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습관(The habit of loving) / 그 여자(The woman) / 동굴을 지나서(Through the tunnel) / 즐거움(Pleasure) / 스탈린이 죽은 날(The day Stalin died) / 와인(Wine) / 그 남자(He) / 다른 여자(The other woman) / 낙원에 뜬 신의 눈(The eye of God in paradise) /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One off the short list) / 옥상 위의 여자(A woman on a roof) / 내가 마침내 심장을 잃은 사연(How I finally lost my heart) / 한 남자와 두 여자(A man and two women) / 방(A room) / 영국 대 영국(England versus England) / 남자와 남자 사이(Between Men) / 목격자(The witness) / 20년(20 years) / 19호실로 가다(To room nineteen)
==
사랑이 습관이 되었다는 표현이 조지의 마음속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그 말이 맞다.
그는 생각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자신의 맨살에 누군가의 맨살이 닿는 느낌, 젖가슴이 닿는 느낌에 본능적인 반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비가 지금껏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사실상 그녀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랑하고 작은 아가씨는 사라져버렸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가 한 번도 자세히 생각 해보지 않은 실패와 좌절 때문에 강하게 단련되어 잠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젊은 여자였다.
그녀의 검은 눈에 깃든 슬픔이 결코 무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매끈 한 머리카락이 이제 막 하얗게 세기 시작한 것이 보였다.
통통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뺨이 사실은 중년에 가까워지면서 말랑 말랑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토록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그는 경악했다.
이제는 진정으로 그녀를 알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그러면 그녀도 그를 사랑해줄 것 같았다
==
생일날 아침 보비가 아침식사 쟁반을 들고 그의 침대가 있는 서재로 들어왔다.
조지는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혹시 다른 여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주 엄숙해 보이는 군청색 정장을 입고, 머리도 남자처럼 자른 모습이었다.
검은 끈으로 매게 되어 있는 구두도 묵직했다.
얼굴로 흘러 내리는 머리카락은 뒤로 넘겨 핀으로 서투른 매듭처럼 고정해 두었다.
갑자기 중년 여자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여보." 조지가 말했다. "보비,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야?"
"난 이제 마흔 살이에요. 철이 들 때가 됐죠."
"하지만 난 당신의 평소 모습을 아주 좋아해.
그 사랑스러운 옷을 입은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한다고."
보비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아침식사 쟁반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아두고 무거운 신발로 쿵쿵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날 아침 그녀는 부엌에서 아주 커다란 케이크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작은 분홍색 초 마흔 개를 정성 들여 꽂았다.
하지만 파티에 초대된 사람은 그녀의 언니뿐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 오후 세 사람이 케이크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게 되었다. 조지는 보비의 언니인 로사, 볼품없고 두툼한 정장을 입은 그 여자와 자신이 사랑하는 보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우아함과 매력이 모두 무거운 트위드 정장 속으로 가라앉아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뒤로 잡 아당겨 묶고, 화장도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두 중년 여자가 음식과 쇼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실감에 온몸이 욱신거렸 다.
보기에도 끔찍한 로사가 예리한 눈빛으로 값비싼 아파트를 두리번거리다가 조지와 제 여동생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너도 이제 포기했구나, 보비."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흡족한 목소리였다.
보비는 반항적인 눈으로 조지를 흘깃 보았다.
"이제는 이런 허튼 짓을 할 시간이 없어요. 정말 시간이 없어요.
우리 모두 이제 늙어가고 있으니까요. 안 그래요?”
조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 여자를 보았다.
꼬치꼬치 캐묻는 듯한 냉정한 검은 눈과 날카로운 칼날 같은 코가 아주 똑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혀가 굳어버린 것 같았다. 온몸을 도는 피가 두근두근 박동했다.
심장이 점점 부풀어 올라 온몸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거대하고 부드럽게 자라난 고통 그 자체였다.
귓속에서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것 같아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피의 박동은 눈으로도 올라 왔지만, 그는 두 여자를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아버렸다.
==
하지만 대위는 추억에 빠져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아냐, 아냐, 그 일은 정말로 있었소. 여기서."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힘겹게 털어놓았다.
"난 평생 결혼하지 않았소."
숄츠 씨는 이제야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곧 소리쳤다.
"아가씨, 아가씨, 계산하겠네." 대화를 끝낼 때였다.
로사는 즉시 돌아서지 않고 뒤통수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앞치마를 똑바로 펴고, 한쪽 팔에 걸치고 있던 냅킨을 반대편 팔로 옮겨 예쁘게 걸쳤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미소 짓는 얼굴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일부러 보란 듯이 웃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계산하시겠어요?" 그녀가 숄츠 씨에게 물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일부러 영어를 사용했다.
대위는 화들짝 놀라서 몹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숄츠 씨는 즉시 자세를 바로잡고 영어로 말했다.
“그래, 계산하겠네.”
로사는 그가 내민 지폐를 받은 뒤 앞치마 아래의 작은 전대에서 거스름돈을 세어 꺼내주었다.
마지막 동전까지 탁자 위에 놓은 뒤 그녀는 두 사람 앞에 서서 두 사람을 향해 똑같이 웃는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그 어머니 같은 미소로 재미있다는 듯 두 사람을 정면으로 내려다보다가 그녀가 영어로 말했다.
"어쩌면 그 여자 분이 두 분 취향에 맞춰서 머리 색깔을 바꾼 게 아닐까요?"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통쾌하게 웃어댔다.
숄츠 씨는 태연히 패배를 받아들이고, 유감스럽지만 상대를 인정한다는 듯 빙긋 웃었다.
대위는 의자에 앉은 채 뻣뻣하게 굳어서 적의를 불태우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진정한 추억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로사는 그를 비웃었다.
그리고 옷자락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휙 돌아서서 테라스를 떠났다.
==
어머니는 아들을 세심하게 살폈다.
아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눈도 흐릿해 보였다.
어머니는 걱정스러웠지만 곧 속으로 생각했다.
괜히 호들갑을 떨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으려고. 이 애는 물고기처럼 수영을 잘하는데.
두 사람은 함께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엄마." 아들이 말했다.
"물속에서 2분… 아니 3분 동안 버틸 수 있어요. 최소한.”
갑자기 터져나온 말이었다.
"그래?" 어머니가 말했다.
"글쎄, 나라면 너무 무리하지 않을 것 같은데. 너 오늘은 수영 그만해야겠다."
어머니는 아들과 다툴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아들은 곧바로 어머니의 말에 수긍했다.
만에 가는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
진 동무는 스탈린-히틀러 조약 때 남편이 노동당원이 되자 남편과 헤어졌다.
그 뒤로는 줄곧 침실과 거실이 별도로 분리 되어 있지 않은 좁은 셋집에서 빵과 버터와 차만 먹으며 살았다.
침대 위에는 스탈린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네, 들었어요." 내가 말했다.
"무서운 일이에요." 진 동무가 흐느끼며 말했다.
“끔찍해요. 놈들이 스탈린을 죽인 거예요."
"놈들이 누군데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자본주의 첩자들이 죽인 거죠. 뻔하잖아요."
"스탈린은 일흔세 살이었어요."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는 법은 없어요."
"일흔세 살에는 그렇게 죽기도 해요.”
"우린 스탈린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서약해야 돼요."
"네, 그래야 할 것 같네요.” 내가 말했다.
==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피어슨 부인이 말했다.
“남자들은…어느 모로 보나 좋을 때보다 귀찮을 때가 더 많아요.
요즘은 여자들이 스스로 살아가야 해요.
애당초 남자들은 스스로 살아갈 줄 모르니까요."
"그런 것 같아요." 로즈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녀는 문간에서 머뭇거리며 혹시나 하는 희망을 안고 지미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지금이라도 지미가 한마디만 해주면 그에게 달려가 여기 머무를 텐데.
하지만 지미는 그 신랄하고 흐릿한 미소를 띤 채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요, 로즈."
피어슨 부인이 말했다.
"갈 거면 얼른 가요. 이러다 지하철을 놓치겠어요."
로즈는 부인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이제 질을 기를 수 있을 거야. 그게 중요해.
질이 자라서 어른이 될 때쯤이면 전쟁도 폭탄도 없는 세상이 될지 몰라.
그때는 사람들도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거야.’
==
크롤 박사는 다행히 이 그림과 헤어질 생각이 없는지, 빨간 비단으로 다시 싸서 수납장에 숨겼다. 그리고 서랍에서 그 그림을 찍은 사진을 꺼내 메리에게 주며 말했다.
"제 그림을 정말로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정말로 그림을 이해하시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니 행복한 기억을 일깨워주는 기념품으로 이걸 가져가시겠습니까?"
메리는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해미시와 함께 예의 바르게 고마운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바라보았다.
물론 사진은 원본인 그림과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파란색과 초록색의 섬세하고 다양한 색조가 모두 사라져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잔디, 나무, 식물, 이파리도 온데간데없었다.
남은 것은 크롤 박사가 손가락으로 두껍게 짓이기듯이 발라놓은 물감의 느낌뿐이었다.
그 속에 가지나 꽃처럼 보이는 형태가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검게 이글거리는 눈.
분노에 차서 벌을 내리는 신의 눈.
그것은 아이의 그림처럼 거칠게 스케치한 눈을 찍은 사진이었다.
구속복을 입고 있던 그 가엾은 아이가 팔을 자유롭게 놀릴 수 있게 되어서 신의 눈이나 크롤 박사의 눈을 그렸다면 바로 이런 모양이었을 것이라고 메리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 아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녀 옆에 예의 바르게 서 있는 해미시도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곳을 나가 버스가 달리는 대로로 나가는 순간이 바로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될 터였다.
두 사람은 크롤 박사에게 친절에 깊이 감사한다고 말하고는, 버스를 놓칠까 걱정스럽다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세 사람이 모두 관심을 가질 만한 의학 논문과 편지를 주고받기로 약속했다.
간단히 말해서, 영원한 우정을 약속한 셈이었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크롤 박사가 있는 그 커다란 건물에서 차가운 2월의 공기 속으로 나왔다.
곧 버스가 와서 두 사람을 태웠다.
두 사람은 평평하고 검은 벌판을 지나 시내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은 네댓 시간 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낮게 드리워진 회색 하늘 밑에 검고 차가운 땅과 폐허가 된 거리, 벌써 가장자리가 부드럽게 무너지기 시작한 폭탄 구덩이, 활기차게 일하는 인부들로 뒤덮여 반짝거리는 하얀 신축건물이 펼쳐져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어두운색의 두툼한 옷 뭉치처럼 웅크린 채 참을성 있게 줄을 서 있었다.
가느다란 눈발이 천천히, 거의 일직선으로 내려왔다.
마치 하늘이 통째로 천천히 내려앉고 있는 것 같았다.
메리 패리시가 그 사진을 꺼내 장갑 낀 차가운 손으로 잡았다.
성난 검은색 눈이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찢어버려." 해미시가 말했다.
"싫어.” 메리가 말했다.
"왜? 그런 괴물 같은 물건을 갖고 있어서 뭘 하게?"
"찢어버리는 건 옳지 않아."
메리가 사진을 다시 가방에 넣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 옳지 않단 말이지?"
해미시가 짜증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신랄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호텔로 가는 버스가 서는 정류장으로 나란히 걸어 갔다.
발이 단단한 땅을 밟을 때마다 날카롭게 바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반쯤 지어진 건물에서 인부들이 작게 고함치는 소리, 기계가 숨 쉬는 소리만 빼면, 사방이 절대적으로 적막했다.
정류장에 줄 선 사람들은 광장 맞은편에 줄 서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몸을 웅크리고 아무 말 없이 눈을 맞으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행군하는 발소리, 무겁고 검은 군화를 신고 행군하는 발소리의 기억이 땅속 깊은 곳에서 박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자, 그럼, 어디 보자, 최근에 가족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지난 크리스마스 때요. 가족을 만나기 싫어서가 아니라, 거기서는 공부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
다."
‘노조 회합과 텔레비전 소리와 돈커스터의 영화관들 속에서 한번 공부해봐요.
직접 해보시라고, 의사선생.
게다가 식구들이 마음을 상하지 않게 조심하는 데 가진 기운을 죄다 써야 하는 판인데.
실제로 나 때문에 식구들 마음이 상하니까.
이봐요, 의사선생, 나처럼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온 사람들이 계층을 뛰어넘을 때 고통받는 건 내가 아니라 식구들이에요.
나는 돈 덩어리거든.
게다가…당신이 논문을 하나 써봐요. 나도 읽고 싶으니까.·····
제목은 “노동계층이나 중하층 출신 장학금 학생의 존재가 식구들에게 항상 그들이 무지하고 문화도 모르는 시골뜨기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현상의 장기적인 효과"라고 하면 되겠네.
그거 논문 주제로 어때요, 의사선생?
이런, 나도 그런 논문을 하나 쓸 수 있겠는걸.’
==
"그 망할 놈의 계집 때문이야. 죽여버릴 거야."
그의 횡격막에서부터 작고 조용한 목소리가 솟아났다.
그는 부인을 향해 살기를 띤 눈을 떴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뻣뻣하게 굳어서 무뚝뚝 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할 생각은..."
"괜찮아요."
부인은 팔짱을 낀 채 가늘게 떨고 있는 그의 팔뚝을 빨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의 두 손목을 잡아 팔을 양쪽 옆구리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진정해요. 괜찮아요, 괜찮아."
그녀가 말했다.
그의 살이 거부감으로 딱딱하게 굳은 것을 느낀 부인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나지 않고 말했다.
"자, 봐요, 그렇게 흥분할 필요가 없어요, 그렇죠?
내 말은, 힘든 일도 의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에요.
다른 방법은 없어요.”
그녀는 걱정스러우면서도 확신이 있는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며 기다렸다.
얼마 뒤 찰리가 말했다.
"네, 맞는 말씀인 것 같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빙긋 웃으며 객실로 돌아갔다.
곧 찰리도 그 뒤를 따랐다.
==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뒤 나는 꿈속의 시장으로 들어갔다.
늙은 도공은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물레를 멈췄다.
작은 소년은 도공의 손을 열심히 바라보던 눈을 들어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나는 메리가 만든 동물을 내밀었다.
노인은 그것을 받아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것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물을 뿌렸다.
그리고 지저분한 흙바닥을 향해 손을 내렸다.
짐승이 훌쩍 뛰어내려 실룩 실룩 사라졌다.
집들을 지나 정착지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깔쭉깔쭉하게 튀어나온 작은 갈색 바위 앞에서 녀석은 앞발을 들고, 메리가 만들어준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머리 위에서는 독수리인지 매인지 알 수 없는 새가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메리의 피조물을 찾아내지 못하고 계속 날아갔다.
바짝 마른 벌판을 지나 산을 향해 광대한 창공으로 사라졌다.
물레가 삐걱걱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이 다시 일하고 있었다.
작은 소년은 웅크리고 앉아 그것을 지켜보았고, 도공이 오른 손으로 뿌린 물이 물레 위의 그릇과 아이의 얼굴에 떨어지며 아름답게 휘어져 반짝이는 빛의 곡선을 만들어냈다.
==
"사장님한테는 장성한 자녀들이 있어. 손주들도 있어, 마니.”
존스 씨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 순간 마니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난 사장님과 결혼할 거예요. 결혼할 거라고요. 그러니까!"
존스 씨가 팔을 내렸다.
화가 나서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이, 천천히 만족스럽고 고마운 표정으로 바뀌며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브룩 씨는 그녀가 이 말을 처음으로 했음을 깨달았다.
자기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가 이 말을 하는 일이 결코 없었으리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존스 씨를 보았다.
그가 미우면서도, 부럽고 감탄하는 마음도 조금 있었다.
혼란스러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랬다.
'사장님은 사진을 갖고 있더라도, 조심스럽게 숨겨두겠지.’
==
그날 오후 늦게 미스 아이브스가 그에게 수표를 가져다주었다.
보너스 10파운드와 함께 그는 해고되었다.
30년 동안 일했는데 10파운드라니! 머리가 멍해서 정신이 없었다.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 알고 있었어요?"
그는 미스 아이브스가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에 존스 씨가 우리에게 알렸어요."
"존스 씨는 나보다도 나이가 많아요······.”
"그 애한테 딱 맞죠." 미스 아이브스가 쏘아 붙였다.
“그런 멍청한 여자애한테는 딱이에요.
그 애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결혼밖에 없잖아요. 그런 애들이 생각하는 건 결혼뿐이죠.
그 애도 이제 남자에 대해 알게 될 거예요."
미스 아이브스는 브룩 씨에게 모자를 건네주고는, 그를 문 쪽으로 부드럽게 밀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제 가보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매정하기만 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존스 씨는 당신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하시니까. 직접 그렇게 말했어요.
이제 몸 좀 돌보면서 살아요. 그 나이에 술을 그렇게 마시면 안 돼요."
그러고 나서 미스 아이브스는 문을 닫아버렸다.
브룩 씨는 복도에 혼자 남은 것을 확인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히스테리 환자처럼 웃어댔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한 손에는 모자를, 다른 손에는 만년필을 들고서.
그는 거리를 걷다가 모퉁이에서 되돌아와 계단 발치에서 기다렸다.
오랫동안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
타자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 같았다.
“뭐! 브룩 영감이 그만뒀다고? 가기 전에 인사도 미처 못 했네. 아쉬워라.”
==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도.
남자는 추레한 거리에 계속 서 있었다.
씁쓸함이 목구멍을 가득 채우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20년이 공허한 세월이 될 것 같았다.
그날 그녀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인생에는 그림자가 생겼다.
그는 사랑도 기쁨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월을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이 빗속에 서서 날 위해 슬퍼하는 일은 절대 없겠지.
그녀는 그동안 나를 생각한 적도 없을 거야.
그녀가 언제 나한테 신경이라도 쓴 적이 있었나…없어…….
난 이렇게 바보처럼 서서 그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선명하고 차가운 분노가 전기처럼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방금 결단을 내린 사람답게 힘찬 발걸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향해 걸어갔다.
==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약 네 시간이었다.
그녀는 즐겁게, 어둡게, 달콤하게 그 시간을 보내며 아주아주 부드럽게 강변을 향해 미끄러졌다.
그러다 딱히 의식을 차리지 않은 상태로 의자에서 일어나 얄팍한 카펫을 문으로 밀고, 창문이 단단히 닫혔는지 확인하고, 벽난로 미터기에 2실링을 넣은 뒤 가스 밸브를 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이 방의 딱딱한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서는 퀴퀴한 냄새, 땀과 섹스의 냄새가 났다.
초록색 새틴 이불 위에 똑바로 누워 있다 보니 다리가 싸늘해졌다.
그녀는 일어나서 서랍장 맨 아래 칸에서 개켜져 있는 담요를 찾아내 꼼꼼히 다리를 덮었다.
그렇게 누워서 가스가 작게 쉭쉭거리며 방 안으로, 그녀의 허파 안으로, 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어두운 강물로 떠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