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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 떼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유사랑/시사펀치
2002 FIFA 월드컵 1라운드 D조 : 포르투갈, 폴란드, 미국, 한국. 작년 말 부산에서 열렸던 본선 조추첨에서 결정된 한국의 조편성 결과이다. 사람들은 어쨌든 최악의 결과는 피한, 그럭저럭 보통의 결과라고 안도하는 편이다. 이 결과에 대해 신이 난 부류의 집단들이 있다. 특히 언론이나, 대기업 광고들은 한국의 16강 진출에 대한 가능성을 부풀리는데 온통 열중되어있다. 한국 축구팀의 월드컵 16강 진출은 과연 객관적으로 살펴봤을 때 정말 그만큼의 호들갑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일까?
한국 축구팀의 월드컵 16강 진출이 이번에도 무리라는 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객관적인 평가 자료를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또는 공인된 평가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FIFA 월드 랭킹’. FIFA 홈페이지(http://www.fifa.com)에 접속하면 누구라도 매달 업데이트 되는 세계 축구 순위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지난 1월 16일자 랭킹에서 우리나라는 총점 599점으로 42위에 랭크돼 있다. 1년 전인 2000년 12월, 40위의 성적이 말해주듯이 우리나라는 내내 40위권 초반을 유지해 왔었다. 한편, 우리나라의 톱시드 배정을 무색케 해버린 강호 포르투갈은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축구국가들인 프랑스, 아르헨티나, 브라질 바로 다음 순위인 4위이다. 총점 741점. 우리나라가 16강 진출의 제물로 벼르고 있다는 미국(662점)과 폴란드(629점)는 각각 24위와 31위. 미국은 1년 전에 비해 8계단 하락한 순위라고는 하나 94년 월드컵 개최 이후 워낙 빠른 속도로 수직상승했던 터라 이 정도의 주춤거림은 별 의미가 없다는 평가다. 16강 진출의 실질적 갈림길이라 할 수 있는 본선 1차전에서 우리와 맞붙게 될 폴란드는 1년 전 우리보다 3계단 밑이던 43위에서 무려 10계단이나 상승한 성적.
객관적 평가에서의 위와 같은 뚜렷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기필코 16강에 진출할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의 믿음은 너무도 완고하다. 그 믿음을 조작하고 주도하는 데 앞장 서는 것은 물론 스포츠신문. 본선 조추첨이 끝난 직후인 지난 12월 3일자 스포츠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발표됐다.
한국이 (포르투갈과) 조별 예선 최종일로 잡힌 일정 덕을 톡톡히 볼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포르투갈전이 벌어지기 이전에 ▲포르투갈이 2승으로 16강 진출을 결정짓고 ▲D조의 16강 파트너인 G조에서 이탈리아가 2위에 랭크될 경우다. G조 2위의 16강 파트너는 D조 1위. 결국 포르투갈이 이탈리아를 피하기 위해 조 2위를 하려면 죽어라 한국에 져야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데 이 같은 가능성이 매우 높아 이 '희망설'은 큰 기대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포르투갈의 상대는 승리가 확실시되는 미국과 폴란드. 따라서 한국전 이전에 2승이 충분하다. 반면 이탈리아의 경우 98년 프랑스대회 3위 팀 크로아티아와 한조를 이루고 있어 1위를 떼어논 당상으로 여길 수는 없는 처지다.
스포츠신문의 대목몰이 마케팅 작전이 빚어낸 엄청난 상상력이다.
한국이 우승 후보 포르투갈과 맨 마지막으로 붙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다. 포르투갈이 미국과 폴란드를 누르고 2승을 챙겨 먼저 16강 진출을 확보할 것이라는 예측에도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G조에서 2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애국적’인 믿음은 아무래도 안쓰럽기만 하다. 크로아티아가 이탈리아를 잡고 1위가 될 거라는 얘긴데, 98년 프랑스 월드컵의 최대 이변이 이번에도 일어날 지 미지수일뿐더러 지금의 크로아티아는 “98년 프랑스대회 3위팀”의 실력과는 거리가 멀다. 98년 말 브라질, 프랑스, 독일에 이어 세계 4위로 껑충 올라선 크로아티아는 99년 말 9위, 2000년 말 18위, 그리고 지금은 19위로 지난 3년 간 어느 나라보다도 가파른 하강 곡선을 그렸다. 오죽하면 스포츠신문들의 G조 전력분석에서 1위 이탈리아를 제껴놓고 에콰도르와 멕시코가 2위 다툼을 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겠는가?
반면 이탈리아는 4위에서 7위 사이를 조금씩 왔다갔다하다가 2002년 1월 현재 세계 6위에 랭크돼 있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스포츠 전문가들과 도박사들이 아르헨티나(25%)에 이어 이번 대회 우승 후보 2순위(20%)로 지목하고 있는 팀이다. 이런 사실들에 주목할 때, 포르투갈이 G조 2위 이탈리아를 피하기 위해 “죽어라 한국에 져”주기보다는, G조 1위 이탈리아를 피하기 위해 가장 손쉬운 상대인 한국을 놓칠 리 없다는 계산에 직면하게 된다.
백번 양보해서 이탈리아가 크로아티아에 져 G조 2위가 됐다고 치자. 세계 4위 포르투갈이 전 세계인이 바라보는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피하기 위해 세계 42위의 한국에 져주는 ‘망신’을 자처하겠는가? 그리고 크로아티아가 다시 한 번 무서운 기세로 이탈리아를 꺾고 조1위를 차지한다면, 포르투갈로서도 크로아티아를 피하고 한 풀 죽은 이탈리아를 상대하는 게 백 번 나을 것이다. 항간에는 포르투갈이 루이스 피구 같은 주전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한국전에서 후보 선수들을 내보낼 것이라는 데 희망을 거는 사람들이 있는데, 세계 4위는 스타 선수 몇 명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포르투갈은 이미 ‘유로 2000’ 당시 비슷한 상황에서 후보급 선수들을 내보내 독일에 완승을 거둔바 있다.
“우리나라는 마지막 경기에서 이때까지 가장 좋은 플레이를 펼쳤죠.” 축구 전문 웹진 <토탈사커>(http://ts.soccerlove.com)의 게시판에서 한 네티즌이 올린 말이다. 이 네티즌의 말대로 마지막 경기에 몰려 선전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처럼 1, 2차전에서 쓰디쓴 고배를 마셔야 한다는 얘긴데, 그렇데 된다면 마지막 경기의 결과에 관계없이 16강 진출은 물 건너 간다. 그러니 포르투갈전에 대한 꿈은 접기로 하자.
4천만이 붉은 악마가 되어도, 또 그 붉은 악마들이 닭똥같은 눈물을 흘려도 16강은 어렵다/ 이종국 기자
포르투갈전에 대한 지금까지의 가정은 물론 한국이 미국이나 폴란드를 상대로 1승을 거두었을 때를 전제로 한다. 1차전인 폴란드전에서 우리나라가 패배한다면 16강 진출의 가망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2차전에서 미국에 이긴다 하더라도 1승 2패의 성적으로는 어렵다. 폴란드가 미국과 포르투갈에 모두 진다 하더라도 골 득실차에서 우리나라를 앞설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하긴 미국이 우리를 잡고 폴란드까지 잡아 2승 1패를 기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1차전에서 패배한다면 오매불망 16강을 염원해온 전 국민의 실망과 질책에 직면한 대표팀이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될 건 뻔한 일.
폴란드는 이번 유럽 예선에서 전승으로 가장 먼저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팀이다. 일부에서는 폴란드가 유럽 예선에서 가장 약체조의 혜택을 입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2000년 말 각각 세계 14위와 34위를 기록하던 노르웨이와 우크라이나를 연거푸 꺾어 그들을 FIFA 랭킹 25위와 45위로 떨어지게 만든 일등 공신이 바로 폴란드다. 대부분의 외신이 조추첨 이후 한국의 16강 진출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번 더 양보해서 한국이 폴란드전에서 이기는 이변을 낳는다고 치자.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부터 4회 연속으로 본선에 진출한 북중미의 축구 강국 미국에게 진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지난 12월 7일 서귀포에서 열렸던 평가전에서 한국이 1:0으로 이긴 사실에 크게 고무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이것도 한갓 억지에 불과하다. 그날 미국은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존 오브라이언 같은 걸출한 주전 선수들이 대거 불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승패를 떠나 실망스런 경기 내용을 보여줬다. 특히 후반전에는 패스가 거의 연결되지 못한 채 미국 선수들의 조직력과 개인기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이었다. 이번 달 19일부터 미국에서 열리는 북중미 골드컵에서 한번 더 이겨 기선을 제압하자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번 경기에서도 미국은 대부분의 스타급 선수들이 빠질 예정이다. 괜히 헛물켜지 말자.
폴란드전과 미국전에서 운 좋게 1승 1무를 기록해도 16강 진출은 여전히 어렵다. 폴란드나 미국 중 한 나라도 1승 1무 1패를 기록하게 될 텐데, 앞서도 말했듯이 골 득실차에서 우리가 뒤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12월 2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한국이 16강 진출을 위해서는 미국과 폴란드를 상대로 2승을 올리거나 예선 3경기서 최소한 1승2무를 거둬야 가능하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16강 진출이 한마디로 어렵지만 포르투갈과 3차전을 치르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입을 모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월드컵 역사상 개최국이 16강에 진출하지 못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큰 기대를 거는 것 같다. 그러나 이건 중학생도 다 아는 ‘유비추리의 오류’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지 못 할 근거가 하나 더 는다. 이번 월드컵에는 역사상 가장 많은 ‘최초’가 따라붙는다. 밀레니엄 최초의 월드컵, 아시아 지역에서 최초로 열리는 월드컵, 최초로 두 나라에서 공동 개최되는 월드컵 등등. 이에 더해 개최국이 16강에 진출하지 못하는 최초의 월드컵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는 얘기다. 더 웃기는 건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치고 또 하나의 개최국인 일본의 16강 진출을 낙관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최국’이라는 ‘신화’에 더 이상 놀아나지 말자.
앞서 언급한 <토탈사커> 자유게시판에는 이런 글도 있다. “선수들의 레벨만큼이나 감독들의 레벨도 무시 못하는 건데 히딩크 감독이 미국이나 폴란드 감독보다는 최고로 경험이 많지요. 감독레벨이 한단계 위인 것 같다는 말입니다.” 히딩크 감독에 대한 이런 기대 역시 터무니없는 ‘한탕주의’의 소산일 뿐이다. 축구란 감독 하나로 바뀌는 게 아니다. 프랑스 월드컵에서 크로아티아를 3위에까지 올려놓은 블라제비치 감독도 이란 대표팀을 맡은 뒤 바레인 등에게도 패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잖은가.
98년 월드컵 당시 우리 언론은 한국이 네덜란드를 이기고 16강에 진출할 수도 있다고, 희망은 있다고 떠들어댔다. 이번에도 ‘공은 둥글다’는 둥의 케케묵은 어법으로 장삿속을 챙길 생각이라면, 앞으론 네모난 공을 만들어 한국팀 전용 축구공으로 사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