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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6,22-34
그 무렵 필리피의
22 군중이 합세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공격하자, 행정관들은 그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지시하였다.
23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24 이러한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7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수인들이 달아났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28 그때에 바오로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32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33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34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 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6,5-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승천과 성령의 파견을 예고하시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세상에 대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뒷부분은 내일 복음과 함께 보도록 하고, 오늘은 앞부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승천을 암시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요한 16,5)
이는 당신이 파견 받아 오셨다는 것과 보내신 분의 사명을 마치실 때가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다는 말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보호자’이신 성령의 파견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요한 16,7)
왜 꼭 당신이 가셔야만 그분을 보내시는 것일까?
아니, 성령은 이미 당신과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고 하시니, 이는 무슨 말씀일까?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정녀의 태에서 잉태된 종의 모습이 우리 육체의 눈앞에서 사라지고나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 자체에 순수한 마음의 눈을 두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내가 나의 육체를 너희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으면, 보호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너희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설합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함께 같이 계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눈이 ‘영적으로’ 열리게 되면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제가 가야 오늘이 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시간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함께 있으면서도, 오늘을 통하여 어제도 내일도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마치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실 수 있으시지만 아들을 통하여 그것을 이루시면서 아들을 드러내시듯이, 예수님께서도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지만 성령의 존귀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특성으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성령을 드러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드러내시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드러내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요한 16,7)
주님!
보는 것, 아는 것에 매여 있는 저를 부수소서.
저를 부수고 당신을 드러내소서!
제 눈을 비추시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시고,
제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당신 영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떠나보면 알 거야>
비가 내렸습니다.
봄에 내리는 비는 농사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귀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화창한 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비가 오는 날을 뛸 듯이 좋아합니다.
어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둠이 빛을 더 빛나게 하고 그래서 그의 소중함도 더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빛은 빛으로써 존재하고 있었고 어둠은 어두움대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호자 성령께서 증언해 주실이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얘기하는 것보다 다른 이가 얘기하면 믿음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세속의 권력자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하느님의 정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지금 새로운 법을 만든 잣대로 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잘못된 것을 지금 알게 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루카 15,11-32)를 보면,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갔던 작은 아들은 모든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풍요로운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새롭게 깨우쳤습니다.
그는 집을 나가서 밑바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다시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깨달아 안다는 것은 잊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떠나보면 알게 됩니다.
그러니 한발 물러서 보십시오.
지금 있는 삶의 자리에서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를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지에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있을 때 잘해!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을 깨닫는 만큼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깨닫는 만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 승천은 아버지의 역할을 명확히 드러낸다>
저는 본당에서 모든 일을 신자들이 알아서 하기를 바라고 큰 방향만 제시합니다.
그러면 신자분들은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동안 일일이 지시만 받아오던 삶에 익숙해져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가장 편하지만, 동시에 가장 힘들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지시해 달라고.
그러면 제가 하는 노력의 효과가 반감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가 반드시 있다고 확신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보면 무서운 아버지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무서운 아버지들 밑에 자라는 아이들은 주눅이 들어있습니다.
엄마를 그리워해서인지 아이가 엄마 젖처럼 부드러운 것만 찾아서 소의 등골을 날로 먹는 것은 좋아하지만, 밥은 먹지 못합니다.
혹은 돈은 벌어주지만, 아이들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아버지도 나옵니다.
아이들은 숨을 못 쉽니다.
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면 아이들이 엇나갈까요?
아버지의 관심은 엄마의 관심보다 아이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이 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돈으로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돈을 버는 이가 직접적으로 아이들에게 말할 때 그 무게는 엄마가 하는 말보다 훨씬 큽니다.
아이들도 엄마가 자신에게 주는 밥이 아버지의 돈으로 차린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엄마가 잔소리해도 어차피 같은 아버지의 돈으로 사는 사람으로 여기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말은 그 무게가 사뭇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르침과 재정적 도움을 어머니는 자신의 것으로 녹여서 자녀들에게 줍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그것으로 성장합니다.
반면 어머니의 역할을 배제한 채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직접 관여하면 자녀들은 성장을 멈춥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게 더 낫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어머니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땅에 살며 자녀를 키웁니다.
반면 아버지는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 마음이 평안합니다.
아버지는 밖에서 돈을 벌 때 자녀들에게 평화를 주고 어머니는 땅에서 자녀들과 머물 때 평화를 줍니다.
평화를 빼앗기면 자녀는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예수님은 이제 교회라는 어머니에게 우리를 맡기고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서양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사라져주는 것이다.”
히틀러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세상에서 가장 포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몸은 자랐지만, 사랑의 마음은 자라지 못했던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을 때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였습니다.
엄한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란 고흐는 언제나 주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떠나가자 숨어있던 예술 본능이 깨어났습니다.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늘에, 어머니는 땅에 머물며 자녀를 키워야 하는 이 신비를 가정이나 성당에서 적용하지 못하면 우리가 키우려는 자녀의 열매는 낭패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역할을 되새겨보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보호자 성령의 현존과 동반을 굳게 믿으십시오!>
요즘 우리가 봉독하는 사도행전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 용맹한 주님의 군사로 거듭난 사도들의 놀라운 행적을 계속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변화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이상 그 어떤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습니다.
그 어떤 박해나 위협에도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복음과 관련해서 한 번만 더 입 뻥끗했다가는 더 이상 안 봐주니, 입을 다물라고 해도, 사도들은 더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참다못한 행정관들은 바오로와 실라스의 옷을 찢어 벗깁니다.
맨살 위로 엄청난 매질을 해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은 깊은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도망을 칠까봐, 발에는 차꼬를 채웠습니다.
그 처참한 모습에 간수는 혹시나 죽었을까봐, 가끔씩 이봐요, 살아있어요? 하고 확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정이 될 무렵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지막지한 매를 맞아 정신이 혼미할 상태 속에서도 두 사람은 어떻게든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 기를 쓰면서 안간힘을 다해 주님을 찬미하는 송가를 불렀습니다.
큰 목소리로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잠시후 주님께서 그들의 모습에 탄복을 하시고 응답을 주셨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사도들이 탈옥한 것으로 알고 품고 있던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바오로가 만류하였습니다.
놀라운 광경 앞에 넋이 나간 간수는 즉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려 물었습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아주 간결하게 대답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사람의 지성이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놀라운 광경, 그 배경에 대체 무엇이 있었을까요?
성령의 굳건한 현존과 활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 복음도 성령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한없이 나약한 우리들, 겁쟁이들인 우리지만, 보호자 성령께서 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고 우리 인생 여정에 동반하심을 굳게 믿는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두려움을 기꺼이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적대자들이 아무리 우리를 협박한다 할지라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눈과 마음과 지성을 밝혀 주시면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의로움인지를 명확히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1)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승천’에 대한 암시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라는 말씀은 “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슬퍼하기만 하느냐?” 라는 꾸중입니다.
예수님께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물은 제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앞의 13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물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요한 13,36)
14장에는 토마스 사도의 질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요한 14,5)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왜 가시는지 알고 싶어 했는데, ‘이별의 말씀’이 계속되면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슬픔에 점점 더 깊이 사로잡힌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14,18-19)
제자들은 다시 오겠다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거나 흘려들었을 것입니다.
2)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라는 말씀에서 ‘진실’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계시’를, 또는 ‘특별한 가르침’을 뜻합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는 “내가 떠나도 너희의 이로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떠나지 않는 것은 너희에게 해롭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로움’은 ‘구원의 은총’을 뜻합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라는 말씀은 “내가 떠나도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실 것이고,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떠나야만 성령께서 오신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의 당신은 떠나시지만,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떠나심’은 ‘이별’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뒤에도 ‘성령을 통해서’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 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슬퍼한 것이 아니라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루카 24,50-53)
3)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성령을 받으면 너희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생각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고, 너희는 그 생각을 바로잡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1)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거스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2) 박해자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생각했지만, 제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예수님의 의로우심’을(죄 없으심을) 증명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의로우신 분’이라는 말은 ‘죄 없으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3) 박해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죄인이 심판받은 일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제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탄과 그것의 하수인들을 심판한 일이다.” 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죽음의 세력인 사탄을 물리치고 정복한 일이기 때문에 사탄을 심판한 일이고,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죽인 박해자들을 심판한 일이기도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께서 하시는 일 “아름다운 삶”>
"주께서 오롯한 이들의 생명을 돌보시나니
그들의 유산이 영원히 남으리라."
(시편 37,18)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역시 오늘도 서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만세칠창으로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답답하면 하루에도 벌떡 일어나 만세칠창을 합니다.
이 또한 기도입니다.
세계 최악의 저출산율로 '20년 후에는 노동인구 1000만명 감소한다'는 불길한 뉴스도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이래서 대한민국, 한반도의 평화공존을 위한 기도 역시 절실할 수 뿐이 없습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성령님 만세!’에 초점을 둡니다.
며칠전 읽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 나오는 다음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영혼을 가지고 짐승을 닮아서는 안된다.
신체의 직립으로도 우리는 짐승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제 아무리 숭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물체들에다 영혼을 내던지라는 말이 아니다.
숭고한 사물이라 할지라도 의지의 안식을 거기서 찾는다는 것은 결국 정신을 비하하는 것이다.
신체는 물체들 가운데서 숭고한 것을 향하도록, 즉 본성적으로 천체들을 향하도록 똑바로 세워져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신 역시 영적 실체로서 영적사물들 가운데서 숭고한 것으로 고양되어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오만불손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경건한 의덕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삼위일체론, 성염 역주;901-902쪽)
두발로 서있을 수 있는, 두발로 걸을 수 있는 축복에 감사해야 합니다.
직립인간답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존엄한 인간품위를 지키며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하늘의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요즘 세상 떠나는 분들을 대하며 화두처럼 저절로 나오는 말마디입니다.
“다들 때가 되니 떠나는구나! 어디로 가나?”
이에 대한 답을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주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믿는 이들 역시 그들을 보내신 하느님께 간다는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떠나심이 우리에게 이로움이 됨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이미 주님께서 보내주신 보호자 성령께서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주님을 닮아 무죄한 삶, 의로운 삶, 진실한 삶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직립인간답게 품위있는 삶, 자유로운 삶, 아름다운 삶,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의 소소하면서도 확실한 깨달음 역시 성령님의 은총입니다.
다음 다산의 말씀도 이런 깨달음의 소산이겠습니다.
“삶의 무게는 온전히 나의 것이지만, 죽음의 무게는 가족들이 함께 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잘 떠나는 죽음이 가족들에게 최고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만으로, 세상은 평안해지기 시작한다.”
구원은 가까이에서부터 시작됨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아주 예전에 민들레꽃 홀씨들 날려 보내며 써놨던 “영원한 삶”이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꽃졌다하여 끝난 것은 아니다
떠날 채비는 끝났다
민들레 홀씨 형제들!
언제 떠나 어디에 닿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임만이 알뿐이다
몇날 동안 참 행복했고 화려했다
이제 샛노랗게 빛났던 하늘사랑 추억 가득 담고
임바람 불기만 기다릴뿐이다
꽃졌어도 계속되는 생명 바로 영원한 삶이구나
죽어 사라져도 끊임없이 사랑의 홀씨들 나눴던 삶
죽음은 없다
영원한 삶이다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생명이다
떠날 채비는 끝났다”
-2001.5,4
무려 23년 전 글이지만 지금도 새롭습니다.
예수님은 떠났지만 보호자 성령 덕분에 우리는 주님의 홀씨들이 되어 계속 주님 파스카의 꽃을 피어냅니다.
주님의 일을 계속합니다.
이런 시 또한 성령님께서 주신 깨달음이며 성령님의 은총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끊임없이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이 되어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라와 실라스입니다.
두 제자들은 깊은 감방에 갇혀 있는 수인들이지만 영혼은 참 자유롭습니다.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이에 놀란 간수는 수인들이 달아난줄 알고 자결을 시도하자 즉시 바오로는 이를 만류하였고 상황을 깨닫고 마음을 추스린 간수와 두 제자간 주고받은 대화가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합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런 두 제자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 일화는 다시 한 번, ‘하느님께서는 굽은 선들에서도 똑바로 쓰실 수 있는(God can write straight with crooked lines)’ 분임을 가르쳐줍니다.
성령의 사람, 바오로와 실라스입니다.
복음선포자들과 간수에게 재앙같은 사건도 그들 모두를 위한 아름다움이 여기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글자들(the most beautiful letters)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만일 우리 삶 중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의 중심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이런 하느님 친히 쓰신 아름다운 글자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 믿는 이들의 굽이굽이 굴곡진 인생길에도 주님은 똑바로 아름다운 글자를 써내려 가실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께 호응하여 어떤 환경중에도 반듯하게, 품위있게, 아름답게, 한결같이 살아야함을 깨닫습니다.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1요한 2,17)
아침독서기도시 마음에 와닿은 성구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성령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며, 우리의 곡선 인생 여정중에도 주님은 계속 아름다운 글자를 써내려가심으로 우리 모두 아름다운 인생이 되게 하십니다.
"오롯한 사람을 보라,
의인을 살펴보라.
온화한 사람에게 후손이 있느니라."
(시편 37,3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가난, 비움, 겸손>
잘 되던 인터넷이 갑자기 연결이 안 되었습니다.
급한 대로 전원을 끄고 다시 켜보았지만 그래도 연결이 안 되었습니다.
그럴 때면 연결하는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스마트폰의 인터넷을 컴퓨터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 인터넷 연결이 되었습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인터넷은 회사에 연락해서 방법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듯이 염불이든 참선이든, 밀교든 현교든, 간화선이든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을 얻게 해 주면 그 수행은 정법(正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로 걸어서 서울로 갈 때 목적지인 서울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나중에 서울에 도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듯이, 불교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내가 체득한 경지가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나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번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가르침은 고, 집, 멸, 도의 사성제(四聖諦)로 요약됩니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란 뜻입니다.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고성제, 그런 고통의 원인은 내 마음 속의 탐욕, 분노, 우치(愚癡)와 같은 번뇌라는 집성제, 이들 번뇌를 모두 제거하여 고통이 사라지는 열반의 멸성제, 그리고 이렇게 번뇌를 제거하는 팔정도의 수행인 도성제입니다.
즉, 불교수행의 길에서 최종 목표는 번뇌가 소멸한 열반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듯이, 그 어떤 수행법을 선택했어도 나에게 열반을 증득하게 해 주면 그 수행법은 정법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부처가 깨달음에 방해가 되면 그 부처마저도 버려야 한다.’
임제 스님의 유명한 살불살조(殺佛殺祖)입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은 나를 얽어매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셔버리라는 뜻입니다.
부처라는 관념, 조사나 아라한이라는 이름에 속박되면 절대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종교적 권위로 만들어진 우상을 부셔버리지 않고서 진정한 자유와 해탈을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제가 안 되는 인터넷을 가지고 씨름했으면 인터넷 연결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행히 스마트폰 연결이라는 방법을 알았기에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 방법이 제자들에게는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이 제자들에게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차원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라는 공간과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점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말씀을 들었고,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을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을 뛰어넘는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차원을 ‘협조자. 성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옥이 흔들리고, 부서졌을 때, 바오로 사도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감옥은 더 이상 굴레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면 불행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재물이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명예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권력이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상이었습니다.
재물이라는 욕망은 가난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명예라는 욕망은 비움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권력이라는 욕망은 겸손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욕망을 가난과 비움 그리고 겸손으로 따듯하게 받아들이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재물, 명예, 권력에 젖어있던 간수는 사도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난, 비움, 겸손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욕망의 우리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의 길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모두 우리를 위함 때문>
사람들이 책 추천을 해 달라고 해서 요즘 인상 깊게 읽은 책 한 권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책의 두께에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두꺼운 책은 도저히 읽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분이 두꺼운 책 읽기를 꺼리십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책도 두꺼운 책의 분류에 들어가는지 성경을 도저히 못 읽는 책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하긴 얼마 전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3년 우리나라 평균 독서량은 7.2 권이라고 하더군요
1년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성인도 50%에 달한다고 하니, 두꺼운 책을 읽기란 두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시대인지라 긴 문장에 대해서는 난독증이 걸린 것처럼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또한 해시태그만을 쫓고, 짧은 글과 짧은 영상으로 지식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이 진실일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진실은 복잡한 경우가 많고, 따라서 복잡하고 길게 설명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설명 자체를 거부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말도 안 되는 흑백 논리로 서로 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하버트 조지 웰시의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눈뜬 청년이 눈먼 부족에게 ‘본다’라는 개념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눈먼 부족은 눈뜬 청년을 조롱하고 배척하지요.
자기들의 생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 세상은 아닐까요?
예수님도 사람들의 알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요.
이처럼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그 생각이 오히려 큰 잘못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하늘에 다시 오를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하시지요.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모두 근심이 가득 찹니다.
아마 십자가 죽음을 통한 이별의 아픔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들의 무능함을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모두 우리를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요한 16,7)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단순히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주님과 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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