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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7,15.22─18,1
그 무렵
15 바오로를 안내하던 이들은 그를 아테네까지 인도하고 나서, 자기에게 되도록 빨리 오라고 실라스와 티모테오에게 전하라는 그의 지시를 받고 돌아왔다.
22 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3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24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25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그분께서는 또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7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하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29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30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31 그분께서 당신이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시어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주셨습니다.”
32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
33 이렇게 하여 바오로는 그들이 모인 곳에서 나왔다.
34 그때에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가 있고,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18,1 그 뒤에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6,12-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고별사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곧 마지막 말씀 중에서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다음 구절부터는 이제까지의 말씀을 다시 요약하시는 부분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성령의 개입은 크게 보면 세 시기에 걸쳐 일어나고 있습니다.
첫째 시기는 강생 때로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라고 표현됩니다.
둘째 시기는 세례 때로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마르 1,10), 또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고 표현됩니다.
셋째 시기는 부활과 승천하실 때로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루카 24,49)고 표현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고별사에서만도 ‘성령에 대한 약속’을 다섯 번이나 거듭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요한 14,16-17)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 14,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요한 15,26)
"보호자가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요한 16,8)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6,13-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안내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성령의 이끄심이 없이는 진리를 깨달을 수도 진리를 행할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라고 하심은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성령의 일치 안에 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 그분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1요한 2,20-27)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을 때는 우선적으로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관상생활에 대해 쓴 편지>를 쓴 12세기의 카루투시오회의 권고는 성경을 읽기 전에 “먼저 성령을 청하라. 그러면 빛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성령의 도유, 곧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독서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는 성령께서 진리의 해석자이시고 동반자이심을 말해줍니다.
말씀의 뜻이 진리의 영으로 하여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그리스정교회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가 한 말을 되새겨 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십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며,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요한 16,13)
주님!
진리의 옷을 입고 당신 정원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하여, 당신의 정원에서 행함으로 꽃을 피우고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모상에 따라 새로워지게 하시고,
진리의 영의 숨결 되어 흐르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진리는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의사 결정 방식의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어떤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의견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만장일치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통합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렇게 진행되기가 어려운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수가 선택한 의견을 따르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소수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소수의 의견이 현실적인 정확한 답과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수결의 원칙이 진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다수에 의해서 바뀔 수는 없습니다.
다수에 의해서 이랬다저랬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누가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일 뿐입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은 말합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신부님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지하 아사감방(餓死監房)에서 1941년 8월 14일 운명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수용소 소장에게 지목되어 죽임을 당하게 된 전 폴란드군 부사관이었던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첵크의 “오~ 제발 절 살려 주세요. 제겐 아내가 있고 불쌍한 자식들도 있습니다. 제발..”울부짖으며 애원하는 소리를 듣고 대신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32)
결국 진리의 길을 따르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고정되고, 우리가 그분께 기쁘고 은혜로운 일들을 찾으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행한다면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만을 위하여 쌓아놓은 이기심의 멍에를 내려놓고 이웃에게 열려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을 무장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 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에페 6,14-16)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우리를 진리 안으로 부르십니다.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고 예배하도록 이끄는 세상의 많은 어두운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진리 안에 더욱 굳건해야 하겠습니다.
숨기려고 하면 왜곡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자신의 논리로 합리화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없애려고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들은 이웃과 세상에 열려 있습니다.
신앙인은 시기, 질투, 미움의 자리를 털어버리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영적인 지혜, 계시 및 지식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 1,18)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미사성제 안에서 당신을 내어 주시며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진실한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자유를 줍니다.
말씀, 예수님, 사랑 안에 자유를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신성을 선물로 받는 법>
며칠 전에 어떤 형제가 자기 가문 조상들의 무덤을 500개 관리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그분은 매우 열성적으로 말씀하셨지만, 저는 ‘왜 저런 고생을 사서 하실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많은 돈과 시간, 무거운 비석을 메고 오르내리며 넘어지는 모습을 보며 아내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며느리 자랑하기 시작하십니다.
장손을 낳은 며느리가 아이가 크면 가르쳐주겠다고 이 모든 것들을 시간 있을 때 아버님과 함께 가서 배우고 기록해 놓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장손이 이 일을 해야 하지만, 장손은 아직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중간에 누군가 그것을 이해시켜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님께서 오셔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얼마 전에 말씀드린 한 학급의 감동적인 사연을 떠올려봅시다.
발을 다쳐서 네 차례나 수술하고 반에 돌아왔을 때 선생님과 아이들이 반겨주지 않아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벤트였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준비해 준 케이크와 노래를 합창했고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누군가의 노력이고 피와 같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들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성령님의 역할은 누군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 전하며 이해시켜 주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한다면 예수님께서 성령님께 모든 것을 주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이해시키시기 위해 노력하셨기에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되신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이렇게 받아 전해서 이해시키는 역할을 하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 곧 신성을 주십니다.
하느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이해시키기 위해 성령님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느님 자녀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위의 형제님도 노후를 위해 준비한 땅이 조금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는 일을 이해하고 손자에게 전해주겠다는 며느리가 너무 예뻐서 모든 것을 며느리에게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결국 손자에게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에게 무엇인들 줄 수 없겠습니까?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더 높은 기도』 북 콘서트 때 세 분의 형제·자매가 제 책을 먼저 읽고 아직 책을 읽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증언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영성의 단계를 알아서 무엇하냐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읽어야 하는 이유와 좋은 점을 조목조목 말씀하시며 신자들이 책을 많이 사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받은 모든 이익금을 그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정은표 씨도 아이들이 공부보다는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공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엄마는 아빠 편을 듭니다.
이때 남편은 아내에게 무엇을 주고 싶을까요?
다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때 자녀들도 마음의 평화를 찾고 좋은 성품과 능력의 자녀로 성장합니다.
성령처럼만 살면 하느님께도 배우자에게도 세상 상사에게도 사랑받고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원리를 이해합시다.
그래야 하느님 자녀가 되고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느님 자녀가 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드님께 모든 것을 주시고, 아드님은 성령님께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세 분 하느님은 모두 같은 ‘모든 것’, 곧 신성을 공유하시기 때문에 같은 하느님이 되십니다.
이제 우리도 성령님을 이해하게 할 수 있다면 그분의 신성을 받게 되어 같은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는 법을 잊지 맙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진리 중의 진리, 궁극의 진리, 불변의 진리는 또 무엇입니까?>
가끔 우리는 진리가 아닌 거짓, 허위를 접합니다.
때로 유명인사들의 거취에 대한 허위사실들이 순식간에 유포되어 입장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저도 며칠 전 한 신자로부터 한 선교사 신부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럴 리가 없는데’하며, 즉시 펙트 체크를 했습니다.
당사자께서는 이미 부활하셔서 삼시 세끼 밥 잘 드시고 계신답니다.
이런 일까지 있었으니, 당신 명줄이 길겠다고 좋아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큰 혼란으로 몰고 가는 거짓, 허위, 헛소문들이 날개를 달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때로 이런 그릇된 정보가 부당한 공권력을 등에 업고, 진실인 양 공공연하게 유포되기도 합니다.
분명 거짓인데 그럴싸하게 포장되고 편집되어 일반화된 것을, 비판력을 상실한 관용 매체를 타고 진실인 양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 앞에 매일 펼쳐지는 세상만사, 다양한 사건 사고 들 앞에서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파악할 수 있는 정확한 식별력과 정보력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보면 분명 거짓이요 악인데, 사탄의 우두머리인데, 그럴싸하게 스스로를 포장해서 진리처럼, 예언자처럼 행세합니다.
아직도 두꺼운 가면을 쓰고 다니며 선량한 사람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 그릇된 지도자들과 사이비 교주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근원적, 태생적으로 나약한 우리 인간들입니다.
거짓과 헛소문 앞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늘 필요한 존재가 한분 계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요한 16,13)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진리, 진리 중의 진리, 궁극의 진리, 불변의 진리는 또 무엇입니까?
그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자체이시며,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신 생애 전체이며, 그분께서 선포하신 복음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 악이 기승을 부리는 이 세상이지만 그래도 이 진흙탕 같은 세상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 진리가 아닐까요?
때로 부담스럽고 때로 거추장스러운 내 이웃, 그래서 피하고 싶은 이웃이지만 그 사람 안에서도 엄연히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시고 하느님께서는 항상 그의 회개와 성장, 그리고 성화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계심이 진리가 아닐까요?
우리네 인생 여정에서 수시로 다가오는 갖은 고통과 시련, 유혹과 십자가가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의 진리, 이 구질구질하고 때로 꼬질꼬질한 인간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의 성령께서 활발히 역사하고 계신다는 깨달음의 진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무력하게도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 끝끝내 적대자의 폭력 앞에 저항 한번 하지 않으시고 돌아가신 수동의 예수님이시지만, 그 예수님께서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고 물리치시고 승리하리라는 깨달음의 진리, 십자가 길의 여정에서 처참했던 몰골의 바로 그분께서 참된 하느님이시며 우리를 영원한 불멸의 삶으로 이끌어 주실 구원자임을 깨닫게 하는 진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1)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줄 ‘새로운 가르침’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보충 설명’을 더 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을 충분히 준비시키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지금 너희는 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받았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온전히 깨닫게 되고 ‘온 삶으로’ 살게 됩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되고 ‘삶으로’ 실천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구원의 진리’, 즉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들’을 뜻합니다.
‘진리’를 ‘예수님 자신’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해석하면, 예수님 말씀은 성령을 받은 뒤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온전히 깨닫게 되고 믿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2)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 뜻을 깨닫고, 이해하고, 믿게 되었다는 말이 ‘성전 정화’ 이야기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요한 2,19-22)
루카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루카 24,44-45)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일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그 일도 ‘성령의 작용’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루카 24,25-27.32)
‘마음이 타오르다.’는 ‘감동을 받다.’입니다.
3)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라는 말씀은 성령을 받는다고 해도 당신이 가르치신 적이 없는 가르침을, 즉 ‘새로운 가르침’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 라는 선언입니다.
우리 교회는 ‘공적 계시’는 예수님에게서 끝났고, 더 이상의 공적 계시는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뭔가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이(신앙인들이) 더 잘 이해하고 믿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일입니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성령을 받은 것으로 혼자서 착각하고 있는 것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성령이 아닌 악령을 받은 것입니다.
요즘에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사이비 종교 사람들이 그런 자들입니다.
그자들은 자기들이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선전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들을 말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자들은 성령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4)
교회 내부에서도 ‘사적 계시’가 논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성모님의 발현을 체험하거나 성령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 교회는 그런 사적 계시 자체는 인정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또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이루어질 때에만 인정합니다.
사적 계시의 경우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거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계시가 아니라 사탄의 장난일 뿐입니다.
성령이든지 성모님이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사적 계시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신앙인’이 사적 계시를 의무적으로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자유의 여정 - ‘진리의 영’의 인도에 따른 삶>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음이 축복의 선물이지만 평생 과제의 실현을 위한 평생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저절로 완성에 이르게 하는 공짜 선물은, 값싼 선물은 없습니다.
은총과 더불어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 합니다.
무슨 선물이요 과제입니까?
참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과제입니다.
세례받았다 하여 참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게 아니라 평생 노력이 뒤따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자세로 살아있는 그날까지 한결같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누구나의 소망이 자유로운 삶, 평화로운 삶입니다.
참사람이 되기 위한 평생 노력과 더불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점차 자유로운 삶, 자연스런 삶, 평화로운 삶,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바로 여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진리의 영, 성령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성령뿐입니다.
진리의 영,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갈 때 점차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자연스럽고 평화롭고 행복한 참나의 실현이요, 이것은 인간 누구나의 근본적 소망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소망을 노래한 “들꽃같은 삶”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살아있음이
기쁨이요 행복이다
찬미와 감사다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
물주지 않아도
약치지 않아도
가난한 땅에서도 무리 이루어 잘도 자란다
작고 수수하나
한결같이 맑고 곱고 부드럽고 강인하다
탈속의 초연한 아름다움이다
최소한의 자리, 양분, 소비의 가난이지만
하늘 바람에 유유히 휘날리는
샛노란 별무리 고들빼기꽃들
참 자유롭고 자연스럽고 평화롭고 행복해 보인다
가난한 부자다
소유의 기쁨이 아닌 존재의 기쁨이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다
들꽃같이 사는 게 잘 사는 거다”
-2001.5.20
23년 전 쓴 시이지만 이때의 분위기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 시를 써놓고는 무려 한달 이상은 행복했습니다.
이때 수도원은 참 가난했고 한옥의 소박하면서도 초라했던 본원 건물 주변에는 철따라 저절로 자라 피어난 들꽃들이 장관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의 평화롭고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싶은 갈망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답은 한 하나 진리의 영,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겸손하고 항구한 인내의 삶입니다.
진리가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의 영의 인도에 따라 살 때 무지의 질곡에서 벗어나 점차 자유로운 삶의 실현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진리의 영, 성령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고별사와 같은 유언에서 주님은 참 좋은 선물인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단숨에 읽히는 오늘 복음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는 것이다.”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끄시는 진리의 영, 성령입니다.
진리의 영의 인도에 따라 한결같이 끝까지 겸손히 따르는 것이 구원의 지름길입니다.
옛부터 종파를 초월해 모든 구도자들이 한결같이 소망했던 진리 추구의 삶이었습니다.
진리 자체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요, 진리의 연인으로 자처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이요, 진리의 협력자로 명명되기를 원했던 베네딕도 16세 교황이요, 진리에 몸바치는 사람이 되기를 열망했던 불가의 대선사, 이미 오래전에 타계한 성철 큰 스님입니다.
그리고 무수한 성인들이 현자들이 시종 여일 “진리와의 열애(熱愛)”속에, 진리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진리의 영, 성령의 인도따라 살 때 이런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자유롭고 자연스럽고 평화롭고 행복한 진리 실현의 삶이겠습니다.
새삼 한결같은 진리 추구의 예닮의 여정은 자유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이의 탁월한, 빛나는 모범이 바로 사도행전의 바오로입니다.
이교철학의 중심지인 아테네에서 선교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아레오파고에서의 연설이 공감 100%입니다.
일부만 인용합니다.
자연과 현실 삶을 통한 하느님의 증거에 이어 끝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소개합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이어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부활을 소개하며 이들을 회개에로 이끌려 하지만, 무지의 철벽같은 이들의 철학저 사고 앞에 좌초하는, 흡사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리하여 당시 최첨단을 걷던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서의 선교활동은 실패로 끝난 듯 하지만 결국은 그리스란 나라도 복음화되어 지금은 국민의 97%가 그리스정교회 신자라 합니다.
아테네에서 일단 선교에 실패한 진리의 사도, 바오로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고린토, 에페소에서 열정적 선교활동을 펼치며 마침내 로마에 이어 유럽 대륙의 선교에 전초기지를 마련하는 느낌입니다.
이 또한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겠습니다.
참으로 철학의 어원처럼 지혜를 사랑하는 진짜 겸손한 철학자라면 철학의 완성이신 하느님의 지혜이자 진리 자체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찾을 것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이 답이듯, 철학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궁극의 답이기 때문입니다.
새삼 선행하는 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성령의 은총이 없이 무지의 철학을 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성령의 인도에 따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고 하느님의 지혜이자 진리이신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해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그분과 성삼위 하느님과 하나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대목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성삼위 하느님께서 드러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성령과 당신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시지요.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요한 16,13)
말씀을 공유한다는 건 당신과 성령께서 마음과 뜻으로 일치하신다는 것이지요.
의지와 생각과 지향이 온전히 하나로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씀같지 않나요?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요한 12,49-50)
예수님께서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말씀하실 때 이미 비슷한 표현을 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의지와 생각과 지향을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전하심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듯이, 성령 또한 예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심으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성삼위 하느님은 이렇듯 한 뜻을 지니시고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제1독서는 바오로 사도의 아테네 선교를 다룹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을 부정하기보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사도 17,23) 유일신이신 하느님이라고 소개하는데, 그가 전하는 분이 곧 성삼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17,25)
그는 성부이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라고 밝힙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자를 주시고, 살아 움직이도록 숨도 불어넣어 주시고, 또 생명을 지탱하고 관계를 꾸려가는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사도 17,28)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숨을 받아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생명을 얻었고, 성령의 도움으로 나날이 새롭게 거듭납니다.
숨 쉬고 움직이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성삼위 하느님 안에 있으며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사도 17,27)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육화를 통해, 그리고 성령의 현존을 통해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우리 밖에 우리 곁에 온통 우리를 감싸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그분이 계시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그분의 현존을 벗어나는 곳이란 찾을 수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복음 환호송)
예수님께서 분명 "영원히"라고 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묶여 사는 우리에게 "영원"을 보장하시고 보증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신비를 믿는 우리에겐 두려움이나 의혹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은 그렇게 온 세상에 가득한 성령을, 그 기운을, 그 사랑을 호흡하며 성삼위 하느님 품에 잠겨듭시다.
그분께서는 나의 온 세포 구석구석을 채우고 계시고, 누추한 마음에도 충만히 머물러 계시고, 숨 한 모금에도 깃들어 계십니다.
그분이 내 안을 가득 채우고 계시고, 또 나를 온통 둘러싸고 계시니 그분이 곧 나이고, 내가 또한 그분입니다.
나는 그분과 성삼위 하느님과 하나입니다.
이런 축복이 또 어디 있을까요?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질 수 있도록>
<알고 싶은 가톨릭 신학>을 읽고 있습니다.
조한규 신부님이 교우들을 위해서 집필하였습니다.
신앙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교리와 신학을 교리 교사가 학생에게 알려주듯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한번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교회’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 교회를 보게 됩니다.
교회의 건축도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모던, 현대에 이르면서 모습이 변하였습니다.
제가 있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아름답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건축물’을 의미합니다.
박해의 시기에는 지하무덤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신앙인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친교를 나누고, 신심활동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셨듯이, 교회에서 영적인 힘을 얻은 교우들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얻습니다.
사목자와 수도자들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도록 공동체로부터 선발되었습니다.
사목자는 성사를 집전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교리를 가르칩니다.
수도자는 세상에서 하느님나라의 삶을 증거합니다.
수도자는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해 줍니다.
교회는 ‘제도’의 모습도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베드로로부터 이어오는 교황을 중심으로 제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신학을 수호합니다.
교황은 지역교회의 주교를 임명합니다.
지역교회의 주교들은 사제를 임명합니다.
사제들은 주교의 권한에 의해서 본당으로 파견됩니다.
수도회는 교회로부터 인준을 받습니다.
인준된 수도회는 각자의 영성과 은사에 따라서 복음을 전합니다.
교육, 나눔, 기도, 피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본당의 요청이 있으면 본당으로도 수도자를 파견합니다.
교계제도에 따라서 사제는 교구에 속하게 됩니다.
저는 서울대교구에 속해 있지만 댈러스 교구의 요청에 따라서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자들도 사는 지역에 따라서 본당에 속하게 됩니다.
이를 속지주의(屬地主義)라고 합니다.
본당에서 영적인 도움을 받고, 본당을 위해서 봉사하고, 재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헌금, 교무금은 본당 재정의 중심입니다.
교계제도에 따라서 모든 본당은 같은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십니다.
지금은 그 나라의 언어로 미사를 봉헌하지만 2차 바티칸 공의회 전에는 ‘라틴어’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신부님은 이런 교회에 대한 이해는 일반적이지만 정확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교회를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사인 교회는 성부의 사랑으로 계획되었고, 성자의 파견과 활동으로 세상에 설립되었으며,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통해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삼위일체로부터의 교회는 무슨 뜻일까요?
첫째, 교회는 삼위일체의 친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삼위의 하느님께서는 일체로 친교와 사랑을 나누시는데, 이는 교회의 원래 모습, 건립 이유와 목적이 삼위일체 하느님이심을 의미합니다.
둘째, 성자와 성령의 파견을 통해 교회의 신비가 구현되고 완성됩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하신 분의 뜻을 실행하도록 노력합니다.
성부가 성자를 파견하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파견되었습니다.
여기서 파견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높낮이가 있는 종속적인 관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치와 사랑과 친교로 이루어진 파견입니다.
셋째, 인간과 친교를 나누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인격적인 친교 의지가 교회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교회는 하느님을 보다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만나고, 체험하고, 구원 은총을 받는 곳입니다.
교회는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계획되었고,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들 각자의 복음서를 가지면 어떨까?
가브리엘 복음서, 안드레아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 로사 복음서와 같이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한 복음사가처럼 깊은 영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처럼 성서에 대한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루가 복음사가처럼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처럼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도전은 ‘그리스의 철학, 로마의 법, 페르시아의 문학’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신화와 종교의 틀을 벗겨버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가치와 의미를 빨아드리고 있습니다.
인간 중심의 사고는 함께 살아야 하는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온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푸른 별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굳셈의 성령, 지식의 성령,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생태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눔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오늘 막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직 지금이 유일한 것처럼 서로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는 우리가 위로의 하느님보다 하느님의 위로를 찾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위로만을 찾게 되면 거짓 위로를 만나서 하느님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 매일 같이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지금의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기를 위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가 들어주신 것인지 그 어려운 상황에서 너무 쉽게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만이 자기를 진정으로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고 외쳤습니다.
몇 년 뒤, 다시 한번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힘들어졌습니다.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이 정말로 계시는 것일까? 계신다면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자기를 이렇게 외면 하실 수 있을까?’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신앙을 버렸습니다.
하느님의 위로만을 찾는 사람은 이렇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위로의 하느님을 찾으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즉 좋은 상황이든 나쁜 상황이든 상관 없이 하느님께 위로받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위로만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그 자체에 다가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며 하느님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위로받기 위해 엄마 아빠를 찾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하다가도 엄마 아빠라는 존재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위로를 주는 부모님께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위로가 아니라, 위로의 하느님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교회와 모든 믿는 이에게 성령을 보내십니다.
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이라는 진리로 우리를 이끌어 주면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알게 해줍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 안에서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과거 많은 순교자가 그러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가득한 삶 안에서 기쁨을 간직했고, 또 힘차게 하느님을 증거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을 매 순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당연히 사랑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이를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 하느님의 위로를 찾지 말고 위로의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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