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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조선 궁궐 탐방 후기[창덕궁과 창경궁] <1>
<2024년 5월 11일>
조선의 5대 궁궐 탐방 두 번째,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가장 한국적인 [창덕궁]을 돌아보고,
수강궁에서 창경궁이 되고, 창경원이 되었다가 다시 궁궐이 되어
우리 곁으로 다가선 [창경궁]을 한바퀴 휘돌아본다.
◀ 창덕궁과 창경궁 탐방 사진을 나누어 게재합니다.▶
창덕궁(昌德宮)은 1405년(태종 5)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세 궁궐이 모두 소실되었는데,
1610년(광해군 2) 창덕궁부터 먼저 재건하였으며, 1867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약 270여 년 동안 실질적인 법궁 역할을 하였다.
특히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은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며,
낙선재 권역은 광복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1966 순정황후(순종 두 번째 황후) <석복헌>
1970 의민황태자(영친왕) <낙선재>
1989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석복헌>
1989 덕혜옹주(고종의 딸)) <수강재>
※ 덕혜옹주를 보살피기 위해 옹주보다 하루만 더 살다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살았다는 이방자 여사는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가 73세로 생을 마감한지 열흘 후인 4월 30일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후원은 1406년(태종 6) 창덕궁 북쪽에 처음 조성되었고 1463년(세조 9) 확장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인조 대부터 순조 대까지 옥류천, 규장각, 주합루, 애련지, 의두합, 연경당 등이 추가로 조성되면서
창덕궁은 정치의 공간과 더불어 휴식과 생활의 공간이 조화를 이루었다.
창덕궁은 창경궁(昌慶宮)과 경계 없이 ‘동궐(東闕)’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창덕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1997년에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 아마도 드론 촬영이겠지. <퍼온 사진 2장>
[돈화문 쉼터 광장]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수령이 475여 년.
일정 안내 및 신규회원 소개
공지사항 안내
회원 등업 축하
[돈화문]에서 기념 촬영
*** 1907년 순종이 경운궁(덕수궁)에서 이어 후, 승용차 출입을 위해 월대를 덮었던 도로 부분을 걷어내고
2020년 월대 등 돈화문 주변 복원 완료.
돈화문(敦化門 - 1963년 보물로 지정)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돈화’는 ‘교화를 돈독하게 한다’라는 뜻이다.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처음 지어졌는데, 창덕궁 앞에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9년(광해군 1) 재건, 2층 누각형 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돈화문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 신하들은 보통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을 들어서면 바닥에 이렇게 주욱 깔려 있다. 기분이 참 좋다.
돈화문을 들어서면 금호문 부근까지 양옆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2006년)된 회화나무 8그루가 있다.
7그루는 높이 16여 미터 정도, 하늘로 싱싱하게 가지를 뻗고 있으나, 오직 이 한 그루가 늘 관심을 갖게 한다.
비록 가냘프고 작은 가지지만, 그래도 매년 푸르게 푸르게 자라며 우리에게 그늘도 준다.
*** 예전에 '태풍 피해'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언제 무슨 태풍이었는지 ~~~, 글쎄다. 암튼, 싱싱하게 자라만 다오.
*** 4월 초순까지 소식이 없어 내심 걱정했는데 ~~~, 4월 중순에 찍은 사진이다.
'늦게 티인다(트이다)' 고 느티나무라 한다지만, 회화나무는 느티나무보다 훨씬 더 늦게 잎이 핀다.
창덕궁의 천연기념물 나무라고 하면, 이 향나무가 먼저 떠오른다.
뿌리 부분 둘레는 약 6m 정도이며, 태풍 곤파스 때(2010년) 피해를 입어 높이 자라던 가지는 잘렸다.
궐내각사 내각(규장각) 북쪽에는 수령이 750여 년 된 향나무(1968년 천연기념물 지정)가 있다.
동서남북으로 1개씩 가지가 뻗어나갔는데, 남쪽 가지는 잘렸고, 북쪽 가지는 죽었으며,
동쪽 가지는 꼬불꼬불한 기형으로 자라고 있다. 동궐도에도 이 향나무가 그려져 있다.
지난 4월 중순 여름같이 무더운 날, 창덕궁 후원 자유관람 때 한 컷.
창덕궁 궐내각사(규장각 뒤)에서 담 넘어 보면 이런 수형(樹形)이다.
금천(禁川)과 금천교(禁川橋).
왕릉도 그렇지만 궁궐 또한 입궐할 때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한 금천(禁川)이 있다.
창덕궁의 禁川은 물길이 비단같이 흘러서 錦川이며, 禁川橋는 錦川橋다. 창경궁은 옥천교, 경복궁은 영재교.
금천교(錦川橋 - 2012년 보물로 지정)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진선문 사이를 지나가는 금천 위에 세운
돌다리로서,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돈화문 동쪽 궐 밖으로 빠져나가 청계천으로 연결된다.
1411년(태종 11)에 조성된 금천교가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현존하는 궁궐의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되었다.
규모는 길이 12.9m, 너비 12.5m로, 다리 옆면 홍예 사이의 벽에는 귀면(鬼面)을 새겼고,
그 아래쪽에 서수로 남쪽에는 해태로 추정되는 석상, 북쪽에는 거북이를 닮은 석상을 배치하였다.
뒤로 보이는 회화나무, 늘 관심을 갖게하는 그 회화나무의 잎이 지금은 제법 무성하다.
진선문을 지나 숙장문 사이 인정전 외행각에는 정청(이조와 병조), 호위청(궁중 호위), 상서원(옥새 등 관리) 등이 있었다.
왕이 승하한 후 5일 만에 이루어지는 임금의 즉위식은 통상 정전 조정이 아닌 정전 문앞에서 치룬다.
인정문(仁政門)
인정문(仁政門_1985 보물 지정)은 정전인 인정전의 정문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등이 이 문 앞에서 즉위식을 치뤘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인정전(仁政殿- 1985년 보물 지정)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세자책봉식, 궁중 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인정’은 ‘어진 정치’라는 뜻이다.
인정전은 1405년 창덕궁이 창건될 때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에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 1804년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내부 바닥은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마루로 개조했으며 조선의 전통적인 마루는 아니다.
전등, 커튼, 유리창문 등과 함께 1908년(융희 2)에 서양식으로 마루를 개조한 것이다.
이때 인정전 앞마당, 즉 조정(朝廷)도 원래 있었던 박석을 잔디로 바꾸고 화초도 심는 등 새단장을 하였다가
1994년 다시 박석으로 교체하였으나 강화군 석모도 박석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경복궁 조정과는 확연히 다르다.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조정에는 품계석을 놓았다.
*** 인정전 용마루에 다섯개의 이화 문양이 있어 말들이 많다.(인정문에는 세 개, 희정당 현관 위에 한 개 등)
일본이 의도적으로 조선을 격하하기 위해 [이화문양]을 넣었다고들 거품을 물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종이 몸소 정성을 쏟아 건축한 덕수궁(당시는 경운궁)의 석조전 중앙에도 이화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고종 주도하에 1900년 착공하여 한일병합 전인 1909년 완공했으며 낙성은 1910년)
참고로, 198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발표한 황실 국장인 [이화문]과 [독수리 문장]
대한제국의 국기
황제국의 정전이 되면서 창문 색깔 또한 황색으로 바꾸었다.
전등, 커튼, 마루, 창문 등등, 조선 궁궐의 정전이 '이게 뭐냐!' 하는 친구도 있지만 그런대로 일월오봉도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겉보기는 2층이나 실제는 통층으로 천정이 높아 천정 중앙에 조각되어 있는 봉황은 제대로 보기가 어렵다.
추녀마루의 단청 목재 보호 등을 위헤 설치한 '부시' 역할을 하는 '오지창'.
*** 부시 설치가 어렵거나 비효율적일 때 새가 앉거나 집을 짓지 못하도록 이렇게 오지창을 설치한다.
[선정전] 그리고 [희정당]
선정전(宣政殿-1985년 보물지정)의 ‘선정’은 ‘정교(政敎)를 선양(宣揚)한다’
즉,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라는 뜻으로, 왕이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이곳에서 조정 회의, 업무 보고, 경연 등 각종 회의가 거의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朝啓廳)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지금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을 거쳐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光政殿)을 옮겨
지었는데,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선정전은 편전의 용도 외에 경로잔치인 양로연과 왕비의 하례식, 혼전(魂殿, 왕과 왕비의 신주를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신주를 모시는 건물)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회랑(回廊)을 설치한 건 혼전으로 사용 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들 보고 있다.
선정전의 바닥은 조선식 마루 그대로 ~~~.
역시, 청기와라 돋보인다.
[희정당]
희정당(熙政堂-1985년 보물지정)의 ‘희정’은 ‘화락한 정치’라는 뜻으로, 원래는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침전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편전으로 기능이 바뀐 건물이다.
창건 당시 이름은 숭문당(崇文堂)이었으나 1496년(연산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혼전으로 사용되면서,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동궐도]에 그려진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1917년 대화재로 대조전과 함께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다 복원하였는데,
이때 내부를 쪽매널 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몄다.
희정당 앞쪽은 현관 형태로 되어있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는 구조로 개조(순종과 황후 자동차 이용)하였다.
희정당 현관 입구의 이화(李花) 문양
희정당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현재 기념품점 및 카페 사랑)은 원래 [빈청]이었으나, 순종 이어 이후에는 [어차고]로 이용,
*** 빈청은 정승 등이 임금을 만나기 전 필요 자료도 보고, 업무협의를 하거나 하면서 대기하는 장소
위의 어차고에 있다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긴 어차(승용차), .왼쪽이 순종 어차, 오른쪽이 순정효황후 어차
[희정당] 전등, 유리창, 현대식 가구, 카펫 등,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겠지. 여전히 등불에 머물러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박쥐] 문양이 눈에 띄네.
좌우 벽면에는 조선말 화가 해강 김규진(1868~1933)의 [금강산만물소승경]과 [총석정절경]이 있다. <퍼온 사진 두 장>
★★★ 여기서 한마디!!!
관리에 어려움은 있겠지만, 희정당이나 대조전 내부에 조명도 좀 하고 가구나 그림도 좀 보게 합시다.
관리 보존만 생각하지말고 관람객의 입장에서 머리를 짜내봅시다. 보존만 생각하면 수장고에 넣어두면
최상이겠지만 문화재란 그런 건 아니잖아요!!!
[대조전]
대조전(大造殿)의 ‘대조’는 ‘큰 공업을 이룬다’라는 뜻으로, 창덕궁의 정식 침전이자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전각 중 유일하게 용마루가 없는 건물로,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 재건을 반복하였으며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다 복원, 마루와 유리창 등 서양식으로 꾸몄다.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대조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
[흥복헌] 1910년 8월 22일(월요일) 마지막 어전회의, 경술국치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
***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일본이 8월 29일 순종 황제의 조칙 형태로 발표.(국치일 8월 29일)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와 재건했기에 합각에 '강(康)'자가 새겨져 있으며 획 사이 검게 보이는 부분은 통풍구 역할을 한다.
물론, 반대편 합각에는 '녕(寧)'가 새겨져 있다.
대조전 화계(花階)
[성정각 일원]
성정각(誠正閣) 일원은 창덕궁의 동궁, 즉 왕세자의 교육 공간이다.
‘성정’은 ‘성심껏 마음을 바르게 하다’라는 뜻으로, 숙종 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성정각은 왕세자의 교육 공간이지만 여러 왕이 독서하던 곳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곳에는 성정각과 그 뒤로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관물헌(觀物軒)이 있다.
원래는 성정각 옆, 후원으로 넘어가는 넓은 길에는 왕세자의 생활공간인 중희당(重熙堂)이 있었으나,
지금은 중희당의 부속 건물인 칠분서(七分序)와 삼삼와(三三窩), 승화루(承華樓) 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때 궐내각사 내에 있던 내의원 일부가 성정각 일원(보춘정 앞쪽)으로 옮겨졌다
[보춘정] 옆으로는 [희우루]라는 편액이 있으며, 그 뒤쪽에 [집희]라는 편액이 있는 [관물헌]이 있다
후원이나 창덕궁 넘어가는 길에 [중희당]이 있었으며, 지금은 중희당의 부속건물인 칠분서, 삼삼와, 승화루만 남아 있다.
땅의 색갈이 조금 다른 부분이 [중희당 터].
*** 지금은 좌측이 후원 가는 길, 창경원과 이어지는 함양문, 오른쪽은 매표소.
[낙선재]
낙선재 탐방 전에 1차 휴식, 창덕궁에서는 아주 귀한 화장실이 뒤편에 있다. 체중조절도 하고 ~~~.
낙선재(樂善齋-2012년 보물로 지정)는 24대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하면서,
1847년(헌종 13)에 창경궁 낙선당 터에 낙선재를 지었고
1848년 석복헌(錫福軒, ‘석복’ : 복을 내려줌)과 수강재(壽康齋, ‘수강’ : 오래 살고 건강함)를 지었다.
낙선재의 ‘낙선’은 ‘선을 즐긴다’라는 뜻으로,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로 사용하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원황후 김씨(순조의 왕비)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낙선재 일원은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고, 낙선재 뒤로는 후원을 만들었다.
건물과 후원 사이에는 화계를 조성, 화초와 함께 세련된 굴뚝과 괴석들을 배열,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간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정원이다.
낙선재 일원이야말로 삼국사기 이후 이어져 내려온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의 표본이 아닐까.
한편으로 이곳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황후 윤씨와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가족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으로 아픔이 묻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현판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추사 김정희로 부터 제대로 배운 덕분일까, 글씨에서 힘이 불끈불끈 솟아난다.
*** 이 장락문을 통하여 보는 풍경, 특히 [상량정] 정자와 어우러지는 매화와 화계의 사이사이 각종 꽃들까지 ~~~, 멋진 그림이다.
*** 사진엔 낙관이 잘 안보이는데 '대원군장(章)'이라 새겨져 있다.
[낙선재]
워낙 [서화(書畵)]를 좋아했다는 헌종, 시간이 나면 주련도 한번 보고 넘어가자.
瓦當文延年益壽(와당문연년익수) : 와당에는 연년익수(延年益壽)라고 씌어 있고
銅盤銘富貴吉祥(동반명부귀길상) : 동반에는 부귀길상(富貴吉祥)이라고 새겨져 있네.
山隨水曲趣無盡(산수수곡취무진) : 산이 물을 따라 굽이치니 흥취가 다함이 없고
아울러 곳곳에 자리잡은 다양한 창살 무늬도 살펴보자. 섬돌아래 노둣돌도 보이네.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 때 문인인 섭지선(葉志詵, 1779~1863년)의 글씨이며,
주련 중 왼쪽 앞에 있는 '藝林博綜乃逢原(예림박종내봉원) 주련은 추사의 스승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글씨이다.
竹與蘭期坐有情(죽여란기좌유정) : 대와 난과 기약하였으니 자리에 정이 넘치네.
經學精硏無嗜異(경학정연무기이) : 경학을 정밀히 연구하여 특이함을 좋아하지 않았고,
藝林博綜乃逢原(예림박종내봉원) : 문예를 널리 종합하여 이에 근원을 만났도다.
滿襟龢氣春如海(만금화기춘여해) : 가슴 가득한 화기(和氣)는 봄이 되니 바다와 같고
[보소당]은 헌종의 당호
다양한 창살 무늬의 조합, 각각 문양마다 각각의 의미가 있을텐데, 복(福)을 상징하는 박쥐 문양 등등 ~~~.
*** 느낌에는 어둠을 좋아하고 또 상당히 혐오스러운 박쥐를 왜 흔히들 '복'을 상징한다며 애용할까.
박쥐를 한자로 편복(蝙蝠)이라 하는 데, 그 '박쥐 복(蝠)'이 '복 복(福)' 字와 발음이 같아서겠지 하고 넘어가자.
*** 언제 시간이 될 때, 창살 문양에 대해서도 자료를 찾아보면 재미가 넘쳐날 듯하다.
여기서 잠깐! 이 창틀에 박쥐(문양)는 과연 몇 마리일까요?
귀갑 무늬는 장수와 영원성을 의미한다고 ~~~.
빙열(氷裂) 무늬. 방화벽(당시는 화방벽이라 했다고들 하지요)에 딱이네요. 벽 뒤에 바로 '아궁이'가 있습니다.
낙선재 뒤로 가서, 사각, 또 사각, 그리고 원형, 다시 사각,으로 내다보는 풍경. 재미있네. 맨 아래에도 박쥐 문양인듯.
이 방에서 책을 읽으며 헌종의 머리 속엔 온통 경빈 김씨로 가득했을텐데 ~~~.
1847년 경빈 김씨를 얻어 그해 낙선재를 짓고, 1848년 경빈 김씨 처소로 낙선재 바로 곁에 [석복헌]을 지었는데,
이번에는 기필코 후사를 보리라 그랬는데, 안타깝게도 헌종은 다음해에 23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도 보지 못한 채 승하,
전하는 얘기로는 아무리 임금이라도 간택 때는 볼 수 없는 법인데, 대왕대비를 졸라 3간택 때 경빈 김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으나
왕실 어른은 홍씨(효정왕후)로 최종 낙점, 계비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자 이번에는 후궁 간택, 김재청의 딸인 김씨가 낙점을 받아
바로 경빈으로 책봉받고 ~~~, 헌종은 이제야 말로 후사도 보고 사랑도 꽃피우리라 했는데 허망하게도 ~~~,
원래 꿈같은 사랑은 일찍 끝나는 법인가!
♣ 1849년 헌종 사후 경빈 김씨(1832 ~ 1907)는 2년도 채 안되는 신혼생활(1847. 11. ~ 1849. 6.)을 마감하고 궁궐을 떠나
사저인 순화궁(현 종로구 인사동5길 26 일원)에서 후사도 없이 쓸쓸히 살다가 1907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 지난 3월초 우리가 함께 걸었던 삼일운동 순례길 중 [3.1독립선언광장](태화빌딩 앞) 그 자리가 바로 [순화궁 터].
아기자기한 화계
글씨가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
금사연지(琴史硯池) 벼루같이 생긴 연못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가도 하고 역사책을 읽기도 한다는 의미.
괴석을 받치고 있는 석함에는 소영주, 영주는 도교에서 말하는 삼신산, 즉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 중
하나인 영주산을 의미, 신선들이 거주하는 전설 상의 신비한 공간이랄까.
물싸리 꽃, 참 예쁘다.
어버이날, 점심 후 짜투리 시간에 사전답사 겸 잠깐 들렀었는데 구름이 너무나 아름다워 한 컷.
창경궁 탐방 사진은 2편에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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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전에는 "어차고"자리에 "순종의 차"가 전시 되여 있었는데 ~~~,
지금은 기념품 판매장으로 변해 아쉬웠습니다.
보존하는것도 좋지만 "모형물"이라도 전시 해주면 좋으련만~~~
그렇습니다. 아쉬움이 크지요.
나름 고민은 있나 봅니다.
관람 권역이 워낙 넓어 카페를 겸한 쉼터 하나는 필요한데
아직은 달리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지 못한 듯하네요.
제 생각으론 현재 화장실이 있는 언덕 부근에
제대로 어울리는 작은 건물 하나 지어도 될텐데 ~~~.
오백년 조선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궁궐탐방에서 많이 배웠어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언제든지 산행을 즐길수있는 서울을 무척 사랑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5곳의 궁궐, 북촌, 서촌 등등이 남아있어 얼마나 좋은지요
알고보면 더 많이 보인다고 궁궐탐방은 많은분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될거라 생각합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서울 도심에 선조들의 숨결이오롯이 남아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
광해군이 정말 공을 들여 창건했다는 인경궁까지 남아 있었다면 ~~~.
참, 돈화문 바로 건너편에 있는 [서울우리소리박물관]도
짜투리 시간에 한번쯤은 들러볼만 했답니다. ^^
창덕궁 창경궁에 이렇게 많은 건물과 그에 따른 스토리가 이렇게 재미있는 걸 이제야 알게되었네요.덕분에 역사공부 많이 합니다.
배우고 익히니 얼마나 좋은지...
가까이에 아름다운 궁궐이 있으니 또 가보고
싶네요
그땐 이 후기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5대 궁궐을 다시 한번 찬찬히 돌아보는 귀한 시간을 갖게 되어
저도 무척 기쁘답니다.
관심 가져주심에 감사드리며,
무엇이든 함께한다는 건 참으로 좋습니다.
참석못한 아쉬움을 자세한 설명으로 대신 달래봅니다.
설명과 사진을 볼수록 아쉬움이 더해지네요.
어느 평일 청파님 설명서를 들고
하루 길을 나서야되겠다고 다짐해봅니다.
빈 자리가 컸답니다.
언젠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