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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1:3-7
오늘 본문의 3절 마지막절 보니까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위로란 말이 조금 막연해서 모든이란 단어를 찾아보았어요. “파세스”란 단어를 썼는데 원어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영어의 All이란 뜻도 있고 또는 “완전하다” ”충분하다. “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읽어 보니까 훨씬 구체적이고 생동감이 있어요. 하나님의 위로는 충분하고...풍성히 넘치는 위로라는거에요. 그리고 어떤 위로가 필요한 그 모든 자리에도 다 위로하시는 완전한 위로란것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심지어 아내도 남편도 자식도 다 위로하지 못하는 그 세밀한 부분까지도, 말로만 위로 하시는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에요. 모든이란 말이 그거에요.
이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늘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금요일에도 말씀 드렸지만 말씀이 삶과 동떨어져서는 안되요. 말씀 속에서 만난 하나님이 여러분의 구체적인 삶속에서 경험되어저야 해요. 그럴때에 흔들리지 않는 참 믿음이 자라납니다. 오늘 만난 위로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런 하나님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환난중에서 위로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4절 상반절보니까, 이렇게 말씀해요.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또 5절 보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환난에서도 반드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에요. 버거운 삶의 환경속에서 한숨 나오고 눈물이 앞을 가릴때 우리를 위로 하십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의 마음이 상하고 아플때에 우리를 위로하세요. 우리의 육신이 지치고 곤할때에 질병으로 인하여 큰 고통이 있을때에도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아골골짝 빈들에서 복음들고 고난을 받을때... 거기에 하나님의 크신 위로 하심이 있어요.
조금만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서 보면 그 위로를 깨달 을 수가 있어요. 말씀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위로하십니다. 심지어 엘리야는 까마귀를 통해서 위로의 손길을 보내셨잖아요.
들으신 분들도 있으시지만 우리 에스더 이야기 다시 쉐어링 할께요. 지난번에 우리 에스더가 결혼할때 여러분들 모두 주례목사님이 한 이야기가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어요. 결혼전 카운셀링을 하는데 저희 사위인 팀에게 물어 보았대요. 너는 에스더와 사랑에 푹 빠진것 같은데 에스더가 처음 어디가 그렇게 좋았느냐고? 그러자 팀이 하는 말이 “눈이 너무 예뻐서” “Beautiful Big Brown Eyes”에 첫눈에 반했대요. 근데 제 딸이지만 저는 아무리 보아도 그건 아니거든요.
저희 집에 프로포즈를 왔을때도 그랬어요. 집사람이 물어 보았습니다. Do you love Esther? 그러자 Absolutely 하면서 첫눈에 반했대요. 그래서 처음에 서로 모를때인데 에스더 어디가 그렇게 좋았느냐고 물으니까 “눈이 너무 예뻐서” 그 눈에 반했다고 하는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 말은요, 듣는 그 순간 저희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었어요. 왜냐면 저희 부부에게 에스더의 눈은 제일 가슴 아픈 상처였기 때문입니다. 6년전에 저의 딸 에스더가 갑상선 항진증으로 판정이 났어요.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진전이 되었는데 큰 문제는 눈이 많이 튀어 나온거에요. 그리고 계속 눈물을 흘렸어요. 그러고 보니까 그동안 여러가지 증상이 있었는데 갑상선은 전혀 생각도 못 해 보았고 또 보헝도 없고 하니까 그냥 그냥 어떻게 넘어 갔었는데 갑자기 증세가 악화가 된거에요.
집사람이 아이와 함게 병원을 같다 와서 울더라고요. 의사가 그랫대요. “아니 어떻게 아이를 이 지경이 되도록 병원한번 찾지않고 그냥 두었느냐고” 의사말이 아픈게 아니라 진짜 무심했던 우리 자신들이 아팠던거죠. 제일 주원인이 스트레스라는거에요.
그리고 생각하니까 아이가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았을까 그제서야 생각이 드는거에요. 유치원때 한국에서 불란서로 떠났는데 그다음에 불란서에서 쏘련으로 쏘련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다시 불란서로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왔거든요. 그때마다 언어가 바뀌고 친구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는 아이들이 나라 바뀌면서도 한 6개월이면 말도 잘하고 하니까 그게 그렇게 스트레스인줄 생각안했어요.
미국에는 언어 클래스가 잇지만 다른 나라에는 그런게 없어요. 그냥 첫날부터 수업에 들어가는거에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한 마디 말도 못하는 상태에서 하루종일 교실에 앉아 있고, 화장실도 가야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야 하는 그 분위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한번은 아들이 아빠 우리는 나라 한번 옮기면 학교가면 한 6개월간은 땅만 쳐다보고 다녀 그랬는데 그런 말이 그제서야 실감이 되는거에요. 그 생각하니까 너무나 마음이 아픈거에요.
못해 준 많은것들이 떠 오르더라고요. 심지어 미국에서 대학을 갈때도 입학허가서를 다 받았어요. 그런데 911이 터지고는 법이 바뀌어서 다 입학이 되는데 유학생 자녀만 입학이 안된대요. 그때 제가 유학생이었거든요. 법이 바뀐걸 모르고 잇었는데 예비등록하러 가서 알았어요. 그래서 신분 바꿀때가지 6개월을 학교를 못 갔어요. 그때 에스더가 그랬습니다. 아빠 어차피 학비도 없는데 잘 됐네 내가 그 동안 일해서 학비 다 마련할께. 부모 위로 한다고 말은 그랬지만 상처가 얼마나 되엇겠어요.
여러분 아시는대로 저는 목회하기전에 선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힘든시간도 사실 많았어요. 별별 일 다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런것들은 사실 잠시 힘든것 뿐이거든요. 또 그만큼 가치도 보람도 있기에 마음이 아프거나 상처가 되거나 그러지는 전혀 않았어요.
그런데 에스더 문제는 전혀 달랐습니다. 튀어나온 눈에서 계속 눈물 흘리는것을 보면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았어요. 갑상선은 약도 먹고 안되면 수술하면 되는데 전문의를 만나 보았더니 갑상선이 다 나아도 눈은 안 들어 간대요. 눈 수술이 있긴 하지만 쉬운 수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웬만하면 그냥 지내는것이 나을거라고 했어요.
새벽기도때 많이 울기도 했어요. 하나님, 나름대로 하나님 일 한다고 이곳 저곳 다녔는데 하나님 왜 이런 아픔을 주십니까? 하나님 이 아이가 결혼도 해야 하는데 누가 이 아이 눈을 보고 좋아하겠습니까? 심지어 하나님 이 아이가 선교지에서 어릴때 통역사역도 하였잖아요. 자기가 다니는 러시아 학교에서 선생님도 전도하고 수 많은 아이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했잖아요. 아빠 개척교회 한다고 청년 많은 다른 교회도 못가고 주일학교 선생하랴 찬양사역하랴 하나님위해 헌신도 했잖아요.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런 기도도 하였어요.
저는 지나온 시간들에 대하여서 절대 후회는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평가를 하고 반성을 하는 일은 있지만 후회는 별로 해 본적이 없어요. 그런데 솔직히 이 부분을 앞에 놓고는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나? 남들 앞에서는 덤덤한척 했지만 사실 그런 생각이 든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사위감이, 눈이 예뻐사 반했다는거에요. 정말 놀랬어요. 우리가 보기에는 쳐다보기조차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아픈 눈이었는데 어떻게 콩깍지기 끼었는지 그 눈이 너무 예뻐서 첫 눈에 반했다는거에요. 처음 사귈때만 해도 많이 아플때 이었거든요. 그리고 처음부터 아픈 이야기도 다 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쁘대요. 저희 부부는 깨달았습니다. “그렇구나 하나님의 위로하심이구나.” 세상의 그 무엇이, 누가 어떤 위로가 이런 위로가 될 수 있겠어요. 하나님께서 그 친구 말 한마디를 통하여 저와 집사람 가슴에 박혔던 큰못을 뽑으시는것을 느꼈습니다.
수술도 안했는데 지금은 눈도 많이 들어 갔어요. 얼마나 사랑을 받는지를 몰라요. 하나님의 위로가 또 깊은 서로의 사랑이 의사가 안 들어간다던 눈도 들어가게 하는구나 하는것을 느낍니다.
여러분! 어차피 누구에게나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고 어려운 시간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럴대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그 위로하심의 은혜를 입는다면 그 아픔은 분명 복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환난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헤가 풍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본문은 계속하여 말씀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들로서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위로의 사람이 되어라” 말씀을 하십니다. 4절 하반절을 보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라고 말씀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것이 우리로 하여금 환난중에 있는자들을 위로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거에요. 6절 보니까 심지어 사도 바울은 자신이 횐난받는것 조차도 또 그 속에서 위로 받는것도 결국은 아픔에 처한 고린도 교회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 위로가 그들 속에 역사하여 그들이 받는 고난을 견디게 하기 위함이라는거에요. 그리고 7절을 보면 고린도 교인 역시 이제는 아픔속에서 당당하게 일어나 또한 남을 위로 할 수 잇는 사람이 될것을 강렬하게 소망하고 잇는것을볼 수가 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40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세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 하라 말슴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을 잘 보시기를 바랍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없는가 살펴 보세요. 아픔이 있는 자들이 없는지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위로가 역사하며 고난을 이기게 할 수가 있어요. 그들이 그 위로를 통하여 위로 받고 또 남을 위로하는 사람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쓰이는 위로하다란 단어는 “파라 칼레오”라고 합니다. 8복 할때도 한번 말씀 드렸어요. 파라라고 하는 말은 “옆으로 곁으로” 하는 뜻이죠? 그리고 “칼레오”라는 말은 부르다라는 말입니다. 위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곁으로 부르시는거에요. 그리고 마음을 달래주십니다. 도움을 주십니다. 대언해 주시고, 힘들고 지칠때 일으켜 세워주시고...그리고 함께 같이 가시는것입니다. 그게 위로에요. 보혜사 성령할 때 이 보혜사란 말도 여기에서 나온 말이에요. 우리도 그렇게 위로하라는거에요.
구약 히브리어로 "위로한다"는 말도 그렇습니다. "나함"이라는 말인데 그 본래 문자적인 의미를 찾아 보니까 그 뜻이 "다시 숨쉬게 한다"는 뜻입니다. 보다 적극적인 위로 였어요.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힌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음뿐만 아니라 도움의 손길읋 내미시어 다시 숨을 내쉬고 소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위로에요. 이게 하나님의 위로하심입니다. 그런 위로를 우리도 하라는거에요.
처음 미국와서 목회할때에 어떤 분이 멀리서 우리교회를 나오는 분이 있었어요. 사업하다가 망하고 부인은 병이 들어서 여동생 집에 있고 본인 혼자 밴에서 생활하면서 페인트 보조일을 했어요. 그런데 한번은 밤중에 전화가 왔어요. L.A 한인타운 마켓 주차장에 파킹하고 차 안세서 잠을 자는데 차가 토잉카에 실려 버린거에요.
전화 받고 집에 있는 캐쉬 다 챙기고 수표 카드 다 가지고 갔는데 토잉은 캐쉬만 받는데요. 50불이 부족한데 방법이 없었어요. 제가 그 분게 물었어요. L.A에 그동안 머무셨는데 어디 전화해서 50불 구할떼가 없습니까? 수첩을 펴서 한참을 보더니 그래요. 없네요. 저는 그때 느꼈습니다. 벼랑에 선 사람의 모습이 이렇구나. 정말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필요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제가 카드깡을 어떻게 해 볼려고 다녔습니다. 자칫 이런 이야기가 제 자랑같이 들릴까 조심스러운데 그냥 나눔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안 사실인데 그 밤중에 문 열려 있는곳은 전부 한인이 하는 술집이었습니다. 덕분에 한인타운 술집은 다 들어가 보았어요. 카드 받고 50불만 좀 해 달라고 사정하는데 참 야박합디다. 그래도 같은 한국사람이니가 났겠지 햇는데 다 거절당했어요. 할 수 없이 회계집사님 집이 풀러톤이었는데 거기를 다시 왔어요. 새벽에 문 두드려서 50불을 받아 가지고 다시 가서 차를 찾고 집으로 함께 왔는데 오니까 새벽 기도시간이었어요. 같이 새벽기도 하고 한 동안 우리집에 함께 살았습니다.작은 아파트에 살아서 우리 부부가 거실에 잘때인데 저희 아들하고 한방에 같이 잤어요. 그래도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해 하던지요.
한동안 같이 살았는데 그런데 어느날 이 분이 연락도 없이 사라졌어요. 교회 한 식구에게 큰 돈은 아니지만 돈 빌려간것도 알았어요. 참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구나.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지금도 확신하는게 있어요. 그 분이 벼랑끝에서 자기가 받았던 그 하나님의 위로를 반드시 기억할거다 하는거에요. 하나님께서 타취하신것은 공짜가 없거든요. 그 확신때문에 저는 그 분에 대한 섭섭함이 전혀 없어요. 지금 이름도 잊어버렸는데 얼굴은 선명해요. 기도 할때에 그 분을 위하여서도 많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셨던 흔적이 그 영혼을 주님의 곁으로 이끌어 달라고 기도해요.
성경에 나오는 사람중에 위로자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어요. 그런데 사도들이 그에게 붙혀준 이름이 바나바입니다. 이 말은 바로 위로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의 삶이 위로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에요. 결국 이 위로의 아들이 내민 손길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일어 났습니까? 사도 바울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어요.
바울이 예수 모를때에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엄청 괴롭힌 사람이잖아요. 예수 믿고 난 다음에 그 죄책감이 얼마나 컸겠어요. 그냥 숨어 살고 싶었을거에요. 사도들과 믿는 사람들에게서 왕따도 당했어요. 그런데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 다소까지 갔습니다. 괴로운 그의 마음을 싸매었을것입니다. 받은 상처를 위로하고 안아주었어요. 그리고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왔어요. 사도 바울이 바나바의 위로를 통하여 그렇게 탄생된거에요. 결국 그의 위로는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 지는 귀중한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서로가 참 바나바가 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서로 위로 할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우리는 바나바가 된 삷 보다는 바나바가 필요하고 바나바로부터 용기를 얻어야 될 형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바나바를 통하여 우리에게 위로를 주셨고 그 위로를 우리가 받은것이 확실하다면...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바나바가 되어야 합니다. 부족하지만 그렇게 살아야 해요. 여러분의 작은 위로를 하나님께서는 크게 쓰실것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영적인 감각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나를 통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역사 하실 수 있도록 합시다. 진실한 위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할 때 사람이 살것이며, 가정이 살것이며 교회가 살것이고 하늘나라가 우리 가운데 꽃피게 될 것입니다. 이 위로의 풍성하심이 우리가운데에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세월호 시건 이전에 한 설교인데 유족들과 가슴아파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위로하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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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이목사님 대단해요.
그 많은 환난과 연단을 다 이기고 우뚝 섰으니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고 많은 은혜와 복을 내리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