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인물사- 이희인-1994년 한겨례 신문 연재물
이희인(1846∼1894)
- 세성산 전투 이끈 '꼿꼿한 선비', 북접 계통 지도자…우금치 전투에도 영향미친 뼈아픈 패배
동학농민전쟁 중에 목천(지금의 천안) 일대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회덕·공주·청주·천안의 중간에 끼어 있는 이곳은 양반붙이가 많이 사는 고장이었는데
1894년 봄 잘라도에서 처음 농민봉기가 일어났을 적에 맨먼저 호응한 곳이 바로 회덕 등 이 일대였다.
양반 토호가 극성해 그득에게 짓눌린 하층민의 고초도 더욱 컸던 것일까.
또 농민군의 2차 기병 때 농민 연합군과 정부·일본군 연합군의 대회전이 벌어진 공주에서 경기도 안성, 멀리는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공주 전투에 앞서 목천 세성산에 농민군이 집결하여 공주의 배후를 지키게 된 것도 그런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독자적으로 행동
이곳의 농민군 지도자가 바로 이희인·김복용이었다. 이들은 동학에서도 북접계통이었다.
그러나 최시형의 북접이 초기에 호남 남접의 봉기에 최후까지 반대를 표명하던 상황이었는데도
이곳에서 호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들은 북접의 지휘만 착실히 따르기 보다는 독자적 판단으로 행동했던 듯하다.
이희인은 왕 세종의 후손이었다.
할아버지 수익은 무과출신으로 평양감영의 중군과 서산군수를 지냈고 수익의 큰아들 학래도 부사를 지냈다.
당시 양반들 가운데는 벼슬을 사기만 하고 실직에는 나가지 않으면서 행세나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들은 실제로 수령노릇을 했던 것이다.
이희인의 아버지 봉래는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큰 지주였다. 맏형 희민은 학래의 양자로 나갔는데
그 역시 참봉직함을 가진 큰 부호였다. 희인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나 글잘하는 선비로 이름난 향촌 지식인이었다.
벼슬아치의 손자요, 지주의 아들인 이희인이 동학에 입도한 내력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는 1893년 2월 동학도들이 올린 상소문에도 이름을 남겼다.
"지금 조선으로 조선을 공격케 하는 것이 왜양(일본과 서양)의 장기이니 통곡스럽고 한심스럽다.
…창의하여 왜양을 치려는 것이 무슨 큰 죄라고 한쪽으로는 잡아 가두려 하고, 한쪽으로는 제거하려 하는가?"
강력한 시국관을 피력한 이 글에는 허연·서병학 등 동학의 상당한 지도자 6명의 이름이 함께 연명되어 있어 그의 비중을 짐작케 한다.
그의 기개나 인품을 전해주는 일화들도 남아있다. 그는 목천현 병천면 병천리 개목마을(지금의 신촌)에 살고 있었는데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북면의 양지리에는 흥선대원군의 사위요, 판서를 지낸 조경호(1839∼?)가 살았다.
한번은 이회인이 고향을 떠나 있던 조경호를 서울로 찾아갔다. 그는 조경호에게 "자칫하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게 된다.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좋은 정치를 펴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대답이 시원치 않자 그느 영창문을 때려부숴 마당에 내팽개치고 나왔다(손자 호익의 증언).
이런 그가 토호로서 세력이나 부리며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두상이 유달리 커서 '이대가리'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그는 민중들의 고통을 두루 살핀 탓으로 성망이 높았다 한다.
1894년 9월 농민군의 2차봉기가 단행될 적에 그는 김복용과 함께 목천에서 본격적으로 기병했다.
그리하여 목천·천안·정의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모조리 빼앗고 양곡을 거두어 세성산과 적성산으로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서로 마주 바라보는 두 산은 그 중간길로 들어오는 롁거을 공격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들은 겨울을 앞두고 적성산에 구들을 놓아 초막을 짓고,세성산에 토성을 쌓아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이때 목천 일대는 농민군의 수중에 떨어져 농민군의 행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향토사학자 이원표씨의 증언).
정부군의 우선봉장으로 남하한 이두황은 이때 죽산의 상황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목천의 도적들이 두 진영의 사이에 죽치고 장차 큰 일을 저지를 염려가 있다. 또 서울길과 아주 가까워 선봉(자신의 군대)의 앞길에 장애가 될 것이다.
그러니 서울 가까운 도적을 격파하여 우리 군사가 승리를 기록한 뒤 그 승전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승승장구 해야
우리 군사는 기세가 올라갈 것이요 도둑들은 예기가 꺾일 것이다."(양호우선봉일기)
이곳은 이처럼 중요한 전략지점이었다.
이두황의 우선봉군은 청주 병영군과 함께 북면 양지리에 유진소를 두고 주변의 민가를 불태우고 수색을 벌이며 이곳을 압박해 들어갔다.
동학의 남접과 북접이 의견조정에 한달 가까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 서울으 조정에서는 토벌의 대열을 정비할 시간을 얻은 터였고,
청일전쟁을 평양전투를 통해 승리로 이끈 뒤 압록강 유역까지 추격하고 난 일본군도 여유를 얻은 상황이었다.
그 일본군도 관군과 손잡고 문의·연기 일대를 수색하며 모여있는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
10월 21일 이두황군은 세성산 밑에 이르렀다. 이두황은 "세성산은 삼면이 심한 절벽이고 함면만이 조금 평지였는데 진지가 매우 견고하고 넓었다.
깃발이 숲처럼 서 있었고 포성이 들판을 울렸다."고 그날 아침 정경을 기록하고 있다.
서울 길목 전략 요충
이두황군은 세 갈래로 공격을 개시했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농민군은 해질 무렵 진지를 버리고 흩어져야 했다.
이두황군은 달아나는 이들을 몇십리나 뒤따라가서 쏘아 죽이기도 하고, 사로잡기도 하였다.
싸움이 끝난 뒤 노획물은 총과 창 4백 28자루, 화살 5천 3백 촉, 탄환 2만 5천 5백 개, 철환 36만 6천 개, 곡식 7백 여섬 등이었다.
이두황은 이 싸움에서 희생된 농민군 숫자는 밝히지 않고 추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아 죽인 숫자가 17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세성산 밑 슨냥리 사람들은 산속에 시체가 하도 많이 쌓여 있었다 해서 지금도 이 산을 '시성산'(시체가 쌓여 이룬 산이라는 뜻)이라 부른다.
산 아래를 흐르는 개울은 피가 얼마나 흘렀던지 '피골'이란 이름을 얻었다. 농민군이 이 거점을 잃은 것은 며칠 뒤 공주전투에서 전술적 상처로 나타났다.
이두황은 세성산 전투에서 유명한 우두머리 김복용을 사로잡았으나 '거괴'는 잡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거괴' 이회인은 과로가 겹쳐서 가랫톳이 서서 멀리 달아날 수가 없었다.
우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은 이미 불타고 없었다.
겨우 몸을 움직여 이웃마을에 있는 사돈집에 숨어들었으나 동네 사람의 밀고로 붙잡혀 갔다. 가랫톳이 생명을 앗아간 셈이다.
그가 유진소에서 닦달을 받을 적에 형 희민은 달려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희민이 참봉벼슬을 얻었고 또 양반지주여서 소홀히 대접할 수가 없었던지 책임자(아마 이두황이었을 것이다.)는
목천현감의 신임장을 얻어오면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형 희민이 겨우 신임장을 받아와보니 이미 이희인을 사형에 처한 뒤였다.
밀고로 잡혀 처형
이희인은 북면 사기실에서 여러 부하 농민군들과 함께 24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가 살던 개목마을은 동학의 집단주거지라고 하여 깡그리 불태워 없애버렸다.
이희인이 주도한 이 고장은 그 뒷날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항유길은 곡식을 빼앗아 군량미로 실어 날랐다고 매맞아 죽었다.
그리고 북면 접주 정인석은 종중에서 많은 뇌물을 바쳐 겨우 살아남았다.
황해도 일대에서 농민봉기를 주도했던 김구도 몸을 피할 적에 이 정씨마을에서 한때 숨어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뒷날 정씨 종중에서는 뇌물마련 때 얻은 빚 감당에 지쳐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정인석의 후손과 짐안 10여 호는 밤을 틈타 만주로 이주해 갔다.
(위 이원표씨의 증언)
인터뷰/ 이희인의 손자 이호익씨
'할아버지 정신 잊지 말았으면
일제 징용·생활고로 지긋지긋한 고생
"동학전쟁을 얘기하라고? 말도 마. 다른 건 둘째치고 일제시대 강제 징용돼 고생한 생각이 몸서리가 나.
일본 사람들 왜 그리 몹쓴 짓만 골라서 했는지 원."
농민전쟁 당시 세성산 전투를 주도한 이희인의 손자 호익(76. 충남 천안군 병천면 병천 6리)씨는 할아버지와 관련된
얘기를 묻자 대뜸 강제 징용당한 고생담을 꺼냈다.
"농민전쟁 이후 집안이 겪은 고통은 대부분 일본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호익씨는 22살 나던 1942년 일본 규슈의 탄광으로 강제징용 당했다.
전쟁물자 징발에 열을 올리던 마을 이장에게 밭일을 하던 어머니가 은비녀를 빼앗기자 이장을 붸아가 따진 것이 화근이 되었다.
"지긋지긋한 날들이었어. 전부가 조선사람이었는데 낮밤 2교대로 짐승처럼 일만 했지.
꼬박 3년이 넘게 지하 막장에서 일을 하고서야 귀국선에 탈 수가 있었어."
집안에서 호익씨만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당숙인 건용씨는 만주에서 지하운동을 하며 가진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건용씨는 특히 아들이 신식교육을 받자 "친일파가 됐다"며 온몸을 때려 그 여독으로 아들이 죽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농민전쟁에 많은 재산을 쓰고 일제시대에는 농민군 후손이라고 시달린 탓에 해방 뒤로도 호익씨는 생활 형편이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다.
지금도 부인과 함께 몇마지기 안되는 땅을 부치며 대학 진학을 앞둔 아들을 힘겹게 뒷바라지 하고있다.
지난해 봄 교통사고를 당한 뒤 기력도 눈에 띄게 쇠약해져 방에 드러누워 있는 시간도 부쩍 많아졌다.
"동학백년이라고 어떻게 알았는지 하나둘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
나야 별로 아는 게 없는 늙은 노인네지만 우리 할아버지들이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정신만큼은 젊은 사람들이 잊지말고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