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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3,26-33
그 무렵 바오로가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 가 회당에서 말하였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28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29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 뒤에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32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4,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
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고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요한 14,1-2)
이는 당신이 가시는 곳이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동시에 그곳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는 것을 통해 당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것도 밝혀줍니다.
그리고 당신은 본 바를 말하니, 아버지를 믿고 또한 당신을 믿으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그 거처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거처할 곳이 많아도 가서 거주하지 않으면, 그 집은 나의 거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알아듣지 못한 토마스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요한 14,5)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4)
사실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엄청난 발언이요,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으며,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또, 당신이 '진리'라 함은 그 뜻이(áληθεια)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은 곧 진리를 발견하고, 성부를 만난 사람이 됩니다.
또한, 당신이 '생명'이라 함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인 생명이심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5)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알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참된 앎의 길입니다.
그저 안다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그것을 믿을 때라야 그 앎을 진정 알게 됩니다.
‘참된 앎’은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서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요한 14,1)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살아 행복하고, 죽어 구원 받는>
옛날 형제들을 양성할 때 많이 얘기한 것이 성숙입니다.
양성이란 미성숙한 형제를 성숙한 형제로 키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숙과 미성숙을 얘기하면서 제일 먼저 얘기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있느냐, 있다면 뭐냐고 끈질기게 물었습니다.
바꿔 얘기하면 왜 사냐고 묻는 것이지요.
왜 사는지를 알아야 어떻게 사는지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미성숙하고 방황하는 인생은 인생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방황이란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 것인데, 목적이 뚜렷이 없으니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출가해야 하는데 가출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절에 가서 수행하려는 뚜렷한 목적으로 집을 나서면 출가인데, 목적도 이유도 없이 집이 싫어서 무작정 집을 나서면 가출이지요.
그리고 가출하여 방황하는 미성숙한 인생은 열심히 살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갈 데가 없는데 어떻게 열심히 갈 수 있습니까?
딱히 갈 데가 없으니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어슬렁거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떤 목적이든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야 열심히 살 수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사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그 목적이 단기적 목적입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는 대학 가는 것이 목적이고, 대학 가서는 취직하는 것이 목적이고,
취직해서는 결혼하고 애 낳고 알콩달콩 사는 것이 목적이고,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돈 버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죽는 것입니까?
죽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적입니까?
일찍이 저는 이 인생 문제로 오랫동안 고뇌와 방황을 했고 그 인생길을 찾고자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을 찾다가 10여 년 만에 찾은 목적이 바로 사는 동안 ‘행복한 것’, 죽어서 ‘구원받는 것’이고, 행복과 구원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 행복이요, 죽어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가는 이 길에 길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왜 사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찾기 위해 석가에게도 가고, 힌두 명상가들에게도 가고, 노자 공자에게도 갔지만,
그 길을 찾지 못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길을 찾고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오늘 주님 말씀이 너무 소중하고 일생 감사하는 저인데,
여러분에게도 이 말씀이 그런 말씀이기를 비는 오늘 저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남자들은 살면서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답니다.
첫째는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하고 둘째는 부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하며,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여성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와 둘째 못지않게 셋째가 중요한데 그것은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잘 안내해 주고, 모르는 길도 큰 어려움 없이 안전하게 도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엉뚱한 곳으로, 안내해 어려움을 주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의 안내자 역할에 내비게이션은 분명히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 여정을 살아가면서 때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물을 때가 있습니다.
최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목적도 방향도 없이 방황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에 안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 하느님 품 안에 쉬기까지 늘 불안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상에 목적을 두고 어떠한 처지, 상황이라도 감당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을 향한 확실한 내비게이션, 안내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당신을 ‘문’(요한 10,9)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종점이 아니라 종점에 이르는 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전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 자신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입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난다고 해서 마음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은 너희가 머물 곳을 아버지 집에 마련하러 가는 일시적인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산란함에 살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에서도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적인 이득을 따지게 되고 계산하면서 결국은 주님의 뜻과는 먼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다다르는 수단이십니다.
아버지와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니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분명하고 확실한 내비게이션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셔서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께서도 그 안에 사십니다.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완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구원을 알립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죽지 않는 생명을 드러내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내 삶을 주님의 삶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분은 그저 좋은 분으로 머물 뿐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매사에 내 뜻을 내려놓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실천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언 16,9)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만난 사람의 삶의 방식>
<금쪽같은 내새끼> 116회에서 ‘게임 캐릭터가 죽자 동생의 머리채를 잡고 무섭게 돌변한 금쪽이, 심지어 주먹질까지?!’란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금쪽이는 게임 캐릭터가 죽자 동생들을 심하게 괴롭힙니다.
그 캐릭터의 가치가 자신에겐 너무 큰 것입니다.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때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싸움은 나의 귀한 것을 누군가 때문에 잃었다고 여길 때 일어납니다.
누가 나의 똥을 훔쳐 갔다면 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은 게임 캐릭터가 자기 삶의 전부입니다.
왜 이렇게 집착하게 되었을까요?
어른으로 성장할 탈출구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숲에 있는데 뒤에서는 불이 나서 계속 내가 있는 곳으로 타고 있고 앞은 큰 강이 흐르는 수렁으로 막혀 있다고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불안하고 두려워서 숨을 곳을 찾게 되고 그 장소를 다른 사람이 노리고 있다면 싸움을 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 그 수렁 절벽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발견한다면 어떨까요?
그 자리 때문에 싸울 일은 없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곧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다리입니다.
진리란 말은 그 다리가 하나 뿐이란 뜻이고, 생명이란 말은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죽음 뿐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용서’가 그 생활 방식이 됩니다.
이 세상 것들이 모두 죽음과 관계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에사우로부터 도망칠 때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 계단을 만나야 합니다.
위 금쪽이들의 이야기에서 금쪽이들의 다리는 바로 부모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의 다리입니다.
그런데 그 다리가 휘청거려 아이들의 평화가 깨진다면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상에 갇히고 맙니다.
형제끼리 싸우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위 아이들의 부모는 매일 싸우고 이혼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저희 집이 가난하다고 아이들 앞에서 인격적인 모욕을 하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을 좋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미워할까요?
저는 아이가 아닙니다.
제가 장난감을 가지고 아이와 싸운다면 저는 아직 어른이 되는 다리를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두 주인공 중 하나는 군대를 제대해서 여자도 사귀며 결혼할 일을 생각하고 그 이전의 일은 다 잊었지만, 또 다른 하나는 평생 군인으로 살 것처럼 죄책감에 사로잡혀 결국엔 자살을 선택합니다.
파올로 코엘료 <연금술사>에서 현자는 행복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기름 두 방울을 숟가락에 주며 쏟지 말고 성을 한 바퀴 돌면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성의 아름다운 것들에 정신이 팔려 숟가락의 기름이 쏟아지는 줄 몰랐습니다.
현자는 두 번째 기회를 줍니다.
그랬더니 두 번째는 기름에 주의를 더 기울이다가 주위의 것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현자는 행복의 비법은 기름을 쏟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자는 그 사람에게 기름 두 방울을 주면서 그 사람이 이 세상 것들에 정신을 쏟을 존재가 아님을 알려준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은총과 진리라는 두 방울의 기름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집착할 존재가 아님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미워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만났습니까?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내가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젊은 시절 산을 자주 다녔습니다.
그것도 높고 험준한 산을. 한번은 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눈도 내리고 있고, 시간적 여유도 없고, 안전하게 올라온 길로 신속히 내려가는 게 상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객기가 발동했습니다.
내 사전에 올라온 길로 내려가는 법은 없다며 홀로 능선을 타고 다른 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에 어느 정도 능선을 타고 가다 보면 머지않아 옆으로 빠져 내려가는 길이 있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가도 가도 능선만 이어졌습니다.
눈송이는 점점 더 커져 함박눈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러다 얼어 죽겠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능선 타기를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길도 아닌 길고 긴 계곡을 타고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죽을 고생 끝에 동사 및 아사 일보 직전, 그것도 심야에 겨우겨우 한 민가에 도착했습니다.
기진맥진해 한 집 문을 두드리다가 간첩으로 오해받아 경위 조사까지 받고 귀가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길도 길이 아닌 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 가면 ‘개고생’이 분명한 길, 멸망으로 가는 길, 인생 종치는 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네 인생에서 돈이나 명예, 권위나 자리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된 것은 아닌지요?
사실 돈이라는 것은 돌고 돈다 해서 돈이 아닌가요?
없다가도 생기는 것, 목돈 좀 손에 쥐었다 하면 어느새 손에 쥔 한 줌 모래알처럼 빠져 나가버리는 것이 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차지하게 되는 권한이나 직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맡겨진 임기가 채워지면,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물려주고 내려와야 할 부초나 뜬구름같이 허망한 별 것 아닌 자리입니다.
오늘 내가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결국 우리가 선택할 최종적인 길, 진리와 생명의 길은 예수님께서 먼저 올라가셨던 길입니다.
정말 가기 싫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올라갔던 예루살렘 언덕길입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끔찍해서 생각하기도 싫은 길이었지만 아버지께서 계획하셨으니 올라갔던 골고타 언덕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1)
오늘 복음 말씀 바로 앞에는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예고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3,38).
그리고 그 앞의 21절에는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말씀도 있습니다(요한 13,21).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거나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시니까, 그들은 더욱더 두려워하고 의기소침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실패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과 불안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는 말씀은 “지금 이런 상황 때문에 의심하거나 불안해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 말씀을 하실 때마다 부활 예고 말씀도 하셨는데, 제자들은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들었고, 수난과 죽음 예고 말씀은 듣기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예고 말씀이 주는 충격이 너무 커서 그랬을 것입니다.
2)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실패란 없다는 것을 믿어라. 또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온 내가 하는 일도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뒤의 30절의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요한 14,30)
적대자들과 박해자들은 예수님에게 아무 권한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또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도 연결됩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
‘저승의 세력’은 ‘악의 세력’일 수도 있고 ‘죽음의 세력’일 수도 있는데, 어떤 세력이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쓰러뜨릴 수 있는 세력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과 예수님의 힘은 세상의 그 어떤 세력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의심과 불안감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인류 구원 사업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왜 꼭 그런 과정을 거쳐야 했는가? 그냥 처음부터 부활로 직행하면 안 되는 것이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모르니까 ‘파스카의 신비’ 라고 표현합니다.
‘신비’ 라는 말은, 인간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파스카의 신비’ 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 일들은 사실상 하나의 사건이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었고, 그 일들을 통해서 인류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하느님의 섭리’ 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섭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하느님은 ‘악’에서도 ‘선’을 만들어내시는 분입니다.
‘악’이 하느님의 뜻은 아닌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거스르는 ‘악마저도’ 당신의 뜻을(선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 모든 과정과 결과를 ‘하느님의 섭리’ 라고 표현합니다.
4)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나라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활동의 끝’이 아니라, ‘한 과정’이라는 것을, 즉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다시 와서”는 여기서는 재림이 아니라 부활을 뜻합니다.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부활 후의 현존’을 뜻하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아야 하고, 나를 따라야 한다.”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당신만이 유일한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고, 흔들리지 말고 당신만 믿으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의심과 불안’은 믿음을 흔들어대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면서, 더욱 굳게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길 -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예수님>
"네 근심 걱정을 주께 맡겨 드려라.
그분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 리 없으리라."
(시편 55,23)
문 없이 살 수 없듯이 길 없어도 살 수 없습니다.
빛을 찾는 인간이듯 문을 찾는 인간이요 길을 찾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방에 들어서면 우선 창문에 눈길이 가고 밖에 나서면 길을 가게 됩니다.
오늘은 길에 대한 묵상입니다.
길에서 나서 길을 가다가 길에서 죽는 인생입니다.
길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 도인(道人)인 인간입니다.
길을 잃어 방황이요 길을 찾는 인간입니다.
길하면 넷이 생각납니다.
1. '하숙생' 노래의 길입니다.
1960년대 풍미했던 인기의 절정이요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좋아해 많이 불렀던, 지금도 70-80대 노년 인생들이 잊지 못할, 지금은 고인이 된 최희준 비오의 하숙생 노래입니다.
당시는 신자가 아니었지만 인생 후반 재혼과 동시에 아내의 권유로 세례받았으며 성당 활동은 내 인생의 기쁨이라 고백한 최희준 비오 가수입니다.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넷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이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간다”
들을 때마다 온몸과 온맘에 촉촉이 적셔드는 느낌의 가사와 곡의 노래입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믿는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가 하느님께 간다고 고백합니다.
믿는 이들 앞에 놓여있는 “나는 길이다” 천명하신 하늘길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2. 길하면 생각나는 2014년 안식년 때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인생길을 압축한 듯한 순례길이요 지금도 순례길을 걷듯 하루하루 살아가는 수도여정의 길이요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 걷게 될 길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명심할 요소는 목적지, 이정표, 도반, 기도요, 날마다의 길을 걷는 여정에 상기해야 할 필수요소들입니다.
내 인생길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했을 때,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와있겠는가 자주 점검해 보는 것도 산티아고 순례 덕분입니다.
3. 날마다 아침식사 후 맨발걷기 한 지도 7개월째입니다.
집무실에서 십자가의 길 따라 가다가 하늘길 따라 수도원 정문까지 갔다가 다시 역순으로 걸어서 집무실로 돌아오는 참 상징성이 깊은 하늘길과 십자가의 길입니다.
순례길 걷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걷습니다.
집무실의 위치가 십자가의 길 14처가 끝나는 지점 바로 위에 위치해 있어 저는 집무실을 제15처 ‘부활의 집’, ‘지족암(知足庵), 천장암(天藏庵)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4.
하늘길이란 제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23년 전 요즘 때 글이지만 하늘빛을 간절히 찾는 당시의 제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시요, 그 굽이굽은 굽은 소나무는 지금도 여전합니다.
“참 많이도 굽었다
하늘빛 찾아가는 하늘길
순탄대로 곧은 길만은 아니다
첩첩의 장애물 온갖 초목들옆 좁은 틈바구니
하늘빛 찾아
이리저리 빠져나가다 보니
참 많이도 굽었다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다
거룩한 아름다움이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하늘빛 가득 담은 내사랑 소나무야!”
-2001.4.21.
길을, 하늘길을 찾는 인간이요 이 길을 잃어 방황하는 사람이요 죄도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길이라 다 길이 아닙니다.
죽음에 이르는 길도 참 많기 때문입니다.
과연 제대로 인생길을 가고 있는지요?
문 중의 문 하늘문은, 길 중의 길 하늘길은, 단하나 예수님뿐입니다.
한결같이 예수님의 하늘길을 걷는 이들은 저절로 다음 옛 어른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할 것입니다.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지위나 명성이 아니라, 하루하루 충실하게 쌓아가는 일상이다.”
<다산>
“도(道)에 뜻을 두고, 덕(德)을 지키고, 인(仁)에 의지하고, 예(禮)에서 노닌다.”
<논어>
하늘문, 하늘길이신 예수님을 떠나, 잃어, 방황이요 혼란이요, 근심걱정에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어리석게 멀리 밖으로 찾아갈 것이 아니라 눈만 열리면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하늘문, 하늘길이신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아버지께 가는 하늘길 예수님을 바로 앞에 두고도 몰라 전전긍긍 불안해 하는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하늘길 예수님이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는 물론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말씀입니다.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하늘길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면 이미 지금부터 앞당겨 지금 여기서부터 실현되는 아버지의 집에서의 삶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를 깨닫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토마스의 물음에 대한 주님의 답이 참 통쾌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께 이르는 하늘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로 환히 드러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복음이 이 한구절로 요약됩니다.
거짓 길도, 거짓 진리도, 거짓 생명도 거짖 빛도 참 많습니다.
생화인지 조화인지 구별하기 힘든 세상이듯 가짜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바로 진위를 식별하는, 분별하는 잣대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알아 닮아갈수록 지혜로운 분별이요, 아버지께 이르는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을 기쁘게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걷게 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하늘나라, 아버지의 집에서서의 진리와 생명의 삶,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하늘문을 드나들면서 풍성한 은총에 충만한 삶이듯 예수님의 하늘길을 걸으면서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희망과 기쁨,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평화와 행복이 충만한 삶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하늘길이신 주님을 통해 구원의 감격을 고백하는 바오로의 강론이 우리에게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소식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날마다 오늘 부활하시는 예수님이시요, 날마다 오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말씀하시는 하늘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
(시편 51,1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목적지가 분명한 우리는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 내용의 바로 전 대목(요한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수난과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신 후,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십니다.
또 충성을 장담하는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하리라고 예고하신 뒤에 바로 오늘의 대목으로 이어지지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1)
이미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의 심정이 어떨지 헤아리고 계십니다.
계속되는 유다인들의 배척과 공격도 힘겨웠지만, 설상가상으로 방금 스승님이 보여주신 행위는 마치 유언과도 같습니다.
당신 스스로 수난과 죽음을 받아안고 계시지만 제자들로서는 이 모든 것들이 그저 비유나 상징이기를 바라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마 설마 하면서도 마음이 갈라지고 어지러워지는 건 피할 수 없었겠지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요한 14,1)
사실 지금 제자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입니다.
한없이 추락해 곤두박질 친 밑바닥에서, 발끝조차 디딜 곳 없는 벼랑 끝에서, 희미한 빛 한 줄기 찾을 길 없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죽음밖에 남은 게 없는 듯한 무기력 한가운데서, 다시 힘을 쥐어짜서 생명과 진리를 부여잡게 만들 수 있는 실체는 믿음뿐이니까요.
삶의 질곡을 헤쳐오면서 깨지고 부서지고 갈기갈기 찢겨질망정 죽음같은 절망에 몸을 내맡기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킨 우리를 오늘 여기까지 오게 한 건, 돌아보면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요한 14,3)
제자들에게 앞으로 이어질 일들을 찬찬히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자상함에 머무릅니다.
근데 예수님 참 바쁘시지요?
가서 자리를 마련하시고, 다시 오셔서 데려 가시고, 같이 계시겠다고 하시네요.
이미 세상에 오신 처음 움직임까지 치면 예수님의 동선이 아래위로 엄청나게 크고 게다가 반복적입니다.
그 반복을 조망하다 보면 아버지에게서 세상으로, 세상에서 다시 아버지께로, 또 세상으로, 또 아버지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하나의 길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 길 자체이십니다.
하강과 상승, 또 하강과 상승...
그런데 단순히 아래위를 몇 차례 오가시는 것이 아니라, 비움과 영광, 고통과 위로, 죽음과 부활...
참으로 극적이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계시지요.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사도 13,26)
오늘 독서 내용은 사도 바오로의 안티오키아 회당 설교 중 일부인데, 예수님의 강생, 즉 하강에서 시작해 상승과 하강, 또 상승의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고 하십니다.
"곳"이라는 표현 때문에 자칫 하늘 나라를 공간적으로만 상상할 수도 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 존재, 하느님 현존, 하느님 주권,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심장... 등 그분 앞에 서면 미물에 불과한 우리가 예수님 덕분에 (감히) 깃들여 머무를 수 있는 거대하고 영원하며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모르는 하느님의 품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그런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품,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길이고 방향이고 동행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셨던 대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밟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올라가는 길일 수도 있고 내려가는 길일 수도 있지만 상관 없습니다.
목적지가 하느님이시니까요.
살다보면 오르막길도 만나고 내리막길도 만납니다.
마냥 올라갈 수도 없고, 마냥 내려만 가지도 않습니다.
선택할 수 없는 외길도, 고민스러운 갈림길도, 심지어 막다른 길도 마주치게 되는 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순리입니다.
올라갈 때 목에 힘이 덜 들어간 만큼 내려가는 길이 유연할 것이고, 올라갈 때 어깨가 너무 치솟지 않았다면 내려갈 때 가벼울 겁니다.
우리가 걷거나 서 있는 모든 길이 예수님이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향해, 그분 품을 향해 그 안에 깃든 희로애락 생로병사를 짊어지고 묵묵히 뚜벅뚜벅 나아가는 중입니다.
목적지가 분명한 우리는 행복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앞으로 닥쳐올 수난과 고통, 죽음 앞에서 이 말씀을 하고 싶으신 듯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벗님의 마음상태가 어떠세요?
뭔가 불안하고 걱정스러우세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답답하기도 한가요?
괜히 나이탓인지 우울해지고 삶의 의미도 재미도 별로 느끼지 못하시나요?
괜히 화가 나고 짜증스럽기도 하나요?
조급한 마음이 일고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지나요?
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내 마음이 이렇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그럴 때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쓸데없는 걱정말고 그냥 부족한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되면 부정적으로 기울었던 내 마음이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래야 내 맘이 밝아지고 나는 걸어가는 복음이 될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 안에서 기뻐하고, 신앙 때문에 고통을 참아내고, 신앙이 내 삶의 중심이 된다면>
메주고리예에서 미사를 하는데 한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 보는데 그분들은 이미 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8년 전부터 제가 매일 쓰는 강론을 읽고 있다고 합니다.
메주고리예에 순례 와서 미사에 참례했는데 제가 미사 주례를 해서 정말 놀랐다고 합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는데 저의 글이 인터넷이라는 마차를 타고 참 멀리도 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활성가 중에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가 있습니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참 좋은 가사의 성가입니다.
부족한 저의 묵상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부족한 저의 글이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는 혼자인 것 같지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맺어졌습니다.
잠시 스쳐지나간 만남이지만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안에 은총의 성지순례가 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메주고리예에는 발현산과 십자가 산이 있습니다.
발현산은 성모님께서 나타나신 곳입니다.
성모님은 나타나셔서 5가지의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기도를 하라는 것, 특히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성심껏 보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자주 읽으라는 것입니다.
단식하라는 것입니다.
미사참례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대부분의 발현지에서 성모님께서 하신 이야기입니다.
성모님의 발현이 특별한 기적과 표징일 수 있겠지만, 성모님의 발현은 흐트러진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성모님의 발현은 세상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의미입니다.
순례에 온 분들은 발현산이 먼저 있고, 그 뒤에 십자가 산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산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1900년을 기념해서 1933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십자가 산에는 14처가 있었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15처가 있었습니다.
십자가 산에는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신부님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십사처를 세웠고, 신자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2000년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고 내려오는 길에 쓰러졌는데 그 시간이 오후 3시였다고 합니다.
거칠고 뾰족한 돌산을 오르면서 십자가의 길을 하는 의미는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길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메주고리예’는 산과 산 사이에 있는 ‘평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 평야에 ‘야고보 성당’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이야기를 따라서 성당에서는 매일 오후 5시에 묵주기도와 미사가 있습니다.
매일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묵주기도와 미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당 안에서만 했었는데 순례자들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야외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이야기를 따라서 성당 마당에는 각 언어별로 고백성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서 고백성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매년 8월에는 젊은이의 신앙대회가 있다고 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서 발현산으로 오르면서 묵주기도를 하고, 십자가산으로 오르면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볼 곳도 많이 있는데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 기도를 위해서 메주고리예에를 찾는 젊은이들의 뜨거운 신앙을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신앙 안에서 기뻐하고, 신앙 때문에 고통을 참아내고, 신앙이 내 삶의 중심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메주고리예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세계적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어떤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역사를 배워야 하나요?”
유발 하라리는 이 질문에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답합니다.
과거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에 예속되고 지배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라는 말에서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과거로부터 답습되던 것들에 벗어나지 못할 때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모습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습에 갇혀 있게 됩니다.
‘왕년에 말이야~’라면서 하는 말, ‘전에는 이렇게 했는데’라는 말…. 이런 모습을 향해 요즘 젊은이들은 ‘꼰대’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역사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 과거에 갇혀서 정체되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역사에 더 예속되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교회 안에서도 새로운 것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늘 반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를 따르면 그만큼 실패 확률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모습에서 찾게 되는 기쁨을 얻기는 힘들어집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당시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모두 중요했습니다.
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율법이라는 과거를 따르라고 그토록 요구했고, 그러지 않은 예수님 모습을 반대해서 떠나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다른 예수님 모습에 제자들의 마음이 산란해합니다.
앞날에 대한 불안, 세상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걱정이 태산 같았던 것이지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과거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마음을 써야 할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닌, 하늘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때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산란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면서 지금을 새로운 마음으로 더 기쁘고 힘차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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