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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7주일(2020-02-23)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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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사랑하고 애덕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 대해 선의로 기도해 주며 자비로운 마음을 보이는 것은 더더욱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길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자비로움이야말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이며,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 안에서도 마음이 갈려 서로를 적이라 생각하는 것이 일상인 이 시대에 자비와 관용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
[금주의 말씀(요약)] : [제1독서 : 레위 19,1-2.17-18 / 제2독서 : 1코린 3,16-23 / 복음 : 마태 5,17-37]
[제1독서 : 레위 19,1-2.17-18] :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 하느님께서 그러하시듯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르신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제2독서 : 1코린 3,16-23] :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 또한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므로, 분열과 미움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고 가르친다. [복 음 : 마태 5,38-48] :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우리 완전함의 척도를 하느님과 비교하심으로써, 우리가 사랑의 삶을 끝없이 추구해야 함을 가르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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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7주일(2020-02-23) |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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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의 마음을 모두 헤아리시는 예수님,
진심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며,
진심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이
비난당하고, 무시당하는 지금 이 현실에
절망하고, 낙담하기 보다는
저희의 마음을 이해하시고, 보듬어
들어 올려 주시는 당신께
나아가고, 희망하게 하소서.
진실이 왜곡되고, 선함이 무지해 보이는
세상 안에서도 그리스도 고통의 신비를
마음에 품으며 믿음으로 희망하며
그 희망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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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7주일(2020-02-23) | 말씀 묵상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Lectio Divina & Comtemplation] * 제1독서 : 레위 19,1-2.17-18 / 제2독서 : 1코린 3,16-23 / 복음 : 마태 5,38-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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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경우, 성당에 들어서면 정면 벽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는 침묵 속에 계신 예수님 고상이 온통 손과 발이 못에 박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달려 있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뺨을 때리고 조롱을 해도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로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모습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 참 많습니다. 용서는 용서받을 이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청할 때 성립된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는 아직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저렇게 십자고상의 모습처럼, 왼뺨을 때려도, 오른뺨을 때려도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온전한 자기 비움의 상태입니다.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바보가 되었을 때나 가능한 것입니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이렇게 자기 존재를 무화(無化)해야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당마다 십자고상이 걸려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 죄로 말미암아 상처 받으신 하느님께서 저렇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용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보고 생명을 얻었듯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 용서의 마음을 헤아릴 때, 상처 난 우리 마음에 새살이 돋고, 그분처럼 왼뺨도, 오른뺨도 내어 주는 바보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
† [주일묵상-1]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처럼! |
악 몰아내는 방법은 모욕에 아예 응답하지 않는 것
이웃을 하느님 자녀로 보는 시선에서 사랑 태어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 되라는 것은
하느님 사랑 모습 그대로 지상에서 완성하라는 뜻
주님, 말씀으로 저희 삶을 비춰 주소서.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들아,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 103,1-2) 오늘 화답송인 이 시편은 저의 애송 시편입니다. 이 시인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은총 가운데 있거나 죄를 지었거나 하느님이 저에게 해주신 일을 기억하면서 제 상황과 상관없이 한결같이 자비로운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이것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가르칩니다.
■ 복음의 맥락
사순시기를 앞둔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마태 5-7) 절정에 해당합니다. 복음은 두 단락(5,38-42; 5,43-48)으로 이뤄지는데 주제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고 사랑하고 용서하라 입니다. 마태오의 청중은 대부분 유다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종교적 관점에서 자신을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척도는 ‘마음의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는 사랑으로 행동했는가?”보다 “나는 율법에 순종했는가? 어떤 규칙을 어긴 적은 없는가?”를 질문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율법주의를 넘어 그리스도인의 특성인 참된 사랑을 실천하라고 초대합니다.
■ 폭력을 포기하여라
예수님은 먼저 고대의 ‘동태 복수법’에서 출발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무한하신 선하심과 자비’를 삶의 방향으로 제시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늘나라 선포로 가능하게 됐습니다. 폭력을 포기한 것은 예수님이 수난에서 보여 주신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태도는 악을 선으로 이기시는 놀라운 교육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지점에 이르는 첫 단계는 폭력에 폭력으로 응답하지 않는 것, 비폭력입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느린 여정을 요구합니다.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며 훈련, 절제, 분노의 본능과 미움의 유혹을 거스르는 투쟁, 식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 안에서 동태 복수법은 폭력을 완화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과 나약함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서 악을 근본적으로 몰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모욕에 아예 응답하지 않는 것, 가장 수동적인 행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아십니다. 이렇게 해서 악의 탄생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는 자신이 겪는 큰 어려움 안에서도 자신이 이미 받은 하느님 사랑의 관점에서 모든 이의 선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응답합니다.
■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어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대해 본격적으로 가르치십니다. 이웃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 가족, 친구, 동료, 동족, 넓게는 타자도 포함됩니다. 이웃은 한 마디로 ‘나의 사람들’입니다. 나와 가까운 이들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인데 왜 굳이 지켜야할 계명으로 정해놓고 항상 지키게 했을까요? 아마도 우리가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나의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원수는 집 안에 있다”라는 라틴 속담이 있습니다. ‘나의 사람들’을 존경과 예의로 대하기보다 내 만족과 필요에 따라 그들을 대하지는 않습니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내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을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초대입니다. 내 이웃을 거룩한 ‘주님의 성전’(1코린 3,16-23), 고유한 소명과 은사를 가진 하느님 자녀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진정한 이웃 사랑이 태어납니다. “나는 우리 안에서 우리 편에서 먼저 행함이 없이 세상 밖에서 세상을 향상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네덜란드 작가 에티 힐레줌).
■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은 이웃만이 아니라 박해하는 원수들도 사랑하라고 합니다. ‘원수’에 해당하는 원어는 ‘미움, 적대, 반대’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서 박해자, 이교인, 우상숭배자, 그리스도인의 이상을 변질시키는 사람들인데 온갖 형태로 우리를 미워하고 반대하면서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이를 상징합니다.
‘사랑하다’(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동사는 신약에서 개인의 감정적인 사랑보다는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 봉헌하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교육 받고 훈련돼야 하는 사랑입니다. 지식(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악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것, 말의 신중함, 현실 관계에서 적응하는 능력)로 계속 성장해야 하는 사랑입니다.(필리 1,9-11)
나아가 예수님은 원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기도와 연결하십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 은총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의 신비에 비춰서, 완전하고 흠 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악을 행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원수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내적으로 가장 큰 에너지, 즉 신앙의 힘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되어라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사랑의 계명을 아버지의 모범과 연결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완전한’(텔레이오스(τέλειός)이라는 말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라 ‘완성한, 이룬’이라는 뜻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모델로 삼아 우리도 이 지상에서 사랑을 완성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 아들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 때문에, 말과 행위로 하느님의 완전함을 보여주신 것 때문에 우리는 이런 사랑에 접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완전한’이라는 말은 ‘거룩한’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인간에 대한 자비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어떤 의무를 강요하기보다는 우리 존재의 뿌리, 우리가 하느님 자녀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유다 교육 철학의 모토는 “너희 창조주를 본받으라”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가르치는 학교인 복음서에서 오늘도 사랑의 수업을 받습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말씀자료 : 임숙희(레지나)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가톨릭신문)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주일묵상-2] : 원수를 축복하고 사랑하라 |
주일에 피치 못할 일로 미사 참례를 못 한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오늘 신부님의 강론 말씀이 무엇이었나요?” 남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다만 아내를 힘껏 껴안아 주었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감격한 아내는 다음날 새벽 미사가 끝난 후 본당 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님! 어제 강론 말씀이 너무 좋았나봐요. 저희 남편이 달라졌어요. 무슨 내용이었나요?” 그러자 신부가 대답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원수에 대한 복수를 미덕으로 삼는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그래서인지 ‘원수 같은 남편’, ‘원수 놈의 자식’이라는 표현을 자주 들을 수 있다. 가까운 이웃이나 가족에게 얼마나 많은 아픔을 당했을까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원수라는 대상이 가장 가까운 곳에 함께 살아가는 경우가 아주 많다. 성경을 살펴보면 아담에게는 아내인 하와가 그랬고, 아벨에게는 형 카인이 원수였다. 야곱의 원수는 그의 형 에사오였고, 요셉을 팔아넘긴 형들과 예수를 팔아넘긴 제자 이스가리웃 유다스를 들 수 있다. 사랑해야 할 원수라는 대상이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가족과 이웃이기에 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원수를 대하는 모습에는 5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 원수에 대해 칼을 품고 복수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대부분 원수가 망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망한다. 둘째, 직접 복수하지 않더라도 원수의 멸망을 손꼽아 기다리는 단계다. 하지만 자기 마음만 불편한 상태에서 일도 잘 안 되고 오히려 원수는 더 잘 될 때가 많아 더 속상하다. 셋째, 편한 마음으로 원수의 종말을 지켜보는 단계다. 노자는 말했다. “스스로 원수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말고 그의 시체가 강물 위로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라.” 이것은 원수가 정말 나쁜 일을 했다면 반드시 망할 테니 사필귀정을 믿고 편하게 지켜보라는 것이다. 넷째, 원수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잊어버리라는 단계다. 자기 할 일만을 생각하고 원수가 어떻게 될지 지켜보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원수에게 복수하는 가장 좋은 길은 원수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다섯째,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원수를 축복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어렵다. 그러나 원수가 가까이 있다면 한번 해봄 직하다. 원수를 미워함으로 스스로를 힘들게 해 자신의 영혼까지 파탄 나게 할 것이 아니라, 원수를 위해 기도해줌으로써 자신의 평화를 얻으라는 것이다.
다만, 원수에게 받은 손해와 상처는 어디서 보상을 받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나는 늘 손해만 보고, 부당한 일을 당해야만 하는지의 문제이다. 바오로 사도는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라고 말했다. 복수는 하느님께 맡기고 우리는 더 큰 사랑을 위하여 원수에게 잘해주고 축복해주면 복수의 쾌감이 아닌 영혼의 행복으로 우리를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느님께 맡기면 모든 일을 가장 선하고 적절하게 처리해주신다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원수에게 ‘잘 대해주고, 축복하고, 기도해주는 것’뿐이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뿐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푸신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마땅히 원수를 사랑하고 잘 대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
[말씀자료 : 임상만 신부(평화신문)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주일묵상-3] : 내 이웃 완전한 사람들 |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잘 해야 할 것은 ‘사랑하기’입니다. 불교인이 ‘자비’라면, 우리는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완전한 사람은 사랑 잘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시며 열변을 토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완전한 사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건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야! 라는 말이 한숨과 함께 나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도 속이 후련하지 않은데, 양쪽 뺨을 다 맞도록 가만히 있으라고요! 같이 천 걸음 걷자고 하면 이천 걸음을 같이 걸으라고요! 제가 한가한 사람인 줄 아십니까? 제 일도 바쁩니다. 남 따라 그렇게 걸으면 뭐가 나옵니까? 저도 없는데, 뭘 다른 사람에게 줍니까? 제가 달라고 해야 할 형편입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 주변에 완전한 사람이 있습니까? 완전한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신가요? 예수님께서는 불가능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신 것일까요? 돌아보면, 적지 않은 분들이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2004년 12월에 저는 일주일간 무전도보성지순례를 했습니다. 돈 없이 걸어서 일주일간 돌아다녔습니다. 스무 번의 식사와 여섯 밤의 잠자리를 생전 본 적 없는 분들에게 청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밥을 주셨습니다. 덤으로 커피도 주셨고, 걸어가면서 먹으라고 과일과 떡을 쥐어 주셨습니다. 천 걸음을 청한 저에게 이천, 삼천 걸음을 같이 가줬습니다. 어떤 분은 초등학교 6학년 딸의 방을 저에게 내어줬습니다. 달라는 제게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우리가 속상해서 실컷 욕하고 싶고, 누구라도 잡고 한 대 때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엄마, 아버지, 형, 동생, 누나, 친구, 그 누군가를 잡고 하소연, 화풀이, 신경질을 냈습니다. 그 때 그분들은 우리의 못난 행동을 가만히 받아줬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괜찮다!”면서 위로를 해주시고, 밥까지 사주며 돌봐주셨습니다.
학창시절 얼마나 많은 선생님들께서 우리를 지켜주셨습니까! 선생님들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저희를 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으로 참기 어려운 상황들도 많으셨을 텐데, 우리에게 당신의 다른 뺨마저 대시며 우리를 안아주셨습니다. 당신들의 모든 것을 다 내주셨습니다.
우리는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만 좋아했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친구들은 나 몰라라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누구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매일 버려지는 아기들이 얼마인지 아셔요? 그 아이들을 받아 안고 키우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있는지 아셔요? 금전적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떤 칭송도, 명예도 없는데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오히려 그를 위해 구명운동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분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이 지극한 사랑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입니까? 가진 작은 것을 나눠주시는 분, 마음을 나눠 더 기뻐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덜 고통스럽게 해 주시는 분, 온전히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분, 이 완전한 우리의 이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옆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이웃들이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오늘 하루 살아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완전한 이웃이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넘치는 사랑을 우리는 받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늘의 우리 아버지께로부터 왔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신세를 많이 지었습니다. 받은 것을 또 다른 이웃에게 나눠줘야 할 때입니다. 우리도 하늘의 우리 아버지처럼 완전한 모습으로 내 이웃 옆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죠?............◆
[말씀자료 : 김동일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주일묵상-4] :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라는 말을 탤런트 김혜자씨가 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특히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람들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며칠 전 발톱을 깎다가, 깊이 깎는 바람에 걸을 때 불편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은 어느 한 곳이 아프거나, 불편하면 온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오늘 특별히 고통과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지치고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센 폭풍우 뒤에 따사로운 해가 떠오르듯이, 어둠을 뚫고서 새벽이 오듯이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들 모두의 시름과 고통을 씻어주는 한줄기 빛으로 오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러한 고통과 시련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인 레위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형제와 자매의 고통과 시련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의 눈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모두 하느님께 속해 있고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습니다."
국경없는 의사회는 언제나 바쁘다고 합니다. 재난과 고통의 현장으로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국제 사회의 많은 구호 단체들은 자신의 일처럼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재난과 사고의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한 가족이라는 인류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바람과 해님'이란 동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동화이지만 어릴 때 제게는 커다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동화 같은 이야기가 현실의 삶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권위주의적이고, 오직 자신만을 아는 남편이 어느 날 아내에게 17번째 결혼기념일 선물로 예비신자 교리 신청서를 적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런 불평 없이 17년 동안 남편의 말을 들어주고, 시부모님을 극진히 섬기며, 아이들을 잘 키워주는 아내가 고마웠고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물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아내가 그토록 원하는 신자가 되기로 결정했다는 남편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뭉클했습니다. 17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가족들을 대했던 그 자매의 정성도 놀라웠지만, 완고한 남편을 부드러운 남자로 변화시켜 주신, 그래서 지금은 구역장 일도 열심히 하는 그 남편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힘에 놀랐습니다.
온갖 사건과 사고의 틈바구니에서, 마치 바위틈에 여린 꽃이 피는 것처럼 주변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이야기, 훈훈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한 아이를 입양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병들고 아픈 아이들을 입양해서 기르는 가족도 있습니다. 평생 모은 재산을 기꺼이 장학기금으로 기부하는 어른도 있습니다. 30년 동안 참고 참아서 드디어 남편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린 분도 있습니다. 자칫 어둠에 가려,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논리에 가려서 아름다운 이야기, 훈훈한 이야기, 감동을 주는 이야기들이 묻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결국 어둠을 이기는 한줄기 빛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우리는 신앙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의 오른 뺨을 때리면 다른 쪽도 대 주십시오. 누군가 오리를 함께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십시오. 누군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십시오.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마십시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완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말씀자료 : 조재형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주일묵상-5] :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가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 |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신앙인 앞에 어떤 전망이 열리는지를 알립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비롯하여 인류가 지키는 법들이 열어주는 시야를 훨씬 능가하는 전망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린다는 말씀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은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일컫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가 질서 유지를 위해 만든 법입니다. 잘못한 사람에게는 잘못한 그만큼 보복을 한다는 법입니다. 보복 당할 것이 두려워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게 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보복이 두려워 유지되는 사회질서를 훨씬 넘어서는 어떤 질서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계속합니다. ‘누가 당신의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다른편 뺨마저 돌려대시오.’ 그대로 하다가는 남아 날 뺨이 없을 것입니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옷마저 내주시오.’ 속옷 내주고 겉옷마저 내어주면 알몸입니다.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시오.’ 천 걸음을 강요하는 사람에게는 천 걸음만 필요합니다. 그 이상 가겠다고 고집하면 또 뺨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천 걸음을 가주라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새 법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법을 가르치는 율사도 아니고, 법을 집행하는 통치자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는 예언자이십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도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새로운 실천을 알리는 예언자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어떤 사람과도 대결의 관계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롭게 이해타산하지 않고, 흔연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내어주어서, 이웃과의 연대성을 소중히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이고, 이웃과의 연대성도 그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기에, 베품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 한 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하는 처세입니다. 나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동물 세계에서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기본자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달리 가르치셨습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친 분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하시는 바를 당신 스스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후에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던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악을 악으로 극복하지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악을 악으로 극복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동태복수법은 인류가 만든 모든 법률의 기본입니다. 오늘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피해를 준 그만큼 국가 공권력이 벌을 주는 것입니다. 동태복수법의 정신은 이렇게 아직도 인류역사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 정신에 익숙한 우리는 가해자에게 당연히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잘 하는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도 벌주신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악을 악으로 극복하신다고 믿는 데서 나오는 발상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벌하신다는 말을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것은 흔히 말하는 인도주의(人道主義)적 박애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다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시야에서 잃지 않았던 것은 하느님이었습니다. 사회의 질서와 인간관계를 보는 우리의 시야에도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그분은 믿었습니다. 인간 사회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도,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악은 하느님 안에 없습니다. 악을 악으로 퇴치하며 질서를 보장하겠다는 생각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그분의 자녀는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남을 성토하고 비난하는 것은 그리스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생명이고, 인류의 연대성이기에, 우리가 추구하는 질서도 당연히 베푸심으로 채색된 것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비, 사랑, 용서 등을 기본 질서로 한 인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십자가 앞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빌며 그것을 감수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세례는 한 순간에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는 마술이 아닙니다. 자유를 지닌 인간입니다. 우리의 자유가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살도록 하겠다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그 호적에 이름이 올랐기에 그 생명은 부모의 자녀가 다 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난 생명은 오랜 양육의 시간을 거치면서 그 부모의 정신과 삶의 자세를 배웁니다. 그래서 그 부모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을 배워 그분의 정신을 실천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자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운동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우리 삶의 모든 여건 안에 살아계시게 하겠다는 운동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살아 있게 살겠다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자비와 사랑과 용서는 나약함이 아닙니다. 부모가 나약해서 자녀를 사랑하고 용서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와 경쟁하지 않고, 더 많이 가져서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부모는 베풀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부모는 알든, 모르든, 자녀 앞에 하느님에게 기원이 있는 삶을 삽니다. 내어주고 쏟아서 베풀었다는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기에 그분은 하느님 안에 살아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열어주신 전망 안에서 살라고 말합니다..............◆
[말씀자료 : 서공석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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