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군 여행] 북지리마애여래좌상...........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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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봉화군 여행] 북지리마애여래좌상...........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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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줄기를 따라 흘러오다가 소백산에서 낙동강 상류를 품고 있는 봉화는 빼어난 자연을 숨겨둔 아름다운
곳이다. 산이 깊이니 물도 깊고 바람도 쉬이 산을 넘지 못하는 물야면의 지림사(智林寺)는 부석사로 가는 길목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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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연봉을 내달리던 바람이 물야면 들판을 지나 지림사 숲으로 귀순하고야 마는 관능의 피안 같은 느낌의 절
집, 지림사에 자리잡은 국보 제201호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北枝里 磨崖如來坐像)을 찾은 유랑자다, 915선
국도인 문수로를 타고 휘돌아 봉화읍 방향으로 가다보면 물야면의 끝자락에 절집이 하나있다. 창문을 열고 들
판의 싱그러운 풀 내음을 맡으며 흘러나오는 음악에 따라 흥얼거리며 휘파람을 곁들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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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림사의 쓸쓸한 마당엔 때아닌 낙엽만 딩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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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1980년 9월 16일에 국보 제201호로 지정되었으며, 비바람에 의한 풍화를 막기 위해 1982년에 간단한
보호각을 세운 후로 현재까지 보호각 안에서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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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하고도 아름다운 들녘이다. 도심에서는 도저히 맛 볼 수 없는 청초(淸楚) 가득한 너른 벌판을 한참 달리다
보면 우측으로 나지막한 산이 하나 보이는데 그 산 아래 고요하게 앉아 있는 절이 지림사다. 지혜의 숲이라는
이름답게 자리잡은 지림사는 벌판을 마주보며 뒤로는 은자의 거처 같은 숲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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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판에서 지림사를 바라보면 작은 숲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또 절에서 들판을 바라보면 거침이 없이 확 트인
푸른 벌판이 놓여있다. 첩첩오지(疊疊奧地)의 봉화에서 몇 안 돼는 그나마 너른 들판을 정원으로 둔 지림사는
만고(萬古)의 숲처럼 언어의 등에 올라타서 서정을 풀어내는 숲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인본주의로
소통되는 조화로운 숲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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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마애불상은 지림 사가 폐사된 이후 잊혀져 방치되고 있다가 1947년 주변 부지를 정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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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제공 :문화재청의 홈페이지에서 찾은 발견당시의 북지리마애여래좌상은 그래도
형태를 알아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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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지리마애여래좌상(北枝里磨崖女來坐像, 국보제2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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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는 듬직한 얼굴로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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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이 짙어가는 신록의 계절, 들꽃 향기의 선율을 품어 내는 지혜의 숲에서 부드럽고도 명랑한 미소를 지닌
마애불여래좌상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애불여래좌상의 인자한 모습과 바위를 뚫고 나와 중생의 고뇌를
다 없애 주려는 듯 현현(顯現)한 그 눈빛을 보기위해 유랑자는 지림사에 도착 절집 마당까지 들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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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하나 없는 적막감까지 감도는 조용하고도 한가로운 절집이다. 유랑자를 반기는 것은 절집에서 키우는듯한
요란스러운 개 두 마리, 시끄럽다. 그 요란함에도 불구하고 절집에선 인기척 하나 없다. 유랑자는 차에서 내려
애써 태연한 척 마애여래좌상 앞으로 다가간다, 유랑자는 먼저 합장을 하고 머리 숙여 기도를 하고 비로소 석
불좌상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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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뒤편의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였으며, 곳곳에 작은 부처를 표현하였고, 머리광배의 중심에는 정교한
연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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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여래좌상은 높이 5m, 너비 4m의 커다란 암반에 새겨진 높이 4.3m의 거대한 불상이다. 다만 조성된지 천 년도 이미 훌쩍 넘었
으며 야외 노천암반에 새겨진지라 비바람에 노출되어 왔기에 여기저기 깨지거나 마멸된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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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지 오래 되었고 자연적인 침식으로 인해 여기저기 손상을 입은 부분이 많아서 불상의 보존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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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대에 신라의 부처를 경배하고자 27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리며, 500여명의 수도승들이 있을 정도로 한
때는 큰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작은 초라한 절집에 불과하다, 정조 때 저술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지림사는 문수산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까지 큰 사찰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추론(推論)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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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타 없어졌다’ 느니 ‘축서사 때문에 사세가 기울어서 없어졌다’라는 소문만 무성하게 전해오고 있을 뿐
이다. 현재의 지림사는 1949년경 권보훈(權普勳)이라는 승려가 현재 위치에 수월암(水月庵)이란 조그마한 법당
을 세우고 수행을 하다가 1947년 부지정리 중에 땅 속에 묻혀 있던 국보201호인 마애불여래좌상을 발견하고는
마애여래좌상을 보호 관리하며 사명(寺名)을 지림사(智林寺)로 다시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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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특징은, 불상의 몸체가 화강암질 암반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서 조성되어 있는데 이것이 아주 도드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반이 되는 암반으로부터 가장 튀어나온 부분은 무려 1.7m나 된다고 하며, 이는 마치 부처가 바위 안에서 막 튀어나와 앉
은 듯한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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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지리마애여래좌상은 호골산(虎骨山) 줄기 끝부분의 자연 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 앉을 거대한 방 모양의 공
간을 만들고, 그 안에 양각(陽刻)으로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다. 1980년 9월 16일 국
보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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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산에 일부 묻혀있었던 불상!. 그냥 세월의 탓일까?. 아니 야산의 흙이 일부 흘러내려 시간과 바람이 덮어 묻
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랑자가 추측해 보건대 일부 불상을 덮어 놓았던 야산의 흙을 파 내리고 터를 다듬어 놓
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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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애여래좌상은 7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부조형식의 여래좌상으로 야산 기슭의 천연암반에 조각되
어 있는 것을볼 수 있다. 그리고 불상 보존 관리를 하기 위하여 현재 주변엔 맏배 보호 각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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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기고 떨어져 나가기도 해서 거친 느낌을 준다. 시무외 여원인
의 수인(手印)을 갖추고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주위로 화불(化佛)이 조성되어 있는데 신광 부분인 몸 양편에
화불이 각각 두 분씩 네 분이 새겨져 있고, 두광에는 깨지지 않은 부분에 두 분이 있는데, 전체가 다 있었다면
두광에는 일곱 분을 새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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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괴산 각연사의 비로자나불이나, 부석사 자인당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의 광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라 석
불의 광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정형적인 부조 양식이다. 두광에는 연꽃 모양이며 그 주위에는 불꽃무늬가 어
렴풋하게나마 남아 있다. 얼굴은 넓고 큼직하며 풍화가 심해 표정이 뚜렷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어려 있어 원만한 상호였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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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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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큼직한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박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다소 움츠린 듯하지만,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양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에서 U자형의 굵직한 주름을 이루
면서 양팔을 거쳐 길게 늘어져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까지 덮고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고 왼
손은 무릎에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큼직하게 표현되어 불상의 장중한 멋을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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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감실의 돌벽(石壁)도 무너졌고, 불상에도 손과 발이 떨어져 나가있으며 군데군데 다소 파괴되고 풍화되었
지만, 아직도 부처의 위용(偉容)은 여전히 남아 있는 편인데 거의 원각상에 가깝게 높은 돋을 새김(양각)으로 새
겼기 때문에 위엄(威嚴)스러운 모습이 더욱 돋보인다. 더구나 네모진 얼굴에 내면적인 힘과 고졸(古拙)한 미소
를 은근히 나타내고 있어 편안한 느낌을 준다.
~~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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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s://cafe.daum.net/b2345/9toB/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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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물야면 문수로 449-66
(지번)물야면 북지리 6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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