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시나무를 보며
허영옥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람 외에 다른 한 사람을 더
알게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 이는 일일까.
혹자는 사람을 많이 알면 아는 만큼 힘이 든다고 했던가. 그러나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맞이하게 될 때마다. 작은
떨림으로 만나고 있다. 상대가 이성이든 동성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나에게 흥미로움과 호기심은 마찬가지이다. 사람을 좋아 하다보니, 때
로는 무턱대고 다가가 마음을 털어놓다가 가슴 아프고 힘든 일도 숱하
게 많았지만, 그것은 아마도 나의 성숙되지 않은 인격과 급한 성격 때
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을 알고 있어도 편안하게 내 마음을 털어놓
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늘 외롭게 살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지금까지
는 인덕이 없어서 일 것이라며 내 편한 대로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온
것 같다. 그러나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느 누가 나를 벌거벗은
겨울나무로 만든 것은 아니다. 가을 채비를 하는 나무처럼 뿌리에서
영양을 공급하지 않아 나뭇잎이 단풍이 들듯이 내 스스로 겨울 나무가
된 것 같다.
나는 가끔씩 남편과 함께 집 부근에 있는 학교 뒷산을 간다. 아침잠
이 유난히 많아 처음엔 비몽사몽 따라 걷지만, 몇 분이 지나 동네를
벗어 날 때쯤이면 새벽 공기의 상쾌함에 반해 힘든 줄 모르고 산을
오른다. 장마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인지 등산로는 물줄기를 따
라 군데군데 골이 패여 있었고, 험하게 패였던 곳인지 부드러운 흙으
로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니, 앞서 지나간 이름 모를 이의 따뜻함
이 전해 오는 듯하다.
가슴이 넓은 사람이 산을 사랑한다고 하였던가. 이따금씩 찾아가는
산이지만, 정상엔 나무 토막의자와 운동기구가 오늘도 나를 반긴다.
가끔은 윗몸 일으키기 운동기구 앞에서 몇 사람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내가 가는 시간대엔 늘 비어 있어 넉넉한 마음으로 그 곳을 찾아간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 날도 남편 보다 두 서너 발짝 앞서 걷고 있는 것
이 아닌가. 부리나케 오르내릴 때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
니지만, 오늘처럼 느긋이 내려오는 날이면 다정한 연인이 되고 싶어진
다. 선뜻 다가갈 수도 있지만 가까이 가지 못하고 남편의 부름을 기다
리는 20대 여인이고 싶을 때가 있다. 나의 엉뚱한 생각을 알리 없는
사람에게 공연한 투정을 부리며 그를 힘들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
었다.
아직도 솜사탕처럼 달콤한 말을 해주길 바라고 가슴엔 항상 18세 소
녀를 꿈꾸며 덜 익은 풋과일처럼 살고 있는 나.
그러던 내가 오늘은 웬일인지 뒤에서 묵묵히 걸어오고 있는 남편
이 조금도 서운하지가 않다. 마치 뒤에서 나를 보호해주는 듯 든든한
느낌이 들고 있을 뿐이다. 젊음의 꼬리만 남아있는 그의 얼굴이 한없
이 안쓰러워 보인다. 살아온 세월만큼 늘어난 주름. 저 많은 주름 중
엔 나로 인해 생긴 것은 얼마나 될까. 지금부터라도 편안하게 해 주고
싶다.
내려오는 길 양옆으로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었다.
소나무 사이사이로는 얼마 전 장마 때 쏟아진 폭우 때문인지 은사시
나무가 군데군데 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평소엔 그리도 도도하게
나를 유혹하더니 힘없이 넘어져 있는 것을 보니 마치 친한 친구가 쓰
러져 있는 것처럼 가엾은 마음이 든다. 은사시나무가 생을 포기하기까
지는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까.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그대로
서서 말이다. 이번 장마와의 전쟁이 얼마나 혹독했었는지 알 것만 같
다. 차라리 바람과 타협을 잘하는 수양버들처럼 부드러움이라도 타고
나든지, 그렇지 못할 바엔 뿌리라도 무성한 채 태어났으면 강한 비바
람을 무사히 넘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울컥 안스러움이 밀려왔다.
많은 나무사이 사이에서 넉넉한 햇볕도 받지 못하고 밤에만 몰래 자랐
을 것만 같은 은사시나무의 일생을 생각하니, 맏이도 막내도 아닌 내
삶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시려온다.
은사시나무의 몸통은 여인의 뽀얀 속살처럼 희고, 팔랑대는 이파리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호객이라도 하듯 나풀대어 누구나 한번쯤은 가까
이 하고 싶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나무이다. 많은 사람들 속
에서도 친한 친구는 금방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어느 산을 지나도 금
방 찾을 수 있는 특이한 나무. 낯 설은 동네에 갔을 때도 은사시나무
만 눈에 띄면 아는 사람을 만난 듯이 반가운 나무였다. 내가 삶이 무
거워 하염없이 그곳을 지나노라면 그들도 바람에 서로를 부대끼며 윙
윙 울어대는 것 같았고, 함께 할 친구가 없어 혼자서 지나칠 때에도
다정한 친구가 되어, 나를 위로하는 것 같던 나무였다. 언젠가는 그곳
을 찾아 가보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리라 마음 먹었
던 그 단단해 보이고 신비롭던 나무가 뿌리를 하늘로 둔 채 벌렁 누
워 있어 내 마음을 슬프게 하고 있다. 아니 넘어져 있는 나무는 모두
가 은사시나무 뿐이지 않은가. 소나무나 아카시아 다른 나무들은 모두
멀쩡하게 서 있는데 말이다.
'너는 왜 허우대만 멀쩡하고 많은 뿌리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해 여름
한철 장마도 못 견디고 이 모습을 하고 있단 말이냐'
나도 나를 믿고 의지하는 친구나 선후배 중 어떤 누구에게 혹여 은사
시나무처럼 허우대만 멀쩡한 채 보여 그들에게 실망을 주지는 않았는
지. 새삼스러워진다. 은사시나무의 뿌리가 흙 속에서 보이지 않고 있
을 때 그 누가 깊이를 알 수 있었을까. 뿌리가 땅속에서 깊이를 보이
지 않고 있는 것처럼, 사람의 속을 겉만 보고 어떻게 평가 할 수 있을
까.
2001. 10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