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이어 살고 싶은 집을 짓고 싶었다
5년간 새 집만 골라 세 차례 이사하면서 “돈이 썩어나는 한이 있어도 집은 짓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내가 서둘러 집을 짓기로 결정한 것은 순전히 연초에 방영된 SBS 환경다큐멘터리 ‘환경의 역습’ 때문이었다. 특히 “집이 사람을 공격한다”는 부제가 붙은 첫 회 방영물은 건축에 관련된 내 모든 상식을 깡그리 뒤엎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만해도 이른바 새집 증후군(sick-house syndrome)은 내겐 그저 시사 용어 중의 하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 후 서울살이 5년간 세 번 이사한 것이 모두 깔끔하고 윤기나는 새 집이었던 까닭이다.
전국 다니며 건축 전문가와 상담
홍동으로 귀농 후 7년을 보내는 동안 집은 단지 피곤한 몸을 누이고 쉬는 쉼터 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농가를 수리할 때도 가능한한 돈 적게 쓰고 편리하게 고칠 생각만 했지 건축 소재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무너진 흙벽을 수리할 때도 흙을 이기고 개는 것이 귀찮아 손쉽게 시멘트를 발랐고 온돌방 아랫목에도 과열(過熱)을 우려해 철골 보호용 내화(耐火) 페인트 한 통을 서슴지않고 쏟아 부었다.
그런 내게 SBS의 다큐 내용은 경악과 충격이었다. 마침 집사람이 외출 중인지라 돌아온 즉시 그 전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인터넷의 TV 프로그램 다시 보기를 신청해 아내와 함께 본 것은 물론 동료들에게도 전화를 잊지 않았다. 그 뒤 2부와 3부도 유심히 지켜봤는데 당시의 심정으로는 조금 과장해 도시인들의 도심 탈출이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과연 쇼핑몰 유해가스 측정기기 판매 회사의 홈페이지마다 구입 및 상담 문의(특히 포름알데히드와 휘발성 유기화합물에 관한)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 후 두 달간 나는 아내를 어렵사리 설득해 건축 허가(?)를 받아냄과 동시에 인터넷의 생태주택 자료를 뒤지고 인근의 신축 주택들을 방문해 노하우를 전수받느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고자 MBC 경향하우징 페어도 참관하고, ALC 블록이라는 신소재의 특성을 확인하기 위해 충남 연기군에 있는 공장을 직접 방문하는 한편 몇 분의 건축 전문가를 만나거나 전화로 상담하기도 했다.
생태건축을
위한 세가지 원칙
그 결과 건축에 앞서 세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환경친화형 주택일 것, 둘째로 할 수 있는 한 에너지를 자급하거나 덜 사용하자, 마지막으로 되도록 외주를 줄이고 내손으로 짓자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나무나 흙, 그리고 흙의 특성을 갖고있는 ALC블록 등을 복합적으로 이용하고 지붕에도 태양광 발전, 취사와 연료로 바이오 개스 사용, 지붕 빗물을 모아 허드렛물이나 농사에 이용하고 나무 보일러나 온돌에는 목초액 회수 장치를 달기로 했다. 아울러 생강이나 고구마를 보관할 수 있는 농산물 간이 저장고를 건축 초기 단계부터 반영해 중복 투자를 덜고 생활 오수 정화를 위한 소규모 생태연못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기초와 조적, 미장 등 각 분야의 전문 기술이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수리 경험을 살려 직접 짓기로 했다.
평면 설계는 거의 아내가 주도하는 가운데 어릴 때의 추억을 되살려 1층을 줄이는 대신 지붕 높이를 이용한 다락방을 두기로 했고, 고생하는 아내를 배려해 주방을 집터의 제일 좋은 자리에 앉혔다. 대신 침실 이외에 큰 용도가 없는 안방은 관행보다 크게 줄였고, 욕실과 화장실을 분리했으며 지하 저장고 위를 발코니로 정했다. 처음, 통나무로 골조로 하고 골조 사이를 흙벽돌로 채우는 목구조 흙집을 짓고자 했지만 평당 백만원 내외의 골조 비용이 부담스러워 기계압 벽돌을 쌓는 내력벽 방식으로 변경했는데 지진에 취약한 구조라 지금도 아쉬운 부분이다. 만약 누군가가 흙벽돌집에 대한 문의를 해온다면 꼭 나무로 골조를 세운 후 쌓으라고 하고 싶다.
상상 외로 많은 어려움이 숨어있는 집짓기
실제 건축을 하다보면 온갖 종류의 어려움에 부딪힐 수 밖에 없게 된다. 포클레인 비용을 아끼려고 구옥을 해체할 때도 기둥에 일일이 와이어 로프를 걸어 트랙터로 당겨 철거했다. 그런데 경계측량을 해보니 현재의 땅 이용 현황과 맞지 않아 도저히 집을 지을 수 없었다. 한참을 수고한 끝에 지목변경 서류를 만들어 행정관서의 재가까지 맡았으나 그래도 답이 나오지 않아 반려하고 현재의 대지(垈地)위에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지금의 대지는 원래 집이 있었던 넓직한 곳이라 전용이 필요 없었지만 지반이 낮아 기초 비용이 많이 들었다.
대지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그해가 윤년(閏年)인지라 봄철 이장(移葬)에 포클레인이 품귀여서 동료들을 불러 삽으로 터파기를 시작했다. 바닥기초 틀에 콘크리트를 붓고 철근을 엮은 후 줄기초를 하고 다시 온통 기초를 하는 데 적지않은 비용이 들었다. 지반이 낮아 콘크리트로 1.2m나 높인데다 펌프카를 세 번이나 불렀기 때문이었다.
충남 연기군 흙벽돌 갖다 사용
주소재인 흙벽돌 선택에 공을 많이 들였는데 기왕이면 지역 것을 쓰고자 했지만 생산량이 많지 않고 내력벽으로 쓰기엔 강도가 낮아 수소문 끝에 공장 몇 군데를 방문하고서야 연기군에 있는 벽돌을 선정했다. 광고에는 모두 천연 소재를 쓴다고는 하나 실제 방문해보면 백시멘트나 각종 화학물질이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우리 벽돌도 소량의 석회가 들어간 것이나 조상들도 건축 재료로 석회를 일부 사용한 자료를 보고 고심 끝에 결정했다.
다만 흙벽돌의 두꼐가 외벽용 20cm, 내벽용 15cm이고 한 장 마감이라 단열이 잘 안 될 것 같아 창호는 단열성이 좋은 시스템 창호를 구입키로 했다. 운좋게도 대리점측이 잘못 실측해 반품된 재고목록을 입수 할 수 있어 저렴한 가격에 구입 할 수 있었다. 우리야 문과 창호 크기에 맞춰 틀(개구부)을 마련하면 되니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지붕 골조 나무 미리 준비했어야
바닥면적 26평의 벽돌 조적작업은 채 사흘이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지붕 골조 작업으로 알고보니 기초 후 미리 나무를 구입해 준비 작업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전공부 김교일 선생님을 불러 목재의 칫수를 뽑고 26년 전 건축 경험이 있던 작은 아버지와 아버지께 S.O.S를 쳤다. 그로부터 보름 가까이 기둥과 서까래를 마름질하고 장부 작업과 대패질을 한 후 지붕의 뼈대를 만들었다. 그 사이 봄장마라고 이를만큼 비가 자주 와 애써 쌓은 흙벽이 무너질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벽 전체를 하우스용 비닐로 두 번이나 덮었다 벗겨내고 그 무거운 판넬로 임시 지붕을 만들었다 떼어냈다를 반복했다. 흙집이 생태 주택으로 각광받는다지만 건축과정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하는 탄식도 흘러나왔다.
워낙 무거운 목재를 다루기에 들보나 도리 등 골조 조립은 보통 크레인을 이용한다. 하지만 우리는 건축 비용을 아끼려고 트랙터 로우더와 체인 블록을 이용했다. 로우더 높이가 낮아 땅을 돋우느라 고생도 심했지만, 두 사람이 간신히 밀 정도의 도리용 기둥과 무거운 합판들을 트랙터를 이용해 올려보니 농기계가 건설 기계로도 얼마든지 전용될 수 있음을 알았다. 부디 트랙터가 있는 농가는 건축시 저극 활용하기 바란다.
지붕내 단열재는 우레탄으로
지붕 마감재는 처음 전량 재활용이 가능하고 흙집에 어울리는 기와형 강판을 얹기로 했으나 흙집에 위협적인 이슬 맺힘을 막기 어려워 이중 아스팔트 슁글로 처리했다. 지붕내 단열재도 고민을 거듭하다가 발암물질로 의심받는 유리섬유나 화재에 취약한 스티로폼 대신 중급 난연재인 현장 발포 우레탄으로 대체했다. 흙을 넣는 방법도 고려했으나 충분한 두께가 아니면 원하는 만큼 단열을 얻기 어렵고 벽체에 가해지는 중량을 감안한 고육책이었다.
외벽마감은 비뿌림에 대비해 강성(强性)을 높이려고 일반 시멘트를 섞어 미장하고, 내벽은 갈라짐을 방지하기 위해 드라이비트용 매쉬를 대고 황토와 모래, 백회, 맥반석에 약간의 백시멘트를 섞어 마감했다. 방바닥은 기초 콘크리트 위에 현장 발포 콘크리트로 20cm 정도 단열을 하고 보온 매트를 깐 후 옩돌 파이프를 시공했다. 2층 다락방에는 바닥 난방 대신 난방수를 이용한 팬코일 유닛(fan coil unit)을 설치해 공기를 데우는 서구식 난방 기법을 도입했다.
그 외 내부 인테리어는 기본적으로 흙벽 그대로 드러내기로 하고 사람이 기대는 하단만 나무널(루버)이나 띠장 몰딩 아래만 벽지로 마감해 황토집의 질감을 살리고 황토 분진이나 날리거나 흙이 덜 묻어나도록 수수풀과 녹말풀을 쑤어 황토물에 개어 발랐다. 각 방의 천정은 석고 보드를 강화한 불연재로 시공한 후 도배를 하고 거실은 나무널을 대어 차별성을 살렸다. 다락방으로 오르는 계단도 급경사를 피해 설계 단계부터 ‘ㄷ’자로 하고 계단밑에는 창고를 두어 수납기능을 높였다. 계단은 집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고 인테리어의 핵심 포인트인 만큼 안전과 미적 감각을 동시에 고려하는 게 좋다.
황토 염색 천 못써 아내는 한참 울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안방에는 본래 벽지대신 풀무학교 정민철 선생님이 주신 광목을 황토염색 후 마감을 하려고 했는데 안보는 사이 도배사들이 천 위에 벽지를 덧바른 것이다. 긴 천을 어렵게 어렵게 염색한 집사람은 대경실색, 한참을 흐느낄 정도로 실망감이 컸다. 또 화장실에 작은 세면대를 설치했는데 배수구를 빼놓지 않아 사용할 때마 드레인으로 물이 흐른다.
이웃과 동료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터 마련해
2월말에 시작한 집짓기가 10월까지 이어졌을 정도로 건축과정이 길어졌다. 6천여평의 논밭 농사를 유기농으로 짓는 터라 건축보다는 농사일이 우선이었던 까닭이다. 그래도 그해에는 워낙 농사지을 시간이 빠듯해서 집 지으랴 농사 지으랴 8개월 내내 마음만 분주했고 덕분에 논밭의 잡초만 신이 났다.
성미 급한 동료때문에 포클레인 대신 삽질을 해야했던 귀농 선후배님들, 흙벽돌이 무사히 올라가도록 든든한 토대를 마련해주신 목수 이동옥님, 아들과 조카 잘못 둔 탓에 갑자기 불려와 한 달 가량 생고생하신 아버지와 숙부, 김교일 선생의 잦은 외근(!)을 흔쾌히 허락해주신 전공부 홍순명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 쥐꼬리 보수에도 항상 겸손하게 성심을 다한 최성훈님과 궂은 일을 마다않고 달려오신 안정순님, 조영주님, 최은희님 등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다. 특히 위생기와 타일을 마련해 준 큰 자형 부부와 수도와 미장, 전기 공사를 무보수로 해주신 처가의 형님들께 큰 신세를 졌다. 지면을 빌어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게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린다.
끝으로 장장 8개월 간의 건축 과정중 그래도 남편이랍시고 불평 없이 따라준 고생 많았던 아내와 언제부터 새 집에 사냐고 끊임없이 질문하면서도 끈기있게 기다려준 아리수, 미지 우리 예쁜 두 딸에게도 뜨거운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다.
<후기>
“건축과정은 선택의 여정!”
집짓기의 어려움은 정작 노동의 어려움이 아니라 선택의 어려움입니다. 수많은 건축 소재 중에서, 무수한 머릿속의 설계도에서 무얼 끄집어 내야 하는지, 계단은 일자, 나은자, 디귿자 중에 어떻게 해야 좋은지, 챌판은 막아야하는지 터야 좋은지 직접 짓거나 이른바 직영(直營)을 하다보면 끊임없이 고민을 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설계에서 마무리까지 늘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습니다.
첫댓글 지으신집 사진 올려주시면안되나요??
늘 생각하지만 이 선생님은 박학다식하시고 다재 나능한면이 있으십니다
꼭 보고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