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과 임유하가 네 살 차이란 것을 한 번 의식하고 나자 형의 모든 게 의식되었다. 아까 밥상머리에서 분명 그 집 이야기를 했지.
엄마가 미자 아주머니에 관해 묻자 형은 분명 통화를 했다고 했다. 목소리가 밝고 씩씩하셨다고. 지난번보다 확실히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고. 미자 아줌마랑만 통화했을까? 아니면 미자 아주머니랑 통화하는 만큼 임유하와도?
민규는 복잡한 생각에 잠겨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럼 임유하는 설마 형을 염두에 두고 네 살 차이라고 말한 건가? 그러고보니 형은 어릴때부터 임상현과 단짝처럼 어울렸지. 그럼 그때마다 유하를 봤을테고...
아까 임유하가 말한 그녀의 이상형을 형과 대조해보았다. 잘생겼고 키도 크고, 덩치...는 내가 더 좋은데, 대화가 잘 통하나? 설마. 형은 유머 감각이라곤 발톱의 때만큼도 없는걸. 그렇지만 나이차는 딱 맞다. 설마. 말도 안 돼. 아니 씨발 진짜? 에이 설마 아니지. 아니 진짜면 씨발 어떻게 해?
똑똑똑-
“야, 지민규.”
지아름의 목소리였다.
“꺼져!”
민규는 고함을 쳤지만, 그러나 그녀는 문을 열었다. 지민규의 협박은 적당히 무시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문가에 서서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금요일에 뭐해?”
지민규는 누나를 쳐다도 보지 않고 답했다.
“뭐하긴 뭘 뭐해? 학교나 쳐가겠지.”
“나 내일 친구가 집에 놀러오라는데 같이 갈래? 바로 옆 동네야. 가까워.”
“…….”
민규는 고개를 들어 수상쩍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지아름은 팔짱을 끼고 별거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뭐, 다음날 토요일이기도 하고. 걔네 집이 그 날 마침 부모님도 없고 빈대서. 가서 술이나 진탕 먹으려고.”
“근데 날 왜 데려가?”
“걔 동생이 너랑 같은 반이래.”
“…동생이 누군데?”
“나도 몰라. 하여간 여자애고 개 예쁘데. 심심할 테니 네가 좀 가서 장단 좀 맞추라고.”
“…….”
미자 아주머니는 월요일에 퇴원하고 그럼 유하도 월요일에 집으로 올 테니 당장 주말까지는 할 일이 없었다. 무작정 찾아가는 것도 싫어하니 매일 찾아가기도 힘들다.
“좋아.”
그래서, 민규는 흔쾌히 승낙했다. 가서 공짜 술이나 실컷 마셔야지. 지 아름은 늘 비싸고 질 좋은 술만 마시니까.
지아름은 잘됐다며 쾌재를 불렀다.
“주소는 내가 문자로 찍어줄게. 내일 잊지 말고 거기로 와.”
그러더니 콧노래를 부르며 그의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보이는 것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건가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금요일, 수업을 마치고 민규는 지아름이 찍어준 주소를 찾았다. 고루한 적벽의 자신의 집과 새하얀 독벽으로 으로 2층 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된 세련된 저택이었다.
버릇대로 대문을 발로 차려다가 여긴 남의 집이란 사실을 깨닫고 벨을 눌렀다. 가만있어보자 그러니까 내가 왜 여길 왔지? 맞아. 술을 실컷 마시고 싶었지. 게다가 개밥보다 맛없는 저녁식사를 피하고 싶기도 했고.
잠시 후, 그의 얼굴을 확인한것인지 스피커에 ‘기다려!’ 하는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다. 삐- 하고 문이 열린 것과 동시였다.
어디서 들어본 것처럼 익숙한데 지아름은 아니었다. 나랑 같은 반이라던 여자아이인가? 미심쩍은 얼굴로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아’ 하고 신음했다. 그랬다. 저기 2층 계단을 허겁지겁 뛰쳐 내려오는 짧은 원피스의 여자는 최유진이었다. 누나가 말한 그 예쁜 여자애가 바로 쟤였다.
“왔어?”
그녀는 반갑기 그지 없는 얼굴로 물었고 민규는 그녀의 차림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살피며 생각했다. 분명 같은 시간에 하교한거 같은데 얜 언제 와서 옷까지 갈아입고 있는거지?
최유진은 그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수줍게 웃으며 긴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겼다.
“얼른, 얼른 들어와. 아름언니는 미리와서 기다리고 있어.”
민규는 신발을 벗고 그녀가 내어 준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그러고는 안내에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이미 거나하게 술판이 벌어진 상태였다. 큰 거실에는 요란한 음악이 광광 울렸고 커다란 커피테이블 위에는 양주,와인, 맥주와 온갖 배달음식이 켜켜히 쌓인 채였다. 남자 둘에 여자 넷. 척 보기에도 짝이 안맞는 조합.
그리고 민규는 지아름이 왜 여기에 왔는지 그 목적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첫눈에 보기에도 훈훈하게 생긴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지아름은 그의 옆에 찰싹 붙어있다가 제 동생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이미 취한 게 틀림없다.
“어! 야! 왔냐!”
“…….”
그러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민규의 팔짱을 끼며 그를 대여섯의 좌중에게 소개했다. 취한게 틀림없다.
“여기는 내 동생 지민규. 가엽게도 조금있으면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고 삼이라는.”
그러자 혀가 풀린 그녀의 친구들이 박수를 짝짝짝 쳤다.
“야! 대박 잘생겼어!”
“완전 영개네 영개! 지아름 너는 저렇게 잘생긴 동생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냐?”
지아름의 친구 하나가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탁 두들겼다.
“우리 민규! 여기 누나 옆에 앉아볼까?”
“.......”
민규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지아름은 막무가내로 그를 여자의 옆에 앉히려고 했다.
그때 최유진이 끼어들었다.
“안돼요 언니.”
그러고는 지아름을 밀치고 대신 민규의 팔짱을 꼈다.
“민규는 제 손님이란 말이에요.”
그말에 누군가가 깔깔 웃었다. 최유진이랑 꼭 닮은 것이 그녀의 언니가 분명했다.
“야 들었지? 저거 최유진 거란다.”
뭐야 씨발 내가 뭐 물건이야? 왜 다 이리와라 저리와라 지랄이야? 민규는 잔뜩 인상을 썼다.
“내가 데리고 갈게요!”
최유진은 민규를 3층으로 끌었다. 민규도 그 술자리에는 끼고 싶지 않았으므로 조용히 그녀를 따랐다. 다만 따라 올라가며 지아름을 한번 돌아보았다.
남자에게 대롱 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자니 걱정스러웠다. 쟤 저러다 사고 치는 거 아니겠지?
최유진은 그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전체적으로 하얗고, 꽃무늬가 많고 벽 여기저기 앵두전구를 달아 화려했다.
유진은 화장대 의자 하나를 침대 근처로 끌어놓은 민규를 놓았다.
“아무데나 편한 곳에 앉아. 배고프지? 난 얼른 아래에서 먹을 걸 좀 가지고 올게. 기다려.”
민규는 어디에 앉을까 고민하다가 그녀의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영 적응되지 않는 방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여자들 방은 다 이런가. 그러고보니 임유하의 방은 어떻지? 그는 늘 미자 아줌마랑 한 방을 쓰는거 같던데. 그럼 그녀의 취향은 어떨까. 그녀도 이런 걸 좋아할까. 꽃무늬 커튼, 요란한 알전구들. 기하학적 패턴의 포스터와 엽서들. 뭐 이런 거.
유하가 생각 난 김에 민규는 그녀에게 문자를 했다.
[뭐해?]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 한참동안이나 그녀는 답이 없었다. 임유하는 늘 이런식이다. 뭐든 바로 답장을 하는 법이 없었다. 뭐랄까 늘 자신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 늘 자신은 뒤로 밀리는 느낌이랄까. 그거 좀 일찍 준다고 손가락이 닳나.
생각해보니 그도 늘 다른 이들에게 답장을 늦게한다. 대게 귀찮거나, 중요하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거나, 답하기 싫거나.
임유하에게 자신도 그런 존재인가. 귀찮고, 중요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은 존재.
잠시 후, 최유진이 쟁반 가득 담긴 쿼사디아, 피자, 잘린 티본 스테이크, 샤인 머스켓 등 먹기 쉬운 음식과 음료, 그리고 반즘 내용물이 담긴 와인 잔을 가지고 와 침대 위에 올렸다.
“이건, 스파클링 와인인데 그냥 탄산음료 같아서 가지고 왔어.”
“양주는 없어?”
“그건 아직 언니들이 안 깠어. 이따 9시쯤에 깐대.”
아쉬운대로 민규는 스파클링 와인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유진의 말대로 탄산 음료 같았다.
“이거 더 없어?”
민규가 잔을 내밀어보이자 유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더 가져올게. 병쨰 가져올게.”
그러고는 다시 다급하게 방을 나섰다. 민규는 그녀가 돌이오기 피자 한쪽을 입안에 우겨넣고 우적우적 씹어 넘긴 다음 쿼사디아도 한입에 다 먹었다. 샤인 머스켓 몇 개를 따 먹고 있으니 유진이 스파클링 와인 하나를 병째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한 손에는 얼음이 담긴 아이스박스도 들려 있었다.
“언니들이 얼음 넣어서 먹으면 더 맛있대.”
와인잔에 얼음 몇 개를 넣고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러더니 거의 텅 비어버린 접시를 바라보며 당황한 듯 하더니 곧 밝게 물었다.
“어, 더 먹고 싶은거 없어? 피자랑 쿼사디아 조금 더 가져다줄까?”
기져다달라고 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됐어.”
어쩐지 최유진을 부려먹는 건 부담스럽다. 이걸 빌미로 뭔가를 요구할 것 같고. 왜냐하면 그녀는 꽤 영악하다고 들었다. 댓가없는 도움은 결코 주지 않는 타입의 아이라고. 하성준의 말이니 믿을만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따 9시 되면 내가 꼭 양주 가지고 올게.”
민규는 시계를 보았다. 이제 막 다섯시가 조근 넘은 시각이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나보고 그때까지 있으라고?”
“응. 난 아름이 언니 나갈떄 같이 가는 줄 알았어. 그러려고 온 거 아니야?”
최유진은 침대 근처에 가져다 놓은 의자를 그의 앞에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사실 민규는 지아름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상관하지 않는다. 일찍 들어오건 늦게 들어오건 하등 상관이 없다. 기실 임유하가 아니라면 누가 무엇을 하든 관심이 없었다. 만일 임유하가 남자랑 술마시러 가서 늦게 들어온다? 기를 쓰고 쫓아가서 옆자리에 딱 붙어 있겠지. 아니 아예 못나가게 그 앞에서 지랄발광을 해 진을 쪽 빼놓는 수도 있다.
난 왜 임유하의 일에서만은 정신줄을 놓아버리는걸까. 물론 평소에도 정상적이지 않다는것이야 잘 안다만.
첫댓글 왜갔어 바보야 유하가 뜻밖에 질투좀하려나
너무 귀여운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