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를 향한 시니시즘과 ‘푸른 광기들’의 세계
ㅡ『놀이의 방식 』 2016년 김유석 , 『시인동네』
이형권(문학평론가)
1.
시집을 열자마자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부조리는/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부조리를 낳는다./ 그런 삶에 관한/ 나는 서투른 시니시스트일 것이다.”(「시인의 말」)그는 시집의 모두에서부터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서투른 시니시스트”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냉소의 사전적인 의미는 대상에 대한 쌀쌀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비웃는 것을 일컫는 것인데, 철학적 의미에서 냉소주의(cynicism)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관습이나 태도, 도덕 따위를 부정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따라 살아갈 것을 주장하는 사상이다. 다른 말로 견유주의(犬儒主義)라고도 하는 냉소주의는 고대 희랍의 기이한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견지했던 삶의 태도와 관계 깊다. 디오게네스가 죽음을 앞두고 알렉산더 대왕에게 “열정과 욕망의 노예였던 알렉산더 대왕과 속세의 모든 열정과 욕망을 지배한 디오게네스”라고 했던 말은 유명하다. 그는 속세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아의 명령에 따른 삶을 추구했던 것이다.
시니시즘은 부조리에 대한 실존주의자의 태도와도 관계 깊다. 부조리는 무의미하고 불합리하고 모순되는 것들로서 인간을 절망에 빠지게 하거나 한계상황으로 몰고 가는 삶의 조건을 일컫는다. 부조리를 본격적으로 문제 삼은 것은 실존주의자들인데, 그들은 전후의 폐허 속에서 이성의 힘에 의한 집단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부정하면서 개체적 자유를 추구했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시대 배경이나 자유의지와 관련해서는 차이가 있지만,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냉소한다는 점에서는 실존주의와 유사성을 갖는다. 다만 사회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태도상으로 까뮈보다는 사르트르에 가깝다. 또한 이 시집의 시니시즘은 언어적, 수사적 차원보다는 시정신의 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정신적, 미학적 태도와 관계 깊다. 그래서 인간 존재의 무의미성· 무력감· 잔악성· 물질성· 반생명성 등에 대한 비판의 정신을 토대로 반어적인 표현이 빈도 높게 드러난다. 따라서 김유석 시의 시니시즘은 인간 존재의 부조리와 모순을 아이러니컬하게 드러내는 태도이자 그것의 극복을 지향하기 위한 정신적 토대이다.
2.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이 시집에 두루 편재한다. 시적 비유에 의하면, 세상은 “배역 인물을 자신으로 착각하는 쓸쓸한 당신”(「배우를 연기하는 배우」)이나 “통속하는 생의 줄거리에 갈등하는 당신”(「매순간마다 바보 혹은 멍청이가 생긴다」), 혹은 “씨 없는 수박을 꿈꾸는 당신”(「반역」)의 시간 속에서 “자꾸 나를 걷어차기만”(「깡통」) 하는 곳이다. 이와 관련하여 각별히 주목할 것은 독(毒)과 관련된 시편들이다. 독은 세상에 미만하게 존재하는 모순과 부조리의 다른 이름인데, 아래의 시는 그 구체적 형상으로 독사(毒蛇)가 등장한다. 독을 가진 뱀, 독사는 저의 생존을 위해 은밀한 생활을 하면서 타자를 공격하는 습벽을 지녔다. 뿐만 아니라 독사는 성경에 등장하는 대로 인간에게 원죄를 짓도록 유혹한 악마적 존재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레일처럼 깔고 나아간다, 그것들은
그림자를
문양처럼 몸에 두르고 다닌다.
몸통이 기다란 것들,
무언가 생략된 듯한 형체의 것들은
꼬리를 밟으면 쭈욱 벗겨질 것 같은
징그러운 비밀을 가지고 있다.
스스르 소리를 내는 것도 그림자다.
재빠르게 풀섶에 스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치명적
그림자로부터 독이 나온다, 경계하라
소리와 수족과 따뜻한 체온을 버리고
경계 모호한 몸통과 꼬리만으로 진화해온 족속들의
슬그머니 당신에게 밟히는 그것
- 「패러독사〔para毒蛇〕」전문
이 시의 독특한 제목의 의미는 ‘독사를 빌려(para)' 세상에 퍼져 있는 “독”을 탐구해보겠다는 것이다. “독사”는 풀숲에서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수족”도 없이 비밀스럽게 살아가는 파충류 동물이다. “독사”는 또한 냉혈동물로서 은폐를 위한 알록달록한 무늬의 몸을 위장한 채, 지나가는 동물에게 갑작스럽게 치명적인 독을 뿜어 다른 생물을 잡아먹는 생리를 지녔다. “그림자를/ 문양처럼 몸에 두르고”서 “레일처럼 깔고 나아가”는 모습은 그러한 “독사”의 생리와 관련된다. 시인은 이러한 생리에서 존재의 부조리한 속성을 발견한다. “그림자”를 지닌다는 것은 자신의 정직한 실체보다는 거짓된 허상으로 살아가는 속성을, 땅바닥에 “깔고 나가는”는 포복의 생리는 매사에 당당하지 못하게 살아가는 속성을, 각각 의미한다. 이는 “독사”가 타자를 희생자로 삼아 이용만 하려는 부정적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독사”는 “징그러운 비밀”을 간직한 존재이다. 그 징그러움, “몸통이 기다란 것”은 그 안에 무언가를 음흉하게 간추고 잇다는 것을 의미하고, “생략된 듯한 형체”를 지녔다는 것은 기형적인 모습으로 타자를 기망하는 존재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징그러움은 또한 “스르르 소리를 내는 것”조차도 거짓 형상인 “그림자”로부터 연유된 것이고, 또 거기서 다른 생명에게는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는 “독이 나오”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속성을 지닌 “독사”처럼 “소리와 수족과 따뜻한 체온을 버리고/ 경계 모호한 몸통과 꼬리로만 진화해온 족속들”이 인간의 삶 가까이에 상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독사”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당신에게 밟히는 그것”으로 존재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 시는 결국 “독사”를 빌려 인간 세계의 은밀하고 이기적 본능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시에서 의하면, “징그러운 비밀”을 간직한 “독사”는 또한 자기당착의 모순을 간직한 존재이다. 세상을 ‘독’의 세계로 만든 “독사”는 세상을 지배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다른 ‘독’에 지배당하는 모순된 존재를 표상한다.
유혈목이가 삼키던 두꺼비를 꾸역꾸역 게워내고 있다.
독으로도 삼키지 못하는 독
삼킬 때보다 더 크게 아가리를 벌리고
몸에 두른 곡선을 ㄱ자로 마디마디 꺽어가며
두꺼비의 윤곽을 조금씩 목구멍 쪽으로 밀어 올린다.
독으로 삼킨 독
잘못 삼킨 먹이를 토해내는 듯하지만, 실은
두꺼비는 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삼킨 것
독으로 맞서는 독
자기방어의 수단으로 달아남을 먼저 익힌 두꺼비가
기꺼이 잡아먹힘을 선택한 까닭을 배우게 된 유혈목이는
두꺼비 몸에 주입시킨 자신의 독까지 뱉어내고는
마른 꽃대처럼 뻣뻣해져버린다.
또 다른 독으로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독
-「동사서독(東邪西毒)」전문
이 시의 제목은 중국의 왕가위 감독이 만든 영화의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 영화 <동사서독>은 시간의 흐름 속에 한 줌의 재처럼 사라지는허무한 삶을 형상화한 명작이다. 황약사와 구양봉이라는 두 인물은 각기 ‘동사’와 ‘서독’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최고의 무예가가 되려는 세속의 욕망 때문에 인간미와 사랑마저 잃어버리고 사악하고 독하게 사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사랑이나 젊음과 같이 한번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세속의 욕망을 위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잃고 사는 인간의 삶은 그래서 허무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는 이러한 영화의 주제와 내용을 패러디한 작품으로서 지나친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낳으면서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적 대상인 “유혈목이”는 ‘꽃뱀’이라고도 불린다. 아름다움(꽃)과 징그러움(뱀)을 동시에 지닌 “유혈목이”는 종종 모순으로 가득 찬 생명의 모습을 표상한다. 미당의「화사」라는 시가 그러한 모순을 잘 드러낸 적이 있거니와 이 시는 독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과는 다른 버전이다. 어쨌든 “유혈목이”는 독으로 먹이를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냉혈동물이다. 일설에 의하면 “유혈목이”는 원래 독이 없는 뱀이지만 유독(有毒) 생물인 “두꺼비”를 잡아먹은 뒤 그 독을 몸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활용한다고 한다. 문제는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아서 “유혈목이”는 “두꺼비”를 잡아먹다가 그 독 때문에 자신의 생명마저 위기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유혈목이”가 “두꺼비”를 삼켰다가 “꾸역꾸역 게워내고 있다”는 것은 “독으로도 삼키지 못하는 독” 때문인 것이다. “유혈목이”의 입장에서는 “두꺼비”를 스스로 잡아먹는 것 같지만, “두꺼비”의 입장에서는 “기꺼이 잡아먹힘을 선택”했다고 한다. “두꺼비”는 “유혈목이”에게 잡아먹힘으로써 살아서는 대적할 수 없는 강자와 동반하여 죽음에 이른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혈목이는/ 두꺼비 몸에 주입시킨 자신의 독까지 뱉어내고는/ 마른 꽃대처럼 뻣뻣해져버”리고 마는 자가당착의 존재인 셈이다.
이 시에서 “유혈목이”가 독을 품고 살다가 그 독에 의해 소멸되는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마치 속악한 욕망에 복속되어 살아가다가 그 욕망에 의해 스스로 멸망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다른 시에서 “나의 독은 씨눈을 틔우지만/ 독 때문에 스스로 썩어버리기도 한다”(「감자」부분)는 시구도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독은 파르마콘(parmacon)처럼 자기모순의 속성을 간직한다. 욕망의 독이 자신에게 약인 줄 알고 살아가지만 결국 자신에게 독이 되고 마는 모순 속에서 사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이처럼 부조리와 모순을 표상하는 “독”의 계열체들이 다양하게 등장하는 것은 이 시집의 표제작이다.
거미는 번지점프의 원조, 집을 짓기 위한 그 위태로운 곡예에서 놀이가 나왔다. 떨어지다 멈춰지는 지점, 아뜩함이 전율로 바뀌는 통점에 거미는 거꾸로 붙어산다.
암사마귀는 교미 도중 수컷을 잡아먹는다. 머리부터 먹는다. 머리가 없어진 수컷은 더욱 격 렬하게 교미를 하며 죽어간다. 잔학성과 쾌락은 동일한 감각, 머리는 상관없다.
무리를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증거이다. 개미의 생각은 앞선 개미로부터 나오고 앞선 개미의 생각은 또 그 앞에선 개미로부터 나온다. 칠월 한낮 장례행렬처럼 늘어서 먹이를 나르 는 저들로부터 우상이 나왔고 우상으로부터 계급이 생겼고, 그때부터 개미는 졸라매기에 충분한 허리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은 모두 헛것처럼 보이게 하고 그 헛것들 가운데 또 다른 헛것을 보여주는 환상마 술을 본 적 있으신가. 카멜레온의 두 눈은 원형(圓形)으로 따로 도는데 두 눈알이 교차할 때마 다 색깔이 변한다. 트릭은 몽롱한 실재
본능과 사유의 경계에 사는 해파리는 입과 항문의 구분이 없다.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생각 한다. 생각은 배설이다. 항문에서, 아, 아니 입에서 나온다.
-「놀이의 방식」 전문
시의 제목인 “놀이의 방식”은 생존의 방식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다. 물론 생존의 방식을 인간에게 투사하면 인간이 견지하는 삶의 방식이 된다. 삶을 놀이라고 명명한 이 시가 취하는 그러한 삶을 향한 태도는 냉소적, 비판적이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호이징하가 인간의 근본적 속성으로 언급한 유희적 존재(homo ludens)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배후에 거느린다고 하겠다. 주지하듯 호이징하는 “놀이”는 삶의 일부를 이루는 요소가 아니라 삶 자체라고 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homo sapiens)이나 도구적 존재(homo faber)를 극복하는 관점을 제공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삶이 지녀야 할 (진)지성이나 진실성과 같은 긍정적인 속성을 폄훼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시에 등장하는 “거미”, “암사마귀”, “개미”, “카멜레온”, “해파리” 등은 삶을 놀이로 간주함으로써 오히려 삶의 진정성을 상실한 존재들이다.
구체적으로 “거미”는 자신의 생존 조건인 거미줄을 허공에 치고 매달려 사는 생리 때문에 “위태로운 곡예”를 하면서 살아간다. “번지점프의 원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거꾸로 붙어”사는 비정상성에 익숙한 존재이다. “암사마귀는 교미 도중 수컷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생리를 지닌 존재이다. 보들레르의 시구처럼 “잔학성과 쾌락은 동일한 감각”이라는 모순을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개미” 또한 개체성을 상실하고 “생각”없이 “우상”의 지배를 받으며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카멜레온”은 “보이는 것을 모두 헛것처럼 보이게 하”는 재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가벼운 “트릭”이 “실재”라고 속이는 삶은 저 스스로도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상실한 채 “헛것”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해파리”도 “입과 항문의 구별이 없”는 생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앞뒤 구분이 없는 모순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다양한 동물들이 지닌 이러한 비정상성· 잔학성· 집단성· 허위성· 모순성 등은 부조리한 인간의 삶을 표상한다.
이 시집에서 세상을 부조리하게 하는 것들의 목록에는 또한 현대사회에 퍼져 있는 인공물들의 작위성이나 나르시시즘, 비굴한 속성, 동족상잔의 비극성 등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모두 인간이 지닌 부정적인 속성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이들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도 비판적 시니시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먼저 현대문명의 인공물에 대한 시적 태도는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난다.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을 너무 많이 본 탓이다.
풍경들이 갑자기
보푸라기처럼 뜯기는 것은
눈썹 밑에 펼쳐지는 것들에 이골 난 까닭,
먼 곳을 보라 한다.
자주 깜박거려도 꺼풀이 걷히지 않을 땐
그저 눈물이 약이라 한다, 그런데
선명함을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이 눈물은 가짜다.
겹쳐 보이는 것들
까끌거리고 뻑뻑한 것들을 씻어냈더니
눈앞이 깜깜하다.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
눈을 비비는 부작용이 생겼다.
-「안구건조증」부분
봄바람에 목마른 흰나비
소 발자국에 고인 물을 빨아먹는다.
무거운 길을 끌고 간
소의 생각을 알기나 한다는 듯
소가 걸어간 쪽으로
팔랑거리다
다시 돌아와서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빨아먹는다.
-「물꽃」전문
앞의 시에서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을 너무 많이 본 탓”에 안구건조증이 걸렸다는 진술은 세상에는 그만큼 보아서는 안 될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부조리한 세상에 불경한 것들과 함께 살다가 보니 “안구건조증”이 걸렸고, 그래서 “풍경들이 갑자기/ 보푸라기처럼 뜯기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시의 화자는 이러한 병증을 치유하기 위해 인공 눈물을 구입하여 눈에 넣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사람이다. 문제는 인공 눈물이 시야를 확보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눈앞이 깜깜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인공 눈물은 인간의 감정이나 생리적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진짜 눈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이 눈물은 가짜다”라는 외침은 현대인들이 이러한 가짜의 현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향한 비판이다. 눈물뿐이랴, 시인은 일상용품에서 인간의 신체는 물론 정신이나 감정까지도 인공적으로 조작하는 이 가짜의 시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뒤의 시에서 “흰나비”는 자아에 함몰되어 타자를 상실한 나르키소스와 닮았다. “흰나비”는 “소 발자국에 고인 물”에 갈증을 달래다가 “무거운 길을 끌고 간/ 소의 생각을” 한다. “흰나비”는 잠시 타자를 인식하여 “소가 걸어간 쪽”에 마음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서/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빨아먹는” 나르시시스트인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지나쳐서 편협한 인식의 틀에 갇혀버리는 존재일 터, 오늘날 이기적인 인간들은 대부분 나르시시스트의 기질을 간직하고 있다. 이것이 지나치면 자폐증이라는 심리적 장애로까지 발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는 겉으로는 타자와의 소통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자기도취적인 삶, 혹은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문제적 인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박에도 세상을 부조리하게 하는 것으로 비굴함이나 동족상잔의 속성 등도 냉소의 대상이다. 비굴함은 “흔드는 모양과 횟수로 감정을 통제하는 기교에 이른/ 저 개 같은 본능을 향해/ 나도 가끔씩 짖는다. 꼬리뼈가 시큰거릴 때가 있다”(「꼬리의 진화」)는 시구에 잘 드러난다. “꼬리”는 몸통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그것을 흔드는 일은 가식적인 행동의 일종으로서 상대방을 현혹시키기 위한 것이다. 동족상잔의 생리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동족을 물어뜯을 만큼 가학적인 갈치가 갈치의 꼬리를 물고 끌리는 경우도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갈치 낚시의 미끼로는 그 무엇보다 갈치의 생살이 제격이라 한다”(「갈치의 경우」)는 인상적인 시구에 잘 드러난다. ‘갈치가 갈치의 꼬리를 문다’는 속담과 비슷한,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인간”이라는 말도 있다. 동족일수록 더 따뜻하고 배려를 해야 하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그 반대이다. 시인은 당당함과 포용력이 결여된 이러한 존재가 허다하다는 것, 그것이 세상이 부조리한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렇다면 시인은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시니시즘에만 머무는가? 그렇지 않다. 그의 냉소는 부조리한 세상을 넘어서기 위한 디딤돌이기에 그 너머의 세계를 향한 열망과 내통한다. 그리고 그 열망의 중심에는 세상을 부조리하게 한 근본 원인인 근대적 이성에 대한 저항의식으로서의 광기(狂氣)가 존재한다. 푸코에 의하면 광기는 17세기 서구에서 백안시되었던 인간의 속성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서구에서는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광인으로 취급하여 무시했고 나중에는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그 결과 이성만능주의에 의해 당시 사회는 더욱 각박해지고 삭막해지고 말았다. 이성의 맹목성이 부과하는 문제점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여 시인은 “무리 짓는 것들의 광기/ 그것이 길이라면/ 그 많은 들쥐들 다 어디 갔나”(「나그네쥐」)에서처럼 광기가 사라진 세상을 아쉬워하면서 예술적, 창조적 능력과 관련되는 광기의 가치에 주목한다.
이것은 새로운 소리가 아니다.
패밀리(family)즘의 문신일 뿐인데
오감(烏瞰), 오독, 오해하는
생은 즐겁다, 발작하는 저 푸른 광기들
3.
사랑하는 테오
내 그림이 팔렸다는 기별 놀랍구나
망상과 환청을 즐기는 이들이 생겼다니
그러나 더는 태양과 나무들을 그리지 않으리라.
한쪽 귀를 잘라낸 후 지독한 착란은 멎었으나
거울 속에 들어앉는 버릇이 생겼다.
엊그제 그린 그림을 보낸다.
나를 닮은 이 초상은
가끔 까마귀 울음 같은 걸 중얼거리는 거울 속의 사내……, 실은
잘라낸 한쪽 귀를 그린 것
그림 속에 잘려나간 소리가 들어있음을
테오, 너는 알겠는지
-「픽션브리프(fiction brief)-태양, 나무, 자화상」부분
이 시는 점묘 기법으로 새로운 화법을 창조한 화가 고흐의 생애와 그림 <자화상>을 소재로 삼고 있다. 고흐는 이성만이 존중되는 세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예술적 창조의 세계로 나아갔다.그에게 이성만이 존중되는 세계는 인간의 삶이 도구화, 규격화되어버린 각박한 곳이었다. 그는 “오감(烏瞰), 오독, 오해하는/ 생은 즐겁다”는 태도로 짧은 생을 살다간 자유인이었다. 실제로 환자로서 정신병원을 드나든 적이 있는 그의 생애에서 진정한 예술성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에 발휘되곤 하였다. 그의 생애에 대해 “발작하는 저 푸른 광기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그의 “광기”는 스스로의 귀를 도려내는 기행을 저지르게 하였지만, 그 기행으로 인하여 <자화상>이라는 위대한 그림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고흐가 귀를 자른 일은 고갱과의 불화가 직접적 원인이라고 하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새로운 예술세계를 향한 치열한 열정과 관계 깊다.
고흐는 근대적 이성을 거부한 화가였다. 시에 의하면 고흐는 자신의 그림이 팔렸다는 소식에 대해 “망상과 환청을 즐기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이상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태양과 나무들을 그리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 “거울 속에 들어앉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이는 부단히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정신의 표현이다. 이때의 “거울 속”은 자신을 성찰하는 내면의 공간일 터, 고흐는 그곳에 마음을 두고 귀를 자른 고통 속에서도 “나를 닮은 이 초상”즉 자화상을 그려 동생 “테오”에게 보낸 것이다. 자화상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그림일 터, 고흐는 현실 속에 안주하지 않고 “거울 속의 사내”가 되어 스스로의 삶을 뒤돌아본 것이다. 이 지독한 성찰은 예술가를 예술가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성찰은 고흐가 “그림 속에 잘려나간 소리가 들어있음”을 발견하듯이, 내면의 진실을 통해 거짓된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조리와 가난으로 얼룩진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도달하는 힘을 성찰적 예술 정신에서 찾았던 것이다. “푸른 광기들”이 바로 그러한 정신을 표상한다.
세상의 부조리를 극복하려는 “푸른 광기들”은 근대적 이성중심주의 사회에서 타자에 불과했다. 그것은 아무런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 텅 빈 기표에 불과했다. 그러나 타자는 근대적 이성의 횡포를 제어하여 더 아름답고 풍요롭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아래의 시에서 저녁은 타자와의 소통을 지향하는 시간이다.
신발들이 보이면 저녁이다, 또각또각,
혹은 질질 끌고 다니던 하루가
헐렁하게 벗겨지는 시간
헛기침이 나온다.
반듯이 놓인 구두 속에선
반질거리는 생각들이
몸을 꽉 끼우고
정장으로 불려나올 것만 같다.
뒤섞이고 엎질러지고
뭔가 묻어 있는 것들, 저녁은
저 끈 풀린 작업화의 냄새로 온다.
분주한 젓가락 소리에
말끔히 발리는 생선대가리 같은 표정들
빈 그릇 위에 포개지는 한때
누군가 바꿔 신고 간
오래 신어 편하던 신발 같은 하루
바뀐 줄도 몰랐을 만큼
나와 잘 맞았을 누군가의 몸으로
뒤꿈치 눌러 끌고 싶은
저녁이다.
-「저녁」전문
일상을 분주히 살아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은 “헐렁하게 벗겨지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구두”를 벗고 그것을 바라보면 그 안에 “반질거리는 생각들”로 가득하다는 느낌이 든다. “구두”를 바라보며 일상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하루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저녁”은 또한 “끈 풀린 작업화의 냄새로 온다”고 한다. 어느 노동자가 고된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벗어놓은 “작업화 냄새”는 그가 지내온 인생 여정을 표상한다. 그 “냄새” 속에 고단하지만 보람 있던 시간, “오래 신어 편하던 신발 같은 하루”가 온존히 배어 있는 셈이다. 이 “신발들”에 대한 애정은 “누군가 바꿔 신고 간”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그 “신발”은 자신의 발에 잘 맞는 “누군가”가 신고 갔을 것이라 생각하며, “나와 잘 맞았을 누군가의 몸”을 빌려서라도 어디론가 “끌고” 가고 싶은 대상이다. 이러한 “신발”을 통한 타자와의 소통은 세상의 부조리를 넘어서는 계기가 된다. 이 시는 고흐의 그림인 <신발>에 대한 하이데거의 언급을 연상하게 한다. 하이데거는「예술작품의 기원」에서 “신발이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신발 가죽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함이 깃들여 있다”라고 진술한 적이 있다. 스림 속의 낡은 “신발”을 통해 거친 자연의 시련을 견디는 “강인함”과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을” 연상한 것이다. 이 시의 “신발”은 그러니까 단순한 일상의 도구를 넘어서는 예술 정신 혹은 삶의 우여곡절을 비유하는 것이다.
이처럼 “푸른 광기들”과 연관되는 타자의 세계는 시적 표현에 의하면 “느리게 기는 쪽으로 진화해 가는 중”(「달팽이」)이나 “지금 바람을 조율하는 중”(「바람조율사」)에 다가온다. 타자의 느림은 주체의 빠름을 제어하면서 “바람”과 같은 시련을 “조율”하는 역할까지 담당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타자의 세계는 속악한 세상에 대한 저항의식으로서의 고고한 자존감, 자기 절제의 미덕 등을 수호하는 가운데 다가오는 것이다.
무리를 짓지 않는 어떤 새가
울지 않는 흰 새 한 마리가 들바람을 밀고 있다.
상하(上下)로 소용돌이치며
드센 바람벽을 넘고 있다.
(중략)
바람에 휩쓸리던 검은 구름들이
새의 날개에 긁혔다. 그때마다
빗방울이 흩뿌리고
빗방울마다 새의 울음이 들렸다.
바람이 불어가는 쪽은 몇 번이나 가보았다.
-「고고(孤高)」부분
악어는 이중인격자
먹이를 삼키는 순간 눈물을 흘린다 한다.
(중략)
한 끼 배부르면
맛있는 먹잇감일지라도 안중에 두지 않듯
제 아무리 굶주려도
종족을 잡아먹는 일은 없다 한다.
-「오명」부분
앞의 시에서 “무리를 짓지 않는 어떤 새”는 인간적 자존감의 상징이다. 세속적인 가치에 훼손되지 않는 존엄성은 세속의 “드센 바람벽을 넘”는 정신적 에너지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존감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자존감을 지키는 과전에서 “바람에 휩쓸리던 검은 구름들이/ 새의 날개에 긁히”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한 고난을 극복해야만 “새”는 정신적 이상 세계인 “바람이 불어가는 쪽은 몇 번이나 가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이상 세계를 향한 열망으로 충만한 존재는 현실의 고난을 무릅쓰고도 그 세계를 지향하기 마련이다. “새”가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이 시는 “새”를 통해 고고한 정신적 자존을 지키기 위한 게을리하면서 집단적 무리에 편승하여 살아가는 파당적 인간을 냉소하고 있는 것이다.
뒤의 시에서 “악어”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악한 동물이라는 “오명”을 가진 존재이다. 그런데 그것은 “오명”(汚名)이기에 실제의 악어가 지닌 생리와 차이가 있다. 시인은 “먹이를 삼키는 순간 눈물을 흘”리는 생리에 주목하면서 “악어”가 잔악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배부르면/ 맛있는 먹잇감일지라도 안중에 두지 않”고, “제 아무리 굶주려도/ 종족을 잡아먹는 일은 없”는 절제의 미덕을 지녔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물론 이러한 시적 진술들은 포악하기만 하다는 “악어”의 “오명”을 변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시의 배후에는 “악어”보다도 잔혹한 인간을 향한 비판적 시니시즘이 숨겨져 있다. 하물며 “악어”라는 동물도 측은지심과 절제력이 있는데, 인간은 잔악성과 탐욕의 무한대를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문제 삼는 것이다. 이 시대,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타인을 향한 잔악한 공격과 무절제한 욕망은 다른 사람의 기본적인 생존 조건마저도 앗아가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이런 시대상은 “악어”도 냉소할 일이다.
4.
우리는 김유석 시인이 자신을 “서투른 시니시스트”라고 명명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의 시를 읽다 보면 그는 서투른 시니시스트가 아니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는 세련된 시니시스트 혹은 비판적 시니시스트라고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는 부조리와 모순으로 미만한 이 세상을 냉소하면서 날카로운 비판적 언어를 구사하는 데 능수능란하다. 그의 냉소는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저항의 일종이자 그러한 세상 너머를 꿈꾸기 위한 마음의 노둣돌이다. 시인은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한 현대사회를 독(毒) 혹은 독사(毒蛇)의 세상이라고 명명하면서 냉정한 고발정신을 발휘한다. 세상에는 독을 품고 타살의 욕망으로 살아가는 독종들이 가득하다는 사실, 그들은 또한 비정상성· 잔학성· 집단성· 허위성· 모순성· 작위성· 나르시시즘· 비굴함· 동족상잔 등의 속성을 간직한다는 사실, 시인은 이러한 사실들을 접하면서 비판적 시니시스트가 된다. 그의 시니시즘은 대상을 향한 핀잔의 포즈가 아니라 대상을 극복하기 위한 공격의 형식인 것이다.
그의 시니시즘이 부조리한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 도달한 것은 “푸른 광기들”로 표상되는 타자의 세계이다. 시인이 예술적 창조의 바탕인 광기가 타인과의 소통을 옹호한다거나, 고고한 자존감과 절제의 미덕이 소중하다고 노래하는 것은, 모두가 타자의 가치를 발견하여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요컨대 시인은 세상의 문제적 국면들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가장 열정적으로 비판해야 할 소명감을 지닌 존재이다. 나아가 문제적 세상에 대한 미학적 처방을 통해 정치적, 현실적 변화까지도 모색해야 하는 존재이다. ‘시의 정치’가 요구된다는 말이다. 김유석 시인은 이러한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시니시스트로서 주목할 만한 시인이다. 이 시집을 읽는 것은 시인과 함께 세상을 시니컬하게 웃어 보는 독특한 경험의 세계로 나아가는 일이다. 이 시집을 덮고나서도 우리의 웃음은 쉽게 그칠 것 같지는 않다. 세상은 아직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하고 시인은 그러한 세상에 대해 계속 웃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께 웃자, 시니컬, 시니컬하게!
이형권(문학평론가)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98년 『현대시』를 통해 평론으로 등단. 저서로는 『현대시와 비평정신』, 『테마로 읽는 현대시 명작선』, 『사고와 논증』(공저) 등이 있음. 현재『애지』 편집위원이며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