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석초시인과 서천 *
글/사진 김경식
겨울이 길면 봄은 더욱 소중하다. 금년 봄이 유난히 기다려졌던 것은 아마도 어느 겨울보다도 춥고 긴 겨울이었기 때문이리라. 겨울이 물러나고 봄이 온 길목을 나서면서 여행 준비를 위해 지도를 펼치면 가슴이 설렌다. 그러나 봄이 오는 시기는 언제나 고통을 수반한다. 꽃샘추위도 며칠마다 오고 가고 황사도 몇 번이고 왔다가야 비로소 봄이 찾아온다.
영국의 시인 셀리는 ‘겨울이 온다면 봄이 어찌 멀다 하리요’라는 짧은 싯구로 절망한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이런 시기에 충남 서천에 있는 신석초 시인의 고향 마을을 선택하여 문학기행이란 이름으로 떠나는 여행의 맛은 색다르다.
먼저 신석초 시인의 대표시중에서 ‘꽃잎절구’ 한편을 읽으면, 우리네 삶도 꽃처럼 짧은 순간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꽃잎이여 그대
다토아 피어
비 바람에 뒤설레며
가는 가냘픈 살갗이여.
그대 눈길의
머언 여로(旅路)에
하늘과 구름
혼자 그리워
붉어져 가노니
저문 산 길가에 져
뒤둥글지라도
마냥 붉게 타다 가는
환한 목숨이여.
- 신석초 시인 시 꽃잎 절구 전문
신석초 시인 생가터
"이 지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슬픈 일이나, 얼마나 단명하며, 또 얼마나 없어지기 쉬운가!"라며 수필가 김진섭은 자신의 수필 ‘백설부’에서 인생의 삶이 눈처럼 순간에 사라질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듯 사람 사는 세상의 이런 저런 아름다움은 곧 사라지기에 소중하다. 영원하지 못하기에 오히려 아름답다. 신석초 시인의 이 시는 짧은 순간에 실존하는 꽃의 아름답지만 곧 떠나야 하는 인생의 삶을 은유로 노래한다.
모든 꽃들은 '비바람에 뒤설레'는 '가냘픈' 존재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다토아 피어'난다
꽃은 결코 인연이 될 수 없는 '하늘과 구름'을 '혼자 그리워' 하면서 '붉어져' 간다. 이렇게 애타게 간직한 그리움의 색이 붉은색이 아니겠는가. '붉게 타다 가는 환한 목숨'의 꽃잎처럼 저마다 주어진 각자가 자신의 현실적인 삶에 충실하다가 이 지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 꽃처럼 저렇게 아름다운 이별을 암시한다.
신석초 시인은 우리의 현대시를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라는 비교의 화두로 시를 쓴 시인이다. 1946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한 석초시집(石艸詩集)은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와 두보와 이백 그리고 노장 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정서와 글로 시를 쓴 민족의 시인이다. 외래사조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의 뇌리에는 언제나 민족이 존재한다.
‘가장 민족족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괴테의 말을 그가 자주 인용한 것도 이런 맥락이리라.
신석초 시인의 고향 가는 길은 서해안 고속도로 ‘서천나들목’으로 진입하면 쉽다. '서천나들목삼거리'에서 좌회전하고 서천읍을 통과한 후에 서천오거리에서 ‘한산모시전시관’ 방향으로 계속 직진한다. 문헌서원을 지나자 나타나는 삼거리에서 29번 국도인 ‘장항’ 방향으로 우회전 한다. 이곳에서 약 300M를 달리면 왼쪽 산 밑으로 동네가 보인다. 좁은 농로길 같은 곳으로 들어서면 여기가 신석초 시인의 고향 마을인 ‘활동리’다.
신석초 시인의 고향
동네입구에서 박금열(93세) 할머니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박 할머니의 남편 송정해(1909년생)씨가 신석초 시인의 어릴 때 친구였기 때문이다. 약간은 가는 귀가 먹은 박금열 할머니는 신석초 시인의 생가와 묘소를 찾아 왔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
“석초 그가 우리 남편과 친구였지유, 얼마전에 산소를 저리로 이장을 해 왔시유”
“이제 신씨들은 이 마을에 거의 살지 않지유”,
“옛날에 석초 그이 네들 집이 네모반듯한 기와집에 연못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밭이 되었시유”
“저기 보이는 산소가 석초의 묘 여유”
“ 여기 신씨덜 토지개혁과 인공 때 망했지유”
신석초 시인의 큰 아들이 6,25때 죽은 이야기와 서로 죽고 죽인 이야기들을 들으니 소름이 끼친다. 아직도 이 땅의 골골마다 이런 슬프고 깊은 상처가 존재한다. 이직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세월이 되어야 이런 상처가 치유되리라
석초의 생가에는 홍매 한 그루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그 홍매의 썩은 그루터기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이 홍매화 나무가 자라고 있어 집 이름을 ‘홍매루’라고 했다.
박금렬 할머니
‘홍매루’ 입구에 있던 연못가에는 은행나무와 벽오등이 집의 운치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으리라. 그리고 모란과 작약, 국화가 자라던 꽃밭을 서성거리던 석초 선생의 젊은 날을 생각해 본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제는 남의 밭이 되어 접근이 용이하지 않게 되었다.
신석초 시인의 생가터 앞에 승용차를 세우고 신석초 시인의 묘소를 찾아 오른다. 봄바람이 삽상하다. 묘소는 정갈하였지만 신석초 시인이 시인이란 글귀가 없다. 근처의 묘지들에는 비석들이 즐비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곳 신석초 시인의 묘소에는 비석과 작은 작은 시비조차 보이지 않는다. 무슨 연유가 있을 듯싶지만 알 길이 없다. 박 할머니도 이곳까지는 올라오시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생의 묘소는 자신이 옛날 태어나고 자란 마을과 생가터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앉아 있다.
산소를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작은 시비라도 세웠으면 하는 바램이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이것이 쉽지 않았다면 상석에 시인이었다는 표시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지금까지 찾아 간 문인들의 묘소 중에서 가장 초라한 망우리 공동묘지의 박인환 시인의 묘에도 막돌에 새겨진 ‘세월이 가면’이라는 싯구가 있지 않았던가.
서울에서 오백리가 넘는 길을 달려온 나그네의 심사가 슬프다. 지금은 남의 집터가 된 생가터의 대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신석초 시인의 시‘춘산(春山)’을 읽으며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봄이 오면
산이 주저앉고
꽃물 든
안개위로
곱게 단장을 하는
산
건넛마을
묵은 기와집 담에
환히 핀
개나리 꽃
신석초 시인의 시‘ 춘산’ 전문
생가터 입구에 세워진 승용차 주변에서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밭 경계선에 심은 향나무 묘목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중년 여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 차바퀴에 깔려 이 나무가 이렇게 죽게 되었잖아요” 투덜거린다. 주차를 하면서 작은 묘목을 발견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워낙 좁은 지역이라 제대로 볼 수 없었어요.” 하니 그녀의 인상이 좀 펴진다. 신석초 시인의 생가와 묘소를 찾아 온 이야기와 한달 후에 버스로 40명이 넘는 분들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하는 말에 서윤네(56)씨는 귀를 솔깃 세운다. “이 생가터비 세울 때 하도 사정을 해서 허락을 했는데 지금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고 있어요”
지금 신석초 시인의 생가터에 현대식 양옥집을 짓고 살고 있는 주인은 서윤네 씨의 남편인 구자연(55)씨다. 그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목수가 되어 전국을 떠돌고 있다고 한다. 서윤내 씨는 이런 남편을 자랑한다. 자랑할 만하다. 목수도 그냥 목수가 아니라 전통가옥기능보유자인 대목수이기 때문이다. 결국 구자연씨가 신석초 시인의 집의 정기를 모두 가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석초 시인 생가터 표석
구자연씨의 조상들은 대대로 신석초 시인 집안의 소작인 이었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해방전에는 신석초 시인 집의 소작인들이었다. 쌀 천석을 한 부농이었지만 지금은 생가터만 남아 있고 소작인 아들이 주인이 되어 생가의 표지석을 세울 땅을 오히려 기부하였다.
지주가 몰락하고 소작인들이 땅의 주인이 되는 급진적인 변화를 실감한다.
신석초 시인은1909년 6월4(음력 4월17일)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옛지명:한산면 숭문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응식, 아호는 유인, 초석, ‘석초(石艸)’를 사용했다. 6세 때에 이미 한문공부를 시작하였으며, 사서삼경을 익힌 후인 13세 때 한산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16세 때인 1924년 봄에 결혼하고 이듬해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약 2년을 공부하다가 병으로 휴학한다. 그리고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난다.
1929년 그의 나이 21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법정대학 철학과에 다니며 프랑스 작가 폴 발레리에 심취한다.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고 안막과 박영희와 교류하면서 카프(KAPE)의 맹원으로 활약한다. 그러나 1925년에 박영희와 함께 카프를 탈퇴하고 다음해 병으로 귀국 한 후에 위당 정인보 선생의 소개로 이육사 시인과 교류한다.
1938년 이육사 시인과 함께 경주를 여행하며 그와의 우정은 깊어진다. 어려운 시기에 여행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이후 30년이 지난 1968년 5월에 신석초 시인은 옛 친구 이육사 시인의 시비를 세우는 일에 기여한다. 이육사 시인과의 옛 추억을 회상하며 1968년 4월 동아일보에 ‘육사(陸史)를 생각한다’ 라는 시를 발표한다.
우리는 서울 장안에서 만나
꽃 사이에 술 마시며 놀았니라
지금 너만 어디메에가
광야의 시를 읊느뇨
내려다보는 동해바다는
한잔 물이어라
달 아래 피리 불어 여는 너
나라 위해 격한 말씀이 없네.
신석초 시인의 시 ‘ 陸史를 생각한다’ 전문
1940년 봄에 동경을 여행하고 돌아와 이육사 시인과 함께 남원과 부여 등지를 기행하면서 문장지에 ‘검무랑’과 ‘비취단장’을 발표한다.
1943년 3월에는 고향 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7대조인 석북 신광수(1712~1775) 시인의 묘소를 참배하며, 민족과 자신에게 다가올 시련에 대비한다.
석북 신광수는 높은 벼슬을 하면서도 노모(老母)를 모실 집이 없어 왕으로 부터 집과 노비를 하사받았던 청렴결백한 선비며 시인이다. 서화와 과시(科詩)에 뛰어났으며 그 중 관산융마(關山戎馬)는 그의 대표작이다.
두보의 시를 인용한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는 자유롭고 느리게 부르는 노래다. 두보(杜甫)가 이리 저리로 유랑 생활을 하다 늙어 악양루에서 삶을 한탄한 것을 묘사한 시다. 사회현실과 동떨어진 시를 쓰면서도 시의 정서를 잃지 않았던 두보를 석북 신광수 선생은 흠모했다. 두보에게는 감동을 주는 현실인식의 리얼리티를 신광수 선생은 좋아했다.
문집으로 석북집(石北集)이 전한다.
그는 현장감 있는 문장으로 당시의 사회의 모순적인 현실을 표현하였다. 농촌의 몰락과 관리들의 부정과 횡포를 담아 하층민의 고단함 삶과 고난을 시의 소재로 삶은 문인이기도 했다.
석북 신광수의 친구였던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은 그에 관해서, “득의작(得意作)은 삼당(三唐)을 따를만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라도 명나라의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을 능가하며 동인(東人)의 누습을 벗어났다.”고 평하며 조선의 백낙천(白樂天)이라는 불렀다. 이런 석북 선생을 흠모하는 것은 그로서는 일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신석초 시인은 일제 말기의 피난처를 찾다가 ‘완산’으로 숨어든다.
1950년 6,25 전쟁으로 큰 아들을 잃어버리고 슬픔속에서도 고향 사람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화양면장이 되기도 한다. 이후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문화부장과 현대문학지의 추천위원과 1965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이 되어 문단의 어른이 된다.
1975년 3월8일 66세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난다.
신석초 시인 묘소
사후 10년 후에 김후란 시인을 중심이 되어 신석초 시인 전집 2권이 출간되어 그의 문학인생을 정리하였다. 이 전집에는 김후란 시인과 신석초 시인의 긴 대담의 글이 게재 된다.
1973년 11월 시 전문지 ‘심상’에 게재 되었던 신석초 시인과
김후란 시인의 대담 몇 단락을 원문대로 인용한다.
김후란 시인: 시를 왜 쓰시죠?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석초 시인: 밀려드는 고독 때문이지. 고독이 시를 쓰게 하는 거야. 노장만 해도 불교적으로 유교에선 유교적으로 해석하려 들지만 결국은 자기를 이야기한 것 아니겠어요? 노자는 철학적인 작업을 통해서, 장자는 사상적, 문화적인 작업을 통해서지.
김후란 시인: 발레리(1871~1945)를 발견한 이래 상당 기간 심취하셨던 자취가 선생님 작품을 통해서 역력한데요. 어느 선까지 일체감을 느끼고 계십니까?
신석초 시인: 내가 발레리에 심취하여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사실이예요. 무엇보다도 그의 동양적인 사고방식으로 살려는 그 점이 나를 끌어당겼나봐. 발레리 자신도 젊어서 사상과 행동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을 거예요. 전통과 진보에 대한 그의 태도라든가 역사 현실에 대한 그의 자세에는 동양적인 영향의 일면이 다분히 있고 이것이 이조 오백년 유가의 전통과 인습에 반발하던 나에게 섬광처럼 부딪쳐 온 것이지.
김후란 시인: 근래에 쓰시는 작품은 선생님 말씀대로 다시 고장에 돌아온, 다분히 동양적인 귀속 계열에 드는 것 같은데 이것으로 안주하실 것인지요.
신석초 시인: 나는 감성의 우주를 방황하는 나그네예요. ‘엘렌 포우’가 시는 하나의 우주라 했듯이, 또 발레리도 시란 인간이 잡을 수 없는 광막한 것, 시인은 그 세계를 향해서 걸어가는 나그네라 했듯이 나 자신도 나그네라 생각하고 있어. 어떤 경우에도 안주라든가 만족이란 없는 것 같아. 시인뿐 아니라 어떤 창작을 한다해도 만족해 사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늘그막에 원고를 다 태워 버리는 사람이 있지 않아요?
김후란 시인: 어떤 때 시가 써지는지요. 시의 발상은?
신석초 시인: 생활에서 어떤 충격을 받았을때 혹은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을 때 시상이 떠오르더군.
신석초 시인의 시세계는 세 계열로 나눌 수 있다.
‘비취단장’으로부터 ‘바라춤’에 이르는 여정이 첫 번째며, ‘처용은 말하다’가 두 번째다
마지막은 ‘프로메터우스 시편’이다.
신석초 시인은 담배를 즐겨 피우며 커피를 좋아했다. 문인들의 기호는 다양하다.
오상순 소설가는 담배를 하도 많이 피워서 그의 호 ‘공초’를 ‘꽁초’라고 부른다.
발레리도 시를 쓸 때 주로 블랙커피를 마셨으며, 1930년대를 풍미했던 영국의 시인은‘오든( Auden1907~1973)’은 홍차를 많이 마셨다. 좌익적이면서 서정성이 짙은 시를 썼던 스펜더(Spender1909~1995)는 줄담배를 피우며 시를 썼다. 창작은 극도의 정신적인 노동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문인들의 기호가 흥미롭다.
신석초 시인의 고향마을에서 한산모시전시관까지는 지척이다. 활동리에서 나와 논산과 ‘강경’ 방향의 29번 국도를 타고 고개를 넘어가면 그곳이 바로 ‘한산모시관’이다.
백제 때에 한산면에 있는 건지산 기슭에서 모시풀이 발견되었다. 이 모시풀을 이 지방 사람들의 인내와 피나는 노력으로 유명한 한산모시는 태어난다. 백옥처럼 희고 아름다우며 비단보다 섬세하고 가늘어 여름철 옷감으로는 최고다. 조상들이 1000년 동안 맥을 이어준 전통 직조기술로 생산하는 자연섬유가 바로 한산모시다. 한산면 일대에는 아직도 양질의 모시가 많이 생산된다. 서천군에서 한산모시 생산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쌀 생산소득의 17%나 되기 때문이다.
한산모시관은 이 지역 출신들이 한산모시의 맥이 끊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전수교육관'을 지어 운영하고 있는 것이 의미 있다. 아울러 서천군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한산모시를 광고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한산모시박물관'을 세웠다. 29번 국도변 언덕에 넓게 자리 잡고 있는 ‘한산모시관’ 건너편에는 ‘한산소곡주제조장’과 ‘토속관’ 등이 있다. 제대로 관람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 될 정도로 볼거리가 많다.모시의 역사를 말해주는 고서적과 베틀, 모시길쌈 도구, 모시 제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을 관람하다 보면 우리조상들의 고달 푼 생과 멋을 동시에 실감한다.
한산모시전시관
그러나 이곳에 모시전시관만 있다고 한다면 단조로운 곳이 되리라.
찾는 이는 비록 적지만, 한산모시관 위쪽 양지바른 언덕에는 신석초 시인의 시비와 이상재선생추모비, 조선시대 3대 여류 시인중의 한 분인 임벽당 김씨의 시비가 서 있다.
신석초 시인의 시비에는 그의 대표시 중의 하나인 ‘꽃잎절구’가 세로 행으로 새겨져 있다.
이 시비는 화강석으로 구름을 형상화 한 모양이 특이하다. 신석초 시인의 흉상을 제작한 정성도 놀랍다. 찾는 이들이 비록 적지만 다른 시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시비로 서 있다.
‘이상재선생추모비’는 오석(烏石)에 ‘月南李商在先生追慕碑’ 가 세로행으로 새겨 넣었으며, 받침돌에는 무궁화를 머릿돌에는 화강암으로 된 용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필자를 감동시킨 것은 임벽당 김씨(1492~1549년)의 시비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큰 자연 화강석으로 만든 그녀의 시비의 시 ‘貧女吟(빈녀음)’이란 시를 읽으면 가슴이 아리다.
地僻人來少(지벽인래소) 땅이 후미지니 오는 사람적고
山深爲事稀(산심위사희) 산이 깊으매 속세의 일이 드물구나
家貧無斗酒(가빈무두주) 가난하여 술 한말도 없으니
宿客夜還歸(숙객야환귀) 잘 손님 밤에 되돌아가네
가난이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렇듯 참담하고 슬프다.
조선 중종 때의 여류 시인이었던 임벽당 김씨는 기묘사화를 피해 고향인 한산(韓山)에 은거하고 있던 임벽당(林碧塘) 유여주(兪汝舟)와 혼인한다. 그의 나이 18세 때다. 그녀의 고향은 인근 부여이며 부친 김수천과 모친 한향조씨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다. 조부 ‘김축’에게 글을 배웠는데 특히 시문이 뛰어났다. 궁벽한 산골에 살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시공부에 정진하여 귀한 한시 몇 수를 남기고 있다.
그녀의 시집이 존재했다고 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단지 그녀의 시가 열조시집(列朝詩集)과 국조시산(國朝詩刪)에 7수가 전한다. 열조시집은 명나라의 문인 '전겸익'이 편찬한 책인데 1683년 애산 김두명이 사신으로 갔다가 이 책을 수집하여 국내로 들여왔다. 이 책에 임벽당 김씨의 시 3수가 게재되어 조정과 문인들 모두는 놀라게 된다. 그래서 당당한 여류 시인으로 조명을 받게 된다. 난설헌집(蘭雪軒集)에도 증별(贈別)과 빈녀음(貧女吟)을 제외한 나머지 시가 게재되어있다. 신사임당과 허난설과 더불어 조선전기 중기의 3대 여류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임벽당 김씨에 관해서는 아는 이 드물다. 그녀의 묘소는 서천군 비인에 있다.
임벽당 김씨 시비
이상재선생생가지(李商在先生生家址)는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 있다. 생가에서 남녘으로 펼쳐진 들이 넓은 평야지대다. 들이 끝나는 곳에는 산들이 병풍처럼 종지리 마을과 한산지역을 둘러치고 있다. 이상재(1850∼1927)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복원되었다. 복원전의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전한다. 생가는 1955년에 무너지고 1972년과 1980년에 복원하였다. 이 집의 특징으로는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내외담이 없는 개방형이다. 생가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이상재선생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상재 선생은 한양으로 1867년 과거에 응시하러 갔다가 부패한 관리들의 매관매직으로 낙방한다. 이에 실망하여 한산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려 했지만 박정양(朴定陽)의 집에서 1880년까지 개인 비서일을 보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게 된다.
이상재 선생은 기막힌 유모 감각으로 일화를 많이 남긴 분이다.
을사늑약이 있은 후 우연히 그는 조선 미술협회 창립 축하연이 열렸다. 상석에는 ‘이토히로부미’와 이완용, 송병준이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이상재 선생은 화가 나서 견딜 수 가 없어서 한 마디 했다.
“ 두 대감님들께서는 일본 동경으로 이사를 가시면 좋겠오.”
두 사람이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그대들은 나라를 망치는 데는 천재이니,
동경에 가서 살면 일본제국도 망할게 아니겠오?”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총무국장에 임명되어 탐관오리를 척결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힘썼으나 조선의 운명은 기울고 있었다. 참다못한 이상재 선생은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윤치호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 보면서 민족의 독립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오래가지 못했다. 1898년 12월 25일 조선의 조정에서 오히려 탄압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일제의 마수가 주변에 득실거렸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낙향하여 초야에 묻힌다.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일제의 강압적인 민족 압살을 보다 못한 그는 다시 기독교에 희망을 걸게 된다.
이상재 선생 생가
1914년 전국의 YMCA를 흡수하는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한다.
이 시기에 이미 모든 민간단체는 일제에 의해 해산당했으며, 집회와 출판,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았다. 이것이 1919년 3·1운동의 기반이 되어 주었다. 그는 3,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한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기도 했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된다. 그러나 그 해 1927년 3월 29일 사망하여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된다. 시신은 한산 선영에 안치되었다가 1957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으며, 변영로(卞榮魯)가 비문을 지었다.
저서에는
‘청년이여’ ‘청년위국가지기초(靑年爲國家之基礎)’, ‘진평화(眞平和)’, ‘경고동아일보집필지우자(警告東亞日報執筆智愚者)’, ‘청년회문답’, ‘상정부서(上政府書)’, ‘독립문건설소(獨立門建設疏)’ 가 있다.
이상재 선생은 문헌서원과 근방에 있던 ‘봉서사’를 자주 찾는다.
그가 오래전에 걷던 길을 간다.
문헌서원 가는 길에서 오른쪽을 따라 난 길을 따라 완만한 산길을 오르면 그곳이 건지산성이다. 건지산성(乾芝山城)은 한산면(韓山面) 지현리(芝峴里)에 있는 건지산 봉우리에 흙과 돌로 쌓은 백제시대 산성이다. 둘레가 약 1,3KM의 작은 산성이지만 이 성의 의미는 남다르다. 백제가 멸망한 후 다시 백제를 찾기 위해 그 유민들이 이곳을 무대로 부흥운동을 하였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이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로 알려저 있던 주류성(周留城)이라는 설이 있다.
산은 높지 않지만 조망이 좋아 금강하구까지 관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이 산성내에 대한불교 조계종 마곡사의 말사인 봉서사(鳳棲寺)란 암자가 있다. 봉황이 머무는 집이란 절이름 답게 아늑하다. 본래 문헌서원 인근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작은 암자지만 경관이 뛰어나다. 석북 신광수 선생과 이상재 선생, 신석초 시인이 봉서사와 인연이 있다는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아마도 신석초 시인은 문헌서원을 들리는 길에 ‘봉서사’를 찾았을 것이다. 간혹 그는 그곳에서 바라춤을 추는 모습을 보았을 터이다. 그의 대표 시 ‘바라춤’은 이곳이 무대라고 한다.
봉서사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 없는 꽃잎으로 살어 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소리를 아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초이고
뒤안 이슥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 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몸은 서러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짐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形役)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내려가것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신석초 시인의‘바라춤’ 부분
두견새에 자신의 마음을 추상적으로 담은 이 시는 홀로 산길을 거닐면서 삶을 깊이
고뇌하고 있다. 격정적이고 영탄적인 화법이 많은 이 시는 작가의 초월적인 모습이 돋보인다. 아마도 신석초 시인 젊은 시기에 고려말의 이색 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문헌서원과 건지산성을 거닐면서 많은 고뇌를 하였으리라. ‘봉서사’에는 비록 늙었지만 싱싱한 자태를 뽐내며 늘씬하게 서 있는 느티나무 옆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다.
신석초 시인은 서천이 낳은 큰 시인이다.
그러나 신석초 시인이 ,한국 문단에 기여한 것에 비해 그의 선양운 너무 미미한다.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을 기행하면서 그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을 건지산에 아래 있는 문헌서원을 찾는 것은 필수다.
문헌서원은 고려말의 대학자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선조 27년 (1594년)에 건립되었다.
이곡(1298~1351)은 목은 이색의 부친이며, 고려후기 학자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다. 원나라에서도 그를 고려인으로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현과 함께 ‘편년강목’을 중수하였으며,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에 3대에 걸친 실록 편찬 업무에 참여했다. 죽부인전(竹夫人傳)이 동문선에 전하며 우탁 백이정 정몽주등과 함께 경학(經學)의 전문가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은 원나라가 명나라와 교체되는 시기에 친명정책을 지지한 학자다. 20대 때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성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고 1354년 그의 나이 36세 때 원나라 한림원에 등용되었다. 3년 상을 제도화한 인물이며 고려말 우왕의 사부(師父)가 되기도 했던 대 문장가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득세하자 ‘장단’과 ‘함창’으로 유배되기도 한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호(號)에 모두 ‘은(隱)’자가 있기 때문에 이들을 일러 삼은(三隱)이라 부른다.
이색 선생 석상
공민왕은 이색을 만날 때면 향을 피우고 그를 기다렸다. 신하들이 이런 공민왕의 행동을 만류하였지만 “목은의 높고 넓은 도덕은 이 세상의 누구와도 비교 할 수 없다.”며 그의 학문과 도덕적 숭고함을 인정하였다.
1391년 유배가 풀려 한산부원군에 책봉되지만 여흥으로 다시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그의 문장과 정치력을 아낀 이성계가 한산백(韓山伯)에 임명하였지만 사양하며 살다가 1396년 그의 나이 68세때 세상을 떠난다. 그의 제자로는 권근, 변계량, 김종직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이 있다.
문헌서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에 의해 모두 불에 타 버린다. 광해군 때 다시 건립되어 ‘문헌서원(文獻書院)’이란 현판을 걸게 된다.
문헌서원은 두 공간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과 진수당 서재가 있는 강의하고 배우는 장소다. 다른 한쪽 경사면 위에 사당을 배치한 묘당공간이다. 즉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뜰이 있으며 그 뒤로 강당과 서재가 있다. 강당은 전면을 향하고 있으며 서재는 강당옆에 있다.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된 전학후묘(前學後墓)식의 배치다. 강당인 ‘진수당’은 ‘외삼문’에서 마주 보인다.
문헌서원의 대문인 ‘경현문’은 굳게 잠겨 있어 돌담을 따라가며 서원을 넘겨다본다. ‘진수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서재는 정면4칸 측면2칸의 역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문헌서원이란 사액현판의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문헌서원의 역사적인 의미는 아무래도 선생의 묘소와 그의 신도비 때문이리라.
선생의 묘소는 문헌서헌 좌측 기린산 중턱에 있다. 묘지 터는 ‘무학대사’가 정했다는 명당터다. 무덤 앞에는 문인상과 망주석, 마상(馬像)이 각 2기씩 양쪽에 서 있다.
그 오른쪽에는 ‘목은선생이색지묘(木隱先生李穡之墓)’라고 새겨진 작은 비석이 서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묘소를 오르기 전에 예사롭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는 목은 이색선생의 신도비를 만나게 된다. 신도비는 살아생전 덕이 많고 배품이 많아 훌륭한 사람이 죽은 후 그 업적을 돌에 새겨 그의 묘소입구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문헌서원에 있는 목은 이색 선생의 신도비는 다른 비와 구별된다. 신도비문을 두 번 썼기 때문이다. 앞면은 하륜(河崙)이 짓고 글씨는 당대 명필가 공부(孔俯) 쓴다. 그러나 목은 이색은 조선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계속 유배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재평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130년이 지난 현종7년(1666년)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다.
목은 이색의 시와 산문은 시집 35권으로 4,300여수다. 그중 여강의 술회(驪江의 述懷)란 시 한편을 읽어보자.
天地無涯 生有涯 천지는 끝이 없고 인생은 유한하거늘
浩然歸至 欲何之 호연히 돌아갈 뜻 어디로 가야하나
驪江一曲 山如畵 여강 한구비 산은 마치 한폭의 그림 같아
半似丹靑 半似詩 반은 붉고 푸른듯 반쯤은 시인듯
문헌서원
태조5년(1396년)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여강(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가다 술을 마시고 즉사한다. 그 술을 이성계가 보낸 술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정치권력이란 이렇듯 비정하고 냉정하다. 서천은 들이 넓다. 금강하구의 물줄기가 바다에 인접한 농토를 적시며 옥토를 만들었다. 이런 들길을 따라 금강 하구언으로 가는 길은 평화롭고 한가하다.
호남과 충청을 가르는 금강둑을 따라 달린다. 갈대밭의 갈대들이 흔들리고 있다. 내 가슴을 마구 흔든다. 저 강물은 이제 바다를 향해서 몸을 풀기위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흔들리면서 가고 있는 것이다.
금강하구
금강의 초입 하구둑 근방의 호수같은 강은 은은하게 아름답다. 하구둑을 건너면 전북 군산이다. 군산 시내가 빤히 보인다. 서해로 기우는 태양빛에 금강 노을빛으로 출렁인다. 이 강물에 물새들은 조용히 수영을 하며 놀고 있다. 평화롭다. 그러나 AD 660년 7월 어느날, 이곳으로 약 13만 명의 당나라 군인들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몰려왔다. 아직 역사적인 실체가 확증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을 통해 당나라 군대가 부여로 침공해 갔다. 여기서 지척이 장항이다. 장항은 일제에 의해 개발된 신도시다.
장항은 금강의 문턱으로 백제의 멸망의 원인이 되는 당나라 군대의 상륙지다. 물론 당시에는 긴 갯벌과 습지였다. 1931년 천안에서 장항까지 144㎞의 장항선이 건설되고 일제가 간척사업을 하여 장항의 지경은 넓어지고 1938년에 읍으로 승격한다.
바다에 끝없는
물결 위으로
내, 돌팔매질을 하다.
허무에 쏘는 화살 셈치고서
돌알은 잠깐
물연기를 일고
금빛으로 빛나다.
그만, 자취도 없이 사라지다.
오오 바다여!
내 화살을
어디다, 감추어 버렸나
바다에
끝없는 물결은
그냥, 까마득할 뿐
'바다'는 끝이 없는 허무의 상징이리라. 영원무궁한 세월의 바다에서 해 아래 모든 존재들은 소멸할 것이다. 이런 바다에 던지는 '돌알'은 물수제비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이런 '돌알'은 유한한 인간의 존재를 나타낸다. 신석초 시인의 '돌팔매질'은 바다를 향해 던지는 저항이다. 바다에서의 돌팔매질은 범 우주적 질서에 너무나 나약한 행동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돌을 던지는 것이 또한 우리네 삶이 아닌가.
신석초 시인 시비
그렇다. 절망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다시 도전하고 좌절과 실망에 상처를 입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성공을 향한 그 돌팔매질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석초 시인은 아마도 여기 장항 앞바다 금강 하구언 어디쯤에서 물수제비를 뜨면서 삶의 이런 모순적 형상을 찾았을 것이다. 신석초 시인은 시련 속에서도 자신만의 시세계를 만들어 선비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비록 고향마을 ‘활동리’에는 그의 생가가 남아 있지 않았지만, 대숲이 바람에 일렁이며 반겨주었다. 그의 생가터에서 묘소까지는 불과 200M 정도의 단거리지만 삶과 문학은 끝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금강둑에도 이제 봄꽃이 피기 시작한다.
이런 시기에 신석초 시인의 시 ‘한국의 꽃’ 읽으며 서천을 떠난다.
韓國(한국)의 꽃은 진달래
개나리 할미꽃
살구꽃 오얏꽃 복사꽃
영산홍 자산홍
모란 작약 해당화
목련 수련 한련화
韓國(한국)의 꽃은 박꽃,
호박꽃 무궁화 채송화
맨드라미 봉선화
백일홍 패랭이꽃 싸리꽃
칡꽃 도라지꽃
국화 매화 동백꽃
그중에도 春三月(춘삼월)이면
江山(강산)에 흐드러지게 피는
진달래꽃
어머님의 웃음처럼
어머님의 젖가슴처럼
하아얀 박꽃
菊花(국화)도 말고 梅花(매화)도 말고
겨울 바닷가에
빨갛게 피는 동백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