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987년 영화가 개봉되어 화제인데, 아직껏 못보고 있다...
81학번인 나로서는 너무나도 생생한 당시의 치열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사회인으로 다시 시위대에 설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볼 마음의 준비를 단디 하고서 봐야겠단 생각밖에 들지않는다...
그러던 차에 엣 여행동호회 사람들 신년에 순천에서 모인단다...
그 김에 벌교를, 태백산맥 문학길을 다시 한 번 걸어보기로 하였다...6년이나 지난 시간 속에 벌교는 얼마나 바뀌었으며, 이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은 얼마나 바뀌어 있는지...확인을 하고 싶었다...
토요일 6시 18분 부전역 발 목포행 열차...간밤의 피곤함을 그대로 안고서 울산의 이산정조님과 함께 따뜻한 두유 촉촉한 반숙계란을 갖고서 열차에 오른다...
슬며시 잠이 들었다...그 속에서 갈대가 마구 휘날리는 붉은 석양 가운데 벌교천 하구에 서있는 나를 발견한다...왜 그런 꿈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진주...역사가 옮겨진 듯하다...그리고 시간이 엄청 단축되어 있다...복선화하고 선형을 개량하니 그런 듯하다...내 친한 초등학교 후배가 이 선로의 신호체계를 만드는데 참여했었다는 생각이 난다...
열차는 제법 빠른 속도로 하동을 지나 섬진강을 넘어간다...
섬진강 철교를 기차로 넘어가는 것이 얼마만인지...대학시절 이후론 처음이다...
그떼 김해 진영에서 아침 9시 조금 지나 순천가는 기차를 탔었는데, 순천 도착하니 6시가 넘어 황당했었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지금은 부전에서 순천까지 3시간여면 도착하고 있으니 세상이 좋아진 것 맞겠지...?
순천역까지는 3시간 조금 지나 도착했었지만 이후로 목포까지는 아직 단선철도...
기차가 완연히 느릿느릿 달리는 느낌이 난다...비둘기호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렇게 해서 열차는 괴목을 지나 벌교역에 10시 거의 정각에 도착하였다...
저 앞 우리를 반겨주는 꼬막 표지판이 촌스럽기도 하고 소박하기도 하고...재밌다...
역앞에서 대구의 후배를 만나 본격적인 벌교 뚜벅이 기행을 시작한다...
벌교는 이름도 없는 갯가 항구였다...하지만 일제는 목포 - 부산간 중간쯤에 곡물수탈을 위한 중간거점을 만들기 위해 이 벌교를 키웠다...
4개의 리를 엮어 벌교면을 만들고 다시 벌교읍으로 승격을 시켰으니, 보성군 벌교읍이 아니라 숫제 '벌교군' 수준으로 만들고 일본인들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벌교천을 따라 배를 타고 일본인들은 속속 들어왔고 든이 흥청망청 돌자 주먹패들도 끼였다...그래서 '벌교가서 주먹자랑 힘자랑 하지말라' 했던가...?
역을 지나면 벌교시장이 나온다...꼬막과 굴, 그리고 참다래가 지금 가장 많이 나와있는 특산물들이다...
이를 지나치면 현대다리인 부용교가 있고 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측으로 내려가는 길이 중도방죽 가는 길이다...
인텔리이자 좌익운동의 핵심이었던, 그리고 나중에 빨치산 대장이 되었던 염상진...
항상 형을 시기하던 동생이자 주먹패 염상구...
염상구는 당시 벌교의 주먹 왕초였던 땅벌과 벌교를 놓고 맞짱을 뜬다...담력테스트로...
저 철다리 중간에 서서 기차가 다가올때 끝까지 뛰어내리지 않는 자가 이기는 것으로...한국판 치킨 게임이라 해야 할까...?
여기서 이긴 염상구는 그를 광주로 보내버리고 이곳의 왕초가 되는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눈에 확 띠는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여기에 서있으니 당시의 기분을 어느 정도 이해할 듯하다...
"꽤~액!"하고 기적을 울리며 다가서는 증기기관차...그 앞의 두 사람...비장한, 그러나 조금은 겁먹은 표정...
철다리 입구를 지나면 중도방죽이 이어진다...
당시 이곳의 대지주였던 일본인 나카지마(中島)의 이름을 딴 방죽...하지만 여기의 방죽은 벌교천 하구와 바닷뻘을 막아 멀리 제석산이 보이는 저 넓은 평야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방죽을 쌓는 일에 열심히 한 이들 순서로 소적권을 주겠다고 한다...소유권도 아닌 소작권...
민초들은 목도를 지고 무거운 돌을 이고 날라 저 뻘속에 박아넣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방죽 안으로 논이 만들어졌고 민초들은 거기서 말이 절반이지 물세 비료대 놉 등등을 포함하면 80%에 달하는 소작료에 등이 휘며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해방이 되자 이승만 정권은 새로운 돈있고 빽있는 신흥지주들에게 손을 들어주었고 한 뼘의 내땅을 소박하게 바라던 농민들의 꿈을 산산이 부숴버렸다...농지개혁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그들은 서서히 빨치산이 되어 갔던 것이다...심정적으로...
"아 그래서 나가 해방이 되아뿌려도 박수를 치지 않았으라..."
방죽 끝 뻘 맞은편에 선창이 있었고 거기가 쌀가마들이 즐비하게 들어찬 창고들이 있었다...
그렇게 중도방죽을 둘러본 우리들은 바닷물이 올라오는 벌교천을 따라 이제 조정래를 만나러 간다...
신 부용교 다리 앞에서 우측 벌교터미널 방향으로 가서 터미널을 지나면 길건너 제석산 자락으로 조정래 문학관 올라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그 길 끝 등산로 시작점에는 작은 집 한 채, 큰 집이 한 채가 보인다...
좌측의 작은 집은 소화(素花)네 집으로 소설에 나온다...
무당 월녀의 딸로 좌익운동을 하던 정하섭이 이곳으로 숨어들어 그의 심부름을 하다 결국 두 사람은 맺어지게 된다...
그의 모습, 그리고 야학을 하던 선생님들을 돕다 스스로 좌익으로 돌아선 그녀는 잡혀서 감옥에 들어가지만 정하섭의 아이를 낳게 된다...그렇게 대는 이어지는 것이리라...
뒤의 대나무숲이 여기는 무녀의 당집이다...하고 바람에 속삭이듯 대나무잎의 서걱거림이 들려온다...
바로 옆은 소설의 현부자네...원래는박씨 문중의 집이다...
들어가는 대문 입구 원래는 솟을대문이 되어야 할 자리에 현대식 누각이 있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정채로 올라서는 곳에 작은 눈썹지붕이 달려있으며, 안에는 둘러보기가 어렵게 되어 있으나 소화와 정하섭이 몸을 섞은 현대식 목욕탕이 있어서 이 집은 근대에 조선양식과 일본양식이 묘하게 어우러진 집이다...
바로 앞에는 태백산맥 문학관이 있다...
작가 조정래는 시조시인지자 교육자, 또 승려였던 조종현의 아들로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이곳 벌교상고에 교사로 왔을 때 그돌 옆 관사에서 살았으며, 북 국민학교를 다녔다...그러다 광주로 다시 가게 되었기에 그가 실제로 이곳에 살았던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지만, 당시의 보고 들은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는 이 역사적인 대하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조정래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치밀하게 사전작업을 합니다...
벌교의 지도며 지명들, 가게들을 정확히 설정하고 인간군상 278명의 캐릭터들을 만든 다음, 비로소 한 자 한 자 원고지를 메꿔가기 시작합니다...
그 원고지 분량이 저 위의 것입니다...
저 위의 두 원고지 뭉치는 그가 그의 아들과 며느리를 시켜 필사를 하게 한 원고입니다...
이렇게 탄생한 소설 '태백산맥'은 무려 11년간 한 사람의 고소에 의해 표류를 하게 됩니다...반공법...
그리고 검찰들의 눈치보기로 그 오랜 시간 파묻혔다가 겨우 빛을 보고서 책으로 완간되었습니다...
같이 여기를 둘러본 두 사람은 징헌 전라도 사투리의 리듬을 타지 못해 이 책을 읽다 말았다는데, 그게 핵심인데...
태백산맥의 그 사투리체 날것 그대로의 대화들이 바로 문학을 진정으로 민중들에게 돌려주었다는 찬사를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문학관을 천천히 꼼꼼하게 둘러보고서 다시 길을 나섭니다...
벌교상고를 지나 우측 골목길로 해서 오르면 회정리 교회가 나타납니다...
이곳은 1935년에 지어진 교회로서 소설에는 야학이 설치된 곳으로 나옵니다...
소설에서 서민영은 배운 사람으로서 자신의 재산을 모두 분배하고 야학도 설치하는 적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교사를 하다 잘린 이지숙, 율어 공무원이었다가 잘린 이주사 등이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은 잔잔하게 우리들에게 시대의 아픔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2시 반 가까운...
6년전까지 들르던 꼬막집으로 갑니다...가격은 부산보다 비싸지만, 이곳 꼬막을 쓰고 무엇보다 서대구이 등 10여가지의 반찬이 입에 착착 달라붙기 때문입니다...
막걸리 한 잔에 반찬을 싹 비우고...
그때 아직 청소년이던 이 집 따님이 어느새 홀 서빙을 하고 있네요...ㅎㅎ
소화다리 앞으로 가면 꼬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식당의 이름이 외서댁 꼬막집...
......................
아시죠...? 외서댁...꼬막...
이 집은 저랑은 아무 관계는 없습니다...단지 상호가 필요해서요...ㅎㅎ
진짜 부용교 앞에 서서...
원래의 이름이 부용교지만 이곳 분들은 소화다리라 부릅니다...
정하섭의 여인 소화가 아니라 일제 연간인 쇼와(昭和)6년인 1921년에 만들어진 다리라 해서 이름이 그렇게 불리운답니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철제 난간이 공출로 없어지자 토벌군들은 좌익 빨치산들을, 좌익은 우릭과 지주들을 여기서 즉결처형하던 자리였다는 거...
다리 아래에는 늘 시체가 쎃여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아젠 돌난간도 가지고 있지만 사람만 다니고 옆으로는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새 다리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씻김굿이 필요하다면 바로 여기서 해야할 듯...
소설 속 김범우의 집은 실제 김씨 문중의 집으로서 현부자네와는 또 다른 대지주의 집이었습니다...
새로 쌓았지만 밖에서 보는 담장이 어마어마합니다...
집이 너무 낡아 좀 애처롭지만 고치고 있는 것을 보니 지원이 나오나봅니다...
살고계시는 분이 잘 둘러보고 문만 잘 닫고 가라며 인사를 해주십니다...
벽돌을 써서 담장을 치고 중간문에 서양식의 문양이 있는 등 역시 근대역사에 물이 든 모습을 많이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김범우의 모델이 된 이 집 아들은 조정래의 친구였다고 하며, 선생님 었던 그가 좌,우익을 함부로 처형하고 잡아가지 말라고 한 말 때문에 좌익으로 몰리며 치도곤을 하고 결국 나중에는 좌.우익 모두의 통역이 되었다가 좌익으로 돌아서는 모습은 당시의 지식인들의 고뇌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벌교를 상징하는 하나...홍교(虹橋)...
이 다리는 선암사의 두 승려가 월천공덕(鉞川功德)을 위해 만든 것이라는데, 홍예, 즉 아치(ARCH)가 3개로 보물로 지정된 다리는 이것 하나입니다...
저쪽편 아치 3개가 오리지널, 가까운쪽 생뚱맞은 것이 가리지널...새로 놓은 겁니다...
원래 홍교와 평다리가 이어져 있었다는데, 새로 놓은 다리 모습이 영 마뜩찮습니다...
이곳 벌교에서는 '횡갯다리'라 합니다...
저 건너편 산이 바로 유명한 부용산입니다...'부용산' 이란 노래는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던 노래입니다...
요즘은 안치환의 음성으로 더 익숙하죠...죽은 누이를 묻고 회한에 차서 부르는 노래...
다리를 건너 나지막한 건물들 사이에 우뚝한 한 건물...
원래 후생병원이었지만 소설에서는 전명환 원장의 자애병원으로 나옵니다...
그는 그 어떤 것을 초월하여 의술에만 매달린 인간적인 의사였습니다...
좌익도 우익도 토벌군도...그에겐 환자였습니다...치료하고 살려야 할...
횡갯다리를 지나 부용산 자락을 따라 난 길이 바로 벌교의 혼마치, 즉 본정통(本町通)입니다...
자애병원을 보고 골목을 지나 이 길로 접어드니 잘 볼 수 없는 삼각박공지붕의 일제시대 건물이 보입니다...
한겨레신문 벌교지국인데, 역사가 좀 되긴 한 듯...
부용산 올라가는 산책로 우측 공터는 2층의 목욕탕 건물이자 당시 청년단이이 있었다고 하는 곳입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사용했던 목조의 목욕탕이었고 2층은 염상구가 이끄는 청년단의 본거지였지요...
여기서 그들은 좌익 빨치산 의심자들을 고문하고 강간 등 온갖 짓들을 벌이던 곳입니다...
또한 염상구 자신도 좋아하던 솥공장 딸인 윤옥자를 빨치산으로 몰아 강간하고 억지로 사위가 되었지요...
부용산은 토벌대가 들어오자 당시 미군이 썼던 소총의 이름을 딴 M1고지라 불렀는데, 일반인들은 일본식의 발음 "에무완"이라 하다 결국 '애망산'이 되었다고...
그 옆으로는 태백산맥 소설을 핵심만 뽑아 해설과 함께 기록해 둔 돌판이 둘러진 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태백산맥을 읽지 않은 분들은 이것만 읽어도 일단 기본적이 맥락을 이해하기는 쉬울 겁니다...
벌교읍사무소는 으리으리합니다...
여기에는 이곳 출신의 음악가 채동선의 고향이기도 해서 '채동선 음악당'을 함께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 벌교읍으로 해서 당시 국민학교는 남.북으로두 개가 있었고 벌교읍 아이들은 대부분 남 국민학교에, 전학오거나 읍 이외의 아이들은 북 국민학교를 다녔다지요...
조정래 작가 역시 이여 북 국민학교를 다녔답니다...지금은 벌교여중으로...
원래 농촌의 협동조합 정신으로 만들어졌던 금융조합...
하지만 일제시대때는 지주들의 금고로 바뀌어 특정계층을 위한 기관이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겨우 단위농협으로 바뀔 때까지도 그들은 '돈의 권력'이었습니다...
지금은 전시관으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벌교초등학교...옛 남 국민학교...
토벌대들은 벌교에 진주해와서 이곳에서 열병식을 가졌고 아이들은 그 장면을 보며 재밌어합니다...
학교는 곧 좌익과 빨치산, 그들의 가족들을 가두고 문초하는 곳이 되지요...
여기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울부짖었는지...상상이 갑니다...
그리고...가장 유명한 장소인 남도여관...
보성여관인 이곳은 그대로 남겨져 현재 근대사관련 등록문화재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워크숍이 있어서 열띤 토론이 있었고 덕분에 우리는 입장료 1,000원을 내지 않고 들어가서 둘러볼 수 있었지요...
당시 솥공장이었던 곳...
염상구를 어쩔 수 없이 사위로 맞이해야했던...
역 조금 못미처 위치한 우체국은 옛 차부, 즉 버스 터미널 자리입니다...
염상구 일당은 이곳에서 자릿세를 뜯어갔지요...
차량들을 보니 어쩐지 실감이 납니다...
...그리고 다시 벌교역으로...
소설의 말미쯤 염상진은 국군 토벌대외 싸우다 장렬하게 죽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체는 이곳 벌교역앞에 효수되고...
이 시신을 거두는 것은 결국 그의 동생 염상구였습니다...
"아 죽어서도 빨갱이는 아닌 것이지라...!"
그렇게 10여km의 벌교 태백산맥 문학의 길을 둘러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망령처럼, 뫼비우스의 띠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념의 논쟁을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많은 생각들이 있겠으나 하나의 민족이 사상으로 갈리어 지금도 갈등을 겪고 있단 사실은,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심화하는 경향이 있음은 앞으로 우리가 어찌 해야할지에 대해 많은 화두를, 숙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찾은 와온해변의 처연한 석양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려봅니다...
(( 한 가지만...이념적 논쟁을 위해 쓴 글은 결코 아니므로 테마가 있는 걷는 길 기행문 정도로만 생각하며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첫댓글 뜻있는 새해 나들이를 하셨네요.
멋지심~~~^
그렇게 되어부럿네...신년 첫 나들이...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