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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10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 / 어버이 주일
예배로 부름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시 128:1, 3-4)
예배 기원
거룩하신 하나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부모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안고 예배를 드립니다. 부모님께 순종하며 받들어 섬기셨던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합니다. 우리도이 예배를 통해서 부모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한평생 자식들을 위하여 헌신했던 우리의 부모님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는 시간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또한 이미 성전으로 모시고 나올 부모가 없는 자녀들에게는 큰 위로를 더하여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저들의 부모가 되어 주옵소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576장 ∼ 579장
고백의 기도
우리의 참된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이 땅에서 복을 받으며 장수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함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리며 살라 하셨건만 저희들은 부모님을 거역하였습니다. 부모님께 기쁨을 드려야 할 저희들이 오히려 슬픔과 눈물을 드렸고, 부모님의 마음에 평안을 드려야 했건만 그분들의 가슴에 걱정과 근심으로 못을 박아드렸습니다. 늙으신 부모님에게는 마땅히 감당해야 할 봉양과 공경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부모님께 드릴 섬김 대신에 ‘고르반!’을 외치는 무정한 자녀로 지내왔습니다. 오, 주님! 부모님에게 배은망덕했던 저희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희들에게 새 마음을 주셔서, 이제부터는 진정으로 부모님을 공경함으로 복된 길을 걷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사함의 확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복음서의 말씀(눅 2:41-51)으로 설교 작성 : 귀납적 설교
제목: 모든 것을 마음에 두는 어머니
I. 마리아는 마음에 새기기 시작하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자라던 시절의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열두 살 소년 예수님이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다녀온 기사가 있습니다.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아들 예수님을 잃어버려 사흘 동안이나 애를 태운 끝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겨우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모는 얼마나 근심했던지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내 아버지의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요셉과 마리아는 그 말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온 뒤에 아들의 태도는 아무것도 바뀐 게 없이 그대로였습니다. 변함없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정성을 다해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경말씀을 보면 크게 달라진 사람은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아버지 요셉의 태도는 언급이 되어 있지 않으나 어머니는 아들 예수님의 말과 행동 모두를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51b절). 여기서 성경은 주를 달아‘말을’이라는 부분을‘또는 일을’이라고 주석해 놓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말, 또는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마음에 새기며 생각하였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의 일을 마음에 새기기 시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탄생하던 날에도 그 모든 일을 마음에 새겨 두고 있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말한 것,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가서 아들을 낳아 구유에 뉜 일, 목자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온 사실들을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눅 2:19). 처음부터 어머니는 아들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마음에 새겼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확실히 믿는 사람은 특히 자녀의 출생과 성장 등 모든 것을 잊지 않고 마음 깊이 간직합니다. 자녀를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두니라”(51절)의 원문은 여러 조각을 합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그리스도의 일을 부분적으로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고 애썼다는 말입니다. 신앙적이고 현명한 어머니는 자녀의 각 부분에서 나타나는 뜻을 하나님 앞에서 모두 합쳐 생각하고 파악합니다.
일찍이 구약시대에도 이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그 이야기로 인해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을 보면서도 아들의 말을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창 37:11). 이러한 부모의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 요셉의 신앙적 바탕이 되었습니다.
또한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는 아들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삼상 2:28). 그 후로부터 하나님의 집에서 자라나는 아들을 위해 한시도 기도를 쉰 적이 없었습니다.
경건한 어머니는 아들의 모든 것을 마음에 둔 채 하나님의 크신 뜻을 파악하려 애썼습니다. 아들 사무엘은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어머니의 기도라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구약의 야곱과 한나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마음에 두고, 간직하고,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깊이 새겼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아들을 통해 이루어지게 될 것을 깨달은 후 마리아의 삶은 경건과 헌신으로 온전해졌습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의 모든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어머니였습니다.
II. 피에타, 조각과 소설
오늘, 어버이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떠올려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리아에 대한 설교를 들을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메시아를 세상에 오게 한 역할을 행한 사람이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세시대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지나칠 정도로 마리아를 숭배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천주교의 전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개혁교회는 마리아를 설교의 중심인물로 삼지 않으려는 의도적 노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도 마리아를 신으로 모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마리아가 예수님의 모친이라는 특별한 위치에 있으므로 각별한 공경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일부 신도들은 그것을 알지 못해 성모 마리아를 신처럼 섬깁니다.
천주교의 교리는 마리아의 역할이 중개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크리스천들을 위해 간청하는 중개자, 곧 매개자라고 합니다. 그래서“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하는 말로 성모의 도움을 구합니다.
마리아를 공경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와 이렇게 말하며 복을 내렸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 1:28b).
또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내 주의 어머니”라 부르면서,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눅 1:42b) 하며 축복했습니다.
마리아 자신은 하나님께 아뢰기를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 1:48) 하는 찬송을 올렸습니다.
당연히 믿음의 어머니로서 공경의 대상이 될 만합니다. 하지만 지나친 공경은 숭배가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가톨릭교회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많고 거기에 기도하는 신도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마리아를 숭배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성결하게 예수님을 낳고 기르며 믿음의 본을 보여준 어머니로 기억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어머니는 십자가 아래서 아들 예수의 영혼이 떠나가는 현장을 지켜보았습니다.
인간으로서 아픈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중세의 거장 미켈란젤로는 어머니 마리아가 느꼈을 비탄의 심정을 조각으로 새겨 세상에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잘 아는‘피에타’가 바로 그것입니다.
‘피에타(Pieta)’는‘비탄’곧‘슬픔’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을 끌어안은 성모 마리아의 비탄을 담아 형상화한 것입니다. 자녀의 모든 것을 마음에 두었던 어머니는 비탄 속에서도 하나님께 자신의 온 마음을 바쳤습니다.
이정은 작가가 쓴 『피에타』라는 소설 작품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슬픔을 쓴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 우리 곁에 살아가는 평범한 어머니의 기도와 고뇌, 다시 말하면 어머니라는 존재의 십자가가 있다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어버이 주일에 이 작품의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III. 어머니의 존재 의미
이 소설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딸이 어머니의 삶을 바라보고 추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노인이 된 어머니와 중년의 딸은 서로 ‘애물단지’라고 부르면서 일종의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시골에 살면서 작은 집을 유지할 돈이 항상 부족하여 힘겨워하였습니다. 서울에 사는 딸은 남편의 빠듯한 월급에서 일부를 떼어 어머니께 생활비를 드리는데 어디에 써 버리시는지 금방 없어지고 맙니다.
옷을 사드려도 누구에게 주어 버리고 항상 자주색 월남치마만 입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속이 상합니다. 정말 애물단지 엄마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딸은 자주 어머니를 뵈러 갑니다. 갈 때는 위로와 사랑의 말을 드리겠다고 벼르고 가지만, 막상 가서는 싸움만 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어머니 생각만 하면 마치 시시포스와 줄다리기를 하듯 힘들게 밀어 올린 바위가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 듭니다.
시시포스는 바위를 언덕 위로 올리는 벌을 받은 신화 속의 인물입니다. 삶이 힘들어진 딸은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워져 차라리 돌아가셨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세상에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랑하지만 서로 힘들어하는 부모와 자녀의 모습입니다.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치매를 앓게 되고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딸은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설혹 어머니를 죽게 해 달라고 했기로서니 그 말을 진정으로 믿고 들어주셨느냐고 항의합니다. 그러다가 엄마에게 나를 더 오래 괴롭혀도 참을 수 있는데 이렇게 빨리 가실 줄 몰랐다며 용서를 빕니다.
어머니의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자식과 부모 사이는 용서라는 말이 필요 없단다. 다 한 몸이니까.”비로소 딸은 어머니에게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내 존재는 어머니가 쏟아낸 기도, 염려의 열매이다”라고. 어머니는 태어난 지 겨우 여섯 달 된 어린 생명을 실수로 잃어버린 상처를 갖고 있었습니다.
옛날 약이 귀하던 시절에 어머니는 충치를 치료할 독약을 얻어다가 장롱 밑에 몰래 숨겨두었습니다. 그러나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한 어린아이가 그 약을 만지고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온 가족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분노를 쏟아냅니다. 어머니는 죽음의 유혹을 느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직접 십자가를 만들어 마치 거기에 스스로 매달리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갈 데가 교회 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만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편까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삶은 온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자책하며, 생명이 있는 한 남에게 베푸는 삶만이 속죄의 길이라고 믿게 됩니다.
작은 시골집에 어려운 사람이나 연고가 없는 사람들을 데려와 정성껏 보살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대체로 피해의식이 강해 고마움은커녕 선의를 왜곡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딸은 그것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느 때는 어머니의 무릎에 안겨 무언가를 먹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어머니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늦바람이 났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 남자가 십여 년 전에 어머니로부터 생명을 구한 장애인인 줄 알기까지 혼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립니다.“난 천국은 있다고 믿는다. 감히 바랄 수가 없을 뿐이지. 바라는 것 자체가 욕심이어서 그렇지.”
이 소설은 어머니가 선물로 주신 피에타상을 바라보며 어머니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천국을 믿는 인생의 존재 의미를 추구하면서 어머니라는 대상에 진지한 접근을 시도한 작품입니다. 어머니가 되어 보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또 어머니가 존재의 흐름이 되어 온몸을 통과하는 경험이 없다면 도저히 표현할 길 없는 글입니다. 가정의 달 오월에 가족이 함께 나눌 만한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IV. 마음을 잃어버린 인간들
노쇠한 어머니를 모셔 본 경험이 있는 이는 모두 공감할 것입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면서도 작은 일에 서운하고 서로 갈등을 빚고, 그러다가 곧 후회하고 죄송하고, 심지어 언제 세상을 떠나실까 생각하다가 죄책감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일들이 반복되곤 합니다.
이 소설의 내용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그런 감정을 갖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습니다.
나의 태어남과 자라남, 그리고 기쁨과 고통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마음에 새겨 두고 있는 존재가 곧 어머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으며, 우리 주님의 모친인 마리아가 그것을 그대로 증명했습니다.
더구나 신앙을 가진 어머니라면 나를 위한 기도가 나보다 더 많고 깊었으며, 나의 고통을 나보다 더 아파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내 모든 것을 마음에 두고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 자신의 마음이 파괴되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내 마음을 두었던 그 근본의 자리를 부정하고 소홀히 여긴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세상이 정상을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가 무너지면 말세가 옵니다. 성경말씀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1-2).
그렇습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돈만 알고,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를 잊어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앞에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말세 현상의 한 가지로 이른바 효도계약서라는 것이 등장했습니다.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은퇴 재벌이 아들을 법정에 고발함으로써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문서가 낯설지 않게 되고 말았습니다. 자녀가 효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노후 보장이 되지 않으므로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적 약속을 하자는 것입니다.
농업 국가인 노르웨이는 일찍부터 은퇴계약서 작성이 활발했다고 합니다. 부모는 내가 농토를 물려줄 테니 너희는 1주일에 우유를 몇 리터 이상, 그리고 고기를 몇 킬로그램 이상 제공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상속을 무효로 한다는 내용을 적었습니다.
요새는 이것이 발달하여 매우 구체적인 조항들이 기록되고 공증을 받는다고 합니다. 씁쓸한 심정으로 우리나라의 계약서 모델을 살펴보았습니다. 효도계약서의 기본 틀이라고 하여 이런 게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자녀 아무개는 부모 아무개의 재산을 증여받았으므로 매월 얼마를 생활비 명목으로 부모 사망 시까지 지급한다. 그리고 자녀는 월 1회 이상 부모를 방문한다.” 방문의 의무가 한 달에 한 번 이상으로 적시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현상을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안타깝습니다. 자기 사랑, 돈 사랑, 부모 거역, 감사 망각 등의 풍조가 고스란히 함축된 실상입니다. 어버이는 내 마음이 새겨진 자리라 하였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찾아 얼마의 돈을 드린 것으로 마음의 자리를 찾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갈 곳은 삭막한 말세의 구덩이뿐입니다.
V.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지점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의 근본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성경은 늘 경고하고 또 권고해 왔습니다. 먼저 십계명의 제5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사람들과 관계있는 처음 계명으로 부모 공경을 말씀하였습니다. 장수의 약속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것은 죽을죄로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5).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7). 치는 것이나 저주하는 것은 정도가 같은 죄로 취급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근원을 부모로 정하셨습니다. 그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하는 것으로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습니다.
솔로몬시대에 지혜의 보고가 된 잠언에서는 경건한 생활을 위한 지침으로 부모 공경을 강조하였습니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 23:22).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25). 참 아름다운 교훈입니다.
이 말씀의 앞뒤에는 특히‘마음’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마음이 즐겁겠고”라든지 “마음을 바른길로 인도”한다는 표현에 이어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6) 하고 말씀하였습니다.
마음의 근원인 어머니와 그분을 공경하는 마음이 조화를 이룬 구절입니다. 신약에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를 통해 제5계명을 은혜롭게 해석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부모 공경의 말씀이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신약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양하는 일이 크리스천의 의무에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며 하나님께서 받을 만한 일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딤전 5:4).
이 모든 말씀과 교훈들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중심이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그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모습에서 부모 사랑과 공경의 의미를 배워야 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순간부터 영혼으로 주를 찬양했으며 모든 일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군 천사들의 찬송과 목자들의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했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자라날 때 하신 말과 행동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이 은혜와 진리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머니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의 자리도 역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그 마음을 주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부모님을 공경하고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만나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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