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경기로써 축구가 가지는 의심할 바 없는 위치는 모든 사람들이 첼시 매거진 최신호에서 볼 수 있다.
철의 장막의 동부 유럽과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의 서로 대조되는 배경에서 자란 두 명의 24세의 첼시 선수가 어떻게 서런던에서 스타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페이지에 들어있다.
마이클 에시엔과 페트르 체흐가 스포츠 계에 입문하게 된 배경은 매우 달랐다.
한 선수는 자신이 마치 맨유 셔츠를 입고 깃을 세우며 우쭐대는 프랑스 선수(역주 – 애릭 칸토나 전 맨유 선수)인 것처럼 상상하면서, 길거리 축구를 했던 반면, 다른 한 선수는 조직적인 경기를 오래 동안 뛰어오고 있었고, 골키핑과 아웃필드 플레이를 체계적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첼시 매거진 5월호 표지 스타인 에시엔은 그 후 자신의 행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나는 12살 때, 꽤 실력이 괜찮은 팀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그 전엔 그냥 친구들과 경기를 하곤 했다. 그리고 나서, 가나의 프로 클럽에 있던 리버티 씨가 나를 발견했다.” 그가 전한다.
“칸토나는 그 시절 나의 영웅이었다. 그는 공격적이었고, 끈기 있었으며, 어떤 것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이런 점이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이어간다.
에시엔의 신체적 특성과 재능을 가진 누구라면, 강한 가족적 결속을 가진 사람에겐 가족과의 헤어짐이 쓰라리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유럽, 특히 프랑스의 클럽들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그가 인터뷰에서 말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결정을 내리기 매우 힘들었다. 처음엔, 나는 한 주 동안만 그저 테스트를 받기 위해 바스티아에 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테스트 후 바로, 나에게 다시 접촉을 했고, 정말로 나를 영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족을 떠난 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에 불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십대 청소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프로 축구선수로써 클럽에서 뛰는 것은 나의 꿈이기도 했다. 따라서,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이것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이에 대해 엄마와 얘기를 나눴던 일이 기억난다. 그녀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요즘도 매일 엄마와 전화로 얘기를 나눈다. 그녀는 나의 전부이다. 나는 그 어느 것보다도 엄마를 사랑한다.” 그가 말한다.
다른 인터뷰에선, 체흐가 자신의 축구 삶에서 초기 시절에 대해 첼시 매거진에 전한다.
“공산주의 체제의 어린이들은 실제로 정말 좋은 경험들을 했었다. 어린이들을 위해 적절한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축구, 농구, 아이스하키, 핸드볼, 테니스, 체조, 미술 등 원하는 것은 정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많은 기회들이 있었다. 아이들의 일상은 전부 학교에 가고, 하교 후엔 이런 종류의 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는 어린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살기엔 훌륭한 나라였고, 아동기에는 일들이 아마도 다른 방향으로 잘못되어 간다고는 생각할 수 있지 않다.”
아마도 이런 교육은, 최근에 첼시와 떨어져 있을 땐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열심히 공부하는데 쓰려고 하는 체흐의 자기 개선 태도의 바탕이 된 것 같다. 매거진을 읽어보면, 체흐가 체코 공화국의 A등급에 해당하는 점수로 8과목을 통과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시험은 지난 시즌 말과 월드컵 사이에 모두 치러진 것이다!
그러나, 수 년 전엔 우리의 골키퍼를 계속 추진시켰던 것은 운동가로써의 탁월함이었다.
“나는 9살 때까지 필드 위에서 뛰었었다. 당시 친선전을 한 번 가졌었는데, 우리 팀의 정규 골키퍼가 경기에 나오지 않았었다.”
중요하지 않은 순간처럼 보이지만, 첼시 풋볼 클럽의 역사는 바뀌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졌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경기를 잘 치렀었다. 다음 날, 골키퍼를 찾고 있던 감독이 자신의 뜻에 동의해달라고 나에게 요청했다. 즉, 강팀을 상대로는 내가 골키퍼로 뛰게 될 수도 있고, 약팀을 상대로는 미드필드에서 여전히 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은 내가 대략 11살 때까지 계속 됐다.”
“하지만, 그리고 나서 다리가 부러지는 일이 생겼다. 부상에서 회복되고 있는 중에, 잘 뛸 수 없었기 때문에, 핸들링 연습과 이런 종류의 훈련을 계속 했고, 이런 것은 나에게 더욱 쉬웠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골키퍼로 남는 것이 나에겐 사리에 맞았다.”
체흐가 골대를 지키는 것에 대한 특유의 압박감과 심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 관심이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지 그리고, <서포트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한 음악밴드에 대한 그의 애호에 대해 첼시 매거진에 전하는 동안, 에시엔 또한 음악에 젖어 있다고 전한다.
라가(역주 – 레게 음악에서 파생된 라가머핀 음악의 준말) 음악이 현재 그가 좋아하는 것이며, 음악 감상은 축구를 하지 않을 때 취침 다음으로 하는 유일한 기분전환 활동이다.
한편, 그가 가나에 돌아갈 때에 대해서도 첼시 매거진에 전한다.
“나를 보기 위해 집 밖에서 기다리는 일부 서포터들이 있다. 사람들은 나의 가족들도 알고 있다. 엄마를 볼 때마다 그들은 그녀에게 말을 걸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가 그런 것에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
첼시 선수들과 유명인으로써의 위치는 당연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5월호 매거진엔 1960년대에 거의 모든 A급 스타들의 인물사진을 찍었던 일류 사진가 테리 오닐에 대한 얘기도 실려있다.
1960년 대는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열리는 축구가 런던생활을 즐기게 했던 때였다.
“함께 브리지에 가곤 했던 약 10명 정도로 구성된 모임이 있었다.” 그가 첼시 매거진에서 회상한다.
“그 모임엔 비달 사순, 리차드 해리스, 토미 스틸도 있었고, 때때로 테런스 스탬프도 있었다. 우리는 ‘킹스 로드’에 있는 <알바로스>라는 레스토랑에 항상 가곤 했는데, 거기서 1파운드에 3가지 코스가 나오는 점심을 먹곤 했다. 그리고 나서, 경기장에 함께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 탔었다.”
오닐은 첼시 매거진이 그가 좋아하는 몇 장의 축구사진의 포트폴리오를 게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만일, 데이비드 웹이 그가 전혀 할 것 같지 않은 석가모니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과 시카고의 악당 같이 나온 피터 오스구드 또는 첼시 키트를 입고 있는 라켈 웰시(그렇다! 그는 유명한 사진을 찍었다)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길 원한다면, 어디에서 봐야 하는지 당신은 알고 있다!
지미 그리브스는 이번 달 레전드 인물로 실렸다. 이 경우에 ‘레전드’라는 단어는 확실히 가볍게 사용된 것이 아니다.
17세의 첼시 유스팀 주장 리암 브리드컷은 이번 달 매거진의 관심을 받은 <주니어 블루스>이다. 클라이브 워커스는 이번 달 초청 컬럼니스트이다.
테리 오닐과의 만남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제공하면서, 첼시 TV 사회자와 전 블루스 수비수였던 제이슨 컨디는 재미있는 촬영을 위해 오닐의 모든 가족을 동반한다.
오늘 4월 19일부터, 첼시 매거진의 2007년 4월호는 3.25파운드에 첼시 메가스토어와 모든 신문판매소에서 구입 가능하다.
이번 4월호는 모든 어린 팬들을 위해 칼링컵 축하 포스터와 조 콜, 애슐리 콜이 어린 서포터들에게 전하는 말이 실려있는 <브리지 키즈 매거진> 최신판이 부속되어 있다.
첫댓글 흠.. 에시앙이 칸토나 팬이엿군요 ㄲㄲㄲ
에시앙..안티가 거의 없는 선수...에시앙 땜시 가나국민들 모두 첼시팬 되어버린....ㅋㅋ물론 드록바의 영향으로 코트디부아르 국민들 다수가 첼시를 좋아하기도 하지만.....ㅎㅎㅎ첼시가 진짜 아프리카 선수들로 엄청 재미 보네요....미켈,칼루는 앞으로 크게 될놈들....
에시앙은..정말 정감가고 매력적인 선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