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솔솔부는 호수 공원에서
金 善 中
어느 날 오후 일을 끝내고 사무실에 가려고 하는 중에 핸드폰이 울린
다. 바둑두며 자주 어울리는 사무소 건축사들이다. 물가나 바람 부는
곳에 가서 맥주나 한잔하면서 바둑을 두자는 제안이다. 충북의 사무소
소장 중에서 바둑 고수인 그가 두고 싶다는데 배우는 내가 거절할 이
유가 없다. 폭염에 시달리며 땀을 흘리다 보면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
리가 들리는 시냇가로 바로 가고 싶은 심정이고 실제 청주 주위에는 금
방 갈 수 있는 자연이 가깝게 있지 않는가.
약속 시간에 동승을 하기로 하고 조금의 맥주, 안주와 소쇄원 시집을
준비하였다. 차를 타고 오창의 개발 단지 안에 있는 한 공원으로 향했
다. 이곳은 내가 미리 보아두었고 좋은 곳이 있다고 침이 마르게 얘기
한 적이 있었다. 대단지 개발을 직접 해본 K 사장이 운전을 해서 인도
를 했고 여기가 문학예술 공원 적지가 아니냐며 추천을 했었다. 돌아
본 곳을 기억해서 찾아가는 데 금방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오창
단지는 너른 곳에 있기도 하려니와 자로 잰 듯 반듯하게 큰 도로가 놓
여 있으나 주택 단지는 수많은 공원을 끼고 작은 도로로 연결되어 찾기
가 어렵다. 지금까지 늘 보아오던 주택 단지와는 다른 곳이다. 구불구
불 길이 있는 제법 옛 동네 같은 정취있는 마을이 들어설 계획이란다.
한참을 돌아다니고서야 큰 도로 곁 산자락 아래에 모습을 나타낸다. 원
래 있던 자연 호수를 이용하여 조성한 공원이다.
옛날 산남 지구에도 도로 곁에 자연 방죽이 있었는데 메워서 집을 짓
기에 아무리 경제성이 우선 이지만 있는 것을 이용해서 공원을 만들지
못하는 우리의 수준에 실망했었다. 방죽을 메워 집을 지으면 지하 물길
을 건물이 차단하여 건물의 지하실이 금이 생겨 물이 샐 수도 있고 가
라앉을 수도 있고, 수맥이 있어 찬 기운이 집과 사람의 건강에 좋을 게
없어 잘 되던 일이 안될 수도 있을 것인데...... 가뜩이나 무미하고 건조
한 주거 단지에 새로 만들어야 할 판에 있는 것도 보존 못하는 것이 아
쉬웠었다.
우리는 호수 가장자리의 조그만 정자에 앉았다. 북쪽으로는 산이 있
고 계곡에서 내리던 물이 이곳에 모여 호수를 형성한 곳이리라. 물위
에는 돌아가지 않은 철새인가 야생 오리 두어 마리가 연신 잠수하며 물
고기를 찾고 있고, 물가 갈대에는 물새들의 노래 소리가 상쾌하다. 거기
에 수생식물들이 떠있고 물결 잔잔한 물가로 선착장 같은 목조 통로가
뻗어있다. 건너편에는 아이들 놀이 공원이 있어 몇몇이 놀고 있다. 뒤
에는 공연장으로 스탠드가 있고 현대식 그늘 막이 조그만 철기둥 위에
조성되어 있다. 그 뒤로는 넓은 풀밭이 있어 아이들이 뛰어 놀기에 좋
다. 우리들은 어린아이 같이 이런 곳이 있다며 즐겁게 웃으며 감탄하였
다.
우리들은 바둑을 두다가 캔 맥주를 비우며 이곳의 경관과 시설 그리고
공원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윽고 두 명이 바둑에 골몰할 때 나는
소쇄원 시집을 꺼내어 소리 높여 읽었다. 소쇄원은 조선 중기의 별서
정원( 집 근방의 별장주거 )으로 남도 기행시 들리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옛 선비들의 도학, 은둔사상, 신선사상을 반영하여 조성되었으
며 풍류를 즐기며 거주했던 곳으로 보면 된다. 흐르는 물이 있고 그늘
이 있고 숲이 있어 여름에는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다. 이러한 자
연과 벗한 수많은 정자를 바탕으로 조선시대의 빼어난 가사 문학이 탄
생한 것이 아닌가. 정철, 송순, 김인후, 기대승, 송시열, 이황, 고경명,
역사에 쟁쟁한 시인, 묵객들이 정자에서 토론하고 머물며 지은 시들이
남아있다.
다음은 왜란 때 의병장으로 금산에서 장렬히 산화한 고경명의 편지 중
한시 번역이다.
가을밤에 그대 생각 간절하다오/ 꿈결에도 빗장을 더듬었다네
손님의 옷자락은 대숲을 스치고/ 차가운 샘물소리 구름까지 들리네
책방에 켜진 불 빛 밝은데/거문고 있는 처마 안에 이슬 내려
신선과 그대는 사귀는 듯해/ 그 모습 아름다워 옷깃을 여미네
우리가 사는 충북은 자연 환경이 빼어남에도 이러한 예술적 정취가 가
득한 공원이 별로 없으며 이것은 혼이 없는 것과도 같지 않나 생각하였
다. 누군가 답사기로 유명한 사람이 청주에 와서 갈만한 곳이 없다고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문득 나는 저 건너편 풀 밭 위에 서있는 한 건
물을 상상하였다. 문학 예술 공원의 팻말 뒤에 시원한 바람 잘 통하고
열린 곳과 닫친 곳이 있는 날아 갈 듯이 서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거기에는 지나간 시인 묵객들의 글과 새로 등장하는 우리의 혼이 들어
간 쟁쟁한 문인, 예술인들의 글과 그림과 조각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열린 찻집 하나 있어 세상사에 시달리며 피곤한 우리를 쉬어가게 하고
시민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그런 건축이 있다면 전통을 계승한
현대적이고 아름다운 정자가 되리라.
물새소리 한적한 호수에 물푸레 갈대 잎 바람에 흔들려
부레 옥잠위에 개구리 한 마리
잔물결에 반짝이는 햇빛은
투명한 잠자리 날개 위에 놀다가 그대 오똑한 이마를 간지려 주고
바람부는 호수에서 캔맥주를 마시는 것은
그대를 생각하기 위함인가
방금 불어온 바람은 날리는 머리칼 만들기
물고기의 끝없는 유영을 보며
잔물결과 그대 머릿결 위를 지나 호수를 건너다
2002 13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