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6,1-10
그 무렵
1 바오로는 데르베를 거쳐 리스트라에 당도하였다.
그곳에 티모테오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신자가 된 유다 여자와 그리스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2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3 바오로는 티모테오와 동행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에 사는 유다인들을 생각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을 그들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 바오로 일행은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이 정한 규정들을 신자들에게 전해 주며 지키게 하였다.
5 그리하여 그곳 교회들은 믿음이 굳건해지고 신자들의 수도 나날이 늘어 갔다.
6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은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을 가로질러 갔다.
7 그리고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로 가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8 그리하여 미시아를 지나 트로아스로 내려갔다.
9 그런데 어느 날 밤 바오로가 환시를 보았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오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10 바오로가 그 환시를 보고 난 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방도를 찾았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5,18-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20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21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 복음은 ‘제자들과 세상의 관계’에서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게 될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신원’과 ‘사명’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로부터 오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결국 세상과 제자들의 관계에서 제자들의 사명 역시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이유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15,19)이라고 밝혀줍니다.
이 말씀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한 계약 체결의 약속 내용, 곧 “너희를 나의 소유가 되게 하리라. ...거룩한 민족으로 뽑았다.”(탈출 19,5-6)라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그러니 이는 ‘이미’ 우리 안에 ‘성취된 계약’, ‘성취된 말씀’입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주님께 ‘속한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주님께 ‘선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2세기의 무명 교부의 작품인 <디오그네투스에게>서 말해주듯이, '세상의 영혼'으로서의 삶입니다.
곧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당하는 이유를 “내 이름 때문”(15, 21), 곧 '내 제자라 해서'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들은(세상은) 나를 보내신 분을 모른다.'(15,2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비록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해도’, 혹은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는다 해도’, 혹은 ‘세상이 아버지를 모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제자들도 똑같이 세상을 그렇게 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그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삼기 위함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은 것도 그들의 구원만이 아니라 만민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삼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세상이 아무리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오직 당신을 보내신 분인 아버지께만 믿음을 두셨던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믿음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께 속해 있다면, 미움과 박해는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 특권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필리피 1,29)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명과 함께 고난의 특권도 부여받았습니다.
한스 큉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고난을 없애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사랑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 나의 주 나의 전부 나의 임자시여!
나를 독차지하신 나의 지배자 나의 정복자시여,
바로 지금 저를 점령하소서.
저는 본시 당신 것이옵니다.
저는 당신의 것, 당신의 소유이오니, 당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이옵니다.
당신의 택함, 당신의 보냄을 따라 감히 당신의 뜻을 따르겠사오니, 제가 공동체와 형제들 안에 머물게 하소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혹 내 형제가 나를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당신 말씀을 사는 말씀의 봉사자가 되어 주인님이신 당신을 찬미하며 감사하게 하소서.
오 감사하나이다.
나의 주, 나의 임자시여!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요한 15,19)
주님!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의 사랑을 구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속하니, 당신의 사랑에 목마르게 하소서!
고난을 겪는 특권을 받았으니,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나 뵙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과 배척에서도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 뽑히고, 세상에서도 뽑히는>
주님에게 뽑히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이고 성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로 뽑으신다고 다 좋아할 것 같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도 주님께 뽑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주님께 뽑히는 것을 다 좋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 말씀에 따르면, 주님께 뽑히는 것은 세상에서 뽑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요한 15,19ㄴ)
이 경우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내가 너를 이 세상에서 뽑아버렸다!
이 세상에서 완전 퇴출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뽑혀도 좋습니까?
잡초라도 자기가 있던 밭에서 뽑히기 싫어합니다.
무릇 모든 생명은 살기 위해 뿌리를 단단히 내리지 않습니까?
또 다른 이유에서도 뽑히기 싫어합니다.
주님도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이 세상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좋게 이해하면 그야말로 주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합니다.
나쁘게 얘기하면 신자 대다수가 양다리 걸치기를 합니다.
이럴 경우 주님께 뽑히는 것은 OK, 세상에서 뽑히는 것은 NO입니다.
주님께 뽑히기 위해 세상에서 뽑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입장입니까?
이것을 진지하게 자문하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거나 선에 대치되는 꿈과 희망은 결코 현실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에 걸맞은 노력과 정성이 함께 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대한 꿈을 지니되 선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크게 이루었다고 해도 선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면 결코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모 그룹 재벌 회장이 술집에서 폭행당한 아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보복하였다는 얘기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구속되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선에 대치되는 잘못된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빌미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을 폭행한 학부모도 있습니다.
폭행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자녀가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까 걱정입니다.
오늘의 세상에는 ‘선생과 학생만 있고, 스승과 제자는 없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줄을 세우며 그것을 즐깁니다.
옳고 그렇지 않고는 상관없이, 자기 입맛에 따라 좋고 싫은 것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너만 고고하냐? 잘났냐? 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증거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움을 당하는 것은 악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사악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조직 폭력배와 공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누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구애 없이 선, 옳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뽑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삶이 우리 믿는 이의 삶이라는 일깨움을 되새기는 오늘이길 바랍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되갚아 주시길 다짐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해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의 힘을 따르다보면>
“지시를 거부하겠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신들이 흐르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이들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지시는 무엇일까요?
경쟁하여 이겨야 하고, 좋은 대학과 직장에 취직해야 하며, 넓은 아파트에 살고 높은 권력을 위해 노력하는 등 정신없이 사는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뒤돌아볼 시간을 가지라는 것은 곧 세상이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이 당신을 미워하였듯이 당신의 제자들 또한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박해했던 그 세상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을까요?
세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여전히 자신을 거스르는 이들을 미워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가만히 있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은 그 반대입니다.
움직이고 새로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힘을 따르다보면 이렇듯 세상에게 박해를 당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잘 적응하고 있다면 한번쯤은 자신을 뒤돌아 볼 일입니다.
세상의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칼을 주러 오셨습니다.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반드시 저항세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 저항에서 오는 고통을 받기 싫어서 그냥 주저앉아서 그 물살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살아서 물살을 거슬러야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숨이 남아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열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정만 있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열정을 보시고 올바로 잡아주셨습니다.
물이 흐르는 곳의 끝은 항상 되돌아 올 수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기다린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폭포를 지나면 바다로 나아가 미아가 되어버려 더 이상 땅으로 되돌아 올 수 없음도 생각합시다.
이 세상이 종국에 가게 될 곳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됩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의 악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교회에 대한 교부들의 정의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세상의 박해와 하느님의 위로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는 공동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의 박해와 미움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이며, 더 나아가서 숙명이요 운명인 듯합니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개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합니다.
세상은 사실 하느님 창조의 손길이 담긴 걸작품이요, 우리 모든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 공동체로서 거룩한 대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의 세상입니다.
죄와 악으로 기운 세상, 기본적인 상식이나 식별력을 상실한 세상, 하느님 아버지를 등지고, 그분의 뜻과 전혀 별개의 노선을 추구하는 악에 물든 세상을 일컫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위로와 축복이 충만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누리는 기쁨과 은총도 클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받게 될 세상으로부터의 박해와 고통도 반드시 따를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바오로 사도 같은 경우 주님으로 인해 받는 매질과 돌팔매질, 배척과 모욕, 투옥과 죽음을 더 없는 기쁨이요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마다 더 크게 찬양하고 더 큰 목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어지는 당면한 일상적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과 시련을 당연시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무시당하고 오해받을지라도, 그러려니 하고 너그럽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 때문에 고통과 박해 앞에 설 때마다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친절한 팁을 건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세상의 악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때로 그 사악함이 너무나 지나쳐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그저 착한 사람 흉내만 내서도 안되겠습니다.
악의 세력들의 농간 앞에 웃고 있어서만도 안되겠습니다.
때로는 단호함과 결연함도 필요합니다.
뱀처럼 슬기로움도 요청됩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에 앞서서 필요한 덕행! 곧 인내의 덕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라는 말씀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은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니까 예수님의 신앙인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움’은 적대감과 박해를 뜻합니다.
‘미워하거든’은, 뜻으로는 ‘미워하는 것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적대감과 박해는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부터 시작되어서 계속 반복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마도 세상 끝 날까지...
‘너희보다 먼저’ 라는 말은 ‘박해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박해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알아라.” 라는 말씀은 “알고 있어라.”, 또는 “깨달아라.” 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종교박해는 예수님의 신앙인이기 때문에 겪는 일이다. 그러니 인내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2)
세상 사람들은 왜 예수님과 신앙인들에게 적대감과 반감을 품을까?
단순하게 말하면, 자기들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편이 다른’ 사람들을 낯설어 하는 것은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닌데,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무조건 거부감과 혐오감부터 가지는 것은 잘못이고 죄입니다.
“우리 편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적이다.”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적대감과 반감도 죄가 되지만, 그 ‘편 가르기’가 더 큰 죄이고, 종교박해는 ‘대단히 큰 죄’입니다.
싫으면 그만이지, 왜 예수님과 신앙인들을 박해할까?
자기들에게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자기들이 살아온 생활 방식, 기존 질서와 체제, 가치관 같은 것들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놓는 위험한 사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자기들의 영역에서 제거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종교박해입니다.
유대교의 박해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박해는 황제의 통치 질서를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고, 조선시대 때의 박해는 조선의 사회 질서와 전통을 파괴하는 위험한 사이비 종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3)
박해자들이 ‘편 가르기’를 한다고 해도, 신앙인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박해자들도 그 ‘모든 사람’ 속에 포함되고, 구원의 대상이며, 선교 대상입니다.
그들도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마태 10,16), 이 말씀에는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는 것은 ‘양들’도 살고 ‘이리 떼’도 사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에 박해받고 죽는 것이 무서워서 ‘양들’이 ‘이리 떼의 악한 힘’에 굴복하고, ‘이리’로 변해버린다면, 그것은 ‘양들’도, ‘이리 떼’도 함께 멸망하는 일입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에 속하지는 않지만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고,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또 세상 사람들을 신앙인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미움 받고, 박해 받는 것은 분명히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긴 한데,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차지하려면 참고 견뎌야 할 십자가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 5,44-45)
이 말씀에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여라.”입니다.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자들도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자신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부정하지만...
따라서 박해자들도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신앙인들의 형제이고 이웃이기 때문에, 그들이 멸망하기를 바라면서 저주하는 기도를 하면 안 되고, 그들을 상대로 전쟁을 해도 안 됩니다.
박해자들은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해도, 신앙인들은 그들에게 사랑과 평화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마태 7,12)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 6,38)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 우리의 존재 이유>
“온 누리 반기어 주님께 소리쳐라.
기쁨으로 주님 섬겨 드려라.
춤추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
(시편 100,1-2)
오늘 복음은 짧지만 초대교회같은 박해 상황이 아니기에 이해하기도 어렵고 좀 불편합니다.
현재 우리 교회가 제대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성찰하게 합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은 우리의 신원이자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과연 교회가 세상과 동화(同化)되어 점차 세상과 하나되어 부패(腐敗)되어 가는 경향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교회가 세상에 속화(俗化)되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역할을 상실한다면 존재 이유의 상실일 것입니다.
세속화로 무디어져 교회 감각을 많이 상실한 현대 교회가 아닌가 생각될 때도 많습니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또 세상 한복판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속에서 참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분들의 고백을 통해, 말그대로 총체적 위기의 현실처럼 느껴집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참 막막하게 생각됩니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습니다.
긍정적으로, 낙관적으로 보려 해도, 부정적 비관적이 됩니다.
각자도생의 사회, 국내의 정치현실, 사회현실, 교육현실, 군대현실, 모두가 소리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같습니다. 다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일어나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교회는 과연 책임이 없나 묻게 됩니다.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학자의 현실 진단에 공감했습니다.
“위기의 본질은 가치와 지향, 비전과 신뢰의 상실에 있다.
그러면 남는 것은 눈먼 탐욕뿐이다.”
다음 독일의 문호, 괴테의 말도 잊지 못합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무한한 욕망따라, 한계없는 삶이 지옥이라는 것이며 오늘의 현실에 대한 진단같기도 합니다.
자주 묻는 물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교회가 과연 예언자적 사명에 충실함은 물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는지 묻게 됩니다.
세상과 사이좋게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지 묻게 됩니다.
참으로 제대로 된 신자 정치가들이요 정당이라면 교회의 가르침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대로 된 에언자적 교회라면 세상과의 적당한 불편은 필수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박해도 받고 때로 순교자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사실 세상과 하느님의 적대적인 대립은 구원 역사의 근본적인 면을 이룹니다.
“세상이 너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배경을 이루는 박해시대에는 세상의 미움의 대상이 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는데 현재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자기 사람으로 사랑한다 말씀하시는데, 과연 하느님께 속한 우리 삶인지, 또는 세상에 속한 우리 삶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정작 무서운 것은 외부의 박해하는 적이 아니라, 내부의 배신과 변절, 분열의 적임을 역사를 통해 배우고 현재에도 목격하곤 합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따라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내적일치의 공동체가 우선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에, 하느님께 속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세상의 사랑을 받는다면 뭔가 문제가 있음에 분명합니다.
정말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의 삶이라면, 세상을 떠난 삶이 아니라 세상 속의 삶이라면, 때로 세상과의 불화와 불편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현상일 것입니다.
정말 영향력있는 정치가들이 교회 지도자들을 찾았을 때 용기있게 쓴소리를 낼 수 있는 분들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지요.
예전 김수환 추기경은 달랐습니다.
명실공히 시대의 어른이었고 추기경의 발언은 큰 반향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당시 시국이 어려울 때는 추기경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요즘 교회의 눈치를 보고 교회를 어려워하는 정치가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좌파나 우파가 아닌 진정 용기있고 정의로우며 평화를 사랑하는 예수님파 참된 교회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대로 세상과 불편해야하고 불편할 수뿐이 없는 우리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신원이 드러납니다.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의 존재로 예수님 친히 뽑아냈기 때문에 세상이 제자들을 불편해하고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느님의 창조한 본연의 좋은 세상에서 아니라 악으로 날로 부패해져가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정말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과 운명공동체일 수 뿐이 없겠습니다.
주인이자 스승인 예수님따라 살다보면 예수님이 겪었던 박해와 고통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요, 이는 바오로 사도는 물론 초대교회 지도자들이나 무수한 순교자들이 그 좋은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의 행적을 보면 그 고난의 파란만장한 삶중에도 참 자유로워 보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대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진리이신 예수님께 속한 그 자유로움일 것이며 박해를 받거나 순교한 분들 역시 예수님께 속했기에 참으로 자유로웠습니다.
이들 바오로 일행의 행로를 보면 성령의 인도에, 예수님의 영에 따른, 또 주님의 환시에 따른 삶이 바로 자유로운 삶의 비결이었음을, 또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의 선교가 자유로운 하느님의 섭리이자 주님의 뜻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이 아닌 주님께 속한 자로서 우리 역시 성령께 귀기울이고 성령에 따라 살 때 참으로 자유로운 삶임을 봅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을 찾아야 할 절박한 시절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님을 보내신 분, 하느님을 알지 못한 무지에서 기인한 박해였음을 봅니다.
역시 무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았더라면 이런 박해도 없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정말 열린 눈으로보면 예수님의 삶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이신데 무지에 눈이 가려 예수님도 하느님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음 한 마디로 정의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 말씀을 믿어야 무지의 어둠에서, 미궁(迷宮)에서 벗어나 흔들림없이 예수님의 길을 통해 진리이자 생명이신 아버지께 이를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되어 진리와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문득 개신교 칼바르트 신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제가 잊지 않고 명심하는 말마디입니다.
“성서를 읽듯이 신문을 읽고, 신문을 보듯이 성서를 본다.”
성서를 읽는 마음으로 깨어 신문을 읽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매일 미사라는 거울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며 미사를 봉헌하는 마음이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이 아닌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합니다.
“주님은 하느님, 너희는 알라,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 백성이어라, 기르시는 그 양 떼이어라.”
(시편 100,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화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기도할 수 있으며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예전에 수영을 배우려면 ‘직접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론으로 수영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물속으로 들어가서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운전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필기시험을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기시험입니다.
직접 차를 몰고 운전을 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장롱면허’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면허증은 있지만 운전을 해 보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운전해 보지 않으면 면허증이 있어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성지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메주고리예에서는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함께하였습니다.
파티마에서는 묵주기도와 행렬을 함께 하였습니다.
루르드에서도 성체강복과 묵주기도 행렬을 함께 하였습니다.
몬세랏에서는 성무일도를 함께 했습니다.
예전에는 성지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적었습니다.
일정이 바쁘기도 했고, 숙소가 성지에서 멀기도 했고, 미처 모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성지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함께 하면서 성지순례가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화중지병(畵中之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림의 떡은 보기는 좋지만, 그 맛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림의 떡은 보기는 좋지만, 결코 먹을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말만 앞서고 행동이 없다면 참다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신앙생활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말은 하지만 그 말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저 사람들의 행동은 따라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은 자기들도 하느님께로 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로 가는 것을 가로막는다.”
성모님의 메시지 중에도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많은 주교와 사제들이 하느님과 멀어지고 있다.
그들이 신자들의 영혼이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고 있다.
그러니 주교와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
성지순례를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제게는 ‘죽비’처럼 따갑게 다가왔습니다.
성지순례의 기회가 있어서 몇 번 더 왔지만, 성지순례를 준비하는 마음은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습니다.
성지순례의 마음가짐은 설명하지만, 정작 저 자신은 여행객에서 순례자로, 순례자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려는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자신은 성화되지 않았으면서 남을 성화시키려고 하는 분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분들을 볼 때도 있습니다.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곧 지치게 됩니다.
힘이 빠지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신앙이 식어버립니다.
즐거웠던 일들도 시들해지고, 성당에 나오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재미가 없어집니다.
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화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기도할 수 있으며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성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 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원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저 고철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원이 연결되어야만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냉장고도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연결될 때, 주님 곁에 머무를 때 성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화 된 신앙인은 박해받을 수 있고, 고독할 수 있으며, 십자가를 지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를 살리는 길이고, 그 길이 영광과 부활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여러분은 주님께 속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종종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또 글을 씁니다.
백색 소음이 더 집중된다고 해서 카페를 찾기 시작했는데 정말로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늘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며칠 전에도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월요일이라 카페가 열리는 10시에 맞춰 갔습니다.
인기있는 카페라서 그런지 벌써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래도 비어 있는 자리를 발견해서 커피와 빵을 주문했습니다.
오래 있을 생각으로 커피도 제일 큰 것으로 주문했지요.
그러나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여학생 때문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1) 떠들어서. 2) 난동을 부려서. 3) 너무 예뻐서? 4) 눈길을 두기 힘든 복장이라서?
사실 바로 옆에 앉아 있었지만, 이 여학생의 대화는 그렇게 시끄럽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말 속에 자주 등장하는 ‘욕’ 때문이었습니다.
욕을 얼마나 찰지게 하는지 계속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이어폰이라도 있었다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제 귀는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아마 평소에 이런 욕을 말하지 않고 또 듣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신경이 너무 쓰여서 결국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학생들의 찰진 욕을 듣지 않으니 이제 살 것만 같았습니다.
욕이 익숙한 여학생에게는 서로를 향한 친근함의 표시일지 모르겠지만, 간접적으로 듣고 있던 저에게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상처를 줘야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다른 이에게 이렇게 상처를 줄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이 박해하고 배척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세상의 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 안에서 풍요로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욕심과 이기심이 넘쳐납니다.
이런 세상의 틀을 따르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로부터 박해와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 주님께 속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께 속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사랑에 집중합니다.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게 됩니다.
자기가 사랑받지 못함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자기의 세속적 이익이라면 악과 함께 하는 것도 꺼리지 않지만, 주님께 속한 사람은 악을 철저하게 미워하고 선을 행하려고 합니다.
더 높아지려는 욕심보다는 다른 이를 더 높이려는 겸손으로 무장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주님께 속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시와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늘 우리 편이 되셔서 구원의 영광을 주십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