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머신을 치우고 손으로 내려 먹기로 한다. 지금까지 머신으로 내린 건 순전히 게을러서다. 오랜만에 직접 손으로 드립한다. 드립(drip)은 말 그대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트리는 인내가 필요한 방식이다. 물을 끓여 성급하게 필터에 붓지 않는다. 조금 기다렸다가 물이 90도 정도가 되면 천천히 물을 붓는다. 처음엔 물을 조금 붓고 기다린다. 커피가 조금 불은 후에 물을 천천히 부으면서 추출한다. 이게 내가 아는 드립의 방식 전부다.
난 변변한 드립 도구도 없다. 드립 서버는 스타벅스 컵이고, 드리퍼는 중국에서 산 보이차 드립퍼다. 그라인드도 따로 없다. 야채 분쇄기로 무지막지하게 간다. 이번엔 갈아 놓은 걸 주문해 따로 갈 필요는 없다. 유일하게 인터넷으로 주문한 게 Dripink란 드립 포트다.
무엇 하나 변변한 게 없고 서툴다. 그래도 내리는 순간만은 나름 진지하다. 핸드드립의 장점은 만들면서 이미 커피 향에 젖어 들 수 있다는 점이다. 만들면서 커피와 호흡한다. 그러는 동안 커피는 이미 내 속에 들어와 있다. 나와 카피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여(物我一如)라 하면 지나친가? 만드는 절차가 느리고 길다. 그러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길 수도 있고, 같이 마시는 사람과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모든 걸 머신에 맡기면 할 수 없는 일들이 가능해진다.
커피가 에티오피아에서 이슬람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커피는 일상의 음료로 자연스럽게 정착한다. 이슬람 수도사들이 잠을 깨우기 위해 마시기 시작한 커피다. 중세 가톨릭 사제들은 커피를 ‘이교도의 음료’ 혹은 ‘악마의 유혹’이라 하여 금기시하지만, 결국 커피 향에 취하고 만다. 이렇게 ‘커피를 마시는 집’이란 뜻의 카페가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간다.
카페에서 연대(連帶)가 가능했고 혁명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의식을 깨어 있게 하는 커피 때문이라고 추론하면 너무 지나친가? 근대 계몽주의가 카페에서 태동했다고 하면 어떨까?
‘계몽’(enlightenment)은 말 그대로 무지몽매함에서 이성이 이끄는 빛의 세계로 나가는 것이다. 무지몽매함에서 자유로워지도록 각성하게 하는 커피다. 그래서 술이 감성의 음료라면 커피는 이성의 음료다.
2017년 2월 파리의 한 카페를 가 본 적이 있다. 1884년 파리 6구 생제르맹 데프트에서 문을 연 '카페 드 플로르'다.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알베르 까뮈, 헤밍웨이, 피카소 그리고 당시 파리 유학하던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이 단골이었다.
한때는 동지였다가 서로의 적이 된 절친 사르트르와 레이몽 아롱의 만남과 이별도 이 카페에서였으리라 상상해 본다. 아롱은 자신의 컵을 가리키며 사르트르에게 말한다. “보라고 자네가 현상학자라면 이 칵테일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걸세. 그리고 그것이 바로 철학인 거지.” 사르트르는 감동으로 새파래졌다. 헤겔의 관념 철학에 찌들어 있던 프랑스 청년들에게 철학은 현실이어야 한다는 걸 선언한 두 지성이었다. 프랑스 실존 철학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어젯밤 대구 경대사대부중고 동기들 몇이서 만나 막걸리 한잔하고 대구 범어성당 1층 상가에 있는 ‘제이컵 아츠’(JACOB ARTS)라는 카페에 들렀다. 구약의 ‘야곱’의 영어식 이름인듯한데, 온전한 의미는 모르겠다. 다음에 가면 물어봐야겠다. 파리 여느 카페 못지않다.
동기 중 중고등, 아니 초등까지 같이 다닌 친구들도 있다. 한창 꿈이 많았던 시절을 공유한 우리들이다. 이제 종심(從心)인 일흔이 되어 만나 하는 얘기가 다 철학이다. “철학은 학문이 아니라 철학함이다.” 칸트의 말이다. 우린 각자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낸 노철학자들이다. 글로벌 안경산업의 한국 선두주자인 윤달호 사장과 대구경북언론인협회 이경우 회장 그리고 사범대학을 나왔지만 선생할 자신이 없어 일찍 대기업으로 진로를 바꾸었고 지금은 소위 건물주가 된 윤주하. 우리가 앉아 담소를 나누었던 어제 그 카페도 헤밍웨이나 피카소가 찾았던 파리의 그 카페와 다를 게 없다. 이젠 걸으면서 무심코 서로의 손을 잡을 나이가 되었다. 잘 살아냈다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
첫댓글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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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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