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춘천에 다녀왔다
춘천은 여러번 다녀 온 곳이지만 춘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춘천이 새롭게 보인다.
춘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구봉산 전망대이다.
춘천에 진입하면서 구봉산휴게소의 구봉산 전망대에서 춘천을 바라본다.
한눈에 들어윱� 춘천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춘천 IC에서 빠져 춘천시외버스 터미널을 거쳐
강원도청으로 들어갔다.
시외버스터미널을 지나면서 바라본 봉의산의 모습은
영락 없는 봉황의 모습이다.
춘천 시내로 진입하면서 바라본 봉의산의 모습
봉황의 머리와 날개가 봉황의 모습을 연상하고 있는가?
춘천분지에 연꽃봉오리의 꽃술처럼 자리잡은 봉의산은
남쪽에 진병산, 서남쪽에 삼악산, 서북쪽에 화악산, 북쪽에 용화산,
그리고 동쪽에 대룡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뒤편으로 소양강을 흘러 보내고 화천쪽의 북한강 물을 받아
의암호수를 이루면서 우두평야의 곡창지대를 거느리고 있다.
춘천시가지를 내려다 보면서 양쪽 날개를 퍼득이는 봉황처럼 솟아있다
봉이산의 모습은 삼봉의 모습이다.
가운데가 높고 봉황의 머리의 모습이고
양쪽의 봉우리는 날개의 모습이다.
이렇게 생긴 산을 봉의산, 비봉산이라고 부르는데
전국 도처에 이렇게 생긴 산들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봉황과 연관된 전설들이 전해온다.
봉의산은 춘천의 진산이요,주산이다.
봉의산을 배산으로 춘천이 자리잡고 있다.
춘천은 사방으로 산들이 동그랗게 둘러져 있는 분지형지형이고
호반의 도시인데 춘천의 태조산 대룡산에서 맥이 와서 봉의산으로 솟고
봉의산과 대룡산이 마주하는 회룡고조형의 도시이다.
봉의산의 앞면에는 강원도청, 춘천시청, 유봉여고, 한림대학교, 춘천향고, 세종호텔 등
춘천을 대표하는 기관들과 춘천시내의 중심부가 자리잡고 있다.
반면에 봉의산의 후면에 속하는 븍쪽 배면에는 사찰, 점집 등이 즐비하다.
산의 면(面)과 배(背)에 대하여 살펴 볼 수 있는 곳인데
터를 잡을 때는 산의 배보다는 면을 중시해야 함을 이곳에서 확인한다.
춘천을 한눈에 내려다 보며, 봉의산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봉의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세종호텔이다.
춘천을 문화탐방하기 위하여 사전답사를 떠나면서
춘천의 이창연선생님께 연락을 하니
꼭 보아야 할 곳으로 추천한 곳이 봉의산 일대이다.
봉의산 일대는 여러번 다녀갔지만 항상 시간이 부족하여 들리지 못한 곳
이번에는 세종호텔에 올랐다.
세종호텔은 봉이산 아래 봉황의 머리 아래 자리잡았는데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춘천에 오면 묵을 곳이 필요하다하여 지은 호텔인데
지금도 이곳은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대통령 되기전에 이곳을 다녀갔고
다시 대통령이 되고 나서 이곳에 묵어가는 호텔이다.
대통령의 휘장이 봉황으로 되어 있는데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이곳을 다녀갔는데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세종호텔 앞, 강원도청 주차장
세종호텔 전순의 자리이다.
1960년대에 지어진 세종호텔
세종호텔 정문
세종호텔에서 바라본 말안장 모습의 안마산
대통령과 함께한 춘천 세종호텔
박근혜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 들렸는데
마침 결혼식이 열려 대통령이 부주를 했는데
부주를 받은 사람이 부주를 확인하니 대통령 박정희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의 축의금을 받은 결혼식을 올리던 장소,
그래서 칠순연을 이곳에서 얼마전 치루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도 이곳에 들렸다.
노무현 대통령
전두환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노태우대통령
대통령이 묵었던 방
방 내부의 모습
효자동 이발사 이야기
친대 2개
호텔 뒤에 세워진 탑,
원래 이곳에 불상이 있었는데 기독교재단인 세종호텔 이사장이 불상을 철거하자
게속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여 더 이상 손을 데지 않고 이렇게 불상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중 략-
춘천을 이해하자면 춘천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김영기 강원일보 논설위원의 글이 있어 여기에 덛붙혀둔다.(仁)
춘천의 지명유래(I)
(출처: 춘주문화 제16호(2001호))
김 영 기(강원일보 논설주간)
1.춘천 지명 변천의 역사
춘천의 원래 땅이름(지명)은 소머리이다. 소머리는 쇠머리 솟을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머리는 마리·머리·마니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백두산을 머리산, 두악(頭嶽)이라고 불렀고 강화도 마니산을 머리산으로 불렀다. 춘천의 우두산(牛頭山)을 소머리산, 쇠머리산, 솟을모이, 솟을뫼라고 부르는 이름과 연계된다. 춘천지방을 소머리고장이라고 부르던 원래 이름이 한자(漢字)로 표기되기 시작한 것은 우곡(牛谷), 우곡성(牛谷城)에서 비롯된다. 우곡성의 지명은 「삼국사기」에 백제 시조 온조왕 34년(16) 겨울 10월초에 처음 사용되었다. 온조왕이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우곡성을 쳤다고 했다. 온조왕 13년(BC 6) 가을 7월에 동쪽으로 주양(走壤)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 주양의 지명도 지금의 춘천 지명으로 비정되고 있다. 우곡성은 우곡(牛谷)으로 불렀으며 소머리골, 소머리고장, 소모리성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우수주(牛首州)의 지명은 신라 선덕왕 6년(637)에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소머리고을을 우수주로, 한자식의 표기는 우두주(牛頭州)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수주에는 우리나라 중부지역을 다스리는 군주(軍主)를 두었고 그 치소(治所)로 삼았다. 우수주 우두주는 문무왕 때 수약주(首若州)라 했고, 오근내(烏根乃)·조근내(鳥根乃)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근내, 조근내는 날아 다니는 새와 관련된 이름으로, 우리 민족 새[鳥] 신상을 상징한다. 새신앙의 이름이 춘천 지명에 잔존해 있다. 춘천의 옛이름으로 맥국(貊國)이 있었다. 「삼국유사」 마한(馬韓) 조에는 「삼국사(三國史)」에 명주(溟洲)에는 옛 예국이 있었고 춘주(春州)에는 맥국이 있었다고 했다. 「춘주」는 전의 우수주이니 옛 맥국」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평북의 삭주(朔洲)와 평양성을 맥이라고도 했다는 용례를 예시하기도 했다. 우리 나라 고대사는 단군조선(檀君朝鮮) 시대, 열국(列國) 시대, 사국(四國)시대, 삼국(三國) 시대로 전개된다. 춘천의 맥국을 정사에서는 논의가 확정되지 않았지만 열국시대 춘천 맥국의 존재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춘천지방에 산재해 있는 지석묘(支石墓‥고인돌)와 적석총(積石塚)이 열국시대 춘천 맥국의 역사를 밝혀준다. 맥국의 이름은 춘천지방에 존재했던 고대국가 맥국의 지명화를 밝혀주는 유일한 증거이다. 삭주(朔州)라는 지명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였다. 삭주에는 총관(總管), 혹은 도독(都督)을 지방관으로 두었다. 삭주에는 12군 27현이 속해 있었다. 12개 군은 양구군, 생천군(화천), 기성군(금화), 연성군(회양), 익성군(금성), 가평군, 삭정군(안변), 정천군(함남 덕원), 나제군(충북 제천), 금산군(경북 풍기), 내령군(경북 영주 봉화) 등이었다. 오늘날의 함경남도 남부, 경상북도 북부, 충청북도 북부를 총괄하는 행정·군사의 행정구역이었다. 행정구역 전체를 삭주라 했고, 치소(治所)가 있는 춘천을 삭주라고 불렀다. 춘주(春州)라고 고쳐 부른 것은 고려 태조 23년(904) 이었다. 오늘날에도 춘천을 춘주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이때부터이고, 춘천의 대표적인 이름이 되었다. 소머리 우수의 지명은 머리 또는 으뜸을 나타내는 이름이고 삭주는 처음 또는 시작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춘주는 봄[春], 고을[州]을 나타내므로 머리·으뜸·처음 시작·봄으로 연계되는 이름이다. 안양도호부(安陽都護府)의 지명은 고려 후기에 고쳐 부른 춘천의 이름 이다. 춘천[春川]의 지명은 조선왕조 태종 13년(1413)에 생겼다. 처음에는 춘천군(郡)으로 정했으며, 동왕 15년, 춘천군으로 정한 지 2년 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조선왕조시대에는 관찰부를 목(牧)에 두었고, 큰 고을은 대도호부(大都護府), 그 다음이 도호부, 그 아래로 군·현으로 행정단위를 정했다. 이때 춘천은 신라시대 고려시대에 영서 지역 행정 군사의 중심지역을 면하게 되었다. 춘천이 도호부 정도의 한가한 고을에서 일약 전국적인 시선을 끄는 도읍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고종 25년(1885)에 유수군(留守郡)을 설치하고 부터다. 당시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열강의 함대 위협을 받았던 때이다. 미국, 프랑스, 일본 등 함대를 몰고 와서 개항(開港)을 강요하던 때이다. 여차하면 싸움이 벌어질 것이고 그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서 내륙지방에 임시수도 또는 피난수도를 조성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정해진 피난궁(避難宮)이 춘천유수부였다. 지방행정관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직할의 별도(別都) 였었다. 춘천이 춘천유수부로 정해지고 이궁(離宮)이 지금의 도청자리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수도를 옮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춘천의 이궁은 그래서 세인의 이목을 끌었고 춘천이 중요한 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고종 35년(1895) 을미개혁이 있었다. 이때 전국의 행정구역인 도(道)를 없애고 부(府)를 설치했다. 전국에 23개 관찰부를 두었다. 강원도는 3개로 갈라져서 춘천관찰부, 강릉관찰부로 정하고 원주는 충주관찰부에 속하게 했다. 그러나 관찰부는 1년을 못넘겼고 다시 전국을 13개도로 갈랐다. 이때 강원도의 옛 판도가 회복되고 춘천을 관찰부 소재지로 정했다. 행정 군사의 중심은 원주에서 춘천으로 완전히 옮겨졌다. 이때 춘천부는 부내(府內), 동내(東內), 동산외(東山外), 남내(南內), 남산외(南山外). 서하(西下), 서상(西上), 북내(北內), 북중(北中), 북산외(北山外), 사탄외(史呑外), 사탄내(史呑內) 등 13개 면을 관찰했다. 큰 면은 다시 둘로 나누었다. 동산외일작(東山外一作), 동산외이작(東山外二作), 서하일작, 서하이작, 북내일작, 북내이작 등으로 고쳐서 18개 면으로 개편했다. 1939년 10월 1일. 춘천읍이 되었으며, 1947년 6월 1일에 춘천시가 되었다. 춘천의 원래 지명은 소머리. 소머리는 쇠머리, 솟을뫼, 솟을묘라고 부르기도 했다. 백제에서는 춘천을 우곡·우곡성·주양·주양성·으로 불렀고 신라에서는 우수주·우두주·수약주·오근내·조근내 등으로 불렀다. 통일신라에서는 삭주·광해주라고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춘주라 불렀고 안양 등의 이름으로 고쳐 부르기도 했다. 조선왕조시대에는 춘천으로 불렀고, 지금의 춘천 지명은 이때부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춘천을 봉산(鳳山)·수춘(壽春) 등으로 별칭하는 것은 춘천의 진산인 봉산(봉의산)을 그대로 별칭으로 정한 것과 삭주·광해주·춘주·안양·춘천 등의 지명이 머리·빛·봄·시작 등의 뜻을 생명과 연계해서 별칭으로 정한 것이다. 봉산과 수춘은 춘천의 지명에서 유래한 내면의 뜻을 살려서 만든 이름이다.
2.춘천 산견명 변천의 역사
춘천의 산경(山經) 이름도 역사의 변천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춘천을 상징하는 중요한 이름이 되었다. 산줄기와 산은 춘천의 별칭이 되기도 했다. 산(山)과 봉(峰)과 령(嶺)과 재의 이름을 산경으로 묶는다.
(1)봉의산
봉의산은 춘천의 진산(鎭山)이다. 높이는 350m. 산 남쪽에는 강원도청이 있고 동남쪽에는 한림대학교가 있다. 북쪽에는 소양강이 흐른다. 오늘날에는 춘천시의 중심부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시가지(부)에서 1리가 있다고 했었다. 이때는 봉산(鳳山)이라고 불렀다. 봉산의 이름에서 유래, 춘천을 봉산이라 하기도 했다. 신석기시대 혈거유적이 동남쪽에 있고 7부능선에는 예부터 쌓은 봉의산성이 있다. 특히 글안유족의 침입, 구한말 의병봉기가 있었던 때 수호산성이 되었다. 봉의사가 예부터 있었다. 북쪽 기슭에 있던 소양정은 삼한시대부터 명승지로 유명했었다. 봉의산성 아래에 있는 봉의산 샘은 춘천시민들의 약수가 되고 있다. 봉의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KBS, MBC 송신탑이 세워져 있다. 정상에는 각종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새벽마다 시민들의 등산코스로 각광을 받는다. 순의비터에서 정상에 오르고 정상에서 봉의사, 소양정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등산길이 나 있고, 북쪽 가파른 비탈에는 춘천의 절개있는 기생 전계심(全桂心)의 묘비가 있다. 춘천의 향토문화제인 소양제 때에는 봉의산제를 시작으로 축제가 베풀어진다. 봉의산을 춘천분지의 꽃봉우리에 비유하기도 하고 봉황이 날아갈 듯한 형세를 취하고 있다고 찬양하기도 한다. 봉황이 깃든 산에 비유했다. 춘천시의 진산이 되는 봉의산도 있지만 북산면 청평리와 부귀리 경계에 있는 높이 734m의 산도 봉의산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었기 때문에 봉화산, 보의뚝이라 부르기도 했다. 전략상으로 중요한 지점이 된다. 춘천 북쪽의 방벽이 되었다. 봉의산은 고대부터 숭앙을 받아왔다. 향토의 성산(聖山)일 뿐만 아니라 향토수호의 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춘천분지에 연꽃봉오리의 꽃술처럼 자리잡은 봉의산은 남쪽에 진병산, 서남쪽에 삼악산, 서북쪽에 화악산, 북쪽에 용화산, 그리고 동쪽에 대룡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뒤편으로 소양강을 흘러 보내고 화천쪽의 북한강 물을 받아 의암호수를 이루면서 우두평야의 곡창지대를 거느리고 있다. 춘천시가지를 내려다 보면서 양쪽 날개를 퍼득이는 봉황처럼 솟아있다. 봉의산 중턱 서남편에서 오솔길을 따라 입산하면 봉의산 샘터에 이른다. 앞두루[前坪]가 내려다 보인다. 샘터 위쪽 10여m 되는 지점에서부터 봉의산고성(鳳儀山古城)의 잔존형태가 드러난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봉의산고성의 둘레가 2,463척, 높이 10척이라고 했다. 460여년전의 봉의산성의 형태이다. 강원도가 발행한 「강원향토문화기본자료」에는 지금 11개소에 석축길이 196m, 높이 2∼6m가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 1960년대에서 1970년 무렵에 보존되어 있는 봉의산성의 모습이다. 지금은 산성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봉의산성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춘천지방의 수호성(守護城)으로 그 명맥이 이어져 있다. 더군다나 춘천지방으로 침입하는 외적(外敵)에 대한 항전장(抗戰場)으로서 역사적 유적이다. 고려 고종 4년(1217) 음력 5월에 글안병이 춘천지방으로 쳐들어 왔다. 글안족이 중국 북부에 요(遼)나라를 세웠고 요나라는 여진(女眞)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망한다. 이때 글안유족의 금산왕자(金山王子), 금시왕자(金始王子)는 중국 황하 북쪽을 점령, 자칭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운다. 대요수국은 일찍부터 고려를 엿보다가 고종 3년, 압록강을 건너 고려 국경을 넘어왔다. 글안유족은 병사들만 침입한 것이 아니고 가족을 이끌고 들어와서 산과 들에 가득 깔려있는 곡식과 마소를 약탈해서 먹었다. 이렇게 한달 남짓 지나 먹을 것이 떨어지자 운중도(雲中道‥평북 운산)로 이동해 침입했다. 분탕질 하면서 남쪽으로 침입해 오던 글안유족은 다음해 정월 개경에 육박했다. 다시 철원(鐵原)을 거쳐 더 남쪽으로 진출한 적병은 안양도호부(安陽都護府‥지금의 춘천)를 점령했다. 당시의 안찰사(?察使‥지금의 지사 벼슬) 노주한이 붙잡혀 살해 당했다. 관속으로 살해된 사람도 많았다. 당시의 춘천부민이 얼마나 많이 살해되었는가는 상상을 불허한다. 이때 봉의산성이 함락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봉의산성이 항전의 현장이 되었던 것도 당연하다. 춘천부민이 외적에 항쟁하다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큰 전쟁은 글안유족과의 봉의산성 싸움이 있는 38년 후의 일이다. 고종 40년(1235) 음력 9월 몽고족 즉 원(元)나라 군사가 춘주성(春州城‥지금의 춘천)을 함락하던 때였다. 몽골족 즉 원나라의 침입은 고종 18년(1231)부터 시작되었으며 그후 7차례나 계속되었다. 춘주성 봉의산성에서의 싸움은 4차 침입 야굴(也堀)군의 침입때였다. 원나라의 원수 야굴은 원나라 황제의 소서(訴書)를 고려에 전했다. 『내가 태양이 뜨는 곳에서 태양이 지는 곳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인민들을 다 편안하게 하려고 하는데 너희들이 나의 명령을 거역하기 때문에 황숙(皇叔) 야굴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정벌하게 했다. 너희들이 만일 나의 명령을 맞아들이고 귀순해 오면 군대를 파할 것이나 만약 명령을 거역하는 날에는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몽고군의 침략이 시작되어 서해(西海)산성을 점령, 성안에서만도 4,700여명을 죽였다. 10세 이상의 남자는 모조리 죽였다. 동주산성(東州山城‥지금의 철원)이 함락된 것은 그해 음력 8월이었고 방호별감(防護別監) 백돈명(白敦明) 부사 판관 및 금성(金城) 현령을 죽이고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잡아갔다. 몽고병이 춘주성을 포위한 것은 그해 음력 9월이었다. 몽고병은 춘주성(봉의산성)을 두어겹으로 포위했을 뿐만 아니라 목책을 이중으로 세우고 참호를 한길이 넘도록 파서 여러 날을 두고 공격했다. 춘주성 안에서는 우물이 말라 우마(牛馬)를 찔러 그 피를 마시면서 기갈을 참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졸들은 심하게 지쳐 있었다. 당시 문학(文學) 벼슬에 있던 조효립(曺孝立)은 성이 지탱할 수 없을 것을 예견하고 그의 아내와 함께 불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안찰사 박천기(朴天器)는 적을 칠 계책이 다하고 힘이 다하자 먼저 성안에 있는 전곡(錢穀)을 불태워 버리고 결사대를 이끌고 몽고병의 목책을 부수면서 포위한 적진을 향해 돌격해 나갔으나 참호에 막혀 더 진격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춘주성 안의 군사와 백성들은 한사람도 탈출하지 못하고 춘주성 함락과 함께 적에게 도륙당하였다. 몽고병은 양근성(揚根城), 양주성(楊州城‥지금의 양양)도 함락했다. 그때 강원도 내에서는 철원, 춘천, 양양의 성이 적에게 함락되었고 춘주성의 혈전(血戰)이 가장 격렬했었다. 춘주성, 즉 봉의산성은 대몽항전(大夢抗戰)의 혈전장이었던 것이다. 봉의산성은 춘천으로 침입했던 외적에 대항, 항전했던 현장이다. 춘천부민이 향토를 수호하던 의지가 깃들어 있는 유적이다. 글안유족의 침입, 몽고족의 침입 이후 왜구(倭寇)의 출몰을 막던 기지였고, 임진왜란에 왜병을 방어하던 기지였다. 병자호란 때 청병을 막아내기 위해 군사를 정비하던 기지였었다. 근세 배양척왜(排洋斥倭)를 도모하던 때 임시 수도인 유수부(留首府)가 설치되었던 현장이기도 했다. 조선왕조 말, 왜놈을 이 땅에서 쫓아내고자 의병봉기의 기치를 높이 올렸던 성채이기도 전연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조선 말기까지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한 방비를 할 때마다 봉의산성은 그때에 알맞게 개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봉의산성이 제 모습을 잃었던 것은 이미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무렵부터지만 일본의 우리나라 침입 때 더욱 무너져 황폐화되었고, 6·25 전쟁이후 봉의산 고지대에 주택이 들어서면서 봉의산성의 돌들을 주춧돌, 축대 등에 사용하기 위해서 뽑아다가 사용했음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지금 남아있는 봉의산성의 일부는 원형 그대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춘천지방인들의 항전의 현장이었음을 보여준다. 봉의산은 현대에도 춘천을 지켜주는 진산이다.
(2)우두산
우두산은 우수산(牛首山)이라고도 부른다. 원래는 소머리산, 쇠머리산, 솟을뫼, 솟을묘라고도 부른다. 머리산(頭嶽)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만주 송화강 유역의 속말(涑沫), 소밀(蘇密)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북쪽에서 용화산 줄기가 흘러와서 우두평야 끝에서 멈춘다. 동북쪽에서 소양강이 흘러내리고, 서북쪽에서 모진강이 흘러 내린다. 두 강의 물줄기가 퇴적토를 쌓아 넓은 평야지대를 만든다. 이 우두평야를 남북으로 가로 지르면서 멈추었다가 솟은 산이 우두산이다. 높이 133m, 산 정상에 1956년에 세운 충렬탑이 서 있다. 예전에는 우두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1938년 봉의산록에서 옮긴 조양루(朝陽樓)가 있다. 우두산과 원래 이어졌던 북쪽능선은 도로 개설로 맥이 끊어졌다. 동북쪽은 샘밭(泉田), 맥국의 도읍으로 전해지는 평야가 펼쳐져 있다. 우두산을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우(天牛)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천하의 명당이라고 전해졌고, 춘천의 상징동물인 천우(하늘소)가 되었다. 우두산의 고총은 대부분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당을 찾아 암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두산은 또 만주대륙에서 살던 우리민족의 남쪽 머리산이라고 말한다. 우두산은 단군역사의 머리산(으뜸산)과 맥국의 옛 땅과 연계되어 신화의 산, 역사의 산, 나라의 산이 되었다. 춘천시 우두동에 있는 우두산은 높이 133m로 야트막한 언덕을 이루고 있다. 용화산에서 남으로 뻗은 산자락이 청평산에서 멈추었다가 마작산이 되고, 소양강에서 끊긴다. 용화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추청산(秋晴山)이 우두평야로 흘러들어 우두산을 만들고 소양강에 미치지 못한 채 멈춘다. 우두산-우수산(牛首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에는 후기에 만들어진 세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나는 옛 무덤이 있는데 소가 밟아도 다시 솟아난다는 전설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의 아이들이 밟아 놓아도 역시 다시 솟아난다는 전설이다. 또 다른 하나의 전설은 돌부처가 나타나 절을 짓게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스님 한분이 길을 나섰다가 우두까지 당도하게 되었다. 들판에 우뚝 솟은 우두산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 보았다. 동쪽 우두산 기슭으로 흐르는 소양강 물 한가운데 바위가 솟아 있고 그 바위 위에 노승이 앉아서 참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길 가던 스님이 우두산을 내려가서 그 바위 위의 노승을 만나려 했다. 소양강가에 당도해 보니 바위 위의 노승은 온데간데 없었다. 소양강가에 앉아서 길 가던 스님은 사흘밤 사흘낮을 기다렸으나 끝내 노승은 나타나지 않았다. 길 가던 승려는 노승을 만나려고 염불을 해도 효험이 없자 범어(梵語)로 노승을 불렀더니 돌부처가 그 바위 위에 앉자있는 것이 보였다. 승려는 그 돌부처를 향해서 절을 짓겠다고 했더니 그 돌부처는 이웃마을에 가서 시주하면 되리라 일러주는 것이었다.
(3)발산
춘천 신북 발산리는 바리미 발산이라 부른다. 본래는 북중면(北中面) 소속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본(章本)리와 산본(山本)리를 병합하여 발산리라 했다. 그때 신북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산이 바리처럼 생겼으므로 발산리라고 했으며 본(本)자가 들은 지명이 맥국터와 관련을 가진다. 바리산 밑의 발산리에 다섯개의 궁궐을 지었다는 맥국의 터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또 맥뚝이 있어 맥국시대에 쌓았다는 뚝이 논뚝으로 변해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 맥뚝이라는 이름이 전해져 내려온데 대한 신비함을 일컬어 맥국시대 역사를 유추한다.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摠目)이라는 책에서 맥국터에 단군의 신하, 팽오(彭吳)의 통도비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장본리, 산본리, 발산리라는 말은 밝산에서 유래했다. 즉 태양이 솟는 밝은 산을 뜻하는 곳이었다. 밝은 산은 작은 백두산, 태백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단군시대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단군의 신하, 팽오가 맥국터 발산에 왔었다는 기록도 실제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전설이다. 발산리와 밝산은 백두산, 태백산으로 추측한다. 발산 위에는 맥국시대의 성터가 있었다. 밑에는 맥국의 궁터가 있었다. 이 맥국의 성터가 있던 곳을 왕대산이라 불렀고 마을 사람들은 그냥 왕뒤라고 부른다. 2∼3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맥국시대의 성터가 있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춘천군 신북면 발산리 마을 왼편으로 돌출하여 마치 바리처럼 생긴 작은 산이 있다. 이 산을 왕대산(王臺山)이라고 부른다. 이 왕대산을 왕위, 왕뒤라고도 부른다. 왕대산 위에 맥국시대의 성터가 있었다. 왕대산 밑에 맥국의 다섯 개의 궁궐이 있었다. 왕대산 밑, 맥국의 궁궐이 있던 동쪽에 맥뚝이 있었다. 맥국이 크게 번성하였는데 외적(또는 마적이라고 함)이 마작산에서 쳐들어 와 맥국이 망했다는 것이다. 우수주(牛首州)의 맥국터에 단군의 신하 팽오(彭吳)가 통도비(通道碑)를 세웠다. 그러나 실제로 바리산, 즉 왕대산 위에는 맥국성터의 흔적이 전여 남아 있지 않다. 맥국의 다섯 개의 궁궐이 있었다는 궁궐터, 즉 맥국터는 논밭으로 변했다. 물론 주춧돌이 되었을 듯한 다듬는 돌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맥뚝만이 지금도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논에 물을대는 물고의 기능을 한다. 팽오가 세웠다는 통도비도 찾아볼 수 없다. 통도비를 보았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부터 4천여년 전 중국에 큰 홍수 「9년치수(九年治水)」가 있었을 때 우리 나라에도 큰 홍수가 있었다.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 가고 논밭이 물에 잠기고 가축들도 잃게 되었다. 물이 골짜기와 들판에 가득 차고 산이 또한 막아서서 물이 빠지지 않았다. 백성들이 산으로 올라가서 구원을 청해다.(마치 노아의 홍수 같다고나 할까). 이때 팽오가 단군의 명령을 받고 사방으로 나가서 길을 뚫었다. 신통력을 가지고 또 의롭고 용기 있는 팽오는 신부(神父)를 가지고 물이 고여 있는 사방으로 다니면서 가로막힌 산줄기를 끊었다. 물이 바다로 빠져나가 산과 높은 지대로 피난했던 백성들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모여 들었다. 농토를 다시 개간하고 정착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하게 되었다. 팽오는 단군조선의 백성들을 물난리에서 구출하고 홍수로부터 구원했다. 백성들이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다시 할 수 있게 한 은인이요, 개척자였다. 백성들은 팽오의 구원이 없었더라면 모두 굶어 죽었거나 흩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은공에 감사하게 되었고 또 그의 치수(治水)와 통도(通道)를 감사하게 생각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팽오의 통도비가 바로 우수주, 지금의 춘천에 세워졌다는 것이었다. 「춘천 우두산의 맥국전설」에도 팽오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춘천군 신북면 발산리의 팽오전설과 통도비를 세웠다는 전설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갈래 중의 하나이다. 춘천군 신북면 버들개(柳浦果)에 한 부자가 살았다. 이 부자는 인색하여 이웃에 나누어 줄 줄도 몰랐다. 그런데 어느날 버들개 부자집에 스님이 시주를 왔었다. 그러나 부자는 시주하는 스님에게 곡물을 주지않고 마당에 있던 거름을 떠서 자루에 넣어 주었다. 스님은 아무 말도 없이 돌아갔다. 그날 밤에 천둥이 치고 큰 비가 내렸다. 날이 밝았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부자집이 온데간데 없어졌다. 부자집이 있던 집터에는 큰 못이 생겨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부자집이 온데간데 없고 못이 생겨났다고 해서 아침못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부자집 집터만큼 컸던 연못은 후에 더 큰 저수지가 되었다. 지금은 저수지 속에 아침못이 들어있고, 역시 아침못으로 불리운다. 아침못의 생성 전설이다. 아침못에는 또 다른 하나의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춘천 박씨의 시조 박항(朴恒)의 묘가 유포리 무지동(茂枝洞)에 있다. 이 무지동은 흔히 수지동, 수짓골이라 불리운다. 그 곳에 있는 그의 묘자리는 그 상이 사두형(蛇頭形)이라고 해서 뱀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사안(蛇眼), 즉 뱀의 눈동자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뱀이 살아가자면 먹이가 풍부해야 한다. 그래서 묘자리 앞에 있는 얕은 봉우리는 머굴봉(蛙山)이라 한다. 뱀의 먹이가 되는 개구리 산, 개구리 봉우리라는 것이다. 뱀이나 개구리가 같이 살자면 반드시 연못이 있어야 한다. 연못에서 개구리 또한 먹이를 구해야 한다. 개구리가 살 수 있는 연못이 아침못이다. 아침못에서 개구리는 먹이를 풍부하게 구하고, 먹이를 잔뜩 먹은 개구리를 뱀은 다시 먹이로 한다. 먹이가 풍부한 뱀머리의 뱀의 눈자리게 묘가 들어섰으므로 백대천손지지(百代千孫之也)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고 전해온다. 아침못은 풍수지리설과 얽혀 생명의 생성이 있는 연못이라는 것이다. 아침못은 한자로 조연(朝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침못 마을을 조연이라 한다. 「규원사화(揆園史話)」의 「단군기(檀君記)」에 『환웅천왕이 세상을 거느리기 무릇 천세이니 이가 곧 신시(神市)씨이다. 쑥대 정자(蓬亭)와 버드나무 대궐(柳闕』)에 살았고, 도발과우(陶髮跨牛)로 다스리며 자연으로 되는 것을 펴서 나라를 열고 왕업을 이룩하니 그 근원을 따지면 만세이다. 그 말년에 이르러 나라의 기겁이 이미 완전하고 만물이 즐겁게 사는 것을 보고 태백산에 올라가 천부인 세 개를 연못가 박달나무 아래에 두고 신선이 되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하니 이로써 그 못을 조천지(朝天池)라 하였다.』라고 했다. 태백산과 조천지와 쑥대 정자와 버드나무 대궐은 버들개와 아침못에 그 이름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버들개(柳浦里)와 아침못(朝天池), 그리고 바리산(鉢山)은 곧 버들궁전, 태백산, 천지가 춘천지방으로 옮겨와 춘천지방의 이름이 된 것이다. 발산은 작은 태백산이고, 아침못은 작은 천지이며 버들개는 궁전의 장소이다. 아침못 전설은 팽오의 통도비 전설과 함께 백두산의 단군조선 건국전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며, 백두산의 원형이 춘천지방으로 이동해서 변형된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리산, 발산은 그 생긴 모양이 바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춘천지방의 바리산(발산)은 춘천군 신북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춘천군 남면 발산리에도 있다. 남면 발산리도 바리처럼 생긴 산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바리라는 낱말은 불교전래 이후에 생긴 것이므로 불교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바리산은 마을 한가운데로 돌출해서 가장 양지바른 동산을 이루고 있다. 그 방향 또한 정남향에 가깝다. 아침 일찍 햇빛이 비치고 가장 늦게 햇빛이 사라진다. 그래서 발산(바리뫼)를 마을 사람들은 밝산이라고 부른다. 밝은 산, 태양을 맞이하는 산, 달을 맞이하는 산으로 치부한다. 바리산 아래에는 반드시 아침못이 있거나 샘물이 있거나 강물이 흐른다. 밝산, 즉 태백산 아래에 아침못 천지가 있는 것과 같다. 바리산은 밝산이며 작은 태백산이다. 백산(白山)이기도 하다. 태백산을 신성하게 생각하던 맥족이 춘천지방으로 옮겨온 이후에도 태백산을 신성하게 생각했던 그 태백산과 비슷하게 닮은 산을 정하여 밝산으로 했다. 그 밝산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올렸다. 밝산의 맥국성터라고 하는 것은 이 제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맥뚝은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 수리산(응봉) 아래 맥국터와 삼한골 사이에 구불구불 길게 뻗어 있다. 맥국터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나간 맥뚝은 그 길이가 700여미터. 지금은 삼한골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관개용으로 물골을 터놓았다. 맥뚝의 한 가운데를 처음부터 끝까지 골을 파서 물을 흘려보내 논에 물을 대개 된다. 그러나 보통 논두렁이나 물고에 10배 정도 높고 넓다. 폭이 넓은 곳은 4m내지 5m, 높이는 1m내지 2m. 옛날 맥국 때 발산리 앞 개울에 용(龍)이 소(沼)를 만들어 물이 깊고 언덕이 크다고 해서 언덕개라고 부르는데까지 맥뚝이 구비쳐 있다. 토성이 후세에 와서 관개용으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고 농경사회로의 변화를 추측해 볼 수 도 있다. 발산리의 서북쪽 외곽이 되는 용산(龍山)리에는 강신제를 지내던 강신터(降神垈) 바위가 있고, 옛날에 봉화를 올렸다는 산이 있다. 이 산을 봉앳뚝이라고 부른다. 용산리도 맥국전설에서는 맥국의 서북쪽 문루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봉앳뚝의 뚝을 산이라고 지칭하는 것처럼 맥뚝도 맥산으로 유추된다. 즉, 토성(土城)을 쌓아 산처럼 높게 보이므로 맥뚝을 관개용 제방이나 논두렁으로 치부한 것이 아니고 산으로 보았다. 맥뚝은 토성으로서 방어용의 성(城)이었다. 발산리 앞을 흐르는 냇물이 자연의 방벽이 되고 맥뚝은 맥국 궁궐의 동쪽 내성(內城)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는 관개용 물고의 기능을 하고 있는 맥뚝은 토성으로 맥국 궁궐의 내성으로서 동쪽의 방벽이 되었고, 남서쪽은 용소가 있는 발산리 냇물이 자연 방벽이 되었다. 맥국이 외침을 받았을 때,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는 언제나 동쪽에 있는 마작산에서 비롯되었다고 맥국터의 전설은 전해주고 있다. 맥뚝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왜 맥뚝이라고 하는지 확실하게 전설의 내용 또는 뜻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발산리에 살지 않는다. 그저 『맥뚝이라고 한다.』고만 마을 사람 모두가 증언해준다. 맥뚝은 맥국의 토성이 관개용 뚝(둑)으로 그 기능이 변화된 전설 및 지명 유래를 보여주는 실증이기도 하다. 팽오(부루)가 맥국터에 통도비를 세웠다는 전설은 팽오가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서 제방을 쌓고 또는 산을 잘라서 물길을 내었다는 토목공사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맥뚝은 팽오전설의 실체를 간접적으로 전해주는 토성 또는 둑(제방)이 아니였는가 하는 추측을 또한 낳는다. 맥뚝은 그 이름만으로도 맥국 전설의 잔영을 보여준다. 춘천시 발산리 동북편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가 남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골짜기가 삼한골. 발산리 마을에서는 언덕에 북쪽 골짜기라고 부른다. 삼한골은 왕건(王建)이 옹립되어 왕위에 올라 고려를 건국하자 쫓겨난 궁예의 군사가 삼한골로 후퇴하여 삼악산 성으로 이동한다. 이때가 태봉국 18년 신라 경명왕 2년(918년)이었다. 후삼국시대(삼한시대라고 이 지방에서는 지칭한다.) 궁예의 군사가 통과했다고 해서 삼한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삼한골은 맥국시대와 무관한 골짜기 이름이지만 삼한골을 맥국의 골짜기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금은 삼한골 물이 아침못으로 관개되어 흘러들고, 또 맥국이 있는 발산리 앞들의 논물을 대어준다. 춘천시 신북읍 버들개, 발산리 앞에 있는 버들개에는 「시내물」이라는 지명이 있고, 이곳에 맥국의 유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마을의 신성한 곳, 성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소대배기가 있다. 신북면 율문(栗文)리에도 솟대배기가 있다. 발산리의 만녘에 속대배기 즉 솟대를 세웠던 터가 남아있는 이들 솟대배기는 마한, 진한,변한 시대의 소도(蘇塗)의 잔영으로 확인되고 있지만 실상은 예국과 맥국의 『산천을 소중히 여기고 경계를 두어 침입하지 않는다.』는 관습이 변형, 정착된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다. 맥국이라는 지명 대신에 삼한으로 맥국골 맥골이 삼한골로 변했고 신시(神市)와 신단수(神檀樹)가 솟대배기 솟대로 변했다 할 수 있다.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의 바리산은 맥국의 왕대산(왕뒤·왕위)으로 백산, 밝은 산의 변형이며 아침못은 천지의 본딧말이다. 맥뚝은 맥국의 흙성으로 관개용으로 변했다. 맥국의 전설, 맥국의 지명전설이 널려있는 춘천군 신북면의 발산리, 유포리, 천전리, 산천리, 용산리, 율문리는 지금도 맥국전설의 보고이다.
춘천의 지명유래(II)
(출처: 춘주문화 제17호(2002년))
김 영 기 (강원일보 논설주간)
1. 춘천 산경 변천의 역사
(1) 삼악산(三岳山)
화악산의 능선이 남동쪽으로 뻗어내려오다가 소양강의 신영강 굽이에서 끊어지면서 솟아오른 산이 삼악산이다. 춘천시 서면 덕두원리 654m 높이의 이 산을 삼학산(三鶴山)이라고도 부른다. 가평지방에서는 빗재가, 춘천지방에서는 삼악산에 검은 구름이 감돌면 비가 내린다고 한다.
맥국시대 맥국의 산성터와 대궐터, 망국대, 깃대봉, 막덕봉 등 맥국패망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또 궁예의 군사가 양길의 군사와 싸워 이겼다는 성터가 있다. 이 성터는 왕건군사에 궁예군이 패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옛날에는 삼악산 서북쪽의 석파령을 통하고 덕두원 앞 신영강 나루를 통해서 춘천과 서울을 잇는 길이 열렸다.
지금의 경춘가도 중에서 당림리 강촌, 의암을 연결하는 도로는 신작로가 뚫리면서 큰 길이 났다. 삼악산 아래 춘천 남산면 강촌다리에서 등선폭포를 잇는 강변 도로가 새로운 관광명소로 등장 눈길을 끌고 있다.
총공사비 1억5천만원으로 1978년 5월2일 착공된 강변도로는 의암호 평수위 1.5m 높이는 2천3백30m, 폭 3m의 도로를 닦은 것이다.
주말이면 교통 소통이 어려울 정도로 혼잡을 이루던 경춘국도 교통소통은 물론 호반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아베크 코스로서 이곳을 찾는 이들의 낭만을 담뿍 안겨주는 관광명소로 등장했다.
이인직(李人稙)의 신소설「귀의성(鬼의聲)」에 삼악산은 무대로 등장한다.
삼악산 남녘 북한강을 마주한 곳에 등선폭포가 있고 동쪽 의암댐이 건설되어 신연강이 의암호 속에 잠겨 있다. 삼악산 정상에서는 춘천분지 일원의 모든 지역을 관망할 수 있다. 주말이면 서울에서 온 등산객으로 항상 만원을 이룬다. 춘천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다섯 가지 맥국의 전설은 발생, 발전 그리고 패망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우두산의 맥국전설은 발생전설이다. 우두동 일대는 퇴적지이다. 소양강과 모진강이 흐르면서 흙을 날라와 늪지대였던 지역에 쌓이고 쌓여 평야가 되었다. 우두산은 늪지대 또는 호수와 강으로 둘러 쌓여 마치 물 속에 솟은 산처럼, 섬처럼 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두산을「솟을 뫼」라고 하는 것은 이 솟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볼수 있다. 발산리와 용화산의 맥국전설은 궁궐을 짓고 성을 쌓고 외적을 방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맥국의 발전 전설이라 할수 있다.
삼악산의 맥국전설은 발산리에 있던 맥국이 외적의 침입을 받아 맥국의 외성이라 할수 있는 삼악산성으로 옮겨 제2의 맥국을 재건하던 이야기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맥국이 재기하려 했지만 외적의 침입은 계속되어 마침내 패퇴하게 되는 전설로 구성되어 있다.
평창군 봉평면 태기산의 맥국전설은 맥국의 태기왕과 군사들이 패퇴하여 태기산에서 재기하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맥국의 마지막이 온 것이다.
우두산, 발산, 용화산 그리고 삼악산의 맥국전설은 춘천지방에 있던 맥국의 전설이고 태기산의 맥국전설은 훨씬 남하하여 부흥의 꿈이 종말을 고하게 되는 맥국 전설이다. 맥국의 발생(건국), 발전, 패망의 각종 전설 중에서 전설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풍부한 것은 삼악산 맥국전설이다.
춘천시 신북면 발산리에 있던 맥국은 적의 침입을 받고 패퇴, 맥국의 남쪽 성인 삼악산성으로 옮겼다. 삼악산성을 수축 거대한 산성 요새를 만들었다. 기와를 구워 궁궐을 짓고 흥국사(興國寺)라는 절을 지어 맥국의 부흥을 기원했다.(과연 맥국이 망할 무렵에 불교 사찰이 건설될 수 있었는지 그 연대가 불분명하다. 고구려 세력이 남하하던 때 이미 불교가 수입, 전파되었으므로 삼악산성에 있던 맥국이 이 고구려 세력에 의해 패망했다면 흥국사라는 사찰의 건립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삼악산성의 궁궐이 있던 자리를「대궐터」라고 부르며 기와를 구웠던 곳을「왜대기」라고 부른다. 사찰은 계속「흥국사」라고 부르고 있다.
맥국을 침공한 적군(적이 어느나라인지는 전연 밝혀져 있지 않다.)은 삼악산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맹렬하게 공격했으나 삼악산의 산세가 험준하고 삼악산성이 견고해서 방어망을 뚫지 못했다. 맥국 군사들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적에게 활을 쏘고 돌을 굴려 내렸다. 적은 삼악산성을 힘으로 점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적은 위장전술로 나왔다.
삼악산의 맞은편 강 너머에 있는 등성이와 계곡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웠다. 적은 군사가 많은 것을 보여주는 이외에 안장을 얹어 놓지 않은 빈 말들을 매어 놓았다. 적들은 맥국의 군사가 허수아비를 군사로 알고, 또 빈 말을 보고 싸울 뜻이 없는 것처럼 위장을 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늙고 쇠약한 군사들이 훈련하면서 칼싸움을 해 보여서 더욱 안심시키려 했다. 늙고 쇠약한 군사가 칼싸움을 했으니 힘없는 군사라는 것을 진실로 믿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의 강촌(江村)역 뒤에 있는 칼봉(劍峰)에 늙고 쇠약한 군사를 훈련시켰던 것이다.
맥국 군사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 적군은 맥국 대궐의 서쪽 서문(西門) 앞 숲에 매복했다.
지금의 춘천시 의암댐이 있는 삼악산 맞은 편에 군사들이 빨래를 많이 늘어 놓았다. 군복을 모두 빨래하여 널어 놓았으니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맥국군을 해이하게 만들었다. 의암리에 빨래로 군사의 이동이나 전투 준비를 하지 않을 것인듯 위장하고 몰래 적군은 군사를 덕두원(德斗院)으로 이동시켰다. 적군은 덕두원리로 진출, 대궐의 북문으로 들어와 접근했다. 적군은 줄사다리를 이용하여 맥국군을 기습했다. 적군은 부수고 쳐들어 와서 흥국사가 있는 골짜기의 맥국 군사를 공격했다. 기습공격을 받은 맥국 군사들은 끝까지 싸웠으나 패퇴했다.
삼악산성의 서문에 매복하고 있던 적군도 방물장수 할머니를 앞세워 길을 안내케 하고 맥국의 왕비가 부탁했던 패물을 구해가지고 왔다고 고했다. 방물장수 할머니에게 맥국 군사들이 성문을 열어주자 적들은 그 틈에 일제히 쳐들어 왔다. 서문도 적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적들은 북문과 서문을 통해서 쳐들어와 삼악산성을 완전히 점령했다. 안심했던 맥국의 군사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크게 패하고 말았다.(이 싸움에서 맥국 군사가 패한 뒤 맥국의 왕과 장수와 백성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는 전설의 내용에 전연 없다. 맥국왕이 삼악산성을 버리고 평창군 봉평면 태기산으로 피난. 재기를 노렸던 것은 태기산 전설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당시 적들이 허수아비를 세우고 안장없는 말을 매 두었던 곳을「말골」이라 부른다. 또 적군이 빨래를 하여 옷을 널었던 곳을「옷바위」라 부른다.「옷바위」는 마을 이름이 되어 한자로「의암리(衣岩里)」되었다. 의암댐도 이 의암리, 즉 옷바위에서 유래한다. 구름다리와 줄사다리를 적군이 놓았던 골짜기를「허궁다리」라 부른다. 삼악산성의 북문은「북문새」, 서문은「할미문」이라 부른다. 방물장수 할미가 열었던 문이라 해서「할미문」으로 통칭하게 되었다.
춘천지방의 중요한 산줄기는 세 갈래로 뻗어 내리고 있다. 동쪽의 대룡산(大龍山)이 장벽을 이루면서 그 한 줄기가 춘천분지 중앙으로 솟게하여 봉의산을 만든다. 북쪽에서 솟은 용화산은 정중앙으로 돌출하여 우두산에서 끝나고 소양강을 흘러 보낸다. 서북쪽에 솟은 화악산은 삼악산으로 흘러 들어와 춘천분지 서쪽에 장벽을 이룬다.
높이 654m의 삼악산 동남쪽에 소양강과 모진강이 만나 신연강이 되어 흐른다. 큰 강물로 띠를 두르듯 자연 방벽이 되어 교량이나 나룻배가 아니면 접근이 어렵다. 지금은 의암댐의 축조로 의암호수가 되어 있다. 옛길은 덕두원에서 석파령(席破嶺)을 넘어 당림리(唐林里)로 통하여 서울로 오갔다. 이 도로가 보안도(保安道). 가평에서 보안리역, 당임리, 그리고 덕두원으로 나와 나룻배를 이용해서 송암리로 나왔다. 조선시대는 물론 20세기 초까지도 삼악산 통행길은 험했다.
맥국시대에 삼악산은 물론 삼악산성이 험준했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삼악산성은 덕두원에서 석파령으로 들어가 남녘인 삼악산 북벽에 위치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돌로 쌓은 옛터가 있다」고 했다. 이 삼악산고성이 맥국의 성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높이 1.3m, 길이 47m 정도가 남아 있다. 삼악산의 8부 능선 부근에 있어 고성(古城)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춘천시 서면 덕두원리 산 47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지방기념물 16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삼악산에 있는 두개의 산성 중의 첫번째 산성이다.
삼악산에 있는 또 하나의 산성은 흥국사가 있는 맞은편 봉우리에서 강촌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산성이다. 이 산성은 그렇게 정교하지 않고 돌을 적당히 능선의 구릉과 정상을 잇는 모양으로 쌓았다. 성의 길이는 500여m. 이 산성은 태봉국의 궁예가 실정을 거듭하자 왕건을 옹립하여 고려를 세우니 궁예의 군사들이 철원에서 춘천시 신북면 삼한골로 이동했다가 삼악산에 웅거 태봉국을 재건할려고 했던 산성이라고 전해진다. 흥국사에는 궁예의 전설이 전해온다. 이 산성은 궁예의 군사들이 새로 쌓은 것인지 아니면 맥국시대의 산성을 보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맥국의 산성이 후에 태봉국의 산성으로 사용되고 다시 구한말의 을미사변, 정미의병 때도 일시 사용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다.
삼악산의 등선폭포 윗편에는 망국대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맥국 최후의 격전지로서, 여기 전투에서 맥국군이 패해 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망국대(亡國臺)라 부른다고 전해 내려온다. 또 다른 전설에는 만경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악산에 있는 흥국사는 맥국의 부흥을 기원하는 사찰이었는데 이 흥국사에는 많은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 많은 승려들의 밥을 짓기 위해서 쌀을 씻었는데 이때의 쌀뜨물이 흘러 뿌옇게 흘러내렸다고 한다. 뜨물이 등선폭포 아래까지 흘러 내렸기 때문에 등선폭포를 설겆이한 물을 버리는 하수구라는 의미의 시궁치라는 별칭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궁치라는 명칭이 맥국시대의 것인지 아니면 태봉국시대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전해 내려오기는 맥국시대의 것이고, 태봉국 시대의 것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추측도 없지는 않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제1, 마한(馬韓) 조에는 예국과 맥국에 대한 기록이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사이(四夷)는 구이(九夷)와 구한(九韓)과 예와 맥이니 주례(周禮)에 직방씨(職方氏)가 사이(四夷), 구맥(九貊)을 맡았다고 한것은 동이의 종족이니 곧 구이이다.「삼국사(三國史)」에는 명주(溟州)는 옛 예국인데 야인(野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印)을 얻어 바쳤다고 했고, 또 춘주(春州)는 전의 우수주(牛首州)이니 옛날의 맥국이요, 혹은 지금의 삭주(朔州)를 맥국이라 하고 혹은 평양성을 맥국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맥국의 마지막 패망의 현장이 삼악산성이라고 삼악산성 맥국전설은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춘천지방에서는 지금도 삼악산이 조화를 부린다고 말한다. 춘천지방에 비가 내릴려면 삼악산 정상에 검은 구름이 감돌아야 하고, 삼악산 정상에 검은 구름이 생기면 비가 올 징조라하여 비 설겆이를 하게 된다.
삼악산 정상에 검은 구름이 끼어서 감돌다가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이는 맥국의 패망한 원한이 검은 구름으로 감돌다가 비바람을 몰아치게 한다고 한다. 삼악산 정상에는 또 신기루가 생기기도 하고 무지개가 화려하게 걸치기도 하는데 신기루나 무지개는 맥국 멸망의 비참함과 맥국 부흥의 소망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더욱 신비롭게 여긴다.
(2) 오봉산(五峯山)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와 화천군 간동면 경계에 솟아 있는 아름다운 산을 오봉산(五峯山)이라 한다. 높이는 779.10m. 동국여지승람에는 이자현이 이 산을 청평산(淸平山)이라 했고, 청평산의 옛이름이 경운산(慶雲山)이라 했다. 또 춘천부의 동쪽 44리에 있다고 했다. 오봉산의 처음 이름이 경운산이고 그 다음 이름이 청평산. 오봉산은 그러니까 경운산→청평산→오봉산으로 바뀐 이름이다. 봉우리가 5개 솟았다 해서 그렇게 이름이 바뀌었다. 청평사 고려정원 소양호가 있어 관광지로 유명하다. 등산은 배후령 고개에서 오봉산 뒤로 넘어 내려오는 코스와, 청평사 뒤로 올라서 오봉산을 타는 코스가 일반에 잘 알려져 있다. 청평산에 문수원을 중창한 이자현 때부터 원(元)나라에까지 청평산은 널리 알려졌었다.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청평산 밑에 있는 마을이므로 청평골이라 불렀다.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해졌다. 1914년 상걸리와 부창리를 병합하여 청평리로 했는데 부창리는 소양호 밑에 잠겨 없어진 마을이다. 부창에는 부창역이 있었고 여기를 관터라 불렀다. 소양댐 건설로 소양호가 생기면서 관광지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청평리 입구에 있던 마을을 옛적에는 수구동(水口洞)이라 불렀다. 물어구라고도 했는데 소양강으로 흘러드는 청평계곡의 물이 만나는 마을이므로 수구동이라 했다.
옛부터 이 수구동에서 청평산 계곡까지를 경치가 좋은 별천지라고 찬양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수구동에 소양댐이 건설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지명과 후세의 변화가 일치된다고 했다.
청평리 중간쯤에 구성폭포가 있다. 아홉가지 소리가 난다고 해서 구성폭포라 부른다고 한다. 폭포가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그렇게 느껴지는 듯하다. 구곡폭포라는 이름도 있는데, 이 구성폭포는 그 소리를 가지고 이름을 지은 경우이다. 지명은 생긴 모양을 가지고 짓는 것도 많지만 그 소리내는 음성으로 짓기도 한다.
청평리 입구에 거북바위가 있다. 마치 거북처럼 큰 바위가 길 옆에 우뚝 서 있고 모양이 거북이처럼 생겼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
소양댐이 건설되고, 소양호의 물이 거북바위 아래 골짜기까지 가득차자 사람들은 바로 이 거북바위가 호수 물이 찰 것을 예언해서 서 있었고, 또 이름이 생긴 것이라고 했다.
청평산에 불교도량이 설치되고 고려정원이 조성되기는 11세기 중엽이었다. 청평산은 처음에 경운산(慶雲山)이라고 불렀으나 문수원이 중수될 당시 청평산(淸平山)이 되었고, 지금은 오봉산(五峰山)으로 통한다. 이 경운산에 선사(禪師), 승현(承賢)이 당나라로부터 신라에 와서 고려 광종 24년(973) 처음으로 절을 창건하고 백암선원이라 했다. 문종 23년(1069) 춘주도(春州道)의 감창사(監倉使)로 부임한 이의(李휆)가 경운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사랑하여 백암의 옛터에 다시 절을 짓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했다. 이의의 장남 이자현(李資玄)이 선종(宣宗) 6년(1089) 경운산으로 들어와 보현원을 수리하여 문수원(文殊院)이라 이름했고, 경운산은 청평산이라 했다.
당(堂)과 암자(庵子)를 10여 처에 짓고 당을 문성(聞性), 선동(仙洞), 식암(息庵)이라 각각 이름하고 선학(禪學)을 닦았다. 이자현은 호를 식암, 시호는 진학(眞學)이라 했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청평식암(淸平息庵)이라는 대해서 (大楷書)가 청평산 계곡의 정원 조성을 알려준다.
청평산의 고려정원은 이자현에 의해 축조되었다. 이자현은 어지러운 세상을 버리고 선(禪)의 경지에 몰입했다. 청평산 계곡의 암당정헌(庵堂亭軒)의 선도장을 꾸몄다.
청평산의 야외정원 규모는 영지(影池)를 중심으로 250m 정도의 길이로 조성되었으며 너비는 넓은 곳이 50m 내외, 좁은 부분이 20m정도이다. 지형에 따라 축석(築石)을 했으나 대체로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려, 변화있고 교묘한 경관을 꾸며 놓았다. 영지의 북쪽부분은 남북 50m, 동서 20∼45m의 범위를 자연석으로 첩석했다.
이 청평산 문수원에 원나라의 태정(泰定) 황제의 황후가 중 성징(性澄)과 윤견(尹堅) 등이 바친 불경을 보내서 이 절에 수장했다. 이제현(李齊賢)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지었다.『…불서 한 질을 가져다가 청평사 문수사에 귀속시키고 돈 만량을 시주하면서 그것으로 이식을 취하여 황태자 황자를 위하여 복을 빌며, 각각 그들의 탄신을 기하여 중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경을 열람하게 하는 것을 연중행사로 할 것이며 또 비를 세워 영구히 뒷세상에 보이게 하라고 하였다. (중략)불서를 수천리 밖에 있는 산중까지 옮기고 그 절을 유지할 재물을 세워서 그 무리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했다.
이 일은 곧 불도들의 행복이다. 이름난 산과 복된 땅이 천하에 적지않게 있건만 우리나라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여기에 황실의 복을 비는 곳을 설치하였으니 이것은 우리 불도들만의 다행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다행한 일이다. 장차 크게 쓰고 영원무궁하게 자랑하며 빛나게 해야될 일이다. (중략)천자의 황후가 가상(嘉尙)하시고 그것을 간직할 땅을 계책하여 말하기를 삼한(三韓)은 선한 것을 즐기고 의를 돈독하게 지킨다. 고려의 지금 임금은 우리가 낳게 한 우리의 생질이다. 복을 빌어 황실에 보답한 그의 정성을 믿는다. 그 나라의 동쪽에 청평산이 있고 문수사가 있다. 길이 막히고 먼 것을 꺼리지 말고 역전(驛傳)을 통하여 가서 베풀지어다. 내탕고의 꿰미돈을 끌어내어 그 무리들을 먹고 살게 하고, 여기서 지키도록 왕과 신하들에게 부탁하라.』고 하였다. 청평산과 문수원은 이렇게 하여 고려 일대의 명산, 명찰로 그 자리가 잡혔다. 청평산 문수원은 원나라 조정의 원찰(願刹)이 되었던 것이다.
청평산에는 우리나라 서도사(書道史)의 봉우리를 이루는 두 명필의 진적(眞蹟)이 있었다. 하나는 고려 중기의 스님 탄연(坦然)의 글씨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후기 좌정승 이암(촆)의 글씨이다. 그들의 글씨가 청평산에 있었기 때문에 춘천은 서도사의 중요한 도장이 되었다.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청평산에 있는 탄연의「진락공이자현비(眞樂公李資玄碑)」,「문수원기비(文殊院記碑)」 글씨는 고려시대 우리나라 서도사를 빛낸 명품이다. 예종이 세자로 있을때 탄연은 숙종의 명의로 세자를 보도(輔導)했으나 속세에 뜻이 없어 궁궐을 나와버렸다. 그 길로 경북산(京北山) 안적사(安寂寺)의 중이 되었다. 이때가 19세.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탄연은 대사(大師),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 선사(禪師)에까지 올랐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에 응했다. 불도들이 배우러 그에게 몰려들어 고려의 종풍(宗風)을 크게 일으켰고, 선문(禪門)을 중흥시켰다. 탄연은 호를 묵암(默庵), 시호를 대감(大鑑)이라 했으므로 대감대사라고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서학박사(書學博士), 서령사(書令史), 서예(書藝), 시서예(詩書藝), 서수(書手) 관직이 있었다. 그래서 과거시험에도 글씨의 수련을 참조하게 되었고 서예의 대유행을 낳았다. 서예의 대가가 그리하여 나오게 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구양순(歐陽殉), 한윤(韓允), 민상제(閔賞齊), 안민후(安民厚), 임경, 오언후(吳彦候)등이 꼽혔다. 자획과 결구 함께 방정건엄(方正健嚴)한 것이 이때 글씨의 특색이었다. 그러나 중기에 오면 우리나라 서도사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한 작가 탄연의 탄생을 보게 된다. 그는 불법의 거장이었지만 서법(書法)의 거장이기도 했다.
탄연의 글씨는 왕희지의 성교서(聖敎書)와 일맥상통하는 풍격을 갖추었으며 중국의 당(唐)대 이후로 이어져 온 사경풍(寫經風)의 필법을 합하여 새로운 서체를 만들었다. 구양순의 필법이 틀에 박힌 전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선문의 승려는 물론 일반 지식층에서도 싫증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때 탄연의 선미(禪味)와 고사(高士), 한아(閑雅)한 운치를 띤 필법은 고려시대의 새 서풍(書風)을 개척했다. 고려의 선문(禪門)을 일으킨 탄연이 선문의 고장 청평산에 글씨를 남긴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탄연의 글씨는 『못 가운데 솟아오른 연꽃처럼 화려하여 속은 단단한 뼈가 들어 있으면서 겉은 옥같은 살결로 가리워 있다.』고 당대의 이규보(李奎報)도「동국제현서결(東國諸賢書訣)」에서 평했다. 이인노(李仁老) 또한『본조(고려)에 오직 대각국사와 학사 홍관(洪灌)이 서명을 날렸는 바…』라고 찬양했다. 탄연의 글씨는 고려시대에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김부철(金富轍)이 글을 짓고 탄연이 글씨를 쓴「문수원기비」는 이렇게 시작된다.『춘주의 청평산은 옛날의 경운산이며, 문수원이란 옛날의 보현원이다. 처음에 선승 승현이 당나라로부터 신라에 와서…』라는 내용의 탄연이 쓴「문수원기비」의 글씨는 그리하여 우리나라 서도사에 명품으로 전해진 것이다.
「문수원장경비전액(文殊院藏經碑篆額)」은 행촌(杏村) 이암의 글씨이다. 청평사의 장경각은 원나라 순제(順帝)의 왕후가 황태자와 황자의 복을 받기 위해서 대장경 일부를 문수원에 기증하고 돈 일만냥을 내렸다. 그것을 가지고 해마다 황태자와 황자의 생일에 승려들에게 음식을 베풀고 원나라 황실을 축원케 했다. 장경비의 비문은 이제현(李齊賢)이 지었고 글씨는 이암이 썼다. 이 글씨는 현재는 없어졌고 탁본만 나돈다.
이암은 흔히 동국의 조자앙이라 불렀다. 그는 고려 충선왕 5년 등제하여 벼슬이 좌정승에 이르렀고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졌다. 고려사에는 『도서(圖書)를 가져 스스로 즐겨하며, 서법(書法)이 일시에 절묘하여…』라 했고, 당시 이암의 필법이 원나라의 명필 조맹부와 같았으므로 여한(麗韓)의 제가들이 흔히 이암을 조맹부의 적수라고 평했었다.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燕京)에서 만권당(萬券堂)을 짓고 문물을 교류할 무렵이었다. 이로부터 이암은 고려 말기에서 조선 중엽까지 서예계를 지배하던 조맹부체의 선구자로서 우리나라 서예사의 거목이 되었다.「문수원장경비」에는 이암서라 쓰지 않고「이군해서(李君該書)」라 했는데 군해는 이암의 초명(初名)이다. 이 비문 글씨를 쓸때 이암은 31세의 청년이었다. 이 글씨는 후세에 아주 기품(奇品)으로 일컬어졌다. 청평산의 이암의 글씨로 청평산은 우리나라 문화사의 명소가 되었다.
(3) 대룡산(大龍山)
춘천시 동면, 동내면, 동산면 경계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산이 대룡산이다. 춘천시의 동쪽 장벽이 되어 춘천시가지를 굽어 보는 형국이다. 일명 여매압산(女每押山)이라고도 부른다. 높이는 899m. 병자호란때 춘천 향교 대성전의 위패를 잠시 이 산에 옮겼다고 전해진다. 대룡산의 줄기는 봉의산까지 뻗어 있다.
춘천지방의 산계는 동쪽에 대룡산계와 중앙에 용화산계 서쪽에 화악산계로 되어 있다. 대룡산계에는 응봉(759m), 영업산(850m), 구절산(750m), 취봉(472m)이 솟았다. 춘천분지의 동쪽 장벽이 되면서 아침에는 대룡산의 동남쪽에서 해가 솟는다. 동북부는 인제, 양구 지방에 접하고 북서부는 소양호와 춘천분지를 싸안고 남쪽은 홍천강 유역에 연이었다. 춘천지방으로는 지내리, 감정리, 만천리, 고은리, 거두리, 학곡리로 산기슭이 뻗어 내리고 있다. 춘천지방에는 이 대룡산의 이름을 따서 사회단체나 친목회 모임 이름으로 삼는 경우도 많다.
춘천과 대구를 잇는 중앙고속도로가 대룡산 서쪽 기슭을 따라 원창고개를 관통한다. 21세기 춘천의 남북 대동맥을 품에 안은 기세이다.
(4) 안마산(鞍馬山)
춘천시 퇴계동과 동내면 정족리 경계에 있는 산을 안마산이라 한다. 안화산, 아내산, 아나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춘천시에서 원창고개를 넘는 길 옆에 있어 동녘쪽의 관문이 된다. 춘천의 안산인 향로산이 서남쪽의 관문이 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말안장을 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높이 198m. 안화산 앞 마을이 두룸실(鶴谷里). 동면 증리에서 학곡리로 통하는 4차선 국도가 뚫려 안화산 남쪽으로 통하게 되었다. 안화산 동남향으로 천주교 공동묘지가 있어 유명하다.
학곡리는 춘천시내에서 원창리를 통하는 길만 뚫려 있을 때는 외따른 마을이었지만 칠전동 증리로 통하는 길이 건설된 이후에는 춘천 동남부의 중심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5) 구봉산(九峰山)
춘천에 사는 사람치고 구봉산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 춘천시 외곽도로가 학곡리에서 감정리로 연결되면서 홍천^속초^양양으로 오가는 차량들이 구봉산록에 즐비한 휴게소에서 쉬어간다. 관광차량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봉산 휴게소를 쉼터로 이용한다. 밤에 구봉산 휴게소에서 바라보는 춘천의 야경은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매김 한다.
구봉산은 후평동에서 만천리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왼편으로 9개의 봉우리가 길게 뻗어 산형을 이루고 있는 동면 감정리, 장학리, 만천리 경계의 산이다. 높이는 441.3m. 봉우리가 아홉이 된다해서 그렇게 불러왔다.
(6) 장절공산(將節公山)
춘천시 서면 방동리 장절공 신숭겸의 묘가 있는 산이다. 고려의 왕건군과 후백제의 견훤군이 대구 팔공산에서 싸울 때 왕건을 평복으로 피하게 하고 신숭겸은 왕건의 모습을 하고 싸우다가 죽었다. 왕건은 춘천에 신숭겸의 묘역을 만들었다. 방동산의 안산은 봉의산이다. 장절공의 무덤이 지명유래가 된다. 방동리의 중심마을을 장평, 당비당이라고 한다. 당비당 북쪽 골짜기가 장막골인데 여기서 1908년 11월 2일 지용기 의병장이 이끌던 의병이 왜병과 맞아 싸우다가 큰 피해를 입은 곳이다. 지용기 의병장과 13명의 의병이 죽었다. 정미의병의 항전장으로서 역사의 고장이다.
춘천 서면 방동리 장절공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를 황골이라 부른다. 또 당비덩 북쪽에 있는 마을을 홍골(洪谷)이라 부른다. 춘천 남면 가정리로 들어가는 입구를 황골(黃谷)이라 한다. 황골은 흔히 강이나 냇물이 흐르는 입구지역을 말하는 것이 공통적이다. 이 황골이 정미의병이 드나들던 길목이었다.
(7) 용화산(龍華山)
춘천지방에는 춘천분지 안에 6개소의 산성이 있고, 분지 외곽지대에 3개소의 산성이 있다. 춘천분지의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봉의산(鳳儀山)에 봉의산성이 있다. 봉의산은 춘천의 진산(鎭山)이며 봉의산고성은 둘레가 2463척이다. 서쪽 서울서 들어오는 경춘가도의 관문인 삼악산(三岳山)에 삼악산고성이 있다. 우두평(牛頭坪)에도 우두평고성이 있었는데 맥국 때의 성이라 한다. 신라 문무왕 13년(673년)에 주양성(走壤城)을 쌓았는데 일명 질암성(迭岩城)이라고도 불렀다지만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발산리의 맥국성까지 합쳐서 6개소인 셈이다.
춘천분지를 약간 벗어난 북쪽 외곽인 사북면 고탄리에 고성(古城)이 있고 그 북쪽 화천군과 춘천시 경계에 있는 용화산에 용화산고성이 있다. 화천읍내 산록에 생산성(牲山城)이 있다. 또한 외곽에 산성이 3개소에 있다.
춘천지방에서는 삼악산고성을 맥국의 남한산성이라고 부르고 용화산고성을 맥국의 북한산성이라고 부른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별칭은 후세에 와서 (한양 : 서울)의 남한산성, 북한산성을 본딴 것으로 춘천분지의 서남쪽이나 동북쪽의 관문이 되는 지역에 축성되어 있어서 군사적 의의가 큰 산성임에 틀림없다.
춘천분지로 침입하자면 동북쪽에서는 용화산 골짜기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서북쪽으로는 화천의 생산성을 비켜와야 하므로 용화산 골짜기는 그 통로가 된다. 용화산이 주산으로 우두산으로 이어 있다. 춘천분지로 침입하는 서남쪽 길목은 삼악산 골짜기이다. 소양강과 모진강(낭천강)이 합쳐 삼악산 남쪽으로 흐르므로 삼악산 서북쪽 석파령을 통해야만 출입이 가능하다. 용화산성, 삼악산성은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축조되었다.
맥국시대에는 남방세력이 북상하는 것보다 북방세력이 남하하는 것이 더 우세했다. 민족이동의 주류는 남하하는 것이었다. 춘천의 맥국에는 그러므로 북쪽으로부터 침략을 받게 되었다는 전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용화산성이 맥국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이런 역사의 추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용화산성은 맥국의 산성이다. 북쪽의 관문이 되는 산성이다. 용화산에는 광바위옆에 긴 석굴이 있어서 남쪽과 북쪽으로 통하게 되었다. 북쪽에서 적이 쳐들어오면 불을 피워서 그 연기가 남쪽의 굴로 빠져나와 남쪽 본진에 적병이 나타났다는 신호를 알리게 된다. 연기로써 신호를 대신한다. 그러면 군사들은 적이 쳐들어 오는 것에 대비했다가 적을 무찔렀다는 것이다.
동굴에 연기를 피워 적병이 나타난 것을 신호하면 맥국군사는 나가서 적과 싸웠는데 그 동굴이 지금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용화산에는 굴의 길이가 짧은 것은 있지만 용화산을 관통한 동굴은 발견되지 않았다. 연기를 피워 적의 침입을 알렸다고 하는 것은 봉화를 올렸던 신호방법의 원형적인 형태이거나, 봉화를 올렸던 사실이 동굴에 연기를 피운 것으로 전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동굴에 연기를 피워 신호를 했던 것이 후기에 와서 봉화를 올렸을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맥국의 용화산성은 용화산의 7∼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봉화를 올리는 것과 성을 쌓는 것은 부족국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 된다. 봉화와 성을 쌓았다는 사실이 전설 속에 살아 있다.
용화산 전설은 맥국의 존재유무를 밝혀주는 근원적인 전설이라 할 수 있다. 용화산의 동북면 7∼8부 능선에 잔존하는 돌로 쌓은 성이 그같은 추측과 확인을 가능케 한다.
용화산의 곰바위와 주전자바위 윗편에서 시작되는 용화산 산성은 후기에 와서 개축한 부분이 많지만 산 정상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그 축성년대를 고대로 잡을 수 있다. 주로 동북방향에 성을 쌓은 것은 낭천강(북한강)을 내려다 보면서 북으로부터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이점이 있고 또 강으로 일차 침입자를 막을 수 있는 지형적인 유리한 조건을 구비하게 된다. 용화산성의 북쪽 방벽의 기능이 맥국성지로서의 현실성을 가능케 한다.
물론 춘천지방이 신라의 강역 안에 편입될 무렵 또는 그 이후 신라, 고구려의 대립 당시에 축성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신라때 축성되었다고 전해오는 주양성(일명 질암성)은 그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다. 주양성이 용화산성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면 추측할 수도 있다. 용화산성은 춘천분지의 북쪽을 막는데 있어서 외성(外城)의 기능을 할 수 있는데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맥국성지, 용화산성의 맥국산성을 화천군 하남면 낭천강의 강돌을 날라다 쌓았다는 전설은 당시의 주민 모두가 성을 쌓는데 참여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강돌을 나르는데 소수의 병력으로는 불가능하고 전주민의 협력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굴을 통해서 신호를 보내고 병사들이 이동했다는 전설은 혈거시대의 잔존한 전설일 수도 있고 병력의 이동을 동굴을 통해서 도모했다는 발달된 문명시대의 전설일 수도 있다. 용화산의 동굴에 불을 놓아 연기를 내어 신호를 했다는 맥국 전설은 용화산이 춘천지방의 북쪽 외곽으로 자연방벽이 되는 지리적 이점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었던 점을 시사해 준다.
용화산에는 '마귀할미바위'가 있다. 옛날옛날에 마귀할미가 이곳에 오줌을 누었다고 해서 마귀할미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마귀할미바위와 조금 떨어진 곳에 '바둑판바위'가 있다. 가로, 세로 2m로 선녀가 이곳에 내려와 바둑을 두었던 곳이라 해서 '바둑판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이 돌을 던져 바위에 올려 놓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아들바위'도 있다.
춘천시 고둔리로 해서 넘어가는 고개에 '흔들바위'가 있다. 밑돌은 작은데 그 위에 얹혀있는 바위는 커서 자연히 흔들리게 되었다. 이 흔들바위는 마귀할미가 치마에 이 돌을 싸서 옮겨다 놓은 것이라 한다. 마귀할미가 재주를 부린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주전자의 주둥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옛날부터 화천지방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개를 잡아 주전자 부리 밑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개의 피를 이 주전자 부리에 바르고 돌아서면 곧 비가 왔다. 기우제를 지낼 때는 미리 비옷을 준비하고 시작했다.
주전자 주둥이(꼭지)처럼 생긴 이 바위를 `꼭지바위'라고 부른다. 바위 주둥이의 바깥 쪽이 춘천지방으로 향해 있어 화천지방의 재물이 밖으로 흘러 나간다고 믿었다. 화천 고을에 살던 어떤 장사가 재물이 밖으로 흘러나가게 하는 바위를 떼어 버렸다.
선녀들의 '바둑판바위', 마귀할미의 '마귀할미바위', 마귀할미가 사용했던 '흔들바위'는 모두 신화시대의 전설이 변용된 것이다. '아들바위'는 이 용화산이 옛부터 생산, 탄생의 성역이 되고 있음을 암시해 준 '꼭지바위'를 장사가 떼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곧 춘천지방에 있던 맥국에 대한 외부고 공격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우제를 지낸다고 한 것도 용화산이 신령스러운 산임을 암시한다. 용화산의 천지창조전설의 변용된 전설이라 할 수 있다.
(8) 고산(孤山)
윗 중도(中島)북쪽에 돌산이 우뚝 솟아 있다. 높이는 98.9m. 이 산이 고산이다. 일명 부래산(浮來山)이라고 부르고, 작은 봉의산이라 해서 봉리대(鳳離臺)라 부르기도 한다. 의암호 한가운데 솟아 풍치가 아름답다.
북한강 상류의 금성(金城)땅에서 바위산이 떠내려와서 춘천에 자리잡은 것이 부래산이라는 전설이 있다. 금성관리가 세금을 받아갔는데 춘천고을 원님의 아들의 기지로 세금을 물지 않게 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백사(白砂), 이항복(李恒福)이 고산(부래산)에서 놀면서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의암호가 생기기 전에는 고산주변에 백사장이 넓게 깔려 있어 춘천사람들의 야유회장이 되었고 학생들의 소풍장소로도 이름이 있었다.
어느해 큰 장마가 졌는데 낭천강 상류에서 큰 바위산이 떠내려왔다. 금성 땅의 관리가 그 큰 바위산을 찾아서 춘천까지 오게 되었다.
중도 북쪽에 떠내려 온 이 바위산을 춘천에서는 부래산이라고 불렀다. 작은 봉의산이라는 뜻에서 봉리대, 홀로 솟았다해서 고산대(孤山臺)라 부르기도 했다. 금성의 관리는 이 부래산이 눈을 즐겁게 해주었으니 세금을 받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매년 금성고을 관리가 와서 세금을 받아갔다.
춘천에 새로 고을원이 부임했다. 금성의 관리가 올때가 되어 부래산 세금을 낼 일이 근심이었다.
원님에게 일곱살 난 아들이 있었다. 일곱살 난 아들이 금성의 관리는 자기가 맡아 잘 처리하겠다고 자신있게 나섰다. 한편으로는 근심이 되고 한편으로는 아들이 잘 해결하리라는 반신반의로 일을 맡겼다.
금성의 관리가 며칠 뒤, 부래산의 세금을 받으러 왔다. 원님의 아들이 금성의 관리에게 "관리님, 언제부터 이 부래산의 세금을 받으셨습니까?"라고 물으니 "이 부래산이 금성땅에서 떠내려가 여기에 온 후부터 받아갔다."고 대답했다. "바위산은 금성의 산이지만 바위산이 깔고 앉은 땅은 춘천땅입니다. 자리세는 한 푼도 내지 않았으니 바위산이 떠내려 온 때부터 지금까지의 자리세를 내십시요. 자리세를 내시고 이제부터는 부래산이 필요없으니 도루 가져가십시요."
금성의 관리는 아무소리도 못하고 돌아갔다. 그 뒤부터는 금성의 관리가 세금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한다.
(9) 봉화산(峰火山)
춘천지방에는 봉화산이 3곳이 있었다. 북산면의 봉의산과 춘천시내의 봉의산, 그리고 방곡리와 강촌리 경계에 있는 산을 봉화산이라 부른다. 이 봉화산의 높이는 734m,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었다.
춘천지방의 서남향을 관장하는 방벽역할을 했다. 지금은 서울지방 등산객의 발걸음이 잦다. 그래서 지금은 춘천지방에서 봉화산이라고 하면 강촌리에 있는 봉화산을 가리킨다. 다른 두 곳의 봉화산 이름은 일반에 완전히 잊혀졌다.
(10) 향로산(香盧山)
춘천시 칠송동 송암동 사이 경계에 있는 산, 높이 373m의 춘천시 안산(安山)이 된다. 집터나 묘자리에 맞은 편에 있는 산을 안산이라 한다.
고을의 안산도 반드시 정한다. 마을 뒤편에 진산(鎭山)을 두고 마을 앞쪽에 안산을 둔다. 춘천의 진산은 봉의산, 안산은 향로산이다. 삼천동에서 서울로 가는 도로가 나있고 서남쪽에 향로봉이 우뚝 솟아 있다. 멀리서 보면 향로를 세워놓은 것 같기도 하고 말이나 소의 목덜미처럼 보인다. 향로산 기슭에는 목장과 산장이 촘촘히 들어 서 있다.
(11) 진병산(陳兵山)·금병산(錦屛山)
춘천시 동산면 원창리와 동내면 증리 실레마을 경계에 있는 산, 높이 653m. 원창리쪽에서는 진병산이라고 부르고 증리쪽에서는 금병산 또는 진병산이라 부른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원호장군이 금화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진을 쳤다고 전해내려온다. 정병산(正屛山)이라고도 부른다.
진병산을 금병산이라고도 부르는데 비단 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이 금병산은 소설가 김유정의 작품무대였는데 특히 `동백꽃'의 무대였다. 지주의 딸과 소작농의 아들이 노란 동백꽃이 피는 봄에 로맨스가 꽃피어났던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진병산이라는 이름보다 금병산이라는 이름이 그래서 더 유명하다. 금병산 뒤에 장수골이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두양주가 마음씨는 착했지만 자식이 없어 슬픈 나날을 보냈다. 어느날 부인이 꿈에 청룡 한마리가 천정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밑에 있는 화로불 때문에 빠져나가지 못하는 꿈을 꾸었다. 그런 꿈을 꾼 다음 태기가 있어 아기를 낳았다. 그 아기는 자라면서 힘이 센 장수가 되어 있었다. 마을에서는 아기장수가 태어났다고 소문이 퍼졌다. 마을사람들은 장수가 나면 역적이 된다고 아기장수를 체포하려 한다.
그때 마을에는 밤마다 이상한 불이 일어났다. 소문은 아기장수의 짓이라고 퍼져 나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힘이 센 아기장수를 잡을 수 없었다.
마을사람들은 꾀를 내었다. 아기장수가 잠잘때 겨드랑이에 있는 비늘을 떼어내면 힘을 쓰지 못할터니 잠자는 틈을 엿보다가 그 비늘을 자르기로 했다.
봄날 금병산 뒤편에서 아기장수는 잠이 들었다. 그때 마을사람들이 달려들어 급히 비늘을 잘라버렸다. 아기장수는 힘이 없어져서 보통아이처럼 되었다. 아기장수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아기장수는 힘 한번 나라를 위해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다.
금병산 아래 증리 김유정 생가터에는 김유정문학관(김유정촌)이 2002년 8월 6일에 개관되어 김유정 문학정신의 산실이 되고 있다.
(12) 수리봉(水利峰)·수리봉(守理峰)
춘천시 사북면 고성리 신북면 발산리 경계에 있는 높이 654m의 산을 수리봉이라 한다. 물 수(水)자, 날카로울 이(利)자를 쓰고 또 지킬 수(守)자와 다스릴 리(理)자를 쓰던 수리봉은 머리라는 뜻이고 수리가 매봉, 응봉으로 바뀐다. 수리봉이 많은 지역은 곧 머리산, 마니산의 뜻으로 우리민족의 천제(天祭)가 행해지던 곳이다.
춘천시 동산면 원창리와 동내면 사암리 경계에 있는 높이 645m의 산도 수리봉이라 부른다. 봉우리가 매우 수려하고 머리산, 마니산의 이름으로 뜻이 통한다. 대룡산과 진병산이 이어지는 사이에 있어 춘천의 남쪽 관문이 되므로 머리 산의 뜻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한다.
(13) 칼봉(劍峰)
춘천시 남면 강촌리와 백양리 경계에 있는 높이 530m의 산, 칼을 세워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칼봉이라 부르고 검봉이라고도 한다.
경춘 4차선 도로로 북한강을 끼고 춘천으로 들어올 때 산세는 날카로우나 수려한 모습에 신비로운 경관을 만들어 준다. 강촌의 절경은 이 칼봉의 돋보이는 풍치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한다. 등산인들의 사랑을 받는다.
(14) 석파령(席破嶺)
춘천시 서면 당림리와 덕두원리 경계에 있는 영마루를 석파령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춘천에서 한양으로 가자면 신영강 나루를 건너 덕두원에서 골짜기로 들어가 석파령을 넘어 당림리로 나갔다.
지금의 경춘국도가 생기기 전의 옛길로 험하고 도둑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지금은 인적이 끊기고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다.
춘천군 서면 덕두원에서 당림리를 잇는 석파령은 춘천으로 부임하는 부사와 이임하는 부사가 돛자리를 깔고 환송을 하던 영마루라 해서 석파령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지금도 석파령에는 기왓장이 뒹글고 있는데 당시의 주막과 인가가 있었던 유적이 숲속에 쌓여 있다. 석파령에는 봄철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무진장으로 핀다. 석파령 옛길은 1970년대까지 마을 사람들이 오갔으나 지금은 거의 발길이 멎었다.
(15) 원창현(原昌峴)
춘천시 동산면 원창리는 원래 춘천군 동산외 이작면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원창역(原昌驛)이 있었다. 원창이란 이름도 이에 연유한다. 가지물, 구암동, 관거리, 덩바우, 매네미, 봉우이, 원골, 새술막, 안말, 온정터, 여우바우골, 왁발골, 큰골을 병합해서 1914년 행정구역 조정 때 원창리라 불렀다. 유명한 원창고개가 1980년대에 직선화되었다. 또 중앙고속도로가 1990년대에 관통하게 되었다.
원창치(原昌峙)또는 원창현(原昌峴)이라 부르는 317m의 이 고개는 춘천의 남쪽 관문이면서 꼬불꼬불하기로 유명했다. 건장한 남자들도 원창고개에 들어서면 버스에서 멀미를 하는 것이었다. 영서지방의 유명한 홍천, 횡성사이의 삼마치 고개만큼 유명했었다.
원창고개 아래에는 유명한 새술막이 있었다. 신점리(新店里)라고도 불렀는데 새점포가 들어선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그 새 점포라는 곳이 술막이었다. 가며오며 나그네들이 술막에 들러 여정을 풀었다. 옛부터 역(驛)마을은 길손으로 붐볐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터미널과 같은 곳으로 자연히 식당, 술집, 여관이 생기는 것과 같다. 새술막은 그래서 신문명이 들어오면서 유명했다.
원창리에 있는 마을 중에서 관거리마을이 있었다. 원창 앞에 있는 마을로 역사(驛舍)와 역졸들의 관사가 있어 관의 행차는 모두 이리로 통하게 되었다. 관리들이 드나들므로 관거리라 부르게 되었고 마을들은 관뜰 뒷마을은 관뒷골이라는 이름도 생겼다. 역마를 갈아타던 원창역이 지금도 춘천의 남쪽 관문이 되고 있다.
(16) 모래재(沙峴)
춘천시 동산면 조양리에 모래재가 있다. 모래재 밑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기도 하고 모래가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한자로는 사현(沙峴)이라 한다. 1991년 모래재에는 춘천정신요양원이 건립되었다. 춘천에서 원주로 나가는 원창리에서 관문 길목에 있는 이 모래재가 인간을 구원하는 정신요양원의 본 고장이 되었다.
강원도 춘천시 소양동에 위치한 산이다(고도:301m). 시의 상징이자 진산(鎭山)으로 시가지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봉산(鳳山)은 춘천부 북쪽에 있으며, 진산이다."는 기록이 있다. 주석에 의하면 이 봉산은 봉의산의 딴이름이며, 산의 형상이 현재의 춘천시 퇴계동과 온의동 방면에서 보았을 때 마치 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상이라고 한다. 즉, 풍수와 관련된 산의 형국에서 지명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고, 그 기원은 조선 전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춘천읍지』에 "부의 북쪽 1리에 있다. 산을 올라가 그 꼭대기를 바라보면, 바람이 나부끼면서 선계를 오르는 듯하며 앞이 탁 트여 막힘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른 들판과 화악산(火岳山) · 독산(禿山) · 경운산(慶雲山) · 전방산(箭防山) · 향로산(香爐山) · 삼악산(三岳山)이 모두 눈 아래에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푸른 산빛에 병풍이 둘러쳐진 듯 잇따라 뻗어서 두르고 안았으며, 혹은 높고 혹은 낮아서 각각 기이하고 뛰어난 모습이다. 양쪽의 강은 동으로 기린으로부터 흘러오는 것은 소양이요, 서로 회양으로부터 흘러오는 것은 장양(長楊), 혹은 담(潭), 혹은 탄(灘)이라 한다. 굽이굽이 빙 돌아서 봉황대의 아래에서 합쳐지니 사면의 안계가 수십 리로, 심고 거두며 갈무리하는 촌락이 서로 바라다 보이니, 한 주의 뛰어난 경관이 모두 이 곳에 모였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대동지지』에는 "북쪽 1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환여승람』에 "군 북쪽 1리에 있다. 진산이다. 그 봉우리에 올라가 바라보면, 바람에 몸이 가볍게 흩날리는 것이 신선 세계에 올라온 것 같고, 탁 트여 막힘이 없다. 사방으로 보이는 것이 모두 대야(大野)이고, 대야 밖으로는 뭇산 · 화악산 · 독산(禿山) · 경운산 · 대룡산 · 전방산 · 향로산 · 삼악산이 눈앞에 구불구불 병풍처럼 둘러쳐 있으면서 읍내를 빙둘러 싸고 있는데, 어떤 것은 높고 어떤 것은 낮아 각각 기이한 경치를 이룬다."고 수록되어 있다. 『강원도지』에는 "군 북쪽에 있다. 진산이다. 위에 봉수대 및 성벽 유지(遺址)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산성에 대한 기록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봉산 산성의 둘레는 2,463척이고 높이는 10척"이라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거란족의 침입으로 안찰사 노주한이 이곳에서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고려사』에는 "몽고족의 4차 침입 때 춘천 주민들이 산성에 들어가 항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임진왜란 때에는 강원도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의 활동지역이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도 격전지였다.
첫댓글 유익한 글 잘보고 갑니다~*^^*
춘천은 볼곳이 참 많은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춘천을 알고 보면 더 즐겁게 탐방이 돱나다
산의 형세가 참으로 독특하네요..
이러한 봉황의 형국이 전국에 많습니다.
여러개를 보다보면 물형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