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 4일간 경남 통영(統營)에 다녀 왔습니다. 제가 둘러 본 곳은 통영옻칠미술관 - 충렬사 - 세병관 - 청마문학관 - 서피랑 - 윤이상기념관 - (통영시립박물관) - 이순신 공원 - 동피랑 - 미래사 - 전혁림 미술관 - 김춘수 유물전시관 - 박경리 기념관 - 당포성 - 해저터널 - 한산도 - 추봉도(포로수용소 터) - 소매물도 등 입니다.
답사 후기를 올립니다. 이야기가 많아서 두 번에 걸쳐서 소개합니다. 첫 번째로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삼도수군통제영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생기기 전 통영은 두룡포(頭龍浦)라 불리던 어촌이었다. 임진왜란이라는 대전란을 경험한 이후 조선왕조는 생존본능에서 삼도수군통제영이란 계획도시를 건설하였고, 일본의 재침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군영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하였다. 조선 후기 3백여 년 동안 조선의 바다와 해변을 호령한 '무게중심'은 삼도수군통제영이었다.
'통영(統營)'이란 지명 자체가 통제영(統制營), 즉 삼도수군통제영의 약칭에서 비롯하였다. 그러므로 '삼도수군통제영 역사'라는 내면의 실체를 살펴야 통영 땅과 바다의 진면목을 알고 그 가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은 통영시의 본질이요 통영관광의 핵심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은 '삼도수군통제사의 군영(軍營)'을 뜻하는 만큼 통제영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통제사(統制使)란 직책이 설치된 경위부터 살펴야 한다. 경상ㆍ전라ㆍ충청, 삼도(三道) 수군을 통할하는 관직인 통제사가 첫 등장하기는 임진왜란 와중인 1593년 음력 8월의 일이다.
경상좌수영 수군은 임진왜란 초기에 괴멸돼 버렸다. 그런 만큼 일본 해군을 방어할 조선 수군은 원균의 경상우수영과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수군이 사실상 전부였다. 이순신이 중심이 된 조선 수군은 1592년 5월과 6월 사이 경상도 남해안 일대에서 일본 해군을 이 잡듯이 솎아낸 상태였다. 나아가 부산포를 압박해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고자 시도하였다.
육지의 승리에 도취돼 바다에 방심했던 일본군은 눈엣가시같은 조선 수군을 혼내주기로 결심하고 해군력을 보강해 반격에 나섰다.
당시 일본의 해군대장은 39살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板安治, 영화 '한산'에서 변요한이 맡은 역)였다. 용인전투에서 1천 6백 명의 군사로 조선 근왕군 5만 명을 물리쳐 이름을 얻었다. 육전의 승리와 달리 해상에서는 패전이 계속되자 도요토미는 해군 재건을 명하였다. 와키자카가 해군 제1군을 맡았고 쿠키 요시다카(九鬼嘉隆)가 제2군,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 제3군을 지휘를 했다. 육전에 참가했던 장군들을 바다로 보내 조선 수군을 공격토록 한 것이다.
와키자카의 제1군은 82척의 배를 이끌고 웅천(진해)을 출발해 견내량(見乃梁)방면으로 돌진했다. 그 뒤를 쿠키의 제2군 40여 척과 가토의 제3군병선이 따랐다.
한편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49척의 판옥선을 거느리고 남해도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이 거느린 7척의 전선과 합세하였다.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 연합함대는 7월 8일 새벽에 당포(唐浦)를 출발해 일찌감치 전 함대가 한산도 앞 바다에 도착한다. 주력함대는 한산섬 북쪽 방화도와 화도(火島), 죽도(竹島) 등 여러 섬 뒤편에 숨긴 채 적군을 유인하기 위해 판옥선 5, 6척을 뽑아 일본 대선단이 정박해 있는 견내량 깊숙이 찔러 넣었다. 견내량(見乃梁)은 통영과 거제도 사이에 위치한 폭 4~5백미터, 길이 3킬로미터 가량의 좁은 해협이다.
견내량에 도착한 일단의 조선 수군은 일본 해군의 선봉을 향해 화포를 내뿜었다. 그러자 와키자카는 총공격령을 내리고 조선함대 쪽으로 돌격하였다. 그러자 조선군은 뱃머리를 돌려 견내량의 남쪽, 한산도 방면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와키자카는 이를 놓칠 새라 전군에 추격을 명령했다. 와키자카는 용인전투 이후 조선군을 무시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을 하루빨리 걷어내고 서해로 진격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서 유인전술에 걸려들었다.
일본 해군의 주력이 방화도와 화도 사이의 수로를 지나 한산도가 보이는 지금의 통영항 앞바다에 이르렀을 즈음 여러섬 뒤에 매복해 있던 조선함대의 주력이 나타났다. 그러고는 부챗살모양의 학익진(鶴翼陣)으로 함대를 배치해 일본함대를 후미에서부터 포위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세 좋게 달려가던 일본군은 뒤늦게 속은줄 알고 달아나고자 했지만 '독 안에 든 쥐'였다. 후미를 차단한 조선 수군은 적을 한산섬 쪽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조선 수군은 적의 주력을 좁은 한산만으로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적군은 뚫린 수로인 줄 알고 달아났지만 '죽음의 독'이었다.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인 한산만에 갇히면서 일본 해군은 완전히 녹아내렸다.
1592년 음력 7월 8일, 조선군은 대장군전과 장군전, 차대전 등 강력한 함포들을 퍼부어 포위된 일본 함대를 차근차근 부수었다. 오전에 시작한 전투는 땅거미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 살육에 가까웠다. 이 해전으로 59척의 일본 함선이 불에 타거나 조선군에 나포되었다. 일본측 기록에는 9천 명의 병사가 한산 앞바다에서 사살 또는 수장된 것으로 나온다. 탈출에 성공한 적선은 14척에 불과했다. 양국 정규 해군이 정면 대결한 한산해전은 조선의 일방적인 승리, 말 그대로 대첩(大捷)이었다.
원균과의 갈등, 이순신 통제사에 오르다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는 충무공 이순신이다. 결론을 미리 말한다면 통제사 직제가 신설되고 이순신이 오른 것은 라이벌 원균과의 갈등과 불화가 역설적으로 도움이 됐고, 양자 간의 갈등이 위험수위에 이르자 수군지휘권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상위직인 삼도수군통제사 직제를 신설한 것이다.
1592년 7월 한산대첩으로 이순신이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차한 반면 원균은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그치면서 원균의 반발이 노골화된다. 조정에서 이순신과 전라좌수영 장수들의 전공을 높이 평가해 큰 보상을 내린 반면, 경상우수영 측은 상대적으로 소홀한 평가를 받게 되었면서 두 사람의 불화는 두 군영 간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기 위해서는 나이가 5살이나 많고 군 경력도 선배인 원균을 명분상으로도 능가할 필요가 있었다. 이순신은 원균보다 전공이 높고 보유한 전선과 군사의 숫자도 월등히 많았지만 약점이 없지 않았으니, 주전장(主戰場)을 관할하는 장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순신 함대는 임진년(1592) 5월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사천해전과 당포해전, 당항포 승첩, 안골포 해전, 한산대첩, 부산포해전 등에서 연승신화를 이룬 주력군이다. 하지만 전장(戰場)이 경상도 해역이다 보니 주장(主將)은 원균이고 이순신은 객장(客將)이었다. 이순신의 약점은 그의 본진이 전투해역 외곽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었다. 원균은 "주장인 내가 이순신을 불러왔다."고 내세우고 있었다.
이런 차에 이순신이 진(陣)을 한산도로 옮기니 객장이란 약점도 사라지게 된다. 전라좌수군 함대가 본진을 한산도로 옮기고 한 달이 흐른 8월 15일,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왕의 교서(敎書)가 발행된다.
■ '전쟁의 선물' 삼도수군통제영
흔히 삼도수군통제사와 삼도수군통제영은 동시에 생겨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통제사가 머무르는 군영이 곧 통제영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통제사란 직책은 생겼지만 제도적 의미의 통제영은 한동안 건설되지 않았다. 혼란한 전시에 새 군영을 세울 여유도 없었고 기지를 수시로 옮겨야 했기에 항구적인 군영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1593년 이순신이 통제사 직위를 제수받았을 때 한산도에 기지를 두고 있었기에 '최초의 통제영'은 한산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식 통제영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5년이 흐른 1603년 남해의 요충지 두룡포(頭龍浦, 현재 통영시)로 선정되어 이듬해 완공된다. 다시는 일본의 침공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전란 직후의 극심한 재정난을 무릅쓰고 국력을 기울여 '삼도수군통제영' 이란 대군영(大軍營)을 건설한 것이었다.
한산도 통제영 시대(1593.8~1597.7)
이순신은 1593년 7월부터 1597년 2월까지 3년 6개월간 한산도에서 스스로 진영을 꾸리고는 남해바다를 자신의 의지대로 경영하였다. 특히 1593년 8월부터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라 전라도 수군뿐만 아니라 경상도와 충청도 수군까지 휘하에 거느렸다. 이로써 한산도 진은 '통제사의 군영' 즉, 통제영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튼튼한 기지를 세운 다음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좁은 수로 견내량(見乃梁)을 굳게 지킨 결과 일본군의 서진(西進)은 효과적으로 차단되었다.
1597년 2월 이순신은 통제사에서 경질되고 체포된 다음 한양에 소환돼 고문까지 받았다. 그 사이 한산도 통제영은 원균이 차지하였다. 그러나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패전으로 원균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견내량은 뚫렸고 한산도 통제영은 불에 타 소멸하였다. 남해바다 전역은 일본군이 차지하였다.
모항(母港) 없는 유랑시대(1597.7~1597.10)
원균의 칠천량 패전 직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직을 회복하였으나 '기지 없는 함대' 였다. 판옥선 12척,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칠천량에서 건져 나온 경상우수영 소속 전선이 기본무력이 되었다. 이순신은 해남의 전라우수영에 임시기지를 둔 채 수만의 적을 상대해야 했다. 이순신의 수중엔 단지 12척의 전선만 남아 있었지만 1597년 9월 명랑바다에서 일본군 130여 척을 무찌르는 기적의 명량대첩을 이룩하며 다시 일어섰다.
명량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한동안 모항(母港)을 갖지 못한채 유랑하였다. 당시 일본 육해군의 압박이 전라도 서해안까지 확장됐기 때문이다. 일본 해군의 잠재역량이 명량해전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조선 수군을 압도했던 탓이다.
보화도 시대(1597.10~1598.2)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1597년 10월 29일부터 목포 앞바다 보화도[寶花島, 현재 목포시 고하도(高下島)]에 작은 기지를 건설하여 이듬해인 1598년 2월 16일까지 약 넉 달 간 본영으로 활용한다.
고금도 통제영 시대(1598.2~1598.11)
이순신 군단은 1598년 2월 17일 보화도에서 100킬로미터쯤 동남쪽으로 진출한(일본군과 가까운 전방으로 다가간 셈이다.) 전남 강진 앞바다의 고금도(古今島, 전남 완도군 고금면)로 진(陣)을 옮긴다. 고금도 진은 그 규모나 실력면에서 한산도 시절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고금도는 산으로 둘러싸여 사방으로 적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공격하고 수비하기에 편리한 섬이었다. 반면 외부에서는 고금도의 수군기지를 공격하기가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오목한 만 안에 위치한 고금도 덕동(德洞)기지는 한산도 제승당과 유사하였다. 고금도 주변에는 완도와 신지도, 조약도, 생일도, 금일도 등 굵은 섬들이 널려 있었고 섬 안에 농지도 넓었다. 고금도만 해도 면적 43.2㎢로 한산도의 2.8배나 되는 큰 섬이다. 한마디로 군량을 모으고 피난민을 거두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고금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수국(水國)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한산도에서 보화도를 거쳐 고금도에 이르는 기간의 수군중심은 어디까지나 행영(行營), 즉 임시기지에 불과하였다. 통제사는 존재하지만 통제사의 군영은 물 위에 떠 있는 상황이었다.
종전 후 최대 논쟁, 해방본영(海防本營)의 위치 선정
조선 조정은 종전 직후부터 7년전쟁의 전 과정을 복기(復碁)하며 일본의 재침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 결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적군이 상륙하기 전에 바다에서 요격(邀擊)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수년 간의 논란 끝에 국초 이래로 해방(海防)의 중심이자 임진왜란 이전까지 최대 수군기지였던 경상우수영을 강화하기로 결론이 났다.
두룡포에 통제영을 건설하다
두룡포는 통영반도의 남단, 바다로 돌출한 해상교통의 중심지이다. 남쪽으로 길게 돌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제도와 미륵도, 한산도, 사량도 등 여러 섬에 겹겹이 보호되고 있다. 동으로 견내량(見乃梁), 서로는 착량(鑿梁, 현재의 통영운하), 남으로는 한산도 앞 바다를 굳게 지키기만 해도 적 함대의 침공을 제어할 수 있다.
두룡포 동쪽 견내량 수로의 중요성은 임진왜란 때 입증됐다. 이순신이 견내량을 틀어쥐고 있는 동안 일본 해군은 거제도 서쪽을 넘보지 못했으니 이곳이야말로 해상의 문경새재였던 것이다.
두룡포 언덕에 세병관(洗兵館)을 비롯한 장중한 관아건물군이 들어서고 정식으로 통제영이 출범하기는 1604년 9월 9일의 일이다. 임진왜란 종전 6년 만에 남해바닷가 한적한 어촌에 삼도수군통제영, 약칭 통영(統營)이란 신도시(新都市)가 건설됐으니 '전쟁이 준 선물' 이 분명하였다.
■ 통제사, 해상총독으로 군림하다
해변의 수도(首都)가 된 삼도수군통제영
두룡포에 경상우수영을 건설하고 3년이 지난 선조 40년(1607년) 5월 6일 조정에서는 통제사의 격을 한층 높였다. 즉, 이때까지는 경상우수사를 본직으로 삼고 통제사를 겸하게 하였으나 이날부터는 통제사를 본임으로 하되 경상우수사를 겸하게 하여 직위를 높인 것이다. 수사(水使)를 본직으로 했을 경우 각 도의 관찰사들이 간섭하고 통제하려 들었기에 서로 다툴 소지가 있었다.
이 조치로 해서 통제사는 삼남해변을 통치하는 사실상의 총독(總督)이 되었고, 삼도수군통제영은 해변의 수도(首都)로 기능하게 됐다고 판단된다.
통제사는 관찰사와 대등한 위상을 확보했지만 그 영역이 삼남에 걸쳐 있었기에 실제 '끗발'은 관찰사를 능가하고 있었다. 통제사는 군권뿐만 아니라 삼남해변의 행정권과 사법권, 징세권도 장악하고 있었다. 통제사가 해군사령관 수준을 넘어 해상총독으로 군림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은 판옥선과 거북선이었다. 그런데 이 주력 전투함 대부분이 삼도수군 휘하에 있었다. 1770년의 경우 판옥선은 전국 83 척 가운데 77척이, 거북선은 40척 가운데 39척이 삼도수군 휘하에 있었다. 또 병선(兵船)과 사후선(伺候船) 등 중소규모 전투함도 삼도수군이 주로 보유했다. 조선 수군의 90% 이상이 삼도수군이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 역대 삼도수군통제사
통제사는 각종 어물과 공예품 등을 한양의 왕실과 고관들에게 선물함으로써 인심을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부력을 쌓아 올릴 수도 있는 자리였다. 통제사직이 가진 매력이 컸던 만큼, 든든한 집안 배경과 조정실세와의 끈이 없는 사람들은 오를 수 없는 자리가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인물들이 그 직을 주고받았을까?
누가 통제사가 되었나?
역대 통제사는 초대 이순신으로부터 마지막 홍남주에 이르기까지 208 대에 이른다. 통제사들의 전임직책을 살펴보면 훈련도감이나 어영청 등 중앙 군영의 2인자급 막료나 육군 병사(兵使)로 있다가 영전돼 온 경우가 가장 많았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사(水使)로 근무하던 중 승진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로 미뤄 볼 때 '삼도원수(三道元帥)'가 되기 위해서는 풍부한 군 지휘경력이 필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군부의 실권은 경영대장(京營大將, 중앙 5군영의 대장)들이 갖고 있었다. 그런데 경영대장 상당수가 통제사를 역임한 인물들이란 점이 예사롭지 않다. 즉, 통제사 제도가 존재하던 3백 년 동안 훈련대장은 80명 가운데 32명이 통제사를 거친 사람들이다. 또 어영대장은 115 명 중 47명, 금위대장은 58명 중 26명, 총융사는 134명 중 55명이 통제사를 역임했다. 비율로는 40%가 넘는다. 중앙 5군영의 대장에 오르기 위해서는 통제사 경력이 크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무장 명가는 평산신씨와 능성구씨, 인동장씨, 덕수이씨, 전의이씨, 진주류씨, 해주오씨 등 10여 가문이 있었다. 평산신씨는 신립, 능성구씨는 구굉, 인동장씨는 장만, 덕수이씨는 이순신 덕분에 장군가(將軍家)의 명성을 높일 수 있었다.
실력보다 핏줄?... 통제사 혈연도(血緣圖)
아래 가계도가 있다. 굵은 글씨로 표시된 사람들은 모두 통제사이다. 대를 이어 통제사를 역임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덕수이씨 순신계(舜臣系)와 전의이씨 진경계(眞卿系), 능성구씨 사맹계(思孟系)의 가계도이다.
충무공이 전사한 뒤 한동안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했던 덕수이씨 순신계는 5세손 때부터 흥성하기 시작해서 직계후손 12명이 통제사직을 역임했다. 통제사는 아니지만 5세손 명상(命祥)이 병마절도사를 역임하는 등 충무공의 후손 가운데 병사와 수사가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다. 정3품 절충장군 이상의 무장만 55명에 이른다고 하니 이순신가문의 화려한 부상을 알 수 있다.
이진경(李眞卿)은 광해군 원년에 무과에 급제해 인조 연간에 황해병사와 경상우병사 등을 역임한 인물인데 그의 자손들은 조선 후기 최대의 훈무세가(勳武世家)를 이루었다. 직계 후손 가운데 9명의 등단 대장(大將)이 나왔고 13명의 통제사가 배출됐다. 이 때문에 진경의 후손들은 통제사파(統制使派)라고 칭하기도 한다.
구사맹(具思孟)은 좌찬성을 지낸 문신으로 인조의 외조부이다. 장남 구성(具宬)도 대사성을 역임한 문신이지만 막내아들 구굉(具宏)부터 무신으로 입신했다. 구굉은 22대 통제사를 역임했고 구성의 아들이자 구굉의 조카 구인후(具仁垕)는 19대와 25대 두 차례에 걸쳐 통제사를 지냈다.
대표적인 무장가문인 덕수이씨 순신계와 전의이씨 진경계, 능성구씨 사맹계의 가계도를 보면 통제사직의 독과점 현상을 실감할 수있다. 혈연이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됨에 따라 왕의 친인척이거나 훈무세가 출신이 아니면 통제사는 바라보기조차 어려운 자리가 됐다.
종합적으로 감안해 볼 때 삼도수군통제사는 부친이나 조부 등의 집안사람이 고위 무관직을 거쳤거나 조정과 인척관계가 있는 경우, 조상이 전공을 세운 경우 등 조선 사회에서 '검증된 인물'의 후손들이 주로 임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1. 『대한민국 도슨트,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통영』, 이서후, 2020.
2. 『바다 지킨 용(龍)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 장헌식,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