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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달 전부터 클라이머들 사이에 괴산 화양동구곡에 관한 풍문이 예사롭지 않게 나돌기 시작했다.
"화양동에 근사한 바위가 나타났다며?"
"이 아무개란 친구가 아예 부인까지 데리고 와서 두어 달째 천막생활을 하면서 길을 내고 있대."
이처럼 듣는 이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풍문이 처음 확인된 것은 짤막한 뉴스를 통해서였다.
단양산악회의 이경호씨(30세)가 화양동 바위개척의 공로로 충북지사와 청주 메아리산악횡서 공동으로 마련한 그 달의 산악인 상을 수상했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소식도 바위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도 없었지만 소문을 옮기는 클라이머들의 말투로 보아 범상치 않은 바위가 개척되고 있음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화양동구곡은 청담 이중환이 그의 저서 '택리지'를 통해 '금강산 이남에서는 으뜸가는 산수'라고 절찬했을 만큼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1975년 충청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84년 속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당시 그 권역에 속해 편입되었다.
청천면에서 송면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끼고 십리쯤 깃들어 있는 이 골짜기는 특히 아홉군데의 경개가 두드러지는 까닭에 계곡이란 이름 대신 구곡으로 불리고 있다.
조선 중엽 우암 송시열이 은거하면서 아홉군데의 구비마다 이름을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지금도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하다는 제1공 '경천벽', 별을 관측하는 곳처럼 생겼다는 제5곡 '첨성대'등지에서 우암선생의 휘호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부부가 바위옆에서 텐트생활하며 개척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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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첫 주말 하늘 한 번 높고 푸르던 날, 손재식 기자와 함께 화양동으로 향했다.
바윗길을 내고 있는 곳이 어쩌면 유서 깊은 화양구곡의 어느 한 구비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을 제외하고는 '뭔가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여정이 유쾌했다.
자동차로 청주에서 한 시간쯤 거리인 화양동 자연학습원 입구에 도착해 두리번거렸더니 휴게소 한 귀퉁이에 너댓채의 텐트가 보였다. 그 가운데 비닐을 뒤집어쓰고 있는 빛 바랜 천막이 이경호씨네 '집'일 것이 틀림없었다.
"이경호씨 계십니까?"
남의 집 대문 앞에서처럼 조심스레 주인장을 찾았다.
"지가 긴데유."
천막 그늘에서 카라비너와 퀵 드로우를 매만지고 있던 사내가 손을 내밀며 일어섰다. 깡마른 체구에 얼굴이 검게 그을은 그는 형형한 눈빛 때문인지 추수를 앞둔 농부처럼 당차 보였다.
나란히 앉아 일손을 거들던 아낙네도 몸을 일으키며 수더분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부인 김현경씨(26세)였다.
신혼의 단꿈이 밴 보금자리를 두고 석 달 째 객지에서 천막생활을 하고 있으니 심신이 고단할 터인데도 전혀 그런 내색이 비치지 않았다. 도리어 길섶에 널어 말리는 두어 됫박의 도토리와 간이식탁에 놓인 들꽃이 가득한 물병에서 이 부부가 엮어 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바위는 천막 바로 옆에 있었다. 아니 텐트를 바위 옆에 바싹 붙여서 친것이겠다. 증평읍과 송면을 연결하는 592번 국도변에 있는 이 바위는 옛부터 울바위란 이름으로 불리는데 국립지리원의 5만분지 1 지도에서도 그 지명을 찾아볼 수 있다.
울바위는 크게 두 덩어리로 나뉘어져 있다. 이경호씨네 '집' 담벼락처럼 서있는 반듯한 것은 높이가 10미터 남짓, 폭은 그보다 약간 더 긴 정도였다. 군데군데 수평으로 찢어진 틈새가 좋은 홀드가 돼서 5.10a의 '환상'으로부터 5.11d의 '아침햇살' 등 6개의 바윗길이 현재 개척돼 있다.
몇 그루의 소나무가 높이 치솟는 덤불을 경계로 이웃하고 있는 그 오른쪽 바위는 14미터쯤으로 조금 더 높았다. 오버행과 루프가 잘 발달해 있고 두서가닥의 크랙도 눈에 띄었다. 바위 생김새의 다양함으로 인해 5.8의 '개선장군'에서 5.12a/b의 '태양' 등 무려 13개의 바윗길이 개척완료된 상태이고 5.12+로 추정되는 또 하나의 길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울바위에는 20개의 바윗길이 만들어진 셈인데 바위의 규모를 감안할 때 대단한 밀도가 아닐 수 없었다. 마치 아주 치밀하게 설계된 건축물을 보는 듯 했다. 물론 그 치밀한 설계는 이경호씨의 등반력과 감각 그리고 매우 세심한 자연보호의식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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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자유등반의 텃밭이 될 전망 밝아 그는 단양 사람이다. 84년 군에서 전역한 후 서울 엠시산악회에서 활동하던 삼촌 김기용씨(40세)에게 클라이밍을 배웠다. 그가 거처를 옮기면서까지 청주가 지척인 울바위를 개척하게 된 동기는 사뭇 비장하고도 극적이다. 지난 6월 중순 수원 키보산장에서 열린 제 1회 친선암벽대회가 끝난 직후였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충북 지역의 자유등반을 살리기 위해서는 인공암벽 설치와 좋은 바위의 발굴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실천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범충북산악인들의 힘이 한곳에 모아졌다 충북이 산악운동의 불모지가 아닌 이상 개척의 손길을 기다리는 버젓한 처녀바위가 남아 있을리 만무한 것이었다. 그때 이찬복씨가 불쑥 울바위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이경호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등반불가'를 고집하는 그들을 재촉해 그 길로 울바위로 달려갔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그는 장비를 갖춰 다시 울바위를 찾았다. 가장 깨끗한 상태이던 오른쪽 바위의 페이스를 톱로핑으로 올라본 후 확신을 갖게 된 그는 일단 단양집으로 돌아갔다가 7월 18일 부인과 함께 아예 바위 옆으로 거처를 옮겨 왔다. 청주지역 각 산악회의 젊은 클라이머들은 물론, 멀리 제천의 매듭산악회원들까지 소식을 듣고 달려와 텐트와 식량을 지원해주고 심지어는 가스풍로까지 설치해주면서 이들을 반겨주었다. 이처럼 범충북산악인의 성원과 지원속에서 이경호씨는 그의 '창작의욕'을 거리낌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장마로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한 그는 8월말부터 9월까지 한 달 동안의 짧은 기간에 20개의 빈틈없는 바뛤길을 개척해내는 집념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그는 스무개의 바윗길 가운데 2개를 청주와 제천의 클라이머 열사람에게 골고루 배정해 주었다. 그 열사람은 자신이 맡은 길에 볼트를 설치하기도 했고 이름을 짓는 특권도 누렸다. 대신 그 바윗길을 깨끗이 오를 수 있어야 했다. 표면적으로는 보고회를 위한 준비였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충북지역에 자유등반의 불을 당기기 위한 도화선의 의미가 담긴 포석이었다. 실제로 윤동근씨(34세·로봉산악회)는 한 달 동안의 집요한 노력 끝에 5.10d의 페이스 '탄생'을 깔끔하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깎아지른 듯해서 '등반불가'란 고정관념을 갖고 있던 그가 '탄생'을 오를 수 있게 된 것은 정녕 새로운 탄생과 같은 쾌거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길을 일찌감치 마스터한 몇몇 사람은 벌써 남의 길을 기웃거리는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동안 청주의 클라이머들은 2시간 30분 거리인 조령산, 3시간 거리의 금수산 등지에서 암벽등반을 해왔다. 그러나 울바위개척을 계기로 그러한 우려는 즐거움으로 변했다. 서울 클라이머들조차 탐내는 스무개의 바윗길과 10명 이상의 자유등반가를 일거에 갖게된 것이다. 이들이 그토록 열성적으로 준비한 울바위개척보고회는 10월 13일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달려온 많은 클라이머들의 청탄을 받으며 성황리에 치러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