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서당'
장재서숙(長齋書塾)
즉, 장재학당(長齋學堂)
거문도 사람들은.,장재(長齋)
이를 "짱째"라고 한다.
재(齋)는 학교를 말한다.
따라서 장재란 한자의 뜻은
장촌에 있는 학교라는 뜻이다.
.
거문도 주민들은 장자로 이어진
이 집안의 훈장들을 '장재훈장' 즉
훈장 집안을 "짱째훈장"이라고 불렀다.
짱째,
짱째훈장,
짱째네,
짱째문장네,
짱쩨네손자
등으로 불렀다.
물론 지금도 거문도 사람들은 이 훈장들의
직계자손들을 가르켜 "짱째손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거문도 촌장으로 섬의 어른이었고
거문도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들이었으며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며, 문장에 밝은 대문장가.
제1대 훈장 김윤해부터
제6대 김준현까지 200년 동안
장손자로 이어진., 문장가 가문.
1902년 제5대 훈장 金相演이 46세로 죽자,
그 장자 김준현이 제6대 훈장을 이었으나
3년만인 1905년에 청춘요절해 대가 끊겼다.
이렇게 해서, 김씨집안 장손으로 만 이어지던
훈장 자리는 일본 동경 최고 명문사립고등학교와
명치대학 법학과 졸업한 친척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때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조선의 국운이 위태로운 시점.
제1대 훈장 김윤해(金胤海 : 1720-1741)
제2대 훈장 김득택(金得澤 : 1763-1822)
제3대 훈장 김석재(金錫載 : 1786-1847)
제4대 훈장 김순태(金舜泰 : 1828-1886)
제5대 훈장 김상연(金相演 : 1856-1902)
제6대 훈장 김준현(金俊鉉 : ?-1905)
제7대 훈장 김상순(金相淳 : 1871-?)
제8대 훈장 김용현(金鎔鉉 : 1891-1933)
..............제1대 훈장 김윤해....................
제1대 훈장 김윤해는 임진왜란, 인조반정 공신
이괄에 난을 평정했던 학성군 김완의 현손이다.
영조시대 때 문과에 급제한 뒤
통훈대부 흥양현감(고흥군수) 중
나라에 죄를 짓고 자신이 다스렸던
거문도 서도리로 귀양을 와서 서도리
북쪽해안 산짓골 옹달샘 옆 움막에 거주.
김윤해는 거문도 귀양 당시
재산은 모두 나라에 몰수되고
빈몸으로 거문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가 서도리 북쪽해안으로 정해진 것은
조선의 모든 신하는 매월 음력 보름과 그믐에
북쪽 임금을 바라보며 절(望倍)해야 하기 때문.
김윤해가 거문도로 귀양을 갈 때
아내와 여동생 독자아들 흥형(興亨).
그 내외와 흥형의 어린아들 득택(得澤) 등
모두 5명이 김윤해 따라 유배지 거문도에 거주.
거문도에 들어간
김윤해 가족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이때 서도리마을 승근네 할멈이
보리 한바가지를 건네 주었던 것.
김윤해 가족들은 양반이라 일이 서툴러
농사, 고기잡이, 해초 채취 등을 할줄 몰랐다.
김윤해 며느리는 주민에게 해녀 물질을 배웠다.
이 때 거문도 주민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경영하며
조선. 일본. 중국 간 해상무역.
제1대 훈장 김윤해의 아들 독자 흥형은
장차 선단을 만들어 울릉도와 독도를 경영할
목적으로 뱃사람들과 함께 울릉도.독도로 향했다.
그러나, 포항 앞바다에서 난파
거문도 뱃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훈장의 아들 흥현의 시체는
경북 영덕 죽산해변에 밀려와
흥형 허리춤 호패 주소지 거문도로
이들이 모두 죽은 사실을 전해왔던 것.
거문도에서 해녀생활을 하던 며느리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죽었다.
이 며느리 무덤은 몰랑 서당터 위 선산의
맨 안쪽에 홀로 묻횐 분이 그 주인공이다.
남편이 묻힌
경상도 영해의
죽산을 바라보며
거문도에 묻혀 있다.
앞서 조선문과 급제 김윤해.
이포(이기미)에 서당을 짓고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
서당이 있던 이포를. 서당이포
일본말로는 '서당이기미'라 한다.
서당이 있던
포구라는 뜻
'서당이기미'
김윤해는 마을 아이들과 함께
자신의 손자에 글을 가르쳤다.
김윤해는 귀양이 풀리지 못하고
거문도에서 죽어 산짓골 산 정상에
현재, 그 무덤이 있는데 멀리 북동쪽의
영해죽산에 묻힌 아들을 바라보며 묻혔다.
이 서당터는 아직도 할아버지 이름으로 등기
옛날에 서당이 있던 곳이라 '서당밭'이라 부른다.
이 밭 언덕에서 옹달샘이 솟는데 이 물을 이용해
논농사를 지을 때는 밭 이름을 '서당논'이라 한다.
경상도 영해 죽산에는
지금도 울릉도로 가다가
죽은 흥형의 무덤이 있다.
.................................
.......제2대 훈장 김득택.........
제1대 훈장 김윤해의 손자이자,
울릉도를 개척하기 위해 거문도
주민들과 함께 울릉도를 가다가
태풍으로 배가 파선되어 죽었던
김흥형(金興亨)의 독자아들이다.
거문도 장재서숙의
제2대 훈장인 문장가.
석재(錫載),
석권(錫權),
석옥錫玉(일명 祉玉)
등 아들 3명을 두었다.
서산사 돌비석이 3남 김석옥 송덕비.
석옥은 고종으로부터 효자문을 받았다.
거문도 서도리 주민들은 김석옥의 아버지가
문장가 만회 김양록이라며 매년 서산사에 만회
김양록 배향하는데 김양록은 김석옥의 양아버지.
...........................................................
......제3대 훈장 김석재(1786-1847)......
김석재는 제2대 훈장 김득택의 장남으로
서산사에 있는 돌비석 김석옥의 큰형이며,
김석옥의 네째아들로 서산사의 쇠비석인
인동도호부사 김정태의 백부이다.
가업을 계승해
제3대 장재서숙
훈장직에 올랐다.
문장가 겸 학자였다.
종갓집 장손으로 아들을 두지 못하고
아들을 보기 위해 계속 자식을 두다보니
딸만 9명이라 거문도 주민들이 김석재 외손.
막내동생 김석옥의 둘째아들
김순태가 선생의 양자로 입적했다.
1885년 영국군 거문도 불법점령사건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이 선생을 기려
삼도를 거문도(거문도)라 고치도록 했다.
이때 조선사신 청 제독 정여창 등이
조선의 사신들과 함께 거문도에 와서
선생의 손자 김상연과 필담을 나누며
선생의 문집을 보고 놀랐기 때문이었다.
무덤은 몰랑 서당텃밭 위
선영에 첫머리 합장묘이다.
거문도 서도리 술비야회관이 지어진 660평
땅이 김석재 선생의 시제밭으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1970년대애 거문도 간첩단 사건으로
그 자손들이 고향을 떠나 뿔뿔히 흩어졌다.
.......제4대 훈장 김순태(1828-1886)
서산사 돌비석 김석옥의 둘째아들이자
서산사 쇠비석 인동도호부사 김정태 둘째형
제3대 훈장 김석재가 아들을 두지 못하자 양자로
입적해 학자로서 거문도 장재 훈장직을 이었다.
조선 말 일본을 오가는
청나라 조선사신들과 교류
조선, 청나라 일본 정치인과 교류
학문과 정치사를 조언하고 예견했다.
.......제5대 훈장 김상연(1856-1902)
제4대 훈장 김순태 장남으로 가업을 계승.
1885년 거문도사건 때 청 제독 정여창 등이
영군동양함대 거문도 불법점령사건 조사 차
조선사신들과 함께 거문도 선생의 집에 들려
선대 훈장들의 문집을 보며 그 학문 선견에 탄식
그리고,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이
이 섬을 거문도라 칭하도록 조선에 명.
바로 이 집안의 선대 훈장 때문 임을 인정.
김상연 선생은 김옥균 박영효 등과 교유
조선의 모든 사신들이 일본에 오고 갈 때
거문도에 들려 선생에게 자문을 들었단다.
1883년 8월, 박영효 김옥균 등이
조선이 일으킨 임오군란 사죄단으로
일본에 가기 위해 일본의 우편운반선
명치호를 타고 유학생 60명과 함께
이 섬에 들렀을 때 선생이 조선최초
태극기 2점을 만들어 박영효 등에게 주었다.
박영효, 김옥균은 서도리에 사는
선생의 제자 오씨를 울릉도 초대 군수인
울릉도감으로 추천, 그를 한양 임금에게 보내고
한개의 태극기를 그에게 주어 국왕에게 바치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태극기는
일본으로 가지고 갔는데
이 태극기가 최초 태극기.
정사각형의 흰 천 위에 붉은천과
푸른천을 오려 붙인 태극기였다.
선생의 무덤은 유림해수욕장에 있다.
박영효 김옥균을 따라
조선 개화파 일본유학을 가서
일본 명치대 법학과를 졸업한
김상순, 김상윤 형제가
선생의 4촌 동생이다.
이 형제들의 친아버지
인동도호부사 김정태가
선생의 작은아버지이다.
무덤은 유림의 해수욕장에서
거문등대로 넘어가는 길에
동생의 무덤과 함께 있다.
...........제6대훈장 김준현(?-1905)..............
제6대 훈장 김준현은 제5대 훈장 김상연의 장남
훈장으로 있던 중 1905년, 20대 초반 나이로 요절.
가법에 의해 다음 훈장은 김준현 동생 김화진이었으나
집안의 어른이었던 인동도호부사 김정태가 금지하고
자신의 둘째아들을 김상순을 훈장에 앉혔다.
이 분의 조카로 아직 살아 있는
김재심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아들이 어릴 때 불에 타죽었단다.
육지출신 미망인 부인이 있었으나
친정에 돌려보내 개가하도록 했다.
무덤은 응달산에 있다.
......제7대 훈장 김상순(1871-?)
김상순은 1871년생으로 만12세이던
1883년 8월 일본특명사신으로 가던 박영효,
김옥균을 따라 조선개화파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육군소년학교를 수료한 뒤
동경 최고 사립 명문고등학교인 게이지의숙
즉 경응의숙 보통과(고등학교 과정)를 졸업하고
일본 명치대학 법률과에 입학하고, 졸업했다.
졸업후 고종황제가 불러
황실의 벼슬을 세차례나
내렸으나 취임 않고 사직.
1904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유군유년학교 창설.
다시 그를 교관으로 불렀는데 네번째 임명이었다.
김상순은 마지못해 취임. 고종황제는 그가 취임하자
그를 황해도경찰청장으로 임명을 내고 다시 몇 달 뒤에
그를 전라남북도 경찰청장인 전라도 경무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관제개편에 따라
그는 전라북도 경찰청장
등을 지냈다가 1910년 9월
나라가 망한 뒤 6개월 뒤인
1911년 4월에 사직됐다.
앞서 김상순은
거문도 장재서숙 제7대 훈장
김준현이 요절하자 서울에서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1905년 장재서숙(장재학당)을
영락학교로 등록하고 자신이
서류상 학교설립자이자
비상근 교장으로 있었다.
이 학교는 일본명치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온 조카 김용현에 의해 운영됐다.
대한제국 신식학교로 근대교육과
조선 민족교육을 교육목적으로 했다.
1912년 거문사립보통학교로 개명했다.
1911년 4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시직된 김상순은
전라도 광주로 거주지를 옮겨 도의원 등을 지냈고
그의 일본 성명은 김택상순金澤相淳이다.
민족문제연구소와 대한민국 국회는
그가 대한제국 멸망시점에 전라도의
경찰청장을 지낸 점을 들어 친일인사로
인명사전에 올렸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선정한 반민족행위 친일인사 708명에 등재.
...제8대 훈장 김용현(1891-1933)..
김상순이 대한제국 전라북도 전주부
경찰서장으로 나아가자 거문사립보통학교
제2대 교장에 오른 사람은 김상순의 4촌 형의
아들 김용현(일본 명치대학 법학부 졸업한 청년)
김용현은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시켰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거문도와 거문도
연안에서 이 학교 학생과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인 소요가 일기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학교를 빼앗고 졸업생 명단을 불태웠다.
이런 이유로 이 학교가 개교한
1905년부터 1919년까지의 졸업생
명단은 사라져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한편 이 학교를 빼앗은 조선 총독부는
이 학교를 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고
제1회부터 학생들을 배출하기 시작.
광주학생운동의 주동자였으며
일본 동경제국대학에서 조선공학 박사
제1호를 받고 서울대 교수을 지내다 월북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서울시 부위원장에
올랐던 김재을씨가 선생의 장남이다.
조선총독부에 학교를 빼앗긴 김용현
선생은 거문도 삼산면 면장을 지냈다.
..................................................
거문도 불탄봉
거문도
거문도.,등대
거문도 등대.,가는 길
2015.01.27
2012.11.08
거문도등대.,숙박.
거문도 전망대.,불탄봉
불탄봉
거문도 트래킹
거문도 관백정
거문도~ 백도
거문도 ~백도
거문도 & 백도
파도가 치는 날에는
높이 20~30m 암반 위를
넘나든다고 하여., '무넹이'
거문도 목넘어와 유림해수욕장
영국군이 거문도에 상륙 전까지
동도와 서도 가운데 고도는 무인도.
영국군은 고도에 부대 막사를 짓고,
통신시설 설치, 죽은 군인묘소 조성.
지금도 고도에는 영국군 묘지가 있다.
병영생활을 하다가 병이 나서 죽고,
사고로 죽고,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이곳 고도에 묻어 놓았던 것이다.
현재 거문초등학교 자리는
영국군이 막사를 지어 주둔.
인근에는 테니스장 터도 있다.
이렇게 거문도에는
영국군의 옛 자취들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2006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때 꼭 가고 싶어했던.,거문도.
영국 수병과 거문도 처녀가
국경을 뛰어넘어 사랑한 일화.
거문도 처녀를 사랑한 영국 수병
.......거문도 처녀와 영국군의 사랑........
당시 거문고 아낙들이 초혼굿을 벌린 동도.
이때 그 초혼굿을 주재하였던 처녀 무당을
망원경으로 본 영국 수병이 처녀애개 반했다.
그후 사랑에 빠진 영국 수병은
밤마다 몰래 동도로 헤엄쳐나와
처녀 무당집에 양과자 통조림 선물.
결국, 마을 사람들에게 발각되고
처녀 무당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쫓겨나 인근 다른 섬으로 떠났다.
무당 처녀가 동도를 떠나는 날에
영국 수병은 그녀가 떠난 길을 따라
헤엄쳐 가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
그후 동도에 처녀가 바다에 빠져 죽으면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 귀신이 잡아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동도에 전한다.
..........................................................
초혼굿
영국 해군이 거문도에 주둔하면서
거문도 주민과 영국군과 다양한 교류
영국군을 통해 서양문화가 전파되었다.
거문도 주민들이 임금을 받고
영국 해군막사 건설을 도왔으며
당시 테니스가 가장 먼저 전파된 섬.
그후 영국군이 물러가고나서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기 전부터
거문도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정착.
뱃길로 부산을 가는 것보다
큐슈로 가는 것이 더 가깝다.
조선시대 왜구침략이 잦았던 거문도
이곳의 해류가 독도, 울릉도까지 연결.
일본 어부가 이곳으로 밀려오기도 했다.
그런 지역적인 배경이 있는데,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거문도를 지배했던 것.
거문도.,소라 문어 은갈치회
영국군이 물러간 거문도항을
둘러싸고있는 고도 바닷가에는
2층 일본식 건물과 옛골목 모습들.
다만 그 주인이 바뀌었고,
집들이 일부 수리가 되거나
개축은 되었어도 골목 풍경은
옛모습 그대로라는 느낌을 준다.
거문도 야경
일본인들은 이곳 거문도에
신사를 지어 참배도 행하였다.
그들이 세웠던 신사 탑 옛흔적들.
.
거문도는 섬이라서
열악한 환경의 도서관.
"원래, 해수부 건물인데,
지역 주민들이 무료임대.
거문초교 등 어린이들이
읽을 만한 책이 필요하다.
집에서 잠자고 있는 책들
보내주시면 도움 되겠다."
2019년 9월 서도분교가 있는 곳으로
4개의 본교와 분교들을 통합을 하여
'거문초등학교'로 거듭날 것이라 한다.
이곳 선생님들은
대부분 여수가 집인데,
관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백령도 및 11항
국가 관리 연안항
2017.02.20
2012.06.14 흑산도 가거항
2017-11-20
전남 거문도항이
서남해역의 영해관리
전진기지로 탈바꿈 한다.
그러나, 1885년(고종 22) 영국은
청·러시아·일본 세력 균형을 이유로
동양 함대를 주둔시켜 거문도 불법점령.
"해밀턴항(Port ㏊milton)"
그뒤, 1887년 2월 27일 철수.
당시 영국군이 전기불로 밝혔던
등대가 사실 상으로는, 최초의 등대.
...................거문도(巨文島).................
고흥반도로부터 남쪽으로 40㎞ 지점에 있다.
'삼도(三島)' '삼산도(三山島)' '거마도(巨磨島)'
고도(古島 ; 0.42㎢).,해안선(3.70㎞)
동도(東島 ; 3.43㎢)
서도(西島 : 7.77㎢)
거문도는 3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도 만을 "거문도"라 부르기도 한다.
서도는 세 섬 중 가장 큰 섬으로서
동백나무로 뒤덮여 있어 연중 푸른데,
이곳에 위치한 수월산(水越山, 128m)에는
다도해 뱃길을 비춰주는 거문도 등대가 있다.
고도와 서도는
삼호교로 연결.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에 영속.
백제의 원촌현에 속하여.,삼호(三湖).
1396년(태조 5) 흥양현(고흥) 속.,"삼도"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여수군 소속.
1949년에는 여천군으로 이속되었다가
1998년에 통합 여수시 삼산면이 되었다.
1885년(고종 22) 영국은 청·러시아·일본
세력 균형을 이유로 동양 함대를 주둔시켜
거문도 불법점령.,"해밀턴항(Port ㏊milton)"
그뒤 영국은 섬 매수 등 온갖 수단을 강구 중
결국, 1887년 2월 27일에 이곳에서 철수하였다.
이때 종래 '삼도'를 "거문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한해협 문호로서
과거 '러시아 태평양 출구'
"동양의 지브롤터(Gibralter)"
.
옛부터 삼도에는 문장가가 많아서
거문도(巨文島)라고 하였다는 기록.
또한 왜인들이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
살았기 때문에 ‘왜섬’이라고 부르던 것을
‘왜’와 훈이 비슷한 "외섬"으로.,훈차(訓借).
"고도(孤島)" 후에 고도(古島)가 되었다는 설.
고도·동도·서도
세 섬으로 둘러싸인
바다를 도내해(島內海)
수심이 깊어 큰 배의 출입이 자유롭다.
고도는 섬의 동쪽으로 비교적 높은 산지
서도를 바라보는 서쪽으로는 만입이 형성.
해안은 암석해안.
연평균기온은 14.4℃,
1월 평균기온은 2.1℃,
8월 평균기온은 24.8℃,
연강수량은 1,247㎜이다.
2009 기준인구 704명(남 386명, 여 319명)
307세대 취락은 섬 서쪽 선착장 주변에 집중.
토지이용 현황은 논은 없고 밭 0.11㎢, 임야 0.25㎢.
수산업이 주민의 주업이며,
농산물은 콩·고구마 등 생산.
고도를 중심으로 하는 수역(水域)은
순천·여수 방면에서 제주도로 항해하는
여러 선박의 기항지로서 근해어업 근거지.
갈치·삼치·고등어·방어 어장
김의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전복 양식이 활발하며,
갈치는 특산품이다.
성어기에는 파시(波市)가 섰는데,
파시 역사가 길어서 현재의 마을들은
대개 파시에서 유래되어 발달한 것들이다.
주민들 구전으로 전해온 거문도뱃노래.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되어 있다.
여수· 녹동 등지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
....................................................
거문도 사건
1885.3.1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
1885년 2월 29일 영국 동양함대사령관
W.M. 도웰 제독은 영국 동양함대 소속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일본 나가사키항 출발,
다음날 거문도를 불법 점령.
거문도사건은 영국이 러시아
해군기지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공격하기 위한 공격책이었다.
영국 외상 로즈베리는
1886년 3월 다른 나라들이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는다면
거문도 철수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시기는 1887년 2월 5일.
거문도 사건은
당시 세계 도처에서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
제국주의 상호간 정치적 대립.
그러나
조선정부는
이 사건 해결과정에서
극도의 허약성을 드러낸다.
이후 서구열강의
문호개방의 요구와
본격적인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는다.
개항 후 조선은
청·일과 구미 열강의
침략의 각축장이 되었다.
특히 1860년 옌하이저우[沿海州]를
점거함에 따라 조선과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된 러시아는 조선은 물론
극동에서의 새로운 위협적 존재.
19세기 전반을 통해
해양으로 진출하려던 러시아
세계 도처에서 영국과 대립했다.
.
대서양·지중해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의
팽창정책을 군사력과
외교수단을 총동원하여
저지하자, 러시아는 크림전쟁
이후 태평양 진출을 모색하게 된 것.
그리하여
'1860년~1900년' 약 40년간
일본· 조선· 중국 연안지 대상으로
러시아는 태평양 진출을 끈질기게 시도.
특히 블라디보스토크는
부동항이 아니었으므로
좋은 항만조건을 가진
조선에 대한 지배욕을
욕심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의 위협에 대하여
영국·청·일본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개항 전부터 청·일본은 누차 러시아 접근을 경고.
황준헌(黃遵憲) 〈조선책략〉에
나타난 방아책(防俄策)이 대표적
.
대원군 집권 이래 수차례나
수호통상을 요청해온 러시아.
조선이 구미제국에 문호를 개방하자,
반러시아적인 청나라 중재를 통하지 않고
조선정부에 직접 외교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
1884년 6월 베이징주재 러시아 공사관 서기관
K.I. 베베르를 조선에 파견, P.G. 묄렌도르프의
알선으로 7월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베베르의 노련한 외교활동
갑신정변 후 지나친 청의 내정간섭.
이에 반발하는 조선 내 친러세력을 부식.
조선 내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있을 무렵인 1885년 3월
영국이 지원하는 아프가니스탄군과
러시아군이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전투.
조선에서도 영국과 러시아 간
양국의 충돌위기가 예상되었다.
이때 러시아의 영흥만 점령계획설,
영국은 러시아에 대한 공격책으로
거문도점령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천연의 요항(要港)인 거문도는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한일양국의
해상통로는 물론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지의 요충지로도 손색이 없는 곳.
1885년 2월 29일 영국 동양함대사령관
W.M. 도웰 제독은 영국 동양함대 소속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일본 나가사키 출발,
다음날 거문도를 불법 점령.
영국군은 영국기를 게양하고
섬 안에 포대구축, 병영 건설.
항내에는 수뢰까지 부설했다.
거문도 주둔군
200~300명에서
700~800명으로 증가
군함도
5~6척에서
10척까지 증가.
영국은 3월 3일 청나라와 일본에
거문도 점령 사실을 통고했으나,
영국의 통고가 통리아문에 접수된
때는 거문도 점거 1개월 후인 4월 6일.
영국 측이
조선에 통고한 공식적인 이유는
"예측할 수 없는 변(變)을 막으려고
잠시 거수(居守)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구실에 불과
러시아 해군기지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공격하기 위한 공격책이었다.
영국이 거문도 점령 초에
청은 러시아에 대한 방비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으려는 목적으로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은근히 국제 사회에 인정했던 것.
영국은 당초 청나라와 교섭하여
거문도를 조차할 계획이었으므로,
3월 14일에 거문도협정안을 제시했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와 일본이 각각
조선 내 영토점령을 요구하고 나서면
국제분쟁으로 커질 것을 우려하여 영국의
거문도 조차에 반대하면서 조선정부에 통고.
지금까지 애매한 태도로 있던 조선정부는
우선 거문도 현지 실정을 탐사하기로 결정.
.
이에 유사당상(有司堂上) 엄세영(嚴世永)과
외교협판 묄렌도르프는 4월 3일 정여창과 함께
거문도에서 영국함대사령관에게 점령이유를 힐책
그리고
이들은 곧바로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측과 외교교섭 추진.
4월 6일 영국측의 점령통고문이
정식으로 전해지자 다음날 통리아문은
강력 항의를 주청하고, 영국공사에 타전한다.
한편, 공함을 발송, 청·일·독·미 공관에
영국의 불법점령 사실을 연락하는 한편
영국이 조선정부의 항의에 불응하는 경우
조정에서 취할 방책과 각국공관 협력을 요청.
이에 대해 각국 대표는
본국 정부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여 명확한 답변을
할 수 없으나, 우선 조선과 영국
두 나라가 원만한 타협을 이루길
바랄 뿐이라는 회답을 보내왔다.
결국, 조선정부는 사건해결에
주체적인 구실을 담당하지 못하고
청·영국·러시아 3국의 상호교섭에 의존.
한편 영국도
서울주재 영국총영사
W.G. 에스턴을 통하여
협상을 제의했다.
즉 거문도를
영국의 급탄지로서
임차교섭을 하되
금액은 1년에
5,000파운드 이내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거문도 점령에 대한 비난이 고조됨과 동시에
4월말부터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관한 영국·
러시아 간의 긴장이 완화되고, 8월 2일
아프가니스탄 협정이 조인되자 영국은
거문도점령의 명분이 없어졌다.
영국 해군도
거문도가 군항 내지
급탄소로서 적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외무성의 정치적 타결 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영국 외상 로즈베리는
1886년 3월 다른 나라들이
거문도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는 보장만 해주면 거문도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그해 8월 28일과 9월 2일에 열린 회담으로
청의 이홍장과 주청 러시아 공사 라디젠스키는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철수한다면 러시아는
조선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3개조의
조회장(照會章)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이에 청나라는
10월 5일 영국 공사관에
러시아측의 보증을 전달하고
영국의 거문도에서의 철수를 촉구했다.
주청 영국 공사 웰샴은
11월 24일 청국정부에,
12월 23일 조선정부에
철수를 통고했다.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1887년 2월 5일이었으며,
22개월간 점거한 뒤
철수한 셈이었다.
거문도 사건은
당시 세계 도처에서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라는 제국주의 상호간의
정치적 대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조선정부는 이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극도의 허약성을 드러냄으로써 이후
서구열강의 문호개방의 요구와 더불어
본격적인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사건해결에
중개역할을 했던 청나라는
이후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더욱 내세우고 내정간섭을 강화.
...........................................
.............한러밀약............
1885년(고종 22) 조선 정부가
청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
러시아와 맺으려 했던 비밀협약
제1차 밀약/2차례에 걸쳐 비밀리에 추진
청·일본·영국 등의 압력과 방해로 실패했고
그 결과 청의 제국주의적 간섭이 강화되었다.
.
1884년 5월 러시아는
베트남에서 청과 프랑스의
대립으로 청·프랑스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그 기회에
한국에서 청의 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할 것을 계획했다.
그리하여 그해 7월
톈진[天津] 주재영사인
베베르를 전권대신으로
한국에 파견하여
한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한편 한국정부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청의 지나친 내정간섭을 경계하고
청일 간의 세력 다툼에서 한국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제3세력으로
러시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갑신정변 직후
청일군대가 주둔하여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고종은 김용원(金鏞元)·
권동수(權東壽) 등을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해
러시아 관리와 약정을 맺었다.
그 내용은
김옥균(金玉均)이
러시아 영토에 가면 압송해줄 것,
일본의 보상금 요구를 파기시켜줄 것,
조속히 조약을 비준하고 육로통상을 체결할 것,
러시아 군함이 한국 연해를 보호해줄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보호 약속보다는
통상조약 추인과 육로통상, 안전에 관한
토론 용의 등에 대해서만 회답했다.
1885년 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망명한 개화파의 체포 및 송환을
교섭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서상우(徐相雨)·묄렌도르프는
비밀리에 주일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와 만나 러시아 훈련교관의
초빙과 영흥만 조차에 관해 협의했다.
묄렌도르프는 귀국하여
비밀교섭의 경위를
고종에게 보고하여 윤허받았고
이에 정부간 정식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주일 러시아 공사관의 스페이에르가 입국했다.
청의 총판상무(總辦常務) 진수당(陳樹棠)과
일본대리공사 곤도 신스케[近藤眞鋤]에게
밀약 사실을 알리는 한편, 스페이에르에게
현재 미국 교관의 초빙 교섭을 진행하고 있기에
러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통고하고 묄렌도르프를 규탄했다.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러시아와 대결하고 있던 영국은
1885년 4월 거문도(巨文島)를 점령하는 등
같은 해 7월
밀약문제가 표면화되어
국제적으로 말썽이 나자
고종은 김윤식 등의 의견에 따라
묄렌도르프를 사직하게 하고 사건을 무마.
.
거문도사건 때
사건해결에 중재를
맡았던 청나라는 이후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더욱
내세우고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청에 대한 저항감이
생기게 되고, 청이
대원군을 귀국시키고
고종을 폐위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씨 척족정권은
러시아 세력에 다시 의존하려고 했다.
그리고
묄렌도르프의 후임으로
부임한 미국인 데니 역시
러시아에 의지할 것을 권고했다.
한편 러시아는
1885년 11월 베베르를
주한공사로 파견하여
조존두(趙存斗)·김가진(金嘉鎭)·
김학우(金鶴羽) 등과 접촉했고,
이들은 '인아거청'(引俄拒淸)의 논리로서
고종과 척족들에게 러시아의
한국 보호문제를 설득했다.
그러나, 친청반러 노선을 취했던
이를 알림으로써 러시아의
접근에 제동을 걸었다.
위안스카이는
같은 해 8월 13일
이홍장(李鴻章)에게
'러시아의 개입을 호소한
고종의 밀서'를 보고하고
청군의 파견과 고종의
폐위를 건의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러시아와의 밀약 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조존두 등을
유배시키는 한편, 서상우·
이응준(李應俊) 등을
베이징[北京]에 파견하여
사건을 해명했다.
이홍장은 8월 16일
러시아 정부로부터
밀약사실이 없다는 통보를 받고
고종의 폐위음모를 중지시켰으나,
러시아와 한국의 접촉에 대해서는
계속 감시·간섭할 것을
위안스카이에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위안스카이는
유언사조(喩言四條)와
시무십관(時務十款)을 제시하여
내정에 깊이 관여하는 한편, 한국의
자주적 외교도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이후 1890년대초까지
청은 한국에서 독단적인 종주권을
주장하고 내정 간섭을 계속했다.
.........................................
미국은 구미의 어느 나라 보다도
오래 전부터 조선과의 수교를 원하여
이에 대한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조미수호통상조약
(朝美修好通商條約)
183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에 대한 관심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로
구체화되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포함외교를 통해 조선을 강제적으로
개항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미국의 포함외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은 종래의 무력시위를 통한 방식
대신에 일본의 우호적 알선에 의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여,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을 찾기 위해
그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일본의 중재가
걸림돌이 되어
조선과의 수교를
위한 슈펠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의 조선과의 수교는
거중조정 의사표명으로 활로를 찾게 되었다.
당시 청은 미국을 끌어들여
러시아의 남진과 일본의 조선침략을
견제하는 '연미론'을 구상하고 있었다.
1880년 8월 톈진[天津]에서
이홍장과 회담을 가진 슈펠트는
곧 귀국 길에 올라 조미교섭에 관해
이홍장으로부터 알선의 확약을 받았다는
사실을 본국에 보고했다. 이에 미국 정부에서는
조미조약의 체결을 교섭할 특별사명을 그에게 부여했다.
1881년 7월 톈진에서
이홍장과 2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진 슈펠트는 그 내용을
미국 정부에 보고했고, 미국 정부에서는
11월 14일자로 조미조약 체결에 필요한
일반훈령과 이에 필요한 전권위임장,
미국 대통령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친서를 발송했다.
한편 이홍장은
조선 정부에 밀서를 보내
미국과의 조약체결의
긴요성을 역설했다.
조선 정부에서는
연미론에 호응하여
미국과의 수교에 어느 정도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으나,
위정척사론자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청의 힘을 빌려 이를 추진하되
그 과정은 비밀에 붙여지게 되었다.
조약의 내용은
1882년 1월 영선사로 파견된
김윤식(金允植)과 이홍장의
4차례에 걸친 비공식 예비회담과
3~4월의 이홍장과 슈펠트와의
회담을 통해 기안되었다.
여기서 이홍장이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라고 하는
조항을 명문화할 것을 주장하자
슈펠트 역시 조선이 내치와
외교에 자주권이 있다면
중국의 종주권과 관계 없이
미국은 조선을 대등하게
취급할 권리가 있다고 맞서
결국 별도 조회문을 통해
속방 부분을 밝히기로 하는
선에서 타결을 보게 되었다.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조선 전권대신
신헌·김홍집(金弘集)과
미국 전권 슈펠트 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조선과 미국과의
수교관계가 시작되었다.
조미조약은
비록 체결과정에서
당사자인 조선 정부가
일부 배제되는 문제점.
그러나,
조미조약은
제3국으로부터
불공경모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
필수상조한다는 규정(제1조),
치외법권이 잠정적이라는 규정(제4조),
거류지는 조선의 불가분의
영토의 일부라는 규정(제6조),
양국간 문화학술교류에 대한 규정(제11조) 등
당시 중국이나 일본이 서유럽 제국과 맺은
조약에 비해 불평등이 어느 정도 배제된
주권국간의 쌍무적 협약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갖는다
............................
거문도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 속해있는 섬.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거문도등대는
거문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들러가는 필수 코스이다.
거문리 선착장에서 등대까지 1시간 도보거리.
삼호교를 거쳐 유림해수욕장을 벗어나면 '무넘이'.
여기서부터 해안가 기암절벽을 낀 1.2km거리 산책로.
길 양쪽으로 들어선 동백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세상 모든 상념을 떨쳐 버릴 수 있을 만한 곳이다.
거문도 등대 절벽 끝에는 '다도해 전망대'.,관백정.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내한 때
방문하고 싶어했던 섬으로도.,유명.
영국 여왕은 왜 거문도로 가려한걸까?
거문도 사건 당시 영국군의 철군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거문도에 내려온 경략사(經略使) 이원회(李元會)의 보고.
영국군 사망자의 묘지는 모두 9기, 현재는 3기만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영 타도 주장이 높아
일본인들 묘비보다.,더 큰 서구식 묘비는 파손.
그후 '영국군 묘' 6기는 본국으로 이전 안장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영국군 3인 서구식 비석도
방치된채로 버려져 있는 것을 해방 이듬해에
거문도 유지들이 보수해 관리해온.,영국군 묘역.
'영국군 묘지' 비문에 적혀있는.,글귀.
“1886년 3월 알바트로스(Albatross)호
수병 2명이 우연한 폭발 사고로 죽다.
윌리엄 J. 머레이(William J. Murray)와
17세 소년 찰스 댈리(Charles Dale)”
“1903년 10월 3일 알비온호 승무원
알렉스 우드(Alex Wood) 잠들다.”
십자가에 새겨져 있는.,글귀.
엘리자베스 여왕은 거문도사건 과정에서
순직한 영국군 3인 묘지에 참배하려 한 것.
2004.12.1(수)~ 12.2(목) 방한 일정 때였다.
2005년부터 주한 영국대사관은 거문도 주민들이
백년간 영국군묘지를 관리해온 것에 대한 보답으로
거문중학교에 장학금을 지급하며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2015년 9일 여수시와 여수시교육청 등에 따르면
주한 영국대사관은 지난 2005년부터 거문도를 방문,
영국군 묘지를 참배하고 거문중학교에 첫 장학금 지급.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매년 150만∼550만원을 전달한 것.
장학금은 한영협회에서
기부금 형식으로 마련하여
영국대사관을 통해 지급한 것.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묻혀지고 지워졌던 사건.
영국에서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거문도 사건.
장차, 한영(韓英)외교를 위해 어떤 조치를 해야할까?
'대한해협 해금강' 관광자원 활성화가
'금강산 개발'보다 안보 면에서 효율적.
외화획득원 관광자원 잠정가치도 높은 곳.
'거문도 ~백도'.,뱃길.
'거문도 ~ 백도' 한려수도 해역은
'천혜의 국제적인 관광자원' 해금강.
관광산업은.,'황금알을 낳는 거위.'
굴뚝 공해 없는 공장 같은.,외화 수입원.
수입 원자재도 필요없는.,100% 외화 소득원.
외국인 관광객 숫자에 비해
내국인들이 주로 찾는 현실이
늘 안타깝게 여겨지는.,관광자원.
영국군 불법 무단 점령으로 기록된.,거문도 사건.
UN군 6.25참전부터 현재까지 '혈맹 우방국' 영국(英國).
거문도 사건에 관한 역사 기록은 수정 보완해야 하지 않을까?
혈맹 우방국들과 외교를 돈독히 하려면
'역사의 현장' 관리가 최우선 중요한 시점이다.
그래야, '거문도 관광 해역'이 빛을 발하지 않을까?
..................백도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약 28km 떨어져 있다.
크게 상백도군과 하백도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적도에 31, 물에 잠기는 섬까지 합해 99개 섬.
100개가 안되어
일백 백(百) 아닌
흰(白)자를 붙였다.
최고 높이는 상백도 110m 지점이며,
대부분 섬들이 암석으로 된.,바위섬.
신비함 간직한 기암절벽 곳곳에 괴목.
....상백도...
나루섬·노적섬·
매바위·병풍바위·
형제바위·오리섬·탕근대
.....하백도...
각시바위·궁성바위·서방바위
바다직박구리·
흑비둘기·휘파람새
등 희귀한 조류 서식.
까마귀쪽나무·
당채송화· 동백나무·
보리똥나무· 풍란·쇠뜨기
등 희귀식물이 자생한다.
연근해에서
조기·갈치·고등어·
농어·복어·참치·도미·
민어 등이 많이 잡혀
거문도 어장에서 중심.
1979년 섬 일대가 명승 제7호로 지정
지금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남국적인 정서가 짙어 관광지로서 인기.
거문도와 백도 간에
정기 유람선이 운항.
1978년 종합 학술조사 실시
상백도에 태양열 무인등대.
여수시 무인도의 대부분의 지대는
중생대 백악기 후기(1억∼9천만년전)
화산활동으로 그 지반이 만들어 졌으며
화강암과 화산쇄설성응회암으로 이뤄졌다.
상백도는 본래 하나의 섬.
파랑의 침식에 의해 여러개
섬으로 분리되었을 것으로 추정.
........................................
백도는 거문도 어장의 중심지역으로
조기·갈치·돔·민어 등의 어장으로 유명.
1979년 상백도하백도일원 섬을 중심으로
200m 해역을 명승 제7호로 지정하여 보호.
........................................................
.....거문도 무늬오징어.....
십완목 오징어과 연체동물로
우리나라 다도해 이남과 일본
등지에 분포하는 대형 오징어다.
5월 하순에 산란하며 이때가 성수기.
수컷 등쪽에 암회갈색 가로 줄무늬가
여러 개 있고 타원형의 반문이 있다.
................................................
거문도 갈치 낚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