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이라는 단어를 주제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짝을 지어서 설명을 합니다.
그 짝은 원래 하나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 입니다.
짝은 히브리어 ‘[레우타]’인데
명사, 여성, 단수이며 접미는 3인칭 단수, 여성이다.
짝을 뜻하는데,
이 단어는 다스리다, 먹이다, 깨트리다는 어원에서 왔다.
창조역사인
첫째시기에서(빛으로 계몽하여 하나됨)
여섯째시기의 (깨끗하고 올바르게 세움)
무지를
깨트리는 짝이라는 말이다.
말씀으로 창조하는데
말씀을 못깨달으면 의도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일반적 사전적 직역 :
머리 안에 엘로힘께서 그 하늘들과 그 땅을 창조하셨다
또는 '피조물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하늘들과 그 땅을 창조하셨다
또는 '베레쉬트가 엘로힘을 창조했다. 그 하늘들과 그 땅으로'
또는 '베레쉬트가 엘로힘을 이미지로 창조했다. 곧 그 하늘들 자체로 그리고 그 땅 자체로
* 말도 안되는 번역들
㉠ The Anchor Bible(1964):
When God set about to create heaven and earth(약호 AB성경):
히브리어 창세기 1:1절의 문장과 전혀 관련이 없는 번역을 하고 있다.
히브리어 문장은 분명히 베레쉬트가 먼저 나온다.
그리고 바라(그가 창조하셨다/ 칼 완료 3인칭 단수 남성형)를
제대로 번역할려면 "created" 를 써서 번역해야 맞는다.
그리고 엘로힘(명사 남성 복수 어미)의 복수형의 의미도 실어서 본문 그대로 번역해 주어야 하고,
샴마임을 heaven으로 번역을 했는데,
히브리어 문법의 쌍수(양수, 복수개념) 개념을 그대로 살려서 번역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When(때)으로 시작되는 시제절의 번역은 성경 히브리어 문장과 도무지 관련이 없다.
이 성경번역 역시 속히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 Tne New English Bible(1970/ 일명 NEB):
In the beginning of creation, when God made heaven and earth :
이 번역도 완전히 히브리어 문장과는 다르다.
제대로 번역을 할려면 정관사에 해당하는 "the"를 넣지 말고 번역했어야 옳다.
히브리 본문 그대로 In beginning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When"집어넣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창조관련동사중에서 창세기 1장 1절의 두번째 단어로 쓰여진
"바라"(칼 완료 3인칭 단수 남성/그가 창조했다)를 "made"로 번역을 했는데
정말 웃기는 번역들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이런 번역들은 변조, 날조에 해당된다.
㉢ The New American Bible(1970):
In the beginning, when God created he heavens and the earth:
조금은 문자적으로 마쏘레트 문법을 적용해서 번역한 생각들이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인위적인 사고인 시제절(When)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
역시 히브리어 성경과 관련이 없다.
㉣ The Living Bible(1971):
When God began creating the heavens and the earth :
마쏘레트 문법 조차도 인위적으로 마구잡이로 날조하여 번역하고 있다.
이 리빙바이블은 고대 근동 창조부패신화를 그대로 적용하여
창1:2절도 "엘로힘의 영이 알까고 있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 제가 위에 적어놓은 72인역(LXX) 헬라어 구약성경도 창세기 1:1절부터 오역하고 있다.
바라(그가 창조했다)는 "칼 완료 3인칭 단수 남성형"이다.
72인역이 제대로 번역했다면 "포이에오"(되었다)를 써야 마땅하다.
히브리어 바라 동사를 포이에오로 번역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완료 형태를 다른 시제로 가져가는 것도 분명 잘못된 번역인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어 핫슈샴마임(하늘들, daul 또는 pl)의 문법적 형태는 "쌍수 또는 복수형"이다.
이러한 사실을 72인역은 고려하지 않은채, 하늘(우라논)를 단수 개념으로 쓰고 있다.
물론 72인역보다 마쏘렡트 문법이 훨씬 후대에 생겨난 것은 사실이다.
근데 오역히 극심한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이미 맛쏘레트 학파에 대해서 익히 들어서 알 것이다.
6,7세기경부터 이들은 모음부호를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히브리어는 자음만으로의 기록이다. 더군다나 띄어쓰기가 없다.
그냥 바벨론 포로 당시의 율법을 낭독하는 낭독음의 고저를 기록하다가
결과적으로는 모음기호도 도입하게 된 것이고,
현재 우리가 보는 히브리어 성경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 히브리어 문법은 아직도 진화 중에 있다.
문법으로는 완성될 수 없기에, 그 문법을 완성하려는 시도들이 많았었는데, 하나같이 다 실패했다.
왜냐하면 성경 66권은 문법의 기록이 아니라,
그 히브리어 각각의 원 자음의 의미값이 있기 때문이다.
즉, 히브리어 문자를 문법으로 읽으면 전부 그 내용이 깨어져 버린다.
즉, 히브리어 자음 22~23개는 전부 각각의 뜻 값이 있다.
그 의미를 아는 것이 히브리어 성경을 볼 수 있는 밑받침이 되는 것이다.
즉, 각 자음이 갖고 있는 원의미로 모세오경을 읽으면,
그 토라(모세오경)는 문자가 아니라, 마음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를들어,
베레쉬트(한글성경은 '태초에'/시간, 공간, 에너지의 시초로만 생각하는 개념이 있다)의
마쏘레트 문번적 특색은 불분리접두전치사 베(~안에)+ 로쉬(머리)
또는 레쉬트(시작)+연계구성형어미인 "이이트"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마쏘레트를 따른 문법적 직역을 시도하게 되면 "머리 안에서"라는 번역이 된다.
72인역은 story 기준이다. 역사이야기 기준이라는 말이다.
즉, 각 자음의 원의미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구약번역일 뿐이다.
그래서 헬라어 구약성경인 72인역은 오역 투성이이다. 어떻게보면 소설책이라는 말이다.
72인역의 헬라어 성경을 읽는 분들은 원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 가족사의 스토리를 보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요즘 얼마전 까지도 이 카페에 자주 들렀던 사랑님의 경우가
바로 72인역으로 성경을 보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의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Vulgata성경도, 영어 성경도, 한글성경도 거의다가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성경들을 보면 정말 인위적인 생각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서 번역이 되었는지, 보다가도 그냥 덮어버린다.
도대체 성경이 아니고, 소설책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을 때에 어떤 스토리를 항상 떠올릴 것이다.
아담으로 시작되는 가계도, 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으로 연결되는
그리고 모세에게 연결되는 스토리를 항상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덴동산을
파라다이스의 개념으로 상상하면서 성경을 읽을 것이다.
물론 회원들은 이런 부분의 이해는 이미 지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들이 여러분들 속에서 무의식 중에 나온다.
사실 72인역으로 쓰여진 구약성경은 그리스(헬라적)적 개념이다.
히브리어하고는 다르다.
여러분들이 히브리어 각 자음의 의미값으로
성경의 인물들을 전부 뜻을 해석하면서 읽어보시라.
여러분이 상상못할 그 진리의 말씀이 들려올 것이다.
예를들어,
계시록에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라는 기록이 있다.
이건 단순히 시간선상의 시작과 끝의 얘기가 아니다.
이걸 히브리어로 그대로 적용하면
"나는 알레프(하나님이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와
타우(완성으로 존재해 있음)라!"가 되는 것이다.
즉, 그가 입을 열어 가르쳐 말씀하신 그 가르침이
여러분에게 타우(완성)라는 완성이 되게 한다는 말이다.
이 가르침의 내용인 시작(산상수훈)과
마지막강의(요13:30~17장)를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는 것이고,
이 첫강의와 마지막강의를 역시, 이른비와 늦은비라고 부르는 것이다.
㉥ 마태복음의 첫 시작 구절인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예수 크리수투 휘우 다비드 휘우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되는 책)이라는
헬라어 본문에서 "아들"로 번역되는-한글성경은 '자손'이라고 번역-휘오스는
아브라함이 그 안에 낳았었고(약속으로), 다윗이 그 안에 낳았었던 "그 씨"(그 아들)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그 씨"를 가진 것을 "베레쉬트"라고 하는 거지요.
역시 마가복음의 "아르케 투 유앙겔리우 예수 크리스투 휘우 투 데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예수의 그 복음의 아르케/시작)에서의
"하나님의 아들"도 "베레쉬트"인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우리 안에 이루어진 사실"(그 아들을 어떻게 두게 되어서 어떻게 낳았느냐)을 말합니다.
이것 역시 "베레쉬트"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베레쉬트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의한다면,
요한복음은 베레쉬트가 가지고 있는 "그 말씀"에 대해 얘기하고 있고,
그 베레쉬트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절의 베레쉬트는 엘로힘을 창조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절의 베레쉬트는 베레쉬트의 존재되는 것을 말하지요.
그래서 창세기 2:10~14절에 나오는 네 강의 얘기에서,
그 강이 에덴(즐거움, 행복, 기쁨)에서부터 나와서
네 머리 흐름으로 흘러간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전부 베레쉬트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즉,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베레쉬트의 해설입니다.
창 1:1절은 베레쉬트가 창조한 목록이 나옵니다.
첫번째는 엘로힘이고,
그 다음에 이 엘로힘을 여러분의 눈에 보여지게끔 나타내서 깨달으라고
그 하늘들과 그 땅으로 성전적 개념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성경은 그래서 이 하늘들과 땅의 갈등의 역사의 기록입니다.
이 갈등을 없애는 것이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실 스타우로스는 십자가가 아니라, 약속을 의미하는 기둥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율법이라는 돌비로 와서 자꾸 나무라는(약속의 굳게 섬의 의미) 얘기를 합니다.
자신이 포도나무라고도 요15장에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라는 표현은 그 나무에 예수
(마땅히 떨어져야할 꽃, 믿어서는 절대로 않된다.
그 율법의 세상임금이 심판을 받을 때 여러분도 그 죄와 율법에 대해서는 끝장나 버렸음)라는
마땅히 버려져야할 그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여러분의 신앙의 대상이 된다면,
이건 어김없이 여러분에게 저주가 되는 겁니다.
사실 깨닫고 나면, 베레쉬트라는 단어 하나면 됩니다.
그 얘기에 대한 표현이 성경66권이니까요.
베레쉬트라는 말은
"베레"(원겸이라는 성전에 그 아들을 낳음)+쉬이트(두다, 놓다)=
"세번째 성전인 원겸이 안에 그 아들을 낳았다" 이게 바로 베레쉬트인 것입니다.
내가 낳은 아들인 진리의 말씀을 손을 펴서 누군가에게 복음으로 넘겨줄 수가 있다면,
이런 존재를 베레쉬트라고 하는 겁니다.
"태초에"라고 하면,
여러분은 대부분이 시간+공간+에너지의 시작의 개념을 가지고 창세기 1장을 대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시간 선상의 태초, 또는 공간선상의 태초, 조물주와 피조물로서의
태초라는 인식이 여러분들 속에 깊숙히 자리하고 있지요.
이러한 관점을 깨기가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절의 히브리어 본문은
"그 아들을 가졌냐, 안 가졌냐(?)"를 얘기합니다.
즉, 니가 그 머리(그리스도/성서상의 머리는 그리스도)를 두고 있느냐 없느냐(?)를
처음부터 논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머리를 가졌으면 "베레쉬트"라는 말입니다.
이 베레쉬트인 사람들이어야 엘로힘이라는 네모박스의 정육면체인 진리로 넘겨줄 수가 있는 겁니다.
엘로힘의 맨 끝 자음이 네모박스입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정육면체(네모박스)로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알레프(엘로힘이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를 들려짐으로
배워서 간직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상태의 여러분들이라면
이걸 요한복음 10:34-35절의 증거의 기록대로 여러분이 엘로힘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이 태초부터 증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눈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니 어떻게 그 진리의 말들을 할 수조차 있겠습니까?
나오는 말 전부가 거짓말밖에는 나올 것이 없겠지요.
저 역시 가짜로 밖에는 나타낼 방법이 없습니다.
근데 여러분이 이 가짜를 진짜로 간직하면 이 가짜 역시 진짜 아니든가요?
이렇게 아는 것이 디카이오수네이고, 아가도스(절대진리의 선)인 것입니다.
글 - 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