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2,1-11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1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2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6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7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9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10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11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2,3ㄷ-7.12-13
형제 여러분,
3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0,19-23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을 받아라.”>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갖가지 모습으로 저희에게 오시고 함께 현존하시며 동행하시지만, 특별히 오늘 말씀 전례에서는 성령께서 오시는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놀라운 모습’, 곧 하늘에서 세찬 바람의 소리와 불과 혀의 모양으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고요한 모습’, 곧 닫혀진 문을 뚫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부드러운 숨결로 들어오십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늘 문을 열거나, 땅의 문을 열거나, 모두 ‘닫힌 문’을 열면서 벌어집니다.
곧 성령의 활동은 ‘문을 여는 일’을 통해 드러납니다.
곧 성령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닫혀진 문을 부수고, 가려진 장막의 휘장을 찢고, 죽음에 갇힌 무덤을 풀며, 우리의 굳은 마음의 문을 여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 문을 열고 땅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묘한 것은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열리고, 닫힌 문은 마음에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늘이 열리는 자리는 바로 우리네 삶의 자리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고, 그러기에 다른 먼 곳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바로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이 베풀어졌고, 우리는 이미 그분 신비체의 몸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신비체’는 지체로 이루어진 ‘한 몸’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몸은 바로 성령에 의해 지탱되고 존속됩니다.
그 지체를 서로 결합시키고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평화'를 주시는 장면과 성령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협력자’이시요 우리의 ‘협력자’이신 ‘성령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새 백성이 탄생되고, 새 시대가 열리고, 그리스도 몸의 신비체인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닫혀진 문’을 열고 들어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닫혀진 문’ 뒤에 숨어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문을 잠가 놓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닫혀진 문’을 뚫고 들어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니다.
팔레스티나에서 보통으로 표현하던 이 인사는 이제 인간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인사가 됩니다.
이제 이 평화는 주님의 축복이요, 선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재가 방황이요 두려움이라면, 예수님의 현존이 곧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으로 이제 공포는 기쁨으로 바뀌고, 혼란스러운 무질서는 질서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공포와 두려움에 ‘닫혀진 마음의 문’을 열고서 ‘성령’의 숨결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평화의 전령’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20,21-22)
이제 제자들은 평화의 도구,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이 주신 이 평화를 서로 나누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세상 안에 이 평화를 건설해야 하는 사명을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화로운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 5,9)
그런데 이 ‘평화’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평화는 우리가 이루는 평화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이루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협조자 성령’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고 할 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의 원어의 번역은 ‘숨을 건네주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모두 용서하시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를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성령을 받아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주며, 그러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용서’를 통해 평화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할 때 ‘평화’는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먼저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새롭게 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가 용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십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오늘 이 감격스런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승복하고, 하느님의 현존에 푹 젖는 성령강림절이 되길 바랍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와 평화의 축제’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성령을 받아라.”
(요한 20,22)
성령이시여!
제 안에 흐르소서!
흐르는 골골에 찌든 때를 벗기시고, 반역과 죄를 몰아내소서!
아픔과 상처 어루만지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소서!
멍들고 굳어진 마음 문지르시고, 접히고 구겨진 마음 펼치소서!
막히고 닫힌 마음 열치시어, 당신 숨결 흐르게 하소서!
새로워지고, 새롭게 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공동체에도 성령께서 내려오실까?>
지금 우리 공동체에도 성령께서 내려오실까?
내려오시면 우리는 성령으로 가득 찰까?
이것이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에 저에 대해 하는 성찰이고, 제가 우리 공동체들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나는 성령께서 나에게 내려오시길 바랄까?
우리 공동체는 성령께서 내려오시길 바라는 공동체일까?
우리는 영성 생활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고, 감히 영성 생활 공동체라고도 얘기합니다.
그런데 영성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정신(spirit)을 사는 삶, 성령(Spirit)을 사는 삶이 아닙니까?
성인들 특히 프란치스코는 영을 많이 강조했고 성령으로 살았습니다.
육의 영(spirit of the flesh)이니 주님의 영(Spirit of the Lord)이니 기도와 헌신의 영(spirit of prayer and devotion)에 관하여 얘기했고, 영이 아니면 하느님 아버지도 성체 안의 주님도 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생애 중요한 순간마다 성령으로 깨달았고, 충만했고, 이끌렸습니다.
육의 영이나 심지어 악의 영에 이끌리는 우리와 그래서 달랐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육의 영 또는 더러운 영에 이끌립니다.
그래서 세상 욕망과 세상 욕심이 많고, 게라사의 더러운 영들처럼 이 세상을 더럽게 집착하여 돼지 떼 속에서라도 이 세상을 더럽게 집착합니다.
그래서 순례자와 나그네처럼 떠날 줄 알아야 하는데 훌훌 떠날 줄 모르고 더럽게 집착하고 안주합니다.
또 악의 영에 이끌려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정도를 넘어 파괴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요 우리의 형제인 한 존재를 파괴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일치의 정신 또는 사랑과 일치의 영은 아니 계시고, 미움과 분열과 파괴의 영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집을 나왔던 악령이 다시 돌아와 보니 집은 깨끗이 비어 있었고, 그래서 일곱 마리의 악령을 더 데려왔다는 비유와 같은 겁니다.
육의 영과 악의 영이 우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성령께서 머물 곳이 우리 안에 없기도 하지만
성령을 모셔 들이지 않았기에 육의 영과 악의 영이 설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치를 갈망해야 합니다.
육의 영과 악의 영은 증오해야 합니다.
우리의 분열을 부끄러워해야 하고,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아야 하고, 잘난 체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덕이 악습을 몰아내게 해야 합니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동요(動搖)도 없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인색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걱정도 방황도 없습니다.
자기 집을 지킴에 주님의 두려움이 있는 곳에 원수가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자비와 신중함이 있는 곳에 지나침도 완고함도 없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께서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가져온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 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은 ‘보호자’(파라클래토스)라는 뜻과 함께 ‘변호자’, ‘협력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증언할 때 지혜로써 변호자가 되어주시고, 직무를 감당할 때 능력으로서 협조자가 되어주시며, 증거적 삶의 여정에서 동행해 주시는 보호자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기도 합니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립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세상 것을 우선하던 마음을 천상의 삶을 그리워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세상의 험한 유혹에도 견디게 합니다.
불로 표상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하였습니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물처럼 샘솟기도 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비둘기처럼 다가옵니다.
평화와 온유함으로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가까이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역사를 이루시지만 특별히 미사 안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체조배를 하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손길이 더 강하게 역사하시니만큼 그에 걸맞은 영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성령의 힘과 능력을 체험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지혜, 통찰(깨달음), 의견(일깨움),용기(굳셈), 지식(앎), 공경(효경), 경외(두려움)을(이 사11장 참조) 얘기하고, 갈라디아서에는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갈라 5,22-23)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와 열매는 아주 다양하고 오만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쳐다보면 졸음이 쏟아졌는데 한 시간을 읽고 두 시간을 읽어도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고 하는 분도 계시고…
'늘 만나던 사람이지만 유난히 사랑스러워 보이고 그야말로 사물까지도 다르게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은총의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미사참례를 그저 의무로만 했고, 짧은 미사를 가느라 어린이 미사에만 갔는데 이제는 미사에 맛 들여 매일 미사참례를 하고 영성체가 기다려지고, 말씀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욱이 성체를 모시는 기쁨이 너무도 커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감사의 눈물도 흘립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영’이 특별히 뽑힌 이들에게 임했는데 성령은 하느님의 사람들, 모세, 판관들, 전사들, 시인들, 왕이나 예언자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함으로서 주 하느님의 영의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3장1절에 보면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만 특별히 임했던 성령이 장차 누구든지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은 먼저 예수님의 일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였고(마태1,28-30), 예수님께서 훗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가서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고 예수님의 공적 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루카4,14-15)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첫 설교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14,17-19)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었고(마태 12,28).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루 카5,17).
또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이하)하시며 새로 나기 위해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과 함께한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승천을 통한 작별을 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파라클래토스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요한 15,26-27)
이 말씀은 당신이 얼마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이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 그래서 그리하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바로 오늘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 말씀과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복음의 선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복음의 증언자로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게 하였습니다(사도 2,1-11).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봅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이미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활발히 역사하시도록 그 장을 만들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함을 회복하십시오.
복음의 증인이 되십시오!
성령께서는 당신 은총의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고 모든 부분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십니다.
“오소서 성령님!
새로나게 하소서”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생각하도록 제 안에서 숨 쉬게 하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행하도록 제 마음을 움직이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보호하도록 저를 강하게 해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결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저를 보호하소서."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핑계만 없으면 성령께서 오신다>
영화 ‘언 브로큰’은 최연소 미국 5,000미터 올림픽 대표로 뽑혔던 루이스 잠페리니의 생존에 대한 끈질긴 의지를 그린 영화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잠페리니는 미 공군 폭격수로 입대합니다.
그러나 1943년, 그의 비행기는 태평양 상공에서 격추되어 바다에 추락합니다.
그는 동료 두 명과 함께 구명보트에서 47일간 표류하며 극한의 생존 싸움을 벌인 끝에 구조됩니다.
그런데 그들을 구조한 배는 일본군의 배였습니다.
잠페리니는 850일간 여러 포로 수용소를 전전하며 가혹한 고문과 학대를 겪습니다.
특히 새디스트로 알려진 와타나베 무츠히로라는 일본 장교에게 집중적인 고문을 당합니다.
와타나베는 잠페리니의 정신을 꺾으려 하지만, 잠페리니는 절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잠페리니는 살아남아 귀국하지만, 전쟁 중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 악몽과 알코올중독에 시달립니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복수심에 불타 와타나베를 찾아가 복수하려고 결심합니다.
1949년 그의 아내 신시가 잠페리니를 빌리 그레이엄의 복음 전도 집회에 데려갑니다.
집회에서 빌리 그레이엄은 인간의 죄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며, 모든 죄인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루이스는 처음에는 설교에 반감을 품었고, 집회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루이스는 전쟁 중 구명보트에서 바다에 표류하며 하느님께 한 약속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바다에서 구출된다면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기도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레이엄의 설교를 들으며, 하느님의 은혜와 용서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루이스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느님께 구원을 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깊은 내적 평화와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이 신적 체험을 통해 그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강하게 체험하였고, 그 순간 그의 인생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집회 이후, 루이스는 알코올중독을 극복하고,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는 와타나베 무츠히로를 용서하려고 했으나, 와타나베는 만남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도, 잠페리니는 그를 마음속에서 용서하고, 자신의 내적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의 나이 80세, 잠페리니는 올림픽에서 성화 봉송을 하며 못 이룬 꿈도 이룹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주시며 가서 죄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입니다.
용서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이를 위해 성령을 주십니다.
그러나 ‘핑계’는 성령강림을 가로막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용서하는 권한을 주실 리 없다고 말합니다.
고해성사는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성사를 포기함으로써 그를 위한 성령강림까지 포기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능력이 없는 이에게 권한을 주지 않으십니다.
허버트 박사는 언어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서 침팬지 님 침스키를 언어학자인 스테파니와 살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수화를 통해 의사소통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침팬지가 사춘기가 되자 폭력성이 드러나 더는 스테파니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침팬지 무리로 돌아간 님 침스키는 무리와 섞이지 못하고 우울증을 겪습니다.
스테파니가 불쌍히 여겨 그에게 다가갔지만, 침팬지는 분노로 스테파니를 죽음 직전까지 두들겨 패고 내팽개쳤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 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성령의 능력을 그것을 할 수 없는 존재에게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핑계 대지 말고 용서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고정원 씨와 다른 유영철의 피해자들과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고정원 씨는 용서하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 용서의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성령강림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조금씩 미운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유영철을 양자로 삼습니다.
용서하라고 했다면 죽기까지 용서하려는 의지를 지녀야 합니다.
핑계 대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오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사랑으로 이끄시기에, 결국 사랑은 의지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 숨은 성령의 숨이요 생명의 숨, 구원과 영생의 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잔뜩 사로잡힌 나머지 문까지 닫아걸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보여주신 일련의 행동들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제가 스승이었다면 가장 필요한 순간 줄행랑을 놓은 제자들을 보자마자 치밀어오르는 배신감에, 너희들이 대체 불벼락을 내렸을 것입니다.
“너희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그게 할짓이냐? 그러고도 어떻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다그치지 않으십니다.
조목조목 잘못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늘 그러하셨듯이 먼저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유다인들의 관습에 따른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샬롬!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어서 아직도 굵은 못자국이 선명한 당신의 두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아직도 당신 부활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긴가민가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이 참된 것임을 확증시켜주신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 숨은 우리 인간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런 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 숨은 성령의 숨이요 생명의 숨, 구원과 영생의 숨입니다.
그 숨으로 인해 살아있기는 하나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던 제자들은 참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그 숨으로 인해 제자들은 존재의 근본적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은 이 땅 위에 살면서도 자신의 내면 안에 영생과 구원의 씨앗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주님을 전하는 일이라면 목숨조차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더 이상 극복 못할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로 건너가는 사다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에 우리 가운데 항상 현존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도 제자들처럼 새로 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은 자동 기계 장치가 아니다.>
1)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서는 어떤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될까?” 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지금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영어일까?
천주교에서 공식 언어로 사용하는 라틴어일까?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일까?
신약성경의 그리스어일까?
아니면 하느님 나라에서만 사용하는 어떤 특별한 하느님의 언어일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가장 먼저 그 나라의 공용어부터 배워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호기심과 궁금증일 뿐입니다.
실제 상황이 어떨지는 그날이 되어봐야 알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각자 사용하는 말이 달라도 아무런 불편 없이 사람들의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나라” 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것이 완성된 나라, 그래서 모든 점에서 완전하고 완벽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 강림 이야기’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데도 사람들 사이에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준 표징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2)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1요한 4,16), 하느님 나라의 언어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마음이 통하고 대화가 통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대화가 이루어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면 그 어떤 장벽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이 다 장벽이 됩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서 없앤 일이고, 마음의 벽도 허물어서 없앤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갈릴래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 같은 마음의 장벽.
3)
그렇지만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성령은 자동 기계 장치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응답과 노력이 합해져야만 합니다.
오순절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
배운 적 없는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사도들에게 갑자기 생긴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사도들의 설교를 저마다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능력이 그 자리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생긴 것인지...
결과만 놓고 보면,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기적은 사도들보다는 ‘듣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의 실현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야말로 진짜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고, 주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놀라거나 신기해하면서도 그냥 가버린 사람들의 수는 삼천 명보다 많았을 텐데, 똑같은 은총이 내려도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게 되고,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못 받게 된다는 것을, 그냥 가버린 사람들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에게 성령과 성령의 은사가 내렸을 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용기를 내서 사람들 앞에 나섬으로써 그 은사에 응답했습니다.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삼천 명은 그 설교에 귀를 기울여서 들으려고 노력했고, 알아들었고, 변화되었고,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은사에 응답했습니다(사도 2,41).
4)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소통이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일치와 소통이 제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남 탓’만 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소통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장상들만의 탓인가?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만의 탓인가?
그게 정말로 ‘남 탓’뿐인가?
‘내 탓’은 없는가?
소통과 일치는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너부터 노력해라.” 라고 비난하는 모습 자체가 불통의 모습입니다.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내가 먼저’ 들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내가 먼저’ 나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야 합니다.
소통과 일치를 주장하면서도 ‘남 탓’만 하다가 더 큰 불통과 분열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외면하고 악령의 유혹에 넘어간 모습입니다.
“일치는 성령의 일이고, 분열은 악령의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겸손은 성령의 일이고, 교만은 악령의 일”이라는 것은 자주 잊어버립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 충만한 삶 - “무지에 대한 답은 성령뿐이다”>
“알렐루야, 주의 얼이 우주에 충만했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 아침기도 초대송 후렴과 이어지는 찬미가를 부르며 저절로 나온 탄성입니다. '
“참 아름답다!”
전례의 아름다움은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움이며 하느님의 아름다움입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 성령에 따라 사는 성령의 사람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아침 독서도 첫 구절도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로마 8,5-6)
사람은 본능적으로 희망을 찾습니다.
길을 찾습니다.
빛을 찾습니다.
희망의 길, 희망의 빛입니다.
희망의 빛을 찾아 새벽 강론 쓰기 전 세상 소식을 대략 일별해 보기위해 인터넷을 검색해보나 대부분 어두운 소식들입니다.
지극한 인내를 요구합니다.
교황님의 홈페이지 뉴스를 보며 희망을 발견합니다.
어제는 교황님이 이태리의 베로나 도시를 방문하여 말씀하신 여러 내용들의 제목이 신선했습니다.
“여러분의 친구인 예수님과 함께 파도를 거슬러 앞으로 나가십시오.”
베로나의 어린이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미래는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베로나 시민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그리고 타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눕시다.”
베로나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고백성사가 고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십시오.”
베로나의 사제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결론하여 분명한 사실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온전한 사람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성령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단 하나의 소원을 말하라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저는 두말할 것 없이 성령을, 성령충만한 삶을 청하겠습니다.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답도 성령뿐입니다.
사랑의 성령, 생명의 성령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우리의 궁극의 목마름을,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고자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참 좋은 성령의 선물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선물을 받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하느님, 당신 얼을 보내시고,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이어지는 성령강림 부속가 기도는 얼마나 좋았는지요! 앞부분만 잠시 인용합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없는 이의 아버지, 은혜를 주시는 이, 마음들의 빛이여.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흐뭇한 안식이여”
참 좋은 성령입니다.
참으로 성령에 목마른, 성령에 배고픈 우리들입니다.
도저히 성령이 아니곤 해결될 수 없는 목마름, 배고픔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온전한 사람입니다.
주목할 것은 공동체에 주시는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인 듯 하나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둘의 독서와 복음을 보세요.
모두가 공동체를 배경으로 합니다.
누가 성령의 사람입니까?
첫째, “소통과 일치의 사람”입니다.
오순절이 되어 사도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을 때 성령 강림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우며, 불꽃 모양으로 각 사람 위에 내려 앉습니다.
실감나게 묘사되는 성령강림입니다.
놀라운 것은 불통의 공동체가 소통과 더불어 일치의 공동체로 변모한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바벨탑 사건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이들이 마침내 모여 일치의 공동체로 변모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은가?”
만민의 공통보편언어가 성령입니다.
이래서 공동체가 중요한 행사나 회의 때에는 “오소서 성령이여” 성가 142장이나 494장을 부르기도 합니다.
공동체가 바치는 참 좋은 기도입니다.
오늘 시간되시면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비상한 성령강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을 잘 아시는 주님은 참으로 겸손한 이들에게 끊임없이 성령을 선물하시어 불통과 분열의 공동체를 소통과 일치의 공동체로 바꿔주십니다.
성령의 사람은 분열의 사람이 아니라 소통과 일치의 사람입니다.
둘째, “은사의 공동선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은사입니다.
공동체에 속한 각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은사는 여럿이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요, 직분은 여럿이지만 같은 주님이요, 활동은 여럿이지만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를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셨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요 모두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공동체를,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형제들을 위해 쓰라 선물로 받은 은사임을 깨닫는 다면, 자랑이 아니라 감사할 것이요 교만은 커녕 저절로 겸손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사람은 은사와 공동선의 사람이자 동시에 감사와 겸손의 사람입니다.
감사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셋째, “평화와 기쁨의 사람”입니다.
파스카 주님이, 주님의 성령이 임할 때 두려움의 벽은 평화의 문으로 바뀝니다.
“벽이 변하여 문으로!”
제가 참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복음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을 때, 예수님은 공동체 가운데 오시어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주님이 함께 할 때 두려움의 벽은 평화의 문으로 바뀝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합니다.
평화의 선물과 더불어 기쁨의 선물입니다.
세상에 이런 주님의 평화와 기쁨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빼앗아 갈수도 뻬앗아 올수도 없는 평화와 기쁨이요, 이는 순전히 주님의 선물, 성령의 선물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사람은 평화와 기쁨의 사람입니다.
넷째, “파견과 용서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파견과 용서의 사람입니다.
파견과 선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주님의 평화의 선물과 더불어 동시에 파견하시며, 또 성령도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남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성구 앞 절(요한 20,21)은 반갑게도 어제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을 맞이한 빠코미오 원장 수사의 서품상본의 성구입니다.
공동체 울타리 안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부단히 평화와 용서의 사도로 파견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선물이요 과제입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아 성령의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평생과제입니다.
이래야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온전한 참나의 실현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1. ‘소통과 일치의 사람’입니다.
2. ‘은사의 공동선의 사람’입니다.
3. ‘평화의 기쁨의 사람’입니다.
4. ‘파견과 용서의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성령의 사람, 주님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우리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고,
우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 강림의 진정한 의미>
전임 사목회장님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가장 연장이신 분이 87세였습니다.
가장 젊으신 분이 77세였습니다.
77세 회장님이 막내로서 역할을 다 해 주었습니다.
음식도 주문하고, 술도 주문해 주었습니다.
77세면 어디 가서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나이인데, 그날은 형님들을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해 주었습니다.
저는 전임 회장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갔습니다.
경험과 연륜이 높으신 회장님들은 제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었습니다.
경청의 자리였지만, 어찌 보면 제가 면접을 보는 것도 같았습니다.
회장님들은 제게 몇 가지 질문을 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이 가지고 있는 ‘비전’은 무엇입니까?
저는 단기, 중기, 장기의 플랜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이곳에 희망이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희망이 없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 신앙인의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저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와 관계가 좋기 때문에 서울대교구에서 멋진 사제들을 보내 주셨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저와 부주임 신부님은 서울대교구에서 최상급의 사제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본당 교우들의 전체 세대수를 파악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우선 구역미사를 함께 하고, 다음에는 가정 방문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래 전부터 성당을 지켜 오신 분들에게 새로 온 신자들이 조금을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성지순례도 가고, 본당 체육대회도 하고, 전 신자 여름 캠프도 가고, 송년모임도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본당 신자들의 주소록을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본당 사제로 있을 때는 ‘신자수첩’을 만들었습니다.
신자수첩에는 본당의 사목방침을 수록했습니다.
본당의 조직도를 넣었습니다.
기도문을 수록하였습니다.
본당 신자들이 운영하는 사업체를 넣었습니다.
전임 사목회장님들과 만나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87세의 연세에도 교회를 사랑하는 열정은 20대의 청년과 같았습니다.
제게 성령강림은 하늘에서 성령의 은사가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게 성령강림은 전임 사목회장님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서 성령 7은의 은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60을 갓 넘은 사제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있었습니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지켜왔던 본당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으려는 희망과 믿음을 보았습니다.
오랜 이민 생활에서 축적된 삶의 지혜와 용기를 보았습니다.
77세 막내 회장님께서 이런 모임을 자주 갖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동감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부부동반으로 만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은 굳이 저녁시간이 아니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예배의 장소가 굳이 예루살렘이 아니어도 되듯이, 만남의 시간이 굳이 저녁이 아니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만남의 장소와 시간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만남을 통해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의 진정한 의미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소통하는 것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협조자이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성령강림의 커다란 의미는 ‘하나 됨’이라 생각합니다.
분열과 불신의 벽을 허무는 것, 신분과 지역의 벽을 허무는 것,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것, 바로 이것이 성령 강림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언어로 사도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일이 가능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며,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평화를 빌어주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는 나의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그 관계가 분노와 미움, 욕심과 질투입니까?
아니면 평화와 기쁨, 용서와 사랑입니까?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을 통해 사랑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
프랑스 아르스에 위치한 작은 시골 교회 사제였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 본당에 다니는 한 자매님이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신론자였던 남편이 얼마 전에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회개하지 않아서 지옥에 갔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안네 성인은 “남편은 구원받았어요.”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인, 남편이 지금 연옥에 있으니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리 난간에서 물로 떨어지는 순간에 참회했어요.”
자매님은 성인의 말씀에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지금을 더 열심히 살게 되었습니다.
비안네 성인의 말씀은 단순히 이 자매님을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회개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무한의 시간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 안에서 회개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했던 이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언젠가 어떤 자살자의 장례 미사를 부정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것인 생명을 스스로 끊어 버리는 큰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 측면에서는 ‘괘씸하고 못된 놈’이라고 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며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빨리 하느님 나라 안에서 당신과 살도록 회개의 시간을 주십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 사랑에 감사함을, 또 그 사랑에 온 희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 사랑이기에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령 강림을 통해 그 사랑이 또 다른 모습으로 계속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사랑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세례를 통해 전혀 변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9장에서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소년의 아버지가 “주님,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외칩니다.
이 외침은 소년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자신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해 사랑의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그 완성을 위한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