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눈물
내가 사는 무안에서 20-30분 내려가면 목포시가 나온다. 인구 24만... 지금 목포는 대불공단 조성, 한라 조선소, 도청이전으로 조금씩 경제 발전의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아직도 낙후한 것은 마찬가지 이다. .. 목포에 이르면 유명한 유달산이 있고, 이 유달산을 오르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 가락이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목포는 역사적 애환이 있는 도시이다. 단지 목포의 애환이 아닌, 과거 역사속에 민족의 비애가 서려있는 도시이다.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이 남해 바다 목포에 들리 기 바란다. 누가 알겠는가? 바다해가 멋지게 안내할지? 유달산을 오르면서 찍은 사진을 올린다.
늦은 오후 유달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목포 앞바다. 중간에 길게 용섬이 보인다.
정오를 알리는 오포
목포의 눈물 / 이난영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임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상처가 새로워진다 못오는 님이면 이마음도 보낼것을 항구의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 암울한 시대에 고통받는 민족의 슬픔과 한을 대변한 이 노래를 부른 이난영(1916- 1965). 그는 가고 없지만 그 노래 가락은 도도히 흐르는 물결처럼 이어져 국민들의 가슴속에서 흥얼거려지고 있다. 이 노래는 이난영을 민족가수의 반열에 올려놓은 ‘목포의 눈물’노래 가락이다. 가사만 읽어도 뼈마디까지 저려오는 이 곡은 나라 잃은 민족의 한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69년 한 시민이 거금 600만원의 성금을 기탁해 노래비가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다. 민족의 비통함을 달랜 그 목소리는 매년 봄·가을 이난영을 추모하기 위해 열리는 목포가요제를 통하여 되살아나고 있다. 70여년간 온 국민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불려진 목포의 눈물은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민족의 슬픔과 울분을 마디마디 마다 토해내고 있다. 목포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전국민들이 기쁠 때나 슬플 때도 ‘목포의 눈물’을 부른 다. “삼학도 가슴깊이 스며드는데 이별에 눈물이냐 목포에 설움” 이란 노랫말은 오고가 는 항구 특성과 바닷가 사람들의 정서를 잘 담아냈기 때문이다....
척박한 바위에 붙어 마치 경쟁이라고 하듯이 싹과 잎을 티우는 넝쿨 식물.... 그래도 가을이라고 한 편에서는 단풍 물들고 , 한 편에서는 푸른 잎의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한 다. 저것이 과거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았던 한 민족의 모습이 아닌가!
암울했던 역사와 달리 목포의 가을 하늘은 푸르기만 하다~
일등 바위! 유일하게 바닷가에 위치한 유달산은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옛부터 영달산이라 불리웠다. 이 곳에 있는 일등바위는 유달산 최고의 봉우리로 사람이 죽어 이 바위에서 영혼의 심판을 받는 다 하여 ‘율동바위'라고 불리웠으며, 이등바위는 유달산에서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일등바위에 서 심판 받은 영혼이 이 바위로 이동하여 잠시 대기한다 하여 ‘이동바위'라고 하였다. 오랜 옛날 사람이 죽으면 혼령은 일단 이 율동바위(일등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뒤, 이동바위(이 등 바위)로 옮겨져 대기하고 있다가 이 중 극락세계로 가는 영혼은 3마리의 학(삼학도)이나 고하 도 용모리의 용에 실려 떠나가고, 용궁으로 가는 영혼은 영달산에서 조금 떨어진 거북섬(목포와 압해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가서, 거북이 등에 실려 용궁으로 떠나간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산 위에서 내려다본 광경들~
남해 바다의 운치는 '다도해'이다. 섬과 섬이 끝없이 이어진다.
지금은 오랜 세월이 지났고... 부둣가 바다에는... 눈물 젖은 손수건을 든 새악시들 대신.... 그 시절을 까마득히 잊은듯 한가로히 홍합을 따며 유희하는 아낙내들이 있다.
오고가는 세월의 흐름속에... 파도치는 저 바다는 '목포의 눈물' 사연을 억하려나?... 널디 넓은 치마폭을 열어 민족의 눈물을 받아주었었는데....
황혼을 맞은 벤취에 쉬고 있는 노인들.... 아마도 그 시절을 기억하리라~~
불멸의 스타가 된 이난영은 초등학교 4학년이 배움의 전부다. 엄마가 식모로 있는 제주도에 건너가면서 그 인생의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일본인 집주인은 극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난영이 아이를 돌보면서 한 마디 한 마 디 흥얼거리는 그녀의 노래 소리가 집주인이 보기에는 예사롭지 않았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소질을 감지한 집주인은“그냥 썩히기에는 아깝다”며 극이 시작되기 전에 노래하는 막간가수로 발탁한다. 열너댓살 애띤 소녀의 구성지고 애간장을 끊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심금 을 울리고 말았다. 1932년 열여섯살 되던 해에 삼천리 가극단장의 권유로 단원이 되면서 가수로서의 길이 열린다. 1934년 조선일보사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계승하기 위해 OK레코드와 공동 으로 전국 6대 도시의 ‘애향갗가사를 공모했다. 3000여편의 응모작품 중 목포 출신 무명시인 문일석이 응모한 ‘목포의 노래가당시의 우리민족의 정서와 애환을 진솔하 게 담아 당선작으로 뽑혔다. 노랫말만 읽어도 눈물을 훔치게 만드는 ‘목포의 노래는 1935년 ‘목포의 눈물’로 제목을 바꾸어 달고 손목인이 작곡한 ‘갈매기 항구’에 이 가 사를 붙였다. OK레코드 사장은 평소 눈 여겨 봐둔 이난영에게 이 불후의 명작을 부르게 했다. 이 노래는 레코드판이 나오자마자 매진되었다고 한다. 가게마다 목포의 눈물을 구 해달라고 주문이 쇄도했다. 순식간에 수만장이 팔렸나갔다. 지금의 수백만장에 버 금가는 대박이었다. 한 동네에 라디오도 하나 없던 시절에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레코드 가게에서 틀어놓은 애절한 노랫소리는 길가는 사람들을 불러 세웠다. 당시 레코드 가게들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해 창문에 가사를 큼직하게 써 붙여 놓았다. 가게 앞에는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외우려는 사람들로 연일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난영의 노랫소리 사람들 가슴 사정없이 후벼파고 남편 잃은 아낙들 “사공의 뱃노 래”에 긴긴 한 숨 섞어 아! 민족의 설움이여. 민초의 설움이여. 그 덕분에 다방도 돈 벼락에 신바람이 났다. 사람들은 노래를 싶게 들을 수 없다보니 듣고 배우기 위해 다방으로 몰려들었다. 신청곡이 쇄도하면서 틀었던 곡을 열번이고 백번이고 어 댔 다. 지금 같으며 당장 다방 문닫을 일이지만 손님들도 전혀 실증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노래를 안 틀면 문을 닫을 지경이었다. 축음기가 없던 영세한 다방은 파 리만 날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여야 했다. 농촌에서도 그 바람은 대단했다. 서울 서 공부한 부잣집 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러다 보니 노래가사도 ‘삼학’이 ‘사막’으로 불리어졌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애환~
패전 말기에 몰린 1940년 일제는 부족한 군수 물자를 충당하기 위하여 놋그릇은 말할 것은 없고 붙이는 모두 빼앗아 갔다. 젊은이들은 총알받이로 징병되어 갔고 처녀들은 위안부로, 나이가 든 남자들은 징용으로 끌고 갔다. 피땀 흘려 지은 쌀은 일본으로 공출해 갔다. 부산과 목포 등 주요 항구에는 전쟁터로 끌려가는 젊은이 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사랑하는 님을 보내는 새악시들은 이제 가면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기약 없는 이별에 손수건에 눈물을 적시며 울어야 했다. 뱃머리에 서 멀어져 가는 고국의 산천을 바라보며 힘없는 민족의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남의 나라 전쟁터로 가는 피눈물나는 원통함을 ‘목포의 눈물’을 부르면서 삭여야 했다. 그렇게 끌려간 그들은 수만리 머나먼 이국 땅에서 총알받이가 되어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갔다.
꽃분(86)할머니는 18살에 결혼했는데 한달 만에 남편이 징병으로 끌려가 이제까 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60여년 동안 유복자인 아들과 함께 하마 돌아올까 하 며 기다렸다고 한다. 자다가도 문소리가 나고 바람소리만 심하게 스쳐도 ‘남편이 왔는 갑다’ 싶어 문을 열고 뛰어 나가 정신나간 사람처럼 남편을 불렀다. 남편은 결혼 첫날부터 목포의 눈물을 너무 잘 불러 처가에서 가수로 통했다고 한다.그래 서 남편 생각이 날 때마다 지금도“사공의 뱃노랩”를 부르며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하나뿐인 아들은 어미 마음도 모르고 그 노래를 부르면 듣기 싫다고 타박을 줘 지 금은 그 노래도 마음놓고 부를 수 없다고 한다. 내 곱던 머리에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에는 저승꽃이 피었는데 지금 살아 있으면 100살 다되어 가는 남편의 떠오르 는 얼굴은 아직도 그때 그 얼굴이라 한다. 이제 곧 문 나서면 저승인데…, 꽃은 지 면 명년 봄에 다시 피건마는 우리 인생은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흘러버 린 내 인생이 원통하다며 회한의 눈물을 훔친다.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은 일본은 한국에 대한 탄압이 악랄했다. 한국처녀들을 끌고가 저지른 만행은 정신대뿐만이 아니었다. 남자들이 하기도 힘든 일인 지하 수백m의 막장인 탄광에 투입됐다.용광로처럼 분출하는 뜨거운 지열에 숨이 막혔 다. 안전시설도 전혀 없었다. 굴이 무너져 흙더미에 깔려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한마디로 사람이 개돼지 보다 못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남녀 2명을 1조로 모두 옷을 벗겨 나체로 막장에 들여보내 짐승 같은 짓도 서슴지 않았다. 한국인 남녀가 같은 조로 막장에 들어갔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일본인 남자와 한국여자와 같이 벗고 막장에 들어갔을 때였다. 한국여인들 이 엄청난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일본인 남자들은 일은 뒷전이었다.이러다보니 생산량을 채우지 못해 일을 하지 않고 놀았다며 일본인 감독으로부터 죽도록 매질 을 당하는 2중의 고통을 당했다. 이처럼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은‘목포의 눈물’이 일제는 가사 내용이 불온하다며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한때 금지시켰다. 이 당시 일제의 악랄함에 대한 우리민족의 정서를 담아내 일본의 귀에 상당히 거슬렸던 것 이다.특히‘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의 대상이 일본이라며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그래서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으로 바꿔서 삼백연(三栢淵)의 바람이 삼 학도를 거쳐유달산 노적봉으로 분다는 뜻으로 만들어 검열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이난영은 나라 잃은 민족의 국민들을 애절한 노래 가락으로 위무했지만 여성으로 서 불행했다. 한국동란으로 남편은 납북돼 생이별을 했고 사랑한 2살 연하인 남인 수는 이미 처자식이 있었다.남인수는 폐병이 악화돼 1962년 세상을 떠나버렸다. 남편과 사랑하는 사람마저 보낸 이난영은 1965년 9월 알코올 중독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녀의 나이 49세였다(해설편집).
- 바다해 해영
목포의 눈물/ 이난영
|
첫댓글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돌아가신 친정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유난히 좋아하셨거든요, 서정적인 노랫말에 이란영님의 비음섞인 노래가 심금을 울려줍니다. 한 10년전쯤 목포를 찿은적이 잇었는데...기억이 가물 거립니다
그래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한번 더 오세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누가 압니까![?](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ㅋ](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5.gif)
![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6.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아...좋고 ..종구나............소주한잔이 생각납니다....그냥 듣기에는 아쉽네요...이제 들어와서 밥을 먹으면서 지금 다시 한번 더 듣고 있습니다...유달산 한번도 못가봤습니다....바다가 훤히 보이는 그 멋진 곳에서 이음치도 한번 불러보고 싶네요...ㅇ하하...저요...엄청 음치인데요............노래방가면 그래도 죽어라고 부르는 못말리는 음치....울동생이 언니 제발 돈줄테니 노래 부르지마라고 합니다...하하..............그래도 합니다....못한다고 못하면 영원히 못합니다...그냥 합니다....
저의 초딩카페로 욺겨갑니다...꽃가마 태워서 말이죠...언제 한번 같이 가자고 해볼까하는데..
하하.............그럼...저는 사주신단 말씀...그말씀을 유도할려고 ...........히히...여자말은 어디가 진실인지 알수가 없지요...그래요...여자말은 이해랄수가 없어요...그냥 느낌으로 이해하는겁니다...
아마도 그대가 진정 들개라면.... 유![달](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11.gif)
산 일등 바위 위에 포효하다 죽어도 좋다는 킬리만자로의 늑대라면... 가능![?](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하하](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46.gif)
어린나이...징용에 끌려간 소년이 탄광벽에 서툴게 쓴 "어머니 보고십어요"란글을 TV에서 볼때 가슴이 미어져 견딜수가 없더군요......자식키우는 엄마로써...목포의 눈물,민족의 눈물이 녹아있네요......
좋던 나쁜던 역사를 잊어서는 안되겠지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특히 눈물로 걸어오는 시간들...눈물의 빵을 먹던 시절을 잊는다면 오늘날 배부름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오늘날 이만큼 내가 있기 까지는 나만의 노력이 아니라 조상들이 눈물로 씨 뿌린 수고가 있고, 대한 민국에 베풀어주신 하늘의 은택이 있지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잠시 노랫가락이나마 추억의 시절을 되 돌아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역시![사과](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28.gif)
는 감을 알아보는군![~](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근데![~](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발강![사과](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28.gif)
님은 남해 바다에 와 보셨는감![?](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아![~](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그래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무엇이든지 지나친 것은 좋은 것은 아니지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그리고 돌아다녀봐야 그게 그것 아닙니까![?](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다 흉내내서 광광지 꾸미고![~](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오히려 가까운 곳에 시간 들이지 않고 나 만의 사색터를 만드는 것이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마사이 마라는 한번쁨 가볼 만하데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자연이 가장 왕성하게 숨쉬는 곳![~](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여러 여행 중에서 가장 인생이 깊은 곳이지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좀 쉬었다가 나중에 그곳에 한번 가보세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 그리고 터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그곳에 관한 책 한 권만 써놓고 실제로는 가보지 못했답니다. 다음 여행의 유력지![!](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