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17)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8구간 (풍산→삼강) ① [풍산 체화정-소산리-가일마을]
2020년 10월 15일 (일요일) [오정택 내외]▶ 이상배 동행
☆… 오늘은 낙동강 종주 제8구간을 가는 날이다. 오늘은 특히 풍산의 유서 깊은 문화유적지, ‘체화정’-‘소산리 안동 김씨 종택’-‘가일마을 안동 권씨 종택’ 등을 돌아보고, 이어서 낙동강 ‘병산서원(屛山書院)’을 탐방한 후, 화산을 넘어 ‘하회마을’을 둘러보고, 우회하여 부용대 높은 곳에 올라 하회마을을 가슴에 품는다. 이어서 ‘옥연정사’를 탐방하여『징비록』을 쓴 서애 류성룡을 생각하며 임진왜란의 처절한 상황을 회고한다. 그리고, ‘겸암정사’와 ‘화천서원’을 탐방하여 서애의 형 겸암 류운룡의 겸손한 삶을 기리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서 풍산읍 구담리 ‘구담정사’를 찾아보고 난 후, ‘구담교’에서 본격적인 트레킹에 돌입할 예정이다. 그리하여 낙동강 제방 길 ‘바이크로드’를 따라 ‘풍지교’를 지나 예천군과 문경시의 경계에 있는 ‘삼강나루’까지 가는 여정이다.
[오늘의 여정] 풍산읍 체화정→ 소산리→ 가일마을→ 병산서원→ 하회마을→ 부용대→ 구담정사→ 풍지교→ 삼강나루
[참고지도] 2016년 부산일보에서 실시한 에코트레일 코스. 나의 코스와는 꼭 일치하지는 않지만, 지명 표기를 참고할 만하다
오늘의 풍산-삼강의 제8구간은, 무작정 강안을 따라서 걸으면, 아무리 빨리 걷더라도 하루에 가기에는 힘든 거리이다. 특히 안동의 풍산 지역은 유서 깊은 문화유적, 유서 깊은 고가(古家)와 종택이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므로 무작정 강안을 따라 걷기보다는, 낙동강 유역의 풍산의 유적지를 탐방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낙동강이 품고 있는 역사`문화유적을 그냥 지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마침 택손이 흔쾌히 승용차를 운전하여 유적지를 안내하겠다고 했다. … 착한 손부가 따뜻한 아침상을 정성스럽게 차려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행장을 차렸다.
오늘의 낙동강 종주 여정
* [풍산수동 오정택 안가]→ [풍산읍](체화정)→ 916지방도로 [풍산읍 소산1리](삼구정-청원루-양소정·안동김씨 대종택)→ [풍산읍 가일마을](가곡지-안동권씨 종택)→ 낙동강 [병산서원]→ [하회마을]→ 광덕교→ 부용대(하회마을 조망)→ 옥연정사→ 겸암정사→ [예천 백수식당]→ [구담정사](권오춘 고택)→ 낙동강 구담교→ [낙동강 제방길]→ 말무덤 입구(쉼터)→ (죽고서원)→ 절벽 테크 길→ (길고 긴 제방길)→ (28번 국도 지인교)→ [풍지교]→ 낙동강 남로 제방 길→ 삼수정→ 독립운동가정훈모선생추모비→ 동래정씨영모제→ 흥국재→ [보람요양원](점촌 한학수 부부 마중)→ 59번 국도-삼강주막→ [용궁-저녁식사(순대국)]→ [점촌-시티호텔]
[풍산수동]→ 풍산읍 ‘체화정’→ 소산리 ‘안동 김씨종택’→ 가일마을 ‘안동 권씨종택’
체화정(棣華亭)
☆… 오전 8시, 안동시 풍산읍 수동, ‘택손[吳柾澤 族孫]’의 자택에서 오늘의 일정에 들어갔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깨끗했다. 오늘의 출행에서, 유적지 탐방 구간까지 고맙게도 택손(澤孫)이 안내를 하였는데, 손부(孫婦)도 동행했다. 우리가 먼저 찾은 곳은 풍산읍 상리 풍산천 앞에 위치한 보물 2051호로 지정된 ‘체화정(棣華亭)’이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풍산태사로 1123-10(상리 2리 447)에 있다. 가을 아침의 신선한 기운이 은은히 스며든다.
* [풍산읍 체화정(棣華亭)] ― 효도와 형제간 우애(友愛)가 깊이 어려 있는 고아(古雅)한 정자
「체화정(棣華亭)」은 1761년에 만포(晩圃) 이민적(李敏迪)이 학문을 닦기 위해 세운 것으로, 그의 맏형인 옥봉(玉峰) 이민정(李敏政)과 함께 이곳에 기거하며 형제의 우애(友愛)를 돈독히 한 곳으로 유명하다. ‘棣華亭’(체화정)이라는 당호와「체화정기(棣華亭記)」는 만포의 아들 하지(下枝) 이상진(李象辰)이 지었다. ‘棣華亭’이라는 당호는『시경(詩經)』소아(小雅) 편에 나오는 ‘常棣之華’(상체지화)에서 인용하였다. 시경에 나오는 상체지화(常棣之華)는 ‘아가위나무꽃’으로 형제간의 우애(友愛)를 상징한다.
常棣之華여 鄂不韡韡아 뒷동산의 아가위 꽃 울긋불긋 피었네.
凡今之人은 莫如兄弟니라 세상사람 있어도 형제 같은 사람 없지
死喪之威에 兄弟孔懷하며 죽을 고비 닥쳤어도 형제 서로 생각하네.
原隰裒矣에 兄弟求矣하나니라 어려운 당할수록 형제들은 구해주네
―『시경(詩經)』소아(小雅) 편
¶ ‘常棣之華’(상체지화)에서 ‘常棣’(상체)는 ‘棠棣’(당체) 즉 ‘아가위나무, 혹은 박태기나무’를 뜻하고 ‘華’(화)는 '활짝 핀 꽃'이다. / * ‘鄂不韡韡(악불위위)’에서 ‘鄂’(악)은 ‘꽃송이 꽃받침’, ‘韡韡’(위위)는 ‘꽃이 울긋불긋한 모양’을 형용하는 말이다 / * ‘原隰裒矣’(원습부의)에서 ‘原隰’(원습)은 ‘습지, 즉 사람이 살기 힘든 곳’, ‘裒’(부)는 ‘모이다’는 뜻이다. … 아가위꽃(산앵두나무)과 박태기나무꽃(배롱나무, 백일홍)은 형제간 우애를 상징하는데, 체화정 아래에는 박태기나무가 여기저기 심어져 있다. 여름 철 붉은 꽃이 뭉실뭉실 아름답게 피어나면 도처에서 많은 관광객이나 사진작가들이 찾아오는 명소이다.
‘棣華亭’(체화정) 현판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스승인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의 글씨라 전해진다. 그리고 ‘湛樂齊’(담락재)의 ‘湛樂’ 또한『시경(詩經)』소아(小雅)편 상체지화 '和樂且湛'에서 인용하였다.
妻子好合이 如鼓瑟琴이라도 처자가 화합하여 비파와 거문고[瑟琴]를 연주하는 것 같아도
兄弟旣翕이라야 和樂且湛이니라 형제간에 화합해야만 더욱 즐겁고 기쁘구나!
* ‘翕’(흡)은 ‘합하다, 화합하다’는 뜻이다. ‘湛樂齊’(담락재)라는 현판 글씨는 18세기 후반 안기역 찰방으로 부임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홍도가 이민적 사후 23년 뒤에 직접 찾아와 현판 글씨를 남길 만큼 형제의 우애(友愛)는 동시대 선비들의 마음을 끌었다. 지금은 모사한 현판을 걸고 있지만 원본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두 현판은 쓴 사람이 명확하고 원본이 잘 보존되어 있서,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
☆… 한국의 정자(亭子)에 설치된 온돌은 비대칭으로 배치되는 것이 보통이고 체화정(棣華亭)처럼 중앙이나 양쪽에 대칭으로 평면을 구성한 것은 흔치 않은 사례이며, 특히 가운데 온돌을 둔 유형은 지역적인 특징이다. 온돌 전면의 창호는 4칸 폭인데, 가운데 두 칸은 문얼굴(문짝을 달기 위한 방형 문틀)이 하나로 되어있으며 중앙에 눈꼽째기창(창이나 문안에 다시 열 수 있게 만든 작은 창)을 달았다. 양쪽 문은 좌우로 열어 가운데 2칸 분합과 포개져 ‘들어걸개’로 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정자에서 눈꼽째기창을 둔 것도 드문 것이지만 양쪽에서 문을 열어 포개 가운데에서 들어걸개로 작동하는 분합문의 유형도 극히 드문 유형이다. 이와 같이 체화정(棣華亭)의 창호는 다른 누정(樓亭) 건물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체화정(棣華亭)은 건축학적으로 그 주요 구성부에서, 18세기 후반 조선후기 목조건축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각 실의 배분과 창호(窓戶)의 의장(儀裝, 디자인)에서 다른 정자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하고 창의성이 높은 건물이다.
이민적의 아들 이상진이 쓴「체화정기(棣華亭記)」에서 보면, '정자 사방에 계자 난간을 둘러 앞의 연못을 바라보며 정취를 즐기고, 연못 안에는 둥근 섬 3개를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그 섬은 방장산, 봉래산, 영주산를 상징하는 삼신산(三神山)이다. 신선의 세계를 추구하는 정자이다. 체화정의 연지(蓮池)는 별서정원(別墅庭園)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사상인 신선사상과 음양론,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 등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체화정(棣華亭)에는 많은 시인묵객들이 방문하여 적은 시판이 게시되어 있다.
☆… 체화정(棣華亭)에서 길 건너 하리에는 그의 8대 조부 풍은공 이홍인의 종택이 있는데, 이홍인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분이다. 체화정은 우애(友愛)와 효성(孝誠), 충의(忠義)를 실천하는 예안(禮安) 이씨 집안의 세 덕목(德目)이 살아 있는 곳이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좋은 인성 교육장이다.
* [500년 전통의 안동 소산마을] ― 안동 김씨의 본거지
☆… 다음, 우리 일행은 안동시 풍산읍 소산1리의 안동김씨 유적지를 찾았다. 풍산 읍내에서 916번 지방도로를 타고 풍천면행정복지센터로 가는 길목에 500년 전통의 '소산마을'(안동시 풍산읍 소산1리)이 있다. 안동(安東)하면,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로 칭하는 오랜 역사와 함께 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는 유교의 고장이다. 안동시 풍산읍 소산마을은, 인근에 있는 하회마을에 비하면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안동 김씨의 집성촌으로 안동 김씨 대종택인 양소당 등 고택과 삼구정, 태고정, 청원루, 삼소당 등을 품고 있는 마을이다.
* [풍산의 소산마을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安東金氏)에 대하여]
안동 풍산의 소산마을은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본거지이다. 경상북도 안동(安東)을 본관으로 하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김은열의 둘째 아들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는 세칭 ‘구(舊) 안동[先金]’과 고려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新) 안동[後金]’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구 안동 김씨[先金]〉; 구 안동 김씨의 중시조는 고려 원종 때의 시중(侍中)·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이다. ‘구안동 김씨’[先金]은 김방경의 아들과 손자 대에 크게 중흥하여 아들 김선은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 김흔은 찬성사, 김순(金恂)은 삼사판사(三司判事), 김윤(金倫)은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 김선의 아들 김승용(金承用)은 대제학, 김승택(金承澤)은 평장사, 김영돈(金永暾)은 유명한 무장(武將)이며, 김영후(金永煦)는 우정승을 지내 모두 명신·충신으로 이름났었는데, 특히 김영후의 후손이 조선 전기에 세력을 크게 떨쳐 사실상 ‘구 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구 안동’의 세계(世系)는 김방경의 현손(玄孫) 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중 13파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13파 중에도 김영후의 손자들인 김익달(金益達)의 제학공파(提學公派), 김사렴(金士廉)의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김사형(金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 등 3파가 ‘구 안동’ 인구의 60∼70%를 차지하여 통칭 ‘제안익(提按翼) 3파’로 불린다. 이밖에 군사공파(郡事公派, 士陽)·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九容)·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 九鼎)가 그에 버금한다. 좌의정을 지낸 김사형의 익원공파에서는 좌의정 김질(金礩), 영의정 김수동(金壽童), 이조판서 김찬(金瓚) 등이 나왔다. 개국공신 김사형의 손자인 김질은 1456년 성삼문 등과 단종복위의 거사를 꾀하다가, 동지들을 배반하고 세조에게 고변, 사육신사건을 일으켰다. 영의정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렇듯 세를 떨치던 ‘구 안동’은 인조 때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꺾이게 되었다. ‘구 안동’의 인물로는 이밖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원주목사 김제갑(金悌甲)과 그의 조카 김시민(金時敏, 진주목사)·시약(時若) 형제, 판서를 지낸 청백리 김시양(金時讓)과 그의 아들 이조판서 김휘(金徽), 숙종 때의 시인 김득신(金得臣, 참판), 무장(武將)으로 영의정이 추증된 김응하(金應河)와 훈련대장 김응해(金應海) 형제, 훈련대장 김중기(金重器)가 있으며, 현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있다.
〈신 안동 김씨[後金]〉‘신 안동 김씨’(後金)는 특히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으로 더 알려졌다. 흔히 ‘신 안동 김씨’을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이라고 하는데, 큰 벼슬을 많이 내었다는 비유로 삼는다. ‘신 안동’의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신라 말 고창군(古昌郡 : 현 안동)의 성주로, 왕건이 고려를 개창할 무렵 고려에 귀부(歸附)하여, 개국공신·태광태사(太匡太師)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김선평의 후손들은 김극효(金克孝)의 아들 대에서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등이 정승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 때 좌의정 김상헌, 그의 후손이 세도가문으로서의 주류를 이루어 이들을 ‘장동김씨(壯洞金氏, 莊金)’이라고도 한다.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에서 부자 영의정·형제 영의정·부자 대제학 등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수십 명의 판서가 나왔고, 우의정 김상헌의 형 김상용(金尙容)의 후손에서도 정승·판서 등이 많이 나왔다. 형제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수항(壽恒)과 김수항의 아들 영의정 김창집의 후손에서 왕비 3명을 내었는데, 이들이 ‘신 안동’을 세도가의 반석 위에 오르게 한 인물들이다.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김달순(金達淳)·문순(文淳)·희순(羲淳)·유근(儷根)·교근(敎根) 등 일족이 정승·판서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 일문에서는 영의정 김좌근(金左根)·흥근(興根)·병학(炳學)·병국(炳國)·병시(炳始), 호위대장(扈衛大將) 김조근(金祖根, 헌종의 장인), 판서 김수근(金洙根)·보근(輔根)·병기(炳冀)·병주(炳州)·병덕(炳德)·병지(炳地)·병교(炳喬) 등을 배출하였다. 이들 세도와는 대조적으로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金炳淵)도 ‘신 안동’이며, 근대 인물로는 한말의 정치가 김옥균(金玉均), 김좌진(金佐鎭) 장군 등이 있다.
* [삼구정(三龜亭)] ― 안동 풍산 소산(素山) 마을 초입에 있는 유서 깊은 정자
소산리 고택마을 초입의 오른쪽에, 너른 녹지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 가장자리 언덕 위에 ‘삼구정(三龜亭)’이 있다. 삼구정은 안동 김씨 소산마을 입향조인 김삼근(金三近)의 손자 김영전(金永銓, 1439~1522)이 지례현감으로 있던 1495년(연산군1)에 지은 것이다. 당시 김영전은 88세의 노모 예천 권씨를 즐겁게 하려는 효심에서 아우 김영추(金永錘), 김영수(金永銖)와 함께 삼구정을 건립하였다. 삼구정(三龜亭)이란 정자 앞에 거북이[龜] 모양의 바위가 세 개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거북이는 십장생 중의 하나이므로 모친이 거북처럼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 동안 몇 차례 보수한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건물은 1947년 대대적으로 보수한 것이다. “三龜亭”(삼구정) 현판은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이 썼다.
☆… 삼구정(三龜亭)은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동오(東吳)’라고 불리는 높이 2m 가량 되는 봉우리의 머리에 앉아 있다. 북쪽으로는 좀 거리를 두고 안동의 진산(鎭山)인 학가산이 둘렀고, 동·서·남 세 곳은 넓은 풍산 들판이 시원하게 트여 있으며, 남쪽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곡강[신역천]이 흐르고 있는 절경에 자리를 잡고 있다.
☆… 정자의 토석담 밖에는 노거송(老巨松)이 둘러서 있어 더욱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서측 담에 둔 작은 일각문에 들어서면 삼구정이 날아갈 듯 자리 잡고 있고 그 앞 왼쪽에는 삼구석(三龜石)이 보인다. 건물은 비교적 큰 잡석으로 기단을 쌓고,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나 2개소에는 탑의 옥개석이 사용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은 모두 우물마루로 시설하였다. 건물의 모습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있어 조선 초기 정자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어 경북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 삼구정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언덕의 서쪽 가장자리에 2단의 자연석 위에 ‘三塘金瑛先生詩碑’(삼당 김영 선생 시비)가 있다. 김영(金瑛)은 ‘신 안동 김씨’[後金] 11세 김영수(金永銖)의 맏아들이다.
빈 배에 섰는 白鷺, 碧波에 씻어 흰가
네 몸이 저리 흰들 마음조차 흴쏘냐
만일에 마음이 몸 같으면 너를 좇아 놀리라
이 시조를 권상로(權相老) 박사(전 동국대 총장)가 한역(漢譯)하여, 그 옆 작은 비석에 따로 새겨 놓았다. …
‘江上虛舟佇立鷺 / 問渠日浴碧波無 / 如今心地如身白 / 與爾相從日夜趨’
* ‘白鷺’(백로) 흰색의 해오라기요, ‘碧波’(벽파)는 '푸른 물결'이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많은 세태를 꼬집어 두고, 깨끗한 외모만큼 마음도 그와 같다면 더불어 공경하는 마음으로 좇겠다는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 그런데 요즘에는 겉은 정의(正義)로 포장을 하고 속은 음흉하고 시커먼 탐욕(貪慾)으로 가득 찬 ‘철면피’ 까마귀들이 세상에 판을 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힌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위선과 거짓이 판을 치는 오늘날의 정치판을 바라보면, 정직하고 진실한 인간성이 더욱 절실한 문제다!
* [풍산 소산마을 청원루(淸遠樓)] ― 병자호란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金尙憲)이 살았던 곳
청원루(淸遠樓)는 원래 중종(中宗, 1488~1544) 때 김번(金璠, 1479~1544)이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지은 집이다. 세도가의 기반을 닦은 김번은 '신 안동' 11대 김영수의 둘째 아들이다. 이후 병자호란 당시 인조(仁祖, 1595~1649)의 굴욕적인 강화에 반대한 척화(斥和) 주전론(主戰論)의 거두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청나라에서 6년 동안 인질로 잡혀갔다 돌아와서 살았던 곳이다. 1645년(인조 23) 청음(淸陰) 김상헌이 누각으로 고쳐 세웠다. 원래 두 채로 된 건물이었으나 1934년 홍수로 인해 한 채만 남아 있다. ‘철천의 한(恨)이 맺힌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淸遠樓)’라 이름 지었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87번지에 있다.
청원루는 좌익사(左翼舍)·우익사(右翼舍)를 중층으로 꾸미고,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조성한 후 단층으로 앉힌 다락집 형상의 ‘ㄷ’자형 평면으로 되어 있다. 정면은 7칸이다. 몸채 부분은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 툇간에 온돌방을 둔 전형적인 중당 협실형(夾室形)이며, 특히 몸채 대청을 60㎝ 정도 폭으로 1단 낮게 하여 마루를 2단으로 구성한 점이 주목된다. 좌익사·우익사의 누마루는 내측으로 궁판에 풍혈(風穴)을 둔 난간을 세워 개방하고, 정면과 측면은 판벽(板壁)에 판장문(板牆門)을 달아 폐쇄하였으며, 누(樓) 하부 전면 칸에 곳간을 두고 뒤쪽에는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정면 원주(圓柱) 상부에는 길고 날카로운 살미를 끼우고 주두를 얹고 내측으로 보아지를 두어 대량(大樑, 대들보)을 받게 하였다.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9호, 대한민국 보물 제2050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2009년 현재 소유자 및 관리자는 김성진이다. 청원루는 중층과 단층을 합성한 평면 구성과 세부 기법이 주목되는 건축물이다.
청원루 좌익사 앞 마당에「淸陰金公尙憲先生詩碑」(청음 김공상헌 선생 시비)가 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읊은 시조(時調)이다. 그리고 그 옆에 안동 김씨 시조(始祖)와 그 후손들의 활약과 청백(淸白) 가문을 찬양하는「咏始祖太師事示同宗諸君」(영시조태사시동종제군)이 새겨져 있다.
가노라 三角山아 다시 보자 漢江水야
故國山川을 떠나고쟈 하랴마는
時節이 하 殊常하니 올동말동하여라
「咏始祖太師事示同宗諸君」'麗代論功在史編 煌煌吾祖冠張權 一時帶礪還餘事 淸白傳家八百年'
* [소산동(素山洞) 동야고택(東埜古宅)]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47호
동야고택(東埜古宅)은 김중안(金重安)이 1,700년 무렵 전후로 지은 것으로 추측한다. 이 집은 영조 때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이 태어나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김양근은 조선 영조 때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어전에서 있었던 면접시험의 답안으로,「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魯人東埜畢事’(노인동야필사)를 인용하였다. ‘魯人東埜畢事’는 .‘노나라 사람이 동쪽 들판에서 일을 마치다’는 뜻이다. 영조가 “동야 선달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면서 김양근으로 하여금 시권을 외우게 하였는데, 김양근은 이것을 기념하여, 호를 ‘동야(東埜)’라고 하였다.
동야고택은 소산 기슭에 집터를 잡고 동남쪽으로 향하게 지었다. 앞마당에 2단의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사랑채를, 뒤에는 안채를 지었는데, ‘ㅁ’자형이다. 안채는 사랑채의 기능이 남았으며, 큰 사랑방이 있는 사랑채의 원래의 모습은 초가였다. 동야고택의 집 모양은 안동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다.
* [양소당(養素堂)] ― 신(新) 안동 김씨[後金]의 종택, 중시조 김선평의 후손
신 안동 김씨 종택 양소당(養素堂)은 조선 성종 때 김영수((金永銖, 1446~1502)가 지었다고 한다. 김영수의 호는 ‘양소당’으로, 신 안동 김씨 중시조 김선평의 후손으로 소산마을 입향조인 김삼근의 손자이기도 하다. … 종택은 사랑채, 중문간채, 안채로 구성된 ‘ㅁ’자형 건물과 사당이 있다.
* [소산마을 안동 김씨[後金]와 한양의 장동 김씨[莊洞金氏]]
신 안동 김씨의 시조는 김선평이다. 성종 때 10세 김계행은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을 지냈다. 그런데 10세 김계권(金係權)은 학조(學祖), 영전(永銓), 영균(永鈞), 영추(永錐), 영수(永銖) 등 모두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제5자 김영수가 바로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고조부인 장령공이다. 김영수(金永銖)는 벼슬이 사헌부 장령에 그쳤지만 당대의 유수한 인사들과 교류하여 하였다. 소산마을 고택 양소당(養素堂)은 바로 그가 지은 것인데, 그 가옥의 규모만 보아도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런 토대 위에서 김영수의 두 아들 김영(金瑛)과 김번(金璠, 1479년(성종 10)~1544년(중종 39))이 문과에 급제하면서, 안동 소산마을을 떠나게 되었는데, 김영(金瑛)은 한양의 청풍계(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김번(金璠)은 장의동(지금의 궁정동)에 터전을 마련하게 되어, 후에 말을 줄여 '장동(莊洞)'이 되었고, 장의동은 17세기 중반까지 한성부 북부 명통방에 소속되어 있었다. 안동 김씨에 있어 풍산의 소산마을이 고향이라면, 한양의 장동은 서울 집성촌이었다. 김번(金璠)이 한양에 와 정착한 이후, 안동 김씨들은 주로 한양의 중심[지금의 경복궁 서쪽 일대의 지역]에 주거를 형성하였는데, 김상헌(金尙憲)의 호적에 등장하는 명통방의 저택은 바로 김번으로부터 김상헌으로 이어지는 장동 김씨(莊洞金氏)의 종가(宗家)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김번부터 김극효까지의 3대가 안동 김씨의 입경(入京)과 정착기라면,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이후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며 번성을 구가하는 시기였다. 그리하여 김번(金璠)의 아들 대(代)인 김생해 때부터 본격적으로 ‘장동 김씨’(莊洞金氏)라고 칭한다.
¶ [신안동 김씨(장동김씨)의 사람들] ―
* 순원왕후[순조(純祖)의 비]는 김상헌의 문정공파 16세인 김광찬 7명의 아들 중 셋째인 김수항 계열의 22세손 김조순의 딸이다. 김수항의 자손들은 조선시대 왕의 외척으로서 세도정치의 주인공들이다.
* 효현왕후[헌종(憲宗)의 비]는 김조순과 7촌간이며 23세손인 김조근의 딸로, 김조순의 큰 할아버지의 자손이다
* 철인왕후[철종(哲宗)의 비]는 김조순과 7촌간이며 23세손인 김문근의 딸, 김조순의 작은 할아버지의 자손이다.
* 방랑시인 김삿갓[金炳淵]은 신안동 김씨 문중의 15세 김상준의 휴암공파 광휘의 24세손이다. 김상준은 문정공파 김상헌과 4촌이다.
*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은 15세 김상용의 문충공파 25세손이다. 김상용은 김상헌은 모두 14세 김극효의 아들로 형제이다. 제5자인 김상헌이 장손인 김대효의 대을 잇기 위해 양자로 들어갔다.
* 청산리전투의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은 김상용의 문충공파 26세손이다. 김좌진의 아버지 김형규는 김옥균과 11촌이다. 야인시대의 주인공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둘째부인 김계월의 소생이다.
* 학조대사(金學祖)는 신안동 김씨 10세 김계권의 첫째 아들로 왕의 기운을 타고 났다고 하여 어려서 불교에 입문하게 되었으며, 세조의 왕사를 담담하였다. 또한 풍수에 능통하여 조카인 김번(金璠)의 집터를 장의동에 정하면서 13세 김생해 때부터 ‘장동 김씨’라고 칭하게 되며 14세,15세에 자손이 번성하였고 이때부터 장동 김씨는 많은 지파로 나눠지게 되었다. * 조선시대 벼슬을 지낸 장동 김씨는 15명의 정승과 6명의 대제학, 35명의 판서가 있었지만, 판서 정도는 벼슬에 끼지도 못한다고까지 말한다. 조선 후기 그들의 세도(勢道)는 하늘을 찔렀다.
* [소산의 신 안동 김씨(後金)와 한양의 안동 김씨(莊洞金氏)]
☆… 소산(素山)은 안동의 진산인 저 학가산의 웅크린 기운이 일단 평지로 입수했다가 다시 솟아낸 첫 번째의 봉우리이지만, 주변의 너른 풍산들 때문에 상승감이 있는 작은 산이다. 모양이 가운데가 솟은 이등변 삼각형 꼴이어서 글자모양 대로 ‘素’(소)자를 쓴 듯하지만, 글자의 뜻처럼 이 봉우리는 작고 아담하여 ‘소박하다’는 느낌을 준다. 비록 작은 봉우리이지만 이 마을에 세거한 안동 김씨들이 발휘한 당대의 문화·역사적 역량은 결코 작지 않다.
안동 김씨가 소산(素山)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태조-세조 연간)로 알려져 있다. 시조 김선평의 9세 후손인 김삼근(金三近)이 소산 아래에 정착하였고 김계권과 김계행 두 아들을 두었다. 10世 김계권은, 출가하여 세조 때 큰 역할을 한 아들 학조대사를 비롯하여 다섯 아들을 두었고 김계행은 도승지를 한 보백당 김계행이다. 11세대 때 김계권의 다섯 째 아들인 김영수(金永銖)는 서울의 장동(莊洞)에 정착하여, 높은 벼슬에 오른 후손을 많이 배출했다. 과거에 급제하여 서울에 정착한 김영과 김번이 김영수의 아들이다.
뒷날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한 노론(老論)의 명문가문은 이른바 ‘장동 김씨(莊洞金氏)’다. 전국 걸쳐 안동 김씨는 여러 곳에 살지만, 소산마을이야말로 신 안동 김씨의 본거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산에 세거한 안동 김씨는 조선 중기 이후 남인(南人)으로서 퇴계학파로 행동했지만, 소산에서 갈라져 간 서울 장동의 안동 김씨는 남인과 대척관계에 있는 노론(老論)의 중심세력이었다. 그런 관계로 소산에 세거하거나 안동지역에 사는 안동 김씨와 서울에 진출한 노론의 안동 김씨는 당파적으로 서로 달랐기 때문에, 처신하기 곤란한 점이 적지 않았다. 이를테면 노론이 완전히 득세한 시기에 노론들은 남인들의 세력권인 안동을 제압하기 위해 소산의 안동 김씨를 발판으로 삼기 위해 소산에 진남서원(남인을 진압하는 상징적 의미)을 세운 일이 있는데, 이때 이 지역 남인들이 그러한 시도를 적극적으로 무산시켰던 사례가 있다.
안동 김씨의 본거지인 소산(素山)으로 말미암아 훗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안동인’들의 세도정치로 오해하여, '안동인들의 유교적 보수주의와 세도정치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비판하고 나아가 안동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갖는다. 안동사람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억울할 누명이다. 200여 년에 전에 안동을 떠나 서울에 살면서 이미 서울사람이 되었고, 그것도 당파적으로 안동과 대립관계에 있던 노론의 안동 김씨[莊金]가 세도정치를 하여 망국(亡國)에 이르게 하였던 것이다.
본관이 ‘안동(安東)’이라는 이유로 안동사람들을 세도정치의 장본인으로 단죄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다. 오히려 노론(老論)의 일당독점정치가 망국에 이르자 구국에 앞정 선 것이 바로 이 지역 사람들이다. 을미의병에서부터 독립투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도자들이, 노론에게 핍박받았던 이곳 남인에게서 가장 많이 나왔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 오늘, 풍산의 너른 들녘을 앞에 두고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소박한' 소산은 그러한 역사의 뒤안길을 조용히 담고, 오늘날 정권이 자행하는 무도한 세상을 묵묵하게 지켜보고 있다.
* [구 안동 김씨[先金]의 종택 삼소재(三素齋)] ―― 중시조 김방경의 후예의 종택
삼소재(三素齋)는 구 안동 김씨 일명 '상락(上洛) 김씨' 중시조인 김방경의 18대조인 김용추가 지은 종택으로, 조선 현종 15년(1674)에 지은 건물이다. 당호인 ‘三素’(삼소)는 김용추의 5대손인 통정대부 삼소재(三素齋) 김종락의 호를 딴 것인데, ‘삼소’는 ‘소산(素山)에서 살며, 깨끗한 행실을 하고, 검소한 음식을 먹는 것’을 의미한다. 청빈도를 삶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다. 삼소재(三素齋)는 소산마을에서 위쪽에 자리 잡고 있어 마을 전체를 내려다 보고 있다. 김종락은 소산마을 제일 위에 비스듬한 언덕 위에 지곡서당을 지어 거처하기 시작하였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동향(東向)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를 중문간으로 연결하였다. 안대청의 건넌방 앞에 뒤주를 둔 것과 중문 옆 외양간 위에 다락을 둔 것이 특이하다. 사랑채 오른쪽 후원에 중시조의 신위를 모신 사당(祠堂)이 있다.
삼소재(三素齋)는 어제 필자가 지나온 건지산 아래 ‘상락대(上洛臺)’에서 무술을 수련했다는 김방경(金方慶) 장군의 후예의 종택이다. 구 안동 김씨[先金]의 종택이다. (소산마을 양소당, 청원루, 삼구정 등이 신 안동 김씨[後金]의 고택이다.) 그래서 사랑채 대청의 좌측에 중시조 김방경의 ‘장군 영정’과 ‘관복 영정’을 나란히 걸어 놓고 그 아래 김방경의 행장(行狀)을 요약해 놓았다. 그리고 사랑채 대청의 좌측 벽에 ‘謹言愼行 能忍最寶 氣山心海’를 적은 액자가 걸려 있다. ‘말을 조심스럽게 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라. 능히 참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보배이다. 기백은 산과 같이 하고 마음은 바다와 같이 하라’는 뜻이니, 가훈이다. 그리고 대청의 오른쪽 벽에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을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쓴 액자가 걸려 있다. 청암(靑菴) 김시웅(金時雄)이 쓴 날렵한 행서이다.
祠堂(사당)
* [안동 권 씨 집성촌인 가곡리] ― 600년 전통의 가일문화마을 이야기
* [가일마을 안동 권씨의 유래] ― 시조 권행(權幸), 고려태조 왕건으로부터 받은 사성(賜姓)
☆… 풍산읍 소산리 삼구정에 916번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1km 정도 가면, 마을 앞에 큰 저수지인 가곡지(佳谷池)가 있는 안동 권 씨 세거지가 있다. 600년 세거지 '가일(佳日)마을'은 고려시대에는 왕(王)씨가 살았고, 그 뒤에 풍산 류(柳)씨가 대대로 살았다. 이후, 가일마을은 고려 개국공신 태사공 권행(權幸)의 후손인 안동 권씨 복야공파가 일가를 이루어 살아온 곳으로, 세종 때 정랑을 지낸 참의공 권항(權恒)이 이곳의 부호 풍산 류씨 입향조 전서공 류중혜(柳從惠)의 숙부인 류개(柳開)의 손자 류서(柳湑)의 사위가 되어 처음 터전을 잡게 되었다. 순흥 안(安)씨 또한 류서의 증손녀에게 장가들어 오늘날까지 세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역사로 현재까지도 안동 권씨, 순흥 안씨 합동으로 류서(柳湑)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안동 권씨(安東 權氏) 시조(始祖) 권행(權幸)은 930년(고려 태조 13년) 고창군(高昌郡, 지금의 안동)에서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과 함께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태상(大相)으로 임명되었다.『고려사』에는 흔행(昕幸)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족보에서는 본성이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본명이 김행(金行)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은 그의 전공을 치하하며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하였다.(能炳幾達權)’고 하며 권(權)씨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이름은 음과 뜻이 상통하는 행(幸)으로 바꾸었다. 시조 권행(權幸)의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천등산 능골에 있다. 권행(權幸),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 세 사람은 고려 창업의 공으로 삼한벽상아부공신(三韓壁上亞父功臣)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를 제수 받았으며 983년(성종 2) 이 세 명을 기리기 위해 현재의 안동시 북문동에 삼태사묘(三太師廟)가 세워졌다.
☆… 안동시 풍산읍 가곡리의 뒷산은 ‘정산(鼎山)’이다. 이웃의 ‘소산(素山)’에 곧바로 이어져 있는데, 두 봉우리가 산세의 흐름에 따라 같은 높이로 앞뒤로 나란히 벌어져 있어 솥가마[鼎]처럼 안정되어 있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 산정에 큰 바위가 있으나 짙은 솔숲으로 가려져 있다. 정산의 정상에 서면, 남쪽으로 하회마을의 주산인 ‘화산’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광활한 풍산의 너른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산의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 바로 ‘안동 권씨 복야공파’의 가일마을이다.
마을 입구의 고목(古木)과 가곡지(佳谷池)
안동 사람들이 소위 ‘가일 권씨’라 일컫는 안동 권씨 복야공파의 일부가 가일마을에 입향하게 된 것은 ‘권항(權恒)’ 때부터이다. 마을의 기운은 정산의 두 자락이 말발굽마냥 포근하게 감싸고, 마을 앞은 풍산 평야보다 지대가 약간 높은 탓에 농수를 확보하기 위해 연못[佳谷池]을 두고 있다. 산세와 이 마을 전체를 감도는 기운은 외부세계에 의존하지 않는 나름대로 독립성을 가지고 있으면서,그 기운이 맑고 꼿꼿하다. 한마디로 외부세계를 관망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 ‘고립적 정의감’이 이 마을의 유별한 기운이다. 따라서 스스로는 정의롭더라도 외부로부터 오해를 받을 수 있다. 그 내력이 그렇다.
실제 이 마을의 역사는 맑고 정의로운 인재가 지속적으로 배출되면서도 많은 고난(苦難)을 받았다. 가일 권씨를 명문으로 발돋음하게 한 ‘화산 권주(權柱)’가 연산군에 의해 처형되고 그의 부인은 자결하였다. 그 아들 ‘권질(權礩)’도 또한 유배되고 권질의 딸은 실성하게 되었다. (권질은 이 불쌍한 딸을 퇴계에게 후처로 보냈다.) 이러한 어려움은 화산 권주의 5대손 권박과 그의 조카 권선이 문과에 급제하여 다시 문명을 떨치게 됨으로서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 더구나 권박의 손자인 ‘병곡 권구’는 매우 현달하여 당시 영남 유림의 종장인 ‘갈암 이현일’의 손서(孫壻, 손자의 사위)가 되었다. 병곡 권구 이후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대대로 꼿꼿한 선비의 가통을 이어갔다.
그렇지만 병곡의 8세 후손대의 ‘권오설’은 일본 유학 후 신사상연구회를 이끌면서 조선노동동맹 중앙위원이 되어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것이 이 마을에 닥쳐온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 이래 한국정부의 반공이념이 이 마을 출신 권오설의 사회주의적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연좌제적 핍박을 가했기 때문에, 이 마을사람들의 정신적 고통은 적지 않았다. 최근엔 권오설의 독립투쟁활동이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다. 정의롭고 지성적이지만 그것 때문에 유별나게 핍박받았던 가일 권씨의 역사는 어쩌면 안동지역의 한국 근대사를 압축해 놓은 것 같다. 정산은 오늘도 가일마을의 역사를 새롭게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 [가일마을 안동 권씨의 수난] ― 문덕이 높은 인재, 강직한 선비의 기질
가일마을 입향조 참의공 권항(權恒) 이후, 화산(花山) 권주(權柱), 병곡(屛谷) 권구(權榘), 정봉(定峰) 안담수(安聃壽)를 비롯하여 학문에 열중하여 문집이나 유고를 남긴 사람이 스물이 넘는다. … 조선 중기 연산조에 화산 권주(權柱)의 5부자 중 네 분이 연이은 사화(士禍)로 희생되었으며, 7대에 걸쳐 의금부 도사가 세 번이나 다녀간 영남 유일한 곳이다.
근대에는 우암 권준회를 필두로 권오헌, 권영식, 권오설, 권오상 등 열 세 분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으며 6·10만세운동의 족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마을 뒤에 잘 생긴 봉우리를 정산(鼎山 또는 定山)이며 풍수가들에 의하면 이곳은 영남 8대 양택지(陽宅地)의 하나이다. 가곡(佳谷)은 가일(佳日)과 지곡(枝谷)에서 한 자씩 따와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 [가일마을 안동 권씨 병곡(屛谷) 종택] ― 화산(花山) 권주(權柱)가 살았던 집
가일마을 병곡고택(屛谷古宅)은, 조선 후기의 학자였던 병곡(屛谷) 권구(權榘)의 집이다. 원래는 병곡 권구의 7대조인 도승지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화산(花山) 권주(權柱)가 살았던 집인데, 18세기 중엽에 후손들이 고쳐지었다. 당호 ‘時習齋’(시습재)는 논어 제1장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따왔다. 면학(勉學)을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다.
병곡종택(屛谷古宅)은 정산(鼎山)을 배경으로 하여 가곡지(佳谷池) 건너 ‘너른 풍산들’이 바라보이는 마을 한 가운데 있으며, 6칸 대청이 있는 큰 건물이지만 구조는 간단하고 소박하다. 전체적으로 ‘ㅁ’자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안채의 북동쪽에 사당이 있다.
時習齋
환와서실
그 대청마루의 측면에 ‘賢人處世能三省 君子立身有九思’ 액자가 걸려 있다. ‘어진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늘 세 가지를 반성(反省)하고 군자가 자신을 세우는 데 구사(九思)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三省‘은 현인이 처세하는 요건이며, ’九思‘는 군자가 자신을 올바르게 하기 위하여, 늘 가녀야 할 아홉가지 마음가짐을 뜻한다.
賢人處世能三省 君子立身有九思
’三省‘은『論語』「學而篇」(제4장)에 나온다.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증자(曾子)가 말했다. ’나는 매일 몸소 매일 세 가지를 반성한다.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하면서 진실되지 아니하였는가? 벗과 사귀면서 신실되지 아니하였는가? 전수 받은 것(공부한 것)을 익히지 아니하였는가?)
’九思‘는『論語』「季氏篇」(제10장)에 나온다. “孔子曰 君子 有九思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늘 아홉 가지를 생각하고 있으니, 눈으로는 밝게 볼 것을 생각하고 귀로는 총명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며 얼굴빛은 온화하게 할 것을 생각하며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며 말을 할 때는 진실하게 할 것을 생각하며 일을 할 때는 경건하게 할 것을 생각하며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물을 것을 생각하며 화가 날 때는 곤란하게 될 결과를 생각하며 이로운 것을 보면 (그겻이) 의로운가를 생각한다).
* [가일마을 안동 권씨 수곡고택(樹谷古廬)] ― 우암 권준희의 덕망, 항일운동가의 집
☆… 수곡고려(樹谷古廬)는 수곡(樹谷) 권보(權보, 1709~1778)를 기리고자 1790년 경에 후손이 지은 건물이다. 화산 권주, 병곡 권구 등 선조의 터전과 문호를 확장한 야유당 권장과 근와, 권익에 이어 5세손인 ‘우암 권준회’ 공은 1849년에 출생하여 가학을 잇고 덕성을 길러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니 동서로 지나는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군자다운 면모에 일제 경찰도 찬탄했으며 절제 있는 삶으로 집안을 중흥시겼다.
권준희는, 1913년 삼종제, 삼종질 권영식과 함께 풍기광복단에 참가하였다. 1915년 풍기광복단이 조선국권회복단과 연합하여 ‘대한광복회’로 계승되자, 여기에도 참여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만주 일대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나라 안팎에 거점을 독 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 했다. 권준회 공은 그 고문에 추대되어 대한광복회를 이끌다가, 1918년 일제에 붙잡혀 공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뒤 1936년에 별세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로 추서하였다. 우암의 손자 권오돈, 권오운, 권도헌을 비롯해 후손 12인이 항일 투쟁에 참여하였는데, 권준회 공은 그들의 정신적 주초(柱礎)이다. 수곡고택은 국가민속문화재 176호,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 [퇴계 이황 선생의 후처, 권씨 부인] ― 사화를 맞은 풍산 가일마을 권질(權礩)의 따님
퇴계는 21세에 허씨(許氏) 부인과 결혼하고 7년 만에 상처를 했다. 이후, 두 번째 부인은 3년 뒤인 30세에 얻는데, 그 부인이 이곳 가일(佳日)마을 안동 권씨 출신이다. 그런데 권씨 부인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권씨 부인은 갑자사화(甲子士禍)의 피해를 고스란히 당했던 집안의 따님이었다.
그녀의 조부인 화산(花山) 권주(權柱)는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 연산군 10) 때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으며, 조모는 남편이 사약이 내려졌다는 기별을 듣고 노비가 되지 않기 위해 자결했다. 아버지 권질(權礩)도 거제도로 귀양 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권씨 부인의 집안은 겨우 안정이 되는가 싶더니, 신사년(1521) 무옥(誣獄)으로 또 다시 풍파를 겪었다. 참혹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숙부인 권전(權磌)이 조광조가 화를 당할 때 귀양을 갔다 왔으나 안당, 안처겸 부자가 송사련의 역적무고로 죽음을 당하던 때 안처겸과 친하다고 해서 매를 맞다가 형장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아버지 권질도 다시 귀양을 가고, 숙모는 관비로 끌려갔다. 권씨 부인은 어린 나이에 이러한 참극을 목격하고 그 충격으로 정신이 혼비백산하여 그 후 정상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전해오는 말로는 퇴계 선생이 당시 예안(禮安)에 귀양 와 있던 권씨 부인의 아버지 권질(權礩)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권씨 부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 퇴계는, 화산 권주(權柱)의 학문과 기개를 일찍부터 존경하였고, 그 아들인 수찬 권전(權磌)의 의리를 흠모하고 있었는데, 특히 권전은 정몽주의 문묘 배향을 주창하여 성공시켰으므로 사화에 희생당한 것을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고로, 이 고을에 유배되어온, 권주의 아들이며 권전의 형인 권질(權礩)을 찾아가 가끔 문안하였다. 어느 날, 권질은 상처(喪妻)한 퇴계에게, 집안의 환난으로 인해 과년한 딸이 정신이 혼미해서 아직 시집도 못 가고 있는 형편을 말하고는 그 딸을 맡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퇴계는 말없이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예, 고맙습니다. 제가 맞이하겠습니다. 자친(慈親)께 아뢰어 승낙을 받고 곧 예를 갖추어 혼인을 치르겠습니다. 마음을 놓으시고 기력을 잘 보존하옵소서.”
이렇게 즉석에서 혼약을 하였다고 한다. 퇴계는 30세에 권씨 부인을 맞아 양곡에 집을 짓고 신접살림을 차렸고, 벼슬 중에도 서울 서소문에 함께 살았다. 퇴계는 권씨 부인과 17년 동안 생활하면서, 부인의 불민한 언행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온전하지 못한 부인의 행실을 자신의 덕(德)을 존양하는 계기로 삼아 지극한 마음으로 부인을 사랑했다. 권씨 부인이 죽기 7개월 전에 장인 권질이 떠났으나, 장인에게 딸로 인해 걱정을 끼친 일이 없었다. 퇴계의 덕성이 얼마나 고매하고 깊은가는 권씨 부인을 맞아 부부생활을 어떻게 하였는지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퇴계는, 바느질 솜씨가 없는 부인이 지어준 빗자루 같은 버선을 신고 다니기도 하고, 하얀 도포에 빨간색 천으로 기운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퇴계의 인품으로 귀결된다. 그는 빗자루 같은 버선과 얼룩덜룩한 옷을 군소리 없이 입고 다녔다. 그가 항상 불평 없이 그런 버선을 신거나 옷을 입고 다니자, 심지어는 제자들과 동료들 사이에서 퇴계 패션(?)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번은 권씨 부인이 제사상에서 떨어진 배를 얼른 치마 속에 감추다가 손윗동서에게 들켰다. 퇴계는 아내 대신 형수에게 사죄한 후 아내를 방으로 불러 연유를 물었다. ‘배가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자, 퇴계는 그 배를 꺼내게 한 후 손수 깎아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퇴계가 권씨 부인을 얼마나 소중하게 대했던가 하는 것은 부인 사후의 예우와 처사를 보면 알 수 있다. 7월 2일 후처인 권씨 부인이 서울 서소문에서 죽자 퇴계는 전처 소생의 아들에게 적모복(嫡母服, 적실부인의 상례에 입는 상복)을 입게 했다. 부인의 시신을 서울에서 남한강의 먼 수로를 타고 단양까지 운구하고 소백산 죽령에 빈소를 차려서 맞이하고 정중하게 예안으로 모셨다. 장례는 자신이 죽어 묻힐 건지산 앞산인 백지산에 묘를 썼다. 그 아래에 있는 백동서당은 아들 첨정공 '이준'이 시묘를 살고 재사(齋舍)를 겸해 독서하던 서당인데, 일명 계남서재라고 한다. 봄이면 퇴계가 좋아하는 철쭉이 산 일대를 뒤덮어 흡사 산이 붉은 치마를 두른 듯 꽃동산이 된다. 산기슭에는 전 부인에게서 난 아들이 시묘(侍墓)를 살고, 퇴계 자신은 건너편 동바위 곁에 양진암을 지어 1년 넘게 머무르면서 부인을 위로하듯 지켜 주었다.
퇴계는 장인이 돌아가신 후, 그 비문에 ‘길사고풍’(吉士孤風)이 있다고 적었다. 길사고풍은 ‘착하고 아름다운 선비의 고고한 풍모’라는 뜻이다. 그리고 비문에 적은 ‘천부적으로 착하시고. 인간의 도리를 극진히 하셨다.’는 말은 어쩌면 퇴계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인 듯, 장인과 사위는 모두 본성이 어질었고 인륜과 의리에 극진하였다. 장인 권질은 딸을 퇴계에게 여의고 나서 8년을 더 예안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그 동안 퇴계는 장인을 극진히 모셨고, 양곡과 학소대에, 장인이 해배하고 나서 살 집터도 보아 두었다.
퇴계는 장인에게 아들이 없음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장인의 행장(行狀)을 비문에다 상세하게 쓰고 맨 마지막에 ‘큰 집에 뒤가 끊기므로 내가 이 돌에 적어 새기노니 영원토록 전할 지어다!’ 하고 손수 글을 짓고 써서 비를 세웠다. 사위로서 처부모에게 이 이상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정신이 불민한 딸을 맡겨 준 그 장인에게 17년 동안 스스로 수양과 덕성으로 부부생활을 끝낸 퇴계가 장인의 산소를 찾아가 묘사를 지내고, 이렇게 추모했다.
옛날에 그땐 참사람을 몰라보고
까닭 없이 저승으로 이 분을 데려갔네.
고향에 돌아와 묘사를 지낸 후
매화 피는 모습 보고 장인 생각하옵니다.
☆… 퇴계는, 고고한 길사(吉士)의 절의가 있는 장인을 높이 받들었고, 비록 명민하지는 못해도 조부(권주)와 부친(권질)의 의기와 자질을 이어받은 부인이기에 더욱 애지중지하였던 것이다. 이 권씨 부인 이야기는, ‘가을하늘 밝은 달처럼’ 권오봉이 쓴 「퇴계선생 일대기」를 참조하여 쓴 글이다. 퇴계 선생의 아름다운 인품과 고고한 덕성을 느끼게 하는 실화이다. 선생의 그 지극한 마음이 가슴 뭉클한 감동을 다가온다. 선생은 너그러운 관용과 사랑으로 부인을 공경함으로써 군자의 도를 실천하셨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