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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장 시 모음 71편
《1》
갈대
이오장
흔들려줬으므로
자리를 지킨다
더 크게 흔들렸으므로
너를 붙든 손 커진다
움켜쥔 땅이 무너져도
네 속에 박은 뿌리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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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감 떨어졌다
이오장
털퍼덕 짓이겨진 감
구둣발에 밟혀 끈적거리는 감
까치가 먹다 남긴 감
가지에 붙어 말라버린 감
형사의 매서운 감
증권거래소 딜러의 송곳감
자동차 안전운전감
앞 못보는 사람의 촉감
코로나 걸린 사람의 미감
회초리 맞는 육감
점술가의 예감
정치인의 미래 감
코로나바이러스 침입으로
횡설수설 설왕설래 우왕좌왕
여기저기 떨어져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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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 건너 흰 저고리
이오장
강 건너에 무슨 일 있나
황톳 빛 햇살 아래
지붕 위로 흰옷 걸렸다
어느 혼령 불러 불사조를 키우는지
어둠 잠긴 산골짝에
가시넝쿨 촘촘하다
길 막혀 가지 못하는 걸음
바닷물 차 올라오지 못하는 걸음
엇갈려 마주한 샛강에
가냘픈 백로 모가지가 다리를 놔도
밟고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 없다
참새 노래는 진군가
비둘기 노래에 발맞추는 행진
쏴 올린 미사일 따라가고
입 막은 확성기는 귀만 커져
발등에 떨어진 이슬 소리 듣는다
강 건너에 어떤 혼령 내렸는가
기수역 오가는 물고기마저
입 벌려 남북을 지웠는데
지붕마다 내 걸린 흰 저고리
철조망에 갇혀 붉은 녹물에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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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화횟집
이오장
행복을 얻기 위한 삶이라면
파도 위에 뜬 바람이다
잃을 것도
가질 것도 없는 삶인데
무엇을 얻으려 다투는가
석모도를 이어주던 카페리호
뒤따라 다니며 먹이를 찾던
갈매기를 봤지 않았는가
뱃길 끊겨 고삐 묶인 빈 배에서
허무를 읽지 않는 다네
길이 힘들다면 외포리로 오라
선창가 돌머리에 서서
갈매기 나는 폼새 살펴보고
강화횟집에 앉아
바람 타는 것을 배워라
행복은 맛을 찾아가는 길
바다와 육지가 버무려진 그 맛이
그대가 바라는 삶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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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거기 그 카페가 있네
이오장
하늘과 견주려고
불쑥 솟구친 명성산
호수 깊이가 궁금하여
뛰어들었다가
그림자만 남았다
욕심은 쥐어지지 않는 허상
믿음으로 이룬 터에
사랑의 탑을 쌓는 다면
보이는 것만으로 이름 얻는 것
바위자락에 새긴 명성도
시간을 스쳐 가는 허상이지 않은가
만족한 삶으로 이름 불리려거든
산정호수에 오라
호수를 품은 카페 거기에 앉아
산과 물을 마주하고
삶의 그림자를 돌아 보라
한 생의 행복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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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매화
이오장
남쪽 꽃 소식에
승용차 키 집어 들고
운동화 끈 고쳐 매는데
빨래줄 붙든 아내가
화단에 고매화 피었다고
반가운 목소리를 낸다
신발 신으려다 바라보니
창문에 꽃 빛 물들어
아내 얼굴이 환하다
서랍에 키를 넣고
신발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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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석정 한우촌
이오장
철원평야 말달린 궁예의 호령
동족에게 쏘아댄 잔인한 포탄도
두루미 날개 짓에 잦아들어
평화의 공원이 된 한탄강
직탕폭포 물보라에 젖어 걷다가
송대소 주상절리에 환호성 지르며
하늘 딛 듯 순담계곡 잔도를 걸었다면
물위를 걷는 마술 부려보자
기암괴석 골짝따라 둥둥 뜬 길
어지럽게 둘러보며 올라가면
임꺽정 놀이터 고석정 기이롭다
금수강산 평화의 땅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산천을 흐르고
무성한 초록에 소가 살찐다
금강산도 식후경 잊지 마라
배고픈 걸음이 보는 건 바위 뿐
한우촌 감미로운 고기 맛에 젖어
은하수다리 날으는 두루미를 보자
천하절경 철원에
천하일미 한우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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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운님
이오장
질기와지붕 위에
와송 몇 송이
노랗게 물든 은행잎 날리고
전정 된 늙은 소나무 아래
측백나무 푸른 노래 따라
실개천 타고 흐르는 가을빛
색색으로 물든다
새소리에 귀기울이다
당닭 울음 쫓는 걸음 앞에
넓게 자리 잡은 느티나무
삶의 멍석이 깔리고
노을 빛 잠들다
석양에 물든 외로움
차탁에 부렷는데
찻잔 앞에 있어야 할 고운님
꿈속에서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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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절통
이오장
관절통을 팝니다
무릎 어깨 발가락 통증이
최고로 저렴합니다
척추협착증 근육통은 매진
오전에 다 팔렸습니다
기부는 하지 않습니다
대등한 것과는 교환이 됩니다
어서 오세요
세상 사람 전부가 가진 건 아닙니다
일 많이 하고
용기가 많아 저돌적인 사람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
통증이 없다는 건 게으름의 증거지요
사람답게 남자답게 살았다고
큰소리치고 싶다면
망설이지 말고 가져가세요
오래 산 고목에 상처가 많고
큰 바위 색이 더 검지요
삶의 증거를 남기고 싶다면
아주 싸게 드립니다
이제 딱 하나 남았습니다
발가락 관절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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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냥
이오장
몇 송이냐고
고민할게 뭐 있어
그냥
꽃 한 송이지
밤하늘에 별
그걸 왜 세여 봐
그냥
별 하나 인데
너는 다르지
꽃, 별 하나 하나 마다
네가 있지
어느 곳을 쳐다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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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금봉 횟집
이오장
파도를 담기에는
바다가 너무 작구나
금봉아
자리를 넓혀 날개를 펴라
돛대 없이 떠가는 배가
파도를 희롱하는데
갈매기는 달아나기만 하고
물거품 속에서 퍼져 나오는
바다향 짙어간다
고기들 헤엄치는 모습 비춰내고
산 그림자 울렁이게 하는
주문진 앞바다
사철 푸르러 노랫소리 울린다
너의 날개는 파도를 덮고
대관령 넘어 세상을 품는데
움츠리지 마라
날갯짓 한 번에 설악이 흔들리고
울음 한 번으로
동해바다 잠든다
잠든 용보다 꿈이 큰 금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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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길
이오장
늙은 나무에서 떨어진 잎들이
언덕길을 넘어갑니다
곧게 뻗은 길에서는
옆을 보지도 않은 채
바람을 앞서 달립니다
회양목 아래 굽은 길에서는
서로 얽혀 풀어내느라
느릿느릿 걸어갑니다
가지에 돋아났을 때는
봄날의 따듯함을 몰랐고
장마의 지루함을 비벼가며 말렸어도
서리맞아 비틀어진 채
소리 질러 이웃을 찾다가
한꺼번에 떨어져 흩어져 갑니다
길은 가는 길뿐입니다
오는 길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길은 되돌아설 수 없는 길
가는 걸음만 있습니다
배웅하지 못하는 나무는
바람 앞에 손가락을 펴주지 않습니다
낙엽 따라 내 걸음이 바람을 앞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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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깃대종
이오장
인천 앞 바다
심학규 지팡이 젖듯
갯벌을 휘 젖는 저어새
백 번 저어 찾는 먹이 두 마리쯤
휘어진 모가지 뻘을 파고든다
월미도 광장에 판 벌린
대통령선거 유세무대에
큰 항아리마냥 입 벌린 확성기
표 구걸하는 헛소리
향단이 그네 밀듯
이러저리 떠들어댄다
75억 명 사람 속에
4,800 마리가 남은 저어새 고개짓과
5천 만 사람 틈에
14명이 젓어대는 소리
시알머리 파고들 틈이 없어
파도를 향해 흩어져가고
둥근 땅 위에 우두커니 선 깃대에
내뱉은 헛말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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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깐부
이오장
손잡고 단상에 오르는 순간
눈길 받는 자와
박수 받는 자로 나뉜다
확성기 소음이 찢기도록
휘둘러진 깃발은
꿰메지 못한 채 말 둑으로 서고
카메라 눈은 소리를 따라간다
투표용지 칸 나눈 대로
하나의 붉은 점 얻을 때까지
구두끈 풀리는 걸 모르고 뛰어도
오징어게임 금 밖을 맴돌 뿐
술래잡기 친구를 잃는다
세모로 접으나 네모로 구부리나
보이지 않는 속은
뒤집을 때까지 말 문 닫는데
동무라고 어깨 내주겠는가
단상에 남아 두 손 흔들 때까지
깐부는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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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꾀꼬리
이오장
행주산성 강변에
꾀꼬리 부부가 산다
버드나무가지에 앉았다가
지나는 사람 불러 세워
목청껏 노래 불러주고
겨드랑이 열어 노랫값 받는다
둥지 찾아낸 구렁이
시끄럽게 짖어대는 까치에게
노래 불러 대들고
새끼 먹이려고 잡아 온 벌레
돌팔매질하는 아이들에게도
노래로 달랜다
노랑 옷 한 벌로 한 계절 보내고
붉은 나뭇잎 박차고 떠날 때까지
한여름 더위를 보듬고 산다
행주산성 졸참나무 숲에
나를 닮은 꾀꼬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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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나는
이오장
해오라기의 기다림은
낚싯줄에 묶인 사치
독수리의 눈빛은
태양을 잃은 허무
부엉이의 밝음은
끊기지 않은 슬픔의 연실
참새의 뜀뛰기는
쉬지 못하는 고난
저어새의 입놀림
갈매기의 부지런함도
갖추지 못한 나는
숨죽이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 가마우지
보이지 않는 것을
오직 입으로 찾는
무식한 물새
입에 문 불고기 뺏기지 않으려
즉시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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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날지마라
이오장
두 물이 만나는 유도에
백로는 왜 날아다니느냐
마파람 속에 서서
목 터져라 부르는 소리
날개에 부딪칠라 멀리 가거라
어머니, 어머니
늙은 누이야
문밖에 서성이는 모습 훤히 보이는데
어찌 대답이 없느냐
강둑에 부딪쳐 메아리치는 소리
여기에서도 귀가 아픈데
누가 입 막아 대답 못 하느냐
연미정 처마에 깃발 달고
돈대 꼭대기에 나팔 매달아
물때마다 발 굴러 불러대어도
훤히 보이는 내 고향 언덕에는
붉은 깃발만 펄럭인다
백로야, 백로야
소식 전할 제비 불러라
넘어진 느티나무 그루터기에
잠자리 앉아 두리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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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놀부 놀이
이오장
공원 숲에서
엄지만한 상수리 두 알을 주워
손바닥에 놓고 둥글리다가
연못에서
크게 입 벌린 잉어에게 던졌다
목이 말라
페트병을 열어 한 모금 마시고
발 밑을 기어가는 개미를 잡아
주둥이에 물을 부었다
물까치 몇 마리가
길 양쪽으로 번갈아 날다가
벚나무 잎 몇 개를 떨어뜨렸다
아직 푸른빛이 남은 잎에
빨리 마르도록 입김을 불었다
재난지원금 통장 조회하고
소리 지르는 넥타이 맨 노인 앞에서
막걸리 두 병을 사서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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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단단한 것이 탑이 된다
이오장
인조대왕 머리는 도토리묵
삼전도 모래밭에서 조아리다
죽살이쳤다
윤집 오달재 홍익한
삼학사 머리는 짱돌
머리 깨진 임금 앞에서
나라를 위해 통곡하다 잘렸다
최명길 머리는 나무통
백성을 구하려고 머리 숙였다가
살았을 땐 손가락질 당하고
죽어서는 이름 날렸다
김상헌 머리는 바윗돌
태풍이 몰아쳐도 절개를 지켰다
밀짚모자 대통령 머리는 쇳덩이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려
앉은뱅이 탑 되었어도
참배 객이 끊이지 않는다
☆★☆★☆★☆★☆★☆★☆★☆★☆★☆★☆★☆★
《20》
단풍
이오장
무엇을 가졌냐는 물음에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했지
꿈이 뭐냐고 묻더군
그것도 잊었다고 말했지
삶의 가치를 모른다고 하더군
실망하지 않았어
가진 것도 꿈도 없으니
가치가 있을리 없었으니까
어느 봄날
산 아래를 걷다가 너를 만났지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그때부터 알게 됐어
무게가 없어도 충분했지만
너에게 준 것은 꿈 뿐 이였어
얼마의 무게를 지닌지 모른 채
전부를 줬다고 믿었어
넌 그걸 밟고 다녔으니까
이제는 알아
꿈마저 단풍 들었다는 걸
그래도 절망하지는 않아
단풍 든 채 굳어 흩날리지는 않으니까
거기에 머물러 영원히 함께 할거야
☆★☆★☆★☆★☆★☆★☆★☆★☆★☆★☆★☆★
《21》
도를 얻다
이오장
법당의 부처가
말문 닫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붉은 피를 흘린다
터번을 벗은 마호멧 얼굴에
수염이 가득하다
공자의 말씀
입에서 나온다
장자의 글
붓으로 그렸다
먼저 죽은 소크라테스
차지한 땅을 두고 죽은
진시황제
권력자와 고개 숙인 자
얻은 자와 잃은 자
모두 사람
주식은 팔고 나면 오른다
☆★☆★☆★☆★☆★☆★☆★☆★☆★☆★☆★☆★
《22》
돈대
이오장
지켜야 돈
놓치면 쓰레기다
광성보 용두돈대 방호벽 넘어
바윗자락 물 잠근데 까지 내려간
소나무 소사나무 아까시나무
손잡고 고깃길 살핀다
밀물 소리 귀에 담아
첨병의 봉화탑에 올리고
썰물 소리 눈으로 옮겨
관측소 망원경에 보낸다
헤엄치는 암초가 일으킨 물살에
낚시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고기를 낚았을까
빈 바구니 털어 낸 돌 바닥에
낙엽 몇 장 뒹글고
느릅나무 가지에 노박덩쿨 매달렸다
놓친 고기가 크다
낚싯대 부러트린 건 바윗자락 콧대
밤샘하며 지켰던 보초병은
낚시꾼 뒤에서 굳었고
활어 수송차의 대기시간은 지루하다
손에 쥐어야 돈이다
☆★☆★☆★☆★☆★☆★☆★☆★☆★☆★☆★☆★
《23》
두무진
이오장
신이 한 살만 젊었다면
저렇게 깎지는 않았을 거다
술 취한 듯 비틀거리는 손으로
형제바위를 다듬다가
사이에 낀 해를 빼내느라
장군의 투구는 비틀어지고
칼자루 쥔 손에 돌맹이가 들려
갈매기가 툭툭 쪼아댄다
매서운 파도가 그랬다고
어느 해 불어온 태풍이 깎았다고
그렇게 말하지만
저건 분명히 신의 작품
지구 위에 명품이 아니던가
장산곶 지켜보며
파도를 솎아내는 두무진
하늘 이야기로 시작하여
바위로 말해주는 전설의 조각품이다
☆★☆★☆★☆★☆★☆★☆★☆★☆★☆★☆★☆★
《24》
명자
이오장
모과도 아닌 것이 누구를 닮아
샛노랗게 시치미 떼느냐
광화문 광장에 서서
웃음 짓는 명자야
꿈속에서 놀던 명자는 어디 가고
바람 몰고 와 광장에 똬리 틀어
태극기 흔들다 넘어진
붉은 깃발만 펄럭이는가
꽃 심은데 풀 나고
말 던지면 욕 나오는 광장에
누구 말이 옳고
어느 말이 틀리는가
너도밤나무 열매는 밤이 아니다
나도밤나무 열매도 밤이 아니다
밤 가시에 찔려봐야 그게 밤나무
이름이 같다고 똑같은가
민주 이름 둘러쓴 명자야
얼굴에 분칠 지워라
얇아도 그것은 가면
용을 써도 명자는 모과가 아니다
☆★☆★☆★☆★☆★☆★☆★☆★☆★☆★☆★☆★
《25》
모래용
이오장
탱자가시 들고 귤을 먹었다는 말 뒤에
인절미 안주로 보드카를 마신다는
소문이 거리에 자자했다
애완견 안은 여자가
콜로라도 네인저를 타고
승마대회에 출전하여 준우승했다는
소문도 퍼져갔다
거리는 자꾸 어둠에 싸이고
한쪽 귀를 막은 사람들이
모래알을 들고 광장에 모이면서
소문을 찾기 위한 촛불이 켜졌다
모래알이 하나씩 쌓여
용머리를 만들더니
뱀 가면을 쓴 사람이 뒤에 서서
제 머리를 떼어내고 용머리를 썼다
우뢰와 박수가 터지고
모래용이 푸른 용집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광화문 앞에 모래가 쌓였다
푸른 집에서 내뱉은 말마다
모래먼지가 되어 거리에 채워지고
빗자루 든 사람들이 귀 막고 눈 감았다
이제는 뱀허물이 보이는 용
원래 모가지를 찾아 두리번두리번
발등 덮은 모래가 제 목인줄 모르고
땅에 털털 바닥을 친다
☆★☆★☆★☆★☆★☆★☆★☆★☆★☆★☆★☆★
《26》
목자르기
이오장
법조거리 대검찰청 앞
가지치기가 한창이다
굵은 곁가지
햇빛 가리는 잔가지
비툴어진 어깃장가지들이
파랑색 전기톱
붉은 장대낫
날 선 작두 칼에 싹둑싹둑 잘려
회색 보도블럭 위에 뒹근다
잘린 자리에 피가 하얗다
떨어지는 소리가 파랗다
육중한 승용차 창문이 열리고
파랑 색 넥타이 차림의 범계맨이
이곳 저곳 가리키는 나무마다
톱날이 간다
큰 길 울리는 참수의 비명소리
때아닌 5월 장마 빗소리에 묻혀
교대역 4거리를 달음박질하고
사람들이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본다
☆★☆★☆★☆★☆★☆★☆★☆★☆★☆★☆★☆★
《27》
발자국
이오장
헐값에 산 외로움을
아무에게나 주려고 찾은 광성보
쌓인 눈 위에 찍는
발자국이 한 줄입니다
박새 한 마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나서 주지만 무슨 뜻인지 몰라
힐긋거리기만 합니다
잎이 다 떨어진 신나무에
매화 피듯 눈송이가 맺혔어도
혼자 피어나서 향기가 없고
주목나무에 쌓인 눈은
푸른 잎에 달라붙어 푸름을 탐합니다
혼자라고 확인하는 건 슬픔일까요
힘주어 찍은 발자국이 녹아버리고
큰 울림에 박새도 날아갑니다
처음부터 혼자였다면
외롭다는 걸 몰랐을까요
넓은 창을 마주하고 받은 찻잔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에게
말 걸어보지만 대답 듣지 못하고
창 한 줄 발자국만 확인합니다
☆★☆★☆★☆★☆★☆★☆★☆★☆★☆★☆★☆★
《28》
밤꽃 연상(聯想)
이오장
노고산 가장자리에 밤꽃 피었다
여름비에 젖은 신성한 보금자리
푸르름에 물든 새들이
초록빛 노래를 부르는 샘터
햇살 울타리 넘으려는 밤꽃이
모둠발로 기웃거린다
숲 가운데 용우물
씨앗 키우는 터가 있다
기다림의 불꽃이 타오르는
향기 젖은 긴 밤이 있다
단숨에 달려가려는 몸짓으로
흥건히 햇살 적신 한낮
달밤을 바랬던 성급함이
숲가를 어정거린다
꿈꾸지 않는다
짝 찾는 삶의 연속일 뿐
새들의 울음신호가 숲을 흔들고
개울물에 흘러가는 비릿한 냄새
여름이 깊어간다
☆★☆★☆★☆★☆★☆★☆★☆★☆★☆★☆★☆★
《29》
비치클럽
이오장
파도는 무슨 일로
왔다가 돌아갑니까
몸 내준 바위는 제자리에서
등 돌려 배웅하는데
날마다 갯벌에 쌓인 그리움
씻어가지 못해 발이 빠지고
와도 올라오지 못하는 사랑인지
부딪쳐 깨지기만 합니다
가도 불러 세우지 못하고
불러도 대답하지 못하는
그런 사인지요
갈매기등에 올라 탄 구름
송전탑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선 솔숲에는
피었다 매마른 목련꽃만
떨어지지 못한 채 가득하네요
간다는 말은 남아서 쌓여가고
온다는 약속은 흩어지는 해변에
상쌍이 마주한 연인들이
소나무 숲 비너스상 눈웃음에
서로서로 맞춰 손을 잡는데
오늘도 홀로이 기다립니다
☆★☆★☆★☆★☆★☆★☆★☆★☆★☆★☆★☆★
《30》
비행기
이오장
해를 따려고 솟구치다가
제 소리에 놀라
꽁지 빠지게 달아나
잠 깬 낮 달을 업은 비행기
구름 속으로 숨어드네
☆★☆★☆★☆★☆★☆★☆★☆★☆★☆★☆★☆★
《31》
빈 배
이오장
항해일지 싣고 누워버린 배
썰물 소리 귀로 듣고
밀물 소리 몸으로 듣는다
잠진도 허리께 잘려 나가고
콘크리트에 덮인 길이 서던 날
갯고랑에 던져버린 깃발
잠들 때를 기다리다
노두길 밑 바위에 누웠다
뭍으로 걷지 못하고
물 위로 뜨지 못하는 배
조타실 지붕에 앉아 재촉하는
갈매기 주둥이에 붙은 물때 시간표
사렴도 바라보며 비껴내고
불 꺼진 팔미도 비탈에
깨진 꿈 거꾸로 심는 빈 배
잊혀 진 용유도 전설
영종도에 붙여 비행기에 싣는다
☆★☆★☆★☆★☆★☆★☆★☆★☆★☆★☆★☆★
《32》
사곶 해변
이오장
너를 감싸기 위하여
천잠사로 짠 비단
잠자리 입김에도 나부끼고
살빛 익는 부드러움으로
별내림 받는 하늘 덮었다
한 겹 두 겹 겹쳐 놓고도
감싸지 못하는 너의 무게는
별 둘, 별 셋, 별 넷
얼마큼이면 하나가 될까
사곶 해변에 와서 알았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 하나라는 걸
맨발자국도 찍히지 않는 모래밭은
별을 품고 하나가 되어
우리를 불러 보여준다
비단 보다 가볍고
별 보다 무거운 너는
진즉 내개로 와 하나 였구나
☆★☆★☆★☆★☆★☆★☆★☆★☆★☆★☆★☆★
《33》
사랑 연구소
이오장
머리가 어지럽고 두근두근
허공을 딛는 느낌인가요
아니면
세상의 모든 슬픔 혼자 가져
소리를 질러도 풀어지지 않고 답답 한가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 하여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절망감으로
잠 못 자고 뒤척거리시나요
바늘에 찔린 듯 망치에 맞은 듯
절구질에 꼼짝 못 하는 아픔인가요
꿈속에서 소리 질러도
도망치지 못하는 눌림으로
몸서리치는 고통인가요
참을 수 없는데 표시 나지 않죠
이런 아픔은 치유되지 않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치유되는 사랑입니다
☆★☆★☆★☆★☆★☆★☆★☆★☆★☆★☆★☆★
《34》
사랑은
이오장
가슴에
나무 한 그루 심는 일이다
피 흘리지 않는 아픔으로
눈물 다독이는 일이다
뿌리가 커 갈수록
꽃 한 송이 피우는 일이다
그게 꽃상여 타는 길이라는 걸
하루하루 느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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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사슬
이오장
밀물 따라
멸치 떼 들어오고
뒤따르는 고등어
그 뒤를 삼치가 꼬리 물고
긴 꼬리를 좇아
쏜살 보다 빠르게
참치가 따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소래포구 어시장
사람은 돈을 찍어
참치 허리를 잘라가고
꽃게는 저희끼리
집게 자랑하다
서로 물어뜯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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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산마을 보리밥
이오장
동짓달 청 보리에 핀 얼음 꽃
기러기가 물어다 뿌린 산골짝
봄바람에 아지랑이 어리면
너울너울 춤추는 보리누름
어머니 돌확은 번뜩거리지
보릿고개 넘긴 동네마다
송화 가루 휘날려 샘물 누렇고
보리타작 아이들 입술 가에
저마다 발라진 숯검정
얼굴 마주하고 손가락질했지
보리밥 한 그릇에 물 한 바가기
책보자기 속에 감춰진 배고픔을
세월 흘렀다고 잊을 수 있을까
안양 비산골 산마을 보리밥
온갖 나물에 된장찌개 마주하니
아스라이 펼쳐진 보리 누름
어머니, 어머니
고향집 마당에서 날 기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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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상당산성
이오장
성벽 타고 흐른 전장의 빗물이
소나무를 적신다
솔잎에서 덜어진 빗방울이
질경이를 밟는다
밟힌 풀잎들이
온 몸으로 일어서서
바람을 꺾는다
꺾인 바람이 돌 벽을 타고
멍석딸기가시 마디마디에 붙은
석공의 혼들 턴다
순찰의 눈총은 돌덩이를 다듬고
날선 졸병의 창끝에
번갈아 가며 나부끼는 삼국깃발
빼앗는 자와 빼앗긴 자의 함성은
오리나무를 키워 국경을 잰다
산등성이에 일어나는 구름 뚫고
희끗한 물까치 꼬리가
하늘과 당의 경계를 허문다
빗물 젖은 산성 돌 벽에
누웠다 일어서는 풀잎이
승리의 그물을 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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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새해의 불꽃을 피우자
이오장
태양을 향해 뛰어라
제자리에서 늘어진 그림자는
거미줄에 맺힌 이슬방울
머리 위에 태양을 얹혀라
뚜벅 뚜벅 소걸음으로
대지를 밟는 굳센 의지는
호랑이를 맞이하기 위한 것
지구는 멈추지 않고 돌고 돌아
우리의 희망을 새롭게 한다
보아리 맞이하라
찬란하게 떠오르는 새해를
걸음마 배우는 아이 입에 마스크라니
말도 익히기 전에
입막음이 왠 일인가
멈추지 않는 지구와
변함 없이 반겨주는 태양이 있는데
이대로 주저 앉아 땅을 치며
코로나 타령만 할 것인가
새해의 오래를 부르자
흑호의 눈은 태양을 밝히고
날카로운 발톱은 당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 앞에서
우링의 노래 부르자
희망은 내일의 확신
새로운 태양은 우리의 것
가슴 깊이 식어버린 불곷을 살리자
☆★☆★☆★☆★☆★☆★☆★☆★☆★☆★☆★☆★
《39》
선거
이오장
돌에서 쌀을 고를까
쌀에서 돌을 고를까
한라산에 가자
조릿대공덕비를 읽어보고
낭창한 조릿대 꺾어다가
조리를 만들자
겉은 빛나지만 속이 썩은 놈
겉과 속이 다 썩은 놈
너무 작아 쓸모 없는 놈
비뚤비뚤 비틀어진 놈
한쪽으로 기울어진 놈
까도까도 속이 보이지 않는 놈
뒤집어 봐도 속이 없는 놈
말 많아 귀가 얇은 놈
말 없이 귀만 큰 놈
맑은 물에 씻어 너울너울 조리질
잡것은 갈앉히고 진짜만 띄우자
쌀에서 돌을 고르자
빛나는 진주를 찾자
☆★☆★☆★☆★☆★☆★☆★☆★☆★☆★☆★☆★
《40》
송추계곡
이오장
계곡을 깎는 물소리가
나무뿌리 간지럼 태워
단풍잎 떨어져 나부낀다
울긋불긋 낙엽 사이를
박새가 날아다니고
밤톨 찾아 널뛰는 다람쥐는
산책로 다리 밑에서
산 그림자 지우는 버들치와
물위에 뜬 하늘을 먹는다
소리가 모여 노래가 되고
색깔이 합쳐져 그림이 되어
멈춘 시간이 춤추는 송추계곡
여성봉 골짜기에 찬란한 햇살
오봉 등허리에 펼쳐져
꿈을 만들어 내는 오색의 정원
전부치는 남자가 차려낸 밥상에서
사계절 향기 퍼져 나온다
☆★☆★☆★☆★☆★☆★☆★☆★☆★☆★☆★☆★
《41》
쇠귀신
이오장
안개 덮인 여명 속에
들녘을 울리는 쟁기질
"이야 이랴. 자라, 쯧쯧"
쟁기 밥 넘어가는 소리에
흩어지는 안개자락 논두렁 넘는다
한 마지기가 장구논
서 마지기 베틀논
구 부 장정 새끼논
소 발자국 찍히며 들썩들썩
"이놈의 송아지 새벽 잠자리 잡냐"
고삐 당기며 재촉하는 아버지
뒤집힌 땅거죽에 털퍼덕 주저앉아
담배쌈지 펼친다
인근 제일 쟁기꾼
읍내 우시장 손꼽히는 흥정꾼
소 이빨 세어가며 나이를 맞추고
손바닥에 닿는 엉덩이 소리로
쟁기 밥 먹은 걸음 셈하였다
새벽안개는 농사의 등불
논두렁 숫자는 농부의 발자국
쇠귀신 소리 등에 짊어지고
뚜벅뚜벅 땅을 일군 아버지
서너 해마다 소가 바뀌어도
누렁이 문패는 하나
외양간에 내 걸고 여물을 끓였다
☆★☆★☆★☆★☆★☆★☆★☆★☆★☆★☆★☆★
《42》
쇠자
이오장
할머니 쇠자는
삼베저고리 홑바지 만들 때
마루 위에서 거꾸로 춤 췄다
어머니 쇠자는
잉앗대 등허리 고르고
오그라드는 모시베 툭툭 폈다
베틀에 얹혀 옷걸이
마루에 누워 파리채
반짇고리 지키는 회초리
눈금마다 묶인 세월을 잴 때는
어머니 한숨으로 어기적거리고
장사꾼 손끝에서 줄어들던 잣대가
촛불 밑에 뒹글다가
청기와집 대리석 벽에 걸리더니
제 멋대로 춤춘다
줄타고 몰려든 비단폭
엎드려 꿀 바친 양복깃만 잰다
☆★☆★☆★☆★☆★☆★☆★☆★☆★☆★☆★☆★
《43》
순담 주상절리
이오장
끊어진 불꽃이
가닥가닥 곤두섰다
식어버린 용암이
켜켜이 포개지고
따라 들어온 물이
불꽃 지워 용암을 보듬던 날부터
날아온 학들이 만든 순담 계곡
황토는 스며들고
뚫린 구멍마다 샘물 솟아나
쪽빛 물이 흐른다
민출랑에 앉은 햇살이
드나드는 발길 붙잡아 돌리는 맷돌
너른 바위 끝자락에 고드름 내린다
돌이 돌을 만나 물길 만들고
그늘마다 늘어진 쉼터에
돌개구멍 자갈들이 노래하는 계곡
급경사에 떨어지는 물도
서로 어울려 어깨춤 춘다
☆★☆★☆★☆★☆★☆★☆★☆★☆★☆★☆★☆★
《44》
숲에서
이오장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이름 한번 지어주지 않고
숲 속에 앉아 열매를 바란다
가지를 흔드는 바람보다
안을 흔드는 바람이 강한가
걸음 옮기면 나무와 함께 흔들리고
옷가지에 구두를 신어도
숲의 체온은 살갗을 파고들어
햇빛 비껴가게 하는 삶
폭포 앞에서 분수를 꿈꾸고
계곡 물에 얼굴 비춘다
날이 갈수록 짧아져야 할 혀는
입술 비집어 헛말 튕기고
가득한 욕심은 하늘에 손 뻗는다
이제 벗어나야지
허허 벌판을 다시 걸어가
이름 없는 것을 찾아야지
☆★☆★☆★☆★☆★☆★☆★☆★☆★☆★☆★☆★
《45》
시간의 터널
이오장
터널 속에서
유리에 붙은 어둠을 닦는다
똑같은 글자를 쓰는 와이퍼에
찌든 그림자가 얽혀
고속질주의 자국을 지운다
당기지 않았는데 몰아쳐 들고
뿌리쳐도 달라붙는 시간 속을
쉬지 않고 달려온 길
뒤따라오는 사람들은
일정한 속도로 따라온다
앞서간 발자국을 제쳐가며
달려가는 어둠은 회색
가속 패달 밟는 발바닥에
피멍 든 아픔이 전해져도
단단함을 풀지 않는 장딴지
땅의 무게와 겨룬다
훤하게 유리창이 닦이고
다시 질주하는 시간이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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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심청각
이오장
뱃노래 우렁찬 인당수 고깃배는
그물에 파도만 걸리고
장산곶마루 돌배나무는
꽃 질 때마다 열매기 달리고
연봉바위 물범은
바람 부는 만큼 살가죽 두꺼워 지는데
청이 아버지는
눈 값을 냈어도 지팡이 던지지 못하고
바닷가에 앉아 파도 따라 운다
어쩔거나 어쩔거나
우리 심청이를
뛰어든 바다에는 용왕이 없고
연꽃 한 송이 피지 않으니
이름이 지팡이 되어
아버지 앞 길 더듬어 주고
우뚝한 사당 한 가운데
한 장 그림으로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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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아리리가 났네
이오장
심학규 눈을 떠서
청이 얼굴 볼 수 있다면
설날 아침보다 좋겠네
아리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심봉사 눈을 떠서
꽃 보고 나비도 보고
덩실덩실 춤춘다면
폭설로 길 막혀도 좋겠네
아리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청이가 아버지 손 잡고
동네 사람들 찾아다니며
어머니 어머니 불러봤으면
온 나라가 잔치여서 좋겠네
아리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청이가 시집가서
저 닮은 딸을 낳는다면
세상에 불효자가 없어서 좋겠네
아리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심봉사 눈 뜬 약은 효성이라
이 땅에 효녀가 많다면
남북통일 절로 되어서 좋겠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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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아버지의 잔
이오장
볏가리 지게질에
허리 굽은 아버지
논두렁에 지게 세워두고
벌컥벌컥 들이키는
막걸리 사발 속으로
쭉 빨려들어 가는 논바닥
순식간에 들판을 삼킨 아버지
성큼 허리 펴고 일어선다
괭이 호미 팽개치고
자동차 운전하는 나는
바닷가 찻집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힘차게 찻잔 바닥까지 들이켜도
바닷물 한 방울 들어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지금쯤
하늘까지 마셔버리고
구름 타고 다닐 텐데
바닷물 마시는 갈매기가
눈앞에서 어깃장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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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안개
이오장
널 부르는 메아리가
안개가 된다
섬과 섬 사이에서
이쪽과 저쪽은
헤어날수 없는 방황
늘어트린 줄은 보이지 않는다
모습을 감춘 새는
울음으로 길을 잡아주는데
가랑잎에 맺힌 빗방울은
소나기에 밀려 떨어지고
낙엽 위에서 제 목소리 내며
멀어져간 새를 좇는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바닷물 앞에서
말뚝으로 박힌 그리움
찻집 언덕에 올라 풀어내지만
들리지 않는 대답
비 그친 바다에 다시 안개가 흐른다
☆★☆★☆★☆★☆★☆★☆★☆★☆★☆★☆★☆★
《50》
어머니
이오장
백중 땡볕에
콩잎 우거지는 것이
소나기 덕이라고 누가 말했나요
포기포기 적신 어머니 땀방울
아직도 밭고랑에 촉촉한데
괭이자루 지팡이 삼고
호밋발 칼날 삼아
풀포기와 다투시며 흘린 땀에
알알이 영글어 된장이 되고
부뚜막 그스름에 얼굴 비벼가며
자식들 주린배 채워주신 어머니
물항아리 언제나 찰랑거리고
빨래줄에 옷가지 비운적 없어도
저녁노을에 마루는 빛나고
장독대 항아리는 거울 같았지요
소털 보다 많은 나날을
구부러진 길만 걸어오신 어머니
밤을 낮 삼아 베틀 위를 걸으시고
낮을 밤 삼아 달빛 엮은 은혜
무엇으로 갚으리까
어느 때나 보답하리까
가시던 길 위에 통곡으로 고개 숙여도
콩밭에 뿌리신 땀방울만 하오리까
뼈마디 갈고 갈아 뿌려대도
다시 못 뵐 어머니
가슴 치며 부르고 목 터지게 불러도
무심한 이 밤은 깊어만 가옵니다
☆★☆★☆★☆★☆★☆★☆★☆★☆★☆★☆★☆★
《51》
어머니 꽃
이오장
장독대에 쏟아진 햇살이
처마 밑 서까래를 얼 비춘다
거미줄에 얽힌 햇살
와송머리 꿰뚫어
감나무 잎에 감겨드는 한낮
버선발로 장 항아리 닦는
어머니 소맷자락에
너울너울 내려앉는 흰나비
활짝 웃는 모란꽃 위를 맴돈다
저것 봐라 화사하게도 폈다
저렇게 웃어야 집안이 화목한 것이여:
항아리 뚜껑 여닫으며
흰 수건에 묻은 흙먼지
훔쳐내는 어머니
병아리와 장독대 찾은 암탁을 향해
연신
꽃보다 고운 웃음 짓는다
☆★☆★☆★☆★☆★☆★☆★☆★☆★☆★☆★☆★
《52》
연줄 앞에서
이오장
오르고 싶은 욕망에
줄에 묶인 연이
손잡고 하늘에 오른다
무명가수 노래가 따라 오르고
낮은 의자에 앉은 여인의
환희의 표정을 그리는 거리의 화가
제 얼굴을 겹쳐 넣는다
박수는 갈매기 소리에 묻히고
따라 부르는 입에 덮힌 마스크
투명한 모금함 속바람은
떨어지는 동전 소리에 놀라
확성기 울림을 따라간다
이름 높이기에 웅성거리는 월미공원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에 기댄
내 이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묶여
어디쯤에서 풀릴까
줄 밪아 오른 연은 아득히 높다
☆★☆★☆★☆★☆★☆★☆★☆★☆★☆★☆★☆★
《53》
오뚜기 알
이오장
사랑은 갔으나
절벽은 안전하다
시끄러운 곳이 삶의 터전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다
헤어지지 않겠다는 언약으로
콘크리트 속에 보금자리 틀고
부대끼는 틈에서 눈빛은 빛났다
쫒겨다는 건 숙명
자리 펼친 곳마다 안개 속이다
가린 것과 가려진 것의 차이를
혼자 지우지 못해도
날개 접을 틈이 없다
물 속 깊이를 아는 만큼
하늘 높이를 몰라 빼앗긴 보금자리
수정되지 않는 꿈은
오뚜기가 낳은 알
거꾸로 굴려도 제자리 찾는다
☆★☆★☆★☆★☆★☆★☆★☆★☆★☆★☆★☆★
《54》
월미도
이오장
휘돌아 나가는 물살 따라
한가로운 갈매기 춤추고
달 눈썹 꼬리에 장미꽃 핀다
파도는 가라
침입의 함선은 방파제 밖에 머물고
비단자락 펄럭이는 꽃배만 오라
포탄구멍마다 심어진 항전의 씨앗
하나하나 싹 틔워 일궈낸 자유
봉우리에 우뚝 솟아 펄럭인다
여기는 자유의 성지
불굴의 정신이 타오르는 곳
핍박과 구속은 불길에 넣고
총칼의 위협은 바닷물에 던진다
오라, 자유를 가져라
세계로 세계로 뻗어 나간 길은
여기가 시작이고 끝이다
달눈썹 곱게 그려진 밤마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꿈이 빛난다
☆★☆★☆★☆★☆★☆★☆★☆★☆★☆★☆★☆★
《55》
은행문 닫혀도 돈은 돈다
이오장
미국산 블루길이
붕어 잉어 씨를 말린다
미국에 잡혀간 가물치는
블루길을 삼킨다
파오차이가 된 김치
가라대로 변한 태권도
뒤틀린 나무가
곧은 나무보다 비싸다
외국어를 모르면
꽃 이름 알 수 없고
노래를 들을 때도
귀에 번역기를 꽂아야 한다
세계의 명품은 명동에서
은행문 닫혀도 돌고 도는 돈
공원에 앉으면
다리 사이로 참새가 뛰고
코로나 백신 접종 못 한 가수가
청중 없이 노래 부른다
☆★☆★☆★☆★☆★☆★☆★☆★☆★☆★☆★☆★
《56》
이편한세상
이오장
친구가 이사하여 집들이한다는 전화가 왔다
주소를 불러 주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한참이나 주고받다가 겨우 받아 쓴 이름
검단신도시 2차 노블랜드에듀포레힐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물어보니 자신도 모른단다
문인협회 주소록을 찾아보니
시인들이 사는 아파트 이름도 여러가지
우리는 참 이상한 곳에 사는구나
디에이치라클라스 레미안라클래스 올림픽파크에비뉴포레
무슨 뜻을 가졌는지 알 수가 없어
사전을 찾아보니 어느 페이지에도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을 뒤져 간신히 알아보니
프랑스 말에 영어를 섞어놓은 이름이고
관사에 형용사를 합쳐 놓은 말이다
블레스티지 첼리투스 웬파타스 리버젠 루센티아
영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뒤섞어
외국인조차 고개를 흔드는 집 이름
전화통화로는 알아듣기는 아주 어렵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어렵게 살고 있는가
얼마 전까지는
동남아파트 현대아파트 두산아파트 주공아파트
쉽게 불러주며 외우고 다니다가
e편한세상 레미안자이 푸르지오 라는 이름에 익숙했는데
리버 [강] 메트로[역] 에듀[학교] 마리나[바다] 라는 영어에
각국의 말들이 동원되어 합쳐지더니
입으로 부를 때마다 더듬거린다
사는 곳이 사람을 높여주는가
이름이 사람을 대우해 주는가
외국어가 우리말을 눌러야 우월한 것일까
아파트 이름이 어려워야
시골에서 올라오는 부모가 찾기 어렵다는 말
절절히 스며드는구나
나는 아버지 문패단 초가집에서 태어나
이편한세상에 살고 있어 참 다행이다
☆★☆★☆★☆★☆★☆★☆★☆★☆★☆★☆★☆★
《57》
장수상회
이오장
사랑이 가고 사랑이 온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귀 닫고 눈감은 삶이
희미한 가로등 밑에서 부르는 노래
날갯짓 멈춘 반달이 듣고
어둠을 내린다
오래 산다는 건
시간을 붙들지 않고
햇살줄기를 나눌지 안다는 것
새 이름과 잃어버린 이름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
상대방 없는 싸움의 패배자
아픔을 잊고 사랑을 딛는다
장수의 길
수난의 길
상처의 길
회상의 길에서
자신을 잊고 찾아낸 늙은 사랑
반쪽 가슴에 샘이 솟는다
☆★☆★☆★☆★☆★☆★☆★☆★☆★☆★☆★☆★
《68》
장항아리
이오장
비둘기 울음 지나가고
장 항아리에 하늘이 빠졌다
뚜껑 열어놓고
베틀에 앉았던 어머니
모시 베필에 감겨
뚜껑 닫는 걸 잊었나 보다
병아리는 벌써
어미 따라 달기장 앞에 모여들고
아버지 지게는 처마 밑에 누었는데
베틀 소리에 귀 닫힌 어머니
아버지 기척 놓쳤나 보다
외양간 들어간 누렁이
빈 여물통에 눈길 맞추고
손작두질 소리에 입맛 다신다
☆★☆★☆★☆★☆★☆★☆★☆★☆★☆★☆★☆★
《59》
재산명시
이오장
두 손 뻗어 가리킨 하늘
영원히 죽지 않고 달려갈 땅
그 안에 핀 모든 꽃
뛰어다니는 짐승 모두가
나의 것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등기부는 누가 만들고
각각의 이름은 누가 지었는가
숨결 한 오라기 내 숨쉬기에 따르고
한 걸음 걷는 것도 내 발자국 찍기
멀리서도 가리키지 마라
손가락 끝에 닿는 게 있다면
너의 환상을 넘는 울타리 밖이다
나는 시를 창조하는 사람
우주의 끝을 보았고
지구의 중심에도 들어가 봤다
만물의 중심에 있는 나의 재산은
있음과 없음의 구별이 안 되는
우주 전체가 대상이다
☆★☆★☆★☆★☆★☆★☆★☆★☆★☆★☆★☆★
《60》
적석사
이오장
높이 오르면 통할까 하여
108계단 끝 밟고 서니
아래에서 바라다본 그 하늘뿐
구름 한 조각 잡히지 않는다
해수관음 귓가에 걸린 병자의 신음
먼저 들은 비둘기가 채가고
갈라진 잎 사이를 지나는 바람에
껍데기 두꺼워진 굴참나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바위를 붙잡았다
골짜기 아래를 가리키는
조막손 소나무 가지
바위틈 이끼에 닿지 못하는데
내밀수록 휘어진다
산다는 건
높낮이 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것인가
내려와 땀 닦으며 올려다보니
적석사 팔작지붕 더 멀어졌다
☆★☆★☆★☆★☆★☆★☆★☆★☆★☆★☆★☆★
《61》
전기와 수소
이오장
형제가 사는 집에
감나무와 돌배나무가 있었다
아우는 감나무를
형은 돌배나무를 맡아
거름을 주며 가꿨다
해갈이 할 때마다
감이 많이 열렸다 배가 많이 열렸다
형제의 환호성이 번갈아 가며
고샅에 퍼져갔다
장성한 둘이 분가하여
각각 식당을 차렸다
형은 매일 50인 분을 미리 준비하여
언제나 10명분이 남아 버렸고
동생은 30명분을 준비했다가
손님이 많으면 더 조리했다
얼마 후
돌 나무 닮은 형은 식당을 닫고
전기파를 샀으나
감나무 닮은 동생은 번창하여
수소 차를 샀다
☆★☆★☆★☆★☆★☆★☆★☆★☆★☆★☆★☆★
《62》
절벽 위의 참새
이오장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 몰입했던
교실 뛰쳐나가
공놀이에 빠졌던
자전거 타고
도로를 질주하던
그런 아이들
모두 훨훨 날았다
명품 찾아다니는
쇼핑중독자
술 마시고
운전하는 철부지
주식 그래프에 눈먼
빚쟁이 투기꾼
그런 어른들
절벽에서 떨어졌다
☆★☆★☆★☆★☆★☆★☆★☆★☆★☆★☆★☆★
《63》
제자리걸음
이오장
섬이 먼저 뛰었다
구름에 쫓긴 듯 서두르는 모습에
갈매기 무리가 휘이 젓어대고
뻘 밭에 박힌 녹슨 닻은
고개 들어 응원해 주었다
그때뿐이었다
바람 탄 파도는
몇 걸음 늦게 출발했어도
금방 따라붙어 꼬리 흔들었다
머뭇거리지 않았고
거북이 등에 탄 것도
잠시 쉬지도 않았는데
제자리에 선채로 바라보는 섬
육지에 닿아
힘차게 부딪치는 파도를 향해
연신 손 흔들어 주다가
힘없이 돌아오는 모습에
신발 끈 고쳐 매려 허리 굽힌다
☆★☆★☆★☆★☆★☆★☆★☆★☆★☆★☆★☆★
《64》
좋은 꿈
이오장
둑이 무너져
바닷물이 넘쳐들었다
들녘의 벼들이 휩쓸려가고
논밭의 구별이 사라졌다
허물어진 집
아름드리 느티나무 몇 그루가
동네의 흔적을 알려줬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산마루턱 메밀밭 둔덕에
풋호박 따러 갔던 나는
어찌할지 몰라 동동거리다가
동네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지만
아무런 방법을 찾지 못 했다
식구들 한 명 보이지 않고
닭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미리 알고
호박 심부름 시켜 나만을 살렸다
찰랑거리는 산마루에 앉아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다가
번득 깨어났다
이불 속이 흥건하게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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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착각으로
이오장
물 속에 담긴
하늘 향해 풍덩
가마우지
유리벽 뒤
가지를 향해 돌진
박새
물에 비친
버들치를 겨눠 탕탕
물총새
잠자리 향해 날아가다
거미줄에 출렁
제비
한번 본 네 이름 찾아
인터넷 창에 빠진
철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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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천 년 고목 아래서
이오장
나무로 깎으면 나무부처
돌로 깎으면 돌부처
쇳물 부어 굳히면 쇠부처
흙으로 다졌다면 흙부처라
금빛 옷자락 곱게 입은 채
살았는가 죽었는가
숨결은 다래순 넘어가고
뜬 눈 속에 느티나무 둥치 들었다
손바닥에 펼쳐진 세상만사
돌아앉아도 훤히 보이고
깃 없는 새들이 무릎에 앉아
창공 너머를 훨훨 난다
온 것은 반드시 가고
간 것은 반드시 돌아오는 순리에
죽음이 무엇이고
산다는 건 무엇인가
나무를 깎으나 돌을 깨트려도
형상만 보이고 말씀을 잊은 집에서
부처를 바라는가
천 년 고목만이 말씀을 알고
경전 읽는 소리 귀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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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청남대
이오장
대통령 궁에도 나뭇잎 진다
석 달 열흘 삶은 호박도 못자를
사열병의 총칼은 낙우송잎에 덮이고
진열된 국화송이마다
우롱 차 되어 겨울비 기다린다
햇빛 없이 반짝이는 그릇은
옷걸이에 걸린 남루를 비추고
말아버린 붓끝은 백지 위에 나뒹굴어
글씨 없는 초청장을 쓰는데
안내방송 확성기에 거미줄은
방문객 이름을 반송가지에 건다
누가 만든 청동상인가
웃음은 지우고 향기만 뿌려
줄지어 선 분재들 고개 숙였다
힘으로 뺏은 권좌는 일곱 해
친구에게 받은 자리 다섯 해
선동으로 빌린 청기와 집
지팡이로 얻은 영광의 의자
웅변으로 지킨 높은 탁상이 무너져
낙우송 기근으로 솟은 청남대
꽃향기 가득 찬 푸른궁에
사람 냄새 없이 발자국만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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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초분
이오장
떠돌던 구름이 산에 닿아
생을 다하여 비를 내리면
풍족해진 산천에 꽃이 피고
활짝 핀 꽃들이 벌 나비 만나
열매 맺어 익으면
살아 있는 것들의 목숨 살린다
백 년 천 년 바람 잡던 나무들도
뿌리 내린 흙의 정기가 다하면
화석으로 땅의 역사를 쓰는 것
자연 속에 깃든 삶이
어디에 뿌려져 이름 지운다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초분에 덮인 주검은
풍장의 먼지로 흩날려
초목의 밑거름이 되잖은가
나무와 꽃을 그리다가
바람 앞에 쓰러져 한 몸이 된다면
언제 어디에 누워도 나는 만족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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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콩돌해변
이오장
파도로 말하는 바다
어느 날
밤새워 받아든 별 이야기이고
슬금슬금 해변까지 왔는데
아무도 들어줄 사람 없어
모래밭에 한꺼번에 쏟아낸 말씨
이러 저리 구르며 부딛치다
닳고닳아 콩돌이 되었다
갈매기가 쪼으려다 입술 구부러지고
물새들 발가락에 피가 맺혀
설움에 겨워 나눈 이야기
쌓이고 쌓여 전설이 되었다
찾는 사람들 귀에 말꽃 피고
듣는 사람들 입에 꽃말이 되어
사방으로 굴러다니는 노래
밤이면 꿈 많은 사람이 품고
낮에는 별 잃은 사람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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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파도가 그랬다
이오장
모래밭에
나란히 찍힌 발자국이 지워졌다
붉은 바위에
뚜렷했던 섬의 역사가 지워졌다
조가비 깎아 쓴
바다의 시간이 지워졌다
언덕에 앉아 수평선에 그린
그 약속이 지워졌다
바위를 깎아 바위에 세운 말
구름 붙잡아 구름에 던진 말
갈매기가 지켜준 다짐의 말
전부 지워졌다
눈빛 한 번 변하지 않고
바람 속에서도 지켜낸 체온
모두 지워졌다
파도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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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해 질 녘
이오장
서쪽을 마주한 저 늙은이
기우는 해 그림자 재고 있는가
등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
얼마인지 모르는데
뒤에 선 청년은
제 그림자가 허리 굽은 그림자와
합쳐지는 걸 보며
해 뜨던 동쪽으로 돌아서서
하루의 나머지를 등진다
나무가 제자리에서 뻗은 손으로
기우는 해를 붙잡아 흔드는 것을
지팡이 짚고 보는 늙은이
젊은이는 두 다리로 서서
하나둘 켜지는 등불을 세어본다
햇볕에 물들기를 반복하던 나뭇잎은
석양에 물들어 가는데
금방 꽂은 지팡이 저 멀리
누운 해 그림자 지워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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