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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0,25-26.34-35.44-48
25 베드로가 들어서자 코르넬리우스는 그에게 마주 나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26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일으키며,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44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45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46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47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48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다.
제2독서
▥ 요한 1서의 말씀 4,7-10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부활 6주일입니다.
그리고 ‘생명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모든 선물의 기초가 되는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선물을 받습니다.
곧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진 아버지의 사랑’을 선물로 받습니다.
제1독서는 그 선물이 ‘성령을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베풀어지는 선물임을 보여줍니다(사도 10,44-46).
제2독서에서는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1요한 4,10)을 말하며,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1요한 4,7)임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다락방에서의 유언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장면입니다.
그것은 먼저 당신의 놀라운 사랑의 선포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
참으로 놀라운 사랑의 선포입니다.
이는 첫째는 우리가 이미 사랑받았다는 선포요, 둘째는 그 사랑의 원천이 아버지의 사랑임을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사랑을 받아먹은 존재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호의와 자애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미 받은 사랑인,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 하나 되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요한 15,11 참조)이라고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계명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12)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되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지 말고,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본보기로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성부에 대한 지고의 사랑의 표현이면서(요한 14,30), 동시에 당신의 친구로 삼으신 이들에 대한 사랑의 절정(요한 13,1.13)이기도 합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동시에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 그것은 친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주고 흘러들게 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 제자들이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바탕이며 규범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요한 15,13-14)
그런데 왜 ‘친구를 위한 사랑’이 원수나 죄인을 위한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그것은 우리가 적이 아니라 서로 친구가 되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곧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이를 그레고리오 교종은 이렇게 해설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때,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도 우리의 친구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는 말씀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불러 뽑으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
~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요한 15,15-16)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삼으십니다.
당신께서 목숨까지 내어주어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주며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이요,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얻어주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진 아버지의 사랑이요, 선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권능을 입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도 ‘친구가 되어주라’ 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주어 ‘친구가 되라’ 하십니다.
그래서 단지 우리를 친구로 뽑은 것만이 아니라, '뽑아 세웠습니다.'라고 하십니다.
'세웠다'라는 원어의 뜻은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방도까지 보장하면서 어떠한 책임을 지워 내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사랑을 실천하고 선포할 책임을 맡겨 세워놓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5,16).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1)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숨결이 흐릅니다.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사랑입니다.
제 안에 굴을 파고들어 와 빈 무덤으로 모습을 숨긴 그지없이 충만한 사랑입니다.
결코 빼앗길 수도 빼앗겨지지도 않는 기쁨입니다.
주님!
당신의 기쁨의 숨결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위에서 오는 서로 사랑>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하느님에 대하여 또 사랑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선언이랄까 말을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4,8)
그런데 여기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이라고 요한이 얘기하는데, 제 생각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존재는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다만 그 사랑이 매우 작거나 크거나 차이가 있고, 사랑의 수준이 낮거나 높거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가족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나라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민족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종교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을 사랑할 수 없어 동물이나 사랑하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이것보다는 수준이 높아 휴머니즘적인 인류 사랑을 추구하지만 아직 하느님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서로 사랑’이고, 그래서 저는 오늘 나눔의 주제를 이렇게 잡았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서로 사랑’
풀어서 얘기하면 위에서 오는 사랑을 받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수직적 사랑과 수평적 사랑이 잘 조화를 이루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곧 위로부터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야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권고를 온전히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사도행전의 얘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사도 34ㄴ-35.44)
어떤 차별도 하지 않고, 어떤 배제도 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렇게 벽을 허물 때 성령께서 임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성령을 사랑의 성령이라고 하고, “오소서 성령이여” 라고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차별도 배제도 없는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하려면 위에서 오는 성령의 사랑 없이는 할 수가 없는데, 위에서 오는 성령을 받기 위해선 우리가 열어야 합니다.
성령의 오심과 우리의 엶이 상호작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냄비의 뚜껑을 열지 않고 국을 받으려고 하거나 창의 커튼을 열지 않고 햇빛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되듯,
그리고 물동이도 없이 내리는 비를 받으려 해선 안 되듯, 우리를 여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주머니를 여는 것보다 나를 여는 것임을 다시 한번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에는 수고로움이 없다>
오래전 일입니다.
노인 요양원에 앞을 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는데 앞을 못 보시니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계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리가 없으셔서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할아버지께서 그 방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 방은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외부 출입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반신이 없는 할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통해 혼자서 휠체어를 굴리기 힘들어하는 불편을 이겨내게 되었고, 앞을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적당한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를 위한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일생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말 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예수님에게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니 얻어야 합니다.
독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외아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은 어떤 모습일까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주시며 끝까지 사랑을 보여주셨고, 당신의 친구로 사랑하셨습니다.
마침내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모두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삶은 주님을 닮은 사랑으로 수고로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만일 수고를 느끼고 혹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다면 아직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으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곤란에 처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사랑은 희생을 전제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이 있는 곳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작은 배려와 희생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말로나 혀로 사랑하지 않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함으로써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 위해 꼭 필요한 것 하나는?>
사람이 우울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관계’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관계는 왜 안 될까요?
나의 교만을 누군가가 꺾어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교만이 있으면 관계에 있어서는 무능력자가 되고 그 때문에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57세 아빠의 머리 꼭대기에 앉은 초4 아들’ 편에서 아이는 “난 왜 이렇게 나쁘게 태어났을까? 난 왜 태어나서 고통 받을까?”라는 생각을 글로 썼습니다.
자기의 교만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하는데도 엄마는 아이를 믿어주고 공감해주려고만 합니다.
아버지는 집에서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아이를 훈육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방송국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호전됩니다.
엄마는 아이를 키울 때 아빠 없이 자기 힘만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빠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아빠도 또 누군가에게 의존합니다.
아이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이렇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가 실천 됩니다.
가지가 가지인 줄 알려면 반드시 어떻게 해서든 이 아이, 이 사람을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때문에 포도나무 비유에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신께 붙어있는 방법이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성모 꽃마을 박창환 가밀로 신부의 『하늘 아래 첫 동네: 말기 암 환자 호스피스 사목일기』에서 ‘정을 떼려고’라는 글의 내용입니다.
넉 달 전 초등 5학년 아들, 3학년 딸을 둔 9세 아빠가 간암 치료 불가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무료 호스피스 시설인 성모 꽃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끝까지 남편 노릇, 아빠 노릇 해주지 못하고 가는 것이 제일 가슴이 아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업 실패로 자살 시도까지 했으나 아이들 때문에 다시 살아보기로 하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술 때문에 간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환자의 여동생으로부터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빠가 100만 원을 주며 착한 일 한 번 안 해 봐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고 맡겼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시누이에게 그 돈을 준 것을 서운해 했지만, 자신에게 주었다면 분명 자식을 위해 쓸 수밖에 없었음을 알고 그렇게 한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남편은 자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며 하느님께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맡긴 것이었습니다.
환자는 이것으로 무언가 큰 숙제를 끝냈다고 느끼고 편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사랑은 능력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려고 시도해 본 사람은 자기 능력만으로는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겸손하게 자기가 나무가 아니라 ‘가지’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을 사명으로 삼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 ‘더 보이’(2019)는 슈퍼맨의 또 다른 버전입니다.
자녀가 없었던 한 부부는 우주에서 떨어진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웁니다.
아이는 자신이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알려줄 수 없었습니다.
우주에서 떨어진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지구를 파괴하는 자가 됩니다.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짜 ‘슈퍼맨’은 자기 아버지가 이 지구를 지키라는 사명으로 자기를 지구에 보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준 힘과 지식을 배웁니다.
그렇게 지구인들에게 사랑 받는 존재가 됩니다.
구약의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 시키라는 하느님의 명령에서 도망칩니다.
그 결과 큰 물고기 배 속에 갇히고 맙니다.
빛에서 도망치면 어둠 뿐입니다.
사랑의 계명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저절로 지옥으로 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인 줄 모르고 나무인 줄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신께 붙어있게 하시기 위해 서로 사랑하라는 단 하나의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붙어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각자와 친구 맺기를 신청하시는 예수님>
저희 집 근처에 저희 공동체와 마치 한 가족처럼 지내는 아이들의 집이 있습니다.
피정 센터 큰 행사 때도 초대하고, 여름 겨울 캠프 때는 아이들이 저희 집에 와서 마음껏 뛰고 즐기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저희 할아버지들은 그저 마음이 흐뭇할 뿐입니다.
한번은 거룩한 부활 성야 미사 때였습니다.
막내가 꽤 만만치 않았는데, 그 긴 전례 동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리저리 다니면서 소음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미사를 주례하는 저는 하나도 괴롭거나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이 존재 자체로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아이들이 저희와 함께 있다는 그 자체로 행복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도 똑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이리저리 좌충우돌하고,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길을 가고, 그분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더라도, 하느님께는 살아있는 우리 존재 자체로 기쁘고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아무리 큰 허물과 상처투성이어도, 하느님께서는 그저 넉넉한 미소와 너그러운 가슴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우리를 당신 품에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살아있는 우리 존재 자체가 하느님께는 기쁨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 친구 맺기를 신청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는 그저 그런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친구 중의 친구, 진정한 친구, 절친을 의미합니다.
절친의 의미에 대해서 과거 인디언들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
진정한 친구 관계는 절대로 그냥 맺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동고동락함을 통해 진정한 친구 사이로 발전합니다.
모든 것을 서로 공유함을 통해 우정은 깊어갑니다.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와 그 사이의 모든 벽이 허물어집니다.
내 것이 네 것이 되고, 내 것이 네 것이 됩니다.
진정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장점, 강점, 경쟁력, 건강 등등 긍정적인 측면도 받아들이지만, 상대방의 약점과 상처, 고통과 결핍, 실패와 좌절까지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물의 창조주, 자비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오늘 이 부당한 죄인, 결핍투성이인 우리 각자를 향해 친구가 되자고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오십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
오늘 말씀을 뜻에 따라 다시 정리하면,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란다면(구원과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 사랑 안에 머무르는 방법은 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가 나의 계명이다.”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이라는 말씀과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는 말씀은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고, ‘기쁨의 충만’은 ‘사랑 실천을 해야 하는 이유’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해서, “사랑하신 것처럼”은 “사랑하시는 것처럼”으로, “사랑하였다.”는 “사랑하고 있다.”로, 또 “사랑한 것처럼”은 “사랑하는 것처럼”으로 조금 바꾸면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항상 ‘현재 진행 중인 사랑’입니다.
즉 ‘지금 이 순간에 하시는 일’입니다.
번역문의 표현만 보면 ‘과거의 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히 ‘현재의 일’입니다.
2)
요한 사도는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요한 3,16-18)
요한 사도는 “궁핍한 형제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일의 구체적인 예로 들고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이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을 수가 있나?”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주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을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은 받는 쪽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나누어 받는 것과 같습니다.
3)
사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형제들(친구들, 이웃들)을 위해서 죽으라는 뜻은 아니고, 목숨을 나누어 주듯이 ‘모든 것’을 나누어 주라는 뜻입니다.
그 ‘나눔’은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분명히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큰 사랑’인데, 예수님 혼자서 죽고 끝나버린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 혼자만의 죽음으로 끝나버린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생명력을 나누어 준 일이고, 예수님과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살기 위한 일이었음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목숨을 내놓는 큰 사랑은 함께 살기 위해서 생명력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그 사람 혼자만의 희생으로 끝나버리는 일이 아니라...
4)
요한 사도의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라는 말은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진실하게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을 하자.” 라는 뜻인데, 이 말은 ‘야고보서 2장’에 있는 다음 말에 곧바로 연결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 2,14-17)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아프면 병원에 가지 왜 그렇게 누워만 있는가?”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아파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업고 병원에 갈 것입니다.
병원에 가라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이고, 진짜 사랑입니다.
실제로 아파서 누워 있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입니다.
5)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고” 라고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기쁨’은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되는 생명, 구원, 행복, 평화 등을 총체적으로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충만하다’는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을 얻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단순하게 요약하면, “구원받고 싶으면 사랑을 실천하여라.”인데, 가르치는 예수님 입장에서는 ‘서로’ 라고 표현하셨지만, 실천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 실천’은 ‘나부터’ 해야 하는 일이고, 남이 안 하더라도, ‘나 혼자서라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은 무엇인가? - "서로 사랑하여라">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영어로 하면 “God is Love”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사람은 사랑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정의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은 사랑인 것입니다.
무지도 탐욕도 허무도 아닌 사랑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사랑의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살아있을 때 사랑이요 죽으면 사랑도 못합니다.
사랑하라 주어진 인생이요, 세상 마칠 때의 마지막 아쉬움도 단 하나 더 사랑하지 못했음에 대한 아쉬움일 것입니다.
늦게서야 후회할 것이 아니라, 언젠가 사랑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어느 자매가 들려준 남편의 임종어도 잊지 못합니다.
1.미안하다.
2.고맙다.
3.사랑한다.
우리가 마지막 임종시 주님께 고백할 말마디 셋도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일 것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고, 만병의 근원이 사랑 결핍이요, 만민의 공통 보편 언어가 사랑입니다.
도대체 우리 일상생활에서 사랑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을 숨쉬며 사랑 안에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분명히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사랑도 보고 배웁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말씀하시며 당신의 사랑을 보고 배우라 하십니다.
참 황송하게도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 우리는 누구나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그러니 서로간의 깊어지는 사랑과 더불어 친구인 주님과의 우정도 깊어짐을 깨닫습니다.
복음 말미에서도 주님은 못을 박듯이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혼자서는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함께 사는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이에는 사랑의 갈망이 있습니다.
사랑은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행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는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내적 자세가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라 다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말도 있듯이 다 아는 사랑같지만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평생 사랑한다 해도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참 중요한 문제에 대해 함께 사랑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1. 사랑은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이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바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사랑의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그 좋으신 분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미사의 힘, 주님의 힘, 사랑의 힘으로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2. 사랑은 생명입니다.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할수록 예뻐지는 얼굴이요 사랑할수록 활기넘치는 삶이니 사랑은 생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신록의 푸르른 생명으로,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는 성모성월 5월입니다.
또 오늘은 고맙게도 생명주일이자 5월5일 어린이날입니다.
대체 공휴일로 내일 쉬지만 오늘 어린이날, 나이에 상관없이 마음은 어린이입니다.
또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어린이입니다.
다함께 생명의 사랑으로 여러분 전 존재를 가득 채우는 마음으로 다음 어린이날 노래를 불러봅시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3. 사랑은 선택입니다.
사랑뿐 아니라 모두가 선택입니다.
우리 인생은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선택으로 이뤄진 우리의 평생 삶입니다.
행복도 선택이요 기쁨도 선택이요 믿음도 생명도 희망도 선택입니다.
참으로 좋은 선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좌절하고 절망하면 불행합니다.
그러나 날마다 좋은 선택할 기회는 무궁무진 활짝 열려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을, 사랑의 주님을 선택하여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선택하신 예수님 말씀을 들어 보세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은 것이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를 뽑아 선택하신 주님께 사랑의 열매로 응답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주님을 선택하는 사람, 정말 살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랑의 주님을 선택하여 오늘 사랑의 미사잔치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오늘 참 좋은 선택을 하신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미사은총이 우리의 사랑의 열매가 참으로 잘 자라게 합니다.
4. 사랑은 배움입니다.
사랑도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 배우지 않고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배움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을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우리는 사랑에 영원한 초보자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배워야 할 스승은 주변에 무궁무진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보고 배워야 할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이런 사랑은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 순수한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집착없는 초연한 깨끗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 있는 그대로 예뻐하는 사랑, 주는 사랑, 돌보는 사랑, 나누는 사랑, 섬기는 사랑이 바로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주님을 닮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요즘 파스카의 계절이자 성모성월인 5월은 온통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신록의 아름다움에 꽃도 많고 새도 많습니다.
예전 꽃을 들고 온 자매에게 준 덕담의 시를 생각하면 저절로 유쾌해집니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예쁨의 비결은 사랑뿐입니다.
사랑하여 웃는 얼굴은 꽃보다 더 예쁩니다.
사랑보다 더 좋은 부작용 없는 화장품도, 성형수술도 없습니다.
5. 사랑은 발견입니다.
사랑은 발견이자 깨달음입니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사랑의 선물인데 사랑을 옆에 놔두고 눈이 가려 보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만이 아닙니다.
행복도, 감사도, 기쁨도 옆에 놔두고 몰라서 보지 못해 참 어리석게도 어처구니 없게도 불행하게, 불평하며, 슬프게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마음의 눈이 열려 공평무사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한, 깨달은 베드로의 고백이 참 신선합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여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새삼 우리 삶은 부단히 눈이 열려 “아, 그렇구나!” 깨달아가는 깨달음의 여정, 발견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깨달음과 더불어 이해지평도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무지에서 벗어나 날로 자유롭고 순수한 사람이 됩니다.
6. 사랑은 훈련입니다.
사랑의 선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 역시 부단한 영적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연주가들, 화가들, 운동선수들이 바로 훈련이 모범입니다.
사랑의 선택에 이어 마음을 담아 의식적 훈련에 이은 습관화입니다.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입니다.
좋은 습관이 덕이 되고 좋은 인생을 이뤄줍니다.
나이 먹으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습관으로 삽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합니다.
오죽하면 사람을 고쳐쓸 수 없다 말하는지요!
굳어진 습관 바꾸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거의 대부분 살아온 대로 삽니다.
그러니 좋은 습관의 형성은,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화는 얼마나 중요한지요!
우리 수도자들이 평생 사랑의 훈련과 습관은 날마다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전례공동기도입니다.
날마다 침묵, 경청, 찬미, 감사, 기도, 노동, 겸손, 성독, 회개, 순종등 무수한 사랑의 수행도 참 좋은 영적훈련이 됩니다.
7. 사랑은 능력입니다.
사랑은 개방입니다.
개방도 능력입니다.
다 똑같은 사랑의 능력이 아닙니다.
성인의 사랑과 범인의 사랑의 깊이와 능력은 다를 수 뿐이 없습니다.
시냇물 깊이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태평양 깊이의 사랑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라 하셨으니 사랑의 정상입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듯 하느님이 보면 우리 사랑의 능력도 도토리 키재기 일 수 있다는 자각이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마다 사랑의 능력은 천차만별입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능력이 못 미쳐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결코 똑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니 서로 이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희망할 수는 있어도 강요하거니 요구할 수 없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능력 신장을 위해 은총과 더불어 꾸준하고 항구한 자발적 노력과 훈련이 필요함을 봅니다.
일곱 개의 사랑을 말했습니다만 끝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유입니다.
사랑할수록 자유로워집니다.
사랑은 행복입니다.
사랑할수록 행복해집니다.
사랑은 기쁨입니다.
사랑할수록 기뻐집니다.
사랑은 고백입니다.
사랑을 고백할수록 사랑은 증대됩니다.
사랑은 지혜입니다.
사랑할수록 지혜로운 삶입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사랑할수록 밝아지는 삶입니다.
끝없는 사랑입니다.
공부 중의 공부가, 평생공부가 사랑입니다.
사랑의 학교 인생 공동체에서 주님의 평생 학인으로, 사랑의 평생 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날마다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
파티마와 루르드에서 매일 ‘묵주기도와 행렬’이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여러 나라에서 오기 때문에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성지에서는 순례자들에게 신청을 받아서 묵주기도를 진행합니다.
이번 성지순례 중에 파티마에서도 루르드에서도 ‘한국말’로 묵주기도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파티마에서는 영광의 신비 4단을 하였고, 루르드에서는 환희의 신비 2단을 하였습니다.
시작은 한국어로 하지만 후렴은 모두 자신의 언어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언어는 다르지만 기도를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체험으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언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피부색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계층과 세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내려 주신다.”
그렇습니다.
선한 마음이 있으면 진흙탕 속에서도 예쁜 꽃이 피기 마련입니다.
악한 마음이 있으면 예쁜 장미 밭에도 가시가 돋기 마련입니다.
성모님의 전구함으로 가정과 본당에 사랑의 꽃이 활짝 피면 좋겠습니다.
오늘 부활 제6주일을 지내면서 지난 5주 동안 있었던 복음 말씀의 주제를 정리해 보고 싶습니다.
부활 제1 주일의 주제는 ‘갈망’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무덤을 찾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갈망을 아셨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렇게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저의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주권을 신청했고, 2년 전에 나왔습니다.
주교님께 보고를 드렸고, 주교님께서는 저를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미사에 함께 하는 것도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 제2주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토마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만져보고, 그분의 옆구리에 있는 창 자국을 만져보아야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만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검증과 사실의 차원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믿음과 신비의 차원입니다.
제가 지난 2월 14일에 이곳에 왔을 때, 여러분은 제게 서류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달라스 교구와 서울대교구에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제가 선하게 생겨서일 수도 있습니다.)
부활 제3주의 주제는 ‘말씀’입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는 안토니오 가우디가 시작한 ‘성가정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에는 탄생의 문과 고통의 문이 있습니다.
이제 곧 영광의 문이 완성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통의 문 정면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 대신 ‘성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성경에 다 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성경 말씀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들려 주셨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저의 서품 성구는 시편 126장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말씀과 가까이 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부활 제4주의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목자의 기준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는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한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소경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나병환자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중풍병자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이방인 여인과 백인대장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착한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 제5주일의 주제는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싱싱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서 버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원이 연결되어야만 세탁기도, 냉장고도, 텔레비전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결되어야만 비로소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도 구역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신심단체들도 본당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사목회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 관계의 중심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미사입니다.
오늘 부활 제6주일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오늘 성서말씀을 미리 읽고 오셨거나 귀담아 들었다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오늘 성서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온갖 심오한 진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요즘에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재미있는 것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사실 미사 때에도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사람을 보곤 합니다.
어떤 청소년의 경우 미사 내내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더군요.
본당 로비에 앉아 열심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청소년에게 “만약 스마트폰이 없으면 어떻겠니?”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절대 안 돼요.”
캠프에 가서 스마트폰을 반납해야 한다면 캠프 자체를 가지 않겠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스마트폰이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은데 여기에 목숨 걸듯이 하는 모습에서 걱정도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런 모습에 대해 내면을 향하기보다는 다른 방향이나 외부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면은 전혀 보지 않고 외부에만 관심을 두는 모습에서 참 행복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두 내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랑, 평화, 믿음, 희망….
모두 내면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면이 튼튼해질 때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내면보다는 보이는 외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외적으로 화려하고 풍요로워야 행복한 것처럼 말합니다.
커다란 착각입니다.
외적인 것에 대한 만족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어느 정도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그 충분한 액수에 도달하면 더 갚고 싶어 합니다.
스마트폰도 한 시간만 하면 충분할 것 같지만, 한 시간이 지나면 그 시간이 너무 짧다고 말합니다.
내면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 사랑은 겉으로 보기에는 실천하기 힘들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사랑받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2)
우리의 내면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사랑.
그 사랑은 받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사랑해야만 합니다.
말로만 사랑한다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행동하는 사랑을 통해 진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내 내면을 더 풍요롭게 만들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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