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찻잔 속에 각설탕을 넣는다. 두 조각이 떨어질 때마다, 퐁당― 퐁당― 소리가
났다. 마치 냇물 속에 하얀 조약돌을 던질 때처럼. 작은
커피 방울들이 튀어 오른다. 티스푼으로 살짝 젓자 설탕 두 조각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주머니 속 조약돌도 사라지지 않았을까.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어본다.
“국어국문학과 한시우라고 했죠? 태민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손끝에 닿는 반질반질한 감촉은 여전히 그대로지만 눈앞에
소녀는 보이지 않는다.
“같은 학번인데……말
놓으셔도 돼요.”
“너희들 키스는 해봤냐?”
며칠 전, 학교
근처 파전 집에서 친한 과 동기 태민이가 입을 열었다. 같이 간 남자동기 여럿이 야유를 보냈다. 말수가 적고 숫기가 없는 나와 달리, 녀석은 붙임성이 좋았다. 문과대학 내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여자애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서로 첫사랑에 대해 떠드는 동안, 새벽꿈 속에 분홍 스웨터를 입은 소녀가 나왔던 것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소녀와 함께 산을 올라가서, 복숭아나무 옆에 하얀 조약돌을 놓자마자 꿈에서 깨어나 버렸다. 아침에 급히 나오느라, 하얗게 물들어버린 이불을 채 수습하지 못하고
나왔었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날 보며, 녀석은 입을
열었다.
“짜식, 넌
아직 첫사랑도 없구나? 아직도 숙맥 티 못 벗어서 어떻게 하냐. 내가
이럴 줄 알고, 오늘 준비한 게 있지."
녀석은 주머니를 뒤져서 사진을 한 장 꺼냈다. 고등학교 교정에 선 여고생이 활짝 웃으며 꽃다발을 손에 들고 있었다.
"에이, 뭐야. 고등학생 아냐. 자식이 이 형님을 뭘로 보고."
"내가 설마 어린애를 소개시켜주겠냐. 내가 아는 영문과 여자앤데, 여고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이래. 사진이 이거 한 장밖에 없다나. 얘 우리랑 같은 학번이야. 얼마 안 있으면 방학인데, 2학기 되기 전에 애인 만들어야지."
사진 속 여고생은 까만 단발머리였다. 소녀의 단발머리가 찰랑이던
것이 떠오른다. 도라지꽃, 마타리꽃, 칡꽃을 꺾어 만든 꽃다발을 품에 안고, 나의 소녀는 아직도 내 마음
속에서 웃고 있다.
기대를 품고 1시간이나
일찍 다방에 왔지만, 문이 열리고 내 앞에 다가온 이는 7년
전 그 소녀가 아니었다. 홍 퍼프소매
블라우스에 남색 롱스커트를 입고 소녀의 옷차림만 따라했을 뿐, 소녀와 달리 눈은 치켜 올라갔고 입가에
작은 점이 있었다. 게다가 사진과는 달리 머리가 길었다. 고양이
울음소리처럼 살짝 교태스러운 음성도, 소녀의 수줍은 목소리와는 너무 달랐다.
“그래, 말
놓을게. 내 이름은 오하영이라고 해.”
서울 여자답게 세련된 이름이다. 그 아이도 서울에서 왔었지.
‘맞다, 내
이름은 연우, 윤연우라고 해.'
마지막 날 들었던 소녀의 이름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연우, 윤연우. 바로
앞에 앉은 여자의 이름을 방금 들었지만, 귀에는 소녀의 이름만 들린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잔잔한 음악과 커피 향기만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왜 이렇게 말이 없어.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하영의 손에서 커피 잔이 미끄러졌다. 블라우스
앞섶에 진한 커피 얼룩이 남았다. 소녀의 분홍 스웨터에 들었던 흙물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얼른
티슈를 뽑아다 블라우스 위의 커피 얼룩을 닦아주려 했다.
“이리 줘. 내가
닦을게.”
하영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블라우스 앞섶을 문질렀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내 손에 든 물티슈에도 커피 얼룩이 옮아
있었다.
다방을 나오니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끼어서, 곱게 물이 들려는 노을을 가려버렸다. 오늘 비가 온다고 했었나.
“비 올 것 같다. 우산
놓고 왔는데.”
마침 내 가방 속에 2단
우산이 들어 있었기에, 이문동에 있는 그녀의 자취방까지 바래다주기로 했다. 블라우스에 물든 커피 얼룩이 영 신경 쓰여서, 재킷을 벗어 하영의
어깨 위에 아이 업은 모양으로 둘러주었다. 소나기가 오던 그날, 개울을
건너기 위해 소녀를 업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 소녀의 심장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다.
“잠깐, 너
코피 흐르는 것 같아.”
긴장하고 있었던 것일까.
대입 준비를 하던 고등학생 때에도 흘려보지 못한 코피였다. 그날, 개울가에서 세수를 하던 소녀의 치마 속을 본 날 이후로 코피가 잘 나지 않았었는데.
“연우……연우야…….”
왜 갑자기 소녀의 이름이 튀어나왔을까. 뭐야, 하는 표정으로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저기, 내
이름 잘못 들었니? 내 이름 연우 아닌데.”
그녀의 얼굴을 보니, 표정이
싹 지워져 있었다. 하긴, 내가 입을 닫고 있는 동안 혼자
이야기하느라 지쳤을 것 같다.
“급한 일이 있어서, 나
먼저 가볼게. 방학 잘 보내."
하영은 블라우스 위에 두른 재킷을 벗어서 내 손에 건네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소녀의 스웨터에는 내 등에서 옮은
흙물이 묻어있었는데, 재킷에는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았다. 비가
올 듯 말 듯, 하늘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진다.
방학이 되자, 서울
자취방에 남는 대신 고향집에 내려가기로 했다. 양평 행 고속버스에 앉아서, 삶은 계란을 깠다. 하얗고 반질반질한 것이 주머니 속 하얀 조약돌
같다. 갸름한 것이 연우의 흰 얼굴을 많이 닮았다. 오늘따라
노른자가 텁텁하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간다.
벌써 서울로 온 지 3년이나 되었네. 그 해 가을은 너무 빨리 지나갔고, 나는 어느새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바로 연우의 고향인 서울에서. 처음에
연우가 서울에서 이사 왔다는 말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었지. 실제로
경험해 본 서울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조금 더 많고,
하늘색이 더 탁하다는 것 정도? 연우는 서울 어디에서 이사를 왔던 것일까, 소녀의 흔적을 찾아 헤매다가 한 학기가 다 지나버렸다.
수능리에 도착하니, 파랗던
하늘에 조금씩 노을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소녀를 만났던 개울가를 지나쳤다. 개울 속에 아직도 하얀 조약돌이 많이 있을까. 맨발로 개울물에 들어가
돌 사이를 헤집었다. 그때 풀꽃 한 송이가 물살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개망초. 달걀 속을 닮아서 참 좋아했던 꽃인데, 왜 그때 소녀에게 전해주지 못했을까. 어린 아이가 돌다리에 앉아서
꽃을 하나씩 개울물에 떨구고 있었다. 방학을 맞아 시골집에 내려온 것 같았다.
예전 윤 초시 댁을 찾아가 보았다. 그때 연우네가 집을 내준 이후, 다른 사람이 잠깐 살다 가고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은 집이였다. 떨리는 손으로 대문을 열었다. 널찍한
대청마루가 눈에 들어왔다. 밝게 웃는 소녀의 영정사진이 있을 것만 같아 차마 마루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때 눈물만 흘리느라 소녀의 마지막 모습은 보지 못했는데. 마지막
가는 길 인사라도 해 줄걸. 낯선 곳에 전학와서 친구도 별로 없었을 텐데.
마당의 대추나무로 눈을 돌렸다. 윤 초시가 직접 심었다는 대추는 여전히 알이 굵었다. 그때, 소녀가 마지막으로 건낸 대추를 씹었을 때 머리가 아득해지면서도, 이상하게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었는데. 그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이불에 하얀 은하수가 그려져 있었다. 연우가 하늘에서 내가 흘려보낸 은하수를 봤을까.
고향집은 여전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읍내 미장원에 나가 파마를 하고,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아온 아들을 반겼다. 밥상에 막걸리 두 병이 놓여 있었다. 저녁마다 반주를 드시는 것은
여전하다. 그날, 개울가에 앉아 물장난을 하던 연우를 처음
봤던 날, 나는 아버지 술심부름을 가고 있었다. 술을 받아서
집으로 가는 길에, 막걸리를 한 모금씩 홀짝거리다가 반을 다 마셔버리고 말았다. 술에 취해 그대로 잠든 나를 동네 아주머니가 발견하셔서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긴 했지만, 그때 처음 맛봤던 막걸리의 싸하고도
짜릿한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얼굴이 화끈거렸던 것은 술 때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랬던 게 벌써 엊그제 같은데, 아버지와 마주앉아 술상을 함께 하게
되다니.
“술 마실 수 있지?”
술병에서 쏟아지는 막걸리 빛이 그날따라 하얀 조약돌을
닮았다. 아버지가 따라주시는 술을 받다가, 잔을 놓칠 뻔했다. 양은사발 속에 파문이 일었다.
‘이 바보.’
소녀의 목소리가 귀에 울리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뭔가에 홀린 듯, 술을 한 입에 마셔버렸다. 막걸리 방울들이 모두 하얀 조약돌이 된
듯, 목이 막혀왔다.
아침 햇살에도, 머릿속에
침투한 막걸리 방울들은 마를 생각을 하질 않았다. 깨어나지 못하고 뒤척이는 동안, 어머니가 급히 날 흔들어 깨웠다.
“오늘 양평읍에 장 서는 날인데, 같이 갈래?”
다 큰 아들이 엄마 손을 잡고 장 구경을 나선다는 것이
좀 뭣했지만, 어머니의 입에서 ‘양평읍’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자마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때 소녀가 이사 갔다는
양평읍. 뛰는 가슴을 안고 어머니 뒤를 따라나섰다.
장터에서 찬거리를 다 사고, 어머니의 발걸음은 한 가게에서 멈췄다. 윤씨네 과일. 흔한 성씨인 윤씨지만, 간판의 푸른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눈물이
고일 것 같았다.
“그냥 장터에서 다 사지,
뭐 하러 귀찮게 여기까지 나왔어요?”
“아, 윤 초시네
기억 나? 그 집이 여기에 가게 차렸어. 여기 복숭아가 정말
맛있어.”
좌판에 백도복숭아가 깔려 있었다. 하얀 솜털에, 연분홍빛 홍조를 띄운 것이, 작은 단발머리 가발만 씌우면 소녀를 꼭 닮을 것만 같았다. 소녀의
미소가 흘러내릴 것만 같다. 어머니가 복숭아를 고르는 동안, 단발머리에
살짝 보조개가 박힌 아주머니가 나와서 우릴 반겼다. 한눈에 연우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우가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저 얼굴로 나이를 먹었을까?
“매번 이렇게 사러 와 주셔서 고마워요. 이거, 우리 가게에서 담근 복숭아주인데 한 병 드릴게요.”
작은 약술병 속에, 조그만
복숭아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소녀를 등에 업었을 때, 막
여물기 시작한 가슴 몽우리가 느껴졌었지. 병 속에 담금주가 발갛게 물들어 있다. 꽃도 피우지 못한 소녀가 흘린 눈물일까.
다음 날 아침 해가 밝자마자 복숭아주 병을 가슴에 품고, 소녀가 묻혔다는 산으로 올라갔다. 셔츠에 땀이 차도록 산을 아무리
뒤져봐도, 무덤 비슷한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연우가 그때
어린 나이라, 봉분을 올리지 않았던 것인가.
그때, 달콤하고
상큼한 복숭아 향이 느껴졌다. 향기의 길을 따라 산을 계속 올라가니,
복숭아밭이 보였다. 땅 속에 잠들어 있는 소녀의 웃음을 먹고 열린 복숭아들일까. 하얀 복숭아 하나를 땄다. 따끔한 솜털에 가슴이 아릿해올 것 같았다. 복숭아를 반 가르면 소녀가 깨어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복숭아를
땅에 내려놓고, 하얀 조약돌을 나무 곁에 놓았다.
복숭아의 향기는 또 다른 향기를 데려왔다. 꽃밭에
파묻힌 듯, 총천연색의 향기가. 도라지꽃, 마타리꽃, 칡꽃……. 소녀의 영혼을 불러 와서 꽃과 함께 잠들고 싶다. 가슴 깊이 잠들어있던 비밀이 깨어날 것만 같다. 비를
피하기 위해 수숫단 속에 연우와 함께 몸을 피했을 때, 소녀의 입에 내 입술을 포개었던 것이. 솜털이 돋아난 복숭아를 그대로 한 입 베어물자, 소녀의 보드랍던
입술 감촉이 되살아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여자의 속살을 만졌던 것도.
*소나기 속편쓰기 공모전 낙선작입니다.......흑흑....
소설을 쓸 때 예쁜 마음으로 써도 될동말동한데,
하필 사이 안좋았던
동창이 떠올라서......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이를 갈며 썼거든요.
아무리 날 해코지했더라도, 사람을 미워하면 벌
받는다는데
진짜인가 봅니다.....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