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3. 10. 22(주일) - 성령강림절후 스물한 번째 주일 - (2023년 43주)
제목; “기억하고 기억하게 하는 신앙”
성경; 딤후 2:8-15 (p. 344) (시 66:8-9, 435<492>, 407<465>, 621)
<예배의 부름> (시 66:8-9)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II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맞이하는 감사와 추수의 달 10월 셋째 주일에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평강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가을 소풍 가는 날인데, 가을 시 한편 나누려고 합니다.
가을 사랑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읍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을 사랑으로 표현한 시인의 마음이 우리 마음 같지요!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이라고 했듯이, 하루가 다르게 짧아져가는 가을 햇살을 바라보며 사랑의 마음으로 넉넉한 나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딤후 2:8-15)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예수 부활 생명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으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특별히 오늘 본문은 디모데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설명하는 기독론가운데 하나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좋은 병사, 경기하는 자, 수고하는 농부’ 등 세 가지 비유를 통하여 복음 사역자가 복음 전파의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당연히 고난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고, 그 고난을 피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당당하게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1-7).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이유가 되는 고난에 감추어진 비밀이 무엇이며, 고난에는 어떤 신비로운 복이 담겨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난은 복의 조건으로써 고난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기억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기억하라”(므네모뉴에, Μνημόνευε)가서두에 강조되어 나타나며,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사용되어, ‘기억하라’, ‘잊지 말라’(Never forget, NLT)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은 종종 ‘잊지 말라’는 권면을 하는데, 그것들은 단지 과거 사실을 대한 기억을 하라는 권면이 아니라 과거 사실이 여전히 현재에도 유효한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여전히 삶 속에서 그로 인한 열매들이 맺어지도록 역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추수감사절에는 광야 40년 방황을 다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기나안 땅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행한 고별 설교인 신명기 8:7-18에서 “여호와를 기억하라”(2,18),‘야드 바셈’하라고 했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8)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8)
앞서 말씀드린 대로 “기억하라”(므네모뉴에, Μνημόνευε)는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기억하라’, ‘마음에 간직하라’, ‘잊지 말라’(Never forget, NLT)라는 뜻이며, 디모데가 계속해서 기억해야 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디모데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앞선 1-7절에서 충성된 복음 사역자의 자세, 그중에서도 특히 고난에 대한 인내를 강조하였는데, 이제 본절에서 복음 사역자가 본받아야 할 인내의 모범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복음 그 자체가 되므로,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대로”라고 표현하며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 자체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8)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소중한 기억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붙잡고 있을 때 우리는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기억하라’(자카르, זכר)는 주로 하나님의 행하신 일과 관련됩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가장 소중한 일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킨 일’, 곧 출애굽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출애굽의 구원 사건을 기억할 때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가 계속해서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출애굽을 기억하라고 말씀이 요청됩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믿으므로 구원받고 천국을 소유하며 영생을 누릴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 현재의 고난이 미래 구원의 영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9-10).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9-10)
디모데후서는 처음 시작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1:1)을 중요한 주제로 삼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이미 예수님께서 죽음이라는 값비싼 비용을 치르고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것처럼, 사도는 복음을 위해 고난도 받습니다(9). 비록 사도가 복음을 선포하다가 옥에 갇혔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갇힐 수 없습니다(9). 하나님의 말씀은 향기처럼 멀리 퍼져나가 많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요 12:24),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은 고귀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자의 고난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영원한 영광인 구원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이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인간이 그토록 소망하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얻을 수 있고, 복음을 선포하는 자가 있어서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10-12절까지 “함께”(쉰,σύν)라는 말이 네 번이나 강조됩니다. 사도는 “구원의 영원한 영광”을 ‘함께’ 받기 위해(10)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입니다(11). 고난을 인내하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입니다(12). 바울은 사도와 교회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관계(고후 7:3)라고 말합니다. 고난도 ‘함께’ 받고, 영광도 ‘함께’ 받는 것이 서로의 관계입니다. 성도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이며, 내 옆 사람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함께’ 해야 할 것은 영광만이 아닙니다. 1:8과 2:3에서 말한 것처럼 ‘함께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No Cross, No Crown!”, ‘십자가의 고난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다’는 진리를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디모데후서는 ‘영원한 영광을 함께 받기 위해 고난도 받으라’(1:8)는 것, 곧 ‘나와 함께 고난 받으라’(2:3)는 말씀이 강조됩니다. ‘함께’ 기쁨과 영광을 받으려면, 슬픔과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3. 신실하게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며, 왕 노릇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11-13).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11-13)
바울은 ‘신실함’에 대해 강조합니다(11,13). “미쁘다”(피스토스, πιστὸς, 11), “미쁨”(피스티스, πιστὶς, 13) 등은 같은 어근으로써, ‘신실한’, ‘신뢰할 만한’, ‘믿음이 있는’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미쁨’(신실함)은 목회서신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딤전 1:15,3:1,4:9, 딤후 2:11, 딛 3:8). 그리스도께서는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신실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신실함으로 약속을 이루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히브리서에서도 모세와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강조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히 3:5),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신실하셨습니다(히 3:6). 모세는 하나님께 신실함으로 출애굽 백성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리스도도 하나님께 신실함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새 출애굽 백성들을 이끄셨습니다.
신실함에 대해 이미 앞 구절 2:4-6에서 군인, 운동 경기하는 사람, 농부,세 가지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군인은 자기 사생활을 접어두고 군 생활에 집중하고 성실함으로 임해야 군 복무를 무사히 완수할 수 있습니다. 운동 경기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훈련을 행하고 규칙을 정확하게 지키는 신실함이 있을 때 승리의 관을 얻을 것입니다. 농부도 성실함으로 고된 노동을 했을 때 곡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듯이, 우리 성도들도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신실하게 믿고 따르므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 보증해 주시리라 확신하며 달려가야 합니다.
영광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행동에서 얻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고난의 인내에서 얻어지는 영광과도 같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맡은 일을 신실하게, 성실함으로 행하여 갈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리스도인, 교회로 세워져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성취보다는 신실함으로 판단하십니다. 반드시 성공에 이르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임하는 신실함을 보십니다. 성공 여부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신실함으로 십자가에 죽으셨기에, 하나님께서 그 신실함을 보시고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빌 2:5-11). 우리 역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구원과 생명을 허락해 주신 우리 주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과 생명의 에너지를 소유하고, 신실하고 성실하게 생명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4. 말다툼을 그치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14-15).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14-15)
이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자신이 디모데에게 전해준 복음의 본질과 부활의 신앙을 기억하게 된다면,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더 이상 말다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14).
여기서 “말다툼”은 헬라어로 ‘로고마케오’(λογομαχέω)라는 단어이며, 이는 ‘말씀’, ‘교리’ 등을 상징하는 ‘로고스’(λόγος)와 ‘전쟁’을 뜻하는 ‘마코마이’(μάχομαι)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말싸움을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은 우리말 어법상 “말다툼을 하지 말라”가 먼저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엄히 명하라”로 번역된 ‘디아마르튀로메노스’(διαμαρτυρόμενος)가 먼저 등장합니다. 이것은 이미 딤전 5:21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적용했던 표현이나, 여기서는 디모데가 충성된 일꾼들에게 적용해야 할 것으로 등장합니다. 이로써 바울은 2절의 언급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는 권면을 더욱 유효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디모데는 그의 충성된 사람들에게 엄숙하게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 6:3-4에서,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여기서 언급된 “말다툼” 역시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한”(딤전 1:4) 결과로 초래된 것으로, 아무 유익도 낳지 못하는 무익한 논쟁을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바울의 후임으로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던 에베소 교회에 복음 진리를 왜곡하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던 거짓 교사들이 존재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무익한 말다툼을 하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이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함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대상에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상처를 주고 있습니까! 많은 설교자가 본인의 설교만이 옳고,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다른 목회자를 끌어내리거나 평가절하하는 말을 얼마나 빈번하게 하고 있습니까? 성도들 역시 자기만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이 아무 유익이 없는 말다툼일 뿐입니다. 모두가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이들이요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서로 ‘말다툼’을 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까요?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5에서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심정으로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령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둘째,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1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생명의 부활을 얻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하나님께 드려야 할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떠해야 함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 세 가지를 말하는데,
① 무엇보다도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은 거짓 가르침(2:16-18, 4:4)을 따라가지 않을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옳게 분변하며”로 번역된 ‘오르도모문타’(ὀρθοτομοῦντα)는 ‘곧은’이란 형용사 ‘오르도스’(ὀρθός)와 ‘절단하다’라는 동사 ‘템노’(τέμνω)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오르도토메오’(ὀρθοτπμέω)의 완료 분사형으로, 신약 성경에서는 본문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명확한 의미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은데, ‘밭고랑을 똑바로 경작하는 것’이나 ‘석공이 돌을 똑바로 자르는 것’, 또는 바울이 천막을 만드는 이였음을 감안하여 ‘꺼칠꺼칠한 낙타털로 만든 천을 똑바로 재단하는 것’과 결부된 단어로 이해합니다.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본절에서 이 표현이 문맥상 거짓 교사들의 왜곡된 진리 전달 방법과는 대조되는 태도로 “진리의 말씀”인 “복음”’ 을 올바로 전달해야 함을 뜻하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말씀에 대한 올바른 분변은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변화시켜야 할 복음 사역자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16-18절에서 거짓 교사들이 퍼뜨리는 이단 사설에 대한 경계에서 알 수 있듯이, 사탄의 간계로 진리의 말씀이 왜곡되는 것을 막고, 구원의 진리의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② 진리의 말씀을 분별한 사람은,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깨끗한 양심(1:3)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정된 자”로 번역된 ‘도키몬’(δόκιμον)의 원형 ‘도키모스’(δόκιμος)는 ‘금속을 정련하다’라는 뜻과 함께 ‘시험하다’(눅 14:19), ‘분변하다’(눅 12:56), ‘연단하다’(벧전 1:7), ‘증명하다’(고후 8:8)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동사 ‘도키마조’(δόκιμάζω)와 동일 어근의 단어로써 본래 ‘일정한 시험을 거친 후에 인정되고 받아들여진 자’를 의미합니다. 동시에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어법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에서는 이 단어가 문장의 구조상 “하나님 앞에”(토 데오, τῷ θεῷ)란 어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훈련과 시험을 거쳐 “하나님 앞에서 인정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확연하게 나타냅니다. 이는 당시 에베소 교회를 혼란 속으로 빠뜨리고 있었던 거짓 교사들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즉 디모데는 거짓 교사들이 논쟁을 통해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을 원했던 것과는 달리 최후 심판을 집행하시는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힘써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도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고, 부끄러운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최종 목표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는 … 힘쓰라”는 ‘스푸다손’(σπούδασον)은 ‘애쓰다’, ‘진지하게 노력하다’는 동사 ‘스퓨도’(σπεύδω)의 부정과거 2인칭단수 명령형으로, ‘네 자신이 최선을 다하라’(Do your best, NIV)는 뜻입니다. 그리고 킹제임스버전(KJV) 성경에서는 ‘네 자신을 보이는데 있어서 연구하라’(Study to shew thyself.)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사역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경건이나 열정만으로 헌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말씀을 통한 은혜로써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드리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스테사이’(παραστῆσαι)는 ‘나타나다’, ‘준비하다’라는 동사 ‘파리스테미’(παρίστημι)의 부정과거 능동태형으로 ‘제시해야 한다’(present, NIV)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날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교회에서는 인정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서는 손가락질받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존경받는 아버지, 어머니로, 직장에서는 전문가다운 모습으로, 교회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헌신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도는불의와 부패, 악과 “선한 싸움”(4:7)을 해야만 하고, 그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므로 “의의 면류관”(4:8)을 받아 써야 합니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성도는 악한 사탄의 세력들과 영적 전투를 하며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키므로 주님 앞에 섰을 때 잘 했다 칭찬 받고 의의 면류관 쓰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I.
최근 친구가 보내준 “바보가 만드는 세상”이란 글을 나누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어느 동네에 두 집이 가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집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었고, 다른 한 집은 젊은 부부만 사는 가정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대가족이 사는 가정은 항상 화목하여 웃음꽃이 피는데, 부부만 사는 가정은 부부싸움이 잦았습니다.
젊은 부부는 이웃집의 화목한 모습을 보고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우리는 둘만 사는데도 매일 싸우고, 이웃집은 여럿이 함께 모여 사는데 저토록 화목한 것일까?
그래서 어느 날 젊은 부부는 과일 한 상자를 사 들고 이웃집을 찾았습니다. 다과를 나누며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댁의 가정은 대가족인데도 웃음이 떠날 줄 모르고, 우리는 둘만 사는데도 매일 싸우는데, 선생님 댁이 그렇게 화목하게 지내시는 비결이 무엇인지요?”
이웃집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아. 네! 그것은 당신네 두 분은 모두 훌륭하시고, 우리 가족은 모두 바보들이기 때문이죠!”
그 말을 들은 젊은 부부는 되물었습니다. “아니 그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그 집 주인은 말하기를,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내가 출근하다가 물을 엎질렀습니다. 그때 나는 내 아내에게 내 부주의로 물을 엎질러 미안하다고 하며 용서를 청했지요. 그랬더니 내 아내는 ‘아니예요’ 하면서 생각이 모자라 물그릇을 그곳에 놓아두었으니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며 오히려 나에게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시던 저의 어머니께서는 ‘아니다, 나잇살이나 먹은 내가 그것을 보고도 그대로 두었으니 내 잘못이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해 바보가 되려고 하니 싸움을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조직이 똑똑한 사람들의 의해서 움직이고 성장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바보처럼 우직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의해서 유지되고 성장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뉴톤, 아인슈타인, 백남준, 스티브 잡스 등 모두가 대단한 성과를 이룬 천재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보라는 소리를 자주 듣거나 또라이, 이단아로 불리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정용철 작가는 ‘사랑의 인사’란 책에서 “다른 사람을 높이고 나를 낮추면 손해보는 것 같습니다. 남을 배려하고 남 뒤에 서면 뒤쳐지는 것 같습니다. 양보하고 희생하면 잃기만 하고 얻은게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바보라 부릅니다. 정말 그럴까요? 짧게 볼 때는 바보 같지만 길게 보면은 이런 사람이야말로 삶의 고수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러한 사람이 남에게 인정 받고 좋은 사람이라 불립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빛나는 멋진 바보가 되어 보십시오. 양보하고 희생하는 그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다 인정 받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사람을 더 인정해 주고 높여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육신의 몸을 입고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복종하시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가장 낮아지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영광도 함께 받을 것이고, 함께 죽으면 또한 함께 살 것입니다. 또한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사탄과 이단 사설과 선한 싸움을 싸우고 천국에서 면류관 쓰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아멘! 샬롬!!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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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2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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