돈보다 훨씬 값나가는
땅을 강제로 빼앗았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점령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본격적으로
일본 이민자를 모집하며 한국으로
이주하는 일본인이 늘면서 한국인은
농사를 지을 곳이 없어 살 곳을 찾아
한국농민은 간도, 만주로 떠나야 했다.
농민대부분 추운 겨울에 만주로 떠났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살림살이를 정리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추운 겨울에, 가난한
농민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야 했던 것.
짐이라야 이불 보따리 하나,
옷가지 몇 개, 숟가락이 전부.
남편이 단출한 이삿짐을 등에 지고,
아내가 아이를 업으면 이사 준비 끝.
“일본 사람은 쌀밥 먹으러 한국에 오는데
우리는 잡곡밥 먹자고 만주로 떠나는구나!”
사람들은 탄식을 내뱉으며 고향을 등졌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시인 이상화는
국경을 넘는 이들을
보면서 이런 시를 썼다.
아, 가도다, 가도다, 쫓겨가도다
잊음 속에 있는 간도와 요동벌로
주린 목숨 움켜쥐고, 쫓겨가도다.
을사조약 이후에 조국을 떠난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를 찾았다.
한국인 마을에다 학교를 세웠고,
군대를 키워 일본군 전투에서 승리.
그러나 등 떠밀려 쫓겨나다시피 한
농민들에게 만주나 간도는 척박한 땅.
농사를 지을 땅도, 잠을 잘 집도 없어서
간신히 바람만 막은 곳에서 생활했던 것.
그래도 황무지를 부지런히 가꾸면
땅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에 호미질,
곡괭이질을 멈추지 않았던 한국인마을.
1930년대 들어 만주이주 한국인들이 늘었다.
일본이 ‘만주국’이라는 꼭두각시 정부를 세우고
이민자를 모집해 한국 사람을 단체로 이민시켰다.
“한국처럼 땅이 좁고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가난을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광활한 만주는
무엇이든 풍족. 한국인마을에 집까지 지어 놓았으니
이민을 신청하십시오. 농기구나 씨앗도 모두 줍니다.”
일본은 만주만 가면
저절로 부자가 될 것처럼
떠벌렸고 한국 사람은 그 말에
속아 이민 길에 올랐지요. 그러나
만주는 일본이 말한 모습과는 정반대.
척박한 땅에
다 쓰러져가는
움막이 전부였다.
한국인 마을은 독립운동가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공격 못할 테니까.
마을 주민들은 낮에는 거친 땅을 일구고
밤이면 흙성을 쌓거나 구덩이를 파는 일.
이무렵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만주까지 진출.
그래서 중국의 황폐한 땅을 값싸게 사들여
비싸게 팔거나 힘들여 농사를 지어 놓으면
이자와 세금으로 다 뜯어다 한국 농민들은
만주에서도 (주)동양척식 횡포에 시달렸다.
..........................................................
나주 영산포 동양척식 주식회사.,문서고.
전남 나주.,영산포구 마을.
2013.09.14 나주 풍류락도 영산가람길
전라남도 담양군·장성군·광주광역시·
나주시·함평군·무안군·영암군·목포시
등을 지나., 서해로 흘러드는.,영산강.
길이 138.75㎞,
유역면적 3,371㎢.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병풍산(屛風山 : 822m)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장성호를 이룬 후,
황룡강(黃龍江)이라 불리다가 장성읍
북서쪽에서 월계천(月桂川)을 합류.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서 평림천(平林川)을,
송대동 부근에서 극락강을,
나주시 금천면 북쪽에서
지석천(드들강)을 합해
남서쪽으로 흐른다.
이어 나주시와 함평군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영산호를 지나 영산강하구둑의
배수갑문을 통과해 서해로 흘러든다.
..............
..............
전라남도 담양군·장성군·광주광역시·
나주시·함평군·무안군·영암군·목포시
등을 지나 서해로 흘러드는.,영산강.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병풍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
장성호를 이룬 후, 배수갑문을 통과해 서해로 유입.
영산강 옛이름은 금천· 금강, 나루터는 금강진
영산강하구둑의 완공으로 남해만·영암만·도포만
등의 바다는 영산강 유역으로 편입, 지면이 높은
갯벌은 농경지화 , 물은 바닷물에서 담수로 바뀌었다.
........................영산강.........................
통일신라 때 나주 옛이름이 금성(錦城)이었기에
금천(錦川)·금강(錦江), 나루터는 금강진(錦江津).
고려 때 신안군 흑산면 영산도(永山島) 사람들이
왜구를 피해 이곳에 마을을 개척해 영산포(榮山浦).
조선초 영산포가 크게 번창하자
강 이름도 영산강으로 바뀌었다.
영산강 유역의 충적평야는 화강암지역으로
저평한 구릉지를 이루고 토양배수가 불량한 편.
상당히 비옥하여 평야의 대부분이 논으로 이용된다.
주요평야는 나주시 일대의 나주평야,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 일대의 서석평야,
함평군 학교면 일대의 학교평야 등이며,
영산강 유역에 펼쳐진 전남평야 핵심부.
유역 내에서는 쌀이 주로 나며,
나주 배·복숭아·포도, 나주·송정 채소,
학교의 양파· 마늘 재배가 유명하다.
영산강 유역은 예로부터 땅이 기름지고
바다와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청동기시대
지석묘군이 영암, 나주 일대에서, 백제 고분군이
영암군 시종면과 나주시 반남면 일대에서 발견되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이 강은 나주까지 조수가 밀려오는
감조하천(感潮河川)으로 바닷물 피해가 많았고,
홍수의 위험성도 매우 높았다.
그러나 1976년에 나주댐·담양댐·장성댐이 완공,
1981년 12월에 목포시 옥암동과 영암군 삼호면
나불리 사이에 영산강하구둑이 완공됨으로써
이 일대는 가뭄과 홍수, 염해로부터 벗어났다.
또한 영산강하구둑의 완공으로
남해만·영암만·도포만 등의 바다는
영산강 유역으로 편입되었고,
지면이 높은 갯벌은 농경지화되었으며,
물은 바닷물에서 담수로 바뀌었다
(영산강지구농업종합개발사업).
그리고
바다로 흘러들었던 하천
삼포강(三浦江 : 23.5㎞)·
영암천(靈巖川 : 14㎞)·
도갑천(道岬川 : 18㎞)
등의 하천이 모두
영산강의 한 지류.
예로부터 수운이 발달해
목포-영산강(나주시 영산동)
간에 배가 왕래했으나 1977년 10월
마지막 배가 떠남으로써 수운기능 중단.
영산포는 농산물의 집산지로서
이 지역 경제의 중심지역으로 부상해
목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급성장했다.
8·15해방 후에도 수운이 이루어져
20~30t급 어선이 20~40척 정박 가능.
1970년대 상류의 댐 건설 후
하상의 변동과 수량의 감소 및
영산강하구둑의 건설로 하류부의
수위가 낮아져 얕은 여울이 되었다.
................................................
.
2015.06.13
1970년대까지 돛단배 증기선 북적이던 영산포.
영산포 홍어는 굽이굽이 영산강 뱃길따라 올라와
닻을 내리면 잡힌 홍어가 먼 뱃길을 올라오는 사이에
자연발효되어 독특하고 절묘한 맛을 내는 웰빙 식품이다.
옛 영산포구가 있던 자리에 40여 곳
홍어음식점과 도매상이 들어서 있다.
홍어거리에 들어서면 홍어 냄새가 진동.
고려 말, 흑산도를 비롯한 전라도
도서지역에는 왜구 침입이 잦았다.
늘 생명의 위협을 받던 섬주민들이
강을 따라 뭍으로 거슬러 올라왔는데,
그곳이 바로 나주의 영산포였다고 한다.
특히, 흑산도 주변의 영산도에서 피신을 왔던
사람들이 많아 마을 이름이 영산포가 되었단다.
이들은 육지로 왔어도 어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흑산도 인근에서 고기를 잡아 배에 싣고 돌아왔는데,
더운 날이면 다른 생선은 썩어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홍어 만은 삭힌 후에 먹어도 아무런 탈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삭힌 홍어는
영산포 특산물이 된 것.
조선후기 학자 정약전 '자산어보'에는
“나주인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데,
탁주 안주로 곁들여 먹는다.”라고 기록.
.
2017.07.06
영산도
........
홍도
.........
2012년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인 관광지 100선’ 중 1위에 선정.
거친 파도와 바람이 빚어낸.,환상의 섬.
연평균 2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명소.
섬 주위에 펼쳐진 크고 작은 무인도.
깎아지른 절벽들, 형언할 수 없는 절경.
눈시리도록 푸른 바다, 울창한 숲의 조화.
물이 맑고 투명해 바람이 없는 날
바닷속 10㎞가 넘게 들여다보인다.
바다밑 경관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유람선 선상에서 바라보는 남문바위 등
홍도 10경은 관광객의 탄성을 자아낸다.
선상에서 즐기는 회 맛 또한 일품이다.
홍도에 가서 유람선을 타지 않는다면
영화관에서 영화 보지 않은 것과 같다.
유람선 투어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다.
홍도로 가는 길목에 흑산도는
가수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그리고 ‘흑산홍어’로 유명하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
생태적으로도 청정지역이다.
정약전 유적지, 철새전시관,
상라봉굽이길, 명품마을 영산도,
장도습지 등이 있다
................
‘느림의 행복’
슬로시티 증도
.....................
2012년 한국관광공사 선정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00선’ 2위에 올랐고, 2015년에도
선정되는 등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증도 해송숲을 따라 걸으며
우전해변 바다 냄새에 취하고,
다양한 수생생물이 서식하는
광활한 갯벌에 또 한 번 취한다.
462만㎡(약 140만평) 규모.
단일 염전으론 국내 최대 규모
태평염전은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
옛날 방식 그대로 천일염을 만든다.
파란 하늘이빚어내는 반짝이는 소금.
자연의 경이로움에 또 한 번 놀란다.
‘모든 생물은
생명이 시작된
바다를 기억한다’
발생학적 논거에서 시작되는
소금박물관 여행도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경제사,
기술사, 사회사는 물론 예술과
신화를 넘나들며 인류와 함께한
소금의 역사를 재밌게 보여준다.
천일염을 배우고,
만들어 보는 과정을 통해
자연환경과 먹거리의 중요성을
체험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이외에도
염생식물원 갯벌생태 전시관 등 다양한 체험
...........
다도해
한눈에 보는
바다정원 송공산.
.......................
송공산 분재공원은
다도해가 한눈에 보이는
송공산 남쪽 기슭 10㏊ 부지
분재원, 쇼나조각,
미니 수목원,화목원,
산림욕장, 미술관 등.
바쁜 현대인들이 자연 속
분재와 미술작품을 보면서
마음의 여유와 평안을 찾도록
조성한 자연 친화적인 분재공원.
분재원에는 소나무, 주목, 소사나무,
모과나무, 먼나무, 팽나무, 금솔, 금송,
피라칸사 등 1000여점의 분재와 신안 출신
우암 박용규 화백의 작품 등이 전시돼 있다.
...........................
12㎞ 백사장을 걸으며
추억 쌓는 대광해수욕장
.................................
임자도 서쪽에 위치한 대광해수욕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넓은 해수욕장.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백사장.
길이 12㎞에 달하며 폭은 300m가 넘는다.
끝에서 끝까지 가려면 걸어서 1시간 20분.
1990년 국민관광지 지정.
완만한 경사와 따뜻한 수온,
광활한 백사장에 넓은 야영장.
천연 잔디, 운동장, 체육시설,
샤워장, 숙박시설 등 편의시설.
가족 단위의 피서객은 물론
학생들 수련회 및 운동선수들
전지훈련장으로도 인기다.
모래 해변에서 즐기는
승마체험은 색다른 체험.
매년 4월이면 국내 최대규모
튤립단지에서 ‘튤립축제’ 개최.
비금도
기사 이세돌
기념관 생가· 명사십리
비금도는 조훈현에 이어
한국바둑을 이끌어가는
천재기사 이세돌 출생지.
하의도
6칸 초가집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
하의도는 제15대 대통령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후광 김대중 거목 고장.
김 전 대통령은 1924년 하의면
후광리 원후광마을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 출생.
김대중 전 대통령 호.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
생가는 1999년 종친들이
복원해 신안군에 기증했다.
복원된 생가는 6칸 초가집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기에
과거로 돌아간 느낌도 준다.
생가의 앞쪽에는 하의면의
전통적인 염전 체험장이 있어
탐방로와 소금전시관도 갈수 있다.
.......영산도(永山島)
전남 신안군 흑산면 영산리.,섬.
영산화가 많이 핀다고 하여 영산도.
동경 125°28′, 북위 34°38′
목포에서 서쪽으로 84㎞,
진도에서 서북쪽으로 60.4㎞
면적 2.25㎢
해안선 7.9㎞.
대흑산도·가거도·대둔도(大屯島)·
다물도(多物島)·대장도(大長島)
등과 함께 흑산군도를 이룬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
지질은 대부분 규암과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동쪽 해안은 단조롭고 급경사 사면인 반면,
북서쪽 해안은 완만한 경사에.,갑. 만 형성.
대부분 암석해안.,해식애(海蝕崖) 발달.
1월 평균기온 2℃,
8월 평균기온 26℃,
연강수량.,1,112㎜.
2009년 기준으로 인구는 103명(남 56명, 여 47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세대수는 59세대이다. 취락은 북서 해안의 만입부(灣入部)에 집중해 있다. 토지이용 현황은 논은 없고 밭 0.11㎢, 임야 2.04㎢로 대부분 산지를 이룬다.
농산물은 콩·고구마·보리·채소 등이 생산된다. 난류인 제주해류가 통과하는 인근해역은 난류어족을 비롯한 각종 어족이 풍부하다. 주요 어획물로는 잡어·장어·전복·농어 등이 있고, 전복·홍합·다시마 양식도 한다.
당산창송(堂山蒼松)·기봉조휘(箕峰朝輝)·비류폭포(飛流瀑布) 등 영산팔경(永山八景)이 유명한데, 가장 대표적인 곳은 제7경인 석주대문(石柱大門)이다. 청나라와 교역을 할 때 이곳을 지나는 배들이 풍랑을 만나게 되면 이 대문안으로 대피하였다고 한다. 교통은 흑산도에서 도선이 운항된다. 교육기관으로는 흑산초등학교 영산분교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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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은 대부분 규암과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낮은 산지(최고높이 220m)들이 남동해안쪽으로 급경사의 사면을 이루는 반면, 북서쪽으로는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해안지역에서는 갑과 만을 이룬다. 북서해안을 제외한 대부분의 해안은 암석해안으로 단애를 이루는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주요 어획물로는 잡어, 장어, 전복, 농어 등이 있고, 전복양식도 한다. 취락은 북서해안의 만입부에 집중하여 있으며, 만입구에 선착장이 있다. 정기여객선이 격일제로 운항되며,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분교 1개교가 있다.
영산화가 많이 핀다고 하여 영산도라 부르게 되었고, 1650년경 최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전한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전형적인 시아치인 구멍 바위를 비롯, 해안의 절경이 아름다워 영산팔경으로 유명하다.
* 면적 2.20㎢, 해안선길이 7.9㎞
장도 & 영산도
다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