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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52
1월26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연중 제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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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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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2zGZvAA_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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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들은 오직 복음만 믿었고, 복음에만 의지했으며, 복음만을 살았으며, 복음만을 최고 가치로 여겼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위대한 선교활동 중에 동고동락했던 최측근 애제자이자 협력자들이었던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에게 쓴 편지들은 읽을때 마다 큰 감동을 줍니다.
제자이자 동료인 두 사목자에게 보낸 편지에 사용된 표현들은 진한 애정과 우정, 호의와 친절로 가득합니다. 크신 주님의 은총과 자비, 그리고 강렬한 사목적 사랑과 친교 안에 형성된 관계였기에, 남자들 사이에서도 그토록 각별한 애정표현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1 티모테오 1장 3~4절)
그리스인 아버지와 유다교 그리스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티모테오는 1차 전도 여행 때 리스트라에서 바오로 사도를 만나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2차 전도여행 때 리스트라를 다시 방문한 바오로 사도는 여행을 동반할 협력자로 젊은 티모테오를 선택했습니다. 그때부터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의 둘도 없는 동반자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차 전도여행 중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에 머물고 있을 때, 티모테오를 테살로니카 교회에 파견하여 중책을 수행토록 했습니다.
3차 전도여행 때는 에페소에서부터 마케도니아를 거쳐 코린토에 이르는 긴 여정의 전 전교임무를 맡겼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를 제자들 가운데 제자로 총애한 흔적이 여러 문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티모테오는 내가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나의 성실한 아들입니다.”(1 코린토 4장 17절)
“나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의 일을 성심껏 돌보아 줄 사람이 나에게는 티모테오밖에 없습니다. 모두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나와 함께 마치 자식과 아버지처럼 복음을 위하여 일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필리피서 2장 20~22절)
바오로 사도가 아들이자 제자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거의 ‘눈물로 쓴 편지’입니다. 오늘 천천히 다시 읽다보니 바오로 사도의 고초가 손에 잡힐 듯이 느껴져 코끝이 찡해오더군요.
로마 감옥의 냉기가 얼마나 뼛속까지 파고들던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자신이 깜빡하고 트로아스에 두고 온 겨울 외투를 좀 가져달라고 당부까지 합니다.
“그대는 서둘러 나에게 빨리 오십시오. 올 때 내가 트로아스에 있는 카프로스의 집에 주고 온 외투와 책들, 특히 양피지 책들을 가지고 오십시오. 겨울이 되기 전에 서둘러 오십시오.”(티모테오 1서 4장 13절)
티모테오와 티토, 오늘 축일을 경축하는 초대 교회 두 주교님의 모습에서 오늘날 주교님들의 모습을 떠올리시면 큰 오산입니다. 그들에게는 주교좌 대성당도 없었습니다. 주교관도 없었습니다. 잘 정비된 교구 조직도 없었습니다. 양떼들은 걷기도 아직 힘든 어린 아기들이었고 결핍 투성이였습니다. 그저 황량한 빈 들판 위에 홀로 서있었습니다. 그들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는 목숨의 위협, 계속되는 박해, 끊임없이 다가오는 환난 가운데 힘겨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런 가운데 두 목자는 용감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복음만 믿었고, 복음에만 의지했으며, 복음만을 살았으며, 복음만을 최고 가치로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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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CwvocwJyf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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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만 할 것인가, 살 것인가?>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제자들인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에게 편지를 씁니다. 사목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열정을 식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인 티모테오 2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로 격려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의 은사는 ‘성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사도들에게 ‘불’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를 받아도 내가 노력해서 불태우지 않으면 꺼져버립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라고 충고하기도 합니다.
성령은 불입니다. 불은 열정입니다. 열정은 내가 무언가 하지 않으면 꺼져버립니다. ‘열정에 기름 붓기’란 말이 있듯, 우리 안에 열정이 들어와야 하고 그 열정이 들어왔다면 계속 기름을 부어주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이 어디론가 나아가는 ‘항해’가 아니라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물 위에 떠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표류’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항해하는 인생은 인생을 사는 것이고, 표류하는 인생은 적어도 성취감이란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주식 투자를 해서 1년에 9억을 벌었다는 ‘채사장’이란 분이 ‘어쩌다 어른’에 나와 다시 한번 강의하였습니다. 말도 참 잘하고 확실히 돈을 많이 버는 사람답게 자신감도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도 고3까지 꾸준히 학교 등수가 하위 3% 안에 드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삶의 열정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고3이 되자 친구들도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채사장은 여전히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마음으로 집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태어나서 책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전에 책 한 권은 읽자는 마음으로 누나의 방에 들어갔더니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첫 책으로 적당히 두껍고 유명한 책이라 괜찮다 여기고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보름을 읽은 다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멍하니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와 벌』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생을 비관하던 한 가난한 대학 청년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파를 죽이고 재산을 털며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죽어 마땅한 전당포 노파였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끊임없는 양심 성찰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몸을 파는 나이 어린 소녀를 만납니다. 그 소녀는 하루라도 몸을 팔지 않으면 가족을 부양할 길이 없어서 매일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삽니다. 주인공은 그 소녀 앞에서 자신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느낍니다. 소녀는 가족을 위해 몸을 팔지만, 자신은 자신을 위해 남을 죽였습니다. 주인공은 소녀의 청을 받아들여 자수하고 시베리아에 벌을 받으러 가며 책은 끝납니다.
아마 채사장은 이 책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도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하루에 한 권씩 3년 동안 1000권의 책을 읽고 130만 부를 판매한 인기도서 작가가 되고 주식으로도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는 강연을 시작하며 세네카의 이런 말을 인용합니다.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채사장이라는 사람에게 열정은 『죄와 벌』로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삶,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살리는 삶 중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후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을 위해 기름을 쏟아부었습니다. 대학 들어가서 1000권의 책을 더 읽은 것입니다.
지금은 『죄와 벌』을 읽고 삶의 방향을 정한 것 때문에 만족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표류한 것이 아니라 항해를 한 것이고 생존한 것이 아니라 삶을 산 것이라 느끼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를 만난 티모테오와 티토도 그렇게 바오로를 통해 열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그 열정을 꺼뜨리지 말라고 합니다. 은총에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그 기름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열정에 자신을 바치지 않으면 열정은 태울 게 없어 꺼집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분도 계시겠고 아니면 언젠가는 그렇게 되실 분도 이 글을 읽고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늙는 것 생존을 위해 살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낸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얼마 전 맨손으로 롯데타워의 거의 2배에 달하는 암벽을 손가락 한 마디만 이용해 오른 알렉스 호놀드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도 사실 대학 때까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자퇴하고 방황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무려 9년 동안 준비한 끝에 로프 없이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절벽을 오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책을 내고 그 덕분으로 결혼을 하고 지금은 강연자로 활동 중입니다. 아무리 열정이 생기더라도 그 열정을 위해 50번 넘게 로프로 오르며 나 자신을 그 열정을 위해 쏟아붓지 않으면 그 열정은 결국 꺼져버렸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헛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 각자의 마음에 분명 열정을 심어주셨습니다. 우리도 올라야 할 산이 있고 지금은 힘들더라도 연습하고 또 연습하며 나 자신을 쏟아붓다 보면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을 때 내가 오른 곳에서 위에만 올려다보는 수많은 사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선택권은 두 개밖에 없습니다. 오르든지 구경하든지. 주님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열정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 열정에 기름을 붓는 삶을 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남을 해치며 생존하는 삶이 아니라 나를 희생하며 남을 살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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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1-9 : 추구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티모테오는 “우리 주님의 은총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나에게 넘치게 베풀어 주셨다”(참조: 1티모 1,12-17)고 믿은 “죄인들 중의 으뜸”인,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다. 아마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의 첫 선교여행 중에 개종한 것 같다. 아버지는 이방인이고 어머니는 유다인이었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와 같이 유다인들 사이에서 사도직을 행할 수 있었고 그는 할례를 받았다.
티모테오는 바오로와 같이 두 번째 여행과 세 번째 여행을 함께 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 여러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맡겼다. 마케도니아의 테살로니카와 코린토의 공동체들을 맡겼다. 사도는 그에게 신약에 정경이 된 적어도 두 서간을 남겼다.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가 첫 번 감옥에 있는 동안 가까이 있었고 그 후에 에페소에서 주교직을 행하였다. 감옥에 갇힌 바오로는 두 번째로 로마의 가는 길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바오로 사도의 또 다른 협력자인 티토는 이방인 가정의 출신이었다. 사도는 그도 사도의 첫 여행 중에 개종시킨 것으로 보인다. 티토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예루살렘까지 동행하였는데 예루살렘은 바오로 사도의 제자들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할례를 적극 주장하는 사람들을 온 힘을 다하여 반대를 했던 곳이다.
티토는 코린토와 사도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바오로가 남긴 서간에서 이미 크레타의 사목자로 나타난다. 성 바오로는 그에게 간곡한 부탁을 하면서 에피로에 있는 니코뽈리와 일치하라고 적고 있다. 거의 달마치아로 그를 보내었을 것이며 그 곳에서 특별한 모습으로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 보면 주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뽑아 둘씩 짝을 이루어 당신에 앞서 보내셨다. 왜 그랬을까? 이 두 사람은 이리 같은 세상에 먹이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은총이 되도록 보내신 것이다. 두 제자는 그들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간 것이다. 사랑으로 모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은총이 되게 하시려고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고 하신 것이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
손님 접대는 당시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의무였다. 낯선 여행자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 손님 접대는 그 마을의 의무였고 풍습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일꾼이 적다는 것이 예수님의 아쉬움으로 보인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고 분부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지금 상황으로는 성직자들도 부족하지만, 우리 신자들로서도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
나 자신의 봉사가 이 공동체에 필요한 줄 알면서도 뒷짐 지고 있는 신자들이 많다. 일꾼이 부족하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며, 일꾼도 어떤 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겠는가? 어느 누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을 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 받은 것이며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일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일꾼들을 위해, 또한 더 많은 일꾼들이 나오도록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우리 스스로도 우리 가운데서 배출해야 한다.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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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은 유산입니다. 이 유산은 그 어떤 물질적인 유산보다 값지고 가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인 오늘 독서에서,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신앙의 유산인 믿음이 티모테오에게도 전수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신앙은 다른 이에게서 전해 받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듣는 것에서 오기 때문입니다.(로마 10,17 참조)
우리는 험난한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신앙을 전수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큰 유산을 자녀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가정에서 배웁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신앙의 공동체며, 가장 중요한 교육의 공동체기도 합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 안에 ‘진실한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실한 믿음이란 ‘위선이 없는 믿음’, ‘진리의 정신 안에 있는 믿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티모테오가 이 믿음을 잘 간직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티모테오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게 합니다. 하느님의 은사란 티모테오가 받은 사목 직무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 직무를 위하여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더욱 뜨겁게 하는 것은 세례를 하나의 자격증이나 천국으로 가는 통행증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교리와 신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특히 우리 가정 안에서 전수될 것이며, 이것은 가장 큰 선교며 우리의 의무고 우리 신앙을 지켜 나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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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음 선포 활동과 신앙생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2-9)
1) 여기서 ‘일꾼들’은 성소자들이 아니라 신앙인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은 ‘일꾼들을 모집하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일꾼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맡은 일의 성격과 내용이 조금씩 다를 뿐이지, 모두가 다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신앙인은 전부 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동시에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자기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고, 동시에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는 생활입니다. 그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일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도 하느님을 위한 일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는 말씀은,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다.”라는 뜻입니다.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라는 말씀은, 성소자들을 많이 보내 달라고 청하라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즉 선교활동이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복음 선포 활동을 당연히 도와주시지만, 그래도 선교활동의 기본자세는 ‘기도’입니다. (만일에 기도하지 않으면서 선교활동을 한다면, 그 일은 세속의 영업활동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2)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을 하다 보면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경우도 있고, 배척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교활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가 그렇습니다.) 박해받는 상황이라면 이리 떼 가운데 놓인 양들 같은 처지가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세상 사람들을 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은, 또 신앙생활은 세상 사람들을 상대로 한 전쟁이 아닙니다. ‘사랑의 봉사활동’입니다.) ‘빈손’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지시를, 이리 떼 같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세속적인 방식으로 감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복음화는 복음적인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세속에 동화되는 것, 즉 세속화입니다. 교회와 신앙인의 세속화는 모든 것을 잃는 일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세속의 인간관계나 친분관계에 연연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재물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7-10) 그래도 선교활동을 하려면 최소한의 활동비는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또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워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돈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것입니다.>
3)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당신의 일꾼을 먹이신다.”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은,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선교활동과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라는 말씀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라는 말씀은, 어디선가, 또 누군가가 반겨 맞이하고 숙식을 제공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믿고 감사히 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말라는 지시입니다. 선교활동은 호의호식하려고 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4) 복음을 전하는 활동은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심는 활동이고, 신앙생활은 그 평화를 누리는 생활입니다. 선교활동을 한다는 명분으로 가는 곳마다 분쟁과 갈등을 일으키는 종파가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자기의 신앙과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선교활동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선교활동의 성과에 대해서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씨를 뿌리는 일은 우리가 하지만, 그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마르 4,26-29)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복음의 씨’를 뿌렸는데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할 때, 그것에 대해서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5)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활동이고, 신앙생활은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 주라는 뜻입니다. 그 사랑 실천은 ‘하느님의 나라’를 실제로 전해 주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라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말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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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미국은 어려움에 처한 국민을 위해서 몇 가지 재정지원을 하였습니다. 먼저 년 소득 75,000달러가 넘는 사람을 제외한 전 국민에게 1,200달러을 지원하였습니다. 저도 받았습니다. 긴급 재난 지원금을 주었습니다. 저희 신문사도 3,000달러를 받았습니다. 직원들의 급여 지원도 받았습니다. 저희 신문사도 28,000달러를 받았습니다. 직장을 잃어버린 실업자들에게는 월 600달러를 지원하였습니다.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국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지원하였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해 선별 지원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나라는 코로나19라는 큰 파도를 넘기 위해서 국민들과 기업들에게 재정지원을 하였습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공급되어서 정상이 될 때까지는 정부의 지원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백신과 치료제를 마련하기 어려운 가난한 나라에게 무상으로 백신과 치료제를 제공하는 방안을 제안하셨습니다. 그것이 애덕의 실천이며, 그것이 모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성당에 들어오는 인원이 제한되었습니다. 교무금과 헌금이 감소하였습니다. 세례, 견진 성사가 중단 되었습니다. 본당의 단체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교우들의 영적인 갈증이 커졌습니다. 많은 본당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두 번 있던 주중 미사를 매일 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미사 전에 묵주 기도를 하고, 영상으로 교우들이 볼 수 있도록 장비를 마련하였습니다. 교우들은 가정에서 함께 묵주기도를 하고, 영상 미사를 참례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세심한 배려와 준비는 교우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교우들을 위해서 주일 미사를 늘리는 성당도 있습니다. 제한된 인원만 성당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미사의 횟수를 늘렸습니다. 교우들은 편한 시간에 불편 없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습니다. 매일 ‘사목단상’을 보내주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신부님의 사목단상은 본당과 교우들을 신앙으로 이어주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힘들다고 포기하기 보다는, 길이 없다고 단념하기 보다는 새로운 길을 찾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잠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종교를 선택한다면 ‘천주교’를 택하겠다고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천주교와 개신교를 방문한다면 어떤 느낌을 가질까? 천주교나 개신교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준 사랑과 희생을 본받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들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보여 줄 수 있는지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이기적인 모습, 우리들의 이율배반적인 신앙생활, 우리들의 나약함 때문에 어쩌다 성당을 찾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합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신념이 있어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는 자기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는 희망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바로 그런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비록 감옥에 있었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걱정하였고, 제자들의 가족들까지 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보면서 ‘티모테오와 티토’는 참다운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을 전하는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위로와 희망을 얻을 것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적어도 하루에 하나씩은 감사할 일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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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래 가자>
루카 10,1-9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래 가자>
그래 가자
나를 보내시는 분께서
가라고 하시니 쉼 없이
그래 가자
나를 보내시는 분께서
몸소 가시려는 곳으로
그래 가자
나를 보내시는 분보다
한발 앞서 그분의 길이 되듯
그래 가자
나를 보내시는 분께서
짝을 지어주신 벗과 함께
그래 가자
나를 보내시는 분께
모두 맡기고 아무 것 없이
그래 가자
나를 보내시는 분께서
늘 가시듯 주저하지 않고
그래 가자
나를 보내시는 분의
평화를 심고 가꾸러
그래 가자
나를 보내시는 분께서
함께하시듯 벗들과 어울리러
그래 가자
나를 보내시는 분처럼
사랑하고 보듬으며 살리러
그래 가자
나를 보내시는 분께서
홀로 모든 것이 되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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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걱정이 불현듯 우리를 찾아오면>
+ 찬미예수님
코로나로 인하여 집에 가지 못한지 한참이 지났습니다. 추석 때에 마지막으로 본가를 방문했으니, 코로나가 조금 더 안정되면 찾아뵙겠다고 한 지 어느덧 4개월이 지난 셈입니다.
유별나다 할지 모르겠지만 이렇듯 코로나는 제 자신과 가족조차 믿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줄곧 성당에 머무르지만 혹시라도 내가 감염되지는 않았을까 혹은 가족 모임을 하게 된다면 그 중에 걸린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특히나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본당에서 아이들을 대해야 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많이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연락을 하시고, 바쁜 탓에 전화를 받지 못하거나 답문이 늦어지면 초조함이 섞인 문자를 재차 보내십니다. 내 자녀가 잘 지내고 있는지, 스트레스가 있지는 않은지 매사에 걱정이 많으신 것입니다.
사실 사제란 부모님께 걱정이나 끼치는 불효자에 가깝습니다.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손주를 보여 드릴 수도 없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부모님을 잘 대접할 수도 없습니다.
남자 혼자 생활하는 삶이니 끼니는 잘 챙겨 먹는지, 옷은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지, 괴롭히는 사람은 없는지 부모님의 입장에선 알 길이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희 어머니가 저의 삶을 응원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는 저를 자랑스러워하시고 대견해 하기도 하시니, 자랑스러운 마음과 함께 기도와 응원으로 저와 함께 하고 계심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얼핏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마음이란 분명 걱정이 가득한 마음, 불안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강하다면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지 말고 그냥 곁에 두면 될 것을 그러면서도 굳이 파견하고 돈주머니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말씀하시니 다소 의아합니다.
저희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사는 아들의 밥이 걱정이고 건강이 걱정이라면, 제가 신학교에 들어갈 때 극구 반대하셨으면 될 것을 어머니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제가 사제의 꿈을 꾸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렇게 걱정이 많으면서도 사제인 저를 자랑스러워하시고 대견해 하시니 참 아이러니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의 답을 우리는 이어지는 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없으면 그것은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결국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있으며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는 양들을 이리 떼에 보내는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용기를 내어 제자들을 파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이런저런 걱정이 들지만 그래도 하느님의 은총을 믿기에 오늘도 묵묵히 기도를 하고 계실 것입니다.
때때로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갑자기 이런저런 걱정이 우리를 덮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걱정은 불현 듯 우리를 찾아와 여러 가지 불안감을 만들어 냅니다.
누가 나를 어떻게 바라볼 지도 걱정이고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도 걱정입니다. 가족들의 건강이 걱정이기도 하고, 하고 있는 일이 잘 풀릴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이러한 인간적인 걱정이 들 때, 우리는 다시금 마음을 잡으며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따라 올바로 살아가고 자녀들을 교육시킨다면, 주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하느님의 일꾼이 되며,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오늘 독서의 바오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들의 땅을 떠나 바오로에게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티모테오를 바오로 사도는 간절히 그리워합니다. 티모테오는 바오로가 수없이 자신의 아들과도 같다고 이야기했던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이니, 인간적인 걱정과 그리움으로 그를 불러들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권고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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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바오로의 오른팔 티모테오, 비서 티토, 그리고 여러분은 명상의 집의 사랑의 가족>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먼저 머무는 곳에서 평화를 빌어 주고,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가까이 왔음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평화를 전해 주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입니다. 주님의 제자인 나는 지금 내 맘에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십니까? 지금 나의 마음에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충만하십니까? 내 안에 주님의 평화와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전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우리 맘에 기쁨과 평화가 넘치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여러분은 명상의 집의 가족"라는 주제로 묵상한 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오늘도 재미난 이야기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박과 내기를 좋아하기로 소문난 보좌신부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를 불러 타이르고자 주교님이 불렀습니다.
"신부님은 어떤 것을 잘 하십니까?"
"내기라면 자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교님의 발등에 화상자국이 있으신 거 같은데 거기에 만 원을 걸겠습니다."
발등에 화상을 입은 일이 없는 주교님은 그의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해 양말을 벗고 자국이 없음을 보여준 뒤 만 원을 받았습니다. 내기에 진 보좌신부는 뜻밖에도 싱글거리며 전화를 걸더니..
"본당 신부님요, 십만 원 준비해 놓으시소. 주교님이 양말 벗었심더~~^^"
보좌 신부님은 본당신부님과 주교님을 만나면 양말을 벗게 하겠다고 내기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기에서 이겨, 비록 주교님께 만 원을 잃었지만 9만 원을 딴 셈이 된 것입니다. 보좌 신부님의 내기 하는 버릇을 고치려 했다 주교님도 내기에 빠지게 되었네요.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 교회에는 교황님, 주교님, 신부님, 부제, 평신도 등 교계 제도라는 것이 있어왔습니다. 이것을 직무적 사제직이라고 합니다. 수도자는 원래 교계 제도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많은 수도 교부들은 수도자들은 교계제도를 오히려 멀리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뽑으셨기 때문에 12명의 제자의 안수를 통해 이 교계 제도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 오고 있습니다. 주교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리자이고 사제들은 주교님을 통해 그 권한을 대행하는 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수녀님을 만났는데, “저는 사제가 나이가 많든 적든, 영적으로 뛰어나든 그렇지 않든, 학식이 풍부하든 그렇지 않든, 사목이나 강론을 잘하든 못하든, 사제 그 자체로 존중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을 먹여 살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해 주셔서,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사제들을 사랑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72명의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어떻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마음이 들만큼 제자들의 어려움이 눈 앞에 선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먼저 외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가는 곳에 주님의 평화를 빌어 주라고 하십니다. 아픈 이들을 고쳐 주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사제로 인해 공동체의 평화가 깨어지고, 수도자로 인해 공동체의 기쁨이 사라지고 서로 불신과 미움으로 지내는 경우도 자주 보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제나 수도자 때문에 상처받아 힘들다고 저에게 찾아 오는 분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사제나 수도자 개인의 인성의 문제인데, 이런 문제들 때문에 교회 전체를 삐뚤게 보는 미성숙한 이들도 보게 됩니다. 사제는 교우들의 영혼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인데 섬김을 받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본당의 수도자들은 사제를 도와 교우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삶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생겨 나는 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모순된 우리의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첫째, 교회의 교계 제도는 직무로서의 역할이지 은총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비유처럼 우리 몸의 각 지체가 그 기능을 하듯 사제와 수도자들도 그리스도를 몸으로 하는 그 기능과 역할의 일부일 뿐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 모두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여정 중에 있다는 것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은 서품과 서원을 통해 축성된 이들이지만 완성된 이들이 아닙니다. 선별되었지만 그것을 직무를 위한 선별이지 완벽하다는 표시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교우 분들이 “신부가 어떻게 저럴 수 있어!” “수녀가 왜 저런 말을 해!”라고 속으로 구워 먹고, 삶아 먹고, 볶아 먹고 심지어 갈아 먹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어떤 교우분들은 사제나 수도자들이 신자들에게 잘 봉사하기 위해서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군림하거나 더 의지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티모테오와 티도는 사도 바오로의 참으로 좋은 협력자였습니다. 물론 두 분도 나중에 모두 주교가 되었지만,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사랑하는 아들(1고린 4:17), 자신과 함께 걱정해는 사람(필립 2:19-20), 충실한 협력자(로마 16:21), 그립고 보고 싶은 친구(2디모 1:4)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명상의 집에서 함께 사는 우리 신부님 수사님들께서 저를 사랑하는 아들이요 협력자로 친구요, 늘 함께 걱정해 주는 동료로서 대해 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수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티모테오가 바오로의 오른팔이었다면 티토는 비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방인이었다가 개종하여 바오로의 착실한 아들(티토 1,4)로서 코린토 교회의 분열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바오로에 의해 파견되었으며, 크레타 섬에서 바오로 지시를 완수하다가 그곳에서 선종하였습니다.
두 분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오로의 복음 선포를 온 마음으로 온 몸으로 도왔으며 가족과 친구처럼 그를 믿고 사랑했습니다. 바오로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복음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에게 협조한 티모테오와 티토의 겸손과 순종의 마음은 우리가 어떻게 사목자들 곁에 있어야 하는 지를 잘 보여 줍니다. 내 뜻대로 그들이 행동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내 생각대로 그들이 말하지 않는다고 무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더 관심을 갖는다고 질투하는 미숙한 협조자가 아니라, 진정 가족과 친구처럼 사랑과 믿음으로 함께 해주고 지지해 주며 그가 필요로 하는 일에 협력하고, 지치고 쓰러져 있을 때 위로해 주며 기도해 주는 그런 협조자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우리 명상의 집에 오시는 교우분들이 떠 오릅니다. "우리 교우분들은 사랑으로 가득한 참 좋은 가족 같다"는 느낌이 들어 제가 참 든든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위해 뭐라도 하나 더 해 주고 싶은 것이 저의 마음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모두가 예수님을 사랑과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 보편적인 사제직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72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 지어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이 어떻게 처신하고, 어떤 것을 소유해야 하고 어떤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이 대목을 많은 교우분들이 사제나 수도자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왜 하필 72명을 보내셨는지 살펴보면 분명해집니다. 70명 혹은 100명을 짝지어 보내실 수도 있었는데 왜 72명을 보내셨을까요? 72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 지으면 36개의 짝이 됩니다. 36은 성경의 완전수인 12와 3의 곱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 모두에게 당신의 일꾼으로서 자격을 주시면서, 동시에 물질로부터의 집착에서 자유로움을 명하시고, 주님의 평화를 빌어 주고, 아픈 이들을 낫게 해 주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72명은 주교님, 신부님, 수녀님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꾼으로서 물질로부터,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지녀야 하며,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를 전해 주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신부들의 물질에 집착하는 마음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살피고, 수도자들의 사람에 집착하는 마음을 따지지 전에, 나의 내면에 들려 주시는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같은 주님의 제자로서 주어진 직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서로 기도와 사랑으로 도와 주며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을 내 마음 안에 먼저 쌓아갈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72명의 제자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72명의 제자단이 서로 나누는 사랑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바로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마음을 비우고 용서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기”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날마다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함께 해 주시는 여러분들이 계셔 참으로 든든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영원히 저희 명상의 집을 사랑해 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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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혁 스테파노 신부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아 이 두 분에 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이 두 분은 그 업적으로 알려지기보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통해서 더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이 두 분 주교는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로서 바오로와 함께 전교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새로 형성된 공동체를 맡아 감독으로써 봉사를 하였습니다.
티모테오라는 이름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티모테오는 성실하고 신앙이 두터운 바오로의 협력자로서, 사도행전 16장 1절에 보면 리스트라에 있는 제자의 한 사람으로 처음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그를 참 믿음의 아들로 여겨, 아들처럼 사랑하고 신뢰하여 여러 가지 충고와 권면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가 리스트라에서 설교할 때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후 바오로의 친구이자 오른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말썽을 방지하기 위해서 할례를 받은 후, 바오로의 제 2차 전교 여행을 수행하였습니다.
바오로가 유대인의 적개심 때문에 베레아를 몰래 빠져나갈 때, 티모테오는 그대로 남아 있다가 테살로니카로 파견되어 그곳의 상황을 보고하고, 또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였습니다.
58년, 티모테오와 에라스토스는 마케도니아로 파견되었으며, 그 후 코린토로 가서 바오로의 가르침을 명심하라는 권고를 하였습니다.
바오로가 체사레아에서 투옥되고 로마로 이감되었을 때 같이 있었고, 그 후 에페소로 가서 그 곳의 초대 주교로 봉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디아나를 공경하는 이교 축제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의 내용을 보면, 교회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은 봉사자로서의 올바른 행동과 자격을 갖추어야 하며 거짓 교사들과 이단에 대항하여 겸손한 태도를 지닐 것을 권고합니다.
1세기말 아시아 교회 전역에는 율법교사로 자처하면서도(1티모 1,7) 꾸민 이야기와 족보에 정신이 팔려(1,4) 결혼을 금하고 음식을 절제하며(4,3)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2티모 2,18) 이들이 여기저기서 늘어났습니다.
다른 이들의 신앙까지도 뒤흔들어 놓는 교회의 암적인 존재들인 이들에 맞서, 바오로가 전해 준 그리스도교 사상만이 참된 삶의 길이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모두 선해서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사실(1티모 4,1-5)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되 각 사람의 형편에 맞추어 권면하라고 하면서 언제나 복음을 선포하라고 촉구하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받은 은사를 개발하고 성장시키는데도 소홀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티토 주교는 바오로에 의해 개종한 후, 그의 비서가 되어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였습니다. 티토는 바오로의 믿음의 아들이며, 그의 훌륭한 협력자였습니다.
다바오로는 그를 코린토로 파견하여 오류를 시정케 하면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한 헌금을 모금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바오로에 의해 크레타의 주교가 됩니다. 나중에 그는 달마시아를 방문한 뒤 크레타로 돌아와서 운명한 듯합니다. 법률가 제나가 쓴 "티토행전"에 그의 행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바오로가 티토에게 보낸 서간에서 보면 착한 목자가 지녀야 할 자질로,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가 신앙인이어야 하며, 방탕하지 않고 순명하며, 술꾼이어서는 안 되고, 난폭하거나 탐욕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유다인들의 신화와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을 멀리 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서간은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과 함께 성직생활에 대한 많은 교훈을 담고 있어서 사목서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전교를 위해서 바오로 사도나 티모테오, 티토 주교와 같은 고생을 무릅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실상 더 쉬워지고 기회가 많아졌는데도 불구하고 전교는 더 미미해 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신앙 안에서 우리 인생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삶을 살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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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신은근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열두 제자 외에도 제자들이 있었다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열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 주어집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과는 인사도 나누지 뭇하게 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인지요?
아무것도 지니지 않아야 절박한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만 의탁하며 버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이 방해받을까 봐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의식중에 하소연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평화를 빌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빌어 주는 사람에게 먼저 찾아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가 평화스럽지 못하면 기쁨의 전교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있어야 기쁨의 주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마음의 평화가 먼저입니다. 우리 삶이 평화를 만들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불화를 일으키고 있다면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과감히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평화는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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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윤준원 미카엘 신부님]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 일흔 두명을 지명하시어 당신에 앞서 전도 여행을 보내십니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장을 가볍게 하여 받기 보다는 주는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이며, 길에서 사소한 일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하는 말씀입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하며 정성껏 부지런히 하느님 말씀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교우들이 방문을 할 때 늘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실 때도 수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 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느님에 의한 평화가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이 세상에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비슷한 모습으로 인간을 만드시고(창세1,26),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창세2,7) 말하자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고, 그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자체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므로 내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을 묵상할 때 가장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성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는 ‘꽃들이 태양을 향해 자라는 것처럼 인간의 내적 갈망은 하느님을 향해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내 마음이 당신 곧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 까지 내게 참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하고 하느님 안에 있어야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들을 보낸다고’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리떼와 양들이 비교가 됩니까? 양들은 바로 잡아 먹혀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양들이 자신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간다면 이리 떼를 이길 수 있습니다. 보내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보내시는 분이 보내실 때는 이 일을 책임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며 지켜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시편에서는 우리가 어둠의 골짜기를 가거나, 재앙을 당할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계시어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지켜 주신다.(시편23,4)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총독이나 임금들 앞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주님을 증언할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10,19-20) 하셨고, 내가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함께 하시고 지켜 주심으로 제자들은 담대하게 온 세상에 나가서 주님의 평화, 사랑, 진리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하시며 먼저 기도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다른 때도 일꾼이 필요하지만 수확할 때는 더욱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제자들이고, 또 모두 수확을 위해서 주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일꾼들입니다.
교회에 좋은 성직자, 좋은 수도자 일꾼뿐만 아니라 좋은 평신도 일꾼도 많이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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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분야에서 큰 성공을 이룬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유년 시절의 경험과 당시에 보고 들은 것들이 성인이 되어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교 수업에 충실해서, 학원에 열심히 다녀서 등을 말하면서,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열심히 공부해서 얻게 된 좋은 성적이 취업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공의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대신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성장기에 있는 아이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쉴 틈 없이 학원에 다니게 하고, 직장에서 원한다는 스펙 쌓기에만 온 힘을 기울여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먼저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을 쌓을 수 있도록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실제로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이 생기게 된 후에 공부하는 것과 무작정 시키는 공부의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우선 성장 속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공부의 의미를 알게 되고 이로써 공부가 더 재미있게 됩니다.
스스로 공부하는 사람과 억지로 공부하는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아마 누구나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다른 아이에게 자기 자녀가 뒤처질까 봐, 남들 정도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체성도 생기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 공부만 시키는 부모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식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 데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특별한 능력이나 재주가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또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지요. 그런 제자를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셨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또 잠을 자면서 얼마나 많은 사랑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에 파견하면서 아무것도 주시지 않습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마음이라고 하면서도,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랑한다면서도 아무것도 마련해 주지 않으시는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파견된 세상 안에서 자기의 노력으로만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노력으로 그들은 세상에 외치는 자기들 말에 힘을 불어넣을 수가 있었습니다. 세속적으로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하느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라고 의심 없이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자기들 마음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늘 기쁘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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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검진>
두 달 전에 건강 검진을 받았습니다. 국가검진 대상자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서 병원에 갔는데, 문진표를 작성해야 한다면서 6장의 종이를 줍니다. 꼼꼼하게 제 건강에 대한 생활이나 습관 등을 적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가?’라는 항목이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해야겠다’라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내 몸인데 왜 이렇게 남이 난리야?’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제게 “왜 이렇게 살쪘어?”라고 말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지 않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다이어트에 전혀 관심 없음’에 표시를 했습니다. 조그마한 반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에게 관심이 많은 우리입니다. 그런데 그 관심은 사실 나의 부족한 모습을 상대방에게서 보이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살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사람들의 살진 모습을 먼저 보게 됩니다. 내 관심사로 남을 보는 것입니다. 어디에 관심을 둬야 할까요? 외부가 아닌 내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외적 건강보다 내적 건강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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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근본에 충실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10,4)고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 하시며 홀로서기를 바라셨습니다. 인사는 왜 하는가? 생각해 보면, 사랑과 존경에서 합니다. 인사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본래의 의미를 잃을 때가 많습니다. 잘 보이려 하고, 인정받으려 하며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또 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근본은 잃은 채 껍데기에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인사까지 하지 마라.’는 것은 한 마디로 ‘한눈팔지 마라’,‘양다리 걸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소명을 들었으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마음을 쏟아야지 어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되겠습니까?
언젠가 익명의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그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라고 하시며 신자들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더 많은 관계를 맺어야 할 텐데 ‘끊어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오로지 주님 안에 머물라는 사랑의 충고였음을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을 간직합니다. 인사를 하다 보면, 다시 말해 사람에게 매이다 보면 진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다는 일깨움을 주십니다. 사람이 정에 매달리다 보면 근본을 잃게 됩니다. 하느님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인기가 오르는 것 같은데 주님의 눈 밖에 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 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고,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나의 가슴은 뛰노라.”)(이사61,10) 하느님만을 갈망하고 즐거워해야 하거늘 인간적인 욕망이 왜 그리 강한지 모르겠습니다. 바오로는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 8,5-6)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도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테오 1,8) 하고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인간적인 것들에 매이지 않는 삶을 갈망하는 오늘을 겸손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산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단순한 입으로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을 거쳐 손발에서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한편 수확할 일꾼이 적다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이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작 나는 그 일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입니다. 일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손길에 우리의 의지를 맡기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 하느님의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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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미사 중 신부님의 강론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성당 안에 요란한 총성이 울렸습니다. 놀란 신자들이 저마다 납작 엎드리거나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쥐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 아주머니가 부랴부랴 꼬마를 안고 성당 문을 향했습니다. 문가에 이르렀을 때 할아버지 한 분이 ‘나갈 필요 없다’며 말했습니다.
“난 사람들이 오늘처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댁의 아들은 신부님이 10년 동안 한 것보다 더 큰 일을 한 거라구요!”
할아버지는 총성이 꼬마의 장난감 총에서 난 소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역시 삶의 경륜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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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복음의 일꾼이자 전사로 파견된 우리들>
-하느님 나라의 평화와 치유-
반갑고 기쁩니다. 예전 초등학교 어린시절 잠 설치며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부터 일어났던 운동회날 추억이 생각납니다. 50-60년대 시골 초등학교 시절 학생들이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 싸운 운동회날은 시골의 잔치날처럼 참 풍성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군과 백군의 싸움이 그렇게 흥미진진했던가 봅니다. 어릴 때 놀이도 거의 싸움 놀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푸른 하늘에 흰 라인을 그려넣은 윤곽이 선명한 운동장의 아침 풍경은 얼마나 가슴 벅찬 행복과 부유의 시간이었던지요!
꼭 오늘 이런 느낌으로 밤12시에 일어나 여러분을 맞이할 기쁨에 설레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얼마전 강론 내용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로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라는 내용에 참 만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언젠가의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아무리 힘들어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잠시 어느 80세 남편을 둔 70대 초반 아내의 글을 소개합니다. 이분들 역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분들임이 분명합니다.
“보스코는 아직도 눈이 오면 으레 그 ‘하트병’이 도진다. 그동안 눈이 안내려 그림을 못 그려 서운했었던가 보다. 나 몰래 마당으로 내려가 아직도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하트를 그리고 하트 안에 그가 나를 부르는 애칭 ‘나니’를 써놓는다. 삐툴삐툴 그림이지만 나이 여든에도 아직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니 퍽 다행이고 그 사랑을 받는 여자 역시 행복하다. 곁에 남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깊이 새기는 중이다. 혼자 남아 수십년씩 살아가는 이곳 할매들마저 ‘그래도 서방 그늘이 강동팔십리江東八十里’하던 탄식이 그런 의미이리라.”(휴천제, 전순란)
참 순수한 사랑의 부부요 아름다운 글입니다. 이런 부부사랑 역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어제 읽은 나이제리아 출신 노숙자 에드윈의 죽음을 애도했던 교황님의 지난 주일 삼종기도 시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베드로 광장 수 미터 떨어진 곳에서 46세 에드윈이란 나이제리아 출신 ‘노숙인homeless man’이 추위속에서 죽은 것이 발견되었다. 그의 불행은 똑같은 극적인 환경하에서 로마에서 죽은 다른 많은 노숙인들과 흡사했다. 그는 모든이에게 무시되었고 물론 우리들에게도 버려졌다.
그를 위해 기도하자. 6세기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추위속에 한 거지의 죽음을 알았을 때, 하루종일 모든 미사들을 금지시켰다. 까닭인즉 그날은 ‘성금요일Good Friday’같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닮은 교황님의 연민의 마음이 그대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의 구조가 닮았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는 내용이고, 제1독서의 옥중서간은 바오로가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티모데오에게 보내는 편지이고 또 하나의 독서는 성 티토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저는 바오로의 말씀을 빌어 여러분에게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께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여러분들이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그대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띠고 파견될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축복 말씀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축복이 우리 하나하나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살게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나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해석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역부족입니다. 더불어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일꾼이, 전사가, 협력자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들을 보내달라 기도할뿐 아니라 나 자신부터 주님 수확할 밭의 일꾼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소유의 짐을 최소화하여 단순 간편한 본질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향한 신망애의 힘, 진선미의 힘으로 영적 무장을 하여 이리떼 세상에서 어진(마음이 너그럽고 착하며 슬기롭고 덕행이 높음) 양들로 사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평화와 치유의 일꾼과 전사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다음 대목이 우리의 사명을 일깨웁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어느 곳에 가든지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우리 모두 주님의 평화와 치유의 일꾼과 전사로 살아갈 때 저절로 저절로 영육의 건강에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런 삶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새삼 주님은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임을, 주님은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결정적 재앙이자 불행은 이런 주님을 잊을 때이겠습니다.
주님을 잊어버려 삶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를 잊어버리면 무질서와 더불어 안팎으로 무너져 괴물 아니면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주님께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주님을 떠나 잘못 미치면 세상것들에 중독되어 폐인이나 괴물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자살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을 떠났기에, 주님을 잊었기에, 주님 희망의 끈을 놓쳤기에 세상 악령들의 희생자들이 된 것입니다.
영적전쟁 치열한 이리떼 세상 현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우리 모두 이런 주님의 평화와 치유의 일꾼이자 전사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갈 때 영육의 건강에 참 행복한 삶이요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다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당신 은총과 평화와 자비의 축복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고 파견하십니다. 제 좋아하는 행복기도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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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격려하십니다.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을 앞서 둘씩 보내시며"(루카 10,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당신이 가시려는 곳으로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과 치유로 환대의 분위기를 형성하신 데가 아닌, 불모지로 가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그러니 제자인 자기들이 누군지 더더욱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그분이 오실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예수님은 제자들이 거기서 겪을 일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믿는 이들의 신앙과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금이야 옥이야 당신 품에만 끼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 성자를 파견하실 때의 성부 마음처럼, 예수님도 각별히 아끼시는 제자들과 사랑의 기회를 공유하시는 겁니다. 사랑에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공동 운명이 파견에서 파견으로 이어집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낯선 곳에 들어서는 제자들에게는 이렇다 할 자기 방어 수단이 없습니다. 정말로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지는 양의 처지인 셈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신뢰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가 먼저 평화를 내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평화는 참 신비스럽고 매력적입니다. 평화를 빌어 준 곳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평화가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평화를 인사한 제자에게 되돌아온다니 말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던 이에게는 그대로 전해지고, 거부하는 이에게는 그를 거쳐 다시 제자에게 되돌아오니, 결국 이 세상에 주님께서 주신 평화의 총량은 사라지거나 감소하지 않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용기를 북돋워줍니다.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신앙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니고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세속적 성공과는 반대의 길을 향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게다가 세속의 눈에서는 스승의 약함이 곧 제자의 수치일 수 있으니, 사형수로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이나, 연이어 투옥되고 순교하는 사도들이나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의혹과 부끄러움의 이유도 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나 신앙이 악세사리 정도인 이들 앞에서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하신 분의 길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은 자칫 사회부적응자나 웃음거리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요.
사도 바오로는 그런 인간적 한계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되레 더 단단해지라고 촉구합니다.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 성큼 더 나아가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라고 초대하지요.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
성령으로 받은 은사는 열정을 일깨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뜨겁게 합니다. 마음 안에 심어진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으려면, 사랑의 상태, 곧 관상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요. 복잡하고 험난한 세상 안에서도 기도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제자인 우리는 불이신 주님과 연결된, 불이 되어야 합니다.
낯선 이에게, 또 자신과 반목하는 이에게 평화를 건네는 힘은 주님의 불로 정화된 뜨거운 마음에서 우러납니다. 나약하고 냉소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건 평화가 아니라 외면이거나 무관심이지요. 평화는 선과 정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해와 가난과 모욕에도 흔들리지 않는 힘입니다. 평화의 군왕이신 예수님이 보여 주신 힘이고, 복음의 고난에 동참하는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어 세상 곳곳을 흐르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주님에게서 받은 은사를 불태우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복음의 고난에 동참해 뜨겁게 사랑하는, 평화의 전달자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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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일상의 삶이 성화되기 위해 성령을 모시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보호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성령? 언제? 어디서?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肉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닙니다.”(로마 8,9)
♣사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 하고 부르며 기도하고 위급할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느님!’하고 하느님을 부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8,15) 성령을 모셨다는 확신이 없으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를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화기의 송신기과 수신기가 있어도 전기가 통하지 않으면 통화가 불가능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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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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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 함은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직 목자이신 당신께만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돈주머니 대신 당신께 대한 ‘믿음의 주머니’를 차고 여행보따리 대신 ‘희망의 보따리’를 매고 자신의 발에 맞춘 신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발’을 신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복음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라” 함은 머뭇거리거나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복음 선포에만 열중하라는 말씀이요,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함은 더 좋은 집과 대우를 위해 찾아 나서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여기서도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곧 평화를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곧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 함은 빈부귀천 없이 어느 집에든지 평화를 빌어주되 자신의 평화가 아닌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루카복음에서는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15).
또한 부활의 첫 번째 선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도 평화입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루카 24,36). 또한 인사를 받으려하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인사를 나누라 하십니다.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은 먹어라” 함은 음식물에 대한 유다적 관습에 매여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방해 받지 말고 친교를 나누며, 동시에 이는 “차려주는”대로 먹으로라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곧 유대 율법에 따라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이 차려주는 대로 음식을 받아먹으라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일꾼으로서 삯을 받음이 정당함을 말해줍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을 전파하고 증거 하는 것이 소명임을 알라 하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파견의 본질과 당부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무엇이 해야 할 일인지’, 그리고 ‘무엇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인지’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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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주님!
이리 떼에 둘러싸인다 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허리에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주머니를 차게 하소서.
등에는 여행보따리가 아니라, 믿음의 보따리를 지게 하소서.
발에는 신발이 아니라, 희망을 등불로 삼고 당신께만 의탁하게 하소서!
길에서 인사하느라 서성거리지 않고, 오로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따름이 오로지 저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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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제자요 선교 활동의 협력자였던 티모테오 성인과 티토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몸소 뽑으신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오늘 복음과 바오로 사도의 선교 협력자들인 티모테오와 티토 성인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건설은 혼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에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저는 일반대학교를 졸업하고 늦은 나이에 신학교를 들어갔고, 늦은 나이(41세)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늦게 서품을 받다보니, 하나라도 좀 젊고 힘이 있을 때 하느님의 일을 더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혼자서 더 땀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품 년도가 한 해 두 해 지나가고, 사목체험도 더 해지면서 느끼게 된 것은 하느님의 일과 하느님의 나라 건설은 결코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자가 앞장서서 "나를 따라라."라는 목자의 소리를 듣고, 목자의 뒤를 따라가는 양떼들이지만, 따라오는 양떼들의 목소리도 들으면서, 그들과 함께하는 사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그대는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1,6.8)
예수님께서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나도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구원과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하느님의 일을 너와 함께 합시다! '함께 하자'고 나를 부르시는 주님 부르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응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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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 10, 2)
다가오는 봄이
성큼 느껴지는
따뜻한 날들의
요즈음이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대자연의
신비이다.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믿는다.
씨 뿌리는
시간도
추수의
때도 모두
하느님으로
부터 나온다.
선하신
하느님의
계획안에
우리가
살고있다.
수확도 일꾼도
모두
하느님에게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기도가
필요하다.
일꾼에게
필요한 것은
결단과
단순함이다.
소유욕이
아니다.
너무 많은
것들에
묶여있는
우리들 삶이다.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기도가
중요하다.
추수와
일꾼 앞에
하느님께서
계신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일꾼들은
수확하면서
더 깊은
하느님 사랑을
알게 되고
제자들은
길을 떠나면서
하느님밖에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로
마음의 눈을
돌릴 때이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과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일꾼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다.
일꾼은
그 행복에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일꾼과
하느님의
단순한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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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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