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문학 확장을 위한 새로운 탐색 1.
홀수문화 속에서 탄생한 3장시조
우리는 흔히 시조 문학의 특장을 이야기 할 때 초 , 중 , 종장의 3장과 종장의 첫 어구가 3음절로 이루어지는 음보의 형식에 대해 말하곤 하는데 왜 3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에 대하여 더 깊은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시조 문학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우리의 전통문학은 신라의 향가에서부터 고려의 별곡, 조선의 가사로 이어지면서 시조의 워밍업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우리말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시조 문학의 정형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속에는 유교사상이 지배하는 당대의 시대적 요구도 있었겠지만 구태여 3이라고 하는 명시적이고 확고한 홀수가 필요했는지에 관한 논의는 적었던 것 같다 여기에는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전통 문화의 생활 관습이 전제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생활 관습으로 1, 3, 5, 7, 9의 홀수 문화가 있었다는 것과 홀수 중에서도 무엇보다 3이라고 하는 숫자가 밑받침 되어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홀수는 우리 정신문화의 깊은 뿌리다. 거슬러 올라가면 까마득한 시절부터 조선의 혼에 묻혀 내려온 민족정신의 숫자이다. 일상생활의 관습에서 얻어진 지혜의 소산으로 홀수는 딱 맞아 떨어지는 짝수에 비해서 넉넉하고 여유롭다. 그 중에서도 특히 3을 선호하는 생활 관습은 예사롭지 않다. 나라의 큰 명절이 대부분 홀숫날이며 생활 곳곳에 뿌리 내린 3의 관습도 매우 다양하다. 사람이 죽으면 3일장 아니면 5일장을 치르며 장례 후에 삼우제가 있고 49제가 있다. 심지어 제물을 올려도 홀수로 올리지 짝수로는 차리지 않는다. 돌탑을 쌓아도 3, 5, 7, 9 홀수 층으로 올렸을 때에 시각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애기를 낳고 금줄을 쳐도 세이레〔三七日〕동안 출입을 삼갔다. 홍익인간을 추구했던 환웅을 찾아온 곰과 호랑이 중 곰은 삼칠일을 견디면서 쑥과 마늘을 먹고 웅녀가 되었다. 三災가 있는가 하면 또 三才가 있다. 가까운 이웃을 일컬어 삼이웃이라는 좋은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거간질을 잘 하면 술이 석 잔이고 잘못 하면 뺨이 석 대다. 힘겨루기 판을 벌여도 삼판양승이거나 5판 3승제를 택하며 만세를 불러도 三唱까지 해야 속이 후련했다. 三冬이 있는가 하면 三伏이 있다. 무리를 일컬어 三三五五라 했고 빛과 색깔도 삼원색이 근원이다. 상고上古 시대에 우리나라 땅을 마련해 준 삼신三神이 있다 하여 생명신으로 섬긴다. 삼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목적한 것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생활 속 곳곳에 숨어있다. 그만큼 하나 둘 셋은 출발의 디딤돌이요 구름판이다. 이렇듯 3이라는 숫자는 우리들 생활의 중심에서 하나의 축을 이루며 이어 내려왔다.
우리 민족은 왜 홀수를 선호하게 된 것일까? 음의 기운인 달을 기준으로 생활해 온 동양사상이 어쩌면 짝지어지는 것을 은연중에 터부시 하면서 살았는지 모른다. 즉 딱 맞아 떨어진다는 강박감을 거부했으리라. 아귀가 척척 맞아 떨어지기보다는 좀 더 후덕한 인성과 넉넉한 생활양식이 한민족의 정서다. 두엇, 서넛, 여남은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숫자이면서도 훨씬 더 넉넉해 보인다. 그 위에 한 개쯤 더 얹으면 더욱 좋고 한 개쯤 빠져도 부족하지 않아 아무 유감이 없는 말맛이다. 그러고 보면 3은 4보다 크고 9는 10보다 넉넉하다. 어쩌면 덤 문화도 예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정부에서 아무리 정찰제를 권장해도 뿌리 깊은 덤 문화는 값을 깎고 실랑이 하는 중에 실거래 값이 매겨진다. 그런 습관은 비록 저울에 근을 달아서 시세대로 팔더라도 한 주먹 더 후하게 얹어 주어야만 서운치가 않지 그렇지 않으면 야박하다면서 고약한 인심 취급을 받았다.
고조선을 개국하기까지의 단군신화를 보더라도 홀수문화의 깊은 뿌리는 우리민족의 태생적인 것이었다. 홀수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3을 선호하는 우리 민족은 확실히 넉넉함을 생활의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그것은 어쩌면 하늘을 섬기고 땅을 믿었던 인간의 근본정신 天 地 人의 우주 근본 원리를 숭배했던 사상에서 내려 받은 것이리라 여겨진다.
깐깐하면서도 후덕했던 조선의 선비문학으로 시작된 시조 문학의 3장 구조 역시 생성의 근거를 이런 문화의식 속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초장에서 펼치고 중장에서 넓혀 나간 확대를 종장으로 갈무리하는 형식 구조다. 종장 첫 구의 글자 수가 3을 넘으면 안 되는 확고한 이유도 시조 전체를 견고하게 받치고 있는 축의 무게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시조는 3장이어야 한다기보다는 3장이기 때문에 시조라고 할 만큼 시조문학에서 3이 갖는 의미는 예사롭지 않다. 누가 딱히 정해 놓은 규범도 아니면서 오랜 세월을 두고 물살에 대낀 조약돌 같이 자연스럽게 자리매김 된 홀수의 미학에서 시조 문학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양반 문학으로 시작되었든 서민 문학에서 치고 올라왔든 민족 고유의 뿌리 깊은 홀수문화의 전통 속에서 자생된 장르라면 시조문학에서 가장 소중한 뼈대는 3장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펼치고 확대한 후에 종장에서 거두어 갈무리해주는 구조다. 이렇듯 장과 장끼리 연결하는 과정에서 높고 낮음의 말 놀림이 밀고 당기고 휘갑치면서 서로 유기적 관계로 조응한다. 한 줄의 글귀를 두고 자유시에서처럼 한 행이라 칭하지 않고 章이라고 칭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장마다 서로가 다르게 압축된 표현을 갖고 3장 구성이 전체적으로 완성될 때에 얻어지는 말의 맛과 가락이 비로소 한 편의 시조를 탄생시킨다. 반드시 열두 마디로 된 세 가닥 줄을 튕겼을 때 서로 부딪치면서 나오는 화음이야말로 시조를 탄생시키는 힘이다. 이것은 한두 줄만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시조에서만 느끼는 유장한 가락이요 독특한 음악이다.
3장의 가락이 조응하면서 춤추고 있는 빼어난 시조 두 편만 보고 가자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김종서)
어저 내일이여 그릴 줄 모르는고
이시랴 하드면 가라마는 제 구태어
보내고 그리는 정을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
소리 내서 읽어 보면 세 가닥 줄이 기-서-결로 이루어져 펼치고 뒤집으며 휘몰아 뿜어내는 특유의 정서와 그 정서가 주는 심미성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석 줄이 보기 좋거나 간단하고 편해서 정착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이유가 군말을 불허하는 분명하면서도 간결한 양반들의 문학으로 정착된 것이다. 종장의 첫 구가 3이어야 한다는 조건 역시 초장, 중장과 조응할 수 있는 축의 디딤돌로 확고하게 대못을 친 것이다.
시조 문학 확장을 위한 새로운 탐색 2
왜 사설시조인가
시조 쓰기에 있어 단수 쓰기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는 필자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의 견해가 개진되고 있다. 이는 오랜 세월동안 지속된 단수 연작 쓰기를 견제하는 말이 되며 실제로도 전보다 확연하게 단수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어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처음 시조가 탄생되던 때는 단수 한 편으로도 선비들은 정자에서 혹은 기방에서 기녀들과 하룻밤 어울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소리의 가락이 유장하고 풍류적이어서 시조창으로 부르자면 45자 내외로 족하던 때다. 그 후 시조를 혁신시키자면서 연작 쓰기를 제창하고부터 지금까지 시조 연작은 오래도록 시조 문학의 근간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신문학이 유입되고 현대문학으로 진행되면서 시조 문학은 신시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그 때마다 민족시로서의 전통성을 들고 나와 그 정당성을 얻으려 하였다. 아무렴! 지금도 시조 자체가 민족시로서의 독특한 장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긴 역사를 끌고 내려온 우리 문학사의 보배 같은 장르요, 귀한 문화유산이다. 몰론 간결하게 압축된 미학적 단수일 경우를 말한다. 더불어 정형이 갖는 틀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융통성이 있다는 여유 또한 부정할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서점에는 시조집이 없고 신춘문예에는 시조 투고가 부족하다. 교과서에도 시조 등재가 잘 안 된다. 이는 그 만큼 시 독자들이 시조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시조 문학이 지금처럼 답보 상태인 까닭은 시조 연작 쓰기에 어떤 문제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점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이는 시조인들이 당면한 현실 진단에 눈치를 보면서 주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조 예찬론이나 막연한 옹호론으로 무장한 대개의 시조작가들이 시조 쓰기를 연작 쓰기로 배우고 그렇게 쓰는 것을 답습해오면서 연작 쓰기의 문제점을 터놓고 공론화시켜 본 일이 없다. 현대시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견해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고시조와의 비교 내지는 현대성 제고라는 개괄적인 것이었을 뿐 시조형식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문제 삼아 터놓고 토론하는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둘째 시조는 과거의 시조에서 현대의 시조 문학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오늘날과 같은 관행 속에서 어떻게 쓰면 시를 좋아하는 독자를 시조 문학으로 모셔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화두로 안고 40여 년 간 시조만을 써 오다가 최근 들어 비로소 시조 문학의 부진이 연작 시조가 주는 지루한 반복 리듬에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근자에는 발표된 시조의 작품성만 보더라도 지나치게 주관화 되고 산문화되면서 난해해지고 있는 자유시보다 독자들의 선호도를 충족시킬 가능성이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시조는 여전히 뒷전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시조가 갖는 3장 6구의 음악적 특장은 민족시의 특허품이다. 성리학을 도입하고 유교사상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의 전유물로 도학적 양반 문학에 딱 맞아 떨어졌다. 창작되는 한 수 시조를 소리꾼의 입에 올려 즐기던 가사歌辭 풍류 시절 얘기다. 유교를 신봉하던 사대부들이 즐겨 쓰던 낭만적이며 관념적이던 언어구사가 또한 그렇다 그러나 다양한 생활 관습과 자유 속으로 들어가 살고 있는 21세기 현대인들의 문화로는 틀 속의 자유마저 불편하다.
문화는 역사와 더불어 변천하는 것을 생명으로 한다. 신라의 향가로부터 고려의 별곡, 조선의 가사 문학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는 정치적 사회적 변천과 궤를 같이한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서 변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역동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 시절,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음악성을 더 강조한 소리로서의 시조였지만 오늘날은 문학으로서의 시조를 요구한다. 바로 현대 시조 문학現代時調文學이다. 간판마저 단순한 시조時調가 아니라 시조로서의 시문학詩文學적 특성을 요구하고 있다. 미디어 문학으로서 외연을 확장할 기회도 크다.
다양한 표기와 표현 방법을 요구하는 현대 독자들에게 지금과 같이 4.4조의 반복 리듬으로 이어지는 연작 쓰기는 호감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 이는 작품성에 앞서 표기, 또는 표현에 관한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지적한다. 우리만의 독특한 장르 문학이란 것만을 자랑하며 보존하고 싶다면 좋아하는 사람끼리 동호회로 뭉쳐 있어도 된다. 하지만 시조 문학은 한국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전통문학으로서의 확고한 당위성과 현대문학으로의 숭고한 작품성을 동시에 확보해야 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1. 시조 연작의 반복 리듬은 시조 읽기를 지루하게 한다.
우리 가락 우리 말 맛도 단수였을 때의 느낌이지 3수 4수 5수 이상 반복되는 리듬은 읽기에 지루하다. 독자들이 시조를 외면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진단한다. 처음부터 시조만 써 오면서 필자가 체험한 결과다. 현대인의 감성은 반복되는 정형시의 가락을 선호하지 않는다. 작품성이 아무리 좋아도 같은 길이의 문장이 거듭되는 반복 리듬은 경음악을 듣는 것 같아 재미가 떨어진다. 시조는 3.4. 3.4 글자 수 맞추기가 아니라 7자의 기본 율에서 몇 자를 가감할 수 있는 융통성이 넉넉한 가락을 갖는다고 강조해 왔다. 때문에 음수율보다는 음보율을 더 강조하면서 무엇이고 담을 수 있는 넉넉한 그릇이라고 얘기한다. 그렇지만 그 융통성도 어쩔 수 없이 정해진 3장 6구의 틀 안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단수의 묘미를 넘어 연작으로 거듭해서 표현하면 내용까지 느슨해지며 단조로워져 탄력을 잃는다. 특히 단수였을 때 종장이 갖는 율격의 특장이나 구비치는 반전의 가락은 가슴을 휘돌아 먹먹함으로 차오르기도 하는데 이것을 연작 쓰기로 반복하면 점점 싱거워진다. 자유시를 쓰는 작가에 비해 손해가 많다. 사실 자유시에도 음악적 리듬은 얼마든지 있다. 운문 창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을 비롯한 새로운 문학 패턴의 도입을 주저하지 않았던 같은 시대의 자유시들을 보자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와사등瓦斯燈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 옆에서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그네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설야雪夜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울릉도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그날이 오면
모두 시조의 한 장章으로 놓아도 무리가 없을 만큼 말맛이 나는 4음보 율격이다. 우리 말맛에서 유발되는 음악적 요인은 우리 언어가 본디 지니고 있는 태생적인 것으로 한국문학의 어느 장르에서나 자연스럽게 만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2~3음절의 단어에 조사를 결합하면 대개가 3~4음절이 된다. 결코 시조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조 문학에서 강조하는 가락은 시조 쓰기를 거듭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이다. 시조의 기본 율을 마음에 두고 소리 내서 읽어보면 내가 쓴 시조가 기본 율에 충실했는지 아닌지는 저절로 드러난다. 다만 시조는 3장 6구의 정형성을 가질 뿐이다. 시조 문학의 시대적 요구와 사명감으로 문학의 질을 혁신시키기 위한 시조 문학의 창작 기본을 교육시키기보다 전통을 앞세워 음악적 요소만 강조하는 동안 복고풍에 빠지거나 관념적인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독자를 다 놓쳐버렸다.
2. 시조 연작은 통일감과 연속성 결여로 산만함을 느끼게 된다.
연작은 단수 짓기의 연속이다. 각 수首마다 3장이 갖는 기-서-결의 의미 구조가 종결된 후에 다시 둘째 수 셋째 수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연작 역시 각각의 수마다 시조로서의 짜임새가 튼튼한 완성품이어야 한다. 그렇게 기술된 여러 수가 한 편의 작품 속에서 통일된 주제로 묶여야 한다. 이것이 연작 시조의 기본 구조이면서 의미 구조다. 자유시에서 말하는 행이나 연의 구분하고는 아주 다르다. 그러다 보니 일반 독자들은 매 수에서 이야기의 편안한 연속성보다는 어떤 단절감을 느끼면서 감상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러운 연속성을 갖는 자유시에 비해서 확연하게 불리한 부분이며 연작을 쓰므로 해서 시조 특유의 긴장미와 압축미마저 느슨해지게 된다.
우리 것을 보존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한 세기가 다 되도록 이러한 연작 쓰기를 반복해 왔다. 그렇게 전수하고 전수받았으며, 한 번도 공론화되지 못한 채 배운 대로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시조 공모나 각종 시상에서 단수는 제외시키고 3수 이상의 연작만을 선에 넣고 있다. 시조를 통해 민족시의 긍지를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겠지만 민족의 전통성이 시대에 맞는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 채 신앙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3. 이야기 식으로 이어진 연작은 시조라고 보기 어렵다.
요즈음 발표되고 있는 연작 시조를 보면 겉모양만 시조일 뿐 시조 특유의 기본을 무시한 채 첫 수에서 시작된 내용을 이야기 식으로 둘째 수 셋째 수에 이어서 쓰고 있는 작품이 허다하다. 역량 있다는 정평을 듣거나 수상 경력이 많은 소문난 작가, 문단 일선에서 부지런히 활동하는 작가도 그렇다. 어떤 경우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쓴다고 한다. 시조를 몰라서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매이지 않는 새로운 시도를 위해 거침없이 쓰겠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는 시조의 본질에 맞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다.
작품을 쓰다 보면 말을 아끼고 절제하여 지엄하고도 단단한 단수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그렇게 풀어서 이야기 식으로 씀으로써 작품성이 더 극대화 될 수 있는 경우도 생긴다. 시적 대상에 따라 표현의 다양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서술체 대화체까지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시조의 기본 틀까지 훼손시키면서 겉모양만 유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현대시조라고 할 수가 있을까? 오히려 진정한 시조 문학의 시비거리가 되면서 일반 독자들까지 헷갈리게 만든다. 이런 경우야말로 과감하게 사설시조 형식을 수용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를 가질 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사설시조는 계속 외면당하고 있다. 이렇게 늘어놓는 연작 쓰기는 민요시나 풍월시와 같은 긴 글을 절제와 생략의 균제미로 탄생시켜 온 시조라고 하는 고유의 정형시를 오히려 시조문학 탄생되기 이전의 가사문학으로 되돌리는 난감한 경우가 되고 말 것이다.
4. 도식화된 3줄 표기법은 시각적으로 거부감을 갖는다.
시조문학의 3장과 세 줄(행)표기는 의미상 구분되어야 한다. 단수일 경우 3장을 세 줄로 표기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없지만 그것이 연작이 되어 3수 4수가 아홉 줄 또는 열두 줄로 똑 같은 간격을 두고 똑 같은 길이로 표기되는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 경우 독자는 읽기도 전에 시각적으로 모나고 규칙적이면서 획일화 된 모양에서 우선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런데도 무심해서인지 시조는 3장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인지 천편일률적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사고 속에서 다양한 정보와 예술을 갈구하는 현대인들이 호감하지 않는다. 이래저래 연작에서 오는 부작용이 크다. 그런가 하면 근자에는 사설시조도 아니면서 이야기 식으로 쓴 연작 시조를 매 수首에 관계없이 계속 붙여서 표기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으며 초,중,종장을 한 줄로 이어서 쓰는 사람도 생기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필자가 위에서 지적한 불편함(거부감)을 이들도 느끼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차라리 그보다는 문장의 의미에 따라 맺고 풀어주는 형식이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가령, 시조 단수에 있어서 7줄 8줄로 표기되더라도 그 안에 시조로서의 3장의 구분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표기가 다양할 뿐 파격의 불합리는 없다. 줄 바꾸기는 작품의 의중을 표현하는 뜻도 같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연작의 세 줄 표기도 시조문학 발전의 저해 요인이 되는 불리한 조건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낮선 여자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가상을 현실과 혼돈한다.
창밖은
막힌 하수구를 뚫는
공사 중 팻말
몽롱히 낮술에 취해
한 폭
춘화 그린다.
-최중태의 「개꿈―버스 안에서」-
개꿈은 그렇게 여러 갈래의 표기를 함으로써 의미상 분절이 되면서도 산만한 개꿈 같은 상상을 유발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행 배열도 단수일 경우 도드라지는 것이지 연작을 이런 식으로 분절하여 발표한다면 자칫 자유시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5. 사설시조 쓰기는 연작 시조의 좋은 대안이다.
한글로 처음 엮었다는 시조집 청구영언에 사설시조를 일컬어 만행청류蔓橫淸類라는 이름을 붙여 별도로 표기하고 있다. 歌, 詩, 調, 謠 같은 좋은 이름을 두고도 만횡청류라고 지칭했던 것만 봐도 사설시조는 어지럽고 삐딱하게 옆으로 가는 시조라고 이단시하여 무리 중에 끼어넣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시대에 엮은 첫 시조집에 같이 엮어진 사설시조라면 그 역사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어쩌면 단시조 쓰기 이전부터 워밍업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푸대접을 받아온 것이다.
매우 특이한 일은 작가미상으로 전해오는 그 내용들이 성애를 중심으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성의 문제는 빠질 수 없는 근간이 되는 소재다. 당연히 시적 대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 여건으로는 사대부들이 성에 대해서 드러내 놓고 자신의 이름을 올려 내놓기는 어려웠던 때다. 이것이 작가미상의 원인일 것이다. 풍자와 해학을 즐기던 선조들은 차명으로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사설시조는 사대부들에 의해 실제로 단시조와 같이 쓰이고 소통했을 것이며 반대로 서민층에서도 양반들의 허세를 비아냥거리는가 하면 지난至難한 삶의 문제를 담아내기도 했다.
사실 백성들의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민요ㅡ령 도라지 타령이나 군밤타령ㅡ에는 가사에 그런 성에 관한 표현까지 과감하게 전해지며, 이름 없는 춘화가 돌아다니면서 성적 표현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반열에 들지 못한 서민들의 사설시조는 인쇄되지 못했다. 때문에 고시조의 내용은 주로 선비들의 생활에서 나온 것으로 대개가 고전적이고 관념적인 한계에 갇혀 있다. 성리학이 주축이 된 유교사상이 내려준 뿌리 탓이었다.
그 후 외세의 침략으로 억압당한 시대, 군사문화와 같은 암흑기를 거쳐 오면서도 저항하고 외칠 수 있는 표현방법으로 매우 적합한 사설시조가 제 소리를 내지 못한 것은 시조문학으로서는 매우 암울한 역사다. 그 동안에도 시조문학은 전통과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시의 특성만 내세우면서 단수연작쓰기로 일관해 왔다. 내용면으로 보아 이호우의‘바람벌’은 시대적 아픔을 탄식하고 항거한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마저도 진귀한 시대였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국가가 어려울 때는 단시조 연작으로 쓰느니 보다 사설시조로의 표현이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설시조 역시 시조 문학이 요구하는 4.4음보의 리듬으로 표현되면서 역동적이고 설득력 있는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창작시를 쓰는 사람이 어찌 간명하게 절제된 방법만을 선택하겠는가. 시는 흥에서 나오는 것이고 흥을 살리자면 소리와 함께 춤이 나오게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광대의 기질로 확장되는 대하시조가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필자는 80년대에 발표된 조주환의『사할린의 민들레』같은 좋은 연작의 큰 시조가 독자들의 흔연대접을 받지 못하고 지나간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소설에 닿을 만큼의 큰 역사적 사건들을 1,226수의 시조로 엮은 것은 시조에 대한 열정과 나라사랑의 큰 뜻이 담겼음에도 독자들의 가슴에 안기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소리의 민요 시조에서 문자화 되는 시조로, 문자화 된 시조가 오늘날에는 미디어시조로 활성화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만큼 문학의 마당은 넓어졌다. 보다 다양한 시조 마당이 되어야 한다.
6. 판소리 사설집은 시조가락으로 된 고전소설이다.
1812년 조선 말기(순조 12년)에 태어난 신재효가 판소리 사설 여섯 마당을 정리하고 확장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일을 돌이켜보면 시조 문학을 하는 입장에서 너무나 가슴이 뛴다. 판소리 역시 우리 민족이 가진 독특한 문화다. 소리로서의 판소리가 그토록 장대한 소설적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데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판소리 사설은 어느 곳이고 펼쳐 읽어보면 4.4 음보로 된 시조 가락이다. 그 때까지도 시조 문학은 일부의 시객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사설시조를 접목하지 못하고 도외시해 왔던 것이다.
판소리 사설뿐 아니라 민요 쪽에서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아리랑 같은 타령조의 가사로 백성들의 원성을 소리에 담아내는 일이 이어져 왔다. 그것이 구전이든 창작가사든 간에 시대의 변천에 충실했다는 증거로 보이는데 이는 민중들 속에서 나온 것이라서 가능했던 것이다. 풍자는 물론 해학 개그의 골계미가 이야기 속에 선명하게 담긴 신명나는 가락으로 서민층을 파고들은 사설시조는 내용으로 보아서는 민중시 , 노동시, 참여시였고, 음악적으로는 발라드요 랩이었다. 소리꾼의 무대처럼 종합적이다. 서쪽에서 신시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우리말 토양에서 자생된 이야기가 생생하게 파닥이면서 어기찬 가락으로 넌출거리는 민중시가 있었으니 바로 조선의 앙가주망 사설시조다. 민요나 무당굿거리가 그렇고 사당패놀이, 상두꾼소리, 농요 등 한민족의 언어 관습이 모두 사설이었다. 소설과 무대 재담과 개그 눈물과 웃음이 농익은 장르다. 속담이나 비유 같은 우리의 생활문화가 온 사방에 산재해 있는 이런 다양한 소리 문화를 시조문학으로 용해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사설 고시조가 난삽한 성이야기로 알려진 것은 유교 사회의 폐쇄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민중들의 저항 정신은 반상班常의 엄격한 계급 사회의 반작용으로 표출된 위대한 민중 정신의 등장이다. 우리말이 갖는 속뜻은 단순하지 않고 다양한 해학과 비유를 갖고 있으니 이러한 여건들과 말맛의 토양이 사설시조가 탄생할 수 있는 근거요 바탕이라고 본다.
사설에 시조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 근거 역시 작품 전체가 단시조 형식과 같이 초장, 중장, 종장을 각각 분명하게 나누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자유시 운운하는 사람은 시조 문학을 알지 못하는 근거 없는 흠집내기요 사설시조로 인해서 단수 시조의 틀이 훼손될 염려가 있다는 걱정은 시조 문학의 기초를 크게 잘못 인식하고 있는 까닭이다. 또한 사설시조는 마치 풍자나 해학 같은 골계미로 국한되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이는 이미 조선시대에 나와 있는 작품을 근거로 하고 있을 뿐 다양한 현대에 살고 있는 지금은 모든 시적 대상을 수용하여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작가의 역량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시조 문학에 깊이 관계하고 있는 사람이 사설시조를 배타시하며 출판에서 제외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시조 문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이런 인식은 재고되어야 한다. 다만 잘못 써진 사설시조로 인해서 시빗거리가 나올 수 있겠지만 비뚤어진 모내기를 두고 논두렁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보다는 3장이 갖는 사설시조의 구체적인 형식 구조와 길이의 문제 등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근본문제를 갖고 활발한 토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공신력을 갖는 단체에서 먼저 사설시조 백일장 사설시조 공모전 같은 행사가 확대 병행되고, 신춘문예를 비롯한 수상 작품 역시 단수 시조나 사설시조를 뽑아 올려서 시조 문학이 활성화되고 발전하는 변곡점이 되어야 한다. 그런 결과물로 사설시조 연작도 나올 수 있고 사설시조 서사시 또는 현대판 판소리사설까지 시조 작가로부터 나와야 시조 문학의 특성과 함께 위대성까지 말할 수 있다.
시조 문학이 그렇게 확대 발전되어 갈 때 비로소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장르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독자층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7. 사설시조의 형식적 구조
사설시조 역시 단시조와 마찬가지로 3장 구조를 기본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까지 사설시조의 형식 구조에 관해서 활발하게 논의된 경우는 적지만 고시조를 근거로 한다면 초장의 길이는 단시조의 길이와 같거나 두 음절 이상 늘어날 수도 있다.
대부분은 중장의 길이가 길다. 중장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게 된다. 단시조에 있어서 중장에서 2구로 형식화되는 것과 같이 사설시조 중장 역시 2구로 나누어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길게 이어지는 중장 중간쯤에서 반전을 시도하는 표현 형식이다. 또한 사설시조라고 해서 4.4 음보로 계속되는 반복 리듬보다 중간에서 엇박자로 한 번쯤 리듬을 바꾸어주는 경우도 시도될 만하다. 사물패들이 한바탕 신나게 두들기다가 상쇠의 꽹과리 가락에 따라 멜로디를 바꾸어 보는 형식처럼 말이다. 그렇게 다양한 가락으로 새로운 면모를 시도하는 것은 좋지만 어디까지나 시조 문학이 안고 있는 기본 형식은 지켜져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자유시로 오해될 수 있다.
종장은 중장을 길게 끌어온 관계로 간결한 마무리를 보여야 한다. 단시조의 종장과 같이 3 5 4 3의 음수율 배열이 보통이지만 이 역시 기본 가락보다 넘칠 수 있다. 사설시조가 갖는 특권과 다양한 융통성이다. 그러나 모든 문장의 길이가 늘어날 때는 반드시 각 장이 담당하고 있는 필연적인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 가지 더 논의될 일은 사설시조라고 해서 지나친 장문長文이 된다면 이 또한 시조문학의 기본 취지와 멀어지면서 자유시로 오해되기 쉽다. 논의 대상으로 제기한다. 문장이 길어지는 중장 역시 평시조 쓰기와 마찬가지로 앞 구와 뒤 구를 구분하는 2구로 써야 한다는 것이 서벌 스승님의 이론이었다. 글자 수로 적당하게 나누기 보다는 내용적으로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마무리 하는 글
시조 창작을 하는 입장에서 그 동안에 필자가 공부하고 경험한 글을 올려 보았지만 공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써야 할 글감이 없어서 시조를 못 쓰겠다는 답답한 전화가 왔다. 다른 사람이 이미 다 썼다는 거다. 듣는 나도 답답하다. 세상 만물이 다 글감인데 글을 만들지 못 하는 눈이 청맹과니다. 남들이 아무리 먼저 썼더라도 내 글은 따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모두 같을 수가 없는 것이고 객관성과 보편성을 유지하면서도 독자의 눈을 끌어 들일 수 있는 것이 바로 개성이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깜깜이 개성 말고 아주 쉽고도 아름다운 언어로 다른 사람의 작품과는 분별되는 별난 개성을 독자들은 기다기고 있다. 고로,
시는 아무나 쓸 수 있지만 좋은 시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다.
시조는 앞으로도 계속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고 시조문학을 깊이 알게 되면 역시 시조 쓰기는 매력 있는 장르다.
|
출처: 현대 시조 원문보기 글쓴이: 고쿠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